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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발해연구

激動의 50年 -高句麗와 唐 關係 硏究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18.05.30|조회수1,085 목록 댓글 0

激動의 50年 -高句麗와 唐 關係 硏究
                                       
                        拜根興 *(中國 陝西 師範大學 歷史文化學院 副敎授)

   

                         
                            Ⅰ. 머리말
 
  618년에 동아시아 대륙 통일국가 당 왕조가 출현하였다. 당 왕조가 출현함에 따라, 주변 제 국가와 민족은 자신들의 이익 때문에 잇달아 당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한반도 북단의 고구려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당 사이에는 많은 문제에서 이해가 엇갈렸다. 상존하고 있었다. 당은 漢 이래 건립된 중국 중심의 동아세계 천하질서를 다시 세우려고 시도하고, 東亞 세계에서 패권을 형성하려고 하였다. 그 밖에 唐은 요동의 토지와 隋말 전쟁때 붙잡힌 포로 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으나 당과 고구려의 충돌로 말미암아 묻혀버렸다. 고구려는 唐 중심의 천하질서를 인정한다는 것을 표하며, 대륙선진문화의 수용에 가속을 가하는 한편, 각종의 방식을 취하여 자신의 자주성을 유지하고 아울러 한반도에 대한 지배 지위를 유지하려고 주력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쌍방은 역사문제, 한반도에 체류하는 중국인의 문제, 한반도 통치방식, 전통 통치이념 제문제의 不同한 추세에서 일련의 모순점을 불러일으켯다. 이렇게 해서 668년 고구려멸망에 이르는 50년간, 고구려와 당은 겪은 격렬하고 복잡한 교섭과 전쟁을 겼었다. 7세기 중엽 東亞 세계 세력의 전체적인 변화, 한반도의 역사 과정 등에 적극적이고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 
 본고는 현존하는 문헌자료 및 새롭게 발견한 金石碑誌자료를 이용하고 현재 학계에서 연구위에서 기초를, 이 시기의 고구려와 당의 관계에 대하여 검토하여 여러분의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Ⅱ. 唐의 건립 및 高句麗의 대응 조치

 1. 밀월기
당은 건립 초에, 북방 소수 민족 정권인 돌궐, 수 왕조의 잔여 세력 및 많은 할거 집단의 도전에 응하여야 했기 때문에, 東北 변방의 일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그렇지만 한반도 북부에 있으면서 직접 수 왕조 멸망을 초래한 고구려는 당의 興起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보였다. 619년(武德 2년) 당나라가 건국한 다음해, 고구려가 먼저 사신을 보내어 唐에 조공을 하였으며, 이어서 신라나 백제가 당에 조공을 하였다. 명백히, 즉위 한지 오래지 않은 고구려 영류왕은 당에 대하여 잘 몰랐기 때문에 사절을 파견하여 새로운 왕조의 동향 및 고구려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려고 했을 것이다. 동시에 고구려와 隋 왕조의 수년간의 전쟁 때문에 수 왕조가 멸망하기는 하였으나, 고구려 자신도 이 전쟁 때문에 생긴 직·간접의 손실 역시 헤아리기 어려웠다. 이것도 영류왕이 즉위 후 부분적으로나마 전왕의 대중국정책을 수정하여, 신흥 당 왕조와의 관계를 평화적인 자세로 처리한 원인이다. 이와 동시에 隋말 전란으로 戶口가 감소한 현실에 비하여 국내 형세가 점차 호전된다는 전제 하에 622년(武德 5년) 9월에 唐 高祖가 令을 내리기를, "戶口를 조사하라"면서, 收稅를 증가시키려고 하였다. 당연히 隋末 전쟁의 패배로 인한 流落하거나 돌궐·고구려로 도망한 인구 및 唐에  있는 다른 민족들도 당연히 조사에 등재되어야 했을 것이다. 현실적인 고려에 기초하여, 체류고구려인의 수가 많은 원인을 고려하여, 당 고조는 멀리 고구려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인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 唐에 있는 고구려인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주동적으로 취했다. 당 고조는 고구려 영류왕에게 조서를 보내어 말하기를
 
 짐은 공손히 하늘의 명을 받들어 천하에 군림하여, 삼가 세 번 신령께 순응하여 만국을 회유하고 있는바, 온 천하 백성들이 모두 나의 사랑을 입을 것이요, 해와 달이 비치는 곳은 모두 편안하게 하려 한다. 왕이 요동지역을 통섭하면서 대대로 번방의 지위에서 正朔의 예를 받들며 朝貢의 직책을 다하여 왔으며, 짐짓 사신을 보내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성을 표시한데 대하여 나는 기쁘게 생각하였다. 지금은 바야흐로 천지 사방이 무사하고 태평하여 예물이 내왕하고 도로가 막힘이 없으며 서로 화목하고 우호의 정을 굳건히 하면서 각각 자기의 영역을 보존하고 있으니, 어찌 장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수나라 말년에 전쟁을 계속하고 재난을 만들어 치고 싸우던 곳에는 각각 자기 백성을 잃어 버려 부모와 자식이 헤어지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갈라져 허다한 세월이 지나도록 원한을 풀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 두 나라가 화친을 맺어 우의가 막히거나 다른 점이 없게 되었다. 이곳에 있는 고구려 사람들은 전부 조사하여 즉시 돌려보내기로 하였으니, 그곳에 있는 우리 나라 사람들도 왕이 돌려 보내어 백성을 기르는 방책에 힘을 다하여 인자하고 너그러운 길을 넓히자.({舊唐書} 卷 199 高麗傳)
           
 
 이 조서는 이하의 문제를 명료하게 하였다. 먼저 건국초기의 唐은 여전히 漢 이래로부터의 중국 천하 질서 관념을 받들어, 고구려에 대해서 당 건립 이후 주동적으로 修交를 하고 역할을 하며, 아울러 당의 지위를 승인하고 긍정과 찬양을 나타내도록 하였다. 다음은, 위에 서술한 바와 같이 당 건국 초기여서, 동북 변방의 일을 돌아볼 겨를이 없어서, 고구려와의 교류 왕래 현황에 대해서 만족한 뜻을 표했다. 셋째, 당 고조는 隋末 쌍방의 전쟁으로 조성된 骨肉 분리 상황에 대해서 깊은 유감을 표시하며, 唐이 국내 인구를 조사하는 동시에, 또한 당에 체류하고 있는 고구려인을 통계낸 것을 설명하고, 아울러 먼저 唐에 체류하고있는 고구려인을 돌려보내는 동시에 고구려왕에게 고구려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인을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분명히 詔書에는 단지 人倫과 天理에 따라 체류인을 해결하는 급박성을 설명하고 있지, 중국인의 정치 경제 원인으로 돌려보낸다는 것은 명백하게 하지 않았다. 다만 윗 글에서 언급한 '檢括 人口'는 唐이 경제방면에 가진 의도를 증명한다. 당의 요구에 대해서 고구려는 회답을 했는데, 즉 '亡命자를 돌려보내려고 官에서 찾으니 모두 萬여인이다.'라 하였다. 분명히 고구려가 송환환 만 여인은 隋末 전란으로 인해 고구려로 도망하거나 혹은 그 밖의 원인으로 인하여 고구려에 체류한자이지, 당 고조 詔書에서 언급한 전쟁기간에 포로로 잡힌  流落은 아니다. 이 때 당은 국내 문제 해결에 전력을 기울였으므로, 당 고조는 1만여명이 돌아온 것을 보고, 고구려가 이 문제에 대하여 배려한 것에 대하여 매우 만족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체류 중국인 문제에서 취한 보류적인 태도는 이후 唐과 고구려의 모순 격화의 제일 중요한 폭발점이 되었다. 徐柄國의 연구에 의하면, 고구려가 일부 체류자를 돌려보내고 대량의 隋나라 포로를 여전히 고구려에 체류시킨 까닭은 고구려의 농업 생산 및 경제 방면에서 수 나라 포로의 역할이 이미 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앞으로 나타날 수 있는 唐의 위협 및 공격에 대비하여 군사력 증강과 軍糧의 비축을 확보하기 위해서, 농업생산에 필요한 대량의 노동력이 장 절박한 문제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견해는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토론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 외 武德 초, 唐은 傳仁均이 推演한 戊寅曆을 처음 시행하였다. 624년(武德 7년) 고구려는 당에 사자를 파견하여 唐이 역법을 頒賜할 것을 청구하였는데, 고구려가  頒賜를 요구한 것이 바로 이 무인력일 가능성이 있다. 이와 동시에 당 고조는 형부상서 沈叔安을 파견하여 고구려로 보내 고구려왕의 官爵을 책봉하였다. 이후 오래지 않아 唐은 백제와 신라에도 사신을 보내서 관작을 책봉하였는데, 이와 같이 한반도 3국은 대륙의 신흥정권과 서로 조공 교섭관계를 체결하였다. 같은 해, 唐은 "道士에게 명하여 像과 法을 가지고 가서 {老子}를 講하게 하니, 建武가 크게 기뻐하여, 國人을 거느리고 그것을 들었는데, 듣는 사람의 수효는 1천에 다다랐다." 이러한 정황에 대하여 당 고조와 신료들은 쌍방의 관계에 관하여 토론을 전개하였다. 아마 국내 문제의 긴박성 때문에 당 고조는 " 명분과 실제는 모름지기 서로 이치가 부응하여야 되는 법이다. 고구려가 비록 隋에 稱臣하였으나 끝내 煬帝에게 저항하였으니, 어찌 신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의 힘쓸 바는 인민을 편안하게 하는 것인데, 하필 그를 신하로 받아들여야 되겠는가"하니 大臣 裵矩와 溫彦博이 아뢰기를, "요동은 본래 기자국으로, 魏晉시에 封國으로 봉해졌으니, 신하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국과 夷狄은 태양과 列星에 비유되니 격을 낮추어서는 안됩니다."하였다. 당 고조와 群臣이 이 문제를 보는 견해가 모두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626년 한반도 신라 백제가 당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가 貢道를 막아, 그들이 조공하러 올 수 없게 하며, 또 병사를 일으켜 침입한다고 제소하였다. 韓昇이 연구한 바와 같이 이 때 唐은 全力으로 自國내의 군웅 및 북방 돌궐의 압력에 부응하느라, 아직도 절실하게 행할 만한 한반도에 대한 정책을 만들지 못하였다. 때문에 당 고조는 散騎常侍 朱子奢를 고구려에 보내어 권유하였으니, 다만 모순을 완화하고 관계를 회복하며 현황을 승인하였을 뿐, 개입하는 책략은 피하였다. 朱子奢가 고구려에 이르러 권유하니 고구려왕이 즉시 당에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였다. 아울러 사신에게 신라와 會盟하겠다고 청하였다. 다만 매우 분명하게 고구려는 당이 한반도의 일에 간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극력하게 자기들이 한반도의 일에 주도권을 가지고 있음을 주장하였으므로, 고구려가 행한 태도가 진실한 모습을 반영한 것은 아니다. 628년 고구려는 곧 당에 사신을 보내어 당 태종이 돌궐 詰利可汗을 사로잡은 것을 축하하고, 封域圖를 바쳐, 당의 천하질서를 인정하고 동의한다는 것을 표시하였는데, 아울러 당 태종 즉위 후 당의 고구려에 대한 정책동향을 관찰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고구려 영류왕과 당 고조는 거의 동시에 정권을 획득하여 양측의 관계는 소모적인 접촉을 하며, 비록 이전의 문제가 노출되거나 새로운 문제가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단지 자국 내 문제의 긴박성 및 쌍방의 自制로 인하여, 이때에는 의외의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 동시에 唐의 관점에서 보면, 이때 아직 실질적인 한반도에 대한 정책을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반도 사태에 대한 대응도 임시적이었던 것 같다. 비록 고구려가 당에 대하여 복종의 자세를 표현했지만, 한반도와 상관된 문제에서는 여전히 자신들 위주의 책략을 행하였고, 비록 문장으로는 복종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실질적인 것은 변화된 것이 없다. 이처럼 당은 자기 중심의 천하질서를 구축했으나, 고구려는 이에 대해 認同하되,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쌍방 충돌은 불가피한 사정이 되었다. 

 2. 모순의 출현 및 심화
 626년 6월 당 궁정에서는 유명한 "玄武門事變"이 발생하여, 이후 秦王 李世民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당의 황위 교체, 국내 정황의 안정의 호전은  대외 정책 역시 똑같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국내 사회경제의 회복 발전의 필요에 기초하여, 새로 즉위한 당 태종은 戶口의 증가 및 流落 호구 문제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626년 9월 "돌궐 詰利可汗이 말을 3천 필, 양 1만 구를 바쳤으나, 황제가 받지 않고 다만 붙잡아간 중국인 戶口를 돌려보낼 것"을 詔로 내렸다. 貞觀 3년 戶部가 아뢰기를 "중국인이 밖에서 돌아오고, 돌궐이 전후로 內附하여  四夷를 열어 州縣으로 된 것이 남녀 120여만口입니다."하였다. 貞觀 5년 4월 " 隋 나라 전쟁 때 돌궐에 잡힌 남녀 중국인 8만인을 金과 비단을 주고 사서 그 가족에게 모두 돌려보냈다. " 그 다음 국내 전쟁이 종결됨에 따라, 인심을 按撫하고, 당 정권은 일련의 위무정책을 내놓아 모순을 완화하였다. 魏徵, 溫彦博, 杜淹 등을 파견하여 각 지방을 선무하게 하는 동시에, 貞觀 2년 4월, "해골이 드러난 자는, 있는 곳에 매장하도록 하였다." 貞觀 3년 建義한 이래 전투가 있었던 곳에 詔를 내려, 전사들이 戰士한 곳에 절을 세우도록 하고, 虞世南, 李伯樂, 楮亮, 顔師古, 岑文本, 朱子奢 등에게 명하여 그들을 위하여 碑銘을 만들어 공을 기리게 하였다. 정관 4년 9월 長城 남쪽의 해골을 수습하여, 致祭하게 하였다. 貞觀 5년 2월 諸州 가운데 京觀이 있는 곳에 명을 내려, 新·舊 가리지 말고 마땅히 헐어버리고 흙을 더하여 봉분을 만들고, 나뭇가지로 덮어 해골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였다. 같은해 8월, 당 태종은 "廣州 司馬 長孫師가 수나라 병사의 해골을 묻은 곳에 임하면, 고구려가 세운 京觀을 헐도록 하였다", 바로 {삼국사기}의 기록에 대해서는 그 시기의 기록이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있고, 해당 책이 새로이 믿을 만한 것을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 {新唐書}·{舊唐書}·{資治通鑑}, {唐大詔令集} 등의 기록에 의하면, 당은 2월에 { 削京觀詔}를 發布하였으며, 長孫師는 8월에 고구려로 갔다. {삼국사기}는 이에 앞서 장손사가 고구려에 갔으며 隋 나라 전사 해골을 묻은 곳에 임하여 致祭하고, 그곳에 세운 京觀을 허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 同年 2월 고구려가 長城을 쌓기 시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선 長孫師는 조서를 발포하기 전에 고구려에 간 적이 없다. 그 다음 고구려는 당의 행동을 알기 전이었으므로, 솔선하여 長城을 쌓았을 가능성 또한 크지 않다. 그러므로 필자가 인식하기에 {삼국사기}는 시간 편제상 착오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당의 행동은 고구려가 우려를 하게 하고, 나아가 당에 대하여 준비 및 방어를 하도록 강요하였다.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전쟁포로로 잡은 많은 사람을 여전히 잔류시키고 있었으며, 고구려는 그들을 얻기 쉽지 않은 노동력자원으로 인식했다. 唐은 流亡 인구를 쌍방 교류한 후에, 아직도 각 지에 체류하고 있는 인구를 대량으로 조사하였다. 당 태종의 이러한 단호한 태도는 마치 어떠한 타협의 여지도 없는 듯 하였다. 쌍방은 이 문제에 필연적으로 마찰과 대립이 생길 수 밖에 없었으며, 이것이 고구려가 우려한 중심 소재였다. 동시에 唐이 각 지의 京觀을 허물 것을 發布했다하더라도, 그 주도하는 의도는 民心을 안무하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甲兵을 두는 것은 不獲에 힘쓸 뿐이요, 義는 전쟁을 멈추는데 있고, 죽이는 것을 제거하는데 있다. 철없는 병사는 다투어 말을 달리고, 힘만 믿어 위엄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날카로운 칼 아래로 마음대로 사람을 죽인다. 피가 흘러 방패를 뜨게 하는데, 바야흐로 快意를 칭한다. 시체는 亂麻처럼 얽혀 있는데, 스스로 용맹스럽다고 생각한다. 해골을 드러내어 봉토를 하고, 모두들 京觀을 우러러본다. 다만 安忍의 마음을 보이면서도, 백골을 덮어주는 禮를 펼치지 못하였다. 말을 조용하게 하고 이것을 생각하니, 연민과 한탄의 마음이 진실로 깊다." 이것은 당연히 고구려가 진정으로 唐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려는 뜻의 眞否를 검토하려는 것이었다. 詔書는 당의 관할 하에 있는 모든 지역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당의 冊封을 받아들이고, 당에게 封域圖를 바쳤으므로, 蕃國이 되어 詔書에 언급된 범위 안에 있었다. 그러나 남북조이래 고구려가 표현해온 독립성은 모두 주지하는 바였다. 당이 각지의 경관을 부순 것은 고구려로서는 내심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그 경내에 京觀을 쌓은 것은 그 해 고구려가 隋軍에 대한 승리의 상징이었으며, 고구려인들이 자부심을 갖게 하는 일이었다. 고구려가 당이 京觀을 헐어버린 데 대하여 취한 대응조치는 고구려의 대당교섭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을 표명한 것이며, 이것은 바로 계속 자립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며, 중대한 문제에서 조금도 타협하거나 강대한 대륙정권인 당에 대하여 守勢的 태도를 취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처럼 고구려와 당과의 관계는 쌍방관계 체결이래 최초의 좌절을 겪었다. 한편 고구려는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장장 16년이 걸려 완성하였고, 그 기간 국가는 많은 비용을 이 공정에 소비하였다. 이후 고구려와 당과의 전투에서 보면, 그것은 상응하는 효과를 보이지 못했다. 때문에 도리어 국가의 최종이익에 불리하였다. 다른 한편 당은 고구려가 長城을 축성한 행동에서 진일보하여 고구려와 당의 교섭의 근본적인 문제를 이해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와 각 방면에서 최종 결판을 내도록 속도를 더하였다. 이후 새로운 요인이 나타남에 따라 고구려와 당과의 관계는 끝내 전쟁을 통해서 겨우 문제를 해결하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후 8년간(632년∼640년)고구려와 당은 어떠한 왕래 기록도 없다. 이 기간 당은 변방지역에서 일련의 승리를 하여, 통일제국의 물질 군사기초를 구비하는데 진일보하였다. 서북지역의 소수민족 정권은 당 태종을 받들어 "天可汗"이라고 하였으며, 이러한 정황 하에서 641년 고구려는 唐이 高昌을 멸하는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였으며 태자 桓權을 파견하여 입당 조공하였다. 한편 수년간 쌍방의 중단된 관계를 잇기를 희망하는 한편, 당 朝廷의 동정을 관찰하면서 다시 고구려가 固守하는 전제 하에서 비교적 탄력적인 대당교섭을 취하였다. 동시에 이 때 아직도 영류왕이 집권하면서, 오랫동안 長城을 쌓고 있어서 고구려 내부의 각종 모순이 촉발되었기 때문에, 영류왕은 태자를 入唐시켜 이전 수년간 고구려와 당과의 긴장관계를 완화시키고, 국내 모순을 완화시켜 보려고 하였다. 바로 이러한 것 때문에 당 태종은 직접 고구려 태자 일행을 접견하고, 물품을 풍부하게 내려 우호를 표시했을 가능성이 있다. 동시에 職方員外郞 陳大德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방문하게 하였다. 즉 "符節을 지니고 勞苦에 答하게" 하고, 또 "틈을 엿보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진대덕이 고구려에서 행한 활동에 관해서는 {新唐書} 卷 220 [동이전 고구려]에 기록되어 있고, {자치통감}·{삼국사기}·{책부원구} 등 여러 책에도 실려있는데, {신당서}가 원본이고, {자치통감}의 기록은 가장 상세하다, 그러므로 아래와 같이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

 {자치통감} 권 196에 ; " 당 태종이 職方郞中 陳大德을 고려에 사절로 보냈다. 8월 기해에 고려에서 돌아왔다. 대덕이 처음 그 땅에 들어가, 산천풍속을 알고자 하여, 지나는 城邑마다 그 관리에게 비단을 후하게 주면서 말하기를 '나는 원래 산수 구경을 좋아하는데, 여기에 경치가 좋은 곳이 있으면 내가 보기를 원한다'하니 수비하는 자가 즐겨 그를 이끌어 주어 그의 발걸음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왕왕 중국인을 보고 그 가족이 某郡에 있다고 말하고, 隋末에 從軍한 자는 고려에서 죽거나, 고려가 遊女를 妻로 삼게 하고, 고려사람과 함께 뒤섞여 사니, 거의 半이나 되었다. 親戚 存亡을 물어 大德이 모두 無病하다 하면 감격하여 서로 눈물을 흘렸다. 며칠 후에 隋나라 사람들이 그를 보고 우는 사람들이 郊野에 널려 있었다....."

일반적인 이해에 비추어 보면 陳大德이 고구려에 간 것은 그 직책 때문이고, 고구려 정보를 탐문한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고구려 산천 형세를 이해하였기 때문에, 고구려에 체류하고 있는 많은 隋末 종군자를 만나, 이들의 숫자, 생활환경, 현황 및 사상 동향에 대한 이해는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고구려에 체류하고 있는 隋말 종군자 문제 및 이로 말미암아 제기된 요동귀속문제는 당이 이 문제 해결에 대하여 급박감을 나타냈다. 이러한 현실적 원인에 기초하여, 당 태종은 고구려에 대하여 전쟁을 발동하고, 이 시기는 이미 상당히 심리적으로 마음을 정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고구려는 본래 4군의 땅이다. 내가 병사 수만을 일으켜 요동을 공격하면, 저들은 반드시 나라를 들어 그것을 구하려고 할 것이니, 따로 舟師를 보내어 東萊에서 나오게 해서, 海道에서 평양을 공격하면, 水陸이 세를 합하면, 그것을 얻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만 山東 州縣이 피폐한 것이 회복되지 못하여, 내가 그것을 힘쓸 수가 없구나"고 한 것이다.  비록 당시에는 아직도 적당한 구실이 없고, 인용한 사료 중에 "山東 州縣이 피폐하여 회복되지 못하였다"는 것은 다만 당과 고구려와의 충돌과 전쟁이 시간 문제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Ⅲ. 唐麗전쟁의 원인 및 전후 쌍방의 관계

 642년은 한반도 역사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해이다. 이 해 6월, 唐 太常丞 鄧素曾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후 "懷遠鎭에 주둔하는 병사를 증가하여 고구려를 압박하십시오"하니, 당 태종은 "먼 나라 사람이 不服하면 文德을 닦아서 오게해야지, 일·이백명의 순라꾼으로 강역에 위엄을 떨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당시 당 태종의 고구려에 대한 태도를 보면 아직도 비교적 완화적이며, 德으로 다른 사람을 복종시키는 것을 주장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한반도 내부 형세 변화는 당이 대응책략을 변화시키도록 촉발했다. 이 표현은 백제 武王이 일년 전에 사망하고, 그 아들 부여 의자가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의자왕은 왕위에 오른 후 정책을 곧 바꾸어, 신라에 진공하였고, 또 고구려와 연합하여, 당항성을 점공하려고 시도하여, 신라와 唐이 내왕하는 데 필요한 경로를 끊어버렸다. 9월에 신라는 긴급하게 唐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고구려 쪽은 동부대인 연개소문이 이해 10월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과 백여명의 대신을 살해하고, 연개소문이 大權을 장악하였다. 분명히 고구려의 행위는 唐이 주장하는 천하질서를 완전히 위반하는 것이어서, 唐과 고구려의 관계는 매우 민감하게 변하였다. 당 태종은 司農丞 相里玄奬을 고구려와 백제에 파견하여,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백제는 당의 권고에 복종할 것을 표시하였으나, 고구려는 역사상의 영토 문제라는 이유로 당의 권고 조치에 대하여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相里玄奬은 요동의 역사귀속문제를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특히 고구려가 당이 파견한 사신 蔣儼을 잡아 가둔 것은 唐이 전쟁이라는 수단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바로 이 말은 한반도 형세의 급속한 발전이 당이 이전에 한반도에 대하여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정책을 변화시키도록 하여 한반도의 일에 처음으로 개입하게 하였으며, 더우기 고구려와 미묘하고 복잡한 관계로 말미암아, 당이 고구려문제 해결에 나서기 시작하도록 이끌었다. 당이 고구려에 출병한 원인에 대하여, 지금까지 기존의 학자들은 당 태종 및 당시 大臣들의 언론을 근거로 하거나 혹은 隋唐 초 皇位 교체의 불안정성에 의거하여, 허다하게 빈번히 깨우쳐 주는 견해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것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 한 시기 고구려와 당의 관계 가능성을 제공한다. 籃文徵은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하나는 華人(中國人)을 구하는 것이요, 둘은 漢의 彊域을 수복하는 것이며, 셋은 어그러진 것을 토벌하여 백성을 위로하려는 것이다"라고 한 말을 인정하였으며, 高明士는 "주요한 것은 고구려 權臣 泉盖蘇文이 임금을 시해하고, 당에 대해서 不恭하였다는 것에 불만을 가진 것이었다……바로 천하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신하되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고, 좌우가 공을 다투는 것은 모두 중국 천하 질서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天下法'의 기본원리이다……"라고 인식하였다. 朴漢濟는 "隋唐 양대 초기는 모두 비정상적인 수단으로 皇位에 올랐으며, 이 때문에 고구려에 대하여 전쟁을 발동하여, 국내 시선 및 모순을 바꾸어 보려는 것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당시에 고구려에 出兵한 주요 원인이다"고 하였다. 劉進寶는 "당 태종 부자가 고구려를 정벌한 것은…… 비록 여러 가지 원인이 서로 상호작용한 결과 즉, 多種의 원인이 있다고 할지라도 다만 시종일관되는 한가지 중요한 원인은 쌍방의 정치이익의 충돌"이라는 것이다. 韓昇은 중국 內政쪽의 요인과 당시 국제정치 방면의 요인 때문으로 귀결하면서, "양쪽의 긴밀한 관계는 서로 표리의 관계이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여러 주장을 검토하면, 모두 唐이 고구려에 출병한 원인을 어느 정도 밝혔다. 다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 외의 각도에서 이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고 본다.
 우선 표면적인 원인 및 심층적인 원인을 구분해야 한다. 소위 표면적인 원인은 바로 당 정부가 인정하고 주장한 가치 관념 즉 중국적인 천하질서이다.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고구려 문제에 대하여 당 태종은 대신들과의 대화과정에서도 여러 차례 이러한 종류의 이념을 이야기하였다. 아울러 이 이념을 당이 당시 동아세계 문제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중국중심의 국가관계의 지침으로 하고, 相關국가의 행동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주변 대부분의 국가 특히 상대적으로 약소한 정권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당이 주장한 이러한 종류의 질서 관념에 대하여 모두 지지하고 동의하는 표시를 하였다. 신라나 백제 같은 나라는 당에게 고구려가 貢道를 막고 있다고 소송하고, 신라는 여러 차례 당에 구원을 요청하는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즉 당이 이러한 종류의 질서 유지를 담당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알 수 있다. 貞觀 18년 발포한 {對高麗詔} 가운데, "高麗 莫離支 盖蘇文은 그 임금을 시해하고, 신하들에게 가혹하게 하였으며, 몰래 변방의 귀퉁이를 차지하여, 그 근거지를 마음대로 하였다……" {親征高句麗詔} 가운데는 "故 上柱國 遼東郡王 高麗王高建武,…… 그런데 그 신하 막리지 개소문은 흉악한 뜻을 숨기고, 不逞한 사람들을 불러모아 몰래 역모를 꾀하며, 몰래 弑逆을 행하니, 濊貊에는 원한이 얽혀있고, 諸華에는 통한이 관통했다…… 어지러움을 좋아함이 더욱 심하고, 병사를 곤궁하게 함이 끊이지 않으며, 그 흉악한 무리를 이끌고 자주 신라의 땅을 침범하였다. 신라는 땅을 잃고, 근심이 날마다 깊어져, 멀리 구원을 요청하여 관청사자가 서로 이어졌다. 짐은 그들의 위급함을 불쌍히 여겨, 이에 칙사의 수레에 명하여, 지극한 이치를 갖추어, 전쟁을 그치도록 타일렀으나 잘못을 바꿀 것을 알지 못하고, 朝命을 어겨 변방의 관문을 몰래 엿보아 쥐새끼가 구멍을 뚫듯이 성곽의 고친 곳을 다시 끊으며, 조세를 거두는 것은 더욱 빈번하다……" 당의 이러한 천하질서 관념을 근거로 하면, 고구려 權臣 연개소문은 윗사람을 능멸하고, 아래로는 참람되이 하여, 신라에 침입하여 당의 詔令을 따르지 않았는데, 이것은 이미 당이 이전에 德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환상을 포기하게 하고, 兵刑的 수단을 사용하게 하는 것이었다. 곧 당은 군대를 파견하여 정벌하여, 비로소 東亞세게에서 영도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 후의 東亞의 일에 대하여 참조할 것을 제공했다. 이와 반대로 당은 태종 이래로부터 형성된 "天可汗"국면이 장차 허명으로 바뀔까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하였으며, 당 태종이 衆意를 물리치고, 소위 "연개소문이 위 사람을 능멸하고 아랫사람을 학대하여, 백성은 연일 구원을 기다리니, 이때야말로 바로 고려가 망할 만한 시기이다……"라고 한 것은 이러한 종류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언설일 뿐이다. 그러므로 비록 이후에 고구려가 先後로 사신을 파견하여 白金을 進貢하고, 연개소문이 50인을 파견하여 숙위를 하겠다고 했음에도 불국하고 당 태종이 거절하면서 고구려 사자를 꾸짖어 "너희들은 모두 高建武를 섬겨 관작을 받았는데도, 막리지가 임금을 죽였어도 복수를 하지 않고, 이제 그를 위하여 遊說하면서 大國을 기망하려는 것이냐, 어느 것이 더 큰 죄인가"하였으니, 당 태종이 당시 東亞세계 질서를 유지하려는 결심을 족히 볼 수 있다. 동시에 고구려는 唐의 무력정벌에 대하여, 당에 사절을 파견하여 白金을 바치는 한편, 선처해주기를 기도하였다. 또는 당 태종의 호의에 의지하여, 마치 당시 西北民族政權이 다양하게 宿衛를 파견하여 즉 당을 향하여 質子를 파견하여 臣服을 보여주며, 나아가 唐의 출병을 지연시키려고 하는 것과 같았다. 그 밖에 당이 파견한 사절 蔣儼에 대해서는 의외로 강경한 태도를 취하여, 그를 지하굴에 가두어 1년 뒤 唐麗 전쟁이 끝난 후에 唐으로 돌려보냈다. 이 역시 당시 고구려가 당에 대한 교섭의 다양한 交錯적인 性格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은 唐이 십 수년간 주변 제 지역에서의 확인을 중시하고, 영도적 지위를 동아세계에 미치려고 했다는 데 인식을 인정한다. 고구려는 공공연히 당의 이러한 종류의 질서 이념을 멸시하고 위반하여, 쌍방의 모순의 해결은 곧 전쟁 뿐이었다.
 다음으로, 위 논문에서 논한바와 같이, 隋 왕조를 이어서 일어난 唐은 수말 天下 大亂 때문에 인구가 감소되어, 당 태종은 즉위 후에 여러 가지 계책을 내어 隋末의 流落 각 지역 인구를 조사하게 하였다. 당시 고구려에 체류하고 있는 십 수만의 隋 나라 포로는 멀리 고향을 떠나 고구려 경제발전 및 안정을 보장하는 중요한 역량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황은 고구려에 파견된 사절이 실제로 증언하였다. 그러므로 증가 인구에 기초하여 높은 노동생산성을 제고하였으므로, 당과 고구려의 쟁탈추세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어지는 고구려와 당과의 전쟁 중에서 이러한 각종의 원인 때문에 고구려에 체류하고 있는 사람의 후예가 쉴새없이 당에 투항하였다. 현존하는 金石碑誌 자료에서 이러한 점을 설명할 수 있다. 저명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大唐故忠武將軍攝右金吾衛郎將上柱國豆府君墓誌銘幷序}, {大唐故雲麾將軍行左龍武軍翊府中郞將趙君李公墓地銘幷序}, {故右龍武軍翊府中郞將高附君墓地
銘幷序}, {唐故右威將軍上柱國王公墓誌銘幷序} 등이다. 王公의 선조가 海東의 바깥에 거주한 것을 제하고, 豆府君, 趙君李公, 高府君 등 諸人의 선조는 모두 요동에 거주하였다. 특히 당 태종은 전쟁으로 바쁠 때, 일찍이 전문적으로 晉尙書令 李公後裔를 방문하였는데, 墓主 李懷의 증조 李敬은 정벌시 잡혀서, "집안을 이끌고, 이에 장안에 이르렀다." 즉 당 태종은 요동의 原漢族流亡자의 당시 생활을 중시하였으며, 그 곳의 실력파 인물에 대해서는 다시 조치를 취하여 이 사람들이 중원으로 오게 하였다. 그 외 당군이 요동을 떠날 떄 "무릇 고구려를 정벌하여, 현도와 횡산, 개모, 마미, 요동, 백암, 비사, 맥곡, 은산, 후황 10성을 정벌하여 遼州, 蓋州, 巖州 3주로 옮긴 인구가 7만여명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바로 실제 효과를 본 것을 언급한 것인데, 당은 고구려에 대한 전쟁에서, 이미 예상한 목적을 크게 획득하였다. 곧 당은 요동 고구려 控除 지역의 인구를 內地로 옮겨, 당 태종이 부지런히 戶口를 증가시키려고 한 염원을 실현하였다. 다시 한번 당태종의 군신들은 요동의 귀속문제를 강조하여 고구려에 대한 전쟁을 발동하여 요동을 탈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相里玄奬은 일찍이 연개소문을 만나 요동문제를 제기하면서, "지난 일을 어찌 논하는가. 요동은 옛 중국 군현이며, 天子도 취하지 못하였는데, 고구려가 어찌 명을 어길 수 있는가"고 하였다. 당 태종은 장안으로 父老를 불러 놓고 강조하기를 "요동은 옛 중국 땅이며, 막리지가 그 임금을 살해하였으므로……" 이러한 이념상의 문제는 고구려에 대한 전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특히 당시 사람들은 정벌 從軍에 응하여 功名을 획득하는 것을 영예로 여겼다. 저명한 장군 설인귀는 곧 이와 같이 하여 자신의 이상을 실현한 사람이다. 이에 대하여 당 정권은 대대적으로 隋末의 실패를 선전하여 당시 백성은 용감무쌍하게 종군하였다. 소위, "征名을 기대하지 않고, 스스로 개인이 무장하여 종군하기를 원하였고, 갖 가지 계책으로 움직였다……모두 말하기를 "이름난 관직이나 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요동에서 죽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韓昇은 이것은 당시 민간이 요동에서 전사한 자제의 복수하려는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고 하며, 나아가 단정하기를 "이 전쟁에는 모종의 의의 이상으로 민족투쟁의 색채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결론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당은 도읍은 내륙관중의 長安에 정하고, 요동 내지 한반도는 통치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매번 군사를 일으키고, 군중을 움직이는데, 실제는 효과를 거둔 것은 크지 않았다. 더우기 요동 내지 한반도는 독특한 지리 및 기후조건으로 말미암아 고구려가 수백년 통치한 뿌리가 깊기 때문에 당이 요동을 회복하고 잘 다스리는 것은 사실상 곤란하거나 불가능하였다. 60년대 李君球가 올린 글 중에 "고구려가 멸망시킨다면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서 지켜야 할 것인데, 군사를 적게 내면 위신이 서지 않을 것이고, 많이 낸다면 사람들이 편안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전선으로 내몰아 피로하게 하는 것입니다. 臣은 정벌하는 것이 정벌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며, 멸하는 것이 멸하지 않는 것 보다 못하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비록 당시의 정황을 설명하는 것이라도, 당이 요동문제에 대한 마음을 드러내놓고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와 같이 당 태종은 요동수복을 희망하였고, 각종 원인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당시의 조건은 성숙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스스로 믿는 이른바 필승의 5조건 즉 "大로 小를 공격하며, 順으로 逆을 토벌하며, 治로 亂을 치며,  逸로 勞를 치고, 悅로 怨을 치고 있다." 아울러 자신이 살아있을 때 요동귀속문제를 해결하여 후계자에게 이 문제를 남겨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전쟁이라는 수단을 취한 것이며, 이 역시 戰後 회한의 눈물을 흘린 원인의 하나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을 종합하면, 당 왕조가 고구려에 출병한 것은 당 황제에게는 당당한 원인이 있었다. 바로 연개소문이 그 왕 및 대신을 살해하고, 고구려 백성이 도탄에 빠진 것을 구원한다는 것이었으며, 또 신라를 빈번히 침략하여 신라가 당에 사절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는 것이다; 중국은 漢이래로 형성된 중국천하질서 이념을 방패삼아 동아세계의 안정을 유지하려고 하였으므로 병사를 일으켜 정벌을 한 것이다. 동시에 아직 심층적으로 비교해야 할 원인이 있는데, 구체적인 표현은 증가하는 戶口와 노동 생산력의 수요를 제고하는 데에 기초하여, 唐은 고구려에 남아 있는 많은 수의 수나라 병사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전에 양측은 체류인을 숫자에 관계없이 서로 교환하였으나 모든 것이 원한만큼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출병에 반대도 있고, 찬성하는 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의 군신은 요동의 귀속문제에는 의견이 일치하였는데, 즉 요동은 원래 중원정권에 속하였다는 것이다. 요동은 지리, 군사, 경제, 방면의 중요성에서 당 태종과 군신은 고구려가 요동에 근거하고 있는 것을 부인하는 태도를 가졌다. 이와 같이 각 시기에 도망하여 요동에 체류하는 漢人을 구제하고, 다시 요동을 점유한다는 것이 당이 고구려 안으로 출병하는 원인을 형성하였다.

          Ⅳ. "소요정책"과 당 고종의 반도체제 형성

 1. 貞觀 말년 "소요정책" 대두
 고구려에 대한 전쟁이 5개월을 지나면서 그 사이 쌍방의 공방은 古代戰의 전범이라 불리만하였다. 필자는 일찍이 연구자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金石碑誌文자료를 조사하여, 당시 및 이 이후 한반도에서 활동한 당나라 將領의 행적을 밝혀냈다. 아울러 그 표를 제시하였는데, 그 가운데에서 쌍방 관계 발전에 가치있는 것이 있음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고구려정벌의 승패문제에 관하여, 연구자의 견해는 각 다른데, 물론 모두들 당 태종이 바라던 전략목표를 완전히 실현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646년 5월 고구려는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아울러 美女를 바쳤다 ; 647년에는 고구려왕이 둘쨰 아들인 막리지 高任武를 당에 보내서 사죄하였다. 다음해에는 다시 唐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그러나 쌍방의 관계는 여전히 긴장관계에 있었다. 사료에는 "처음 황제가 돌아가려 할 때, 연개소문에게 활과 의복을 내렸으나 그것을 사죄도 하지 않고 받아, 더욱 교만한 태도를 지녔다. 비록 사신을 보내어 表를 바쳤다고 하더라도 그 말에는 기만하는 것이 있었다. 또한 당의 사자를 맞이함에 있어 교만함이 있었으며, 항상 그 틈을 엿보며, 신라를 침략하지 않겠다는 칙령을 어기고, 마음대로 바르지 못한 것을 자행하였다." 그밖에 신라가 당에 아뢰기를 "병사 5만으로 고구려 남쪽 水口城을 정벌하여 열었습니다" 하고, 백제는 당의 出兵기회를 틈타, "신라의 일곱성을 빼앗았다". 한반도의 형세는 또한 당의 출병으로 평정이 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 말은 고구려가 여전히 자주성을 견고하게 하여, 당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아울러 힘써 한반도의 주도권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었으며,  백제와 신라의 모순은 한층 더 격화되었다.  전쟁 전 한반도는 불안정한 정황이 여전히 존재하였다.
 이에 대하여 당 정권은 상응하는 대응조치를 취하였다. 우선, 고구려에 대한 出兵 문제를 총괄하여, 당 태종과 군신들은 새로운 정벌을 발동할 것을 토론하였다. 다만 지도 방침은 곧 근본적으로 바뀌었는데, 史書에는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고려는 산에 의거하여 성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공격하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전에 황제가 親征하였을 때 國人이 농사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이겨서 빼앗은 성은 그 곡식을 모두 거두었고, 旱災가 이어져, 백성 태반이 굶주렸습니다, 지금 만약 자수 偏師를 보내어 더욱 그 영토를 소란스럽게 하면, 저들 피곤하여 성안으로 도망하고 들어가 入堡하면 수년 사이에 천리가 조용해지며, 인심은 스스로 떠나, 압록이북은 싸우지 않고도 취할 것입니다.' 하니 황제가 그 의견을 따랐다. 필자는 당이 취한 이러한 책략은 隋가 陳을 멸망시킨 책략을 수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재상 高潁  일찍이 비슷한 건의를 제출하였고, 나아가 陳나라가 빨리 멸망하게 하였다. 韓昇은 당의 이러한 정책을 총괄하여, "국력을 걸고, 持久戰을 폈다"고 하였다. 김영하는 곧 "장기 소모전략" 때문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실제 바로 소요정책을 취하여 고구려로 하여금 곧바로 긴장 상태에 빠지게 하였고, 최종적으로 고구려를 끌어 넘어뜨려 전략목표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물론 당의 전략적인 변화는 고구려에 대하여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647년과 648년 당은 세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공격하는 군대를 파견하였으며 기본적으로 예상한 효과를 얻었다. 이어서 당 태종은 30만 명을 출병시켜 일격에 고구려를 격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빨리 사망하였기 때문에 繼位한 당 고종은 이 계획을 방기하였다. 다만 이 소요정책은 나중까지 계승되었다. 650년대의 고구려에 대한 연이은 전투는 바로 이 소요정책의 연속이다.

2. 唐 高宗의 半島 對應體制 出現
이와 동시에 한반도 동남부에 있는 신라는 자신의 사정 때문에, 당과의 교섭의 속도를 빠르게 하였다. 648년 신라가 이찬 김춘추를 당에 파견하여 請兵한 것은 신라와 당 관계의  새로운 전개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삼국사기} 권 7 신라본기 문무왕 조에 실려있는 [문무왕 이 설인귀에게 보낸 편지]에는 신라와 당 사이에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밀약이 있다. 이 밀약에 관해서는 필자가 이미 중문으로 자세히 밝혔기 때문에 다시 거론하지 않는다. 650년 신라는 金法敏을 당으로 보내서 승리를 고했는데, 김법민은 순수한 교섭 수단을 사용하여, 당에 대한 교섭에서 중대한 진전을 보았다. 당은 1년을 경과하면서 심사숙고하여 백제에 대한 이전의 입장을 정리하고 調整을 시작하면서 아울러 다음해에는 [백제왕 의자에게 주는 璽書]를 보냈는데, 璽書는 당이 奉行하는 천하질서를 강조하는 동시에, 백제가 신라를 침략하지 말도록 경고하는 것이었다. 만약 백제가 당의 권고를 듣지 않으면 당은 군사를 내어 치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당 고종의 한반도에 대한 대응체제가 이미 그 형태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永徽 원년, 당 西北 변경의 瑤池 총독인 沙鉢羅葉護阿史那賀魯가 반란을 일으켜 자칭 '可汗'이라 하고 西域을 영유하고, 뒤이어 당의 영토로 대거 진격하자, 당은 서북변경에 대하여 위협을 느꼈다; 그러므로  영휘 4년이 시작되면서부터 唐은  梁建方·契苾何力·高德逸·薩孤吳仁;程知節·王文度·蘇定方·蕭嗣業·阿史那彌射·阿史那道眞等 많은 蕃漢 將領을 파견하여,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정벌을 하여 顯慶 3년 11월에 비로소 최후에  賀魯를 사로잡아 당 서북의 위협은 비로소 해제되었다. 잇따라 蘇定方은 蔥嶺以西의 疏勒·朱俱波·喝磐陀 三國의 叛亂을 평정하고, 아울러 顯慶五年初에는 叛亂首領 都曼을 사로 잡아 東都 洛陽,에 보냈으니 다만 西北 戰線의 勝利의 후속일 뿐이다. 그리고  顯慶 四年에 唐은 梁建方·契苾何力·薛仁貴 등을 보내어 高句麗를 토벌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당이 戰線을 동쪽으로 이동하는 실험적인 행위였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 가운데는 百濟나 高句麗의 企圖를 혼란시켜보려는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다음해 蘇定方은 백제를 정벌하였으나 어떠한 인과관계도 갖추어져있지 않았다. 이것 역시 설명하면, 顯慶 四年전에 唐의 관심은  西北 戰場에 있었다는 것이다. 永徽 末 顯慶初에 高句麗를 정벌하려고 병사를 내었는데 그 목적은 다만 新羅의 압력을 경감시키고,(永徽末 出兵은 명백히 新羅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금석문 자료에 명백하게 나와있다.) 高句麗에 대해서는 압력을 행사하려는 것이었다. 실제의 효과는 이전 騷擾策略의 延續에 불과하였다. 동시에 650년대 동아세계 각 세력은 재차 새롭게 조합되어, 당 고종은 당시의 천하질서를 유지하였으며, 아울러 그 아버지의 뜻을 계승하여, 고구려 문제의 해결을 가장 중시 하였다. 그리나 백제는 당의 권유를 듣지 않았으며, 신라 또한 백제가 고구려와 결합하여 변경을 침략하고 자기를 압박했으며, 백제 내부의 혼란과 부패에 관한 소식을 빈번하게 당에 전해주어 여러 가지 계책을 내어 백제를 멸망시키는 것을 최종목표로 하였으며, 나아가 역시 당은 백제에 대한 신뢰감을 버렸다. 이와 같이 고구려를 정벌, 전투에 대응하는 필요에 맞추어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에서 남부 전선을 형성하여 고구려 거점을 진공하며, 남북이 고구려를 挾擊하는 구상이 나왔다. 이것 역시, 이 구상의 형성은 이미 당이 고구려를 정벌하려는 필요이며 신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당에 사신을 보내어 한가지 말을 하였고, 신라의 請兵乞師 사절의 활동 역시 상당한 작용을 하게 했다.
반면에 고구려는 당과의 교섭 측면에서 보건대, 당 고종이 650년 즉위하자, 고구려는 일찍이 축하사절을 파견하였다. 652년(영휘 3년)다시 당에 조공 사절을 파견하였으며, 655년 당이 황태자를 책봉하는 것을 축하하는 사신을 보내었다. 동시에 통치지위를 점하였던 불교에서 새롭게 도교의 충격을 끌어들이려고 하여, 고구려 사상계는 그 혼란의 상태가 극에 달하였다. 643년 연개소문이 "도교를 구하여 國人을 가르치고자 하였던 것"을 이어서, 고구려는 당에 도교 경전을 청한 후에 곧 전국 범위 안으로 道敎를 끌어들였는데, 이는 연개소문의 통치이념이 바뀐 중요한 표현이다. 사료의 증거가 없기 때문에 추정할 뿐이지만, 고구려는 당과의 전쟁을 겪으며, 백성에 대한 교화로 도교를 더욱 강화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불교의 몰락을 이끌고 불교도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盤龍寺 普德和尙은 國家가 道를 받들고 ,佛法을 믿지 않아 남쪽 完山 孤大山으로 옮겼다." 분명히 이것은 전사회의 역량을 국가의 위기에 공동으로 대처하도록 하는데 불리하였다. 동시에 역시 역사 혹은 그 밖의 다른 원인은 650년대 온통 고구려와 백제의 연맹체제는 아울러 당과 신라를 제어하지 못하엿다 는 것이다. 현재 영휘 5년 고구려와 말갈 연합병이 거란에 진공하였는데, 그 결과 거란에게 격퇴를 당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휘 6년(655년)에 "고구려와 백제·말갈은 병사를 연합하여 신라 북쪽 변경을 쳐서, 33개의 성을 빼앗았다" 최종적으로 당은 많은 군사를 보내서 다시는 큰 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필자가 생각하기에 ,첫째 이것은 당의 소요정책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고구려는 당으로부터의 빈번한 진공에 응하여 요동지역의 농업생산이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둘째, 650년 자연재해의 원인으로 말미암아 고구려는 백성들이 기근에 빠지는 엄중한 사황이 나타난다. 그 밖의 史書  중에는 고구려 영역 안의 인심의 불안이나 流言이 네 번 있었던 기록이 있으며, 당시 통치집단내부는 연개소문 집단에 대하여 정책적인 불만을 표시하였으며, 이러한 정국의 형세는 연개소문 사망 직후에 즉각 밖으로 표출되었다.

   
                        Ⅴ. 羅唐연합과 고구려의 멸망

 1. 對百濟戰後 당과 고구려와의 관계
 660년 당은 대장 소정방을 파견하여 神丘道 行軍大總管으로 삼고, 10여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신라와 연합하여 일거에 백제를 공멸하였다. 나아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南線據點을 개척하게 하였다. 다만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할 때는 고구려 행동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고구려 승려가 당시의 전투에 대하여 묘사한 것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나당연합군의 행동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는 듯하였다. 필자는 고구려가 내부 안정을 고려하여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백제의 멸망이 勢力 對比는 물론이고, 고구려 통치자의 심리에도 많은 부담스러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바로 주의할 것은, 백제가 비록 멸망했다고 하더라도 都城 이외의 지방 세력들이 즉각 勢를 모아 나당연합군에 대하여 위협이 되었다. 당은 도리어 이때 즉각 소정방에게 조서를 내려 군사를 돌려 돌아오라고 하였는데, 그 안의 이유는 사람들이 의미를 찾아야 한다. 필자는 당의 中樞 기관은 백제전선 지휘관과 전황판단에 차이를 드러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 조정은 백제를 멸망시킨 승리의 여세를 이용하여,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고구려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고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바로 당이 당시의 형세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하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이 표현은 소정방이 조서를 받자, 곧바로 이어서 유인원을 鎭에 머물게 하고, 신라 왕자 김인태가 이끄는 군사와 공동으로 백제 도성 사비성을 굳건하게 지켰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당 조정은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아울러 그 땅에 羈  정부체제를 수립하여, 남북이 고구려를 협공하는 제일보를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였을 것이다. 동시에 以前에 그 밖의 지역에서 경험한 것에 비추어, 當地 세력의 수령에게 관직을 주어, 일정한 병력을 주둔하게 하고, 아울러 신라와 연합하여 공동으로 백제 故地에 대한 질서를 유지하며 곧 정해진 목표를 실현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와 같이 같은 해 12월 15일에 당 조정은 詔書를 발포하여 "左驍衛大將軍 契苾何力을 浿江道 行軍大總管으로, 左武衛大將軍 蘇定方을 遼東道行軍大總管으로, 左驍衛將軍 劉伯英을 平壤道行軍大總管으로, 蒲州刺史 程名振을 鏤方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병사를 나누어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靑州刺史 劉仁軌는 坐督海運, 覆船 에 연좌되어 白衣 從軍하라고 하였다. 당 고종 본인은 적극적으로 親征을 준비하였다. 이해 3월에 群臣 및 外夷에게  洛城門에서 잔치를 베풀고 屯營에서 새로 가르친 춤을 보게 하면서 그들에게 '一戎大定樂'이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판단착오는 고구려정벌 전쟁 전에 갑작스런 준비를 초래하였고, 이것은 마침 백제에서 막 돌아온 병장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군대의 전투력을 정리하는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황후 武氏와 많은 대신들의 재 권유로 당 고종은 親征한다는 생각을 포기하였다. 이것 역시 바로 661년 고구려에 출병할 때, 당은 실제상에 이미 양면작전에 빠졌음을 말한다. 이 기간에 고구려는 일찍이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 述川城을 공격하고 이어서 또 북한산성을 공격하여 전투는 20여일간 지속되었다. 끝내 고구려군이 퇴각하면서 끝을 맺었을 때, 고구려의 행동은 백제 부흥군이 羅唐 留守軍에 공세하는 데 대하여 유력하게 지지하였다.               
 평양성 주위에서는 수 개월동안  전투가 있었고, 당군의 손실도 적지 않았는데, 주력부대는 고구려에서 철수하였다. 이 뿐 아니라 당 고종은 백제 留守軍에게 조서를 보내어 "신라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할 것을 강조하는 동시에 고구려와의 전투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음"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백제의 유인원과 유인궤의 신라연합군은 여러 차례 격전을 겪으며, 최종적으로 왜국 세력이 참여한 백제 부흥군을 격퇴시켰다. 단지 백제왕 부여 풍 및 뒤따르던 大將 遲受信이 고구려로 도망하였다. 이와 같이 남북 양면의 고구려 挾擊 전략 태세가 최종적으로 형성되었다.

2. 고구려 멸망 전후 당과의 교섭
665년(麟德 2년) 당의 東西 邊境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국면을 유지하였으며, 그 기간동 안 이순풍의 麟德曆을 바꾸어 사용하였다. 또 신라가 백제와 더불어 웅진 취리산에서 성공적인  會盟을 하도록 촉구하였다. 특히 측천무후는 조정 회의에 참여하는 한편, 나아가 당 고종이 泰山의 封禪행사의 진행을 촉구하였다. 바로 주의해야 것은, 고구려가 이 때 태자 福男을 파견하여 사신단을 이끌고 당의 泰山 封禪행사에 참여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바로 이해 말에 집권 20여년의 연개소문이 사망하였다. 연개소문의 병중에 혹은 사망했을 때에 보장왕이 그 중의 작은 권력을 장악했던 것은 아닐까.? 아울러 唐조의 중대한 封禪행사에 참여하는 것에 의하여 쌍방의 관계를 변화시키려고 하였던 것은 아닐까. 당은 고구려가 사신을 파견할 것을 접수하였는데, 이 때 고구려사태에 대한 조치를 완화시킨 것은 아닐까. 직접적인 사료 설명이 없기 때문에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656년 이후, 중단 된 당과 고구려와의 관계 해결될 흔적이 있었던 듯 하다. 이와 동시에 백제에서 돌아온 劉仁軌는 역시 신라, 백제, 왜, 탐라의 사절을 거느리고 泰山 封禪행사에 참관하였다. 666년 초의 泰山 封禪은 7세기 중엽 唐이 중심인 동아세계국가의 최후의 庭宴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각국 사신은 가능한 한 모두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한번이라도 모두 마음을 표현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내부의 변란은 이러한 종류의 국면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唐 및 신라는 이번 기회를 잡아서, 고구려를 멸망이라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로 보내려고 하였다. 각종의 상황에서 연개소문의 계승자인 長子 泉男生은 당과 일정한 연계가 유지하려고 한 듯한 흔적을 볼 수 있다. 고구려 내부의 모순은 이러한 내부의 모순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료에 이르기를;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장자 남생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막리지가 되었다. 男生이 처음으로 나라 정사를 맡아  諸城에 다니면서 그의 두 아우 男建과 男産을 시켜 조정에 머물러 있어 뒷일을 처리하게 하였더니 어떤 자가 남생의 두 아우에게 이르기를 '남생은 두 아우의 압력을 싫어하여 처리해 버리려고 생각하니 먼저 손을 써서 계책을 도모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였으나 두 아우가 처음은 믿지 않았다. 또 어떤 자가 남생에게 고하기를 '두 아우가 형이 돌아오면 자기들의 권세를 빼앗을까 두려워서 형에 대항하여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고 하였다. 남생이 비밀리에 자기의 심복을 평양으로 보내어 두 아우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더니 두 아우가 그것을 알고 숨어 있는 남생의 심복을 체포하고 곧 왕명으로 남생을 부르니 남생이 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남건 자신이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내어 남생을 토벌하니 남생이 國內城으로 달아나 그곳에 웅거하면서 아들 獻誠을 당에 보내어 살려달라고 애걸하였다. 
 위에서 인용한 {삼국사기}의 내용에 보면, 남생 형제는 연개소문이 살았을 때에도 관계가 좋지 못하였으며, 연개소문은 그 가운데의 싹을 이미 보고, 자신이 죽은 다음의 일에 대해서 걱정했다. {일본서기}에는 그가 臨終 前에 男生 형제에게 권고한 내용이 있다. 다음으로, 고구려 내부는 사람들이 국가가 빨리 전쟁을 종결하기를 희망하는 것 같고, 아울러 그 중에서 좋은 것을 얻고자 했다. 이에 대하여 김영하는 "추정해보면, 이러한 사람들은 이미 唐에 대하여 강경노선인 남건파도 아니고, 온건파인 남생측에도 속하지 않으며, 다만 연개소문 집안의 장기 집권을 반대하여, 아울러 전쟁을 일찍 종결지을 것을 희망한 사람이었다."고 하였다. 세 번째, 보장왕이 전반적인 사건 중에서 한 작용은 상당한 한계가 있으며, 泉男産, 泉男建 형제는 보장왕의 명의를 도용하여 泉男生을 소환하였는데, 보장왕은 특정한 상황하에서 작용한 것을 알 수 있다
 唐은 보고를 접한 후, 천남생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泉씨가 앞다투어 大兄 弗德과 大兄  有를 당에 보내어 청병할 때, 모두 대답을 할 수 없었던 듯하다.;천남생이 다시 아들 천헌성을 唐에 보냄에 접하여, 당 고종은 최종적으로 泉男生에게 特進시키고 太大兄을 이전과 같이 하였고, ,平壤道行軍大總管兼使持節安撫大使로 삼아 領本蕃兵共大總管契苾何力等 相知經略을 맡게 하였다. 당시 당과 泉男生쪽이 어떠한 구체적 교섭 협조를 하였는지, 현존하는 {구당서}·{신당서}·{자치통감}·{삼국사기} 등의 아울러 미기재되었으나 연구자가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금석 묘지자료에는 서로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崔獻은 {新·舊唐書}에는 빠져 있는데, 그는 정관 16년에 營州都督府參軍事를 담당하였고, 19年에는 唐 太宗을 따라 출정하였다 ;後에 또 唐 高宗에게 신임을 얻어 對遼東地域地理民情에 관하여 많이 알고 있었다. 처음에 唐 四傑 중의 한 사람인 楊炯이 찬한 <左武衛將軍成安子崔獻行狀>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崔獻이 敎旨를 받들고 國內城에 가서 泉男生을 영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천남생은, 내부에 원한을 만들어 무성하게 자라게 했으나 위험을 제거하고, 편안함에 나가려고 하며, 禍를 福으로 바꾸는 것을 생각한다. 道가 있는곳에 돌아 가기를 청하여 使者가 서로 오갔다. 天皇이 불쌍히 여겨, 公을 불러 國內城에서 영접하게 하였다." 이 말의 '使者相往'은 바로 천남생파의 使者인 弗德,  有, 천헌성등 가리키는 것이다. 崔獻은 이 삼인에 뒤이어 소명을 받고, 먼저 국내성으로 가서 천남생을 영접하였다. 그 시간에서부터 보면 최헌은 직접 먼저 국내성에 가서 契苾何力의 군대를 거느렸는데, 바로 이것은 崔獻이 唐 高宗의 뜻을 받들어 당의 전권대표가 되었으며, 솔선하여 천남생 측과 접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최헌은 원만하게 임무를 완수하여 遊擊將軍左威衛義陽府折衝都尉로 옮겼으며, 이에 上柱國을 더하여 이전과 같이 右羽林長上이 되었다. 이후에 또 李勣의 막료가 되어 高句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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