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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발해연구

黑龍江 渤海 山城에 나타난 高句麗 文化 硏究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18.05.25|조회수51 목록 댓글 0

黑龍江 渤海 山城에 나타난 高句麗 文化 硏究

 

 

 

王禹浪 王宏北

 

 

서 언

 

이미 발표된 고구려 산성에 관한 연구성과 중에서 흑룡강 지구 발해 산성이 지닌 고구려산성의 문화 특징에 대한 연구는 거의 무시되어 왔다. 흑룡강의 발해사를 연구하는 학자도 이 지역의 발해 산성을 소개할 때 발해 산성과 고구려 산성에 대한 필요한 비교는 대체로 하지 않고 발해시기 산성 특징의 설명에만 국한시켜 왔다. 이러한 학계에서 고구려 산성 문화를 언급할 때 필연적으로 현재의 요녕성, 길림성 아니면 북한의 평양지역을 정해진 한계로 삼고 흑룡강의 발해 산성문화중의 고구려 문화 특징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심지어 흑룡강 발해 산성과 고구려 산성 문화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설도 있는데, 사실 흑룡강 발해 산성 문화의 기본적인 경향과 특색은 고구려 산성 문화의 특징과 복잡하게 얼켜있음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60년대부터 흑룡강성의 저명한 고고학자인 朱國臣, 孫秀仁, 張泰相, 譚英傑, 幹志耿, 殷德明, 魏國忠 선생과 이미 작고한 王永祥, 趙善同, 呂遵錄선생 등은 모두 흑룡강 지구 발해 산성의 조사를 위해 큰 공헌을 하신 분들이다. 그들의 조사성과에 근거하여 필자는 90년대 초기부터 시작하여 흑룡강 발해 산성에 대한 재조사와 연구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이미 발표된 요녕, 길림 두 성의 고구려 산성 자료를 비교하는 가운데 흑룡강 발해 산성의 건축 특징, 특히 성벽의 구조와 재료, 산성의 위치와 지형의 선택, 산성을 설치한 주요 목적과 산성의 배치 그리고 산성내의 시설 및 성벽 위의 부속건축 등이 모두 고구려 산성과 깊은 내적관계가 있음을 놀랍게 발견하였다.

우리는 직접적 증거를 내세울 수 있는 더 많은 고고 발굴 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고고학 조사에 의한 자료에만 의거한다면 실제 상황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이후의 고고 발굴 사업이 끊임없이 진행되어야 하고 이 문제에 대한 부단한 보완이 필요하다. 그러나 흑룡강에서 발견된 발해 산성들이 고구려 문화의 北界와 발해 문화와의 관계, 나아가 고구려 문화와 勿吉의 관계, 발해 산성 문화와 黑水靺鞨과의 관계 등의 문제에 대해 한층 진전된 이해에 새로운 시야를 펼쳐 줄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사실 우리는 700여 년에 달하는 고구려 왕국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극히 적으며 문헌과 증거 자료의 散失로 인해 고구려 왕국 700년간의 동북아시아 각 민족과의 관계 및 각 역사 단계의 영토 등 많은 문제가 풀지 못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예를 들면 三國志, 魏書毌丘儉傳에는 玄兎太守 王頎를 파견하여 고구려왕을 뒤쫓으니 沃沮를 지나 천여 리를 내달아 肅愼 남계까지 다달았다. 공로를 돌에 새겨 기록하고 丸都山에 도달하여 不耐의 성에 새겼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문헌 기록 중에서 다음의 세 가지 문제가 불확실하다.

1. 肅愼 南界가 도대체 어디인가? 2. “過沃沮千里에서 옥저의 지리적 위치는 현재의 어느 곳인가? 3. 소위 丸都之山은 옥저의 앞인가 아니면 그 뒤쪽인가?

그런데 이 문헌 기록에서 244년 전후 고구려왕이 肅愼南界에 갔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고구려 왕의 도피노선과 지점은 반드시 그 세력이 닿아있는 곳에 국한될 것이라는 추측으로 고구려의 세력이 3세기 때에 이미 지금의 흑룡강 동남부에 접근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현재 흑룡강성의 鏡泊湖 지구, 牧丹江 지구에 고구려 문화를 갖춘 발해산성은 바로 그 시기에 흑룡강으로 전해진 것이 아닌가? 흑룡강 발해 산성에 관한 이러한 일련의 문제들은 우리가 이제부터 충분한 토론과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본 논문은 다만 흑룡강 지구 발해 산성이 위치한 지리환경, 산성의 성곽구조 및 부속 시설, 성벽의 건축 재료, 산성 내부의 배치 등의 특징들을 중심으로 고구려 문화와의 관계를 검토할 뿐이다. 흑룡강지역에 고구려 문화를 구비한 산성이 왜 나타났으며 나타난 시기는 언제인가 하는 등의 문제는 다른 논문에서 서술될 예정이다.

본 논문의 내용은 다음 4개 문제로 구분된다.

1. 흑룡강 발해 고성에 대한 조사의 역사적 경위

2. 흑룡강성 지구 발해 산성의 분포와 특징

3. 흑룡강 발해 산성에서 볼 수 있는 고구려 산성의 문화 특징

: 흑룡강의 고구려 문화 특징을 갖춘 발해 산성의 분포도

 

. 흑룡강 발해 고성에 대한 조사의 역사적 경위 및 그 분포 특징

 

1. 흑룡강 발해 고성 조사의 역사적 경위

흑룡강 발해 고성에 관한 조사의 역사 경위의 처음을 따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楊賓, 方拱乾을 대표로 하는 명말, 청초에 유배되어 흑룡강으로 들어온 학자들을 우선 꼽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보고 듣고 고증한 바를 기록한 것이 뒷 사람에 의해 정리편집되어 일련의 개인 저작으로 출판되었다. 예를 들면 絶域記,柳邊記略,龍沙記略,寧古塔記略,黑龍江外記,吉林外記』『全遼備考』『東夷考略등의 책이다. 이런 책들에 발해 상경 및 그 주변의 발해, , 금 등과 관계된 역사 유적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많은 역사유적의 정확한 시대구분이 결여되어 있고,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 정리되는 과정에서 본래의 내용을 잃어버리는 등의 문제가 있다. 이러한 폐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술한 저작들은 여전히 발해 고성의 역사를 고찰하는데 중요한 단서임에는 틀림이 없다.

淸朝 말년에 이르러 동북부 변경에 닥친 위기는 청 정부로 하여금 흑룡강 유역에 비밀요원을 파견하여 현지답사를 진행토록 하였는데 그 결과 동북역사지리학의 저명한 학자인 曹庭杰屠寄 두 사람을 탄생케하였다. 그들이 쓴 발해 고성 조사를 포함한 흑룡강 유역의 역사에 대한 저작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저작들은 東三省輿地圖說,西伯利亞偏東紀要,東北邊防輯要黑龍江輿圖,黑龍江輿圖說등이다. 청말의 이 몇 가지 저작들은 완전히 현지 답사에 기초를두고 선인의 성과를 역사 문헌과 일일이 대조하여 교정한 역사적 의의와 과학적 가치를 지닌 저작이다. , 두 사람은 현지 답사와 상세하고 충실한 고증을 매우 중시했던 바, 그 연구 방법으로 말하면 현대 역사 지리학 연구의 기본 방법과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20세기초부터 2차 대전이 끝나기까지 러시아 학자 및 일본 학자들이 흑룡강, 길림 등지의 발해 고성에 대해 부분적인 조사와 발굴을 진행하였다. 당연히 짙은 식민 색채의 배경하에서 진행된 조사와 발굴이었지만 학술적 의의에서 볼 경우 이 기간에 조사, 발굴된 발해 고성의 규모 및 수확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까지 가장 풍부했던 한 단계 였던 것이다.

예를 들면 1910(明治 43)에 일본학자 白鳥庫吉은 발해 東京城阿城金 上京城 유적을 조사하였고 발해의 동경성에서 唐代風을 띤 牧丹花무늬와 萱草무늬 사각 벽돌, 연꽃 무늬 와당 등 발해 유물을 수집하였다. 현재 이런 유물은 여전히 東京대학의 고고연구실에 보존되어 있다. 필자는 1995년에 일본 동경 외국어 대학 교수인 中見立夫, 동북학원 대학 교수 細谷良夫 선생 및 동경 대학 교수 大貫靜夫의 도움아래 동경 대학 고고연구실을 방문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고 白鳥庫吉이 수집한 발해 문물을 볼 수 있었다. 1926(大正 15)渤海史考의 저자 鳥山喜一 교수가 滿鐵조사대의 신분으로 발해 동경성 유적을 현지 답사했고, 1927(昭和 2) 鳥居龍藏 박사도 동경성 유적을 조사하였다.

이후 1931년 하얼빈의 東省特區 문물연구회에서 조직한 동경성 조사단이 193132년 사이 牧丹江 중류 兩岸, 海浪河 하류, 穆楞河 유역에 대해 종합적인 현지 고찰을 진행하였다. B. 鮑諾索夫가 인솔한 고찰대는 동경성의 발해 상경성 유적을 답사했을 뿐만 아니라 牛場 발해고성, 三斗江屯 발해고성, 城墻砬子 발해고성, 南湖頭 발해 고성, 松乙溝 발해고성, 爾站盆地 발해고성, 沙爾滸 고성, 牧丹江市 교외의 邊墻유적, 목릉하 유역의 고성지 등을 발견했으며 그 성과는 1932년에 처음으로 러시아어로 발표되었다.

1932三上次男이 하얼빈에서 B. 鮑諾索夫가 아직 발표하지 않은 동경성에 관한 조사자료를 보고나서 B. 鮑諾索夫와 함께 대규모의 동경성 발굴 계획을 세웠다.

이후 三上次男, 駒井和愛, 水野淸一 등 일본학자들도 각기 동경성 발해 상경 고성지를 조사하였다. 1933619347原田淑人, 池內宏, 鳥山喜一, 駒井和愛 등이 東亞고고학회의 명의로 선후 두 차례에 걸쳐 발해 상경성의 궁전 유지를 대규모로 발굴했는데 우리나라 학자 金毓紱등도 이 발굴에 참가하였다. 이 기간동안 三上次男, 駒井和愛, 水野淸一 등은 각기 동경성 및 그 주변 지구에 대해 고고학 답사를 진행했으며 1939년에는北滿風土雜記(소화13년 출판 됨)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책에서는 동경성의 고고 발굴 과정을 상세하게 소개하였고, 같은 해 東京城 -渤海 上京 龍泉府址調査報告라는 책이 출판, 발행되었다.

1949년 건국이후, 50년대 초기부터 195910월까지 朱國臣, 孫秀仁 등이 목단강 유역의 발해 고성 등지를 현지 답사했고, 1960呂遵祿, 孫秀仁, 樊萬象 등이 목단강 유역과 경박호 지구를 조사했으며, 19789월과 1979년 봄에는 흑룡강성 문물 관리 위원회에서 조직한 文物普査隊가 목단강유역, 목릉하 유역, 綏汾河 유역의 광대한 지구에 대해 문물 전면 조사를 진행하였고, 아울러 선후로 寧安市 발해 大牧丹 고성, 林口縣 三道通 고성, 임구현 刁翎鎭 烏斯渾河口 고성, 東寧縣 大城子村 발해 고성, 樺南縣 南城子고성, 목단강교외 龍頭山고성 등 많은 발해 유적과 산성을 발견하였다.

20세기 70년대 중기이후 흑룡강성 각 지구, , 현에 文物管理站, 문물관리소, 시현급 박물관 등 문물기구가 성립되었고, 성문물관리위원회의 동일한 조직하에 야외 고고조사사업을 전면적으로 펼쳐나갔으며 아주 많은 발해 산성지와 유적을 발견하였다. 예를 들면 海林縣 長汀鎭 九公里山城, 三道鄕 興農고성, 石河採石場 발해고성, 鷄東縣 鍋盔山 발해산성, 임구현 五林鎭 大山頭 발해고성, 建堂鄕 발해고성, 勃利縣 大四站鎭 古城村고성, 영안시 三陵鄕 東崴子村 발해고성, 臥龍鄕 杏花村 발해 고성, 東寧縣 道河鄕 抽水砬子 발해 산성, 城子溝 발해고성 등이다.

80년대 90년대에는 흑룡강 성내에서 발견한 발해고성에 대해 재조사, 확인, 시굴과 발굴을 중점적으로 진행했는데 그 주된성과는 아래의 네가지로 모아진다.

1. 흑룡강성 문물고고연구소의 呂遵錄, 李廷鐵 등이 경박호 주변의 발해 고성과 산성 유적을 재조사하여 鏡拍湖周圍山城遺址的調査라는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2. 목단강시 文物管理站에서는 목단강시에 소속되는 발해 산성과 고성유지에 대해 중점적이고 과학적으로 상세한 실측을 했으며 그 성과를 책으로 만들어 1992년에 牧丹江市文物保護單位保護區規劃한 책을 정식 출판하였다. 책에서는 九公里 산성 등 발해 고성의 상세한 위치, 해발 높이, 성벽 구조, 건축 특색, 출토 유물 등의 상황을 상세하게 서술하였으며, 천연색 그림이 부록되어 있다.

3. 발해고성과 산성의 건축 구조와 배치를 한층 명확히 밝히고 발해의 역사와 문화의 내적의미를 더욱 깊게 이해하기 위해 흑룡강성 고고연구소는 발해 상경 용천부 유지에 전문적인 발해 工作站을 세우고 발해 상경성 유지의 宮殿地區 및 성벽 구조에 대해 시굴과 정식 발굴 작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동시에 발해 京城이외의 소형 고성과 산성 유적의 구조를 깊게 이해하기 위하여 해림현에 소속된 三道鄕 興農고성지에 대하여 소규모의 발굴을 진행하였다. 그 성과는 北方文物』『考古』『文物등 잡지에 발표되었다.

4. 하얼빈 출판사에서 정식 출판한 高句麗渤海古城硏究匯編은 흑룡강의 발해고성의 특징을 소개하였을 뿐 아니라 실로 동북삼성의 고구려 및 발해 고성의 분포, 그리고 그 비교연구에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요컨대 근 100여년 간 흑룡강 발해 산성의 발견 과정은 대체로 발견, 조사, 재조사발굴의 3단계를 거쳤다. 고고학자들의 끊임없는 새로운 발견과 더불어 흑룡강 발해 산성에 대한 연구는 필연코 나날이 심화될 것이다.

 

2. 흑룡강 발해 고성의 분포와 주요 특징에 관하여

 

행정구획으로 볼 때 흑룡강성의 발해 고성은 주로 본 성의 동부지구에 분포한다. 그 곳에서 동쪽으로 러시아 경내의 발해 고성의 분포구와 이웃하며 남쪽으로는 중국의 길림성 경내에 분포된 발해 고성 구역과 연접해 있다.

만약 강물의 흐름과 그 유역의 관점에서 분석하면 흑룡강 발해 고성은 주로 지금의 송화강 하류, 목단강, 목릉하, 수분하 유역에 분포되는 셈이다. 地形地세로 그 分布規則을 관찰한다면 흑룡강성의 발해 고성은 주로 張廣才嶺 東麓 以東老爺嶺산지, 우수리강 以西完達山산지 및 송화강 이남의 沿江山地의 강, 호수 둘레의 험준한 요충지대에 분포되어있다.

마땅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아직까지 張廣才嶺 東麓 以西松嫩평원과 구릉산지 사이의 하천 유역에서 고고학과 역사학자들에게 공인되는 발해시기의 고성 유지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발해의 세력과 관할 지역이 여기까지 미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이 구역의 발해 고성의 문화가 아직 식별되지 못한 것인가? 이것은 금후 발해 고고와 역사 연구중의 중요한 과제의 하나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발해의 영토 문제에 관계될 뿐 만 아니라 발해의 고고 문화의 면모와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다른 논문에서 검토 할 것으로 여기서는 덧붙이지 않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설명해야 할 것은 흑룡강성 동부 지구의 발해 고성 중 寧安분지에 자리한 발해 상경성과 東寧 수분하 평원에 분포된 발해 大城子 고성(발해의 率賓府)이 대형의 평원성이고 그외에는 거의 모두가 지형이 험준한 산간 요충지 및 하천 합류하는 교통요지와 고지 위에 수축되어 있는 산성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산성들은 대체로 적군의 침입을 견제, 격퇴할 수 있는 방어적 성격을 띤 군사요새라는 점이다.

발해 상경성의 정북방에서 忽汗水(즉 지금은 목단강)가 북으로 굽이굽이 200km를 흘러 老爺嶺張廣才嶺사이의 험산준령을 꿰뚫고 지금의 依蘭縣城 서쪽에서 송화강과 합류되어 동북쪽으로 흘러간다. 목단강 동쪽은 老爺嶺의 서록 여맥인 肯特山鍋盔山이고, 강 서쪽은 바로 장광재령 동록의 여맥인 鍋盔山이다. 목단강과 송화강이 합류하는 곳이 바로 장광재령의 북단이 되고 송화강의 對岸이 바로 小興安嶺의 남단이므로 두 산이 대치해 있는 모습은 마치 용 두 마리가 한 갈래의 강줄기를 껴안고 있는 기세다. 이 물길은 발해 상경이 북로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므로 발해인은 이 수로의 입구와 요충지에 10여 채의 요새와 성보을 쌓았다. 그 중에서 고구려 특징을 현저하게 나타내는 산성이 바로 지금의 해림현 경내에 있는 九公里 산성이다.

발해 상경성의 동북방을 살펴보면 노야령 東路에서 발원한 목릉하가 興凱평원을 가로 지난 후 虎林현 경내에서 우수리 강에 흘러든다. 목릉하 양쪽 산지와 구릉지대에도 발해인들은 많은 산성과 防禦性城堡修築하였다. 그 중 고구려 산성 문화의 전형성을 살리고 있는 산성은 목릉하 지류 鍋盔河 유역의 鍋盔山산성이다.

발해 상경성의 정동방, 노야령의 동록 산지의 변두리 수분하 유역, 발해 솔빈부 즉 바로 지금의 동녕현의 대성자 고성을 에워싸고 발해인들은 많은 산성을 쌓았다. 그 중 비교적 전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산성은 동녕현 경내의 城子溝산성과 道河鄕 紅石砬子산성이다.

발해 상경성 정남쪽의 경박호 주변 험준한 요충지에도 발해인들은 비교적 견고한 대형산성을 쌓았다. 그 중 고구려 특징이 가장 뚜렷한 것은 바로 城牆砬子산성이다.

발해 상경성의 정서쪽 방향은 바로 장광재령의 주봉인데 해발이 1668미터에 달한다. 산 위에는 일년 내내 눈이 덮여 있어 금나라 때에 于冷山이라 불렸으며 발해 상경성의 천연적인 서쪽병풍이 되었다.

발해 상경성의 서북쪽, 해랑하가 발원하고 통과하는 지역에 흙과 돌을 섞어 쌓은 수십km에 달하는 긴 성벽체가 있다. 성벽의 방어방향으로 볼 때 북쪽을 방비하기 위한 방어 공사임이 분명하지만 그 년대는 아직까지 확실하지 못하다. 경박호 城牆砬子산성의 호수 對岸江山嬌林場의 동쪽 산언덕에도 한 갈래의 북쪽으로 향한 방어용 벽체가 있는데 그 길이는 아직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고성과 고성 성벽의 분포를 올바로 종합, 분석하여 보면 이 모든 것이 발해 상경 용천부에서 京師를 보위하기 위하여 구축한 엄밀한 방어체계임을 알 수 있다. 그 북부는 동쪽의 饒河縣完達山山地부터 서쪽의 佳木斯 張廣才嶺까지의 여맥사이로 북부 산지의 천연방어선으로 형성되었다. 그리고 寶淸은 또 북부산지의 요충지로 이로부터 흥개평원과 삼강평원으로 진출한다. 이때문에 보청현 부근의 七星河 유역에서 발해인은 원래 물길과 흑수말갈이 축조해 놓은 고성을 이용하여 견고한 방어용 보루를 축조한 것으로 예견되는데 바로 칠성하 유역의 炮台山성이 그것이다.

경박호에서 남쪽으로 가면 哈爾巴嶺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발해 상경 남부의 천연병풍이 된다. 哈爾巴嶺 남쪽은 비옥한 해란강과 布爾哈通河의 충적 河谷平原이다. 여기는 원래 舊國의 소재지였고, 후에는 중경 顯德府의 소재지였다.

발해 상경성에서 동쪽으로 가면 老爺嶺을 넘은 후, 곧 수분하평원과 비옥한 우수리 평원에 들어서게 되는데 엄밀한 의미로 말한다면 이 두 평원은 실제적으로 흥개평원의 남쪽으로의 연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발해 상경의 서쪽은 바로 장광재령을 사이에 둔 松嫩대평원이다. 하지만 장광재령의 여맥이 서쪽으로 阿什河의 평원까지 뻗어있기 때문에 300km의 험산준령의 산지가 기병부대의 습격을 막아주는 천연 장애가 된다. 아직까지 이 일대에서는 비교적 대형의 명확한 특징을 나타내는 발해 시기의 고성과 유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발해인들의 서쪽 방어중점은 발해 상경성의 서남쪽 즉 목단강 상류 하곡평원 및 길림시의 송화강 골짜기 일대였고, 이 일대에서 대량의 발해 고성이 발견되었다. 그 중 발해의 평원성은 보기 힘들고 방어 성격을 갖춘 산성이 가장 보편적으로 나타났다.

총괄적으로 현재 발견된 발해 고성의 분포 특징을 분석하면 발해 상경성 소재지인 영안 분지를 중심으로 하는 주위의 동서남북은 모두 큰 산에 격리되어 천연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발해 상경성과 연접되거나 하는 각개 산길의 교통요로에 발해인이 군사요새와 산어귀의 요충지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시야를 넓혀서 다시 살펴본다면 발해 고성의 분포는 다음 두 가지의 현저한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1. 발해인의 주요 방어 방향은 동북과 서남이었으며 동북 방향으로는 주로 흑수말갈을 방어하고 서남쪽으로는 당나라 군대와 후에 강대해진 거란인을 방어하였다.

2. 발해상경 주위 산지의 바깥 둘레에는 네 개의 비옥한 평원이 있다. 즉 북부의 삼강평원, 동부의 흥개평원과 수분하우수리 평원, 남부의 해란강과 布爾哈 通河 및 도문강 하류평원목단강 상류의 하곡 평원(만약 중경현덕부 위치로부터 보면 목단강 상류의 하곡 평원은 바로 舊國을 중심으로 한 서쪽 평원이다), 서부는 바로 松嫩대평원이다. 발해인이 현재의 요동평야를 점유한 적이 있는가 하는 것은 금후 우리의 고고 발견과 깊이 있는 연구에 의해 해결될 것이다. 이런 발해 고성 문화중에 고구려문화 특징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고구려 전형적 특징을 띤 흑룡강지역의 발해 산성을 다음에서 소개하겠다.

 

. 흑룡강 발해의 산성과 邊墻

 

흑룡강 발해 산성에 반영된 고구려의 문화 특징을 알려면 반드시 흑룡강 지구의 발해 산성의 분포와 기본 특징을 이해하여야 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예전의 학자들이 모두 발해 상경성에 관한 상황에 대해서는 널리 소개하였고 발해 상경성에서 발굴된 자료의 점차적인 공개에 따라 여러 사람에게 잘 알려져 있으므로 필자가 중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아울러 아직 공개하지 않은 고고 자료에 대해서는 필자가 성급히 연구나 議論을 할 권한이 없으므로 공개 발표되는 날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본고는 다만 필자가 근 20년간의 직접진행한 현지답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미 공개 출판된 졸작 高句麗 渤海 考城硏究匯 編을 기본자료로, 우리의 現地實錄을 회의에 참석하신 여러 선생님께 소개하는 바이다.

 

1. 海林縣 長汀鎭 渤海 九公里山城

 

구공리산성은 지금의 해림시 장정진 구공리 기차역 부근 구공리 산의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는데 그 해발 높이는 약400m에 달한다. 필자는 1986, 1988년 두 차례에 걸쳐 이 산성에 대한 답사를 진행하였다. 실제에 있어 현지인들은 구공리 산성을 高麗城子라고 불렀는데 소위 구공리산성은 바로 고고조사자가 임업부문의 습관적 칭호로 명명한 것이다. 이 산성은 장광재령의 동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데 산성의 남쪽은 깍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海浪河와 임하고 비옥한 新安분지를 멀리 바라 보고 있으며, 산성의 동, , 북 삼면은 모두 험산 준령이다. 해랑하는 두 개의 발원지가 있다. 그 하나는 지금의 오상현 경내의 장광재령 주봉의 하나인 大禿頂子산 동면에서 발원하는데 산꼭대기에는 일년 내내 눈이 쌓여 있다. 다른 하나는 길림성의 돈화시 경내의 琵琶頂子 북면에서 발원한다. 두 갈래의 물길이 구공리 산 서쪽에서 합류한 후 수량이 급증하는데 오랜 기간의 침식으로 이 곳에 富饒하고 아름다운 신안분지를 형성하였다.

산성은 신안분지의 북단에 자리잡고 북면에서 분지에 들어서는 요충지를 지키고 있다. 신안분지로부터 동쪽으로 약 40km쯤 가면 영안분지에 들어가는데 이는 곧 발해 상경성의 소재지이다. 구공리산성은 발해 상경성 서북방향에서의 중요한 군사요새라고 추측할 수 있다. 구공리산성의 성벽은 그 길이가 2000m에 달하며 성벽의 벽체는 산능선의 흐름을 따라 축조된 것으로서 산성의 평면은 불규칙적이다. 목단강시 문물관리참의 실측에 기초하여 그려낸 평면도의 형태는 산성의 평면이 불규칙적인 삼각형과 靴形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산성의 남단은 깍아지른 절벽으로 해랑하에 임하여 바로 오를 수 없으므로 그것을 천연장벽으로 삼고 성벽을 쌓지 않았다. 강과 임한 곳의 절벽은 3개의 산봉우리에 각기 속하여 있으며 3개의 산봉우리 사이에 두 갈래의 비교적 가파른 산골짜기가 성내로 직접 통하여 있다. 두 갈래 산골짜기의 너비는 10m이고 골짜기 양측의 석봉은 천연적인 문을 형성하였다. 그 지세는 매우 험요하여 일당백의 기세를 자랑하고 있다.

산성의 동측 성벽은 산능선에 축조되어 있고 그 아래는 비교적 완만한 산비탈이 골짜기 밑 부분까지 뻗어있다. 가파르지 않기 때문에 인근 산능선의 비탈에 차단벽이 축조되어 있다. 동서양측의 산성 벽체는 모두 남쪽의 치솟은 암벽위에 산능선의 흐름을 따라 북쪽으로 이어졌으며, 서북의 최고봉(해발 470m) 으로 향하여 있다. 동서 양측의 벽체가 이 곳에서 합친 후 척추모양(脊狀)을 형성하였다. 북쪽의 성벽 위에 문 하나가 있어 직접 동쪽의 산골짜기로 통할 수 있고, 동쪽과 북쪽의 벽체 위에 다섯 곳의 馬面과 흡사한 건축물이 축조되어 있어 성벽의 벽체가 바깥으로 삐져나와 반원 형체를 갖추었다.

산성의 벽체는 토석혼축, 石塊壘築, 片石쌓기등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눠진다. 동쪽성벽 벽체는 비교적 높고 견고하며 두텁다. 벽체의 안쪽은 마도가 있는 듯이 보인다. 북쪽 성문쪽에 가까운 벽체는 매우 두터운 듯한데, 서쪽벽 벽체만이 수축한 것이 높지 않고 일부 벽체는 이미 무너진 상태다. 그러나 서쪽의 산세는 동쪽에 비해 가파르며 바로 오르기가 어렵다. 산성의 벽체의 지세로 볼 때 그 안쪽은 경사도가 완만하고 바깥쪽은 매우 가파르다.

산성내의 최고봉은 성의 동남방향에 위치했으며 해발 380m정도이다. 그 위에 모래 흙과 돌부스러기를 섞어서 축조한 꽤 큰 돌무지가 있으며 이와 비슷한 돌무지가 산성의 북단 산능선에도 한 곳 있는데, 산성에서 없어서는 안 될 望臺로 가늠된다. 돌무지의 남쪽에 하나의 사각형의 이미 무너져 내린 돌 웅덩이가 있는데 물저장 못 따위의 유적으로 짐작된다. 현지 사람들의 소개에 의하면 산성 안에 샘물과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산성의 남벽에 서서 북쪽을 바라보면 산성이 키모양으로 보이며 성 안의 양지쪽 산비탈에 여러 개의 穴居坑이 널려 있다. 산성안에서는 布紋瓦가 출토되고, 현무암으로 제작된 수동맷돌, 화살촉, 회색 도기편 등 발해 시기 특징을 가지고 있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외 신안분지의 해랑하 부근 지방에서 이미 여러 곳의 발해 시기의 역사 유적이 발견되었다.

 

2. 東寧縣 紅石砬子山城

홍석랍자산성은 동녕현 도하진 서남, 대수분하 오른쪽 기슭의 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다. 산벼랑과 절벽 위의 돌이 자홍색을 띠므로 홍석랍자라고 불리우며, 산성의 이름은 산의 이런 특징으로부터 온 것이다. 산성 동쪽 5km 되는 곳은 바로 대, 소수분하가 합류되는 곳이며 산성 남쪽에서 약 13km떨어져 오배산산성이 있다. 북쪽과 동쪽은 대수분하와 임하고 있으며 홍석랍자촌과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산성이 위치한 지세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의 가장 높은 곳은 해발 450m의 산봉우리이다. 산성의 성벽 벽체가 이 곳 산봉우리의 남북 두 끝으로부터 산능선의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연장되며 점점 넓어지는데 가장 넓은 곳은 150m가 된다. 성벽은 중앙의 가장 넓은 곳에서부터 점차 줄어들며 수분하 오른쪽 기슭의 대지 위에서 그친다. 수분하의 충적에 의해 동쪽 성벽은 이미 강물에 잠겨버리고, 이 곳의 대지는 현재 강면보다 4m가량 높다. 수분하는 산성아래로 유유히 흐르고 산성 동쪽은 배가 닿는 부두와 유사하다.

산성 주위는 모두 노야령 동록의 여맥이다. 산성의 북쪽 성벽 벽체는 가파른 절벽 위에 있으며, 중앙에 문이 하나 있고 한 갈래의 오솔길이 가파른 산비탈을 이리저리 돌아 강가에까지 닿아 있다. 산성의 남쪽 벽은 지세가 비교적 완만한 산비탈에 있기 때문에 성벽을 쌓은 것이 높고 견고한데 현제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4m에 달한다. 남쪽 벽의 동서 양쪽의 벽체 위에 또 3개의 차단벽이 세워져 있는데, 각각의 길이는 50m정도이다. 남쪽 벽 중앙의 골짜기 입구쪽에 또 문 하나가 있으며, 돌벽을 쌓아 양측의 산과 연결시켜서 남문을 통하여직접 동남으로 뻗은 산골짜기에 내려갈 수 있게 하였다. 산골짜기 입구로 통하는 곳에 또 하나의 높은 돌벽이 축조되어 있는데 양측의 산골짜기와 연결되어 한 갈래의 견고한 돌담방어선을 이루었다. 산성의 주요 방어시설은 모두 남쪽성벽과 남부의 골짜기입구와 비탈에 설치되어 있음을 확연히 알아 볼 수 있다.

산성의 벽체는 둘레가 2000m이고 산성 벽체의 흐름은 동서방향이다. 중간이 넓고 양쪽이 좁으므로 평면이 콩꼬투리 형태를 이루고 있다. 북쪽 성벽은 모두 돌덩이로 쌓아올렸고 남쪽 성벽의 서쪽은 흙과 돌을 섞어 쌓았으며 동쪽의 성벽은 돌덩이로 쌓았다. 산비탈과 산골짜기 입구의 차단벽은 모두 돌덩이로 축조되었다.

산성내의 서쪽과 중앙은 비교적 평탄하며 중앙부에 흙으로 된 사각형 못이 있는데 넓이는 약 30×30m이며 둘레는 120m이다.

성벽의 남아 있는 높이는 2.5m, 꼭대기의 너비는 1.2m, 성벽 위에는 사면에 문이 없다. 산성 안에는 샘물과 우물이 있고, 성내의 평탄한 곳에는 크기가 서로 다른 혈거갱이 널려 있다. 성내에서는 현무암으로 제작된 수동맷돌(파손됨), 布紋瓦 등 발해의 전형적 유물이 출토되었다.

 

3. 穆棱縣 小四方山山城

소사방산산성은 肯特阿嶺 산록의 동쪽 목릉하 중류, 현재의 목릉현 福祿鎭 高峰村 동남 목릉하 지류의 소사방산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사방산 산꼭대기는 사각형을 이루고 있기에 현지사람들은 소사방대산이라고 부른다. 산성 남쪽은 太平嶺 북부의 산록에 임하고, 서쪽은 목릉하의 지류 亮子河에 임하였으며, 서북쪽은 목릉진과 30km 떨어져 있으며, 남쪽은 光明村10km의 거리를 두고 있다.

목단강시 문물관리참에서 근래 조사한바에 근거하면, 소사방산성은 북쪽은 높고 남쪽이 낮은 두 개의 산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2개의 산봉우리 사이가 트이고 평탄한 지대이다. 산성 내의 지세는 서, , 북 세면이 비교적 높고,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점차 경사가 져 완만한 비탈을 형성하여 평면의 형태는 미치 키와 같은 형상을 이루고 있다.

소사방산산성은 석성과 토성으로 조합하여 된 것이다. 서쪽의 산성은 돌덩이로 성벽을 쌓아 석성을 이루었다. 푸른 돌덩이를 이용하여 쌓은 벽체가 남북 두 개의 산봉우리 및 평탄한 지대를 에워쌓아 성안은 하나의 봉쇄된 산성이 이루어졌다. 석성의 벽체는 산능선의 흐름에 따라 축조되었고 절벽에 맞다은 곳에서는 험준한 절벽을 이용하여 성의 천연 벽체로 삼았는데 석성의 둘레는 약 990m이다. 석벽의 벽체는 약24m로 그 높이는 일정하지 않으며 벽체의 밑부분 너비는 11m, 윗면 너비는 2.5m이다. 석성의 동쪽, 골짜기 입구에 돌문이 있으며 능히 동쪽의 토성으로 통할 수 있다.

석성안의 동북부는 비교적 평탄하고 서남쪽은 높이가 일정하지 않은 산지이며, 성내의 동북쪽엔 샘물과 우물이 있고 많은 혈거갱이 분포되어 있다.

석성 동쪽벽에 이웃하여 토석혼축 산성이 있는데 석성과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토성의 둘레 길이는 1665m이며 벽체는 모두 흙과 돌의 혼합 축조이며 토성벽의 남아있는 높이는 약1.72.8m이다. 동쪽에 또 비스듬히 흙벽이 한 갈래 쌓여 있어 토성을 남북 두 성으로 갈라놓았다. 만약 석성과 남북 토성의 평면도를 연결시켜 살펴본다면 소사방산산성의 형태는 세 성이 연결된 고리모양을 이루고 있다. 토성의 남북 양끝의 성벽은 석성의 동쪽 성벽의 남북 양끝과 서로 연결되었고, 토성 남벽과 석성 동벽 결합부의 골짜기 입구에 성문이 나 있는데 너비가 약3m이고, 성문 양쪽에 견고한 토성 혼축 성벽이 갖추어져 있다. 성문 밖에 한 갈래의 굽이굽이 내려온 좁은 산길이 있어 산 아래의 양자하 기슭으로 직접 통한다.

산성내에서는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돌절구, 돌화살촉, 돌맷돌, 돌절굿공이, 돌창, 회색 단지조각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산성은 발해시기에 축조되어 요, 금까지 사용된 것으로 짐작된다.

 

4. 東寧縣 五排山山城

 

五排山山城은 현재 동녕현 도하향 오배촌 서남쪽 오배산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오배산은 태평령 동록에 연결된 산지인데 산성내의 최고봉의 해발은 617m이다. 이 곳은 산이 높고 숲이 무성하며 골짜기가 깊고 비탈이 가파로우며 수분하 상류의 산지와 하천을 좁은 땅에 자리잡고 있다. 대수분하가 산성의 남, , 북 삼면을 에워싸고 흐르고 있으며 고성의 서쪽은 모두 험산준령이다.

산성 주위의 지세는 산봉우리가 솟아있고 강물이 안고 돈다. 대수분하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다가 꺾여서 동으로 에돌고 서로 굽어 북으로 간다. 그리하여 산성 동쪽에 자루형의 모래톱을 형성했다. 산성은 바로 자루형 모래톱의 아구리에 축조되었는데 성벽은 아구리의 남북 양 끝으로부터 쌓아 나갔고, 수분하 강가의 절벽과 나란히 하고있다. 성벽은 동으로부터 서로 산능선의 흐름에 맞추어 점차 안으로 오물아들어 마지막에 서쪽 산능선의 최고봉에서 합쳐져 V자형을 이룬다. 성체는 마치 자루를 뒤집어놓은 V자와 같은데 발해인은 이 곳 산세와 강물의 흐름을 충분히 이용하여 성벽과 산세, 강을 교묘하게 결합시켜 방어하기 쉽고 공략하기 어려운 방어체계를 마련하였다.

오배산성의 성벽은 V형 산 능선에 세워졌다. 산성 성벽의 축조방법은 다음의 세가지 1. 산성 동부의 가장 높은 곳의 성벽 이남은 그 벽체가 돌덩이로 쌓아올렸고 높이가 34m이다. 2. 가장 높은 성벽의 북쪽 벽은 돌과 흙을 혼합하여 쌓는 방법을 채용하였다. 3. 골짜기입구는 양측의 산봉우리를 석벽으로 연결시킨 후 산봉우리의 가파로움을 이용하여 천연벽체를 이루었다. 산성 북쪽부의 성벽에 문이 뚫려 있는데 이는 고성 및 帶狀구역으로 출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주의할 점은 여태까지 발표된 자료 중 이 산성의 둘레를 모두 1900m로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오배산산성의 성벽이 있는 부분의 길이일 뿐이지 동쪽 산성의 성벽이 없는 부분 및 자루형 지역의 면적을 무시한 것이다. 오배산산성의 둘레는 실제로 50006000m이다.

이밖에 산성내의 북쪽 벽 아래에서 많은 혈거갱이 발견되었으며, 성벽에서 마면과 옹문은 발견되지 않았다. 성내에 샘이 있다.

1986년 필자는 李建材, 張泰湘, 魏國忠 세 명의 선생을 모시고 오배산산성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근래 목단강시 문물관리참에서 산성에 대하여 재조사와 측량작업을 하였다. 그들은 성벽의 건축방법으로 보아 비교적 소박하고 간단하며 성벽의 돌덩이가 대다수 당지의 산물이고 제대로 가공을 거치지 못하였으며 성벽에 마면, 옹문 등 시설이 없는 것으로 보아 축조년대는 마땅히 수당 이전으로 예측된다. 수분하 유역은 戰國때부터 兩漢 때까지 옥저인의 거주지였고 魏晉때에는 남하한 勿吉인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 산성은 옥저인이 물길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나는 이 추리가 충분한 근거가 부족하다고 본다. 고성 건축의 특징 및 지리적 위치로 볼 때 산성의 연대는 발해시기부터 쌓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5. 鷄東縣 鍋盔山山城

 

과회산산성은 계동현 동해진 동북방향 목릉하 왼쪽 기슭 하류의 좁고 긴 대지에 위치해 있다. 이 곳은 불쑥 솟아오른 원형의 산봉우리로서 그 산 형태가 하나의 거꾸로 엎어진 솥과 비슷하다 하여 과회산이라 불리우며, 산성의 이름도 산이름에 의해 얻어진 것이다. 과회산 동북쪽에 과회하가 있고 서쪽은 哈達河이고 남쪽은 목릉하이다. 산성의 둘레는 20km이고 모두 평탄한 들이다.

산성은 과회산 꼭대기에 자리 잡았고 산꼭대기는 움푹 들어간 솥의 밑 굽과 흡사하다. 산성의 성벽은 산꼭대기의 산비탈을 에돌며 청석으로 쌓여졌다. 성벽의 남아 있는 높이는 23m, 밑부분의 너비는 8m이다. 성벽 안쪽에는 마도가 설치되어 있는데 너비가 거의 2.5m에 이른다. 산세가 비교적 평탄하므로 성벽의 축조가 비교적 정연하다. 다만 산성 동쪽의 완만한 비탈에 축조된 성벽에 문이 하나 있는데 성문의 방어 능력을 높이기 위하여 성문 바깥쪽의 산비탈에 세 갈래의 석벽이 쌓여있다. 석벽의 길이는 거의 70m나 된다. 산성 서쪽과 북쪽의 성벽은 가파른 절벽이기 때문에 돌로 간단히 쌓았고, 동쪽와 남쪽의 산성 축조는 비교적 견고하다. 석벽 위의 돌덩이는 가늘고 긴돌, 덩어리 돌, 잔돌(자갈) 세 가지로 나뉜다. 축조 방식은 성벽의 내외 양측을 돌로 쌓은 후 중간은 흙과 돌의 혼합물로 채워 넣었다.

산성 내의 남쪽에 돌덩이로 쌓은 직경이 45m되는 원형 못이 있는데 깊이는 약 2m, 못의 네 벽은 모두 정사각형의 돌로 쌓아올렸다. 산성 내의 북쪽에 말라버린 우물이 있는데 그 우물벽도 돌로 쌓은 것이다. 산성의 중앙에 모래, , 돌을 혼합하여 쌓은 높은대가 하나 있는데 산성의 望臺로 짐작된다.

과회산산성 성벽의 둘레는 1900m이고 산성으로부터 동쪽는 흥개호 평원으로 들어갈 수 있고 북쪽으로는 완달산록을 따라 삼강평원에 들어설 수 있다. 산성의 남부와 동부는 모두 老爺嶺의 산지이다. 이 곳은 목릉하가 충적되어 형성된 하곡평원이며 흥개평원, 삼강평원을 드나들며 老爺嶺산지로 진입하며 발해 상경성에 직접 연결 될 수 있는 교통 요충지이다. 발해시기에 건축된 중요한 산성으로서 현재까지, 흑룡강 지구에서 발견된 돌로 쌓여진 유일한 석축산성이다. 이 산성의 축조년대와 수축한 목적 및 산성이 반영하는 문화의 내적의미 등에 관한 문제는 이후의 깊이 있는 연구를 기대한다.

 

6. 鏡泊湖 城牆砬子山城

 

성장랍자산성은 지금의 흑룡강성 목단강시 경박호 호수구역 중부 西岸의 호수에 임해 있는 산봉우리 위에 위치해 있다. 산의 이름은 성이 생긴 뒤에 붙여 졌고, 성과 산은 서로 답습하여 사용하며 이름이 굳혀졌다. 산성 동쪽과 북쪽은 모두 호수에 면해있고 그 동북은 호수 안의 소고산과 약 1km떨어져 있으며, 남으로는 경박호 안의 이른바 珍珠門이라는 것에서 겨우 0.5km떨어져 있다. 산성은 호수에 면해있고 그외 서쪽으로는 대부분 장광재령 산지의 여맥이 펼쳐지고 있다.

성장랍자산성은 두 개의 높이 솟은 석랍자 산봉우리를 사이에 자리잡았고 성장랍자 산성의 동쪽은 호수에 면한 곳으로 암석이 솟아오르고 절벽이 매우 험준하다. 산성의 동, , 북 세면은 모두 경박호 호수에 에둘려 있다. 산성 서쪽은 가파른 낭떠러지로서 낭떠러지 아래의 길은 협곡인데, 이 협곡과 서쪽의 산지는 서로 간신히 연결되어 있다. 산성의 서남은 기어오르기 어려운 비탈이고 동서 양측 산능선과 성벽이 만나는 산의 입구 지대이다. 산성 동남쪽은 호수로 막힌 곳으로 곧 경박호 동부의 소위 江山嬌古城牆기점이다. 산성의 북쪽은 완만한 비탈이고 지세가 비교적 평탄하고 트였으며 북쪽, 서북쪽 및 서부의 산무리와 서로접해 있다. 이 곳은 산성의 가장 낮은 곳으로 산성 안의 골짜기가 성 밖의 골짜기 입구로 통하는 곳이며 산성에 출입하는 성문이 만들어져 있다.

산성의 성벽은 산세에 따라 산능선에 축조되어 있으며 산성의 평면은 불규칙적인 형태이고 성벽의 둘레는 약 3200m이다. 산성의 북벽은 흙과 돌의 혼합체와 돌덩이로 쌓여 있고 북쪽의 성벽은 동서 두 성랍자산봉우리사이에 가로 질러 있고 양쪽의 산꼭대기와 접해 있다. 북쪽의 성벽은 높이가 약 34m이고 밑부분의 너비는 약 11m, 윗부분의 너비는 약 2m이다. 성벽 안쪽에 마도가 설치되어 있고 담벽 중앙에 문이 하나 뚫려 있는데 문밖에 옹문을 증 설 하였다. 돌계단이 있는 작은 길 하나가 산성과 호수를 연결시켰다. 이 곳의 호수면은 하나의 만을 이루며 배를 대는데 적합한데, 당시 성안에서 호수로 진입할 때 배를 대던 부두로 짐작된다. 북쪽 벽의 서쪽 끝에 비교적 큰 마면과 같은 평대건축물이 담벽 밖에 삐쳐나와 있고 평대는 돌덩이로 쌓은 뒤 다시 흙으로 다듬어 평대모양을 이루게 했으며, 성벽밖에는 성을 보호하는 가 파여 있다.

서쪽벽위 낮은 비탈이 진 완만한 지대에 정연한 사각형 돌덩이로 쌓아올린 성벽이 있는데 성체가 매우 높다. 돌 축조방법은 먼저 산능선을 90각의 벽체로 다듬은 후 사전에 가공한 규격이 정연한 돌덩이를 쌓아올려 높은 벽체를 만들었다. 이런 석벽의 벽체는 높이가 57m이고 윗면의 너비는 34.5m이며, 개별 구역은 바로 벽체의 내외 양쪽을 모두 돌덩이로 쌓았다. 성내의 지면은 성 밖에 비해 4m정도가 높다. 이러한 높고 큰 벽체는 대체로 서쪽의 비교적 완만한 산비탈에 수축되어 있고 서쪽 벽의 벽체위에는 두 개의 마면과 흡사한 평대 건축물이 있으며 평대의 외부는 모두 돌덩이로 4×4m5×5m의 정사각형으로 쌓았다. 서쪽 벽의 서북쪽 끝은 바로 가파른 돌봉우리 절벽를 천연 장애물로 이용하였고 성벽을 축조하지 않았다. 산성 서쪽 벽의 남쪽 산비탈의 비교적 완만한 비탈(벽체와 30m정도 떨어진 곳)에 무너진 두 갈래의 돌로 쌓은 차단벽이 발견되었는데 그 남은 길이는 약 2030m이고 높이는 1.52m이다. 산성 서쪽의 산봉우리는 산성의 가장 높은 지점으로서 봉우리 꼭대기로 바로 오르면 주위 수십리 湖水 및 산성을 한 눈에 조망 할 수 있다.

산성의 남쪽 벽은 모두 정연한 돌덩이로 축조되었고, 재료는 화강암 돌덩이를 선택하여 깎아서 평평하게 만든 산능선에 쌓아 올렸다. 성벽의 외측의 돌덩이는 아주 정연하여 산비탈에서 올려다보면 매우 웅장하다. 현재 남쪽의 돌로 쌓은 성벽의 잔존 높이는 45m이고 윗면의 너비는 약 3m이고 벽체 안쪽에 넓은 마도가 정리되어 있다. 산성 남벽의 중간쯤에 문이 하나 있는데 옹문의 구조로 되어 있다. 성문 쪽에 쌓인 석벽은 더 견고하고 남문으로부터 산 아래에 이르기까지 돌판을 깍아 만든 가파른 길이 호수가에까지 바로 통해 있다.

산성의 동벽은 모두 다듬어진 돌덩이로 축조되어 있다. 성벽은 동쪽의 호수가의 산능선을 따라 남북으로 이어졌고 현재 성벽의 대부분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성벽의 잔존 높이는 25m이고 동쪽의 벽은 호수가의 암석절벽을 따라 남으로부터 북으로 뻗어나갔고 북쪽벽 동쪽의 산봉우리와 성벽이 연결될 때까지 계속된다. 동쪽 성벽의 북쪽 끝 암문이 두 곳있고 호수가에 가까운 성벽에는 돌로 쌓아올린 4개의 평대가 있다. 평대는 모두 자연지세를 조금 다듬은 후, 다시 돌을 쌓아올려 평대모양을 완성했는데 그 면적은 4×4 혹은 6×6m로 똑같지는 않다.

산성 내의 지세는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으며 동서 양쪽은 비탈이고, 중간이 움푹 들어가 남북 방향의 키형태를 이루었다. 성내 동북쪽에 흙으로 쌓은 작은 네모성이 하나 있는데 둘레는 95m이고 남아있는 높이는 11.5m가 되고 문은 없다. 북문 성내 좌측에 둥그런 구덩이가 하나 있는데 구덩이 안에 돌이 무너져 있었다. 저수지 혹은 저장실 따위의 건축물로 추측된다. 성내 남문 동쪽에 면적이 비교적 큰 건축 흔적이 있는데 땅 위에 다듬어진 돌들이 일정하게 배열되어 있다. 성 내에는 일년내내 얼지 않는 샘물이 있어 남쪽으로부터 북쪽으로 흘러 작은 시냇물이 되고 성 동북쪽으로 흘러 커다란 못물을 형성하였다. 못의 사방 주위는 모두 돌로 쌓여져 있다. 이 못은 항상 차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그 스며든 물은 북문으로 흘러 나간다.

이 밖에 산성 내에 남벽과 서벽 안쪽에 평탄한 마도가 닦여져 있는 외에 질서있게 배열된 평대도 발견된다. 분명히 이것은 인공적인 건축물이다. 산성 안이 하늘을 찌를듯한 나무들로 덮혀 있기에 지표 위에 표본을 채집하기 어려웠다. 寧安縣志에 따르면 “1911년 영안현 성장랍자산성에서 銅獅印이 출토되었는데 크기가 사발만하고 忽汗洲兼三王大都督이라는 아홉 글자가 새겨 있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 관인에 관한 상세한 고증은 필자가 忽汗洲兼三王大都督官印 初探에서 상세하게 밝혔기에 北方文物1996년 제2기를 보기 바란다. 성장랍자산성의 건축구조를 알아내기 위해 필자는 다섯차례의 현지 답사(1983,1986,1995,1997,2000)를 거쳐 풍부한 자료를 얻는데 忽汗洲兼三王大都督官印 再探이라는 글에서 특별히 발표하려 하므로 여기에서는 더 논하지 않겠다.

이 산성의 건축년대에 관해 현재 학계에는 아직 논쟁이 있는데 발해설, 요금설, 동하국설 등이 있다. 우리가 볼 때 고성의 건축형식과 특징으로부터 분석해 보면 이 성의 건축방법 그리고 채용한 축성재료가 모두 고구려가 산성의 특징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성내에 고구려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발해국 초기에 고구려의 산성을 쌓는 방법에 따라 지은 것일 수 있다. 요금 고성의 건축방법은 이 성의 건축방법과 크게 다르다. 때문에 우리는 이성의 년대는 고구려가 멸망 당한 뒤부터 발해 건국초에 이르는 시기의 산성이라고 추측 혹은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7. 鏡泊湖 城子后山山城

성자후산산성은 현재의 경박호 폭포로부터 동북으로 3km정도 떨어진 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발전소로부터 2km떨어져 있고, 산성의 동, , 서 삼면 모두 골짜기와 절벽으로 되어 있다. 산성의 왼쪽에는 목단강이 있는데 강은 산을 끼고 동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산등성이는 강 수면의 약 50m정도 올라와 있는데 현지 사람들이 이 산을 성자후산이라 부르며 산성의 이름도 이렇게 지어진 것이다. 산성이 처해 있는 위치가 매우 험준하고 경박호와 목단강이 합쳐지는 곳을 통제 할 수 있는 수륙교통의 중요한 요충지이다. 산성의 지세는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데 성벽은 산능선을 타고 쌓아졌다. 그 둘레는 3590m에 이르고 산성 평면은 불규칙적인 형태를 띄고 있다. 산성의 동, , 북 세면은 모두 절벽으로 되어 있고 강에 면해 있는 곳이 가파르므로 산성의 천연적인 장애 역할을 하므로 성벽의 흔적은 그다지 분명하지 못하다.

산성 내에는 하나의 중간 성벽[腰墻]이 있는데 그 중 한 갈래의 흙벽이 서남으로부터 동북 낭떠러지 언덕으로 기울어져 있어 모든 산성을 남북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성내 腰墻의 서쪽 끝은 강변절벽의 산구릉에 가까이 있는데 성벽은 약간의 손질을 한 뒤, 마면과 흡사한 산성 부속 시설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 곳을 평대라고 부르고 있다. 이 평대는 산성의 제일 높은 곳으로 이 곳에 오르면 산성 안팎의 수십리를 조망할 수 있다. 산성의 腰墻 중간에 옹문이 하나 있고 동쪽으로 200m 떨어진 산골짜기 입구에도 문이 하나 있는데 지금은 파괴된 곳이 12m정도나 되도록 심하게 파괴되어 있는데 그 실제 너비는 상세히 알지 못하고 있다. 문 근처에는 배수구가 하나 있다. 이 문들은 산성을 드나드는 교통 요충지로서 腰墻의 길이는 800m에 이르고 있다. 남쪽 성벽은 산세를 따라 축조되어 있는데 서남에서 동북쪽으로 향해 있다. 지세가 복잡하고 변화가 심하고 산성의 성벽은 산세를 따라 구불어져 아주 불규칙한 모양을 하고 있다. 남쪽 성벽의 동서 양 끝에는 높고 큰 마면과 흡사한 평대 건축물이 세워져 있다. 산성 남쪽 지세는 비교적 넓고 평평하여 지금은 평탄한 산 길이 산성까지 바로 연결되어 있다. 산성 남부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남쪽 성벽 외곽에 또 다른 이중 성벽이 세워져 있고 그 바깥에는 또 산성을 보호하는 구덩이를 파놓았다. 이 밖에도 남쪽 성벽의 동, , 북 세 면의 성벽 밖은 산세가 그다지 험준하지 않아서 누구나 쉽게 올라올 수 있어서 이 곳에도 차단벽을 쌓아 올렸다. 腰墻 옹문 서쪽 남부에 작은 네모꼴 토성이 있는데 문은 없고 둘레가 약 100m에 이른다. 현지 사람들은 이 곳을 고려 감옥[高麗牢]이라고 부른다. 산성의 腰城 북쪽 성 동부의 목단강에 접한 곳에서 9개의 인공으로 쌓은 돌무지를 발견했는데 그 돌의 크기와 무게가 기본적으로 같았고 그 돌 재료는 대부분 鵝卵石과 현무암으로 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성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攂石무기라고 추측하고 있는데 우리는 돌무지무덤 혹은 봉화대와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추측한다. 하지만 아직 모를 일이다. 이후 고고발굴에서 상세히 밝혀지리라 기대한다.

산성 북벽의 강에 접한 부분 중 3군데에서 집중적인 둥근 흙구덩이를 발견하였는데 일반적으로 34개가 한 조를 이루어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다. 흙구덩이의 직경은 약 34m인데 혈거갱으로 추측된다.

腰城 남쪽의 성벽 중에는 3개의 오랜 우물이 남북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지금은 모두 돌멩이로 채워져 다 못쓰게 되었다. 모든 산성의 성벽에는 마면시설과 유사한 평대가 15개 세워져 있다.

산성 내에서는 돌절구, 만두 모양의 석기, 수동식 맷돌, 포무늬가 있는 회색기와, 잉어 모양의 작두 등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영안현지에 따르면 이 성에서 天泰연호를 새긴 동하국 관인이 출토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성을 東夏國이 세운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고성의 형태와 건축물의 특징을 볼 때 우리는 이 성의 건축 연대를 동하국보다 이르다고 보고 있다. 발해 초기의 산성이 요, , 동하 등 시기를 거쳐오면서 계속 사용되면서 몇 차례의 수리와 개조를 통해 성이 변화되어 다양하고 복잡하게 되었으리라 추측된다.

 

8. 鏡泊湖 渤海 重脣河 山城

 

重脣河산성은 지금의 경박호 북쪽 서안 중순하 기슭의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산성은 하천때문에 이름이 붙었다(현지 사람들에 따르면 하천에서 重脣魚 혹은 蟲蟲魚가 있기 때문에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동북쪽으로 경박호 발전소와 6km 떨어지고 북쪽으로 경박호 강둑과 2.5km 떨어져 있는데 경박호 산장과는 호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다. 중순하는 산성아래에서 경박호에 흘러든다. 산성은 산세에 따라 세워졌는데 성벽은 산능선 위에 축조되어 있다. 모든 산성은 두 산 사이 키 모양의 산체내에 적당하게 자리잡고 있다.

산성의 평면은 불규칙적인 형태를 이루었고 성의 둘레는 약 3000m이다. 산성의 최고 지점은 동북과 서남쪽의 두 산봉우리의 꼭대기이다. 산성은 동남쪽이 경박호의 호수면이 쑥 들어간 부분에 접하여 있어 여기로부터 동쪽으로 나란히 100m 떨어진 작은 반도가 호수를 향하고 있어 두 갈래의 자연적인 차단벽이 형성되었다. 산성의 동부는 깍아지른 절벽으로 험한 장애가 되어 따로 성벽을 쌓지 않았고, 산성의 북쪽은 비교적 넓은 호수면이다. 산성 안에는 사람이 다니는 길이 서북에서 동남의 협곡을 향해 뻗어 있다.

산성 성벽을 쌓은 방법은 대체로 3가지이다. 한가지는 돌과 흙을 섞어 쌓은 것이고, 둘째로는 돌로 쌓아올린 것이고, 셋째는 돌을 성벽의 바깥에 붙여 올린 것이다. 산성 성벽의 내측과 성벽 중심은 작은 돌로 혼합하여 쌓아 올린 것이다.

산성의 성벽위에는 세 곳의 성문 유지가 있다. 하나는 산성의 서남문인데 그 문 흔적은 3.2m이고, 서남문 밖에 3갈래의 성벽이 있는데 차단벽이라고도 부른다. 분명히 이것은 산성의 방어능력을 높이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다. 성벽 외측과 성문 遺址사이에 馬道가 통하고 있다.

두번째는 산성의 북문으로 북쪽의 동쪽 끝에 있는데 너비가 3m쯤 된다. 이 문은 바로 산성 내 협곡의 북쪽 출구에 있다. 이 곳은 산성 내에서 제일 넓고 평탄한 지대이고 성문 부근에는 배수시설이 있다.

세번째는 산성의 동남문 유지로 동쪽 벽의 남쪽 끝, 고성 내 협곡 동남에 있는 골짜기 입구에 위치해 있어 바로 호수의 만곡부를 마주하면서 호수면에 임해 있다. 동남문의 너비는 약 3.5m이고, 성문 외측에는 한 갈래의 통로가 호수와 연결되어 있다.

산성의 북문과 동남문이 남북으로 관통되어 있어 서로 호응하고 있다. 산성내의 지세가 비교적 가파르기 때문에 산성내외의 연계와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산성 성벽 내외에 모두 평탄한 馬道가 닦여져 있다. 이외 산성 북부에 두 곳의 인공으로 깎아 내린 산 언덕이 있는데 그 위에 마면과 흡사한 평대 유지가 있다. 산성 내 지표면에는 다량의 정연한 돌이 배열되어 있다. 산성 성벽의 건축 특징이 고구려시대 성을 쌓은 특징과 아주 비슷하다는 점을 보면 이 성은 발해초기에 쌓은 것으로 추측된다. 산성의 정확한 연대는 아직 알 수 없고 앞으로의 지속적인 조사와 연구가 기대된다.

 

9. 海林縣 境內에서 발견된 邊牆

 

해림현 경내에서 발견된 邊牆으로 일명 牧丹江邊牆이라고 한다.

목단강시 문물관리참의 조사에 따르면 이 변장은 동쪽으로는 목단강시 시구역 교외의 北安鄕 江西屯 西溝 북산의 주봉에서 시작된 것인데 여기가 바로 장광재령 동쪽의 산지가 목단강 왼쪽 기슭에 접한 지대이다. 변장이 여기에서 서북쪽으로 장광재령 동쪽의 산능선을 타고 산봉우리 사이를 구불구불 뻗어 있다. 변장이 통과하는 산봉우리는 新豊南嶺, 哈蟆塘砬子, 岱王砬子, 二人石南嶺이 있고, 제일 마지막으로 해발 740m가 되는 西大砬子 북쪽 비탈에서 끝난다. 변장은 해발 400700m 사이의 산봉우리를 오르내리는데 그 총 길이는 50km가 된다. 변장의 벽체는 대개 그 자리에서 재료를 채취한 것이고 산능선에는 대체로 토축벽에 석축벽을 겸한 것이며 골짜기의 것은 대개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것이며 또한 차단벽이 쌓여져 있다. 변장의 벽체에는 여러 곳에 북쪽으로 뻗은 돌로 만든 평대 건축물이 있는데 이런 평대 건축물은 대개 산을 깎은 후 돌을 쌓아 만든 것이다.

변장의 안쪽(남쪽)에는 많은 곳에 혈거갱이 발견되었다.

현재 학계에서 이 변장은 발해가 흑수말갈을 방어하기 위하여 쌓은 것이라고 대부분 인정하고 있다. 아울러 시기도 발해 초기로 인정하고 있다.

 

10. 鏡泊湖에서 발견된 邊墻

 

경박호에서 발견된 邊牆은 경박호 오른쪽 기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鏡泊湖邊牆이라고 부르고 있다. 경박호 변장의 서쪽 기점은 城墻砬子 산성의 맞은편 小孤山 부근의 경박호 주변이다. 여기에는 호수에 가까운 산과 호수면이 만나는 곳에 아직도 한 무더기의 남은 돌들이 있는데 호수 주변의 성벽일 것이다.

변장은 경박호 동쪽으로 老爺嶺의 험산준령으로 들어가 노야령과 哈爾巴嶺이 만나는 해발 700m가 되는 평탄한 산꼭대기에서 끝난다. 그 총길이로는 5000m가 되고 동쪽으로는 馬蓮河嘎呀河의 분수령에 접해 있다. 馬蓮河는 남쪽으로부터 북쪽으로 흘러 지금의 발해진 즉 발해 상경성 부근에서 목단강에 흘러 들고 嘎呀河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지금의 圖門市 布爾合通河와 서로 합친 후 도문강으로 흘러든다. 취재조사 중 현지 사람들의 소개에 따르면 변장이 남쪽으로 향한 南湖頭 부근에도 유사한 장성 혹은 변장이 있다고 한다. 영안현지에는 이 고성에 올라서면 호수의 남쪽 기슭이 바라다 보이며, 邊牆의 한 갈래가 있는데 그 높이는 5으로 연길까지 뻗어 있는데 몇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고 기재되어 있다. 그 중에서 연길까지 이르렀다는 기재가 매우 흥미롭다. 연길지구의 哈爾巴嶺위에서도 장성 유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동서 길이가 무려 100km나 된다. 경박호 변장이 연길 장성과 연계되어 있는지 아닌지는 이 구간의 산이 너무 험준하여 아직 조사를 진행하지 못한 형편이라 알 수 없다.

변장은 흙과 돌을 섞어 만든 것인데, 서쪽은 대개 흙으로 되어 있고 동쪽은 대개 돌로 쌓은 것과 흙으로 쌓은 것이 겸하여 있다. 변장의 외측(즉 북측)은 마면과 흡사한 평대 건축이 많이 축조되어 있고, 돌출된 마면은 그 사이의 간격이 5080m 정도이다. 분명한 것은 경박호 변장과 해림경내의 변장, 연길 경내의 변장의 방어 방향은 모두 한 방향이라는 점이다. 즉 모두 북방을 방어한 것이다.

 

. 흑룡강 발해 산성의 고구려 산성 문화의 전형적인 특징

 

기존의 연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고구려 산성은 주로 장백산 산지를 중심으로 하는 주변 산지에 분포되어 있는데 남쪽으로는 요동반도, 북쪽으로는 哈爾巴嶺, 동쪽으로는 조선 반도의 북부 연해, 서쪽으로는 요동평야의 동부 산지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광활한 구역내의 고구려 산성은 또 대부분 강 부근의 수륙 요충지, 산이 높고 나무가 많아 방어하기 쉽고 공격이 어려운 깊은 산 협곡 요충지에 세워져 있다.

고구려 산성이 분포된 구역, 밀도를 분석하면 그 산성의 주요한 분포구는 대개 아래의 몇 개 구역이다. 첫째 요녕성의 淸原, 新賓, 桓仁현의 산지, 둘째 길림성의 집안시 부근의 산지. 셋째 요녕성 요동반도의 북쪽 그리고 바다에 가까운 산지, 넷째 길림성 통화 부근의 산지, 다섯째 길림성의 연길훈춘시의 산지, 여섯째 지금 조선반도의 북부 평양 부근이다.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상술한 흑룡강지구에서 발견된 발해 산성은 고구려가 험요한 지세를 택하여 산성을 쌓은 특징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즉 강, 산골짜기, 협곡에 가까운 수륙 요충지를 선택하여 산과 물의 천험을 이용하여 산성을 쌓은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발해 산성은 모두 고구려의 이런 특징을 지니고 있다. 만약 우리가 고구려 산성의 형태와 구조적 특징, 그리고 성벽 건축 구조의 특징을 비교해 보면 흑룡강성의 발해 산성은 전형적인 고구려 산성의 특징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고구려 산성의 형태와 구조의 주요한 특징은 여섯 가지로 나누어진다.

 

1. 고구려 산성의 형태와 구조

其一: 簸箕形山城

이런 유형의 고성은 주로 선택된 지형을 관찰함으로써 얻어낸 경험적 결론이다. 그 주요 특징은 산성의 성벽에 환형에 가까운 산등성이를 따라 서로 끌어안은 기세를 이룬다는 것이다. 산성의 삼면은 산봉우리가 서 있는 병풍같은 산등성이에 둘러싸였는데 가운데 산봉우리가 일반적으로 산성에서 제일 높고 좌우 양측의 산등성이는 점차 낮아진다. 세 봉우리가 솟은데는 모두 산구에 향해 기울어 키 모양의 산성 형태를 이룬다. 산성 내에는 깊은 골짜기와 넓은 땅이 있는데 전체적으로 산성의 형태는 파기바닥 모양을 이룬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형의 산성을 栲栳形산성이라 이름지었는데 왜 그렇게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사실 파기형 산성은 고구려 산성 중에서 가장 전형적인 특징의 하나인데 장백산 산계중에 이런 지형이 많다보니 파기형 산성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대, 소 흥안령의 산계 중에는 이런 유형의 지형은 아주 드물게 보인다.

 

其二: :築斷山谷式 山城

이른바 築斷山谷式 산성은 실제 골짜기를 성으로 만든 것이다. 산성의 위치는 양측에 바로 오르기 힘든 고산 준령이고, 중간은 깊고 좁은 골짜기로 되어 있는 곳을 선택하였다. 이런 산성은 양측의 높은 산을 장벽으로 골짜기와 협곡의 양쪽 산 입구에 견고한 돌벽을 쌓아 측면의 산끝(산자락)을 막아 하나의 封閉式 山谷城을 형성하는 것으로 이른바 이런 유형의 고성은 지세에 의해 정해졌는데 이 때문에 그 규모가 비교적 크다.

 

其三: 一面坡式

이른바 일면파식은 한 쪽이 비탈진 산지형세를 선택하여 높은 산의 가파른 절벽을 장벽으로 이용하고 그 외 삼면은 산비탈의 경사를 따라 담을 쌓아 연결하는 것이다. 산성내의 지세는 가파른 곳에서부터 삼면평환한 방향으로 기울었고 성문은 산비탈아래의 골짜기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데 물 빼는 구멍도 함께 설치되어 있다.

 

其四: 連環式 山城

이런 산성은 주로 두 산봉우리가 이웃하여 있는 지세를 이용하여 산의 지세를 따라 성벽으로 두 산봉우리를 둘러 쌓은 것이다. 좌우가 연결되어 두 산이 하나로 되게 하였는데 굽어보면 마치 肺葉 같아서 어떤 사람들은 肺葉形山城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가장 전형적인 산성이 길림성 유하시의 나통산 산성이다.

 

其五: 多角形 山城

이 유형의 산성의 주요 특징으로는 일정하지 않은 산성 성벽이 튀어 나온 큰 모퉁이와 돌출한 산등성이에 산성의 주성 성벽에 기대어 튀어나온 모퉁이와 산등성이에 다시 작은 성을 쌓아 중앙 대성 외에 또 몇 개의 성을 이루어 대성의 방어 능력을 증강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요녕성 무순시의 고이산 산성이 바로 이런 산성에 속한다.

 

其六: 不規則形山城

이른바 불규칙 산성은 완전히 산등성이의 지세에 따라 산성의 성벽을 쌓은 것이다. 이런 산성의 모양은 실제상 바로 산등성이의 모양이다. 산성은 일정한 모양이 없고 대개 불규칙한 모양인데 이런 산성이 비교적 많다.

고구려 산성의 형태와 구조는 대개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고구려 산성의 형태와 구조의 특징 외에도 산성의 성벽 구조와 산성의 배치에서도 아주 선명한 특색이 있다.

 

2. 고구려 산성의 성벽구조와 벽체재료

 

첫째, 돌로 쌓은 것으로 여기에서도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성 외벽에 비교적 일정한 돌을 쌓은 것으로 석재는 네모형, 장방형 혹은 쐐기꼴 돌이다. 둘째는 성벽의 외부를 일정한돌을 쌓아 만든 것인데 돌은 들여쌓기를 하여 계단모양을 이루었다. 성벽의 내부는 넓적돌로 층층이 엇갈리게 쌓아 올렸고 틈사이는 작은 돌로 메우고 있다

둘째, 불규칙적인 돌을 엇갈려 쌓아 올린 것인데 이런 돌담은 일반적으로 산등사이의 틈에 쌓아 올린 것이다.

셋째, 흙과 돌을 섞어 쌓아 올린 것인데 돌을 기초로 벽 양측에 일정한 크기의 돌을 쌓고 중간에는 산 흙 혹은 돌 부스러기로 채워 넣은 것이다.

넷째, 비교적 큰 돌부스러기로 한 줄로 돌벽을 쌓은 후 그 위에 흙을 올려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속칭 包骨牆이라는데 실은 흙이 돌을 싼 것이다.

다섯째, 흙으로 쌓은 것인데 대개는 흙을 틀에 넣어 다져서 쌓는 것을 채용하였다. 토층사이에 돌부스러기와 기와 등을 넣어 다져서 성벽을 더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여섯째 돌, , 나무들을 섞어 쌓은 것인데 돌을 쌓아 기초를 하고 나무를 옆으로 배열하여 위에 다시 흙을 채워 넣으면서 한층 한층 쌓는 것인데 아주 견고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볼 때 고구려 산성의 성벽을 쌓을 때 구조와 재료는 일반적으로 다종형식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산성에 돌로 쌓은 성벽이 있는가 하면 흙과 돌을 섞은 것, 포골벽, 납작돌벽 등 여러 가지 구조의 성벽이 있다.

일곱째, 이 외 고구려 산성은 벽체에 나무, 퇴석 구멍이 있고 벽에 쌓은 성가퀴와 벽체 바깥의 평대 등 성벽의 보조시설을 돌출시켰다. 이런 평대는 마면과 흡사한데 대개는 산을 정리한 후 표면에 돌을 쌓아 올린 것이다.

여덟째, 산성의 성문은 보통 산성의 골짜기 입구에 세워져 있고 성문 바깥쪽에 대부분 돌려쌓은 돌 담벽이 세워져 있는데 차단벽(攔馬牆)이라고 한다. 분명히 이것은 성문의 방어 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증설한 것이다. 성문의 구조는 내외가 다른 옹문형식을 취하였다. 성문이 있는 곳은 자주 산성 안의 山谷 출구로 성문은 또한 산 속의 물을 빼는 洩水口이기도 하다. 설수구는 일반적으로 돌로 쌓았다.

 

3. 고구려 산성내의 구성배치 특색

첫째, 고구려 산성 내에는 수량이 다른 저수지가 있는데 이런 저수지는 산성의 대소 규모에 따라 정한 것이다. 저수지는 산성 안의 제일 낮은 곳에 있어 산의 샘물과 기타 산에서 나오는 물을 저장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당연히 고구려 산성은 샘물이 아주 풍부한 산꼭대기에 세운 것이 많다. 장백산 산맥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산성을 세우는데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을 제공했는데 바로 특별히 풍부한 샘물이 그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고구려 산성에서 샘 우물을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풍부한 장백산 지구의 생활 경험을 갖고 있었으며 산 속의 지하수와 피복, 동물, 산의 구조, 계절의 변화에 대한 광범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산의 샘물의 깨끗함과 충족한 수량을 유지하기 위하여 일정한 돌을 저수지의 밑에 깔고 돌 밑에는 두꺼운 모래층을 깔아놓았다. 그 다음 돌로 저수지를 정방형 혹은 장방형으로 벽을 만들어 놓았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龍潭이다.

둘째, 고구려 산성 내에는 저수지 외에 또 양식을 저장하는 창고시설이 세워져 있는데 사람들로부터 旱牢라고 하는 것으로 오해 받는다. 창고를 짓는 방법은 저수지와 기본적으로 비슷한데 형태와 구조는 원형이며 그 깊이는 저수지에 비해 더 깊고 위치는 일반적으로 산성의 높은 곳에 지어져 있다.

셋째, 고구려 산성 내에는 하나 혹은 몇 개의 전망대가 있는데 속어에 이르기를 點將臺라고 한다. 전망대의 위치는 보통 산성 내 혹 성벽이 있는 높은 곳에 있다. 전망대를 짓는 방식은 먼저 산봉우리를 평평하게 깎아낸 후 돌로 바닥을 쌓고, 다시 흙과 돌을 섞어 다져서 지은 것이다.

넷째, 고구려 산성 성벽 내외 양측은 일반적으로 깎은 산체를 이용하여 성을 도는 길이 닦아져 있는데 어떤 것은 안쪽에 있고 어떤 것은 바깥쪽에 설치되어 있다.

다섯째, 고구려 산성 바깥쪽의 비탈진 곳에는 보통 돌로 만든 차단벽(攔馬牆)이 세워져 있다. 이른바 차단벽(攔馬牆)은 크기와 길이가 다른 주로 산골짜기로의 진공을 막는 군사 방어벽체이다. 이런 돌벽은 보통 산성의 골짜기 가까운 곳에 세워져 있다.

여섯째 고구려 산성에는 보통 성외성과 성외대가 있다. 이른바 성외성은 실제 바로 산을 끼고 한 성을 보호하는 시설인데 산성 바깥의 돌출한 산비탈에 세워졌다. 형태는 대형 각루와 비슷하다. 성외대는 보통 성벽에 주위 골짜기 가까운 地段에 있어 전망대의 기능도 갖고 있고 방어 기능도 갖고 있다.

일곱째, 고구려 산성의 翼牆, 이른바 翼牆은 산성 성벽의 바깥쪽 그리고 양측의 산능선에 또 하나의 성벽을 쌓아 산성의 성벽과 연결되어 마치 두 날개와 같이 만든 것이다. 그 목적은 산성 내외 뿐만 아니라 바깥 비탈의 아래 위 교통을 제어하기 위한 것이다.

여덟째, 고구려 산성 벽에는 또 크기가 다른 원형의 혈거갱유지가 발견되는데 작은 것은 직경이 3m이고 어떤 것은 산성 성벽의 위에 분포되어 있다. 큰 것은 직경이 약 10m가 되고 대개 성내의 지세가 높고 성벽에 접근한 산등성이에 분포되어 있다. 혈거갱이 집중된 것이 열 몇 개씩 되는 것도 있다.

아홉째, 고구려 산성 안에는 대형의 큰 샘우물이 있는데 제일 큰 우물의 직경은 4m이고 제일 작은 것은 직경이 1m 내외가 된다. 우물은 정교한 돌로 벽과 우물대를 만들었는데 이것 또한 고구려 산성 중에 없어서는 안될 시설이다.

위에서 서술한 흑룡강 발해 산성과 고구려 산성의 비교에서 우리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것은 흑룡강 지구에서 발견된 발해 산성의 형태와 구조의 특징과 지형 선택의 특징, 성벽 구조와 성벽에서 채용한 건축 재료 그리고 산성 안의 건축 배치와 주요한 건축구조 내지 산성을 설치한 군사 방어사상은 기본적으로 고구려 산성의 건축 구조와 설립 목적을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번 더 추측할 수 있는데 발해왕국의 상층 사회, 특히 군사 지휘권을 갖고 있는 장군은 전략 전술적 사고에 있어서 고구려 산성의 문화역사적 배경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추었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발해국을 건립한 속말말갈인이 줄곧 고구려지도에 속하여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고 할 수 있고, 또 어떤 이는 발해 왕국의 정치와 군사의 지도층에 고구려가 망한 후 남은 신하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밖에도 발해 왕국 중하층에 아마 적지 않은 고구려 산성건축의 기술진들이 있어서 산성 건축에 필요한 여러가지 숙련된 기술의 장인들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또 고구려가 멸망한 기원 668년 발해 왕국이 건립된 기원 698년 사이에는 30년의 시간차 밖에 안된다. 때문에 7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고구려문화가 30년 내에 한꺼번에 그림자도 없이 소실될 수는 없다. 어느 각도로 보든지 고구려문화가 발해왕국에 미친 영향은 매우 깊었다. 산성 문화의 특징을 관찰해 보더라도 발해 왕국의 산성 문화는 고구려 산성 문화를 계승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우선 고구려와 발해왕국의 산성의 형태적 특징에서 보면 흑룡강에서 발견되어 발해산성으로 인정된 것은 대개는 파기형이고 연환식산성, 축단식산성, 일면파식산성과 불규칙식 산성이 겸하여 있다. 이런 형태의 산성은 모두 고구려사람에게 익숙한 군사방어능력이 있는 산성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흑룡강에서 발견된 이런 군사방어성질을 갖춘 발해산성은 대부분 발해 상경 용천부의 북부와 동부 및 동북부의 산지와 강 골짜기 사이 交通요지를 수비하는 산 끝에 있다는 것이다. 현재까지의 조사자료에 의하면 이런 발해 산성의 북쪽계선은 지금의 임구현의 鳥斯渾河 하구에 이르고 동북변계는 지금의 鷄東市의 목릉하 하곡 평원과 산지의 결합부에 이른다. 여기서부터 북쪽과 동북쪽은 송화강 연안의 淺山區 지대이고 삼강 평원과 흥개평원 사이를 횡단하는 한 갈래의 산맥이 있는데 바로 完達산록이다. 완달산지에는 고구려 산성과 같은 산성을 세울 만한 곳이 아주 적으므로 지금까지의 이 지역에서 고구려 산성의 특징을 지닌 산성을 발견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완달산록과 삼강평원, 흥개 평원에 인접한 淺山 지구에서는 고구려 산성문화유형과는 다른 유형의 산성을 발견하였다. 이런 산성은 대체로 饅頭형의 낮은 산자락 위에 세워져 있고 그 수량이 많이 있으며 높은 성벽이 없고 돌덩이로 쌓은 성벽 건축을 보기 힘들다. 이런 고성은 발해 산성과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다음으로 산성의 성벽구조와 성벽의 건축재료를 볼 때 흑룡강에서 발견된 발해 산성의 벽체구조와 성벽의 건축재료는 기본적으로 고구려의 산성 건축 방법을 이용했다. 예를 들면 성장랍자 산성의 돌로 쌓은 성벽, 홍석랍자산성의 포골담. 과회산산성의 불규칙적인 돌덩이를 엇갈려 올려 만든 벽체 및 다른 산성에서 흙과 돌을 섞어 쌓은 벽체 등은 모두 전형적인 고구려 산성의 벽체 구조이다. 대형 산성 벽체 내외에 세운 성을 따라 세워진 환형 馬道, 산성 건축의 주요한 재료가 돌덩이, 돌막대, 돌조각. 산흙, 원목이 위주인 것도 이 점을 설명한다. 그 돌재료를 선택 가공하는 방법과 쌓아 올리는 기술은 주로 두 가지가 있다. 1. 인공적으로 규칙에 따라 동일한 규격의 돌덩이를 다듬고 말려서 쌓는 방법을 이용하는데 벽체의 겉모양이 높고 웅장하게 보이며 견고하고 오랜 시간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성벽벽체의 대표적인 것은 성장랍자산성이다.

2. 현지에서 재료를 선택하여 일차적으로 돌덩이와 돌막대로 가공한다. 이런 돌재료는 일반적으로 석장에서 깎아내린 후 다시 가공하지 않으며 산성에 날라온 후 직접 벽체로 쌓아 올린다. 건축방법은 일반적으로 석재를 말려서 건축하는 법과 진흙을 밑에 까는 법을 사용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은 과회산산성과 오배산산성이다.

이외 천연적인 절벽을 성벽으로 이용하는 것은 고구려와 발해 산성에서 가장 보편적인 현상의 하나이다. 발해인은 고구려인과 마찬가지로 산성의 건축지점을 선택할 때 병풍같아 보이는 거대한 산등성이와 현애절벽을 찾아 천연장벽으로 삼는데, 마치 성벽과 같아 보인다. 어떤 사람은 이런 천연절벽을 峭壁牆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위에서 서술한 흑룡강 발해 산성의 성벽 구조의 특색은 고구려 산성의 건축 특색과 부합된다.

또 다음에 산성내의 분포와 구조를 볼 때 흑룡강에서 발견된 발해 산성에서는 돌덩이로 만들어진 물저장호수 및 돌덩이로 쌓은 저장실, 흙과 돌로 섞어 만든 망대, 담벽위에 마면과 흡사한 돌평대 건축, 돌로 세운 우물, 옹문 구조가 산골짜기의 입구쪽에 건축된 것, 성문 부근에 돌덩이로 된 산물 배설구 등은 모두 고구려산성의 기본 특징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산성내의 평탄하고 높은 곳에는 대개 하나의 정방형의 소형 성이 있으며 둘레의 길이가 약 100m이고 흙으로 되어 있으며 문은 없다는 점이다. 이런 소형의 방성의 용도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후의 연구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설명해야 할 바는 길림지구에서 발견된 고구려 때 건축되고 발해 시기까지 사용되던 산성 및 요녕성의 고구려 산성에서 모두 이런 소형 방성을 발견했으며 둘레의 길이가 모두 100m를 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산성중에 또 소형 방성을 건축하는 방식은 아마도 고구려 산성의 또 하나의 특징인 것 같다.

이외 흑룡강 발해 산성에서 산성의 성문 바깥쪽 및 느슨한 산비탈에 차단벽, 성외성, 날개벽, 거주굴혈, 강가에 깔려 있는 작은 돌계단 등이 있었음을 발견하였다. 발해의 산성은 고구려 산성과 마찬가지로 샘물과 물이 풍부한 산이 많고 봉우리가 겹쳐 솟아오른 곳을 선택했으며 산성 위에는 반드시 산과 강, 절벽 등 험요한 곳이 있어 수비하기가 쉽고 공략하기가 어려운 장기적으로 지킬 수 있는 잇점이 있다.

그 외 흑룡강에서 발견한 발해 산성은 거의 모두 흑룡강지구 동부에서 발견한 두 갈래의 시대가 분명한 성벽 주위에 분포되어 있으며 또 발해 상경 용천부 소재지의 북쪽 혹은 동북쪽에 널려 있다. 주지하다시피 발해 건국이후 당나라 군대 외에 가장 주요한 적수는 바로 북방 혹은 동북방의 흑수말갈이었다. 발해 왕국은 뒤의 근심을 덜기 위하여 힘을 다해 북벌을 했고 끝내는 흑수말갈을 항복시켜 신하로 만들고 발해는 그 세력을 더해 흑룡강 하류일대로 밀어내었다. (상세한 것은 졸작 黑水靺鞨分布를 보라.北方文物19971기에 실렸음) 해림현 경내와 경박호 부근의 성벽 방어 방향은 모두 북부 및 동북부쪽이며 만약 이 두 성벽과 발해의 산성을 하나로 합쳐 생각한다면 이건 분명히 발해 북부의 영토변계가 끊임없이 북으로 발전하여 발생한 움직임과 변화이다. 만약 우리가 또 연변 지구와 훈춘 지구의 장성과 성벽도 고려한다면 발해 북부의 변계의 변화는 흑수말갈에 대한 정복을 따라 끊임없이 북부로 밀고 나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지금의 연길, 훈춘, 해림, 경박호에서 발견된 장성과 성벽은 발해 초기에 흑수말갈을 방어하기 위하여 건축한 것으로 가늠된다. 발해 상경성의 북부와 동북부 지구에는 대체로 발해의 산성이 있으며 발해의 평원성은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당시의 군사활동이 빈번했음을 말해준다.

 

결 어

 

이미 발표된 고구려 산성에 관한 연구성과 중 흑룡강 지구 발해 산성이 갖고 있는 고구려 산성의 문화 특징에 대한 연구는 거의 홀시되어 왔다. 흑룡강의 발해사를 연구하는 학자도 흑룡강의 발해 산성을 소개할 때 발해 산성과 고구려 산성에 대한 필요한 비교연구는 대체로 언급하지 않고 발해 시기의 산성의 특징 설명에만 국한되어 왔다. 따라서 학계에는 고구려 산성 문화는 반드시 지금의 요녕, 길림 아니면 북한의 평양을 고정된 힌계선으로, 흑룡강의 발해 산성 문화중의 고구려 문화 특징에 대해서는 무시해 버리는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흑룡강의 발해 산성 문화를 한정시켜 그것을 다만 그 지역의 특유한 산성문화로 연구 설명하지만 흑룡강 발해 산성의 문화 특색이 바로 고구려 산성 문화를 이어받아 형성된 것인 줄 모르고 있다.

긴 시간동안 사람들은 줄곧 발해 문화중의 고구려 문화요소를 무시한 결과 이런 그릇된 관점이 고고학계 뿐 아니라 역사학계에까지 그 영향이 미치어 흑룡강 구역의 발해 산성은 일찍부터 발견되기는 하였으나 깊이 연구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흑룡강 지구 발해 산성이 갖고 있는 고구려 산성 문화에 대한 연구는 더 넓은 시공간 범위 속에서 고구려 산성 문화의 빈자리를 메꾸어 줄뿐 만 아니라 우리가 고구려 문화가 발해 왕국에 도대체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를 알아내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단지 발해 왕국의 역대 무덤속에만 고구려 문화 특징을 찾아 헤매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필자가 앞 사람이 연구한 기초 위에서 근 20여년 동안 고구려 및 발해 산성을 실지 답사한 자료를 이용하여 발해 산성이 갖고 있는 고구려 문화 특징을 비교 연구하였는데 여기에는 다른 하나의 주요한 목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기원 3세기부터 6세기까지의 고구려 문화와 그 북부의 물길문화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대하고 해석해야 할 것인가 하는 답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강조할 것은 본문에서 흑룡강이라는 개념을 이용하고 흑룡강성이라고 하거나 흑룡강유역이라 쓰지 않은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실제에 가깝고 더 넓은 범위 안에서 흑룡강이 지역 개념 혹은 지리 행정 개념으로 이해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지금까지 필자가 중국경내 흑룡강성의 행정구획범위에서 발견한 발해 고성이 나타내고 있는 고구려 문화 특징으로 설명을 더하고 이것으로 길림과 요녕 지구 이외에 고구려 문화 특징을 띤 산성을 구별했으며 이는 또 고구려문화 특징의 북쪽계선을 찾는데 새로운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지적할 만한 것은 흑룡강 유역에 속하는 除額爾古納河, 石勒喀河, 精奇里江 이외 송화강 유역, 눈강 유역, 목단강 유역 및 우수리강 유역 등도 흑룡강 유역에 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목단강 유역과 송화강 유역의 상류는 모두 장백산 지구에서 발원하고 고구려 강성시기에 지배했던 지역에 속한다. 목단강과 이어지는 도문강 유역, 布爾哈通河유역은 일찍이 고구려 5부의 발원지이며 통치했던 지역이다. 布爾哈通河유역이 훗날 발해의 서울로 되어 舊國으로 불린데는 물론 깊은 역사적 원인이 숨겨 있다. 다 알다시피 고구려정권은 건국하여 멸망될 때까지(기원전 37기원 668) 동북아시아 대륙에 700여년의 역사를 휘어잡으며 버티고 서있었다. 그 활동과 가지고 있던 영토와 공간으로 보나, 역사가 지속된 시간으로 보나 고대 고구려 정권이 사실상 오늘날 동북아시아 대륙 각 나라의 역사 영역에 남긴 영향은 매우 깊었으며 절대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멀리 바라보이는 일본마저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깊히 받았거니와 고구려와 인접한 지역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긴 시간동안 국내외학자들은 고구려 중심 지구의 역사와 문화연구(즉 고구려 도성 혹은 도읍, 도성 문명)에 줄곧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19세기부터 시작하여 중국, 일본, 조선, 한국의 고고사학자와 역사연구가들은 고구려 도성 문화의 특징 확인 및 그 문화 중심구역의 각종 지리적 고찰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이들로 하여 고구려 문명의 베일이 20세기 말부터 점차 벗겨지며 학술계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고구려의 건국으로부터 멸망 즉 기원전 37년부터 기원 668년까지는 바로 동아시아 지구 역사와 민족 大動蕩, 大分化, 大變動을 겪던 시기이다. 중원 왕조의 바뀜, 북방 민족의 연이은 궐기, 조선반도와 일본 열도의 역사적 변동 등등이 동아시아 지구의 가장 복잡하고 분열과 혼란의 역사적 화폭을 구성하였다. 고구려 왕조 정권은 바로 이런 특수한 역사환경 속에서 발생으로부터 발전, 번영 다시 정복과 쇠퇴 마침내 멸망으로 나아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현재 학술계에는 고구려 왕조의 형성과 발전의 역사배경에 대한 연구 및 고구려 역사와 문화의 존재가 주변 지대의 여러 민족, 여러 왕권에 준 영향에 대한 연구가 모두 아주 부족하다. 실제로 중국의 동북사를 연구하든, 조선 반도의 역사를 연구하든, 심지어 러시아의 원동사, 일본의 고대사를 연구하든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만은 물리칠 수 없는 것이다.

본문은 다만 흑룡강성에서 발견한 발해 시기의 고성과 아직 역사 연대를 확정하지 못한 고성 속에서 나타난 고구려고성 문화의 특징을 실험삼아 서술했을 뿐이다. 고구려 문화가 말갈, 발해, 여진 등 민족에 끼친 영향력을 탐색하고 펼쳐보이는데 그 뜻을 두었다. 필자가 고구려문화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것은 결코 일부 학자들처럼 문화의 영향력과 문화의 비슷한 점으로 모모 계승국의 주요의거를 삼거나 심지어 형이상학적, 기계적으로 그리고 당대 국가의 정치 음모를 마구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시 말하면 필자는 역사문화가 국가정치주권론을 결정하는 관점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문화의 전파와 수용, 문화의 영향과 계승, 문화의 특색과 소유권은 국가 정치의 강제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고대 고구려의 문화는 마치 오늘의 한자문화와 비슷하다. 한자 문화는 하나의 문화의 특수한 영향력으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수용되었다. 그러나 무릇 한자 문화를 수용한 나라는 도리어 모두 자기 독립적인 국가 주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한자를 사용하는 것은 자기 나라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지 결코 한자 문화의 발원국에 의거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문화특징을 이용하여 국가 주권의 표지로 삼는 방법은 더욱 문화가 역사와 현실 정치에서의 작용을 무한히 확대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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