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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발해연구

고구려를 찾는 내몽골 대장정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2)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18.05.25|조회수164 목록 댓글 0

819() 울란하오터 - 색륜(索倫) - 수목구(樹木溝)

 

5시에 일어나 오늘 일정을 체크하고, 7시에 아침 식사. 운전사가 와서 자기가 아는 운전사의 짚차가 고장이 나서 불가능하다며 역 앞에서 차를 고르자고 한다. 우리는 어제의 빵택시를 타고 역으로 나가기로 했다. 출발하기 전 바로 호텔 윗편에 있는 징기스칸묘를 사진이라도 찍고 가기로 했다. 이곳에서는 가장 중요한 관광지인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징기스칸묘는 한산(罕山)공원 안에 있다. 56의 공원 안에는 여러 가지 위락시설이 되어 있으나 필자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징기스칸묘이다. 진짜 징기스칸묘는 아직도 발견하지 못했다는데 이 묘는 어떤 것일까 하는 관심때문이었다. 그러나 현 선생의 설명을 듣고는 빠쁜 시간을 한가하게 보내는 것보다는 밖에서 들여다 보기만 하기로 하였다. 징기스칸묘는 일본이 제국주의 지배를 할 때 몽고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만든 산물이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징기스칸은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고, 일본인들도 징기스칸은 존경한다는 것을 몽고인들에게 보여주어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해 만든 산물인 것이다. 1940년 건축을 시작하여 해방 1년 전인 194410월에 낙성하였는데, 그 뒤 거의 회손된 것을 1987년에 수리하였다고 한다. 건물은 정전과 양쪽의 편전으로 나뉘는데 정전의 높이가 28m, 편전이 16.2m로 웅장해 문 앞에서도 보인다. 정전 중앙에는 2.8m 짜리 징기스칸 전신 동상이 서있다고 한다.

역 앞에 가서 대흥안령을 넘어갈 차를 골랐다. 마치 옛날 사람들이 마시장에서 타고 갈 말을 고르듯이 우리는 타고 갈 차를 고르는 것이다. 처음에는 장거리이기 때문에 공간이 넓은 봉고같은 승합차를 빌려보려 했으나 마땅치 않아 짚차를 빌리기로 했다. 중국의 짚차를 대변하는 것은 북경시리즈다. 북경121, 북경212, 이런 짚차는 이미 타 본 경험이 있어 그 성능을 잘 안다. 그런데 그 뒤 북경왕이라는 신형이 나왔다고 해서 북경왕(BJ2020S)을 빌리기로 했다. 앞으로 적봉까지 5일간 빌리는데 1000를 기준으로 3000(30만원)을 달라는 것이다. 길림성이나 요령서에 비해 싼 편이다. 1100까지 3000원으로 하고 그 이상을 넘으면 더 주기로 결정. 최종 결정은 운전사와 함께 있던 부인이 한다. 앞으로 5일간 생사고락을 함께할 운전사는 임수로(任修露)라는 중국인으로 인상이 순하고 성실해 보여 마음에 들었다.

 

830, 울란하오터를 떠나서 북쪽으로 향해서 달린다. 역시 빵택시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힘이 있는 말이다. 출발 당시 미터기를 보니 4854. 아직은 새차나 마찬가지다.

30쯤 가니 찰이림진(察爾林鎭)을 지나고 여기서부터 비포장도로가 이어진다. 엄청나게 큰 댐이 보인다. 조아하(洮兒河)를 막아서 쌓은 댐은 총용량이 136500이고, 수력발전소와 양어장, 관광지 등으로 사용되는 다목적댐이다. (중국의 진은 한국의 읍과 같다)을 지나면서부터 울창한 버드나무숲이 끝없이 이어진다. 저수지 주위에 인공으로 조림한 것인데 초원을 달리다 갑자기 숲이 나타나니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지나다 보니 몽고 겔 모양을 따서 화려한 집을 짓고 관광객을 받는 유원지가 호수가에 멀리 보인다.

아주 비싸게 받습니다

현선생이 한 마디 거둔다. 야외에 지어놨어도 값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있다면 시내에서만 자지 말고 하루쯤 이런 곳에서 몽고 음식을 들며 몽고 노래와 춤을 감상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룬(索倫)의 고려성을 찾아

 

숲을 지나자 다시 초원이 계속된다. , 이제부터는 다시 고려성을 찾아야 한다. 1933년 렐리졔프가 처음 찾아서 비교적 자세하게 조사를 하였는데 현지인들이 이 성을 고려성이라고 부른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바로 그 고려성을 찾는 것이 오늘 오전에 할 가장 큰 임무인 것이다.

 

古城遺址의 명칭은 高麗城이라하고 그 뜻은 고려인의 성벽이다. 이 명칭에 대한 영구(永久)적인 표기를 고려하여 현지 주민들의 말을 더 들어보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여기서 20년 동안 살았던 사람도 이런 간단한 문제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기 떼문이다. (K. A. 熱列玆雅科夫 , 王德厚 , 󰡔興安省的考古學資料󰡕 82)

 

고려성의 위치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933109일 우리는 차를 타고 王爺에서 索倫까지의 사이를 답사하였다. 洮兒河 상류에 도착하여(현재의 新白倫鐵道) 종점 1013못 간 지점인 二十家子村索倫 사이에서 古城터 하나를 발견하였다. 索倫으로 들어가는 시골 큰길 가에 古城터가 있었는데, 지금까지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은 뜻밖의 일이다. 우리는 차를 타고 東壁 남단의 낮은 곳을 따라 북쪽 성문을 지나 성터를 가로 질러 갔다.(그림1 참조)

여기서 왕야(王爺)가 울란하오터이니, 렐리지에프는 울란하오터에서 색륜까지의 구간을 답사한 것이다. 발견한 고성터의 위치가 색륜을 거의 다 가서 이십가자촌과 색륜 사이라고 했는데, 문제는 지도에 이십가자촌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교통지도 이정표를 보면 찰이삼진에서 색륜 사이에는 호인향(好仁鄕)이라는 향 소재지 한 곳만 나온다. 이 향에서 색륜까지가 19이니까 여기가 이십가자촌일 가능성이 크다. 불과 60여 년 사이에 지명이 어떻게 이렇게 바뀔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난점이었다. 찰이삼진에서 호인향까지는 59이고 그 사이에는 어차피 물어볼 곳도 많지 않았다. 무조건 호인향까지 가서 물어보는 것이 상책이다.

1005, 출발한지 1시간 반이 넘어서 호인향에 도착했다. 마침 노인정이 있어서 찾아들어갔다. 태어나서부터 그 마을에서만 살았다는 노인이 불청객이지만 무료하던 참이었는지 우리가 한 마디 하면 자기는 두마디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고려성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여기가 옛날에는 이십가자촌이라고 했지

그래도 이런 답만 얻어낸 것도 큰 수확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색륜 사이에 있다는 결론이다. 여러 가지로 노인의 기억을 되살려 봤지만 고려성은 들은 바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자료를 꺼내서 다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주민들 말에 따르면 이곳을 하라껀타이(蛤拉根臺)라고 한다.

 

바로 이거다. 할아버지에게 하라껀타이를 아느냐고 물어보라고 했다.

 

하라껀타이란 동네는 있지

 

그러면 그렇지, 이제야 일이 풀려가지 시작한다. 우리가 길을 묻은 사이에 운전사는 벌써 펑크난 바퀴를 갈아 끼웠다. 호인향 입구로 되돌아가니 조그마한 돌산이 하나 있고, 거기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간다. 그러니까 울란하오터에서 올 때는 우회전을 해야 한다. 험악한 길이라 북경왕조차도 힘겹게 진행한다. 10여분 가니 마을이 나오고 두 갈레길이 나온다. 만두산(饅頭山)이란 마을인데 여기서 왼쪽 길을 따라서 가다 보면 고개를 넘는다. 고개 위에 올라서서 보니 넓은 들판이 나오고 바로 앞에 조아하가 흐른다. 그리고 그 강 왼쪽에 마을이 있는데 바로 하라껀타이다. 찻길이 더 이상 없고 막힌길이니 하라껀타이일 수밖에 없다. 우선 전경을 찍고 마을로 내겨가자 멀리서도 평지성이 분명하다. 드디어 고려성을 찾은 것이다.

 

고려성의 돌절구

 

동남 모서리쪽에 마을로 들어가는 큰 길이 나 있다. 마을로 들어가 첫집에 있는 사람을 불렀더니 나와서 친절하게 응답해 준다.

여기가 고려성입니까?”

그렇습니다. 고려성이라고 합니다. 이 곳에서 돌절구도 나왔습니다.”

46살이라는 신변금(辛邊金)씨는 묻지 않는 말도 해주며, 돌절구 있는 집이 장해량(張海良) 씨 집이라는 것까지 자세하게 가르쳐 준다. 신씨의 말에 따르면 이 마을은 몽고족만 130호 약 500여 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1933년도의 기록에는 사냥꾼이 사는 집이 딱 한 채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 뒤 언제 부터인가 몽고인들이 마을을 이룬 것이다. 동네에 제법 큰 나무들이 서있는 것을 보면 상당히 오래 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1933년의 기록을 보고, 그 뒤 변한 상황만 설명하기로 한다.

 

둘째날, 1010, 索倫에서 돌아올 때 이 고성터를 자세하게 답사하였다. 그러므로 짧은 시간에 이 성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성의 면적을 측정한 것이다.

이 성터는 哈拉河 골짜기 왼쪽 강가에 위치한다. 哈拉河洮兒河가 합쳐지는 곳에서 2 km 떨어진 곳이다. 성터는 기하학모형의 성벽으로 둘러쌓인 장방형이다. 성의 면적은 약 800 × 600m이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벽의 높이는 약 22.5m이며, 성벽 밑변의 넓이는 약 5m이다. 성벽의 구석과 성문 부근에 예전에는 탑루(역자 주: 각루)와 기타 방어시설(역자 주: 옹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곳에서는 벽의 높이와 너비는 다른 곳보다 1.5m나 더 크다. 각 면 성벽에는 모두 대문이 하나씩 있고 ( 그림2에서 보면 동쪽의 벽은 문이 없다) 대문 부근에는 한쪽 성벽의 끝과 마주친 다른 성벽은 구부러진 모양으로 되어있다. 이 시설은 적군들이 성을 직접 공격하는 것을 방지한 것이다 . 적군들이 성안으로 공격해 들어가려면 반드시 구부러진 성벽과 다른 성벽 끝 사이의 휘어진 통로를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옹성). (그림2 참조)

거대한 塔樓와 방어시설 등과 같은 유적 이외에도 작은 유지들도 많이 있다. 대개 古城이란 항상 공격의 대상이기 때문에 방위시설은 아주 신경써서 건설하였다.

성터 서북쪽 구석에 울타리 친 농가가 한 채 있었다. 그 집은 사냥꾼인 커얼친(喀喇泌) 몽고인이 살던 집이다.

지표에서는 엣날 陶器조각이나 이와 비슷한 물건도 전혀 찾지 못했다. 아마 충적층 밑에 파묻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地表層의 흙은 부드럽고, 호수나 강 밑에 자갈이 깔려있는 것처럼 크고 작은 자갈들이 덮여져 있다.

성의 서남쪽에는 또한 거친 회색 화강암으로 제작된 맷돌처럼 생긴 커다란 舍利塔이 하나 발견되었다. 윗부분은 직각형이고, 직각의 맞은편 한 면은 돌출되어 있다. 舍利塔의 아랫 부분은 바로 윗 부분의 모양과 똑 같다. 꼭대기의 가운데부분는 공모양처럼 오목하게 파져있다. 사리탑의 높이는 44Cm, 직각으로 된 각의 길이는 65Cm이고, 튀어나온 면의 길이는 109Cm, 공모양처럼 오목하게 파져있는 부분의 직경은 22Cm, 깊이는 10Cm이다.

고성터에는 성벽 이외에도 성 밖에 해자를 둘러 파 놓았다.

고려성의 옛날과 지금

 

성벽은 비교적 옛날처럼 남아있는 곳도 많지만 특히 동쪽 벽은 회손이 심하다. 성 밖 20여 미터까지 집을 짖고 주거지로 사용하기 때문에 성벽은 무너지고, 일부 파서 집을 지었으며, 치성은 높이를 낮추고 구덩이를 파 겨울철 저장고를 설치한 곳이 많다. 동쪽에 있는 옹성은 흔적을 찾아볼수 없고 앞에서 말했듯이 동남 모서리 부분이 크게 뚫려 동네 한 복판으로 길이 나 있다.

북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고 치성도 7개가 분명하게 남아 있다. 30년대 답사팀이 길인줄 알고 지나쳤다는 곳은 지금도 벽이 허물어져 있지만 안에 집을 짓고 통행을 막아 다닐 수는 없게 되었다. 오히려 서북 모서리쪽 북벽이 크게 뚫려 길이 나 있는데, 처음 들어왔던 동남 모서리 길과 주된 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서쪽 성벽에도 옹성은 없어지고 서남 모서리 부분이 터져 길로 사용되고 있다.

현선생과 운전사는 먼저 돌절구가 있다는 장씨 집으로 가고 서교수와 나는 서벽의 일부를 보고 가려고 했으나 서벽이 모두 개인집의 높은 담을 이루고 있고 설령 담 밑으로 가도 집집마다 높은 흙벽을 쌓아 바로 건너편인데도 갈 길이 없다. 할 수 없이 서남 모서리까지 가자 눈치빠른 운전사가 차를 가지고 그곳 까지 와 주었다. 그만큼 성 안이 넓은 것이다.

돌절구는 장씨 집으로 들어가는 긴 입구 오른쪽 텃밭에 버려져 있었는데 바로 옆에 지금은 쓰지 않은 셈이 있었다. 절구는 52×60이고 높이는 42이다. 이 돌절구가 내몽고에 와서 세 번째이다. 고구려인들이 살았던 성, 그리고 그들이 썼던 돌절구, 그렇다 돌절구란 몽고인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똑같은 돌절구인데 고성촌의 조선족은 돈을 주고 사다가 부엌에서 실제로 사용하고, 제가점둔의 중국인은 밭에다 팽게쳐 놓고, 이곳 몽고족도 한쪽에 버려논 것이다. 조선족은 곡식도 까고 고추도 갈려면 필요하지만 그들의 문화에서는 돌절구가 필요없기 때문이다. 세월은 흘러도 문화는 이렇게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어쨋든 돌절구를 가르쳐 준 신씨가 고맙고, 잘 가지고 있는 장씨집이 고맙다. 장씨집에 가서 시원한 펌프물을 얻어마셔보니 물맛이 기가 막힌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보면 물맛을 보면 그 마을의 인심을 안다고 하지 않았는가! 오이를 5원어치만 따달라고 부탁했더니 딸들이 나가서 한 보따리를 따 준다.

다시 입구로 나와서 기록에 나온 사리탑을 찾았으나 그 자리에는 집들이 들어차 있다. 성밖의 밭 가운데 낮은 둔덕에 있다고 해서 가 보았으나 흙으로 쌓은 것이다. 사리탑은 없어진 것이다. 차로 동쪽 산 언덕으로 올라가 마을을 조감하는 사진을 찍고 1240분 고려성을 떠난다.

나오면서 재보니 호인향까지는 11인데 15분이 걸린다. 이렇게 볼 때 1933년에는 길이 호인에서 고려성을 거쳐 색륜으로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인을 떠나 색륜을 가다 보니 오른쪽에 멀리 조아하(洮兒河)가 보이고 그 뒤로 고려성터가 아스라히 보인다.

 

징기스칸변장(邊墻)을 찾은 뜻은

1330분 색륜에 도착하였다. 기사는 바퀴 펑크난 것 때우러 가고 우리는 식사를 시켜놓고 열심히 징기스칸 변장(邊墻)에 대해서 정보를 수집한다. 오후부터는 징기스칸 변장을 보고 그 변장을 따라 대흥안령 산맥을 넘는 대장정을 시작하기 위해서다. 현선생 말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 색륜에서는 통행증 검사를 해서 통행허가를 받지 않은 사람은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그 제도가 없어졌다고 한다. 대흥안령을 넘어 아리산만 가면 이미 몽고와의 국경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리산이 관광지로 개발되어 될 수 있으면 관광객을 유치하여고 하기 때문에 통행증 같은 것은 없앨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왜 징기스칸 변장을 찾아가는가? 사실 이번 대흥안령을 넘는 대장정은 바로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몇 년전 서영수 교수가 지도 한 장을 보여 주며 대흥안령산맥에 고구려산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뒤 재야사학자로부터 같은 내용의 지도를 입수하였고, 관심을 가지고 보기 시작하자 여러 곳에서 자료들이 모였다.

 

* 󰡔중국분성신도󰡕 丁 一 三 - 대흥안령산맥에 고려성(高麗城)이 표시되어 있고, 임동(林東) 바로 아래 고려성자(高麗城子)가 표시되어 있다.

지도

 

* 󰡔만주국여지도󰡕 - 대흥안령산맥에 고려성(高麗城)이 표시되어 있고, 임동(林東) 바로 아래 고려성자(高麗城子)가 표시되어 있음.

서영수 교수가 동경에서 입수한 󰡔만주국여지도󰡕 영인본에 따르면, 만주지도시리즈 -7, 대일본제국 육지측량부 제작, 소화 8(1933)제작, 소화 14(1939) 수정개판한 것인데 겸광사(謙光社)가 영인한 것이다. 일본의 육지측량부가 제작했다면 상당히 신빙성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지도

 

*국제지학협회, 만주건국10주년기념 󰡔만주제국분성지도󰡕, 소화 17(1942) 발행 - 임동(林東) 바로 아래 고려성자(高麗城子)가 표시되어 있음.

지도

 

* 조선전사의 기록 - 일부 지도들에는 내몽곶치구 소오달맹 파람좌익기(림동현)고려성자가 있었으며 또 그보다 서북쪽에 고려성으로 표식된 장성방위시설이 두어군데 보인다.(󰡔조선전사󰡕 190)

󰡔중국분성신도󰡕 4, 1928년판, 43

󰡔만주국여지도󰡕, 1939년판, 좌하도

 

정말 대흥안령산맥에 고구려산성이 있을까? 만일 이것이 사실로 증명된다면 고구려의 국경이 바뀌는 대단한 사실인 것이다. 언젠가 현지에 가서 확인하겠다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제법 자세한 내몽고 지도를 입수하였는데 만주국여지도에서 고려성이라고 표시한 성벽이 변장유적(邊墻遺迹)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 변장유적은 30년대 논문에서는 징기스칸변장이라고 했고, 요즈음은 금장성(金長城)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변장은 지도에 나왔던 임동 근방의 고려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1000나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만주에는 위에서 언급한 두 개의 장성이 있는데 징기스칸변장이다. 그 가운데 하나의 장성은 흥안북성 워흐어쿠리(沃和庫里)촌 부근에서 시작된다. 根霞 왼쪽 가를 따라 서쪽으로 강어귀까지 가서, 서남쪽으로 틀어 어얼구나강(額爾古納河)이 흐르는 방향으로 가, 만주리 역이 있는 지방까지 오면 강은 동쪽으로 흐르고, 성벽은 대체로 서쪽으로 이어나간다. 끝에 가서 외몽골에서 없어진다.

다른 하나의 징기스칸변장은 한쪽 끝이 누어민강(諾敏河) 가 부근에서 시작, 布西城 (현재의 尼爾基鎭) 북부에서 성벽이 서남쪽으로 이어진다. 징기스칸장성과 碾子山 사이에 있는 철로를 지나면 索倫城에 닿는다. 대체로 흥한령 산맥과 같은 방향으로 이어진다. 성벽은 색륜성 안에서 사라진뒤, 몽고의 다얼한와(達爾漢瓦)에서 다시 나타나서 한 동안 이어지다 다시 사라진다. 다시 몽고 빠이린(拜林)에서 나타났다 다시 林西에서 사라진다. 달라이호(達賚湖) 와 만리장성 북부에서 또 끊어진 성벽이 나타난다. 징기스칸 장성과 끊어진 성벽을 모두 합치면 대략 1000정도가 된다.( B. B. 빠오누어수어푸(包諾索夫) , 胡秀杰 , 징기스칸변장 기초조사, 󰡔흑룡강고고민족자료역문집󰡕, 1, 69)

 

이처럼 변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1933년도의 렐리졔프의 논문이 입수되었는데, 내몽고에 고려성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 울란하오터를 추가하여 여행계획을 짠 것이다. 그 결과 뜻밖에 여러곳에서 고려성을 발견하는 성과를 얻었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징기스칸)변장을 답사할 차례이다. 그런데 현제 우리가 도착한 색륜이 바로 변장이 끝나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변장을 가능한한 많이 답사하여 그 성격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색륜을 찾은 것이다.

 

징기스칸 변장의 실체

 

색륜에서는 비교적 쉽게 변장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변장은 두 군데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두군데를 다 가 보기로 하고 우선 북쪽을 보고 남쪽 변장을 따라 대흥안령을 넘기로 하였다.

색륜 출발이 늦었다 운전사가 타이어 수리하러 갔다 늦었기 때문이다. 북쪽 변장이 있다는 마을은 전합륵문(前合勒門)인데 마을사람들이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250분에 출발하여 북서쪽으로 떠나자 마자 운전사가 헤메기 시작한다. 마차꾼에게 물어 큰 내를 건너서 달리는데 넓은 들판에 길림길이 많은데도 임수로 대원은 신기하게 잘 찾아간다.

얼마를 가자 멀리 성벽이 나타난다. 성벽이 산꼭대기 능선을 따라 이어질 것이라는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 산기슭에 있는 마을 뒷산에 마치 동네 담처럼 길게 이어져 있다. 밭길 사이에 난 농로를 따라 산비탈 마을 앞까지 가자 제법 넓은 냇가가 나온다. 북경왕은 서슴치 않고 내를 건너더니 산비탈 마을 앞까지 올가가 선다. 변장 성벽이 마을 뒤와 연결되어 마치 마을 담장같이 보인다. 빨리 가서 보고 싶은데 마을에서 뒤로 빠지는 길이 없다. 하라껀타이에서도 보았지만 몽고인들은 뒷편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을 철저하게 막아놓은 것이다. 점잖치 못하지만 담을 넘어 성벽으로 갔다.

성벽을 보는 순간 우선 들어오는 느낌이 실망감이다. 지도만 보고 상상할 때는 웅장한 돌성벽을 생각했는데 돌도 아닐 뿐더러 웅장하지도 않다. 두 번째는 왜 이 성을 쌓았을가 하는 커다란 의문이 떠오른다. 흔히 징기스칸 변장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징기스칸이 쌓았다는 것은 아니다. 유목민족인 몽고가 이런 성을 쌓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 다음 나온 설이 징기스칸의 침략을 막기 위해 금나라가 쌓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북쪽을 막기 위해 성을 쌓아야 하는데 이성은 동남쪽을 향해 쌓았으니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감이 잡히지 않는다.

흙으로 쌓은 변장은 이중 성벽이었다. 성벽 안에는 자연히 호()를 이루도록 되어 있는데, 똥쪽 벽이 높고 산쪽인 서남쪽 벽이 낮다. 서북쪽 벽을 따라 가 보니 강가 절벽에서 변장이 끝난다. 마을 뒤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몽고인들의 토템인 돌무지와 큰 나무가 한 그로 서 있다. 그 곳에서 동북쪽을 바라보면 멀리 산을 넘어서 변장이 계속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눈치빠른 운전사른 차를 가지고 성벽 안까지 올라와 있었다. 차를 타고 동북 변장을 따라 건너편 산 중턱까지 올라가 보았다. 가슴에 까지 차는 풀과 나무들 때문에 자세하게 볼 수는 없지만 마을 뒤와 별 차이가 없었다. 마을로 내려오는 곳에 문이라고 생각되는 터진 곳이 있는데 이 지점은 상당히 성벽이 높았다.

 

이어지는 변장 계속되는 천연 목장

 

마을로 내려와 색륜으로 돌아가지 않고 들판 건너편에 이어지는 변장쪽으로 갈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가능하다는 것이다. 내를 건너 왔던 길로 돌아가지 않고 들판을 가로 질러 달렸다. 420분쯤 마침 참외밭이 있어, 천천히 참외를 먹으며 멀지만 분명하게 보이는 변장을 다시 한 번 바라보며 변장을 쌓은 의미를 생각해 보았으나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은다.

약간 헤메던 차가 철도를 건너서 계곡같은 넓은 분지를 들어서 달린다.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변장이 나타나고 우리는 계속 그 변장을 따라 달린다. 중간에 두 번 변장을 조사하였다. 445분 홍광촌(紅光村)에서 그리고 520분 만족둔만족향(滿族屯滿族鄕)에서 살펴 보았는데 홍광촌과는 달리 만족둔의 변장은 이중성이 붙어있지 않고 마치 성을 두 개 쌓은 것처럼 분명하다.

참외밭을 출발하여 1시간을 달리는 동안은 마치 동화의 세계를 달리는 것 같았다. 계속 이어지는 변장을 바라보다보니 이제는 어느 지점에는 변장이 있을 것이고 어느 지점에는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 진다. 산과 산 사이나 벌판은 반드시 변장이 있고 절벽이 심한 산 밑에는 쌓지 않았다. 동화의 세계라고 한 것은 바로 초원지대의 아름다움이다. 서교수와 나는 몇번이고 스위스와 비교를 하였다. 다만 스위스는 인공으로 초지를 조성한 것이고, 이곳은 돈 한 푼 안들이고 하늘이 그대로 내려 준 혜택인 것이다. 특히 만족둔은 정말 한폭의 그림같은 곳이다.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갔으면 좋겠다.“

여기다 땅을 사서 목장을 했으면 좋겠다.”

서교수와 나는 의견이 일치된다. 아마 누가 와봐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원래 계획되지 않은 길로 들어선 것인데 뜻밖에 비경을 만나 여름에 여기와서 원고 쓰면 좋겠다는 등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은 건물들을 보아도 모두 빨간 벽돌로 지어 주위 경치와 아주 멋지게 어울리고 있는 것을 보면, 중국, 그것도 내몽고의 산골 마을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만큼 소득수준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목축에는 최적지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만족둔을 벗어나자 가던 길을 벗어나 왼쪽으로 접어드는데 보통 험한 길이 아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오늘 울란하오터를 떠나 귀류하진(歸流河鎭) - 대석채진(大石寨鎭) - 해력삼(海力森)을 거쳐 수목구(樹木溝) -도합목(桃合木)으로 가는 길인데 지금은 변장을 따라가는라 엉뚱한 길로 들어선 것이다. 지금 접어든 길은 자연부락들을 연결해 주는 시골길들이기 때문에 길이 아주 좋지 않았지만 바고 해력삼으로 연결되는 길이다.

몇번이고 하늘로 치솟았다가 떠러지고 공중재비를 하는 길을 달렸지만 시골길 경치는 참 좋았다. 시골길을 접어들자마자 산길을 오르던 차를 산꼬대기에서 세웠다. 몽고인들의 돌무더기를 배경으로 멀리 초원에 두 줄로 쭉 뻗어가는 변장이 마치 작품같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초원의 변장위에 수많은 마소와 염소떼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차를 멈추기도 했다.

 

대흥안령을 오르는 길

 

615분 울란하오터에서 오는 큰길을 들어서더니 10분 뒤 해력삼을 지난다. 7시 수목구에 도착해서는 운전사가 기름을 넣으며 앞으로는 대흥안령산맥으로 계속 올라가는 길이기 때문에 밤에 가는데는 어렵고 가장 가까운 곳이 도합목인데 숙박시설이 마땅치 않기 때문에 여기서 자고 갔으면 하는 의견을 내 놓았다.

원래 계획보다 무려 200를 못가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에 다음 도합목까지라고 가자고 했더니 마음 착한 운전사는 두 말 않고 출발한다. 도합목까지는 46, 715분 출발할 때는 이미 어두워진데다 급하지는 않지만 계속 올라가는 길이다 운전사나 차나 힘들어 한다. 물론 서교수나 60이 넘은 현선생도 벅찰 것이다. 그러나 계획한 답사를 다 마칠려면 가능한 한 밤에 이동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이 경험에서 나온 행동지침이다.

815, 도합목에 도착하니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른 저녁인데 마을은 완전히 잠들어 있다.

지도에 보면 수목구에서 다시 시작한 변장이 여기 까지 오는 동안 계속되는데 깜깜한 밤이라 보지 못했다. 도합목에 도착하기 얼마 전 지점에서 변장을 넘어 서는 곳이 있는데 확인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귀류하가 이미 해발 700미터이고, 1리 갈 때마다 해발 1m 씩 추가되니 여기가 해발 1000 지점 쯤 될 것이다

현선생이 전공을 살려서 한 말이다. 마치 파키스탄에서 히말라야를 넘어가는 고개에 온 것처럼 삭막한 고원인데 사람이 살고 있는 것만도 신기하다. 우선 여관을 찾고, 식당을 물었더니 밥까지 해 준다고 한다. 손님이라고는 몽땅 우리밖에 없는데 밤이 늦었다고 거절할 리가 없지만 설령 여관이 아니라고 해도 재워줄 인심 같았다. 옛날 집이라 그런지 천정이 높고 넓직하다. 아주머니가 식사를 하는 동안 할머니와 아이가 텔레비젼을 보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 차대접을 받았다. 기온이 차서 그런지 따뜻한 차를 마시니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하늘 아래 첫동네 같은 도합목(烏審一合이라고 된 지도도 있다)은 몽고족들만 200여 호, 1000여 명이 사는 마을이다. 한족이 34호 있지만 몽고족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목축업이 주업인 이곳 몽고인 들을 주로 소를 기르는데, 제일 작은 집이 78, 많은 집은 200두가 넘는다고 한다. 기온이 낮고 눈이 많이 오지만 나름대로 사는 방법들이 있는 모양이다.

도착하자마자 차도 마시지 않고 녹초가 되어 골아떨어진 운전사를 깨워 식사를 하고 나니 10시가 다 되었다.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5인용 방에서 침대를 하나씩 차지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820() 대흥안령을 넘는다

 

5시 기상하여 밖을 나와보니 아직 달이 덜지고 결려 있는데 방향을 분간할 수가 없다. 제법 넓은 고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숙박비가 1인당 6(600)24, 그리고 식사비포함하여 50원을 지불하였다. 90년대 초 길림성과 요령성을 돌아다닐 때의 가격이다. 중국의 천정부지의 인플레이션이 아직은 여기까지 닿지 않은 모양이다. 볼일 보고 세수하고 545분 출발하였다. 중국교통지도 이정표에 따르면 44가면 군마장(軍馬場)이라는 곳에 도착하니 그곳에서 아침식사를 하기로 하였다. 마을을 지나며 보니 마당이나 길가에 큰 쇠똥보관소들이 있는데 여기서는 나무가 없어 쇠똥이 유일한 연료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대흥안령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깊고 아슬아슬한 산꼭대기를 생각했던 우리는 끝없이 계속되는 초원을 달리며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구별이 안되는 평원을 달리며 여러번 뇌까렸다.

역시 직접 와 봐야 한다.”

계속되는 초지에 때때로 1000마리가 넘는 양을 한 곳에서 기르는 대규모 집단도 보인다. 평원 양쪽에는 그다지 높지 않는 산들이 계속되고 있어 마치 바람막이 울타리를 처놓은 것과 같다. 갑자기 올라가는 높은 고개는 거의 없지만 길은 완만하지만 계속 올라가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길이 몹시 좋지 않아 시간이 많이 걸린다. 1시간 쯤 달리자 제법 산 계곡 길을 오르기 시작하더니 7시에 정상에 다달았다. 정상에 닫기 전에 표지판이 하나 있어 보니 1986년에 세운 표지판인데 표지판 번호만 있지 이정표나 표고를 표시한 내용은 전혀 없다. 이 정상이 해발 몇 미터나 되는지 궁금했던 우리는 실망이 컸다.

고개를 넘자마자 처음으로 밀밭이 보인다. 이곳은 주식이 양고기지만 밀가루도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때문에 밀을 심은 곳도 가끔 보인다. 고개를 내려오며 처음 조그마한 마을이 있어 물어보니 신건(新建)이라고 한다. 최근 겔(빠오)을 싣고 다니며 유목생활을 하던 몽고인들이 정착생활을 위해 새로 집을 지은 곳이 많은데, 그런 곳에는 지명이 없기 때문에 새로 이름을 지어야 하는데, 새로 건설한 곳이니 쉽게 신건이라고 한 모양이다.

 

시속 20도 못 달리는 산길

 

다시 차를 몰아 군마장을 찾아 계속 달려 내려가는데 40분 쯤 달리니 넓직한 평지가 나오며 제법 큰 마을이 하나 나타났다.

드디어 군마장에 도착했구나

생각하고 차를 달렸다. 오랜만에 평지이고 길도 좋을 뿐 아니라 저기만 가면 아침 식사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기사가 신나게 달린다.

신건(新建)입니다

신건에서 45분을 달려 내려왔는데 또 신건이라고 한다.

군마장은 얼마나 어디입니까

길을 잘 못 들어섰습니다. 여기는 막혔으니 다시 산밑을 따라 나가면 직선으로 내려 오는 길과 만날 것입니다.”

신건에는 여관도 식당도 없어 사먹을 것이 없다. 지도에도 없는 새로 세운 마을이지만 상당히 활기차다는 인상을 받았다. 755분 출발하여 20분 쯤 달리자 오래된 마을이 나타났다. 그런데 물어보니 군마장이 아니라고 한다. 군마장은 여기서도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다는 것이다. 식당도 없고 여관도 없다. 44만 가면 군마장이고 한 시간만 가면 도착할 것으로 생각한 군마장이 2시간 반을 달려왔는데도 아직 아니라니 길을 잘 못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침 상점이 하나 있어 들어가 식사를 할 수 있느냐고 했더니 안된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라면을 사서 먹으면서 만약을 생각해서 여러 가지 비상식량을 샀다. 라면을 먹는 동안 주인이 우리말을 듣고 연변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우리말을 조선말로 알아들은 것이다. 산중 사람치고는 상당히 유식한 사람이다. 이 사람과 지도를 놓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여기가 바로 군마장이 맞다는 것을 알았다. 군마장도 본부가 있고 여려 연대가 나위어져 있는데 원래 여기가 본부였다가 다른 곳으로 옮기고 지금은 7연대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7(七聯)이라고 해야 안다고 한다. 다행이다. 그런데 불과 442시간 반에 왔다면 1시간에 20도 못달렸다는 결론이니 앞으로의 일정이 상당히 늦어질까봐 걱정이다.

 

한국보다 더 넓은 초원을 가진 석림곽륵맹(錫林郭勒盟)

 

9시 출발, 서남쪽으로 계속 달린다. 군마장은 흥안맹을 지나 석림곽륵맹(錫林郭勒盟)으로 들어선 첫 마을이다. 석림곽륵맹은 넓이가 202500로 거의 남북한을 합친 것만큼 넓은데 인구는 90만 정도이니 인구밀도가 대단히 낮은 편이다. 석림곽륵맹은 내몽고고원의 중부에 위치하고 있고 고도가 해발 8001700m 사이로 높은 편이다. 광활한 평원분지가 많은데 이런 본지를 몽고말로는 타라(塔拉)리고 한다. 초원이 넓기 때문에 목축업이 주된 산업인데 초원 면적이 142,384론 전 면적의 70%가 넘는다. 국토의 70%가 산지인 우리로서는 부러운 초지이다.

길이 정말 좋지 않다. 길을 물어볼 사람도 없고 중간중간에 물이 있는 곳은 진탕을 이루어 차를 내려야 할 정도였다. 흙이 많은 곳은 이렇게 물이 빠지지 않고 풀도 많이 자라 차가 다니기 어렵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가 오는 날에는 물이 잘 빠지지 않기 때문에 다니기가 불가능해 지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 날씨가 좋아 크나큰 해운이 아닐 수 없다.

945, 군마장2(軍馬場二隊)를 지나는데, 마을을 지난 뒤 한참동안은 길이 제법 좋고 전형적인 초원이 나타나 시원한 초원을 마음껏 즐겼다. 30분 쯤 가자 멀리 내려다 보이는 곳에 큰 저수지가 나타났다. 초지만 보다 오랜만에 물을 보니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초록색돠 파란색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는 처음에 길을 잘 못 들었다가 저수지를 오른쪽으로 끼고 도는 길로 들어섰다. 이 저수지는 오랍개곽륵(烏拉盖郭勒)강을 막아 만든 것인데, 석림곽륵맹에서 가장 큰 강이다.

강가는 사막화가 진핸되는 곳이 많아 저수지를 만든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저수지 가에는 많은 가축들이 풀을 뜯고 있고, 물에는 많은 철새들이 떼지어 날고 있어 그림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저수지 바로 밑이 합랍개도(哈拉盖圖)인데 저수지가 생긴 뒤 그 덕을 많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우선 여기서부터는 길을 닦아놓았다는 것만해도 큰 혜택이 아닐 수 없다. 오랜만에 80를 놓고 달려본다. 그러나 이런 길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는 길이 계속되는데 산등성이 물이 잘 빠지는 곳은 전혀 손을 대지 않고, 낮은 지역만 길을 닦은 것이다.

 

몽골의 야생마에서 낙마

 

길도 좋고, 정말 몽골의 초원을 느낄 수 있는 초원과 낮은산, 말을 타고 양떼를 모는 목동들의 한가한 몸짓, 한번 말을 타고 끝없이 달려보고 싶은 충동이 절로 솟는다. 고개를 하나 넘자 길에서 가까운 곳에 이 모든 것을 갖춘 경치가 나타나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차가 서면 대부분 목동들이 다가온다. 하루 종일 무료하게 지내다 말상대라도 나타나면 반갑기 때문일 것이다. 상당히 미남인 젊은이에게 말을 한 번 타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런 풍경을 배경으로 말을 타고 사진이라고 한 장 찍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젊은 목동은 두말 않고 말에서 내린다. 미국이나 쿠바 같을 때 훈련된 말을 몇 번 타 본적이 있기 때문에 잠간 사진만 찍는 것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훈련이 된 말입니까? 야생마는 아닙니까? 뛰어가서는 않되고 걷는 정도야 된다

현 선생을 통해서 몇번 다짐을 했는데, 청년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서교수에게 사진기를 주고 찍어 달라고 부탁하고 과감하게 말에 올랐다. 청년이 끈을 주며 잡아다니라고 준다. 내가 끈을 받고 잡아당기려는 순간 무엇인가 강한 거부감을 말에서 느꼈다.

!”

그것은 정말 순간이었다. 나는 청년이 어느 정도 말을 다루어 줄 줄 알았는데 끈을 넘겨주고 물러나자 마자 말은 곧바로 뛰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한 번 위로 튕기면서 말 엉더이를 넘어서 뒤고 떨어지고 말은 질풍같이 뛰어 달아났다.

사진 찍었어?”

떨어졌다 일어나면서 맨 먼저 물어본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사진이 문제가 아니었다. 몽골의 말을 훈련된 말로 생각한 것부터가 잘못이었고, 목동이 끝까지 잡고 있어야 한 것인데 너무 경솔했다는 것이 그 목동을 뺀 모든 사람들의 뒷얘기였다. 만일 발걸이에 걸려 끌려가거나 떨어질 때 머리를 다쳤다면 목숨이 위험한 판국에 사진이 문제가 아니었다. 다행이 발걸이에서 빠질 때 발이 약간 긁혔을 뿐 전혀 상처가 없어 기적과 같았다. 아마 태어나서 말과 함께 살아온 그 목동은 말을 못 타는 사람도 있나?’ 하며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얼마나 빨리 도망갔는지 목동도 말을 붙잡지 못했고, 한 번 뛴 말은 종적이 묘연하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목동은 걱정을 하지 않지만 미안한 생각도 든다.

놀래서 사진을 찍을 수 없었어, 뛰어가서 사람을 구해야지 어떻게 사진을 찍겠어?”

결정적인 순간을 찍어야지 놓쳤다고 불평하자 서교수가 한 말이다. 낙마한 순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별 감이 없어는데, 조금 지나니 살아있는 것이, 그것도 아무런 상처도 없이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었다는 것이 실감이난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서있는 청년과 악수를 하며 미안하다고 하자,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하면서 기념으로 한국 담배를 한 갑 주었는데 한사코 안 받을려고 할 만큼 순진하였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현장을 떠났다.

몽고 빠오는 관광상품으로

 

1215, 오랍개(烏拉盖)에 도착하였다. 길가에 몽고 빠오가 원색으로 설치되어 있고 만국기를 걸어 사람의 눈을 끌고 있다. 이곳이 바로 점심식사를 할 곳이로구나, 결정하고 우선 차를 고치기 위해 수리센터에 맡겼다. 대흥안령을 넘어오면서 그토록 요동을 쳤는데 멀쩡할 이가 없다. 우리가 한 번도 등밭이에다 등을 댈 수가 없었다. 등을 대면 바로 튕기기 때문에 바로 앉아있을 수가 없었는데 차는 어떻겠는가! 부품을 하나 완전히 바꾸어야 하는데 다행이 부품이 있다고 한다.

메뉴는 완전히 몽고식이다. 주된 메뉴가 양고기다. 마치 한국에서 보신탕 고기 준비하듯 미리 삶아서 근으로 파는데 한 근을 시켰더니 웃는다. 이곳에서는 34명이면 몇 근은 족히 시켜야 하는데 너무 적게 시켰기 때문이다. 준비를 하는 동안 우선 나이차(奶茶)가 나오는데 우유에다 차를 탄 것으로 채소를 먹지 않고 고기만 먹는 몽고인들은 비타민이 부족하기 때문에 평소에 우리 보리차 마시듯 한다고 한다. 나이란 우유를 말하는데 나이두부라는 것도 있다. 세콤하면서도 맛이 있다. 한 근은 역시 부족하였다. 한 근을 더 시켜서 오랜만에 충분히 먹고 150분 다시 출발하였다.

마을을 떠나 고개를 넘는데 처음으로 진짜 표지판을 만났다. 白音胡碩鎭 九六, 이라고 써있다. 진은 우리나라의 읍이나 마찬가지이니 읍경계포지판 쯤 되는 것이다. 오랍개는 백음호석진에 속한 것을 알 수 있다. 9610월에 세웠으니 세운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

환상적인 초원이 계속된다. 길도 비교적 좋기 때문에 마음껏 초원을 즐기는 시간이다. 길이 좋다고는 하지만 낮은 곳만 닦았지 나머지는 멋대로 길이 나 있기 때문에 까딱하면 길을 잃어버리는데 물어볼 곳이 없어 불안할 때가 있다. 길을 잃었다가 아름다운 호수를 볼 수 있었다. 경치도 경치지만 물이 있는 곳은 반드시 목축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 차로 집앞까지 가서 길을 물었다. 건장한 젊은 목동이 나아 길을 가르쳐 주는데 현선생이 차에서 내리지를 않는다. 바로 황소만한 개 때문이다. 목동들은 개를 이용하여 양떼를 모는데 크기로 대단하지만 대댠히 사나워서 대한히 위험하다고 한다. 낯선사람이 나타나면 즉시 달려들어 목을 물고늘어져 결정적인 일격을 가한다고 한다. 그것을 모르는 서교수가 반대쪽 차문을 열고 나가 가축과 호수를 찍고 유유히 돌아왔다. 사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으나 다행히 큰 일은 나지 않았다. 나중에 현선생의 말을 들으니 목동이 개를 막느라고 애를 먹었다고 한다

오랍개에서 신소막(新蘇莫) 가까이에 있는 도특락이(道特諾爾)까지 32, 320분도착, 또 보랍격(寶拉格)까지 40, 435분에 도착하였다. 이 사이에서 처음으로 초원에 설치한 빠오를 볼 수 있었다. 어느 사이에 서교수와 나는 한국에서 단체로 왔을 때 몽고 빠오를 어떻게 운영하고, 어떻게 일정을 잡을 것인가를 논의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학술적으로나 관광이란 면에서나 주위 사람들에게 정말 추전하고 싶다는 것이다.

 

몽고인의 신혼생활

 

보랍격에서 동오주목필기(東烏珠穆泌旗)까지는 61가 남았다. 때때로 몽고 빠오가 나오니까 새로운 멋을 느낄 수 있다. 가다가 가까운 곳에 빠오가 있으면 한 번 들려서 그들의 생활을 보고 싶었다. 530, 지나가는 산 언덕 위에 빠오 한 채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그림처럼 서있는데 그냥 지나갈 수가 없다. 북경왕은 가볍게 초원을 달려 산 위 빠오 앞에까지 데려다 준다. 다행히 안에 사람이 있었다. 현선생이 몽고말까지 몇 단어 섞어서 능숙하게 말을 건다.

들어가세요

안에라도 한 번 들여다 보고 사진이나 한 두 장 찍을 생각을 했는데 들어오란다. 밖이 하얀 천으로 둘러쌓여 담백한 멋을 준다고 생각했는데 안은 정말 휘양찬란한 원색으로 가득 찼다. 몽고의 유목민들은 항상 광활한 초원에서 생활하며 목초지를 따라 항상 이동한다. 이러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항상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겔(ger)에 산다. 이 몽고 겔을 만주인들은 빠오라고 부르고 돌궐계에서는 유르트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빠오라고 부르기 때문에 필자도 편의상 빠오라고 하기로 한다. 빠오는 1.2m 정도의 원통형 벽과 둥근 지붕으로 되어 있다. 벽과 지붕은 버들가지를 비스듬히 격자로 짜서 골조를 하고 그 위에 펠트를 덮어씌워 이동할 때 쉽게 분해·조립할 수 있다. 골조는 마치 우산처럼 쉽게 피고 접을 수 있게 만들었는데 빨간색을 칠했다. 중국적인 색채가 들어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바닥 양탄자를 포함해서 빨간색이 많다. 이 빠오는 아까 점심때 식사했던 것과 색갈이나 모양이 너무 똑같아 시장에서 구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면에는 화로가 있는데 몽고인들은 이 화로 안의 불씨를 매우 신성시하여 항상 꺼지지 않도록 주의한다고 한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 화로 왼쪽에 앉았다. 주인은 바로 보온병에서 나이차를 따라 대접하고 나이두부도 내놓은데 아까 식당에서 먹은 것과는 다르다. 여기서 주는 나이두부는 마치 꿀을 빼고 남은 밀랍을 모아놓은 것처럼 노랗고 딱딱하였다. 아마 오래 보관할 수 있도록 만든 모양이다. 기념으로 가져가도 되느냐고 했더니 좋다고 해서 손바닥만한 나이두부를 가방에 집어 넣었다.

 

전통의상 입은 뽀임 뽀리커와 나른 치무그어 부부

 

안쪽 벽면에는 재법 많은 살림을 정말 화사하게 잘 정돈해 놓았다. 마치 우리가 온다고 통보를 받고 일부러 준비를 한 것처럼 깔끔하게 정리해 놓아 보기 좋았다. 밑에 침구와 옷장을 놓고 그 양편에 화려한 옷을 입고 찍은 사진틀이 놓여 있으며 그 위에는 제법 좋은 스레레오 전축이 놓여 있다. 입구 양쪽에는 양고기를 걸어 말리고 있고, 주방용구들이 걸려 있다.

집안 사진을 찍는 것은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자 선선히 포즈를 취해 준다. 밖에 나가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부인이 부지런히 밖으로 나와 빠오 옆에 세워둔 수레로 가더니 두껑을 열고 부지런히 무었인가를 찾는다. 이 수레들은 물건을 실어나르는 것이 아니라 수레 위에 이미 통이 있어 여러가지 살림살이를 두는 행랑채인 것이다. 이런 행랑채가 무려 3채나 된다. 가운데 행랑채 윗문을 연 부인은 예쁜 전통의상을 꺼낸다. 실례가 될까봐 부탁을 못했는데 부부가 스스로 전통의상을 입고, 남자는 구달이라는 장화까지 신고 나온다. 기왕이면 안에서도 다시 한 번 찍고 바께서 찍자고 부탁했더니 마치 숙련된 배우처럼 연출에 능동적으로 응한다.

금년에 결혼했다는 신혼부부, 남자는 23세로 이름은 뽀임 뽀리커, 여자는 25세로 이름은 나른 치무그어다. 어떤 것이 성이냐고 하자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몽고인들은 부르기 위해 이름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거나 이름을 부친다. 태어날 때 할아버지의 나이을 따서 68, 73이라고 짓기도 하고, 태어날 때의 무게를 떠서 7, 8근이라고 짓기도 한다.’

현 선생의 설명이다. 한문으로 주소와 이름을 받아보니 이해가 갔다. 주소를 받을 때도 난관이 많았다. 청년이 중국어를 어느 정도 알아듣지만 글은 전혀 모르고 우선 주소라는 단어를 모르기 때문에 현 선생이 애를 먹은 것이다. 여자는 물론 중국말을 못알아 듣는다. 한참동안 몽고 단어 까지 몇개 넣어 설명한 뒤에야 사진을 보내기 위해 주소가 필요하다는 말을 알아들은 모양이다 보에 똘똘 감아서 싸두었던 주민등록증을 꺼내서 내어 놓는다. 그런데 그것도 자기 것이 아니가 아버지 것이다. 아버지 것을 왜 아들이 가지고 있고 자기 것은 없는지 모른다.

僧格(1948, 3, 20)

東烏珠穆泌旗 敦達高璧蘇木 達布希勒圖嘎査

문제는 아들 이름을 한자로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한참만에 현선생이 한자로 번역을 해냈다. 알고 보니 쉽다는 것이다. 이름은 [白音 寶力格], 바로 우리가 얼마 전에 지나온 마을 이름인 것이다. 그리고 보니 아버지 이름 승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몰이는 말 대신 오토바이로

 

가지고 있는 가축이 얼마다 됩니까?”

1000마리, 50마리, 70마리 정도입니다.”

일년에 새끼를 몇 마리 씩이나 낳습니까

300마리, 16마리, 18마리

요즈음 가격은 얼마나 나갑니까?”

양이 200, 소가 큰 것은 2000원 이상, 말이 1500원 정도 갑니다.”

3 가지만 물어보면 이집 재산은 다 파악이 된 것이다. 총재산은 양이 20만원, 소가 10만원, 말이 105백원, 모두 40500원이니 우리 돈으로 4000만원이 넘는 재산이다. 가축들이 매년 커가고 있는 것을 무시하고 대신 새로 불어난 것을 현시가로 계산하면, 이 집 1년 수입은 줄잡아 12만원 우리 돈으로 1200만원이 넘는다. 현재 중국의 1년 임금이 6000원에서 12000원정도인 것을 보면 높은 임금을 받는 사람의 10배 수입이 되는 것이다. 초원을 달리며 깜짝 놀랜 것이 이들의 목축을 하는 몽고인들의 생활수준이 높다는 것이다. 거의 모두 벽돌로 집을 지어 정착했기 때문에 빠오를 찾기 어렵고, 집집마다 차가 있고, 심지어는 차가 두 대가 있는 집도 있다. 도시 근처에 왔더니 말로 양떼를 모는 것보다 오토바이로 양떼를 모는 풍경이 더 익숙할 정도이다. 이 신혼부부 집에도 오토바이는 물론 집 밖에 풍력발전기를 설치하여 전축을 틀 정도로 문화생활을 하고 있다.

위에서 본 재산은 동산만 계산한 것이고 부동산을 가지고 말하면 전혀 다른 계산이 나온다. 초원을 나누어 개인에게 분배했기 때문이다.

초원의 넓이는 얼마나 됩니까?”

모릅니다

어디서 어디까지 인지는 알겠지만 정확한 단위로 넓이를 모른다는 것이다.

 

장수왕이 넘었을 대흥안령

 

6시 신혼부부 빠오를 떠나 6시 반 드디어 동오주목필기(東烏珠穆泌旗)의 인민정부가 있는 오리아사태진(烏里雅斯太鎭)에 도착하였다. 북경왕의 계기판을 보니 5,469, 이틀동안 616를 달린 것이다. 원래 이정표대로 하면 496인데 120를 더 돌거나 헤멘 것이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200쯤 더 달려 오늘밤은 서오주목필기에 가서 자야 했는데 새벽부터 저녁까지 달려도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그만큼 이곳에 대한 정보가 불확실했던 것이다.

동오주목필기(東烏珠穆泌旗)를 여기서는 그냥 동오, 서오주목필기(西烏珠穆泌旗)는 서오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동서 오주목필기가 옛날 고구려 시대 때 지두우의 땅이다. 기록에 따르면 479년 장수왕 때 이 지두우를 고구려와 유연(柔然)이 나누어 가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이곳까지 진출했다는 것이다.

479년 유연(유연)과의 역사기록 보충(서영수)

 

만일 장수왕이 이곳에 진출했다면 어느 길을 택했을까? 이때 나오는 질문이 과연 장수왕이 대흥안령을 넘을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다. 우리가 어제 오늘 그 험한 길을 일부러 넘어본 것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실제 대흥안령을 넘어보고 한 대답은 가능하다이다. 우리가 상상하기는 대흥안령도 우리나라 태백산맥처럼 깊은 산과 높은 산봉우리가 있고, 그 규모가 광대하기 때문에 마치 알프스를 넘는 대장정을 예상했었다. 그러나 현지에 와 보니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마치 산맥 위에 길을 냈는데, 대규모 군사가 한꺼번에 이동할 수 있도록 그 넓이를 2000미터 정도로 넓히고 잔듸를 깔아 비단길을 만들어 놓은 것과 같다. 이러한 초원지대를 말로 달린다면 차로 달리는 것 못지 않게 빨리 달릴 것이며, 유목민족의 습속을 가졌던 고구려가 이곳을 넘을 때는 가축떼를 함께 몰고 왔을 것이기 때문에 초원은 훌륭한 먹이를 대주는 목장이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막강한 기마군단을 유지하고 있던 고구려가 말을 기르는데 이렇게 좋은 곳을 그냥 두었을 이가 없다. 오늘지났던 군마장은 바로 고구려 때 군마장이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두우국의 중심지 오주목필기(烏珠穆泌旗)

 

그렇다면 장수왕때 고구려가 진출했을 지두우국, 즉 오늘날의 동·서 오주목필기는 어떤 곳인가. 면적은 동오가 47000, 서오가 22000이니 모두 7가까이 되어 서울과 경기도를 뺀 한국의 면적과 같은 큰 땅이다. 여기에 사는 인구는 동오가 52800, 서오가 62400면으로 모두 125200명 밖에 안된다. 전체 인구 가운데서 몽고족이 동오 32500, 서오 38700명으로 모두 71200명인데, 몽고족을 포함한 소수민족이 63%나 된다.

지형을 보면 동오는 북서부는 낮은산과 구릉지고, 우리가 넘어올 때 저수지가 있었던 중부지방은 우랍개괄륵강 유역을 중심으로 띠처럼 길죽하게 형성된 분지, 즉 해발 1000m 정도의 대상분지를 이루고 있다. 남부는 넓고 평탄한 파상평원이다. 한편 서오는 내몽고 고원 동남부이고 대흥안령산맥의 서북쪽 기슭이 된다. 동남부는 대흥안령의 산지이기 때문에 해발 1600나 되는 고지이고, 북서부는 동오의 남부와 마찬가지로 넓고 평탄한 파상평원이다.

오주목필기는 아직도 목축업이 주업이다. 물이 있고 풀이 풍부한 초원이 동오가 29000, 서오가 1500044000로 전 면적의 63%에 가까운 땅이 힘들이지 않고 초지를 조성한 천연목장이다.

이처럼 자연의 풍부한 이점을 가진 지두우는 고대에도 큰 욕심없이 목축에 전년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항상 주변국가의 지배하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현제도 이곳에는 소, , 양이 주된가축인 것을 보면 당시도 여기는 중요한 말의 생산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동오주목필기(東烏珠穆泌旗)는 지두우국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넓은 평원 들판 한가운데 세워진 도시는 주로 산을 등지고 도시를 세운 우리나라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마침 우리가 도착한 곳에 시장이라 시원한 아이스케익을 사먹으며 다음 일정을 논의하였다.

 

소금못(鹽池)를 찾아서

 

시간은 이미 7시가 다 되어 날이 어두워 가는데 염지(鹽池)까지 갈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자고 갈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사실 아침에 출발하여 13시간을 뛰었으니 이곳에서 자고 가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염지에 가서 자면 저녁과 새벽에 염지에 대한 자료를 모을 수 있는 좋은 조건이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곳에 숙박시설이 있겠는가 하는 문제인데 일단 가보기로 했다.

염지를 물으니 쉽게 알려 준다. 중국교통지도 이정표에는 44로 되어 있으니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다. 시내를 빠져 나가는데 약간 헤메느라 710분에야 출발하여 석림호특(錫林浩特)으로 가는 도로를 달린다. 아스팔트길은 아니지만 잘 다듬어진 길이다. 오랜만에 신나게 달리는데 문제는 어디서 들어가는 길을 찾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지도상에 나타난 삼거리는 지나갔는데 오른쪽으로 빠져 들어가는 길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 불안하였으나 물어볼 곳도 사람도 없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물을 사람이 없어 고심하는데 멀리서 불빛이 보인다. 가까이 가 보니 차가 고장이 나서 큰 차가 끌고 있었다. 차를 세우고 염지를 묻자, 바로 그 고장난 차가 염지까지 가는 차라는 것이다. 내일 행사가 있어 선생님들을 모시고 가는 길인데 3명만 좀 태워달라는 것이다. 우리는 잘 되었구나 하고 한 사람을 길안내로 태우고 가기로 하였다. 3명을 태워 달라고 간청을 했으나 한 자리밖에 없기 때문에 여자분과 어린아이만 태웠다.

향정부(우리나라의 면사무소) 부녀담당 주임이라는 여인의 안내를 받아 캄캄한 길을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큰 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들어 초원길을 한참 달려 가니 어둠 속에서도 호수가 보인다. 내일 아침 일찍 가 보기로 하고 우선 여관을 찾아갔다. 처음 찾아간 여관은 이미 만원이라 호젓한 곳에 있는 여관을 찾아 짐을 풀었다. 시간은 85분이고 동오에서부터 49였다.

식사준비를 하는 동안 세수를 하고 모기향을 피웠다. 그 사이에 이미 모기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운전사는 이것 저것 만사 제쳐놓고 골아 떨어졌다. 흔들리고 빠지고 튀는 길을 하두 운전대를 꽉잡고 오다 보니 팔이 부었다고 한다. 정말 운전도 잘하고 성실한 운전사를 만나 참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운전사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식사할 때는 깨워서 먹였으나 양고기, 소고기를 먹지 않은 운전사는 먹는 것도 부실하다. 방에 서교수와 현선생은 오늘의 성공을 축하하는 축배를 드는데 운전사는 다시 골아 떨어진다.

우리는 이 때부터 여관주인과 염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인은 염지에 대해서 잘 아는 전문가를 데려와 자세하게 대답해 주었다.

염지를 찾은 뜻은

 

11시가 다 되자 나도 눈꺼풀이 자동으로 내려 앉는다. 좀 그만 끝냈으면 하는데 얘기좋아하는 주인은 좀처럼 끝내려 하지 않는다. 나는 자주 하지 않은 말이지만 할 수 없이 이제 자야겠다고 양해를 구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들은 염지에 대한 내용은 중요하기 때문에 간단하게나마 기록한다.

호수에서 소금은 만드는 염장은 모두 25이고, 1년에 8만톤 씩 생산해 낸다고 한다. 식용과 공업용 두 가지가 나는데 식용의 비중이 더 높다고 한다. 호수가 있는 동네는 쉽게 소금나는 못이라는 뜻을 가진 염지라고 하면 모두 알지만, 보통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공식적인 이름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정확한 행정지명은 아문호도알(阿門呼都嘎)이고 소금못의 이름은 액길뇨이(額吉淖爾) 천연염지(鹽池)인데, 額吉淖日蘇木(액길뇨일소목)이란 쓰무(우리나라의 면단위)에서 딴 것이다. 우리가 하루 묵은 아문호도알은 5002000여명이 사는 큰 마을인데 그 가운데 500여 명이 이 소금못 염전에서 일해 먹고 산다. 국가가 관리하는 연전이라 국가 공무원이나 마찬 가지인 그들은 정식노동자가 300, 임시노동자가 200명인데 임금은 월 400(40000)정도로 낮은 편이었다. 최근에는 소금을 만들 못물이 부족해 주위에 샘을 파서 채우고 있어 경기가 옛날같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소금못을 찾은 뜻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우선 광태토태왕비의 기록부터 검토해야 한다. 광개토태왕비를 보면 처음에 고구려 건국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이어서 태왕의 업적에 대해서 오는데 그 첫 업적이 바로 패려 정벌이다.

 

업적1- 영락 5(서기 395) 패려(稗麗)정벌

 

永樂五年 歲在乙未 王以稗麗不△△△ 躬率往討 過富山負至鹽水上 破其三部六七百營 牛馬 羊 不可稱數 於是旋駕 因果襄平道 東來城 力城 北豊 王備獵 遊觀上境 田獵而還

영락 5, 을미년에 패려(稗麗)△△△하지 않기 때문에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과 부()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3 ()6,7백 영()을 처부수고 소양떼 들을 얻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수레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쪽의 역성(力城)북풍(北豊)으로 왔다. 왕은 사냥을 준비하도록하고 국경을 시찰한 뒤 사냥(田獵)을 하고 돌아왔다.

 

광개토태왕은 諡號廣開土境이란 내용을 붙일만큼 고구려의 영토를 넓힌 군주였다. 지금까지 광개토태왕의 영토확장 가운데 가장 하일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북서쪽의 稗麗정벌에 대한 논의는 많이 되었으나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가장 중요한 문제가 패려가 어디냐 하는 문제이다.

주로 중국 학자들에 의해 패려는 심양 근방이라고 축소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양평도(哿平道라는 주장도 있다)를 통해서 돌아오는 것을 보면 현재의 요양보다 서쪽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서쪽으로 더 갔을까? 이 논의에 대해 패려는 거란의 필혈부(匹絜部)라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박시형, 󰡔광개토왕릉비󰡕). 그리고 필혈부는 지금의 요양에서 북으로 수 백리를 더 간 지역이라고 한다. 조양에서 수 백리를 더 간다면 바로 우리가 지금 여행해고 있는 곳이다. 거란족의 최대 근거지는 역시 시라무렌강을 지난 내몽골 부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태조능을 비롯한 모든 유적이 이곳에 집중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열쇠가 되는 것이 부산(富山), 부산(負山), 염수(鹽水)가 어디냐 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염수에 대한 수수께끼를 푸는데 이번 염지의 방문 목적이 있다. 염수란 소금강, 또는 소금호수라고 볼 수 있는데 강물이 말라 소금이 된 곳은 찾을 수가 없었다. 자연히 소금호수를 찾게 되는데 바로 염지가 그곳인 것이다. 이 근방에 염수를 찾을 수 있다면, 영락5년 기록에 6,7백 영()을 처부수고 소양떼 들을 얻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하였으니 소양이 재산의 모든 것인 이곳 환경과 완전히 부합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821(), 날씨 맑음, 연지 - 서오주목필기 - 임동

 

5시 기상하여 25분 여관을 출발, 소금못을 찾았다. 하얀 소금을 호수 옆에 야적해 놓은 것이 마치 언덕처럼 버티고 있다. 가까이 갔으나 철조망이 쳐져있어 접근 할 수가 없다. 아직 개장시간까지는 많이 남아있어 들어가는 것은 포기하고, 철조망 밖에 있는 염장을 가 보기로 하였다. 호수 가까이에 작은 냇가가 흐르는데 건너기가 마땅치 않아 동쪽 끝가지 가서 건널 수 있었다.

물가에는 자연소금이 덮혀 있어 소금못을 바로 실감할 수 있다. 못의 깊이가 1520m이고 염도가 2530°이기 때문에 호수 물은 염도는 있지만 소금 상태는 아니고, 호숫가에는 햇볓에 때문에 소금이 되어 있는 것이다. 만일 호수물을 다 소금으로 만들면 3000만톤이나 된다고 하니 옛날 사람들이 보기에는 소금강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광개토태왕이 왔던 염수의 소금이니 기념으로 가지고 가야지

서교수가 소금을 조금 긁어서 봉지에 넣으며 감격해 한다.

소금을 야적해 놓은 곳 가까이 가니 소금을 만드는 염전이 있고 거기서부터는 철조망 때문에 갈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바다에서 나는 소금만 본 우리로서는 대륙 한 복판 호수에서 소금이 난다는 것이 신기했다. 몽고어로는 다부수놀이라는 염지는 이곳 말고도 몇 군데 더 있다는 것을 보면 염수는 이 근방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40분 동안 염호를 보고 65분 마을을 떠났다. 지금부터 목표는 서오주목필기, 서오. 석림호특으로 가는 큰길에 나오니 바로 입구에 염장(鹽場)이란 하얀 표지판이 있었다. 어제 캄캄한 밤중이가 보지 못했지만 낮에는 쉽게 입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큰 길 나가기 전에 앞으로 갈 로선에 대해 많이 논의했다. 염지에서 소금을 싣고 동오로 가는 길이 있다고 했으나 길이 좋지 않을 것 같아 멀어도 동오로 돌아서 가는 길을 택하기로 하고 어제 오던 길로 달렸다.

65, 오리아사태진에 도착하지 직전 갈라지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꺽어 들어갔다. 이정표에 따르면 서오까지 102이니 늦어도 2시간이면 갈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길이 좋지 않았다. 같은 오주목필기이기 때문에 길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초원길로 흥안령을 넘어올 때와 같은 길이다.

 

중국 최대의 초원 실링고로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초원은 실링고로(錫林郭勒) 초원으로 내몽고 4대 초원 가운데서도 최대의 초원이다. 실링고로초원은 한 초원의 면적이 142384로 한국 땅보다 더 넓다. 이 곳 초원은 그 규모가 크고 자연목장으로서 조건이 좋기 때문에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지원하여 가축의 종자개량, 초지의 조성 등 과학적 목축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한 과학적 목축기술 가운데 하나가 초고룬(草庫倫)이라는 궂이 이름을 붙인다면 이포초지법(二圃草地法) 정도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중세 서구의 삼포농법(三圃農法)처럼 울타리를 쳐서 초지를 나눈 뒤, 가축이 한쪽 초지만 먹도록하고 다른 한쪽은 풀이 잘 자라도록 두었다가 어느 기간이 지나면 다른쪽 초지를 먹도록해서 초지를 보호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조성한 초고륜이 1984년 이미 900만 무(), 울타리 기둥 137000, 250으로 74000좌의 초지를 만들었다. 인공적으로 새로운 풀 종자를 뿌려 초지를 조성한 것이 33만 무, 항공기로 풀종자를 뿌린 것이 28만 무가 된다.

실링고로초원은 초원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다. 동오를 떠난 뒤, 가끔 빠오가 나오고 목동들도 보였으나 1시간 쯤 지난 뒤부터는 길을 물어볼 사람을 만나기도 힘들었다. 길은 초원에 형성되 자연도로이기 때문에 비가 와서 질퍽거리면 옆 초원으로 달려 새 길이 나고, 또 다시 다른 길이 나고 해, 울퉁불퉁해 진 길이 북경왕에게도 만만치 않은 곳이다. 다행이 버스 한 대가 같은 시간에 외로운 초원길의 동무가 되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함께 달리게 되어 위안이 되었다.

 

서오주목필기(西烏珠穆泌旗)의 정부 소재지 파언오랍호특진(巴彦烏拉浩特鎭)

 

두 시간이 훨씬 넘었는데 나타나야 할 서오의 인민정부가 있는 파언오랍호특진(巴彦烏拉浩特鎭)이 보이지 않자 약간 지루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런데 멀리 상당히 큰 도시가 나타났다. 끝없이 이어지는 초원에 멀리 나무가 많이 자라고 언덕이 있는 도시가 나타나자 반가운 생각에 열심히 달렸으나, 가까이 가서 보니 마을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사막이다. 초원에는 나무가 전혀 없는데 모래 언덕으로 된 사막에는 나무들이 있는 희한한 광경이 벌어진 것이다.

예상보다 1시간이나 더 걸려 10시에 파언오랍호특진(巴彦烏拉浩特鎭)에 도착하였다. 염지를 떠나 168를 달려 오는데 4시간이 걸린 것이다. 세벽에 떠나 중간에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먹을 데가 없어 그냥 달려온 우리는 만사 제쳐놓고 우선 먹기로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지도를 펴놓고 현지인들에게 자세하게 길을 물었다. 파언오랍특진은 우리나라 읍 소재지 쯤 되기 때문에 그다지 큰 곳은 아니지만 다음 오늘 목적지인 임동에 도착하지 전에는 가장 큰 도시이다. 몽고 전통옷을 입고 오토바이를 타는 젊은 부부에게 사진을 한 장 찍겠다고 했더니 기분좋게 폼을 잡아 준다.

11, 파언오랍호특을 출발하였다. 파언오랍호특을 떠나 20여분 쯤 가자 오른쪽 초원 위에 지금까지 본 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큰 빠오 집단이 나타났다. 가까이 가 보니 철조망이 처져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조금 걸어가 보니 간판이 하나 높이 달려 있는데 오일격하락영(烏日格夏樂營)이라고 쓰여 있다. 오일격은 이름이고 하락영은 피서지라는 뜻인데, 몽고의 풍습을 따라 빠오를 지어 운영하는 것이다. 제법 큰 호수가 있고, 멀리 보이는 산을 배경으로 말을 탄 목동들이 양떼를 모는 정경이 정말 그림같은 곳이다.

계속되는 초원에 마을도 사람도 보이지 않아 물어볼 곳이 없다. 지도상 다음 목적지인 달청보랍격목장(達靑寶拉格牧場)에 도착한 것은 1213, 전전포(前氈鋪)로 가는 길을 물었더니 바로 왼쪽으로 꺾어들어 가라고 한다. 꺾어들어가 바로 건너다 보이는 마을까지 갔는데 아무래도 길이 좁고 험할 것같다. 우리는 다시 큰 도로로 나와 좀 더 내려가 보기로 했다. 지도에 나오는 상영자를 지나고 한 참을 달려도 지도에 나오는 왼쪽길이 안나온다. 임서현(林西縣)과의 경계쯤 가서 간신히 한 사람을 만나 전전포로 가는 길을 물었더니 아까 되돌아 나온 길이 맞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30여 분을 허비하고 다시 돌아온 마을에서 6쯤 올라가니 고개가 나오고 융이선(隆二線)이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내용은 불비하지만 표지판이 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반가워 차를 세우고 사진도 찍고 마음도 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원래 고개란 쉬어가는 곳이 아닌가.

 

고구려 성인가 아닌가, 서변장(西邊墻)을 찾아

 

고개를 넘어 임서현에 들어서자 지금까지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나타난다. 높은 산들이 주위를 감싸고 제법 큰 나무들도 보인다. 초원지대에서 고개를 하나 넘자 갑자기 농경사회로 접어든 것이다. 우리가 흥안령을 넘어 이곳을 찾아온 것은 앞에서 본 색륜에서 보았던 변장이 흥안령을 따라 내려오다 이곳 파림좌기(巴林左旗)파림우기(巴林右旗)를 거쳐 임서현에서 중단되는데 바로 그 변장을 고구려성이라고 기록한 자료가 있고, 또 파림좌기의 행정부 소재지인 임동(林東)에 고구려 성이 있다는 기록이 있어 이 두 가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130분 전전포를 지나 15분 쯤 더 가니 신림진(新林鎭)이 나오는데, 지도에 다르면 여기가 변장의 마지막 부분이 된다. 지나는 노인에게 변장을 물어보니 오히려 전전포 오기 직전에 산쪽으로 올라가면 변장이 있다고 한다. 변장이 있다는 것은 확인하고, 우리가 목표로 한 서변장(西邊墻)이란 마을을 향해서 달렸다. 양쪽에 제법 높고 야무지게 뭉쳐진 돌산이 병풍을 세워놓은 듯 이어지는데 그 사이에는 넓은 들판의 농촌이 이어진다.

저것이 부산이고, 저것이 부산이다

광개토태왕비에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넘어 소금강(鹽水)으로 갔다고 했는데 바로 그 부산과 부산을 말하는 것이다. 두 산이 멀리 떨어졌다고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처럼 가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오른쪽에 우뚝 솟은 1251m 짜리 삼능산(三倰山)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구련장(九連庄)을 지나면서 사간목륜하(査干沐淪河)란 제법 큰 강과 만나게 되고, 도로는 그 강을 오른쪽에 끼고 계속 거슬러 올라간다. 해가영자(解家營子), 서가영자(徐家營子), 곽가영자(郭家營子, 우가영자(于家營子)를 지나 왼쪽으로 꺾어들어 다시 조가영자(曹家營子), 몽고영자(蒙古營子) 등 많은 영자(營子)를 지나간다.

영락5년 광개토태왕이 6,700()을 쳐부셨다는데, 바로 이런 자연부락이 영()이었구나

다른 곳과는 달리 임서현에는 각 부락마다 마을 이름을 쓴 표지판들을 세워놓아 참 편리하였다. 서교수가 부지런히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갈 시간이 바쁘고 앞으로 마을이 많을 것이기 때문에 다음에 찍기로 하고 앞으로 달렸다.

315, 노방신(老房身)을 지나 10분 뒤 서변장(西邊墻)이란 마을에 도착하였다. 큰 길에서 좌회전한 것이 250분이었으니 25분이 걸린 것인데 북경와의 거리표시계를 보니 15를 들어온 것이다. 우선 마을 앞에 있는 상점에 가서 변장을 물었더니 한족이라는 57세 요진명(姚振鳴) 씨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수나라 때 몽고병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인데 많이 파괴되었다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이곳을 측량하면서 현지 몽고인들에게 들은 것은 분명히 고구려성(高麗城)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표기했을 텐데 60 여년이 지난 지금은 내용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수나라 때는 몽고가 존재하지도 않았고, 또 수나라 군사가 여기까지 온 기록도 없기 때문에 몇 십년 전에 이곳으로 이주해 온 한족의 말은 어차피 신빙성이 없는 것이다. 다만 요나라나 금나라 때의 것이라고 하지 않고 시대가 수나라까지 올라간 것은 특기할만한 일이다.

색륜에서 본 변장과 차이가 없군

마을 뒤 담장처럼 이어진 변장은 밭을 일구었기 때문에 많이 회손되었지만 토성이란 점과 중간중간에 나타나는 치성 등 그 구조는 이미 본 변장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와같은 사실은 우리에게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최근에 나온 지도에서 볼 때 같은 성격의 변장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고구려성이라고 표시한 부분은 돌로 쌓은 웅장한 고구려식 석성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를 했기 때문이다.

이 성을 왜 쌓았을까?’

그저께 변장을 보았을 때의 의문이 똑같이 되풀이 된다.

변장에서 바라보는 들판은 나무가 없는 초원형 산과는 달리 들판은 완전히 농토로 바뀌어 있다. 멀리 우리가 차를 타고 들어왔던 길 양편으로 오른쪽에는 마안산(馬鞍山), 왼쪽으로는 월아산(月牙山)이 알맞게 자리하고 있어 경치가 아름답다. 서변장을 지나가면 대령산(大嶺山)이라는 제법 높은 산이 있는데 변장은 그 산 밑을 따라 동쪽으로 이어진다.

 

동변장(東邊墻), 왜 쌓았을까?

 

4, 서변장을 출발하였다. 변장을 따라가는 길이 없어 갔던 길을 6되돌아 나오면 동오포(東傲包)라는 마을에서 왼쪽으로 꺾어 산길로 들어서야 한다. 길에서 밀타작을 하고 있어 간신히 마을을 통과하여 제법 급한 경사를 올라간다. 짚차가 아니면 도저히 갈 수 없는 산길을 8달려가니 이도영자(二道營子)라는 마을이 나온다. 마을을 지나 3를 더 가니 오십가자진(五十家子鎭)에서 올라오는 큰 길을 만나고, 거기서부터는 흥안령쪽으로 올라간다. 큰 길을 들어서자 바로 왼쪽에 표지판이 하나 서 있는데 농업종합개발 오십가자항목구(五十家子項目區) 동변장개발촌(東邊墻開發村)이라고 씌여 있다. 2를 더 올라가 동변장에 도착하니 이미 510, 여름해임에도 불구하고 산의 동쪽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 있어 나그네의 마음을 다급하게 한다.

진시황제가 쌓았는데 몽고군을 막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는 더 황당한 얘기가 나온다. 변장을 찾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마을 뒤를 돌아 산으로 올라가더니 꼭대기에 올라 서서 보니 멀리 이어지는 모양이 그야말로 장성이다. 지금까지 본 변장 가운데서 가장 규모도 크고 잘 남아있는 곳이다. 치성도 거의 완형이 남아 있는데 높이가 6m, 너비가 15m 이상이 되는 대규모이다. 내려오는 길에 빗물에 잘려 단면을 드러낸 곳이 있어 자세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북경왕으로 산 중턱까지 올라갔으나 시간이 제법 걸려 출발하며 보니 시간은 이미 620분이다.

동변장을 떠나 6는 계속 이어지는 변장을 왼쪽에 끼고 달린다. 중간에 변장이 석양에 뚜렷하게 부각된 곳이 있어 한번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지만 더 이상 보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보지 않아도 섭섭하지 않을만큼 실컨, 아니 약간 가는데 마다 비슷해 약간 지겨울 정도로 이어진다. 그러나 처음 가졌던 의문은 계속된다.

왜 이 성을 쌓았을까?”

643, 대청하(大淸河)에 도착하였다. 지도에는 해일기격(海日其格)이라고 되어 있는데 현지에서 물어보니 대청하라고 한다. 대청하는 흥안령에서 사간목륜하로 흘러들어가는 개천 이름이다.

자 이제 해도 다 떨어져 가고, 변장의 실체도 다 파악했으니 내려가자

대청하에서 산 속으로 더 들어가 영생(榮生)이란 곳에 가면, 대청하에서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는 변장을 더 볼 수 있지만, 그것이 그것이고 새로운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서교수는 못내 아쉬워 한다. 지도에 고려성이라고 씌여있는 곳이 바로 영생부터 이어지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있다면 고려성이 아니라 하더라고 이곳은 참 볼만 한 곳이다. 바로 한산(罕山)의 자락이기 때문이다. 1936m의 한산은 새한한오랍(賽汗罕烏拉)이란 이름으로도 불리우는데 두 봉우리가 서로 마주보며 솟아있다. 모두 여 미터 씩 되는데, 정상에는 기암이 많고 4정도의 초원이 있다고 한다. 이 초원에는 두 군데에 못이 있어 맑은 물이 나는데 마르지도 넘치지도 않는다고 한다. 신비하고 장관인 이 산은 마치 우리가 백두산에 대해서 갖는 것과 같은 경외심을 가졌다고 한다.

 

요나라 경주성(慶州城)과 백탑

날이 어두어지므로 어차피 오늘은 볼 수가 없어 서둘러 내려왔다. 요양을 지나 요나라 경주성(慶州城) 자리가 있는 색포력알(索布力嘎)에 도착하니 이미 해는 넘어가 버리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다. 이곳을 만주국 지도에 따르면 차간소프루겐스무(白塔子)라고 했는데 스무는 향(), 즉 우리나라의 면을 뜻하는 것이니까 차간+스프리가+스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거대한 평지성인 경주성과 내성에 자리잡은 높은 백탑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이 백탑 때문에 이곳 지명이 만주국 시대에는 백탑자로 불리웠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산수가 아름다워 요나라 때의 황제가 사냥터로 쓰던 곳이었는데, 성종(聖宗)이란 황제가 이곳을 좋아해 자손들에게 내가 죽은 뒤 이곳에 묻도록 하여라고 하였다고 한다. 아들인 흥종(興宗)이 그 유언을 받들어 경운산(慶雲山) 남쪽 기슭에 능을 만들었고, 1031(景福 원년) 산 앞에 경주(慶州)란 읍을 만들어 황제능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 뒤 도종(道宗)과 흥종(興宗)도 이곳에 묻혀 세 황제의 능이 되었는데 경능(慶陵)이라고 한다.

경주성(慶州城)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된 이중성인데 현재 내성 성벽은 본존상태가 비교적 좋은데 외성 성벽은 회손된 부분도 많다. 성내외에 건축 유적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 백탑이다. 백탑은 내성 서북부에 세웠는데, 5층 벽돌에 새겨진 탑기에 따르면 탑의 본래 이름은 석가여래사립탑이라고 한다. 탑은 1049년 흥종 때 건립된 것인데, 팔각 누각식 벽돌탑이다. 탑의 높이가 50m나 되고, 탑의 외부에는 금강역사상, 경당(經幢), 보개(寶蓋), 비천(飛天), 화훼(花卉), 인물 등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 외부 각층에 있는 나무현판, 조각상, 기둥 등 곳곳에 828개의 구리거울이 달려있어 해가 비칠 때마다 반사되어 사방으로 비친다. 현제 탑신 전체에 백회를 바르고 꼭대기 표면에는 금도금을 해, 탑 전체가 광채를 발휘하기 때문에 수십리 밖에서도 웅대한 자태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날이 너무 어두워 사진이 나올는지 자신은 없었지만 1분의 1초 타임을 주고 촬영을 한 뒤, 요나라 성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성을 한 바퀴 둘러 보았다. 성터에서 경능(慶陵)까지는 몇 킬로를 더 가야 하기 때문에 포기하기로 했다.

 

험난지로(險難之路) 행복지로(幸福之路)

 

해는 져서 어두운데, , 여기서 자고 갈까, 아니면 밤중에 이동을 할까? 시간을 보니 다른 날 보다는 시간이 좀 남는다. 원래 오늘 임동까지 가기로 되어 있었으니 가능한 한 더 가보기로 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굉장한 무리였다. 우선 색포력알 바로 아랫 마을이 고구려마을(高麗艾勒)이란 이름을 가졌으니 조사를 해야 하는데, 피곤하고 힘드니까 저녁에 무얼 찾을 수 있겠어?’, ‘모두 잠 잘 시간이야라고 핑계를 대고 통과한 것이다. ‘한 번 물어나 보자고 했으나 잘 진행이 되지 않을 정도로 심신이 곤했다.

떠난 지 얼마 안되어 우리의 선택이 무리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은 밤 늦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도로사정 때문이다. 초원의 길 때문이 아니고, 진흙탕 때문도 아니다. 도로를 돋우기 위해 흙자갈을 잔뜩 깔아 놓아 제아무리 북경왕이라 하더라도 뾰족한 수가 없는 것이다. 속도가 문제가 아니라 정말 위함한 강행군이었다. 그런데다 길은 상당한 각도로 내려가는 길이라 흙자갈 위를 달릴 때는 옆길로 밀려 구를까봐 겁이 나고, 길이 약간 좋아져 달리기 시작하면 내리꽂듯이 달리는 차가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할 때마다 공포가 엄습해 온다. 모두들 말은 안하고 있지만 밤길 곡예를 중단했으면 하는 눈치들이다. 그러나 중간에 잘 곳도 먹을 곳도 없다. 한 밤중이라 길 물어보기도 어려운데 가도가도 끝이 없다. 여관이나 식당이 있는 곳이 나오면 무조건 자기로 마음먹었다.

산을 거의 다 내려와 가로수가 늘어서 있고 제법 구색을 갖춘 마을에 도착한 것은 밤 9시 반이었다. 사실 9시 반에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오늘만의 일이 아니지만 오늘은 정말 배고프고 피곤한 날이다. 아침 10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지금까지 빈속인데다 그 공포의 도로를 달렸으니 모두들 말이 아니다. 여기저기 물어서 자고있는 여관 주인을 깨워 저녁식사하고 잠자리에 드니 이미 11시가 다 된다. 운전수는 이미 녹초가 되어 간신히 몇 숟갈 들고 다시 곤한 잠에 떨어진다. 지도를 보며 마을 이름을 물어보니 행복지로(幸福之路)라고 한다. 험난지로를 지나 행복지로를 만난 것이다.

 

822일 임동 -

 

파림좌기의 중심지 임동

 

밤이란 참 좋은 것인가 부다. 휴식을 주기 때문이다. 어제 그렇게 힘들게 뛰었는데도 5시가 되자 모두들 다시 기상하여 강행군을 준비한다. 6시 출발하여 얼마 안 가 철길을 건너고 이내 큰 길이 나오면서 아스팔트 길이 나온다. 가까운 마을 이름을 물어보니 사간물소(査干勿蘇)라고 한다 오랜만에 신나게 달려 일찍 임동진(林東鎭)에 도착하였다. 임동진은 파림좌기(巴林左旗)의 정부가 있는 곳으로 진이니 우리나라의 읍에 해당한다. 파림좌기는 면적이 6600이고 인구가 323,000인데, 그 가운데 84%가 중국 한족이 차지하고 있다. 몽고족이 47000여 명으로 소수민족 가운데서는 가장 많다. 인구의 대부분인 93.2%가 농업인구이고, , 아연, 주석, , , 수정, 보석 등의 광산물도 나는데, 특히 1979년 개광한 백음낙이(白音諾爾) 아연 광산은 앞으로 160년간 채광할 수 있는 풍부한 매장량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먼저 호텔을 찾아갔다. 여기 저기 전화할 곳도 있고, 대개 호텔에 가면 관광안내서가 있기 때문에 쉽게 현지 사정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여기 저기 전화해서 적봉에서 심양가는 기차표를 부탁했다. 그러나 관광안내서는 없었다. 시내에 가서 책방을 뒤졋으나 아내서는 찾을 길이 없다. 한국에서 미리 자료를 준비해 가지 않았다면 현지에 대한 정보를 현지에서 얻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가져간 자료에는 너무 간단히 소개 되어 있다.

임동진 남쪽에는 요나라 수도 상경 임황부(臨潢府) 유지가 있고, 남산 언덕 위와 진 소재지 안에 남탑과 북탑이 있다. 요나라 초기에 세운 석방자(돌방)가 있는 조주성(祖州城) 유지와 요나라 태조능, 사간합달쓰무(査干哈達蘇木) 경내에 있는 요나라 때의 석굴사(石窟寺) 등이 있으며, 오력길목륜하(烏力吉木倫河) 유역 부하(富河)의 개울 가에 있는 부하문화라는 신석기 유지가 있다.

 

요나라 상경 터는 고구려 성이었는가

 

우리는 대강 일을 마치고 우선 상경성으로 가 보았다. 이 상경성 자리를 만주국 때의 지도에는 고구려 성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경성 터는 읍내를 벗어나기 전 외곽 남쪽에 자리잡고 있고, 읍내에서 남쪽으로 빠져 나가는 대로가 바로 이 성터 한 가운데를 지나가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우선 박물관에서 받은 작은 안내서에 나온 사실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성터는 오이길목륜하(烏爾吉沐淪河)와 사리하(沙里河) 두 강 사이에 있는데, 이 주변은 바로 요나라 태조가 나라를 세운 곳이다. 기록에 따른면 요나라 태조 야율라보기가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고 요나라를 세운지 3년째 되는 909년 건축하였으며, 925년 태종이 등극하면서 확장하였다.

문헌의 기록과 고고학적 발굴 결과에 따르면, 요나라 상경은 남성과 북성이 붙어 있는데 북성을 황성(皇城)이라 하고 남성을 한성(漢城)이라고 한다. 두 성을 합치면 성의 둘레가 8.5나 되는 큰 성인데 4개의 문이 있다. 남문은 큰 길이 나 없어져 버리고 나머지 문들은 윤곽이 남아 있는데 문밖에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성의 높이는 3()이고 망루(樓櫓)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제 성의 높이는 610m이고 43개의 망루(중국말로는 敵樓라고 한다)가 남아 있다.

성은 외성과 내성(중국에서는 大內라고 한다)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성은 성 북쪽 높고 평평한 평지 위에 있는데, 개황전(開皇殿), 선정전(宣政殿), 오만전(五彎殿) 등 세 대전의 터가 있다. 내전 남문을 승천문(承天門)이라고 하는 대 위에 누각이 있었다. 승천문 남쪽에 요사에 나오는 정남가(正南街)’용사가(龍寺街)’가 있는데 이것이 외성이다.

외성 남쪽에 한성(漢城)이 있다. 이 한성은 성밖에 따로 성을 쌓아 한인(漢人)이나 상인들의 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성 남쪽 옆길에 누각들이 맞서 있고 점포, 술집들이 그 사이를 잇는다. 성내에 상경이 속하는 현의 아문이 있고, 각국 사신들이 머물던 역관도 있다. 현재 한성은 이미 대부분 농토로 변해 그 흔적만 간신히 판별할 수 있을 정도이다.

황성 안에 현존하는 석각 관음상이 하나 있는데 실제는 없다(?). 그 서쪽에 거북이 모야의 비석 좌대가 하나 있고 그 부근에서 거란문자가 세겨진 석물을 몇 개 발견하였다. 성 밖의 남북 산 언덕에 벽돌 탑이 하나씩 있는데 남쪽 탑이 더 아름답다. 팔각 탑인데 높이가 25m이다. 현재의 모습은 1991년 보수한 것이라고 한다.

상경은 1120년 요나라가 지배했던 발해의 후손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게 점령당해 202년만에 주인이 바뀐다.

 

상인들의 주거지였던 한성터에서 요나라 때의 동전이나 자기, 요나라 글자로 쓴 비석들이 발견되었으니 요나라 성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필자는 벌써 두 개의 요나라 성을 보면서 고구려 성과의 차이를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었다. 고구려가 주로 석성을 많이 쌓은 데 반해 요나라 성은 모두 토성이며, 옹성과 치성을 그대로 이어 받았지만 그 형태가 약간씩 달랐다. 옹성은 많이 회손되어 자세히 관찰하지 못했지만 치성은 마치 석벽 중간 중간에 큰 무덤을 쓴 것처럼 불뚝하게 솟아 있다. 고구려 치성이 직각으로 쌓아 적군이 쉽게 오를 수 없게 한 것과 비교할 때 접근이 훨씬 쉽게 되어 있고, 고구려의 치성 꼭대기는 성벽 윗면과 같은 높이로 쌓아 성가퀴를 일율적으로 설치하는데 반해 요나라 성은 성벽보다 불뚝하게 솟도록 해 전망대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고구려 성은 주로 높은데다 쌓기 때문에 망루 기능보다는 방어기능에 중점을 둔 반면, 요나라는 주로 평지성을 쌓았기 때문에 적군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시설에 중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서쪽은 몽고인, 동쪽은 고구려인

 

, 문제는 이런 요나라식 평지성이나 요나라 식이 거의 분명한 변장을 현지 몽고인들이 고구려성이라고 부르느냐 하는 것이다. 지금은 84%로가 중국인이지만 1930년대 러시아인이나 일본인들이 이곳을 조사할 때는 대부분 몽고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몽고인들이 이런 요나라식 성을 고구려성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첫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고구려가 한 때라도 여기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나라가 여기에 성을 쌓기 전에 고구려 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선 광개토태왕의 패려 정벌 때 그 목적지가 바로 이곳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패려가 바로 거란이라고 보았을 때 여기가 바로 거란의 본거지이고,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의 침공을 두려워한 거란은 모두 지금의 대능하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직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거란에 비해 강력한 고구려가 이곳을 지배했다면 그 영향력은 거의 전설적으로 남을 만큼 컷을 것이다.

임동을 위주로 한 거란의 거점이 광개토태왕에 의해 정복당한 남로의 종착점이라면, 필자가 처음 간 우란호터를 지나 흥안령을 넘어 지두우로 가는 북로는 장수왕의 정복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몽고인들이 이곳을 지배할 당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고구려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 후손인 발해가 망한 뒤, 그 후손들이 다시 금나라를 세워 이 땅을 빼앗았기 때문에 나라는 금나라지만 민족은 고구려일 수 있다. 몽고인들이 이곳을 점령한 것은 몽고가 나라를 세운 1206년에서 금나라가 망한 1234년 사이일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요나라 때 이주한 발해의 후손들을 현지에서 고구려인이라고 했듯이 금나라 때도 민족명은 같았기 때문에 1200년대에 들어온 몽고인들에게는 현지인들은 모두 고구려인이었을 것이다. 한편 다시 몽고를 무찌르고 옛땅을 찾은 것이 바로 금나라의 후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후금이라고 했고 나중에 청나라라고 바꾸었지만 몽고인들이 보기에는 청나라를 구성한 만주족 역시 같은 고구려인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렐리졔프가 조사한 몽고인들의 증언을 다시 한 번 인용할 필요가 있다.

현지의 주민들은 500600년 전에 징기스칸성벽의 西面(덧 붙여 말한자면 이 성벽은 索倫에서 남쪽으로 山海關 까지 뻗어 있다.)에는 몽고인이 살고 있었고 東面에는 高麗人이 살고 있었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몽고인들의 전설적 구전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변장을 경계로 몽고 동쪽은 고구려인이 살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읍소재지에 있는 당당한 박물관

 

시내에서 자료를 구하지 못한 채 상경을 본 우리는 자료를 찾기 위해 성안에 있는 문물관리소에 가 보았으나 문이 굳게 닫혀 있어 헛수고였다. 마침 아침 일찍 임동에 들어올 때 입구에서 본 박물관 간판이 생각나 그곳에 가보자고 했다. 북탑산으로 약간 올라간 박물관은 의외로 쉽게 찾았다. 박물관에 들어가 보니 문이 잠겨져 있다. 사무실에 가니 젊은 청년과 나이든 아주머니가 트럼프놀이를 하다가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친절하게 전시실 문을 열고 안내해 준다.

전시실에는 관할 기()에서 출토된 선비, 거란, 여진, 몽고 등 각 민족들의 역사 유물들과 근대 혁명관계 유물들이 15,000점 전시되어 있었다. 1984년에 개관하여 아직 역사도 그다지 깊지 않은일개 읍 소재지에서 이처럼 많은 유물을 모았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전시 수준도 제법 잘 한 편이었다.

사진 좀 찍을 수 있을까요?”

원칙적으로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유물은 찍지 않고 벽에 그려진 조감도나 설명서만 찍는다고 하자 마음씨 좋아 보이는 젊은이가 허락을 한다. 아까 방문했던 상경성과 오후에 가 볼 조주성(祖州城)의 조감도, 요나라 때의 벽화, 부하문화와 홍산문화 같은 신석기문화 설명...

사진기 넣으세요

문 앞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관장이 온다면서 다급하게 말한다. 관장이 사무실로 들어가자 요나라 문자로 된 비문, 화폐 등을 찍고나서 보여준 직원들이 곤란하지 않도록 사진기를 가방 안에 넣고나자 관장이 왔다. 관장의 안내를 받으며 좀 더 자세히 관람하였다. 주로 요금시대의 유물인데 이곳이 요나라의 발상지고 수도였기 때문에 거란의 유물이 많았다. 특히 거란의 글자로 쓰인비문의 글씨 가운데 자 같은 한글 비슷한 문자가 있어 관심을 끌었다. 요금의 역사를 연구하는 한국의 학자가 이미 방문했다는 관장의 말을 듣고 물론 고구려사와 연관해서 오지는 않았겠지만 이제 우리나라도 각 방면에서 다양한 연구자들이 나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반가웠다.

 

고구려샘(高麗泉)을 찾아라

 

박물관을 나와 북쪽으로 향했다. 우리가 북쪽으로 가는 목적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어제 못 본 변장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제시대 때 나온 지도에 고려천(高麗泉)이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그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일본의 국립 육지측량부에서 제자한 지도에 고려성이라고 표시한 것은 현지에서 분명히 확인하고 썼을 것이다. 그러니 변장을 끝까지 확인해야 한다.”

어제 늦어서 보지 못한 고려성 부분을 그냥 다른 변장과 같다고 지나친 것에 대해 서영수 선생이 계속 미련을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설령 적봉의 홍산문화를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곳에서 시간을 더 투자해 다시 답사하기로 했다. 적봉은 쉽게 다시 올 수 있지만 이곳을 다시 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제 온 길을 다시 올라 간다는 것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길을 택해 변장을 접근하는 길을 찾아보니 북쪽으로 가면 고려성이라는 성벽의 끝부분에 갈 수 있었다. 그런데다 일본 가나글자로 포스네라라고 쓴 곳에 고려천(高麗泉)이 있는데, 오늘 가는 길목에 있어서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이 근방에 와보기로 한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려성과 고려성자가 일제시대 지도에 나왔기 때문이지만 필자는 이곳 답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고려라는 지명을 세 군데 처 찾아서 표시해 놓았다. 우선 방금 언급한 고려천이고, 현재의 지도에 고려마을(高麗艾勒)이 두 곳 나온다. 한 군데는 어제 그냥 지나친 곳이고 다른 한 곳은 임동에서 대판으로 가는 길 왼쪽에 있으니 오늘 가는 길에 찾아가 보려고 한다.

읍내를 벗어나서부터 차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비 온 뒤라 길이 온통 흙탕으로 울퉁불퉁해서 지금까지의 달려온 길도 어려운데가 많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최악의 상태였다. 십삽오포(十三敖包)까지 11를 가는데 가장 힘들었다. 다시 21를 달려 갈림길이 있는 하화방(下伙房)에 도착하니 벌써 10시 반이 되었다. 길이 갈려지는 동네 복판에 하화방이란 돌표지가 서 있고 교통지도에도 그렇게 표시되어 있는데 내몽고에서 나온 가장 자세한 지도에는 해력근태(海力根台)라고 되어 있어 길 찾는데 기준잡기가 힘들다.

하화방에서 서쪽으로 꺾어 달리다, 얼마 안가 오향영자(五香營子)에서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튼다. 남산만(南山灣), 장가영자(張家營子), 고유수(孤楡樹) 등 작은 마을을 지나 1110분 새로운 마을 어구에 들어 서는데 여기가 만주국 지도에서 말하는 고려천이 있는 포스네라라는 감이 들었다. 차를 세우고 현선생에게 지나가는 할아버지에게 한 번 물어보라고 했다.

여기 고려천이라는 샘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노인은 너무 쉽게 대답하며 마을 뒷편을 가리킨다. 우리는 모두 차에서 뛰어 내렸다. 정말 생각치도 않은 대어를 낚은 것이다. 단 한 번의 물음에 정확하게 현장을 알고 있는 노인을 만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어떤 필연성을 확실하게 느끼는 순간이다. 우선 노인에 대한 인적사항을 적는다.

이름 : 陸振會

민족 : 몽고족

나이 : 65

주소 : 巴林左旗 四方城鄕 海蘇溝屯

 

고구려인이 살던 터전

 

부인도 없이 아들 하나하고만 산다는 노인은 아들하고 할 일이 있다며 동행을 망설이다가 현선생이 노숙하게 몇마디 설득하자 함께 차에 탄다. 노인은 마치 자기 집을 안내하듯이 운저사에게 길을 안내한다. 마을 뒤에는 샘이 있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샘이 아니라 개천처럼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샘이라고 하는 것은 이 물이 샘처럼 땅 속에서 솟아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고려천입니까?‘

아닙니다. 내가 안내하려는 곳은 고구려인들이 살던 마을입니다.”

이것은 지도에도 없는 말이다. 마을을 지나자 골 안에 넓은 벌판이 나오고 거기서 다시 3쯤 가서 차를 오른쪽 풀밭으로 인도한다. 운전수가 약간 망설이자 차가 갈 수 있다며 밀고 나간다. 낮으막한 산 밑에 거의 다 가서 노인은 손을 휘이 저으며 말한다.

여기가 전부 고구려 사람들이 살던 땅이다.”

여기서 저기까지는 300m이고, 이쪽으로는 500m이다.

마치 자기가 붙여먹는 밭처럼 훤하다. 300×500m(800m?)라면 15000이니 약 5000평 쯤 되는 넓이다. 건물터라고 가리키는 곳을 보면 돌들이 아직도 완연하게 남아 있다. 샘도 있다. 제법 큰 샘인데 너비를 재보려고 하다 깜짝 놀랬다. 다른 초원보다 약간 풀들이 잘 자라긴 했지만 발목 쯤 닫는 것이 보통인데 특별이 샘 안에서 큰 풀만 사람 키만큼 커서 샘 밖으로까지 올라와 있다. 보통 여늬 풀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던 풀이 옷을 통해서 찔렀는데도 굉장히 아프다. 내가 소리 지르자 현선생이 자기도 찔렸다며 조심하라고 늦은 경고를 한다. 어지간 하면 풀을 베어내고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하락하이라는 이 독풀 때문에 불가능하였다. 풀이 높게 자라는 것을 보면 지금도 습기가 많으니 파면 물이 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만주국시대 지도에 고려천(高麗泉)이라고 기록한 것은 바로 이 우물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집은 선조 때부터 대대로 이곳에 살았는데 어렸을 때 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느냐고 물었더니 거침없이 대답한다. 지금까지 만난 증언자들 가운데 이처럼 분명하고 확신에 찬 사람은 처음 본다.

“50년대 여기를 발굴했는데 돌절구가 나왔다.”

묻지 않는 말도 한다. 고구려인이 살았다고 하는 데는 거의 틀림없이 돌절구가 나오는데 고구려인과 돌절구는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여기서 발굴이란 박물관 같은 유관기관에서 정식으로 발굴한 것이 아니고 동네사람들이 찾아서 가져갔다고 했는데 동네까지 찾아가서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아직 어떤 기관에서도 발굴하지 않았는데 이런 노인조차 돌아가신다면 이런 고구려의 역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만해도 아찔한 생각이 든다. 우리는 아침에 산 수박을 한 통 잘라서 함께 먹으며 고구려의 흔적을 찾은 기쁨을 나누었다.

그것 봐, 내가 가보자고 했잖아

서교수가 고집을 부려 이쪽 코스를 왔기 때문에 이런 수확이 있었다는 자랑이다. 그리고 그런 학자적 고집이 큰 행운을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무엇 때문에 변장을 쌓았을까?

 

1220, 고구려마을을 떠나 10분쯤 가니 북화방(北伙房)을 지나 바로 사방성(四方城)이다. 동네 들어가는 입구 바로 길가에 커다란 표지판이 서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사방성은 밭을 일구느라 거의 회손되었지만 그래도 성의 흔적이 뚜렸하고 마을을 돌아 반대편으로 가 보니 치성도 제법 잘 남아 있었다. 사방성을 보고 바로 출발하였다. 이제부터는 고려성의 끝을 보러 가는 것이다. 과연 고구려 성처럼 무엇인가 다른 것이 나타날 지, 아니면 동변장이나 서변장과 똑같은 변장일는지 궁굼하다.

사방성에서 4정도 가니 사부태(沙不台)라는 작은 마을이 나오고 여기서부터는 흥안령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초원이 이어진다. 나는 계속해서 왼쪽만 바라보고 달렸다. 지도에 따르면 길에서 왼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변장의 마지막 부분이 보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당한 시간을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변장은 보이지 않는다. 길은 비교적 좋고 다시 초원으로 들어서 시원하게 달리는데 옆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 성벽이 나타났다. 우리는 열심히 왼쪽에서 찾았는데 우리가 달리던 길이 바로 장성을 가르고 지나가는 것이다.

여기도 똑같은 변장이구나

차에서 내려 자세히 보니 지금까지 보아왔던 변장과 같은 것이다. 넓은 들판에 비교적 잘 남아있는 변장 위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자세히 관찰하였다. 동쪽은 산을 넘어 계속 이어지고 서쪽은 길 건너 넓은 벌판을 달려 아스라히 보이는 산넘어로 사라진다. 들판 가운데로 낮으막한 언덕이 이어지고 변장은 그 끝부분을 지나가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그 언덕 위에서 건너편을 다시 조감해 보기로 하였다.

북경왕을 타고 성 밖 언덕 위까지 달려 올라 갔다. 차를 세워놓으니 약간 위태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경사가 있는 언덕이다. 한 눈에 들어오는 성벽은 단순하다고 할 정도로 곧게 이어지면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치성이 바가지 두 개를 엎어놓은 것처럼 설치되어 있다.

무엇 때문에 이 성을 쌓았을까?’

여기서는 북쪽이 적군일 것이므로 남쪽을 지키기 위해 쌓았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북쪽에 성 안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이 있으니 성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곳에 성을 쌓아 무슨 전략적 가치가 있을 것인가? 아무리 보아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가장 너그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국경을 표시하기 위한 것인데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품을 들였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출발하면서 보니 벌써 130분이다. 돌아오는 길에 방목하는 가축들도 많고 가끔 화물차들도 만나는데 여기서 조금만 가면 백음낙이(白音諾爾) 아연 광산이기 때문이다. 15분만에 사포태 마을에 도착했는데 거리를 보니 변장에서 9정도 된 곳이다. , 이제는 무조건 처음 나타나는 식당에서 시급한 민생고를 해결하고 가야 한다. 2시 정각에 벽류대향(碧流台鄕)에 다다르니 식당이 있다. 식당 이름이 사방성, 성을 찾아다니다 보니 식당도 성이름이 붙은 곳이다.

35, 출발하여 임도에 돌아오니 5시가 되었다. 계속 고치고 있어 오전에 갈 때보다는 좀 나아졋지만 정말 힘든 길이었다. 거리계를 보니 변장에서 임동까지 70인데 다녀오는데 거의 하루가 다 걸렸다.

 

요나라 시조 야율라보기 능과 조주성(祖州城)을 찾아

 

임동에서 쉴 틈도 없이 임동을 벗어나 서쪽으로 달렸다. 오늘 적어도 조주성(祖州城)까지는 보아야 하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스팔트길을 21쯤 가니 석방자(石房子)입구가 나온다.

석방자 임장(林場)을 찾아가면 된다

고 했으니 여기서 석방자 들어가는 오른쪽 길로 꺾어 들어간다. 상당히 유명한 관광지이기 때문에 찾아가기가 쉬울줄 알았는데 안내표지판 하나도 없다. 관광지로 들어가는 큰 길을 내느라 공사중이라 찾아가기가 더 힘들다. 일직선으로 뻗은 들판길을 지나 조금 가니 산속으로 들어가고 얼마 안가서 조주성이 눈에 들어 온다. 누구에게 묻지 않다도 성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것 같은 이 저녁 무렵이라 길을 물을 사람도 없을까봐 걱정했는데, 골짜기로 들어가니 제법 큰 건물이 하나 나오고, 차 소리를 듣고 두 세 사람이 나와 마중을 한다. 임장을 관리하는 건축물인데, 여기서 근무하는 조주성 관리인이 입장료를 걷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한 사람에 5원씩을 내고 먼저 요나라의 시조인 야율라보기의 능을 관람하기 위해 왼쪽 길을 택해 올라 갔다. 찻길이 나 있어 그렇지 한 참 올라간다. 계곡 어귀가 나오면서 길이 두 갈레로 나누어진다. 안내판 하나 없는 이곳에서 우리는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들어가면 계곡인데 그런 계곡 안에다 황제의 능을 쓸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오른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언덕을 올라서 보니 바로 조주성과 연결된 길이었다.

 

요나라 조주성

 

이 지역에 대한 자료를 구하기 힘들었는데 마침 아침에 들렸던 박물관에서 간단한 안내책자를 받은 것이 있어 참고로 그 내용을 간추려 본다.

 

조주(祖州)는 요나라 태조 야율라보기의 능을 보호하기 위해 건립한 특수한 고을이다. 927년 요나라 태종이 건치한 것인데 여기에 성을 건설하기 이전에는 요나라 황실의 가족이 살던 땅이다.

조주성은 임동진 서남쪽 30지점에 있는 석방자 임장(石房子 林場)에 있다. 둘레가 4.5이고 장방형인 이 성은 동남쪽을 향하고 있고 4면에 각각 문이 있다. 성 안 뒷쪽에 각루가 있고 내성에는 상당히 큰 건물 터가 있는데 요사(遼史)에 나오는 흑룡전(黑龍殿)과 이의전(二儀殿)일 것이다. 이 전 안에 태조 야율라보기의 금상과 태조가 정복전 때 사용한 병기와 갑옷이 안치되어 있었다.

내성 밖 동쪽의 집터는 제관해사(諸官廨舍)’능면원(綾綿院)’ 등의 터이고, 서쪽의 높고 평탄한 곳에 장방형 뜰이 있다. 이 뜰 뒷쪽에 일곱 쪽의 거대한 화강암 석판으로 지은 돌집이 있는데 속칭 석방자(石房子)라고 한다. 돌집은 성과 마찬가지로 동남향이고 길이 6.7 m, 너비 4.8m, 높이 3.5 m이며, 문위 좌우에 창이 있다. 두껑돌의 무게가 약 40톤이고 겉모양의 꾸밈과 運料???가 대단히 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 돌집의 용도에 대해서는 국내외 학자들의 의견이 다른데 거란 민족의 습속과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다.

지형을 살펴보면 성안에 T자 모양의 큰 길이 내성과 외성을 이어서 나 있고, 계속해서 저자거리로 연결되어 있다. 내성 앞은 평행으로 큰길이 나 있는데 기록에 나오는 동남쪽 옆길이 있고 네 귀퉁이에 망루가 마주하며 서 있다고 한 가로지르는 큰길이다. 외성은 동서 둘로 나뉘는데, 요사에 따르면 동쪽은 장패현(長覇縣), 서쪽은 함령현(咸寧縣)으로 이 두 현이 조주를 다스렸다고 한다. 남문을 지나 남쪽으로 가면 골짜기가 나오고 돌다리 터가 나오는데 그 서쪽이 300m 거리의 저자거리다. 길 양쪽에는 집터가 밀집되어 있는 일반 평민들의 주택으로 보인다. 골짜기 돌다리를 건너면 상경으로 가는 옛날 길이 보인다. (中共巴林左旗委宣傳部, 巴林左旗愛國主義 敎育基地敎材, 22)

 

우리가 도착한 곳은 관리소에서 오른쪽으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곳인데, 이곳이 조주성의 서문이고 안내판이 서 있다. 토성인 성벽은 아직도 상당히 높게 남아 있다. 서문을 지나 우거진 수풀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바로 석방자가 나온다. 현제 성 안에 남아있는 유적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곳이기 때문에 이곳이 첫 관광코스인 모양이다. 주위에는 무진장이라고 할만큼 많은 기와조각들이 널려 있어 커다란 건물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석방자가 무슨 용도로 쓰였는지 기록에도 없지만 필자도 전혀 감을잡기가 어려웠다.

석방자에서 동쪽으로 내성을 따라 가면서도 보니 가는 곳마다 기와 조각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일반적으로 내성과 외성이란 개념은 밖으로 외성 성벽이 있고 안에 작은 내성이 있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인데, 여기서 말하는 내성과 외성이란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성안이 앞 뒤로 나뉘고, 주요한 건물이 들어선 안쪽이 내성이 되고 내성 앞쪽에 거의 같은 규묘의 외성이 있고 이 두 성을 둘러 쌓은 큰 성벽이 있다. 요나라의 축성법을 확실하게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계곡 안의 태조능

 

조주성을 나올 때는 이미 해가 서산 너머로 떨어지고 말았다. 여기까지 와서 야율라보기의 능을 보지 않고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시 올 수도 없으므로 서둘러 현장이라도 확인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아까 갈라졌던 길로 가서 직진해 가니 불과 몇 십 미터 안에 태조능에 관한 표지판이 서 있었다. 아침에 받은 안내서를 읽어보았더라면 쉽게 찾을 수 있었을텐데 그럴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잠간이라고 헤메게 되었던 것이다. 우선 안내책자에 나온 내용을 보기로 하자.

 

태조 야율라보기의 능은 조주성 서북쪽 1.5에 있는 바구니 모양의 계곡 안에 있다. 계곡 안은 삼림이 무성하고 땅에서 솟은 물이 흐른다. 이것은 󰡔요사󰡕에서 태조능이 있는 곳을 액천(液泉)’여곡(黎谷)“이라고 표현한 것과 일치한다. 협곡 사방의 봉우리는 경치가 대단히 아름답다. 계곡 입구 터진 곳에는 모두 돌덩어리로 높은 벽을 쌓았다. 계곡 입구의 바위들이 마치 커다란 용이 머리를 추겨 든 것처럼 동서로 서로 맞보고 있어 자연히 산의 문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이 요나라 사람들이 말하던 흑룡문일 것이다. 이 흑룡문이 이 산을 들고나는 단 하나의 문인데 두 봉우리 사이의 거리는 100m가 좀 못된다. 가운데는 문터가 있고 위에는 건물터가 있다. 흑룡문 밖 오른쪽 높은 언덕 위에 건물터가 있고 그 위에는 주춧돌이 있다. 그 오른쪽에 또 뾰족한 산머리가 있는데 조주성과 맞보고 있다. 그 위에 건축터가 있고 거북모양의 비석 좌대가 하나 남아 있다. 주위에서 거란문자로 쓰인 비석 조각들이 여러 개 출토되었다. 이곳이 󰡔요사󰡕에 나오는 비석을 세워 태조의 창업 공을 세기었다고 한 곳일 것이다.

계곡을 들어가 북쪽으로 약 11.5들어가면 전각이 있던 터가 있다. 양 방향으로 크고 작은 주춧돌들이 남아 있는데 전각의 터가 상당히 큰 것으로 보아 󰡔요사󰡕에 실린 태조천황제묘(太祖天皇帝廟)’일 것이다. 계곡 깊은 곳에 능묘로 보이는 것이 두 곳 있다. 하나는 협곡 동북 구석 도랑 입구에 흙무덤이 있는데 무덤 옆에 전각 터가 있다. 해방 전 어떤 사람이 파 보았다는데 아직 확실한 정론이 없다. 다른 하나는 깊은 산골 가운데 뒤편 서북쪽의 작은골에 있는데 속칭 석인구(石人溝)라고 한다. 도랑 동쪽에 큰 산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그 산 앞에 거대한 흙무덤이 하나 있다. 흙무덤은 주홍색인데 다시 복토한 흔적이 뚜렷하다. 무덤 꼭대기에 풀과 나무가 적고 가뭄 때마다 말라 죽은 것이 많다. 마을 사람들은 대권분(大券墳)이라고 부르고. 초목이 말라죽는 것은 모두 지하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사에 따르면 태조능은 산을 파서 전각을 지었는데 명전(明殿)이라고 한다고 했으니 명전은 지하에 있는 궁실이고, 그렇다면 이 산이 태조능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흙무덤 양쪽에 머리가 회손되고 어깨가 끊어진 돌사람이 한 구 있는데 절반 정도가 땅에 묻혀 있다. 돌사람은 몸매가 풍만하고 옷은 간단히 몸에 두르기만 해 마치 나체와 같다. 두 손을 맞잡아 배 앞에 놓고, 등에는 머리를 길게 땋아 여성과 같다. 이 석상은 능 앞에 세운 석물의 일종일 것이다. 이 전각 남쪽 고개 산 비탈에 건물 터가 하나 있는데 시제를 준비하던’ ‘천성당(天膳堂)이 틀림 없을 것이다.

1120년 금나라 군이 상경을 함락시킨 뒤 계속해서 조주성도 짓밟았다. 이 때 성과 능은 크게 회손되었다. 조주성과 태조능은 1988113일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었다. (中共巴林左旗委宣傳部, 巴林左旗愛國主義 敎育基地敎材, 23)

 

계곡 안으로 들어가 조금 가자 다리를 놓고 호수를 만드는 등 관광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이지만 마무리 공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어설퍼 보인다. 길은 안쪽으로 계속되는데 깊은 산골인데다 날이 어두어져 가 네 사람이 함께 가니까 그렇지 혼자는 무서워서도 되돌아 왔을 것이다. 비교적 나무들이 잘 자란 길을 한참동안 올라가다가 운전사가 차를 세운다. 차가 더 올라갈 수가 없어 걸어서 조금 더 올라가는데 능으로 보이는 것을 찾을 수가 없다. 시간은 7시를 넘었지만 조금 더 올라가다 문득 이 낮은 산봉우리가 바로 능이구나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13능이나 다른 황제들의 능과 비교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날이 컴컴해지기 시작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되돌아 오는데 길가에서 조그마한 석상을 하나 발견하였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정도이다. 이것이 바로 안내서에서 말하는 돌사람이라고 보면 우리는 안내서에서 말하는 두 번째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

후렛쉬를 써서 석상은 찍고 전경도 하나 찍은 뒤 부지런히 출발하였다. 나오면서 보니 입구까지가 3이고, 거기서 다시 8를 나오니 임동과 대판을 잇는 아스팔트 길이 나온다. 시간은 이미 740, 캄캄한 길을 66더 달려 파림우기(巴林右旗)의 행정중심지인 대판진(大坂鎭)에 도착하니 915분이다. 밖으로 나오니 이미 거리도 한산하고 가까운 곳에는 식당도 별로 없다. 조금 걸어 간신히 식당을 찾아 간단히 끼니를 떼운 뒤 샤워를 하고 취침.

 

823() 대판 -고구려 마을 - 시라무렌강 - 홍산 - 적봉

 

고구려 마을, 고구려 강

 

오늘은 고구려 마을을 찾아나서는 날이다. 5시 기상하여 준비하고 퇴방(退房, 체크 아웃)하고 나니 550분이다. 어제 온길이 아닌 다른 길을 통해서 북경왕은 새벽길을 달린다. 아스팔트는 아니지만 잘다듬어진 길이라 20분만에 익소모도(益蘇毛都, 모도는 몽고어로 도시라는 뜻)라는 마을에 도착한다. 우리가 찾아나서는 고려마을(高麗艾勒)을 지도에서 보면 이 익소모도라는 마을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가면 있다. 그러나 마을에 들어서자 마자 비온 뒤 패인 길 때문에 우리는 짚차 안에서 말을 타기 시작하였다. 길도 불분명한데다 이른 아친아라 그런지 길가에 물어볼 사람이 없다. 마을 마지막 집에서는 할 수 없디 텃밭 안에 있는 집 쪽을 향해 큰소리로 길을 물었다. 일단 제대로 가고 있다는데 안심이 되었다.

불과 5를 가는데 20분이 걸릴 정도로 길이 험하다. 이른 아침이지만 목축을 하는 사람들은 이미 가축(주로 양)을 몰고 초원으로 나가고 있었다. 지도상에 나타난 고구려마을이라고 생각되는 마을 앞에 다다르니 마침 20대 처져가 지나가 현선생이 여기가 고려마을이냐고 물었으나 대답이 쳐다만 보고 말이 없다. 몽고족이라 중국어를 몰라 말이 통하지 않은 것이다. 조금 더 가니 40대 청년이 나와 물어보니 바로 그 동네가 고리아이리(高麗艾勒), 즉 고구려마을이라는 것이다.

마을 앞으로 고려하(高麗河)가 흐르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고려(高麗)라고 했다.”

마을 바로 앞으로 서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흐르는 작은 강이 고려하라고 한다. 고구려마을을 찾다가 고구려강을 찾은 것이다. 좀 더 확인하기 위해 동네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더니, 해가 떠오를는쪽에서 말을 타고 오는 사람을 가리킨다. 바로 그 노인이 아침 일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라는 것이다. 66세라는 노인의 말도 똑 같다. 이 마을에서는 이미 상식화되어 있기 때문에 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이곳에 왜 고구려 성, 고구려 마을, 고구려 강, 고구려 집터들이 있는가? 이것은 오랜 옛날 어떤 형태로든가 고구려 백성들이 이곳에 살았다는 것을 뜻한다. 1500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대흥한령산맥의 이곳저곳에서 고구려의 흔적을 찾은 필자는 감격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안내를 맡은 현선생도 자기가 한평생 살며 남의 땅이라고 생각했던 곳곳에서 우리 선조들의 흔적이 나오자 어린애처럼 좋아하며 감격의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여기는 우리 동네다

고구려 강을 가 보자

우리는 마을을 지나 강이 흐른다는 곳을 향해 나갔다. 그러나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늪지대가 되어 전진이 불가능했다. 마을 위로 올라가 상류로 올라가면 길가에서 강을 볼 수 있는 곳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차를 타고 출발하기로 하였다. 몽고족만 20여 호 사는 조그마한 마을이지만 아직도 우리 선조의 이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 대견하고 고마웠다. 떠나려는 마을 어귀에는 한 아낙이 연자방아로 잡곡을 찧고 있는데 멀리 산과 마을을 배경으로한 풍경이 우리에게 매우 낯익은 것이었다.

좁은 길을 힘들게 가는데 시장을 가는지 아니면 단체로 일을 나가는지 딸딸이를 타고 가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 길을 비키느라고 운전사가 애를 먹는다. 좀 높은 언덕에 올라서서 보니 강이 멀리 보인다. 그러나 그곳도 접근은 그다지 용이하지 않다. 파언포토(巴彦包吐)라는 마을에 거의 다 가자 강을 건너는 곳에 다다른다.

지도상에는 이 강 이름이 고일고륵태하(古日古勒台河)인데 요나라 경주와 조주 근방에서 발원하여 고구려 마을을 지난 뒤 시라무렌강으로 들어가며, 결국은 요하와 합쳐지는 것이다. 강은 제법 넓었지만 강바닥에 모래가 많이 쌓여 깊지는 않아 자전거를 가지고 건너기도 한다. 시원한 고구려 강물에 발을 담그고 감격적인 인사를 올렸다. 망설이던 서 교수도 등산화와 양말을 벗고 강물 안으로 용감하게 걸어들어와 한 마음이 된다. 오늘의 이 기쁨을 자축하기 위해 우리는 비장해 둔 수박을 꺼내 파티를 열었다.

북경왕은 쉽게 강을 건넌다. 건너서 조금 가자 합랍알토(哈拉嘎吐)라는 마을이 나오고 마을 앞으로 엊저녁 밤늦게 지나갔던 임동-대판간 대로가 지나간다. 대판에 돌아오니 8시가 다 된다. 이른 아침 약 두 시간 동안에 우리는 고구려의 마을과 강을 찾아내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시라무렌강(西拉木倫河)을 건너서 적봉(赤峰)으로

 

810, 대판진을 떠나 37가니 시라무렌강을 건너는 파림교(巴林橋)가 나온다.

시라무렌강에 물이 흐를까, 마른 강일까, 혹시 소금이 덮인 강이 아닐까

이곳에 오기 전 서교수와 여러 가지로 상상하고 말도 많이 했기 때문에 시라무렌을 보는 감격은 담다르다. 상당히 넓은 강이지만 고구려강과 마찬가지로 바닥이 모래로 쌓여 깊이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가뭄일 때는 물이 마르고 소금끼가 들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주위의 언덕도 파릇하릇한 풀들이 덮여있는 곳도 있지만 모래언덕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돌던 길이 언덕을 넘자 왼쪽에 완연한 사막이 나타난다. 우리에게 사막은 특이한 이국적 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사막을 맛보기 위해 차를 새우고 가까이 가 보기로 했다. 초원을 달릴 때는 발가락이 보이는 샌들이 그렇게 편했는데 사막을 걸을 때는 약간 걱정이 된다. 혹시 전갈이라도 밟은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래알이 굵지 않아 발이 쑥쑥 빠지는 모래 밭이 아니라 모래흙같은 사막이라 언덕을 올라가도 미끄러지지가 않는다. 고구려강이나 시라무렌강의 바닥도 이러한 단단한 모래이기 때문에 물이 새지 않고 그 위로 물이 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벌써 10시가 되었다. 12시까지 적봉박물관에 도착하기로 하였으니 빨리 서둘러야 한다. 중간중간에 나타난 사막들을 바라보며, 사막 주위의 풀들만 죽으면 바로 사막이 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지구의 곳곳에서 진행된다는 사막화 현장을 실감할 수 있었다. 60가니 오단(烏丹)이 나오고, 적봉에 들어선다.

시간이 조금 넘어 걱정을 했는데 박물관에서는 우리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장춘에 유학하는 복군이 미리 연락을 해 놓았기 때문이다. 복군과 대학 동창이라는 고왜(高娃) 북경에서 방금 돌아와 피곤할텐데도 열심히 도와주었다. 우선 점심식사를 하였다. 해산물 뷔페에 가서 오랜만에 잘 먹었다. 점심시간에 현지에 사는 유일한 에스페란티스가 기차표를 사가지고 왔는데 침대표는 사지 못했다고 한다. 다행히 고와 여사가 이미 열차표 문제를 해결해 놓아 큰 시름을 놓게 되었다.

 

홍산(紅山)문화와 하가점(夏家店)문화

 

식사를 마치고 나니 3시가 다 되었다. 적봉에 와서 홍산을 다녀가지 않을 수 없다. 오후의 현지 답사를 안내하기 위해 박물관 연구원인 유소협(劉素俠) 선생이 동행하였다. 홍산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유선생은 우리를 먼저 하가점 문화가 나온 유지로 안내하였다.

이것은 하가점하층 유물, 이것은 상층 유물

유선생의 현장 실습 강의가 시작되었다. 큰 유물들은 없지만 작은 도기편들이 상당히 많이 보였다.

하층은 무늬가 있고, 상층은 없고, 하층은 회색에 질박하고, 상층은 적색기운이 있고

얼마 뒤 나는 거의 틀리지 않고 상층과 하층의 유물을 구분해 내는 총명한 학생임을 실증해 보였다.

1935년 일본학자가 홍산을 발굴한 뒤 적봉제2기문화라는 개념을 발표하였다. 홍산문화가 신석기문화인 반면 신석기에 이어지는 시기의 유물을 말한다. 1960년 중국인 학자들은 적봉의 약왕묘와 하가점유지를 시굴하고 적봉제2기문화는 서로 성질이 다든 두 개의 다른 청동문화라는 것을 밝혔다. 그것이 하가점 하층문화와 상층문화이다. 이 지역은 우리 ()조선과 관계가 있는 지역이고, 하가점문화는 연대로 보아 조선의 유적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에 대단히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

저쪽 건너편이 홍산문화 유지입니다.”

하가점문화 유지보다 좀 더 높은 곳이다. 보통 손님이 오면 하가점유지만 보여주고 홍산문화유지는 가보지 않은다는데 유선생은 정성을 다해서 우리를 안내한다. 복군하고 같은 지도교수한테서 공부한 인연때문이라는 것이다. 중국에서 펑여우(朋友)’의 위력은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 실감한다. 홍산문화유적지에는 가시가 달린 나무를 심어 놓아 유물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가상했는지 유선생이 도와줘 석기 1점과 토기를 여러점 접해 홍산문화의 특징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적색 토기들은 신석기 토기 답지 않게 수준이 높았다. 청동기 토기인 하가점 유물보다 오히려 거 수준이 높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교한 것도 있었다.

홍산문화는 앞에서 잠간 보았지만 1935년에 일본인이 처음 발굴했는데, 적봉에 있는 홍산에서 발굴했다고 해서 홍산문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홍산문화는 중국의 대표적인 문화인 황하유역의 양사오(仰韶)문화의 중말기와 같은 시기의 문화이면서도 양사오와 전혀 다른 문화형태를 취하고 있어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 뒤 요서지역 대능하 유역에서 대단히 발달된 동종의 문화 유적유물이 발굴되어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빗살무늬 등 토기 문양이 요동지방과 압록강 유역의 출토물과 같아 앞으로 우리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야 할 부분이다.

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적봉에서 맥족의 무덤이 발굴되었다는 신화사통신의 보도를 확인해 보는 것이었다. 관계자들은 이 문제는 전혀 모르는 것이라고 했지만 앞으로 계속 밝혀가야 할 문제이다. 우리 민족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맥족의 유지가 여기서 발견된다면 역사서술이 사뭇 달라지기 때문이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니 5시 반, 고와 여사의 저녁식사 초대가 있었다. 우리는 먼저 운전사와 정산을 하기로 하였다. 계산해 보니 1694, 5일만에 우리나라 이수로 4235리를 달렸다. 처음 준비할 때 1000쯤이 나와 넉넉하게 1100를 기준으로 계약했는데 그보다도 600여 킬로를 더 뛴 것이다. 130원씩을 더 달라는 것을 1500원을 더 주어 4500원에 결정하였다. 이제 이 운전사는 밤을 세워 다시 울란호터까지 돌아가야 한다. 그동안 참 열심히 해준 기사와 작별을 나누었다.

 

저녁식사는 사천식 요리로 했는데 모두가 매워서 눈물을 흘려야 했다. 한국인이 매워서 눈물을 흐렸다니 그 상황이 어떻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인들과 식사를 할 때 술을 마시지않는 필자에게는 항상 고통스러운 작업이 된다. 다행히 현선생의 능수능란한 화술과 제스츄어로 모든 것을 대신해 주어 분위기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교수는 좀 취한 편이었다.

몽고인의 습속에는 상대방이 술을 다 마실 때까지 계속 노래를 부른다.”

마지막에 몽고 여인인 고왜 여사가 노래를 계속 부르고 있기 때문에 서 교수가 약간 과음을 한 것이다.

저녁식사를 너무 흥겹게 즐기다 보니 차시간을 잊을 뻔 했다. 허둥지둥 역에 도착하자 고왜의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가 표도 끊지 않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행히 기차는 아직 떠나지 않았다. 역무원들에게 여러번 묻더니 맨 앞칸으로 간다. 이 칸이 바로 질좋고 값비싼(優質優價)열차다. 침대칸을 못 샀을 때 차선책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인데, 이것도 막강한 고여사의 빽이 아니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818, 78일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한 현선생, 그리고 적봉의 펑여우들과 헤어지고 심양으로 향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번 여행은 현선생이라는 대단히 훌륭한 안내를 만났기 때문에 여행도 순조로웠고 많은 결실도 얻었다. 긴 좌석을 한 개씩 점령하고 침대삼아 누어 서교수와 이런저런 얘기하며 마지막 밤을 보낸다.

 

824() 심양

 

자다 일어나 보니 새벽이 다 되었다. 언제들 탔는지 우질우가칸에도 사람이 꽉차 좌석마다 누어 자던 사람들이 대부분 일어나서 두 세명씩 같이 앉아 있다. 우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 엊저녁 강력한 빽이 부탁해서인지 아니면 외국인이어서인지 차장이 우리는 깨우지 안하 다행이었다.

636, 심양역에 도착하였다. 우리 차는 대련까지 가는 차라 다 내리지 않았지만 내리는 사람 타는 사람, 역안은 무척 붐빈다. 제법 짐이 많아 우선 택시를 하나 잡아 타고, 옛날에 왔을 때 신세를 졌던 이경빈 씨 집을 찾았으나 실패했다. 아마 주소가 틀렸던 것이다.

공항에 도착하니 시간이 좀 이르다. 윗층에 올라가 식사를 하고 세수도 하는 등 시간을 보내다 1210분 무사히 중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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