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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논총(서울대)

조선 전기 태교론(胎敎論)의 수용과 전개*1)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19.05.04|조회수40 목록 댓글 0

조선 전기 태교론(胎敎論)의 수용과 전개*1)


김 성 수*


[국문초록]
동아시아에서 고대부터 전개된 태교론은 산모와 태아에 대한 의학
적 견해뿐만 아니라, 태교를 통해 획득하고자 하는 이상적 인간형에 대
한 사회적 요구가 반영되었다. 따라서 태교는 의학의 발전 정도와 함께
시대에 따라 문화․사상 등과 교류하면서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각 단계의 사회적 성격을 일정 정도 반영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태교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시대로, 특
히 조선 전기 의학사의 전개과정과 함께 성리학의 성숙이 중요한 요소
로써 작용하였다. 세종 시기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방유취(醫
方類聚) 등 의서편찬 과정에서, 중국 송대 진자명(陳自明)의 부인대전
양방(婦人大全良方)에서 제시한 태교의 내용이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최신의 의학이론을 소개하여 현실에 반영하는 한편 성리학적 규범을 조
선에 뿌리내리려는 의도였지만, 주로 의학적인 차원에서만 언급되었다.


* 이 논문은 2007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07-361-AL0016).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조교수
인문논총 제71권 제1호 (2014.02.28), pp. 51~82


조선 전기 태교론(胎敎論)의 수용과 전개
52 인문논총 제71권 제1호 (2014.02.28)


16세기 소학의 재발견을 통한 성리학의 사회적 규범화가 가속화
되면서, 기질지성(氣質之性)의 차이를 극복하고 성인이 되기 위한 교육
과정에서 태교가 주목되었다. 이에 태교를 성리학적인 관점에서 재해
석하고, 나아가 사회적 교화의 측면으로써 태교의 논의를 경세학의 근
거로 제시하려는 시도도 등장하였다. 동시에 명대 의학의 본격적인 도
입을 통해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는 부모의 수양을 강조하는 형태
로써 태교론의 전환을 이끌었는데, 이는 의학과 성리학의 수양론이 밀
접한 관계를 맺음에 따른 결과였다.


1. 머리말
태교는 태아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서 임부가 행동과 마음가짐을
조심하는 행위를 말한다. 현재까지의 연구를 보면 동아시아에서 오랜 전
통을 갖고 있는 태교의 기원은 주나라의 문왕에게까지 소급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후 한(漢) 시기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태교의 논리
가 정리되어, 후세 태교 이론의 근거가 되었다.
일찍부터 형성되었던 중국의 태교 이론은 한국에도 전해졌는데, 최치
원(崔致遠)의 짧은 언급 이외에 정몽주(鄭夢周)의 어머니가 작성한 태
중훈문(胎中訓文)이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동
의보감(東醫寶鑑)에서 수양론을 중심으로 소개되다가, 조선 후기에 이
르러서는 사주당 이씨(師朱堂李氏, 1739~1821)의 태교신기(胎敎新記)
나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 1759~1824)의 규합총서(閨閤叢書) 간행
에서 보이듯 태교의 담론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더욱 구체화되었다고
이해한다.1)
태교에 대한 이러한 연구는 주로 사회에서 지향하는 인간상의 모습이


1) 장정호(2008), 「한․중 전통 태교론(胎敎論) 비교 연구」, 교육사학연구 18-1, 교
육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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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2)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남성 중심의 가치가 태교를 통해서 어떻게 여
성과 태아에게 투영되었는지에 집중되었다.3) 그러나 태교가 등장하게
된 역사적․문화적 맥락 가운데 하나로 의학서 중심의 논의가 조선 전기
에 집중 소개되었음은 언급조차 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바탕에서 본 논
문은 태교가 전통의학에서 어떻게 이해․정립되었으며, 어떤 발전경로
를 거쳐 왔는지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태교를 처음으로 언급하였다고 할 수 있는 태산서(胎産
書)를 시작으로 중국의 산부인과 발전 속에 나타난 태교의 특징과 최초
의 산부인과 전문서로 불리는 송대 진자명(陳自明)에 의해서 편찬된 부
인대전양방(婦人大全良方)의 태교이해가 조선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
지 밝히고자 한다. 아울러 의학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도입된 태교가 조
선 전기 사상과 의학의 전개․발전 과정에서 어떠한 변화를 겪으면서 자
리 잡았고, 그것이 갖고 있는 특징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중국의학의 태교론 전개
2.1. 태산서와 고대의학의 태교
중국에서 태교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주나라의 태임(太任)이 문
왕(文王)을 가졌을 때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4) 이후 가의(賈誼, B.C.


2) 김종섭(2012), 「唐代 理想的 人間型-胎敎를 중심으로-」, 中央史論 36집, 중앙대학
교 중앙사학연구소. 태교를 통해 당대에서 추구하였던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이 어
떠한 것인가를 규명하려고 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3) 정해은(2009), 「조선시대 태교 담론에서 바라본 이사주당의 태교론」, 여성과 역사
10, 한국여성사학회.
4) 列女傳 卷1, 「周室三母」, “婦人妊子 寢不側 坐不邊 立不蹕 不食邪味 割不正不食
席不正不坐 目不視邪色 耳不聽淫聲 夜則令瞽誦詩 道正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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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68)의 신서(新書)를 비롯해, 유향(劉向, B.C.77?~6)의 열녀전
(列女傳), 왕충(王充, 27~100?)의 논형(論衡) 등에서 태교에 대한 고대
사상이 차례로 정비되었다.5) 이러한 태교의 논리는 태교를 수행하는 산
모를 계도하고, 특히 정치권력의 핵심에 있는 제왕을 교육해야 한다는
목적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한편 의서에 나타난 태교 관련 기술은 마왕퇴(馬王堆)에서 발견된 태
산서가 최초라고 할 수 있다. 1972~74년 중국의 장사 근교에서 발굴된
3개의 분묘에서는 백서․죽간․목간 등에 기록된 대략 15종의 의서가
출토되었고, 그중의 하나가 바로 태산서이다.6) 그런데 분묘의 조성 시
기가 대략 기원전 180~160년 사이라는 점에서 태산서로 명명된 의서
의 내용은 기원전 2세기 이전에 통용되던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태산서는 많지 않은 분량에다 중간에 결락이 있지만 출산 및 태교
와 관련하여 중요한 서술이 담겨 있으며,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태산서의 내용을 검토하면 제일 먼저 임신할 수 있는 시기는 생리가
끝나고 삼일 이내이며, 첫째 날 임신하면 남자가 되고 둘째 날에는 여자가
된다고 성별의 결정을 설명한다.7) 두 번째로 잉태 이후 10개월 동안 태아
의 변화과정을 서술하는데, 이는 태교의 원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에 따르면 잉태된 첫 달에는 유형(留刑)이라고 하며, 이후 2개월째에
는 시고(始膏), 3개월째에는 시지(始脂) 등으로 차츰 발전해 나간다.8) 그
런데 3개월까지는 아직 성별이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이때에 태교를 통


5) 장정호(2008), pp. 61-67; 김종섭(2012) 참조.
6) 마왕퇴 의서에 대해서는 周一謨(2000), 고대 중국의학의 재발견, 서울: 법인문화
사 참조. 특히 태산서에 대해서는 pp. 155-172 참조. 태산서는 본래의 책명이
아니며, 연구자들에 의해서 임의로 붙여진 명칭이다.
7) 胎産書, “禹問幼頻曰 我欲埴(殖)人産子 何如而有 幼頻合(答)曰 月朔已去汁□ 三
日中從之 有子 其一日南(男) 其二日女殹(也).” 원문에서 □는 결자이며, ( )로 표시
된 것은 앞의 한자를 괄호 안의 의미로 해석해야 함을 말한다.
8) 胎産書, “一月命曰留(流)刑…二月始膏 毋食辛臊 居處必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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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성별이 바뀔 수 있으며, 외모와 성품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3개월째를 시지라고 하는데, (형태가) 마침내 드리워지면서 조금
씩 드러난다. 이때에는 아직 형체가 정해지지 않아서, (산모가) 보는
사물에 따라 (태아가) 변화한다. 이러한 까닭에 군공대인(君公大人)
을 봐야 하며, 난쟁이와 모습이 추한 사람, 원숭이 등을 보지 못하게
한다. 파와 생강, 토끼 죽을 먹지 않는다. 남자 아이를 낳고 싶으면
활과 화살을 놓아두고, 수꿩을 잡고, 숫말을 타며, 숫호랑이를 봐야
한다. 여자를 낳고 싶으면 비녀와 귀걸이를 하고 구슬을 꿰어야 한
다. 이것을 내상성자(內象成子)라고 한다.9)
‘내상성자’의 원칙에 따라 산모가 대하는 사물이 태아에 영향을 줄 뿐
만 아니라, 남녀의 성별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이해한다. 한편 음식
과 거처의 금기도 월별로 제시하는데, 첫 달에는 반드시 정미(精米)를 먹
고 맵고 비린 것은 피하며, 일곱 번째 달에는 건조한 곳에 거처하라고
한다. 이외에도 세세한 금기들이 있는데, 어떠한 연유로 형성된 것인지
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10)
한편 4월 이후로 태아의 발생은 오행의 수화금목토(水火金木土) 배열
에 따라 혈(血)․기(氣)․근(筋)․골(骨)․피부(膚革)․터럭(豪毛)의 순서
로 만들어진다고 이해한다. 수화금목토는 상극(相剋)에 따른 차례로, 수
극화․화극금․금극목․목극토의 관계를 의미한다. 이는 고대로부터 형
성된 천일생수(天一生水)라는 자연관에 따라 수(水)가 처음 발생하고 차


9) 胎産書, “三月始脂 果隋宵效 當是之時 未有定義(儀) 見物而化 是故君公大人 毋
使朱(侏)儒 不觀木(沐)候(猴) 不食茐(葱)薑 不食兎羹 □欲産男 置弧矢 □雄雉 承牡
馬 觀牡虎 欲産女 佩蠶(簪)耳(珥) 呻(紳)朱(珠)子 是胃內象成子.”
10) 胎産書, “一月 命曰留(流)刑 飮食必精 酸羹必[熟] 毋食辛星(腥)…二月始膏 毋食
辛臊 居處必靜…五月而火受(授)之 乃使成氣 晏起□沐 厚衣居堂…七[月而]木受
(授)[之 乃使成骨] 居燥處 戊使[定止].” [ ]로 표시된 것은 후대의 의서들을 통해서
결락된 내용을 추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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례대로 화금목토가 생성된다는 견해로, 오행 생성의 순차에 따라 해당하
는 인체 부위가 형성된다고 이해한 것이다.
태산서에서 제시된 태아의 발생단계 및 음식금기, 남녀 성별의 선택
법은 이후의 의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수나라의 소원방(巢元方)이 610
년 저술한 제병원후론(諸病源候論)에서는 태산서의 내용을 바탕으
로 오장육부(五臟六腑)와 경맥(經脈)의 발생과정을 더하여 태아의 발생
을 설명한다. 즉 임신 4개월째에 육부가 형성되고 5개월째에 오장이 자
리를 잡으며, 4월 이후로 신체의 발달이 경맥과 연관된다는 것이다.11) 한
편 태교와 관련해서는 태산서를 따르지만 내용상 풍부해지는데, 그 일
부를 보면 아래와 같다.
임신 3월은 시태(始胎)라고 한다.…자식이 용모가 아름답고 단정하
기를 바란다면 희고 아름다운 옥을 자주 바라보고, 공작을 보도록 하
며 잉어를 먹도록 한다. 자식이 지혜가 뛰어나고 힘이 있기를 바란다
면 소의 심장을 씹고 보리를 먹도록 한다. 자식이 어질고 덕이 있기
를 바란다면 마음을 바로 하고 똑바로 앉아 마음을 항상 맑고 고요히
지니고, 비뚤게 앉거나, 기대어 서거나, 굽은 길로 다니거나, 시선을
비뚤게 하여 바라보거나, 나쁜 말을 입에 담거나, 나쁜 생각을 마음에
두지 않도록 한다. …이것을 외상이변(外象而變)이라고 한다.12)
앞부분에서 생략한 부분은 태산서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다만 시
지라고 했던 것을 시태로 개명(改名)하였고, ‘내상성자’를 실제 의미에


11) 諸病源候論 卷41, 「婦人妊娠病諸候上, 妊娠候」. 4월은 水와 手少陽三焦脈, 5월
은 火와 足太陰脾脈, 6월은 金과 足陽明胃脈, 7월은 木과 手太陰肺脈, 8월은 土와
手陽明大腸脈이다.
12) 諸病源候論 卷41, 「婦人妊娠病諸候上, 妊娠候」, “妊娠三月始胎…欲令子美好端
正者 數視白璧美玉 看孔雀 食鯉魚 欲令兒多智有力 則啖牛心 食大麥 欲令子賢良盛
德 則端心正坐 清虛和一 坐無邪席 立無偏倚 行無邪徑 目無邪視 耳無邪聽 口無邪
言 心無邪念…是謂外象而變者也.”
김성수 / 조선 전기 태교론(胎敎論)의 수용과 전개 57


맞춰 ‘외상이변’으로 수정하였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마음을 가다듬고
행동을 조심하라고 강조한 부분인데, 이는 앞서 문왕의 태교론과도 상통
하는 내용으로 소원방이 제병원후론을 편찬하면서 여러 서적을 참조
하였음을 보여준다.
제병원후론에서 제시된 장부의 형성과 경맥과의 관계, 그리고 태교
의 논의는 이후 중국 고대 의학의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전거가 되었다.
다만 태교가 임신 중에 나타나는 질병을 설명하는 가운데 일부분으로 서
술된다는 점에서, 태교의 관념을 여타 질병과 구별하여 독립시켜 정의하
는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극복한 것은 당(唐)대의 의사 손사막(孫思邈, 581~682)이 지은
천금방(千金方)의 「양태」(養胎) 조항이다. 불교에도 능통했었던 까닭
에 태교를 통해 추구하는 인간상의 하나로 성덕(盛德)한 대사(大師)를 들
고 있는 점도 특이하지만,13) 무엇보다 이제까지 임신의 증후 가운데 다
루어진 태교법이 ‘양태’라는 명목으로 산부인 의학의 체계에서 일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의의가 있다.


2.2. 부인대전양방(婦人大全良方)의 ‘태교론’
태교의 명칭으로 독립된 장을 마련한 의서로써는 송대 국가사업으로
992년 편찬된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이 최초라고 할 수 있지만,14) 보
다 구체적으로 다루었던 것은 진자명(陳自明, 1190~1270)이 편찬한 부
인대전양방이었다. 남송시대 강서성(江西省) 임천현(臨川縣)에서 대대
로 의학을 하였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40세 무렵부터 역대 의서들과
자신의 경험 및 집안에서 전해지고 있었던 비방(秘方) 등을 결합하여


13) 備急千金要方 卷2, 「婦人方上, 養胎第三」, “舊說凡受胎三月 逐物變化 稟質未定
故姙娠三月…欲得見賢人君子盛德大師 觀禮樂鐘鼓俎豆軍旅陳設.”
14) 太平聖惠方 卷76, 「胎敎論」. 이 내용은 뒤의 胎産要錄에서 다시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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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7년에 부인대전양방 24권을 편찬하였다. 송대 이전에는 산부인과
전문서적이 매우 드물었다는 점에서 그의 저술은 최초의 산부인과 서적
이며, 이를 통해서 산부인과가 의학 안에서 독립된 분야로 자리 잡게 되
었다고 평가를 받는다.15)
그는 부인대전양방을 총 8가지 항목으로 편제하였는데, 중요도에
따라 조경문(調經門), 중질문(衆疾門), 구사문(求嗣門), 태교문(胎敎門), 임
신문(姙娠門), 좌월문(坐月門), 난산문(難産門), 산후문(産後門)으로 구성
하였다.16) 월경이 여성만의 특징인 동시에 여성의 생리․병리에 있어서
핵심이었기에 조경을 제일 첫머리에 두었으며, 이후의 내용은 여성의 질
병과 임신․출산으로 대별되는데 분량 상에서도 각각 절반씩을 차지하
고 있다. 그런데 각각의 질병을 하나로 묶어 「중질문」에서 총체적으로
다루는 것과 다르게 임신․출산 관련해서는 세세하게 나눔으로써, 임
신․출산에 대해 많은 비중을 부여하고 있었다는 점이 독특하다.
이 글의 주제인 태교와 관련해서 그는 당시까지 전해지고 있었던 많은
의서들을 검토한다. 그가 거론하고 있는 서적들은 잘 알려진 내경,
제병원후론, 천금방 이외에도 기파오장론(耆婆五臟論), 장중경오
장론(張仲景五臟論), 노신경(顱顖經), 성제총록 등을 비롯하여, 장
자, 주역, 설문해자, 예기, 효경 등이 언급된다. 이 중에서 그
가 가장 신뢰하고 있던 것은 내경과 제병원후론이었다.
총 8편으로 구성된 태교문의 첫 번째 편인 「임신총론」(妊娠總論)에서
는 임신 일반론을 말하면서 오장론(五臟論) 같은 많은 의서는 참고할
15) 罗元恺(2011), 妇科学讲稿-中医名家名师讲稿丛书 第三辑, 北京: 人民卫生出版
社, pp. 128-133.
16) 婦人大全良方, “調經門 凡醫婦人 先須調經 故以爲初 衆疾門 經脈不調 衆疾生焉
故以次之 求嗣門 疾病旣無 須知求嗣 故以次之 胎敎門 求嗣已明 須知胎敎 故以次
之 妊娠門 胎敎已明 須知妊娠疾病 故以次之 坐月門 妊娠疾病旣明 須知坐月避忌
故以次之 產難門 坐月旣明 須知產難 故以次之 產後門 產難旣明 須知產後疾病 故
以次之.”
김성수 / 조선 전기 태교론(胎敎論)의 수용과 전개 59
가치가 없다고 혹평한다. 대신 ‘소원방의 이론보다 뛰어난 것은 없다’고
하면서, 제병원후론에서 제시된 임신 개월에 따른 태아의 발생과 육경
(六經)과 오장 등의 생성과정에 대한 설명을 채용한다.17)
다음으로 「신자론」(娠子論)에서는 쌍둥이의 탄생, 아들과 딸의 구분이
생기는 원인 등에 대해서 설명한다. 세 번째인 「수형편」(受形篇)에서는
「신자론」의 내용을 제(齊)나라 저징(褚澄)의 저술을 토대로 부연하는데,
특히 여성의 음혈(陰血)이 양정(陽精)을 둘러싸면 남자가 되고 반대의 경
우에는 여자가 된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정과 혈의 선후관계 및 근본이
되는 요소의 차이에 따른 성별 결정론으로, 이전의 의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견해였으나 편을 달리하여 언급할 정도로 가치가 있다고 이해한
것이다.
네 번째 장은 명칭이 「논태교」(論胎教)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태교의
원리나 제반 요건들을 설명하는 내용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다만 마익경
(馬益卿)의 논의에 따라 “태교나 산도(産圖)에 대한 책이 이치에 맞지 않
는다고 하여 믿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구애될 필요도 없다.”18)고
한다. 이는 태교의 논리에 따르자면 때로는 맞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자신의 경험 때문이었다.
한편 다섯 번째인 「잉원립본장」(孕元立本章)에서는 태아의 시초가 형
성되는 과정을 의서와 잡서를 통해 다양하게 설명하였고, 이후 「응형수
품장」(凝形殊稟章)에서는 남녀의 형체가 만들어지는 원리를 주역과
숫자의 배열로 설명한다. 이외에도 기후적인 영향에 따라 척박한 지역에
서는 딸이 많고 기름진 곳에는 아들이 많다는 논의를 제시하기도 한다.
17) 婦人大全良方 卷10, 「胎教門, 妊娠總論第一」, “五臟論者 類皆淺鄙不經 往往妄托
其名 至於三藏佛書 且語涉怪誕 謾不可考…此論奧微而有至理 餘書所論皆不能及也
觀此測知巢氏之論 世更有明之者 亦未有過於巢氏之論矣 余因述其說.”
18) 婦人大全良方 卷10, 「胎教門, 論胎教第四」, “論曰 胎教產圖之書 不可謂之迂而
不加信 然亦不可狎泥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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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기질생성장」(氣質生成章)에서는 임신하였을 때 조심해야 하는
이치를 천지에서 사물이 생겨나는 이치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천지의 성품을 받고 만물의 신령함을 모아서, 음양(陰陽)이 균형
있고 기질(氣質)이 완비된다. 이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짝
수와 홀수가 다르듯이 남는 것도 있고 모자라는 것도 있으며, 굳셈
과 유약함이 다르듯이 튼튼하기도 하고 여위기도 한다. 영혈(榮血)
과 위기(衛氣)도 소식(消息)과 영허(盈虛)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못하
므로, 천품(天稟)을 받은 초기에 어찌 일률적으로 말할 수 있겠는
가?…그러므로 배태(胚胎)의 처음과 정기(精氣)의 변화 뒤일지라도
보호하고 도와주는데 진실로 법도가 있다.19)
사물의 차이가 발생하듯이 사람도 차별적 형체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인체의 발생과 생리작용의 큰 요소인 영혈과 위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다. 물론 그로 인해서 생겨나는 구별을 일률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분명 임신 시기의 조섭에 따라 분명 변화할 요소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내경의 「천진론」(天眞論)과 「통천론」(通天論)을 인용하여
조섭의 차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언급한 뒤에, “임신 초기
에 한번 섭생을 잘못하면 안으로는 태아의 오장이 충실하지 못하고 겉으
로는 몸을 튼튼하게 할 힘이 부족해져서 기운과 형체가 다 충실하지 못
하고 병이 생긴다.”고 말한다.20) 마지막으로 「전녀위남법」(轉女爲男法)
에서는 임신 3개월 전에 남녀가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에 해
당하는 사물을 통해 성을 결정할 수 있다는 태산서 및 제병원후론
19) 婦人大全良方 卷10, 「胎教門, 氣質生成章第七」, “具天地之性 集萬物之靈 陰陽平
均 氣質完備 咸其自爾 然而奇偶異數 有衍有耗 剛柔異用 或強或弱 血榮氣衛 不能
逃於消息盈虛之理 則稟質之初 詎可一概論是…然則胚胎造化之始 精移氣變之後
保衛輔翼 固有道矣.”
20) 婦人大全良方 卷10, 「胎教門, 氣質生成章第七」, “方授受之時 一失調養則內不足
以爲中之守 外不足以爲身之強 氣形弗充而疾因之.”
김성수 / 조선 전기 태교론(胎敎論)의 수용과 전개 61
등의 언급을 그대로 전개한다.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진자명은 부인대전양방에서 ‘태교’를 의학의
틀 안에서 구체화시키려고 노력하였고, 이는 임신과 출산에 대한 계통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다만 태교의 실현정도에 대해서는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지 못했는데, 실제로 이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
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질(氣質)의 차별성에 근거하여 영혈과 위기
라고 하는 인체 생리작용의 근간에서 태교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인
정하기도 하였다.
3. 조선 전기 태교론의 수용
3.1. 15세기 의서의 태교론 수용
태교에 대한 기록은 조선 전기 이른 시기부터 간간이 나타나지만, 집
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향약집성방이나 의방유취, 태산요록과
같은 의서였다. 이들 의서에서 태교를 언급했던 것은 무엇보다 부인대
전양방이 미친 효과였으며, 실제로 각 의서의 산부인 항목에서 대부분
부인대전양방을 채용하고 있었다. 세 의서가 모두 세종 대에 편찬되었
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각 의서의 편찬 의도가 달
랐던 만큼 태교를 언급하는 양상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가장 먼저 1433년 노중례(盧重禮, ?∼1452)․유효통(兪孝通) 등에 의해
서 편찬된 향약집성방은 총 85권 가운데, 권54~63까지가 부인문(婦人
門)이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권54의 조경문(調經門)․붕루문(崩漏門)
에서는 생리를 고르게 하는 법과 갑작스레 많은 피를 흘리는 붕루의 치
료법을 서술한다. 권55․56의 부인제병문(婦人諸病門)․여음문(女陰門)
에서는 여러 질병과 생식기 질환 치료법을 언급하고, 권57의 구사문(求
62 인문논총 제71권 제1호 (2014.02.28)
嗣門)․태교문(胎敎門)에서는 임신하기 위한 방법과 태아의 생장, 태교
에 관한 내용 등을 기술한다. 한편 권58~60까지의 임신질병문(姙娠疾病
門)에서는 임신 시기의 질병과 치료법을, 권61~62의 좌월문(坐月門)․산
난문(産難門)에서는 해산 시기의 추정법과 난산의 치료법이 서술되어 있
다. 마지막으로 권63~66까지는 산후문(産後門)으로 출산 이후 산모의 질
병들에 대해서 치료법을 기술하였다.
이상을 살펴보면 부인대전양방의 체제를 대부분 채용했음을 알 수
있는데, 「태교문」의 의론(醫論)에 해당하는 부분 역시 부인대전양방
「태교문」을 옮겨 놓았다. 부인대전양방이 당시로써는 가장 최신의 산
부인과 지식이었다는 점에서, 이를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향약집성방의 편찬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편찬이 시작되는 의
방유취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의방유취는 총 365권으로 1445년 편찬이 완료되었고, 이후 교정을
거치면서 266권으로 줄어들어 1477년 간행되었다. 부인문에 해당하는
분량이 총 33권으로, 이는 앞서 향약집성방보다 세 배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향약집성방이 의료현장에서의 사용을 목적으로 하였던
것과 달리 의방유취는 당시까지 전해진 의학지식을 집성한다는 취지
가 있었다는 점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의방유취는 권206의 조경
에서 시작해, 권212~220까지는 부인의 여러 가지 질병을 다루었고, 권
220의 일부에서 구사를 언급한 이후 권221에서 태교를 다루고 있다. 다
시 권221~227까지 임신, 권227~228은 좌월, 권228~229는 난산, 권
230~238까지 산후로 구성되어 있다.
이 편제 역시 부인대전양방이나 향약집성방과는 별다른 차이가
없지만 인용하고 있는 의서는 다양해서, 태교 항목만 보더라도 부인대
전양방 이전의 의서인 천금방, 산보(産寶), 성혜방(聖惠方), 왕
악산서(王岳産書), 삼인방(三因方), 직지방(直指方) 등이 있다. 물론
부인대전양방이 중국에서도 본격적인 산부인과 의서의 시초였다는 점
김성수 / 조선 전기 태교론(胎敎論)의 수용과 전개 63
에서, 이들 의서의 내용은 매우 소략하고 대부분 진자명의 저술이 핵심
을 이루고 있다. 결국 의방유취의 내용은 태교에 대한 의학사적 맥락
을 알려주지만, 지식의 체계는 부인대전양방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향약집성방, 의방유취가 부인병, 임신과 출산, 그리고 태교와 관
련하여 많은 의학 지식을 알려주고 있었지만, 의사가 아닌 사람들이 이
를 소장하여 활용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한 예로 의방유취는
처음 30부가 간행된 이후로 조선에서는 다시 간행되지 못했다는 점을 고
려한다면 의방유취나 향약집성방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
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게 위해 1434년 3월 세종의 명에 따라 노중례
가 의방유취를 편찬하는 과정 중에 태산요록을 간행하였다. 상․하
권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는 실제 사용에 편하도록 핵심적인 내용만을 수
록하였는데, 상권의 제일 앞부분에서 「태교론」(胎敎論)이 언급된다. 여기
서는 성혜방을 인용하여, 수태 이후에 어머니 뱃속에서 태아가 성장하
는 과정과 아이와 산모의 심신(心神)의 교류에 대해 개략적으로 설명하
고서 태교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혜방에서 말하였다. “처음에 아이를 가지면 점차로 형태가
생기는데, 아이가 태 안에 있을 때에는 어머니가 듣는 것을 따라 (변
하기 때문에) 성현께서 세상에 태교를 전하셨다.…이와 같이 하면
아들과 딸이 복되고 장수(長壽)하며 충효가 갖춰진다. 이를 어기면
아들과 딸의 성품이 어그러짐이 많고, 장수하지 못한다. 이것이 성
인(聖人)께서 태교(胎敎)를 둔 도리이니, 부모 된 자가 어찌 행하지
않겠는가?”21)
21) 胎産要錄, 胎產門, 「胎敎論」, “聖惠方云 始受胞胎 漸成形質 子在胎內 隨母聽聞
所以聖賢傳乎胎敎…如此 則男女福壽敦厚 忠孝自全 若虧此儀 則男女或多狼戾 及
壽不長 斯乃聖人胎敎之道 爲人父母 可不行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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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혜방의 「태교론」을 그대로 가져온 이 대목에서 주목할 것은 성인
이 태교를 말한 이유를 강조하고, 아울러 태교를 통해서 장수와 함께 충
효를 갖출 수 있기를 기대한 사실이다. 태산요록에서는 이어서 천금
방의 「양태」 조문과 성제총록(聖濟總錄)의 견해까지 포함해서 총 세
항목에 걸쳐 태교를 해야 하는 이유를 간단히 소개한다.
한편 「태교론」에 이어지는 「전녀위남법」(轉女爲男法), 「태양근신법」
(胎養謹愼法), 「임신축월십이경맥양태장식신호법」(姙娠逐月十二經脈養胎
將息愼護法), 「식기법」(食忌法), 「태살피기산전장호」(胎殺避忌産前將護)
의 내용이 넓은 범위의 태교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각각 딸을 아들로 바
꾸는 법, 태아의 성장을 방해하는 약물과 부부간의 성행위 경계, 월별에
따른 태아의 경맥(經脈)과 장부(臟腑)의 성장, 임신 이후에 산모가 조심해
야 하는 음식, 사시(四時)에 따른 태아․산모에게 나쁜 방위의 계산법 등
을 차례로 제시하고 있다.22)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가 종합의서였다는 점에서 부인문의 일부
로 태교를 포함시킨 것과는 다르게 태산요록에서 가장 먼저 서술하였
음은 의미가 있다. 즉 태산요록의 등장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상황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태교임을 명확하게 드러낸 것이다.
여기에는 태교 역사의 유구함이나 부인대전양방과 같은 산부인과 전
문의서의 등장 이외에도, 조선 초기 사회․정치적 배경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고 생각한다.
임신과 출산이 국가 운영의 인적 기초가 된다는 점과 함께 조선을 성리
학적 관점에서 사회를 재편하려고 시도했던 세종과 조선 전기 지식인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천금방에 앞서 성혜방의 논설을 먼저 실었던
22) 조선 전기 산부인과 의학에 대한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며, 다음의 논고 정도가 참
고가 된다. Kim Sung soo(2010), “Publication of Obstetric Books and Actual Childbirth
Cases of the Chosŏn Dynasty”, Horizon 2, Institute of Humanit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김성수 / 조선 전기 태교론(胎敎論)의 수용과 전개 65
것은 성혜방에서 언급한 성인(聖人)의 가르침, 즉 충효와 성품의 덕목
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태교가 주로 의학
에서 먼저 수용되었다는 점은 조선의 현실에서 의학의 일부로써 손쉽게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었다. 다만 태교를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보다 구체
적으로 설명하고,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하였다.
3.2. 16세기 태교론의 정치․ 사상적 전개
조선 전기 의학 이외에서 태교가 언급될 때에는 문왕의 사례가 주로
소개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昭惠王后)가 1475
년에 편찬한 내훈(內訓)을 들 수 있다.23) 그러나 조선의 정치․사상계
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로, 발단이 되었던 것은
왕세자의 교육 문제였다. 16세기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들은
성리학적 이상론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방도로써 세자에게 소학을 충
실히 학습하도록 강조하였는데, 소학의 가장 첫머리에서 태교를 말하
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사림을 대표하였던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중종에게 어린
왕자 교육의 정당성을 언급하면서 태교를 거론하였고,24) 이자(李耔,
1480~1533) 역시 같은 견해를 제시하기도 하였다.25) 이들이 교육의 목
표로 삼았던 것은 성인이 되는 학문 즉 성학(聖學)이었는데, 소학이 성
학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태교의 전거가 되었다. 그러나 태교가 직접적으
로 문제가 된 것은 명종이었다.
23) 이경하 주해(2011), 內訓 파주: 한길사, pp. 250-252.
24) 中宗實錄 卷26, 中宗 11年(1516) 10月 19日(丁卯), “檢討官趙光祖曰…然古有胎敎
況今知識將生 其所見聞必正 然後庶可謂保養之有始矣.”
25) 中宗實錄 卷27, 中宗 12年(1517) 4月 29日(甲戌), “侍講官李耔曰 古人有胎敎之語
況旣生之後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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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명종에게 즉위 후 얼마 되지 않아 영의정을
비롯한 당시의 대신들은 10개의 조항이 담긴 경계문을 올리고, 언문으로
한 부를 더 작성하여 명종의 어머니에게 바쳤다.26) 어린 명종을 대신해
서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첨정 하는 상황에서, 태교를 근거로 문정
왕후의 섭정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는 동시에 정치 운영에 있어서 성리학
적인 요구에 부응토록 요청하는 것이었다.27) 얼마 지나지 않은 주강(晝
講)의 자리에서 정옥형(丁玉亨, 1486~1549)은 성리학과 소학, 그리고
태교와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정옥형이 아뢰었다. “학문의 공효는 한갓 입으로 문자나 읽는 것
이 아닙니다. 마땅히 잠심(潛心)하여 연구해 가슴에 새기기를 간단
없이 하면 마음이 열리고 사물을 접응하는 데 환하여 의심이 없게
됩니다. 소학(小學)의 가르침은 태교(胎敎)에서부터 시작되며, 성
인(聖人)의 학문은 유년 교육에 불과할 뿐입니다.”28)
그는 성인의 학문인 성리학의 교육에서 소학이 핵심이며, 유년의 교
육 나아가 태교에 대해 언급하였다. 소학은 「입교」(立敎)․「명륜」(明
倫)․「경신」(敬身)․「계고」(稽古)․「가언」(嘉言)․「선행」(善行)의 편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성리학에서 중시하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윤리와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었다.29) 그런데 「입교」의 가장 첫머리에서 입태잉
26) 明宗實錄 卷1, 明宗 卽位年(1545) 7月 25日(乙酉).
27) 明宗實錄 卷1, 明宗 卽位年(1545) 7月 25日(乙酉), “伏願慈殿 體文母․孟母之慈
愛 所以預養先示者 必出於正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而先明夫義
利․公私之分 以立其本 則生於心害於事 作於事害於政者 自爾而小矣.”
28) 明宗實錄 卷2, 明宗 卽位年(1545) 12月 17日(丙午), “知經筵事丁玉亨曰 學問之功
非徒口讀文字之爲也 當潛究服膺 終始無間 則心地開明 應物處事 洞然而無疑矣 小
學之敎 自胎敎始焉 聖人之學 不過乎蒙養而已.”
29) 소학의 정치사상적 함의에 대해서는 김준석(1981), 「朝鮮 前期의 社會思想」, 東
方學志 29,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참조.
김성수 / 조선 전기 태교론(胎敎論)의 수용과 전개 67
지교(立胎孕之敎)라고 하여, 열녀전에서 기술한 태교의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태교와 성리학이 연결되는 고리로 소학이 언급된 이유였으며,
한편으로 16세기에 소학이 교학서로 정착하면서 태교의 명확한 근거
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태교는 교육의 측면 외에도, 성리학에서 전제하는 인간의 차
별성 극복에 대한 질문에도 일정 해답을 주고 있었다. 성리학에서는 사
람마다 기질의 청탁(淸濁)과 순잡(純雜)의 차이가 있으며, 성인의 학문을
통한 교화로써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이와 같은 차별
성의 근원을 명확히 한다면, 교화의 방법 역시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었
다. 일례로, 선조가 사람들에게 선악이 있는 이유를 묻자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사람의 기품은 천만 가지로 같지 않은데 아름답거나 추악하게 된
까닭도 그 이유가 또한 여러 가지입니다.…대개는 수태(受胎)한 첫
머리에 근본이 생기고, 임신(妊娠)한 지 3개월이 될 무렵에 변화가
생깁니다. 임부(妊婦)가 감촉(感觸)하는 것과 먹고 마시는 것이 모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데, 이런 것의 근원이 이미 하나가 아니며 선
과 악도 또한 따라서 천만 가지로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사람들
이 사는 곳을 가리고 적선(積善)을 하고 태교(胎敎)를 하여 현명한 자
손을 낳으려고 한 것입니다.”30)
그는 부모 가운데 누구의 기운을 받았는지, 산수․풍토․천시(天時)․
만물의 영향에 따라 음양(陰陽)․숙특(淑慝)․화순(和順)․괴려(乖戾)의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31) 그러나 임신 초기와 3개월 이후 변화의 과정에
30) 宣祖實錄 卷8, 宣祖 7年(1574) 10月 25日(丙寅), “(柳希春曰)人之氣稟 千萬不同
而其所以爲美惡者 所從來亦多端…蓋發源於受胎之初 變化於妊娠之第 三月孕婦所
感觸所飮食 皆能變化所從來者旣不一 而善惡亦隨而千萬不同 此古人所以卜居積善
胎敎而生賢子孫也.”
68 인문논총 제71권 제1호 (2014.02.28)
서, 임부의 환경과 마음가짐, 음식 등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중시한다. 이러한 요소 하나하나 모여서 사람들마다의 차이를 형성한다
고 보았으며, 따라서 이를 극복하고 성인의 학문으로 향하는 길은 부모
의 자식에 대한 태교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이해한다.
한편 정개청(鄭介淸, 1529~1590)은 이와는 색다른 논의를 제시한다.
박순(朴淳)과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주류의 성리
학자들과는 계통을 달리하고 있었는데, 「태교」(胎敎)라는 글에서 유희춘
과는 약간의 차별성을 보여준다.
사람이 형체를 갖출 때에는 반드시 기(氣)로써 하는데, 형태가 처
음 이루어질 때에 감화된 기가 바르면 형체와 용모, 재주와 식견이
또한 함께 올바르다. 그런 까닭에 어머니가 된 도리에 아이를 갖게
되면 이목구비에 닿는 것들은 올바른 것으로써 하지 않으면 안 된
다. 이것이 열녀전에서 말한 태교의 의미이다. 대개 태중(胎中)에
서 응결된 것은 진원(眞元)의 기이며, 몸밖에 감화된 것은 외기(外氣)
이다. 진원과 외기가 온몸을 통하여 꿰뚫을 수 있는 것은 본래 표리
(表裏)에 간격이 없기 때문이니, 태교의 교훈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
는가?32)
그는 태아 형성의 근원인 진원이 외기와 통한다고 설명한다. 진원은
부모로부터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원기(元氣)인데, 육체의 표리에는 간격
이 없기 때문에 바깥의 외기로부터 영향을 직접 받게 된다는 것이다. 즉
산모의 육체에는 표리가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태중의 아이와 바깥의 외
31) 宣祖實錄 卷8, 宣祖 7年(1574) 10月 25日(丙寅).
32) 愚得錄 卷1, 「論學, 胎敎(己卯九月初四日)」, “人之成形必以氣 而當其成形之初 所
感之氣正 則形容才識 亦與之正 故爲母之道 當其姙子 凡耳目口鼻之感 無不以正 此
列女傳胎敎之意也 蓋胎中所凝者 眞元之氣 身外所感者 外氣也 眞元與外氣 通透一
身 本無表裏之隔 胎敎之訓 不亦宜乎.”
김성수 / 조선 전기 태교론(胎敎論)의 수용과 전개 69
기가 상호 작용할 수 있다고 이해한 것으로, 태교가 미치는 영향을 인체
에 대한 이해를 통해 설명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4. 태교론의 변용과 발전
4.1. 이이(李珥)의 태교론
16세기 태교론이 성리학적 입장에서 재정리되어야 하는 사정은 유희
춘의 언급에서 일부 드러나고 있었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전개한 것은
이이(1536~1584)라고 할 수 있다. 그 역시 태교를 중시하여 성학집요
(聖學輯要)의 네 번째 장으로 교자(敎子)의 항목을 만들고, 가장 먼저 열
녀전을 들면서 태교를 언급한다. 그와 함께 송대 학자들의 견해 약간을
인용하는데, 그 역시 태교에 대해서는 상당히 긍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성학집요에서 이전의 견해를 답습하는 것과는 다르게 소학
집주(小學集註)에서는 성리학의 이론 틀 내에서 재해석하고 있었다. 그
는 조선 전기에 널리 유행한 소학집성(小學集成), 소학집설(小學集
說) 등의 주석서와 여러 자료들을 집대성하여 소학집주를 편집하면서,
자신이 이해하고 있었던 성리학의 이념들을 그 안에 투영시켰다. 그리고
태교와 관련하여, 오눌(吳訥)의 소학집해(小學集解)를 근거로 다른 해
석을 제시한다.
이는 임신 했을 때에 마땅히 감화되는 바를 삼가야 하니, 선(善)에
감화되면 선해지고 악(惡)에 감화되면 악해진다고 말한 것이다. 이
씨(李氏)가 말하였다. “사람이 태어남은 천명(天命)의 성(性)으로 말
하면 순수하고 지극히 선하여 본래 다름이 없으나 기질(氣質)의 성
으로 말하면 청탁(淸濁)과 미오(美惡)의 차이가 없을 수 없으니, 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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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지혜롭고 탁한 자는 어리석으며, 선한 자는 어질고 악한 자는
불초하다. 임신의 초기는 감화받는 시기이니, 한번 자고 한번 앉고
한번 먹고 한번 보고 한번 듣는 것이 실로 청탁과 미오의 관건이 되
고, 지우(智愚)와 현불초(賢不肖)의 근저가 된다. 어버이 된 자가 이
것을 소홀히 하고 태만히 하여 공경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
는가.” 하였다.33)
여기서 언급된 이씨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지 분명하지 않지
만, 인성(人性)을 천명지성(天命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어
이해하는 성리설과 연관하여 태교를 설명하고 있다.34) 그리고 율곡은 이
를 전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태교를 성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다. 그런데 이 설명이 성리설을 개인적인 차원의 태교에 적용한
사례라고 한다면, 그와 함께 사회적인 차원으로도 확대해서 해석하려 한
듯 보인다.
그의 제자인 김진강(金振綱)이 기록한 어록 가운데의 대화에서 그 단
서가 일부 드러난다.
물었다. 남녀가 정(精)을 섞을 때, 유기(游氣)가 그 사이에 결합한
이후에 사람이 생겨납니다. 순(舜)이 태어날 때에, 고수(瞽叟)의 기가
비록 탁했지만 지극히 맑은 유기를 받았기 때문에 성인(聖人)이 된
것입니까?
대답했다. 그렇다. 대개 부모의 기는 분수(分數)가 적고, 천지의 기
33) 小學集註 「立敎」, “此言姙娠之時 當愼所感 感於善則善 感於惡則惡也 李氏曰 人
之有生 以天命之性言之 純粹至善 本無有異 以氣質之性言之 則不能無淸濁美惡之
殊 淸乃智而濁乃愚 美乃賢而惡乃不肖 姙娠之初 感化之際 一寢․一坐․一立․一
食․一視․一聽 實淸濁美惡之機栝 智愚賢不肖之根柢也 爲人親者 其可忽慢而不
敬畏哉.”
34) 정호훈(2009), 「16․7세기 小學集註의 成立과 刊行」, 韓國文化 47,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p. 117.
김성수 / 조선 전기 태교론(胎敎論)의 수용과 전개 71
운은 분수가 많다. 그런 까닭에 고수의 탁기(濁氣)가 천지의 청기(淸
氣)를 당해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순이 성인이 된 까닭이다.
비유하자면 한 잔의 매운 물을 한 항아리의 꿀물에 넣으면 매운 맛
이 섞여서 단 맛이 되는 것과 같다.35)
김진강이 태아가 형성될 때 남녀의 ‘정’ 이외에 ‘유기’가 개입함으로
써 현부(賢否)와 성인․악인의 차이가 생겨나는 것인가라고 묻자, 율곡
은 부모의 기운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차별성은 적지만 천지의 기운에서
는 차이가 크다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천지의 기운이 부모의 기운보다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질문은 인간의 심신(心身) 형
성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유기’의 존재였는데, 율곡은 천지의 기운으로
확대해서 대답한 것이다.
그런데 김진강이 다시 “소학에서 말하는 태교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하자, 율곡은 “기의 평평한 것을 받았다면 태교로써 교정할 수
있지만, 지극히 탁하다면 태교의 힘으로도 어찌할 바가 없다.”고 대답한
다.36) 이것은 태교가 갖고 있는 한계를 지적하는 것인데, 앞서 태교를 주
목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율곡이 갖고 있는 성학(聖學)에 대한 견해를
보아야 한다. 율곡은 사람들이 장수하고 요절하는 원인을 묻는 책문(策
問)에서 천지의 기운이 해답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천지의 기
운은 선치(善治)의 여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며, 그로 인하여 상고(上古)
35) 栗谷全書 卷31, 「語錄 上, 金振綱所錄」, “問 男女構精之際 游氣合於其間 然後人
得而生焉 舜之生也 瞽叟之氣雖濁 而稟游氣之至淸 故爲聖人耶 曰 然 大抵父母之氣
分數少 天地之氣分數多 故瞽叟之濁氣 不能當天地之淸氣 此舜之所以爲聖人也 譬
如一勺辛水 投於一瓮蜜水 則辛味渾化爲甘味也.”
36) 栗谷全書 卷31, 「語錄 上, 金振綱所錄」, “曰 天地之氣爲主 則以父母之氣 不能矯
其天地之氣耶 曰然 曰 小學所謂胎敎者何也 曰 受氣平平者 則可以胎敎而矯之也 至
於極濁者 則非胎敎之力所可爲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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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장수하는 사람이 많았고 중고(中古) 이후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
한다.37) 또 인간의 기운과 천지의 기운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천지의 기
운이 ‘치중화’(致中和)의 경지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개별 인간들이 좋은
기운을 받아서 명(命)을 누릴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군주가 진실로 지성(至誠)의 도리로써 지성의 교화를 펴서 천지를
경륜하고 화육을 돕게 된다면…중화(中和)의 기운이 천지에 가득 차
서 동물․식물로써 천지간에 해와 달, 서리와 이슬의 은총을 받는 것
모두가 인수(仁壽)의 영역으로 들게 되어 반드시 요사하는 것이 없을
것인데, 어찌 이 백성들이 장수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겠습니까?38)
그리고 치중화(致中和)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은 군주가 요순(堯舜)의 마
음을 갖고 행동하여 도덕에 의한 교화를 구현하는 것이었다.39) 이와 같
은 율곡의 성학론을 감안한다면, 태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긍정과 함
께 한계를 지우는 방법을 택함으로써 성학이 태교라는 논의에서도 근거
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고 있었다.
태교가 일반적으로 개인에 의한 개별적인 행위라고 한다면, 율곡은 그
것 역시도 천지의 기운이라는 사회적 함의에 구속된다고 보는 것이다.
애초에 천지의 기운을 올바르게 해서 사람들이 이를 얻어 바르게 태어나
도록 한다면 태교는 훨씬 수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와의 대화에서
주장한 것은 태교의 부정이 아니라 군주의 마음을 바르게 함으로써 보다
37) 栗谷全書 拾遺 卷5, 「雜著, 壽夭策」, “上古之世 天地氣運甚盛 故得氣之厚者多
中古以下 天地氣運漸衰 故得氣之薄者多 是以 古之人 壽者多而夭者少 今之人 夭者
多而壽者少 脩短善惡 雖不同矣 大槪繫於氣運之盛衰矣.”
38) 栗谷全書 拾遺 卷5, 「雜著, 壽夭策」, “人君苟能以至誠之道 推至誠之化 經綸天地
參贊化育…中和之氣 充塞天地 動植之物 日月所臨 霜露所沾者 皆囿於仁壽之域 必
無夭札者矣 何患斯民之未壽乎.”
39) 栗谷全書 拾遺 卷5, 「雜著, 神仙策」, “後之王者 苟能心堯舜之心 行堯舜之行 以
此道而化天下.”
김성수 / 조선 전기 태교론(胎敎論)의 수용과 전개 73
거대한 차원에서의 태교를 이루려는, 즉 경세학을 통한 사회적 태교로의
확대였다고 할 수 있다.40)
4.2. 동의보감의 태교인식 전환
17세기 전반 허준(許浚, 1546∼1615)에 의해 동의보감(東醫寶鑑)과
산부인과 전문의서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가 편찬되는데, 이 시
기를 대표하는 의서라는 점에서 16세기 이래 전개된 태교의 논의가 의학
에서 어떻게 정립되는지 고찰할 수 있다.41) 그런데 동의보감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태교의 항목이 사라지고, 대신 부모의 수양이 강조되며
임신 금기 조항 정도만 다루어지고 있는 점이다.
동의보감 부인문은 「구사」(求嗣)로부터 시작되는데, 조선 전기 의서
들의 내용과는 사뭇 다르다. 조선 전기에는 진자명의 부인대전양방이
산부인과 지식의 중심이었다면, 동의보감에서는 16세기 이래 조선에
널리 전해진 금원사대가와 명대의 의서들이 핵심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그 의서들은 주진형(朱震亨, 1281~1358)의 단계심법(丹溪心
法)․격치여론(格致餘論), 이천(李梴)의 의학입문(醫學入門)이나 우단
(虞摶)의 의학정전(醫學正傳) 등이었다. 이들의 견해에는 진자명과 동일
한 면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론상에서 커다란 차이점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구사」의 항목을 검토하면 드러나는데, 가장 먼저 단계심법
을 인용하여 임신을 위해 여성의 생리를 고르게 해야 한다는 점을 말한
다. 부인대전양방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 항목이지만, 그에 이은 설
명은 전혀 다르다.
40) 양생론을 통한 율곡의 경세학 전개에 대해서는 김성수(2005), 「16~17세기 養生書
편찬과 그 배경」, 韓國思想史學 24, 한국사상사학회, pp. 360-364 참조.
41) 언해태산집요가 내용상 동의보감을 대부분 따르고 있는 까닭에 여기서는 동
의보감만을 대상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74 인문논총 제71권 제1호 (2014.02.28)
임신할 수 있게 하자면 여자들은 월경을 고르게 하는 것이 중요
하고 남자들은 정기(精氣)를 충실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성
욕을 억제하고 마음을 깨끗하게 가지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성욕을 억제하여 함부로 성생활을 하지 말고 정기를 축적하면서 정
액을 충실하게 했다가 적당한 시기에 성생활을 해야 임신할 수 있
다. 성욕을 억제하면 정기가 충실해지기 때문에 흔히 임신할 수 있
을 뿐 아니라 또 오래 살 수도 있게 된다.입문42)
의학입문을 인용한 이 대목에서는 여성의 조경(調經) 외에 남자의
정기를 충실히 할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정기를 충실하게 하려면 성욕
의 억제와 성생활의 절제를 말하는데, 이를 위해 마음을 안정시키라고
한다. 결국 임신을 위해서만 성생활을 해야 함을 말하는 것인데, 여기
에는 명대의 의학론과 함께 정(精)을 중시하는 허준의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43)
허준은 동의보감의 편찬 범례라고 할 수 있는 「집례」(集例)에서 정
기신(精氣神)은 장부(臟腑)와 육체의 중심이라고 말하였다.44) 그리고
정․기․신 가운데 몸의 근본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 ‘정’이라고 이해하
는데, 영추(靈樞)를 인용하여 남녀의 결합으로 태아가 생길 때 가장 먼
저 생기는 것이 정이며 또한 골수와 뇌수의 근간이 된다고도 설명하였
다.45) 그런데 ‘정’은 사실상 남자의 정액을 말하기 때문에, 임신에 있어
서 남자의 역할을 다시금 강조한 것이다.46)
42) 東醫寶鑑 雜病篇, 卷10, 「婦人門, 求嗣」, “求嗣之道 婦人要經調 男子要神足 又寡
慾淸心爲上策 寡慾則不妄交合 積氣儲精 待時而動 故能有子 是以 慾寡則神完 不惟
多子 抑亦多壽(入門).”
43) 김호(2000),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 서울: 一志社, pp. 191-195.
44) 東醫寶鑑 「集例」, “臣勤按…精氣神又爲藏府百體之主.”
45) 東醫寶鑑 內景篇, 卷1, 「精, 精爲身本」, “靈樞曰 兩神相薄 合而成形 常先身生 是
謂精 精者 身之本也 又曰 五穀之津液 和合而爲膏 內滲入于骨空 補益髓腦 而下流
于陰股.”
김성수 / 조선 전기 태교론(胎敎論)의 수용과 전개 75
다음 항목은 부인을 선택하는 「상녀법」(相女法)으로, 여성의 품행을
보아야 하는 이유로 품행이 올바르면 월경이 고르기 때문이라고도 설명
한다.47) 즉 품행의 좋고 나쁨이 결국 여성의 혈과 관련이 있으므로, 부인
선택의 중요한 기준이 바로 임신의 가능성과 직접 연결된다고도 할 수
있다.
정과 혈이 임신의 기본이라고 이해된 만큼, 임신이 안 되는 이유도 결
국에는 두 가지 방면에서 찾아야 했다. 이는 임신을 위해 가장 먼저 제시
한 처방약인 고본건양단(固本健陽丹)의 설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대체로 임신하지 못하는 것은 정혈이 멀겋고 차거나 성생활을 지
나치게 한 탓으로 신수(腎水)가 약해져서 정액이 자궁으로 곧바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혈(母血)이 부족하거나 허하고 찬 데
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회춘
공정현(龔廷賢)의 만병회춘(萬病回春)을 인용한 대목에서, 불임의
원인을 여성에게만 돌릴 수 없음을 새삼 언급하고 있다.48) 그렇다고 해
서 남성의 금욕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여성은 감정의 기복이
심하여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으므로 수양이 중요하다고 여긴 만큼 임
신을 위한 여성의 수양도 필요하였다.49)
46) 東醫寶鑑 內景篇, 卷1, 「精, 精爲至寶」. 여기서 언급하는 ‘정’은 남자의 정액만을
말한다. 임신에 있어서 남자의 역할이 부정되었던 것은 아니어서, 부인대전양방
에서도 자식을 갖지 못하는 세 가지 원인 중 하나로 남자와 여자의 질병을 언급하
고 있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정’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동
의보감의 사유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47) 東醫寶鑑 雜病篇, 卷10, 「婦人門, 相女法」, “未笄之婦 陰氣未完 慾盛之婦 所生多
女 性行和者 調經易挾 性行妬者 月水不勻 相貌惡者刑重 顔容美者福薄 太肥脂滿子
宮 太瘦子宮無血 俱不宜子 不可不知(入門).”
48) 東醫寶鑑 雜病篇, 卷10, 「婦人門, 脉法」, “固本健陽丹 凡人無子 多是精血淸冷 或
房勞過傷 以致腎水欠旺 不能直射子宮故爾 豈可專責於母血之不足(回春).”
76 인문논총 제71권 제1호 (2014.02.28)
이어서 원하는 시기에 임신하는 방법과 금기해야 할 내용들도 언급되
며, 특히 태교에 있어서 중시되는 금기와 관련된 내용은 「음양교합피기」
(陰陽交合避忌)에서 자세히 나타난다. 천금방을 인용한 이 부분에서는
정상적이지 못한 성생활을 피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태아에게 육체적
질병, 신체적 결함 이외에 품성과 행실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50)
동의보감에서는 오장(五臟)이 칠신(七神)을 간직하고 있으며 또한 ‘신’
(神)이 칠정(七情)을 거느리기 때문에 ‘신’이 상하면 육체적 병이 된다고
설명한다.51) 따라서 신기가 손상되면 남자의 정과 여성의 혈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임신을 한다고 하더라도 나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태교와 관련하여 지적할 것은 동의보감에서 여성의 조경과
더불어 남성의 수양을 강조한다는 사실이다. 천금방 등을 토대로 여전
히 임신에 따른 금기나 전녀위남법 등을 소개하고 있지만 태교의 과정에
서 보다 중시된 것은 수양이었으며, 이는 한편으로 수양론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조선 성리학의 발전과정과 명대 이후 의학의 반영에 따른 결과
로 이해된다.
49) 東醫寶鑑 雜病篇, 卷10, 「婦人門, 婦人雜病」에서 부인의 병은 남자보다 10배나
더 치료하기 어려운데, 그 이유로 부인은 남자보다 성욕이 강하고 질투와 걱정 등
감정의 기복이 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50) 東醫寶鑑 雜病篇, 卷10, 「婦人門, 陰陽交合避忌」, “凡男女交會 當避丙丁日 及
弦․望․晦․朔․大風․大雨․大露․大寒․大暑․大雷電․大霹靂 天地晦冥 日
月薄蝕 虹霓地動 則損人神不吉 損男白倍 令女得病 有子必癩痴․頑愚․瘖瘂․聾
瞶․攣跛․盲眇 多病短壽 不孝不仁 又避日月星辰 火光之下 神廟佛寺之中 井竈圊
厠之側 塚墓尸樞之傍 皆所不可 夫交合如法 則有福德․大智․善人 降詫胎中 仍令
性行調順 家道日隆 若不如法 則薄福․愚痴․惡人 來詫胎中 令性行凶險 所作不成
家道日否 禍福之應 有如影響 可不戒哉(千金).”
51) 이상은 東醫寶鑑 內景篇, 卷1, 「神, 五藏藏七神」 및 「神, 神統七情傷則爲病」 참조.
김성수 / 조선 전기 태교론(胎敎論)의 수용과 전개 77
5. 맺음말
중국 고대로부터 논의된 태교는 조선 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소개
되기 시작했다. 세종에 의해서 주도된 의서편찬 과정에서, 중국 송대 진
자명의 부인대전양방에서 제시한 태교의 내용이 핵심으로 자리 잡았
다. 당시로써는 최신의 의학이론을 소개하여 현실에 반영한다는 의학 본
래의 취지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성리학적 규범을 조선에 뿌리내리려
는 세종의 의도도 어느 정도 반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교가 추구하
는 것은 건강한 신체 이외에도 올바른 품성을 갖출 기반을 마련하는데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아직 성리학의 연구가 활발하지 못한 상태에서,
태교에 대한 논의는 의학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16세기 소학의 재발견을 통한 성리학의 사회적 규범화가 가속화되
면서, 그 안에 담겨 있었던 태교는 새로운 논의로 전개되었다. ‘기질지
성’을 근간으로 인간의 차별성을 설명하였지만, 동시에 이를 극복하고
성인의 학문으로 들어가는 길잡이인 소학의 가르침이 태교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태교를 성리학적인 관점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필요했
고, 부모의 선천적 기운과 함께 후천적인 요소가 태아 형성에 미치는 영
향을 새롭게 조명하였다. 그리고 나아가 이이는 사회적 교화의 측면으로
써 태교의 논의를 경세학의 근거로 제시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마찬
가지로 16세기 이래 수용된 명대의 의학에서 수양을 중시하는 경향은
동의보감에도 영향을 미쳐, 태교의 시작으로써 부모의 수양을 강조하
였으며 이는 조선 후기 의학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이 태교의 논의는 시대를 거치면서 다양하게 해석․변화되어
왔다. 따라서 그 면면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의학과 사
상․문화 등 여러 층위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며, 또한 조선의 의학과 사
상계가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보다 큰 범
78 인문논총 제71권 제1호 (2014.02.28)
위에서의 연구가 필요하다. 중국과 조선의 사상사․의학사적 전개에서
나타난 태교 의식의 변화, 무엇보다 조선후기 태교서 등장의 배경 등에
대해서는 이후의 연구과제로 남겨둔다.
김성수 / 조선 전기 태교론(胎敎論)의 수용과 전개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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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접수일: 2013년 10월 31일
심사 완료일: 2013년 11월 25일
게재 확정일: 2013년 12월 3일
김성수 / 조선 전기 태교론(胎敎論)의 수용과 전개 81
ABSTRACT
The Acceptance and Development of Antenatal Training
Theories during the Early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Kim, Seong-su*52)
Antenatal training (胎敎), which had been discussed since ancient times
in China, began to be introduced in earnest from the Joseon Dynasty
period. In the process of medical book compilation led by Sejong, the
contents of antenatal training presented in the Fùrén dàquán liángfāng (婦
人大全良方), which was written by Chén zì-míng (陳自明) in the Sung
Dynasty period of China, was established as the core of antenatal training.
At that time, although there was on one hand an original medicinal intent
to introduce the newest medical theories which could be applied, also reflected
in this endeavor is the intention of Sejong who wanted
neo-Confucian norms to take root in Joseon. However, since studies of the
quality of disposition were not yet actively carried out, discussion on antenatal
training remained within the medical dimension.
As the adaptation of the social norms of neo-Confucianism came to be
accelerated in the 16th century through the rediscovery of Sohak (小學),
it was necessary to give meanings to antenatal training discussed in Sohak
* Institute of Humanit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82 인문논총 제71권 제1호 (2014.02.28)
from the viewpoint of neo-Confucianism. In addition, Lee Ee (李珥) attempted
to present discussions on antenatal training as a grounds for statecraft
studies in terms of social enlightenment. However, a change also appeared
in Dongeuibogam (東醫寶鑑) which emphasized the abstinence of
the father based on medical grounds ― a theory which had been central
to medicine since the four famous physicians (四大醫家) of the
Geum-Yuan Dynasty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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