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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중추부사 조상변(趙相抃)공 묘갈명 병서〔同知中樞趙公墓碣銘並序〕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23.02.21|조회수19 목록 댓글 0

동지중추부사 조공 묘갈명병서同知中樞趙公墓碣銘並序

 

공의 휘는 상변(相抃)이고 자는 열경(悅卿)이며 성은 조씨(趙氏)이고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11대조는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가 정절(貞節)이며 호가 어계(漁溪)인 휘 려()이경은(李耕隱),김매월당(金梅月堂)등 현자들과 세상에서 노릉(魯陵단종의 능호) 생육신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이들과 나란히서산서원(西山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조려가 동호(銅虎)를 낳았으니 군수를 지냈으며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또 동호의 아들로 집의(執義)를 지낸 삼()과 별제(別提)를 지낸 손자 정백(庭栢)과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증손자 개()를 지나 의영고 주부(義盈庫主簿)를 지냈으며 호가 방호(方壺)인 현손 준도(遵道)에 이르렀으니, 조준도가 공의 5대 조부이다. 이분이 함일(咸一)을 낳고 함일이 중린(重藺)을 낳으니 두 분 모두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휘 암()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휘 경인(景仁)은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으니 곧 공의 조부와 아버지이다. 첫째 어머니는 아주 신씨(鵝州申氏)로 신현석(申玄錫)의 따님이며, 둘째 어머니는 월성 이씨(月城李氏)로 이진표(李震彪)의 따님인데,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둘째 어머니 이씨가 숙종 갑오년(1714, 숙종40)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영오하고 뛰어났다. 8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통곡하고 울며 절하고 꿇어앉기를 한결같이 백형이 하는 대로 따라 하였다. 학문을 배우자 번거롭게 해석하여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깨칠 수 있었다. 그러나 성격이 얽매이지 않아 길들이기가 어려웠다. 조금 성장하여 마음을 고쳐먹고 책을 부지런히 읽어 일 년 만에 소미통감(少微通鑑)통감절요(通鑑節要)전체를 다 외웠다. 숙부들이기삼백(朞三百)을 펴 놓고 계산함에 옆에서 그 착오를 바로잡아 주었다. 약관에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영조 갑자년(1744, 영조20)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임신년(1752, 영조28)에 아버지 상을 당하였는데, 삼년상을 마치고는 과거 시험 공부를 그만두었다. 거주하는 곳은 배산임수의 지형으로, 날마다 거기서 물고기를 잡고 나물을 캐서 먹으니, 맛있는 나물을 먹을 수 있고 신선한 물고기를 먹을 수 있다[美可茹鮮可食]는 뜻을 취하여 당호를 이가당(二可堂)’이라 하였다. 생도들을 모아 가르치매, 부지런함과 태만함을 고과하여 상과 벌을 주어 감히 태만하게 놀지 못하게 하였다. 더욱이 학교(學校)와 향당의 서숙(書塾)에 힘을 다 쏟아 다방면으로 조치하고 마련하여 선비들을 양육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였다. 여가가 있으면 당시의 유명한 인사들과 아름다운 산수를 마음껏 노닐며 즐겼다.

갑인년(1794, 정조18)우로전(優老典)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되었고 계해년(1803, 순조3)에 가선대부로 승진되었다. 이듬해 갑자년(1804, 순조4)은 사마시에 합격한 지 만 60년이 되는 해로, 특별히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되었다.과거 시험 합격자를 발표하고 패를 주는 것60년 전 처음 사마시에 합격할 때와 같이 하였는데, 초여름에 축하연을 베풀었다. 공은 금관자와 붉은 허리띠를 하고서 난복(幱幞)을 갖추어 입고 가마를 타고 밖으로 나가니, 관현악단이 앞에서 인도하고 자제들과 많은 손님들이 좌우에서 따르며 호위하였는데, 구경하는 사람들이 찬탄해 마지 않으며 진짜 신선이라고 하였다. 공이 드디어 오언 율시 한 편을 읊어 손수 써서 성은을 칭송하매, 그 자리에 있던 선비들이 모두 그 시에 차운하였다. 을축년(1805, 순조5) 6월 모일에 정침에서 고종명하니 향년 92세였다. 청송 주왕산(周王山) 대곡(大谷) 임좌(壬坐)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부인 증() 정부인(貞夫人)은 고성 이씨(固城李氏) 시우(時雨)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아들은 우섭(友爕)이고 두 딸은 김도운(金道運)과 권재대(權載大)에게 각각 시집갔다. 우섭의 아들은 기영(基永)이고 딸은 박승규(朴承圭)에게 시집갔다. 김도운의 아들은 일수(一壽), 남수(南壽), 응수(應壽)이고 두 딸은 이시옥(李時玉)과 고몽두(高夢斗)에게 각각 시집갔다. 권재대의 양자는 병문(炳文)이다. 기영의 아들은 박()이고 딸은 어리다.

공은 일찍이 원조십훈(元朝十訓)을 지어 자손에게 보여 주었으니, 첫 번째는 효도와 공경으로 스스로 면려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학문하여 잠심(潛心)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몸가짐을 경()으로 하는 것이고, 네 번째는 정성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며, 다섯 번째는 근본에 힘써 게으르지 않는 것이고, 여섯 번째는 상례와 제례를 힘이 닿는 대로 하는 것이며, 일곱 번째는 국가에 바치는 세금을 기일 내에 납부하는 것이고, 여덟 번째는 관정(官政)에 대하여 논의하지 않는 것이며, 아홉 번째는 종들을 어루만져 긍휼히 여기는 것이고, 열 번째는 가축을 거두어 기르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공이 이미 능한 것이었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자애롭고 선량하며 질박하고 곧았으며, 평소에 항상 몸을 낮추어 자신의 덕을 길렀다. 일에 임하여 시비를 판단하는 데 이르러서는 명민하고 과감하였다. 또 변화에 통달하는 지혜가 넉넉하였고 엄정한 도리로 집안을 다스렸다. 복서(卜筮), 감여(堪輿), 무격(巫覡)의 무리들을 일체 물리쳐 멀리하였다. 타인의 옳지 않은 점이 있음을 보면 반드시 면전에서 배척하고서야 그만두었다. 그러나 대체로 화후(和厚)한 기상이 얼굴과 거동에 가득차 넘쳐났다. 문사(文辭)와 가곡(歌曲) 등을 지음에 또한 넉넉히 창달하고 발양하여 회포를 잘 표현하였다. 어려서부터 만년까지 매일 반드시 일찍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저녁까지 단정하게 앉아 정신이 혼란하지 않기를 죽을 때까지도 오히려 그러하였으니, 매우 장수하며 높은 품계에 올랐던 것은 참으로 또한 까닭이 있었다.

하루는 공의 손자 기영이 구호(龜湖)김굉(金㙆)영공(令公)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면서 묘갈명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기에 드디어 서술하기를 위와 같이 하였다. 명으로 이으니 다음과 같다.

기자의 홍범구주의 오복/ 箕疇五福
잘 누리는 사람이 드무네 / 人鮮克享
공은 이에 완비하여 가졌으니 / 公乃備有
특별한 성은이 거듭 내려왔네 / 異恩荐降
자금어대는 만년을 비추었고 / 紫袋暎暮
난복의 도포는 옛날 그대로이네 / 幱袍依曩
넉넉한 큰 덕망을 / 優優碩德
세상 사람들이 우러르네 / 寔爲世仰
묘갈명으로 후세에 알리니 / 銘以詔後
나의 말이 거짓이 아니네 / 余言非爽

 

[-D001] 이경은(李耕隱):

이맹전(李孟專, 1392~1480)으로,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백순(伯純), 호는 경은이다. 선산 출신으로, 1427(세종9)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김숙자(金叔滋)ㆍ김종직(金宗直) 부자와 평생을 가까이 지냈다. 수양대군이 정권을 탈취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가서 귀머거리ㆍ소경이라 핑계하고는 은둔하여 친한 친구마저 사절하고 30여 년이나 문밖에 나가지 않았다. 90세 가까이 살았다. 1781(정조5)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과 선산의 월암서원(月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D002] 김매월당(金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으로,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ㆍ청한자(淸寒子)ㆍ동봉(東峰)ㆍ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이다. 법호는 설잠(雪岑)으로 서울 출생이다. 1455(세조1)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3일간 통곡하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1707(숙종33)에 사헌부 집의(執義)에 추증되었고, 1782(정조6)에는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784(정조8)에는 청간(淸簡)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D003] 서산서원(西山書院):

경남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있다. 단종(端宗) 선위(禪位)에 즈음하여 절의를 지킨 어계(漁溪) 조려(趙旅)가 은둔하던 이곳 백이산(伯夷山) 아래에 영남의 유림들이 조려와 이맹전(李孟專),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등 생육신(生六臣)의 충절을 천양하고 덕의(德義)를 존모하기 위하여 1703년에 세웠으며 1713년에 서산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서원 이름을 서산(西山)으로 함은 서원 동쪽에 백이산(伯夷山)이 있는데, 생육신의 절의가 수양산(首陽山서산(西山))에 숨은 백이(伯夷)ㆍ숙제(叔齊)에 비견(比肩)되었기 때문이다.

[-D004] 기삼백(朞三百):

서경》 〈요전(堯典)에 있는 월력(月曆)을 만드는 기본이 되는 기록이다. 하늘 둘레가 3654분의 1도이므로 그에 맞추어 월력을 만들되 1년을 355, 56일로 정하고, 그 나머지 수를 모아 3년에 한 번 또는 5년에 두 번의 윤월(閏月)을 두었던 것이다. 원래 서경에는 ()366일이다.”라 하였는데, 여기에서 기삼백(朞三百)이라고 말한 것은 끝수를 약한 것이다.

[-D005] 우로전(優老典):

나이가 80세가 된 사람에게 특별히 내리는 벼슬을 말한다.

[-D006] 과거 시험 합격자를 …… :

원문 창방급패(唱榜給牌)’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의 명단을 부르고 그들에게 합격증(合格證)을 주는 일을 말한다. 대과(大科) 합격자에게는 홍패(紅牌)를 주고, 소과(小科) 합격자에게는 백패(白牌)를 주었다.

[-D007] 김굉(金㙆):

1739~1816.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자야(子野), 호는 구와(龜窩)이다.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다. 1773(영조49)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777(정조1)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예조 참판에 이르렀다. 문학과 서체에 뛰어났으며, 스승의 유문을 정리하였다.

[-D008] 영공(令公):

영감(令監)이란 말과 같은데, 관직이 정3품과 종2품의 사람에게 존칭으로 쓰는 말이다.

[-D009] 기자의 홍범구주의 오복: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에게 올린 홍범(洪範)구주(九疇) 중 오복으로 수()ㆍ부()ㆍ강녕(康寧)ㆍ유호덕(攸好德)ㆍ고종명(考終命)을 말한다.

[-D010] 자금어대(紫金魚袋):

물고기 모양의 장식이 붙어 있는 주머니를 말하니, 공복(公服)의 띠에 매달아 관직의 귀천(貴賤)을 구분하였다.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김영옥 송희준 (공역)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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