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과 군막을 오가며 어머니 봉양한 아들
성풍세
배 위에 뛰어 오른 잉어
경북 고령군 다산면은 불당산과 인봉산(195m) 사이에 있는 들판이다. 칠
곡에서 고령으로 접어든 낙동강은 동락리 앞에서 불당산에 가로막혀 물길을
동쪽으로 비켜서 흐른다. 여기서부터 월성리까지는 팽팽히 잡아당긴 활시위
처럼 역‘C’자 형태의 반원을 그리며 내려온다. 그 사이에 사문진교를 지난
강은 월성리 인봉산 앞에서 직선을 회복한 채 산 옆구리를 훑으며 고령 쪽으
로 비스듬히 남하한다. 다산면은 낙동강 너머 달성군 옥표면, 논공면과 마주
하고 있고 달성군 화원면과도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나정리는 임진왜란 때 전라도에 사는 기奇씨 성을 가진 사람이 정자나무를
심었으므로 전라도의 ‘나羅’자와 정자나무의 ‘정亭’을 따서 마을 이름을 불렀
다는 설과 마을 앞 정자에서 뒷산을 바라보니 비단이 펼쳐진 것 같다고 해서
‘나정’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기씨 성을 가진 사람이 피난 와서 정자나무
백원문, 성풍세 효자비각문 입구
를 심고 마을 이름을 나정리라고 부르던 그때 쯤, 성풍세成豊世(1572~1650)
도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나정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태종 때 영의정을 지
낸 성석린의 후손이다. 임진왜란을 피해 노모를 모시고 나정리에 왔다. 임진
왜란이 나던 해에 그는 21살이었다. 나라가 왜적들의 수중에 들었다고 생각
하니 피가 펄펄 끓었다. 상주진의 병사가 됐다. 그러나 홀로 된 어머니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집에서 군영까지 180리나 되는 길을 아침 저녁으로
걸어 다녔다. 아침 일찍 일어나 군영에 갔다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
의 밥을 챙겼다. 그 180리 길을 호랑이가 태워줬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행동을
보고 장교가 감동해 군역을 면해줬다고도 한다. 『효행지』에 나오는 기록이다.
사문진沙門津은 낙동강변의 모래를 걸어가서 배를 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라고도 하고, 절에 불공을 드리기 위해 신도들이 거쳐 가는 나루라 하여 사문
진寺門津이라고도 한다. 달성군 화원에 있는 사문진 나루터는 성풍세가 어머
니의 약을 구하기 위해 낙동강을 건너온 곳이다. 지금은 유람선이 운항하고
주막촌이 들어서서 가족과 연인이 즐겨 찾는 대구시민들의 휴양지가 됐다. 세
월이 400년 정도 흘러 성풍세가 배를 타고 건너던 강에는 780m 길이의 사문
진교가 들어서 고령과 달성을 오가는 차량 물결이 끝없이 이어진다. 고령군과
달성군은 2021년 8월 ‘강나루 디지털 뉴딜사업(사문진교) 업무협약을 맺었다.
20억을 들여 야간경관 개선사업을 시행하겠다는 것이다. 다리에 경관조명을
설치하는 것도 좋지만 400년전 이곳을 배타고 건넜던 성풍세의 효행도 더 널
리 알렸으면 좋겠다.
성풍세는 어머니의 약을 구하기 위해 배를 타고 사문진으로 가던 중이었는데
잉어 한 마리가 배위에 뛰어 올라왔다. 배를 타고 가던 손님이 잉어를 잡았다.
사공은 자기 배에 잉어가 들었으므로 자기가 주인이라고 목성을 높였고 손님
은 고기를 잡은 사람이 주인이라며 서로 싸웠다. 어머니의 병환 치료를 위해
잉어가 꼭 필요했던 성풍세는 돈을 주고 잉어를 샀다. 잉어의 꼬리를 잘라 표
시를 해둔 뒤 도로 강물 속에 잉어를 던져놓고 돌아올 때 다시 가져가겠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황당해 하며 바보 같은 짓이라고 비웃었다. 돌아오는 길에
꼬리 잘린 잉어가 배위에 다시 올라왔다. 배 주인이 이것은 분명히 성풍세의
잉어가 맞다며 돈을 돌려주었다. 잉어도 사람도 성풍세의 효행에 감동했던 것
이다.
성풍세가 전쟁터와 집을 오가던 사문진나루터는 유원지로 변했다.
공조 이원조, 성풍세의 전기를 짓다
성풍세의 효행은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던 모양이다. 성만징이 이 이
야기를 듣고 감동했다. 그의 문집 『추담문집』에 「효자성풍세전」이 전해오고
있다.
모친이 83세가 되어 죽었는데 슬픔으로 자신을 손상함이 예의범절을 넘어섰다.
장례를 치름에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묘소에서 곡하며 절하였으니 비록 비가 오
더라도 폐하지 않았고, 다니기를 반드시 맨발로 해서 비록 눈이 쌓여있더라도
신발이나 버선을 신지 않았다. 3년 동안 죽을 먹고 옷은 따뜻하게 입지 않았고
침석은 편안하게 자질 않았다.(중략) 하루는 삭전朔奠에 고기를 바칠 수 없어
효자가 상심하고 탄식하며 오랫동안 슬퍼하였다. 홀연히 날아가는 꿩이 마당에
스스로 들어오니 효자가 하늘에 절하며 “하늘이 이 물건을 나에게 하사하시어
어머니를 제사지내게 하셨는가?그런데 잡아 죽임을 차마하지 못하겠으니 내 장
차 어찌할꼬?” 하였다. 그러니 꿩이 또 스스로 죽었으니 그 효성에 감동한 부
류가 이와 같이 많았다. 관아에서 마침내 부역을 제외시켜 주었다.
200년이 지나 경주부윤, 대사간, 공조판서를 지낸 이원조(1792~1871)도
「성효자전」을 남겼다.
효자의 이름은 풍세豐世이고, 관향은 창녕昌寧이다. 태어나면서 지극한 성품을
지녀 늙은 모친을 잘 섬겼다. 임진년 난리에 비록 떠돌아다니며 달아나 숨더라
도 봉양은 빠뜨린 적이 없었다. 일찍 학업에 실패하여 예군적隷軍籍에 낙강落講했
는데 상주진尙州鎭에 나가서 조련함에 문득 저물녘에 갔다가 새벽에 돌아오기를
늘 똑같이 하였다. 때마침 차가운 서리가 깔았던 자리에 가득 쌓여 있어 주장主
將이 괴상히 여겨 물어 그 실상을 파악하고 두 장교로 하여금 몰래 따라가게 하
니 과연 그러하더라. 주장이 크게 놀라고 탄복하여 마침내 군액軍額에서 제외시
켜 주었다. 성대하게 술과 음식을 갖추어 하사해도 기꺼이 먹지를 않으므로, 주
장이 또 괴상히 여기고 물으니, 효자가 대답하길, “어머니를 생각하면 차마 먹
을 수 없습니다. 이로써 그릇을 바꾸지 않고 어머니를 봉양하기를 원하니 관의
하사품이 과분하기 때문입니다.” 하므로, 주장이 허락해 주었다. 효자가 상투를
풀고 밥상을 이고서 돌아갔는데 쌓여진 음식물이 새것 같았고 술맛도 여전히 따
뜻하였다.
백원문 현판
효자비 문화재 자료비 성풍세 효자비
1
‘성풍세 효자비’는 경북 고령군 다산면 나정리 불당산(172m) 자락에 있
다. 나정리에서 다산 석재단지 앞을 지나 벌지리로 가는 나선로 길 옆 산자
락이다. 수백년 된 느티나무가 시립해 있고 계단길에는 개망초와 루드베키
아가 피어 있다.
정려비각의 출입문은 ‘백원문百源門’이다. ‘효가 만사의 근원’이라는 뜻
이다. 마당에 들어서면 개망초가 마당을 뒤덮었다. 비각 문에 ‘명정문命旌
門’현판이 걸려 있다. 비각 안에는 ‘효자성공휘풍세지비孝子成公諱豊世之碑’
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비석은 1768년(영조 44)에 세워졌다. 귀부 위
에 비신을 두고 반원형의 연화문이 조각된 이수를 얹었다. 비석 위 천장 아
래 ‘효자성풍세지려’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편액에 숭정 85년에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1712년(숙종 38)에 정려가 내려졌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