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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충효열전

영덕/남경훈 아버지 대신 옥살이를 한 의병장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22.03.16|조회수35 목록 댓글 0

아버지 대신 옥살이를 한 의병장


남경훈


가렴주구 사또에 맞서다
남의록南義祿(1551~1620)은 생각했다. 전쟁이 끝난 지 고작 10년이 지났
다. 민생은 여전히 도탄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농토는 피폐해 고을민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배고픔에 허덕이는데 목민관이 어떻게 민생은 외면하고
가렴주구에 골몰한다는 말인가, 저런 꼴을 보자고 왜란 때 아들까지 앞세워
부자가 목숨을 걸고 왜적들과 싸웠다는 말인가. 왜놈들이 물러가니 벼슬아치
들이 준동하는 세상은 도의가 있는 세상인가 아닌가.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
운 것이 관리였다. 전쟁 때는 제 한 몸 살겠다고 꽁무니를 빼던 자들이 전쟁이
끝나자 저마다 자리를 꿰차고 나타나 백성 위에 군림했다.
무거운 세금 때문에 못 살겠다는 사람들이 남의록을 찾아와 하소연을 했다.
남의록은 영해 백성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었다. 향당의 좌장을 지냈던
그다. 무과에 급제했고 판관 벼슬까지 했으며 임란 때는 아들과 함께 의병을
이끌고 경주, 영천 등 경상도 일대를 누비며 왜적의 목을 베고 이 땅을 수호한
사람이다. 선무원종공신에 녹선되었다. 남의록은 1611년 겨울, 억울하게 피
해를 입은 사람들과 함께 영해부사를 찾아가 현재 부과하는 세금이 부당하다
며 세금을 다시 책정해 줄 것과 재발방지책을 요구했다.

 


난고 남경훈 종가 전경

영해부사는 단호했다. 남의록이 조산대부 판관을 지낸 임란공신이며, 고을
민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다는 사실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오직
부사의 권위에 도전하는 늙은 무관이 보였을 뿐이다. 부사는 관원을 능멸한
점, 불순한 무리를 선동한 죄를 물어 남의록을 안동감영에 보내 옥살이를 시
켰다. 남의록은 환갑의 나이에, 엄동설한 한 겨울에 말도 안되는 죄명을 뒤집
어 쓰고 옥살이를 하게 됐다.
아들 남경훈南慶勳(1572~1612)이 격분했다. 그는 5년 전 사마시에 입격해
성균관 진사로 선발되기도 한 인재였다. 우복 정경세가 그의 문장을 보고 ‘세
속 선비의 흔해 빠진 사장의 학문이 아니다’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또 효성이
뛰어났다. 「난고선생행장」은 그의 효행을 이렇게 기록했다. ‘일찍이 아버지
조산공이 병환 중에 계시면서 물고기를 드시고 싶어 하셨으나 구하지 못하였
다. 경훈은 이때 모친 상중에 있었는데 상주라고 어찌 망설이겠는가,라고 하
면서 그물을 가지고 개울에 가서 잉어를 잡아다 대접해 드렸더니 부친의 병환
이 곧 안정되었다. 이 소문을 듣고 탄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라고 기록할
만큼 아버지에 대해 효성이 깊었다.
그는 경상도 관찰사를 찾아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영해 백성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설명한 뒤 부사의 학정을 조목조목 열거하며 아버지의 무죄 방면을
주장했다. 아버지가 임란 공신이며 고령인 점을 감안해 죄가 밝혀질 때까지
자신이 감옥살이를 대신하겠으니 아버지를 방면시켜 달라고 읍소했다. 남의
록이 풀려나고 남경훈이 감옥살이를 했다. 이 사건은 무죄로 판결되고 영해부
사는 파직됐다.

 


옥살이 후유증으로 죽다
남경훈은 이듬해 봄에 풀려났으나 풀려난 그해 겨울 41세의 젊은 나이로 세
상을 떠났다. 한겨울에 옥살이를 하면서 얻은 병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남의록은 맏아들이 이렇게 떠나가자 참담하고 비통한 마음을 이길 수 없었
다. 꾹꾹 누르고 삭였던 슬픔을 맏손자 남길이 사마시에 급제하자 아들에 대
한 비통한 마음과 손자의 급제에 대한 기쁜 마음을 글로 쏟아냈다. 희비가 교
차하는 심정이었다.
아!어찌 차마 말하리오. 지난 병오년(1606) 가을에 네 아비가 사마시에 합격
하여 영광스럽고 다행스럽게 여겼다. 지난 신해년(1611)에 내가 관가로부터 큰
재앙을 당하자 네 아비가 감영에 분주하게 다니면서 원통한 사정을 하소연했다.
병들고 늙은 나를 대신해 겨울 동안 풍설이 몰아치는 차가운 감옥에 갇혀 상심하
고 분노하다가 결국 병이 들어서 임자년(1612) 겨울,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지
경에 이르러 나보다 먼저 죽고 말았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본
사람들이 모두 효성이 지극하고 순수하다고 하면서 공경하고 탄복하지 않는 이
가 없었다.
애석하구나. 내가 쇠락한 가문의 복이 없는 사람이다. 매양 이 일을 생각할 때
쇠한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졌다. 이제 네가 장손으로서 겨우 스물셋의 나이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아비의 행적을 이었으니 슬픔과 기쁨이 지극해 이 글을 써서
네게 보여준다.
장손 길에게 글을 써서 보여주며


남경훈은 1572년 영덕군 영해읍 원구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남의록,
어머니는 춘천박씨다. 자는 응화應和, 호는 난고蘭皐, 본관은 영양이다. 원구
리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남경훈의 고조부 남비다. 남비는 무과에 급제해 훈
련원 참군, 충무위 부사직을 역임했는데 아들 남한립이 영해 인량리 박지몽의
딸과 혼인하면서 아들의 처향 근처로 옮겨왔다. 남경훈은 어릴 때부터 영특
해서 7살에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웠다. 아버지 남의록은 이황의 제자인 유일
재 김언기 문하에서 수학했다. 남경훈은 임진왜란 때 아버지와 함께 의병으로
참전해서 공부를 쉬었으나 1604년 향시에 장원을 했고 이듬해인 1606년 사
마시에 입격하여 성균관진사에 선발됐다. 남경훈의 가문은 대대로 무인 급제
자를 배출한 무인 집안이었으나 남경훈이 사마시에 입격하면서 문풍을 일으
켰다. 남경훈은 그러나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인근에
학문이 높다는 소문이 나면서 가르침을 청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대표적
인 사례가 「음식디미방」의 저자 장계향이다. 장계향은 이시명과 결혼을 했는
데 이시명에게는 전실의 소생으로 여섯 살 난 아들이 있었다. 장계향은 남경
훈의 학문과 인품을 듣고 전처의 어린 자식을 가르치기 위해 인량마을에서 원
구마을까지 5리길을 업고 다녔다고 한다. 남경훈은 저술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사례해의四禮解義』 2책은 후학들이 예를 실천하는데 지침으로 삼도
록 한 저술이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 요점을 뽑고 여러 선현의 쓴 글의 주
해를 비교해 서로 같음과 다름을 구분해놓았다. 그밖에도 여러 유고들이 『영
산가학』, 『가선세묵』에 수록돼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남의록이 일어섰다.그는 대대로 국록을 받은
무인 집안의 자손이요, 의리와 명분을 목숨처럼 여기는 선비였다. 그는 또 향
당의 좌장으로 고을민들의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었다. 통문을 돌려 동지를 규
합하고 자기 재산을 털어 군량과 병장기를 마련해 영해 최초의 의병을 조직했
다. 아버지의 창의를 본 남경훈은 자신도 아버지를 따라 출전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국난에 몸을 바치는 것이 선비의 도리이고 부모를 보호하는 게 자식
의 도리라는 것이다. 남의록은 아들이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웠다. ‘나라의 형
편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하 되고 자식 된 자가 높은 베개에 편안히 누워
있을 세월이 아니다.’며 아들의 출전을 허락했다. 남경훈의 나이 21세였다.


영해의병장으로 공을 세우다
남경훈은 영해의병장으로 8차례 의병회맹에 참석했고 8차례 전투에 나섰
다. 첫 전투는 경주 선도산 전투였다. 1592년 6월 7일 아버지 남의록과 함께
최봉천, 김난서 등이 이끄는 의병군과 박의장이 이끄는 관군과 함께 울산에
서 올라오는 왜군을 격파해 400여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뒀다. 7월 27일 영
천성 수복 전투에 나서 경주 영천 지역의병 4,000명과 함께 창의 정용군을 편
성하고 권응수의 지휘 아래 영천성을 되찾았다. 남의록과 남경훈 부자는 경주
성 수복 전투에도 참전, 마침내 영천, 울산, 언양, 흥해, 장기성의 거진인 경
주성을 되찾았다. 남의록은 이 전투에서 군량미 700석을 내놓아 노블레스 오
블리주 역할을 단단히 했다. 이듬해 2월에는 순찰사 한효순의 통문을 받고 문
경당교까지 달려가 당교 전투에 참전했다. 당교는 조령을 넘어 충주와 한양으
로 통하는 목구멍 같은 길목이었다. 그만큼 전투가 치열했다. 10여 차례 전투
끝에 왜군을 몰아냈다. 1597년 명나라와 왜의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왜군이 5
만명의 병사를 동원해 다시 밀려들어 왔으니 정유재란이다. 남경훈은 곽재우
가 있는 화왕산성으로 달려가 일주일 동안 왜군들과 대치하며 성을 지켜냈다.
남경훈은 학행이 뛰어난 선비였지만 전략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으니 의
병장 곽재우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군량미는 빈부와 노약을 분별하여 두斗와 석石으로 합하고 향서鄕序와 향교의 보
편寶便 및 학위의 세미를 모아서 군량미를 비축하면 전조미 80~90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기는 구한 것과 바친 것에 따라 개介와 부部(원문 결락)영덕, 청하,
흥해, 연일에서 빌린 대나무 및 각 원員이 바친 쇠를 아울러서 화살을 만들면 또
한 장편의 화살 60~70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를 감사가 지시한 바 대로 왜마
약간 필에 싣고 향병이 이끄는 품종 몇 명을 곁에 두어 그것의 운반을 감독하고
여러 곳의 군량미와 무기 또한 이를 사례 삼아 편의에 따라 조처하여 주둔한 곳
에 차례로 모으면 비축된 군량미가 필요에 맞게 지출되고 무기도 모자라는 근심
이 없을 것입니다.


남경훈이 곽재우에게 쓴 편지 ‘의병장 곽재우에게 올리다’ 중에서
앞서 말한대로 남경훈은 아버지의 억울한 감옥살이를 대신하다가 감옥을
나와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가 죽자 지방 유림과 후손
들이 그의 충절과 효성을 추숭하고 유업을 계승하려는 작업이 이어졌다. 광
산서원이 대표적인 사례다. 광산서원은 1802년 유림의 공의로 남경훈과 남길
부자를 배향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대원군 서원철폐 때 훼철됐다. 현재 서
원은 없어지고 서원이 있던 자리에 ‘광산서원 경덕사유지비’가 있다.
남경훈의 호를 딴 난고종택은 남경훈의 아버지 남의록이 터를 잡은 곳이다.
종택 정침은 아들 남길이 성균진사에 입격한 뒤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남경훈을 추모하기 위해 지었다. 정침 오른쪽에 있는 만취헌晩翠軒은 거창현
감을 지낸 남경훈의 장증손 남노명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지었다. 늦게까지
푸른 기상을 잃지 않겠다는 뜻이다.

 


만취헌 오른쪽 뒤에는 신주를 모신 불천위 대묘와 체천위 별묘가 각각 있다.


체천위는 종손이 4대가 지나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4
대 이내의 자손이 생존해 있을 경우 따로 신주를 모시는 것을 말한다.
난고정은 종택 제일 동쪽에 있다. 남경훈이 생전에 자신이 살던 집 동쪽에

 

 


만취헌. 만취헌 남노명이 지은 정침.

연못을 파고 연못가에 세원 정자로 1606년에 건축됐다. 김도화가 쓴 「난고정
기」는 “원래 집 정원이 작은 연못가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난고라 하였다”라
는 밝히고 있다. 그 후 광산서원으로 옮겼다가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될 때 현
재의 자리로 이건했다가 2011년에 다시 복원했다.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2
칸, 홑처마 팔작지붕기와집이다.
난고종택에서 귀중한 소장자료가 많이 나왔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기

 

 


남경훈 종가 내 난고정 

 


탁한 자료는 총 2,564점으로 고서가
433종 1,130책, 고문서 1,167점, 책판
214장, 서화자료 4점 기타 민속자료 49점 등이다.

 

 


남경훈 위패를 모신 불천위 사당

 

 


만취헌 남노명이 370년 전 심은 백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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