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端宗]청령포에서 비운의 삶을 마감하다
1441년(세종 23) ~ 1457년(세조 2)
영월 장릉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단종의 즉위와 정세의 변화
조선의 제6대 임금이다. 이름은 이홍위(李弘暐)이고, 문종[조선](文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권전(權專)의 딸이었다. 세종(世宗) 23년(1441) 7월 23일에 태어나서 세종 30년(1448) 4월 3일 세종에 의해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되었고, 문종 원년(1451) 정월에 왕세자(王世子)로 책봉을 받았다. 문종 2년(1452) 5월 14일 문종이 경복궁(景福宮) 천추전(千秋殿)에서 죽자, 5월 18일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근정문에서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단종은 즉위 때 교서를 반포하였는데, 모두 24개 조항이 부기되어 있었다. 취임 초기 단종의 정치는 모든 사무를 매양 대신들에게 물어서 하라는 즉위 교서의 내용과 같이 의정부의 정승들에게 크게 의지하는 것이었다. 개별 조항을 보아도 13번째 조항에서 모든 조치는 의정부·육조와 의논하여 행하겠다고 하였으며, 14번째 조항에서 육조에서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던 것을 모두 의정부를 거쳐 보고하라고 하였다. 또한 다음 조항에서 주요 관리의 인사도 모두 의정부와 의논하여 결정하겠다고 하였다. 관련사료
단종의 모후는 단종을 낳다가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므로, 단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후원해 줄 내명부의 어른이 없었다. 따라서 어린 국왕의 후원은 문종이 후사를 부탁한 대신들이 맡았다. 당시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는 고명대신으로서 어린 임금을 보좌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 즉위 직후 단종은 문무 관료의 인사 때 추천자들 가운데 대신이 황표(黃標)를 붙여 올린 사람을 낙점하여, 왕권이 대신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황표정사’를 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 문무 관료의 인사를 행함에 있어 의정부 대신들이 매일 빈청(賓廳)에 나와 일에 관여하였다. 문무 관료를 제수함에 있어 대상자를 3명 추천하면 국왕이 그 가운데 적임자를 낙점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이때에는 3명의 추천자 가운데 대신이 임명하고자 하는 인물에 황표를 붙여 아뢰면 임금은 그것을 보고 낙점하였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황표 정사(黃標政事)’라고 한 것이다. 관련사료
한편 당시 종친들의 위세가 대단하였는데,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도 아직 살아 있었고 세종의 정실 자식인 여러 대군들은 한창 왕성한 활동을 펼칠 나이인 장년에 접어들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후의 세조[조선](世祖))과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유명하였는데, 그들은 단종의 숙부로서 정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에 단종 즉위 초에 사헌부(司憲府)에서 의정부 대신과 함께 대군들에 대한 분경(奔競)을 금지하라는 요청을 하기도 하였다.
2 계유정난과 수양대군의 집권
단종 원년 10월 수양대군은 자신의 동생인 안평대군과 의정부 대신인 황보인, 김종서 등이 결탁하여 모반하려 한다는 것을 핑계로 군사를 동원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이를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고 한다. 그는 먼저 자신의 최대 정적인 김종서를 찾아가 죽이고, 여러 대신들을 왕명으로 불러 처단하였다. 또한 안평대군은 체포하여 강화도(江華島)에 유배하였다가 사사하였다. 정변에 성공한 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영경연서운관사(領經筵書雲觀事) 겸판이병조사(兼判吏兵曹事)의 직함을 받아 권력을 장악하였다. 북변에서 이징옥(李澄玉)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이로써 단종의 왕권은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계유정난의 구체적인 진행 과정을 살펴보면, 수양대군은 단종 원년 10월 10일 자신을 따르던 무인들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먼저 김종서의 집을 방문하여 그를 살해하고 군사를 동원하여 단종의 처소 및 도성의 성문과 주요 요충지를 장악하였다. 그런 다음 왕명으로 여러 재상들을 차례로 불러 자신들과 대립하고 있던 황보인, 조극관(趙克寬), 이양(李穰), 민신(閔伸) 등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안평대군과 그 아들을 체포하여 강화도에 안치하였다. 이로써 수양대군 일파는 주요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국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관련사료
수양대군은 정변의 뒤처리가 마무리되자 단종의 혼례를 추진하였다. 당시는 문종의 상기가 아직 끝나지 않아 평상시의 예로 보면 혼례를 추진할 수 없는 시기였으나, 수양대군은 단종의 처지가 외롭고 약하여 국인이 모두 왕비 맞아들이기를 원한다는 논리로 혼례를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풍저창부사(豊儲倉副使)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비(妃)로, 예원군사(預原郡事) 김사우(金師禹), 전 사정(司正) 권완(權完)의 딸을 잉(媵)으로 맞아 들였다. 하지만 이때는 아직 문종의 상기가 끝나지 않은 때였기 때문에, 왕비를 맞는 것을 옳은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또한 혼례 과정에서 왕비를 맞아들인 뒤 상기를 단축하고 길복을 입을 것인지를 놓고 논란이 벌어져, 단종이 왕비를 맞는 일을 정지하라는 명령까지 내려왔으나 결국 수양대군의 강력한 요청으로 혼례가 성사되었다. 관련사료
3 단종의 선위와 단종복위 모의
수양대군이 정권을 장악한 다음 단종의 측근 세력은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종을 보위하던 내관들이 축출된 것이 그 한 예이다. 한편, 왕실에서는 단종의 어린 시절 보육을 맡았던 혜빈(惠嬪) 양씨(楊氏)와 그의 아들인 한남군(漢南君)과 영풍군(永豊君), 그리고 금성대군(錦城大君) 등이 단종을 보위하면서 수양대군과 대립하였다. 그러자 수양대군은 단종 3년 6월 혜빈 양씨와 한남군 이어, 영풍군 이천을 비롯하여 상궁 박씨, 금성대군 이유 등이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수양대군이 이들에게 난역을 도모한다는 혐의를 씌워 지방으로 귀양 보내자 단종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선양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고 단종을 상왕으로 추대하였다. 관련사료
수양대군은 고대 중국 주나라의 주공과 같이 어린 임금을 도와 반란을 진압하고 왕권을 안정시킨다는 명분으로 정변을 일으켰지만 조카로부터 선양을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되자 유교 정치 이념에 따른 명분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세조 정권의 성립을 인정할 수 없는 유신들은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모의를 추진하였다. 오늘날 사육신 사건으로 알려진 단종 복위 모의 사건은 사실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집현전 출신의 유신들과 성승(成勝), 유응부(兪應孚) 등 고위 무관, 그리고 단종의 외숙부인 권자신(權自愼)과 같은 외척 세력이 연합하여 모의한 것이었다. 이들은 세조를 조선 국왕으로 책봉하는 조서를 가지고 방문한 명 사신을 위한 연회 자리에서 세조를 살해하고 측근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계획이 성사되지 않자 세조 2년 6월 모의 가담자 중의 한 사람인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김질(金礩)과 그의 장인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 정창손(鄭昌孫)이 함께 세조를 몰래 만나기를 청하고, 성삼문, 박팽년,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응부, 유성원(柳誠源) 등이 상왕의 복위를 모의하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세조는 연루자들을 급히 체포하여 심문하였는데, 그들은 명 사신을 접대하는 연회에 별운검으로 참여하게 되어 있었던 성승, 유응부, 박쟁(朴崝) 등으로 하여금 세조를 살해하고 그 일당을 제거한 다음 상왕을 다시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실토하였다. 관련사료
성삼문 등의 상왕 복위 모의가 발각되자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은 가혹한 심문을 받았다. 심문 과정에서 성삼문은 단종이 복위 모의에 가담하였음을 밝혔다. 단종은 자신의 외할머니인 권자신의 모친으로부터 복위 모의가 진행되고 있음을 전해 들었고, 모의의 실행이 예정된 아침 권자신은 창덕궁에 가서 상왕에게 긴 칼을 받아 왔다. 이 칼은 상왕이 복위 모의에 동의했다는 증거로 간주되었다. 관련사료
4 영월 유배와 죽음
단종이 모의에 가담한 것이 드러나자 대신들은 상왕에게 모의에 대한 책임을 물어 지방으로 내치자고 건의하였다. 하지만 세조는 이러한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세조 3년 6월 단종의 장인인 송현수와 권완이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이 들어오자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새로운 조치를 단행하였다.
세조는 송현수와 권완을 의금부(義禁府)에 하옥시키라고 명령한 다음, 상왕 복위 모의 이후 지금까지 인심이 안정되지 않고 잇달아 난을 선동하는 무리가 그치지 않는다고 하면서,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고 궁에서 내보내 영월에 거주하게 하였다. 한편 야사에는 단종이 영월로 유배된 것이 세조 2년 성삼문 등의 복위 모의가 발각된 직후라는 주장도 있다. 야사에서는 당시 실록을 편찬한 자들이 모두 세조 일파로서 그 기록을 모두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관련사료
단종은 영월 서강 청령포(淸泠浦)에 머물다가 수재를 입을 염려가 있어 객사(客舍) 동헌(東軒)인 관풍헌(觀風軒)에 옮겨 거처하였다고 한다.
단종의 선위를 불러왔던 혜빈 양씨와 금성대군 일파의 모반 사건 때 금성대군 이유(李瑜)는 삭녕(朔寧)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 그는 광주(廣州)를 거쳐 경상도 순흥(順興)으로 이배되었다. 여기서 금성대군은 지방민들을 설득하여 반란을 도모하였다. 하지만 이 거사는 안동 관노의 고변으로 사전에 발각되었다. 금성대군의 순흥 거사가 발각되자 결국 금성대군 이유는 사사(賜死)하고, 송현수(宋玹壽)는 교형(絞刑)에 처하고 말았다. 『세조실록』에는 금성대군의 죽음을 들은 단종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관련사료
하지만 야사에는 금부도사가 사약을 가지고 영월에 당도하였고, 단종을 모시던 통인이 공을 세우려고 단종을 교살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세조가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으며 사약을 내릴 때의 기록이 의금부에 남아있다는 주장이 선조 때 기대승에 의해 제기되었으며, 사약을 받들고 갔던 금부도사가 왕방연(王邦衍)이라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설화나 야사에도 단종이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고는 되어 있지 않고, 누군가가 목을 졸라 죽였다고 되어 있으므로, 단종이 목이 졸려 죽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관련사료
단종 사후 시신을 수습하는 이가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영월의 아전 엄흥도(嚴興道)가 위험을 무릅쓰고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5 후대의 평가와 복권
단종은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었지만 단종비 송씨는 단종이 죽고도 65년을 더 살아 중종 16년에 세상을 떠났다. 송씨는 정미수(鄭眉壽)를 시양자로 삼았었는데 정미수는 문종의 딸이자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정미수도 송씨보다 일찍 중종 7년 세상을 떠나자 송씨는 정미수의 아내에게 자신의 노비와 재산을 모두 물려주기를 바랐다. 이후 정미수의 후손들이 단종과 단종 비에 대한 제사를 계속 이어왔다. 숙종 때 단종의 왕호가 복위되었는데 단종과 단종비 송씨의 신주가 고(故) 참판(參判) 정중휘(鄭重徽)의 집에 봉안되어 있다고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관련사료
세조의 후손들의 조선의 왕위를 계승하게 되면서 단종은 국가의 위기를 불러온 어리석은 왕으로 폄하되었고, 신분도 왕이 아닌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하지만 사림파가 정치적으로 성장하면서 세조 정권 성립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단종의 죽음을 억울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그에 따라 꾸준히 단종 세력의 복권을 추진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 중종대 소릉 복위가 이루어졌고, 노산묘에 대한 치제가 거행되었다. 중종대 이후 역대 임금은 노산군묘에 대한 수리와 치제를 이어왔으나, 실질적인 복권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숙종 7년에 이르러 대군으로 일컫도록 하였다. 숙종은 정비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대군(大君)이나 공주(公主)라고 일컬으니, 노산군(魯山君)도 당연히 대군으로 일컬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숙종은 칭호를 높인 다음 승지를 보내 그의 묘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관련사료
이후 숙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었던 단종을 다시 왕으로 추복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는 전 현감 신규(申奎)가 상소를 올려 왕호 추복을 건의한 데서 비롯되었다. 신규가 상소하자 숙종은 실록과 문집, 만필 중에서 참고가 될 만한 것을 조사하도록 하고, 널리 의견을 물어보라고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대신과 종친을 비롯하여 문관들이 모두 모여 회의를 하였는데, 회의에 참석한 문관이 모두 491인에 달하였다. 그 뒤에도 숙종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대신과 유신(儒臣)들에게 의견을 물었고, 그들의 의견이 모두 도착한 다음 비망기를 내려 왕호 추복을 결정하였다. 관련사료
숙종은 단종의 왕호 추복이 결정된 이후 복위 의절을 결정하기 위해 대신과 비변사의 제신들을 불러 모았다. 복위의 의절은 크게 종묘에 부묘하는 의례와 영월의 무덤을 능으로 봉하는 의례로 나뉜다. 무덤은 왕릉 가운데서도 석물이 가장 간단한 후릉(厚陵)에 의거하여 조성하였고, 종묘의 부묘는 바로 영녕전(永寧殿)에 신주를 봉안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관련사료
숙종이 단종의 왕호를 추복하고 육신을 복관하자 이후로 단종 대에 반역자로 몰려 죽음을 당했거나 처벌 받았던 사람들, 그리고 세조 정권에 저항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복권하고 추숭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었다. 이러한 요구가 계속되자 정조는 단종의 능인 영월의 장릉(莊陵)에 배식단을 세우고 이른바 단종 충신들을 봉안하였다. 배식단에는 정단(正壇)과 별단(別壇)이 있는데, 정단에는 육종영(六宗英)·사의척(四懿戚)·삼상신(三相臣)·삼중신(三重臣)·양운검(兩雲劒) 및 육신과 육신의 아비와 자식 중에 특별한 사람과 허후(許詡)·허조(許慥)·박계우(朴季愚) 등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 문헌공(文獻公) 박연(朴堧)의 아들과 손자로서 더욱 뛰어난 사람과 순흥 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 도진무(都鎭務) 정효전(鄭孝全), 호장 엄흥도 등 충신지위 32인을 모셨고, 별단은 시판 3개를 만들어 조사(朝士)를 한 판, 맹인·내시·군사·노비를 한 판, 여인(女人)을 한 판으로 했다. 관련사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