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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연대기

건주여진 정벌[建州女眞征伐]세조, 건주여진을 정벌하다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22.07.08|조회수14 목록 댓글 0

건주여진 정벌[建州女眞征伐]세조, 건주여진을 정벌하다

 

「여진」이 새겨진 수명장수를 바라는 동제 거울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조선에서는 국경지역에서의 여진 침략이 대규모이거나 지속적으로 행해지면 정벌을 통해 대응하였다. 조선 태종 대부터 광해군 대까지 20차례 가까이 정벌이 이루어지거나 시도되었다. 일반적으로 건주여진 정벌은 1467년(세조 13)에 행해진 정벌을 가리키지만, 연구자에 따라 성종 대의 건주위 정벌까지 포함하기도 한다.

2 건주여진은 어떤 부족인가

여진족은 금(金, 1115∼1234)이 멸망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요동과 만주에 흩어져 분포하고 있었다. 특히, 두만강과 압록강 위쪽에 분포하고 있던 오도리(斡朶里), 우량하(兀良哈), 우디거(兀狄哈) 등은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명에서는 여진족을 크게 건주여진(建州女眞), 해서여진(海西女眞), 야인여진(野人女眞) 등의 세 부류로 구분하였다. 이 가운데 건주여진은 명에서 남만주 지역의 여진 세력을 초무(招撫)하기 위해서 1403년에 설치한 건주위(建州衛)의 여진을 말한다. 처음에는 우량하의 추장 아합출(阿哈出)이 이끌었고, 1405년에는 오도리의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가 건주위 도지휘사(建州衛都指揮使)가 되었다. 같은 해에 두만강 인근의 회령(會寧)에 건주좌위(建州左衛)가 설치되었고, 이후 우위(右衛)가 증설되어 본위·좌위·우위 등의 건주삼위(建州三衛) 체제가 되었다.

3 조선과 건주여진

조선은 여진에 대해 교린(交隣) 정책을 취하였다. 조선 조정은 그들을 정치적으로 복종 시켜 변방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했다. 이에 여진은 조선 조정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하고, 일부 여진 추장에게는 관직을 하사하여 포섭하였다. 여진의 무역 요구를 받아들여 함경도에 무역소(貿易所)를 설치하기도 했다. 관련사료 그러나 여진은 종종 조선의 변방을 침략하였다. 1406년(태종 6) 여진 침략은 우디거가 경원(慶原)을 침략한 사건이었다. 이후 정묘호란 이전까지 백여 차례나 발생하였다. 특히, 압록강 일대에 거주하였던 건주여진이 조선을 자주 침범하였다. 그들은 국경 지역의 조선인 민가에 침략하여 불을 지르고 재산을 약탈하였다.

여진의 잦은 침략에 대해 조선도 강경책으로 대응하였다. 특히, 세종은 국경 지역에 4군 6진(四郡六鎭)을 설치하여 그들을 압박하였다. 1433년(세종 15)부터 1443년(세종 25)까지 최윤덕(崔潤德), 이천(李蕆) 등은 여진족을 토벌하면서 여연군(閭延郡), 자성군(慈城郡), 무창군(茂昌郡), 우예군(虞芮郡) 등의 4군을 완성하였다. 또한 1433년에 김종서를 함길도 도절제사로 삼아 동북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게 했다. 관련사료 이후 십여 년에 걸쳐 두만강 하류 지역에 6진이 개척되었다. 6진은 회령, 종성(鍾城), 온성(穩城), 경원, 경흥(慶興), 부령(富寧) 등이다. 4군 6진 개척은 조선의 북쪽 국경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조는 집권과정에서의 부당성을 외교의 안정으로 만회하려고 했다. 세조는 여진의 내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명은 조선과 여진의 통교를 문제 삼았는데, 조선은 명에 해명하면서도 여진과의 통교를 중지하지는 않았다. 1458년(세조4)에 건주위 추장 이만주(李滿住)의 아들 이고납합(李古納哈)에게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의 관직을 내려주었고, 관련사료 건주좌위 추장 동창(童倉)에게도 지중추원사의 벼슬과 녹봉을 내려주었다. 관련사료

4 1460년의 모련위 여진 정벌

세조의 여진 정책으로 여진과의 관계는 개선되었다. 그런데 1460년(세조 6)에 첫 번째 여진 정벌이 단행되었다. ‘경진북정(庚辰北征)’이라고도 일컫는 이때의 정벌 대상은 모련위(毛憐衛)의 잔존세력이었다. 모련위는 명이 1405년(태종 5)에 두만강가의 경원(慶源), 종성(鐘城) 북쪽에 설치하였는데, 1410년(태종 10) 조선의 정벌로 인해 대부분 몰락했다. 그러나 1411년(태종 11) 모련위가 다시 설치되며 건주위 부근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모련위 정벌의 직접적 계기는 조선이 낭발아한(浪孛兒罕)과 그의 아들 낭이승가(浪伊升哥) 등을 죽였기 때문이다. 관련사료 낭발아한 부자는 조선에서 우대해왔던 여진인이었지만, 변경의 조선 장수들과 몇 차례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에 세조가 신숙주(申叔舟)를 함길도 도체찰사로 파견해 여진 세력 간에 화해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낭발아한은 거부감을 나타냈다. 낭발아한은 조선이 모련위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냈고, 결국 낭발아한 부자는 모반을 꾀했다는 이유로 참수형에 처해졌다.

모련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 참수형을 당했다는 것은 파급력이 컸다. 낭발아한과 친했던 화라온(火剌溫) 부족과 낭발아한의 다른 아들 아비거(阿比車)는 2천 명이 넘는 군사를 끌고 조선 변경을 빈번히 공격하였다.

이에 세조는 여진 정벌을 결정하였다. 신숙주, 홍윤성(洪允成) 등에게 8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여진을 공격했다. 약 한 달 동안 단행된 정벌에서 조선의 전과는 죽인 여진족 430여 명, 불태워 없앤 집 9백여 채, 죽이거나 사로잡은 우마 1천여 마리였다. 관련사료

5 1467년의 여진 정벌, 조선과 명의 협공

모련위 정벌 이후에도 조선은 여진과의 통교를 유지했고, 한편으로 정벌에 대한 논의도 자주 했다. 조선은 여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논의하였다.

1467년(세조 13) 8월, 조선에서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났다. 이는 약 3개월 만에 진압되었는데, 진압군이 아직 북쪽에 잔류하고 있을 무렵 명에서 건주위의 이만주(李滿住)를 협공하자는 제의를 해 왔다.

이러한 명의 요청이 있기 전부터 조선은 독자적인 건주여진 정벌을 계획하고 있었다. 올량합 1천여 명이 의주에 수십 명의 조선인과 수십 필의 말과 소를 죽인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관련사료 『세조실록』에는 모련위 정벌 직후부터 건주위 정벌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타난다. 관련사료 세조가 여진에 대해 “오로지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할 뿐이며, 이로움을 보면 탐내고, 체통이 없기 때문에 기강이 없다. 그리하여 조금만 패하면 도망하여 흩어지고, 조금만 이기면 장물을 나누는 것이 적의 실정이다.”라며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도 주목된다. 관련사료

한편, 당시 명의 여진 정벌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명에서는 건주여진에 대한 조공 제한 조치를 건주여진에서 위반하는 사례들이 나타났다는 이유로 여진 정벌을 계획하였다. 더불어 여진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던 조선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세조는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을 필두로 강순(康純), 어유소(魚有沼), 남이(南怡) 등의 무장에게 명하여 군사 약 1만 명을 이끌고 길주에서 바로 압록강을 건너 건주위의 본거지를 공격하도록 했다. 관련사료

조선과 명의 협공은 건주여진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우선 이만주와 그의 아들 이고납합을 죽였다. 이외에도 죽이거나 사로잡은 여진인이 당시 건주위 인구의 약 10%에 가까운 1,20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여진 입장에서는 인명, 가축이 살상되고, 가옥, 농경지가 파괴되었으며, 상당한 노동력을 제공받았던 피로인(被虜人, 포로)까지 잃게 되었다. 관련사료

6 성종 대의 여진 정벌

건주여진이 정벌되고 2∼3년 후에 건주삼위는 부활되었다. 명이 여진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전통적인 조공체제를 재개했기 때문이다. 1472년(성종 3)에 조선에서도 평안도의 방어를 강화하고 건주여진과의 관계를 회복하였다. 관련사료 그러나 건주여진의 조선과 명의 국경 침략은 다시 행해졌다. 1467년(세조 13)의 여진 정벌에 대한 보복이기도 했고, 기존의 변하지 않는 교역 방식에 대한 불만이기도 했다.

명은 또 다시 건주위 정벌에 조선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극배(李克培)는 세조 때의 정벌로 인해 건주여진이 조선에 대한 원한이 남아있다고 하면서 출병을 반대하였다. 이극균(李克均)은 평안도의 흉년과 세종 대의 출병 거부 사례를 근거로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라 주장했다. 관련사료 하지만 성종은 우리 군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략을 모색하면서 출병을 결정했다. 이때의 정벌은 승리로 규정되기는 했지만, 사실상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고, 전과도 미미했다. 관련사료

여진 정벌이 다시 행해진 때는 1491년(성종 22)이었다. 당시 올적합 1천여 명이 조산보를 침입하였고, 이를 계기로 출병이 결정되었다. 관련사료 이때에도 많은 신하들이 반대했는데, 사대, 권력, 실리 등의 요인을 두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결국에는 북정도원수(北征都元帥) 허종(許琮)을 필두로 전례 없던 2만 명의 정벌군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 전과는 매우 미미하였다. 죽인 적은 9명에 불과했다. 관련사료 이때의 정벌은 사실상 실패였다.

7 건주여진 정벌 이후

조선의 건주위 정벌은 조선과 건주여진과의 관계를 크게 악화시켰다. 그런 중에도 식량난에 시달리던 여진인들은 조선에 귀화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서로 간의 교류도 일시 끊어졌다가도 다시 회복하기를 반복하였다.

건주여진은 수차례의 정벌에서 인적, 물적 손실을 당한 이후 그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하지만 약 1백 년이 지난 후인 임진왜란 무렵부터 세력을 회복해 나갔다. 건주좌위의 누르하치(老兒哈赤)는 건주삼위를 통합하여 만주를 통일한 뒤 1616년(광해군 8)에 후금(後金)을 건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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