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빈옥사[姜嬪獄事]인조의 미움을 받아 억울하게 죽은 세자빈 강씨
1646년(인조 24)
광명 영회원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강빈옥사는 1646년(인조 24)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姜嬪)이 시아버지인 인조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의혹을 받고 사사(賜死)된 사건이다.
강빈은 1627년(인조 5) 17세의 나이에 세자빈이 되어 궁으로 들어갔다. 1636년(인조 14)에는 병자호란으로 강화도에 피난하여 청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소현세자와 함께 청의 심양(瀋陽)에 볼모로 끌려가 생활하다가 1645년(인조 23)에 귀국하였다.
하지만 귀국 후 얼마 안 있어 소현세자는 급서하였다. 이후 인조는 강빈을 도와줄 친척들을 유배 보냈으며, 강빈 처소의 궁인들도 제거하였다. 1646년(인조 24) 정월 인조의 수라에 올린 전복구이에 독이 들어간 사건이 발생하자, 인조는 그 배후자로 강빈을 지목하며 그녀를 궁에서 폐출하고 사사하였다. 또한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내고 강빈을 옹호했던 신하들도 처벌하였다. 강빈에 대한 신원(伸寃)은 1717년(숙종 43)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의 제안으로 민회빈(愍懷嬪)에 봉해졌고, 관련자들도 복관되었다.
2 궁중에 연이어 저주사건이 발생하다
1645년(인조 23) 볼모로 청의 심양에 있던 소현세자와 강빈이 귀국한 지 2개월 만에 소현세자가 급서하였다. 세자의 죽음으로 그의 병간호를 담당한 의관의 처벌이 논의되었다. 이때 대사헌 김광현(金光炫)이 담당 의관 이형익(李馨益)의 죄를 적극 주장하자 인조는 의관 대신 김광현을 의심했다. 이유는 그가 강빈의 오빠인 강문명(姜文明)의 장인이었기 때문이다. 관련사료 결국 인조는 “사람됨이 무식하고 처사하는 것이 분수에 넘친다”는 이유로 강문명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인 강문성(姜文星), 강문두(姜文斗), 강문벽(姜文璧)을 제주(濟州)·진도(珍島)·흡곡(歙谷)·평해(平海)로 나누어 유배시켰다. 관련사료
인조는 강빈의 인척 뿐 아니라 처소의 궁녀들도 제거하기 시작했다. 궁녀 애란(愛蘭)은 “무당이 ‘세자가 북경에서 가지고 온 비단이 문제가 되어 소현세자가 죽는 흉화를 당하게 된 것이니, 이를 없애고 신(神)에게 사죄하여야 한다’고 했다”며 강빈에게 고하였다. 그러자 강빈이 그 말을 믿고 비단을 모조리 찾아내어 애란에게 없애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귀인 조씨가 애란의 방을 우연히 지나다 들른 것처럼 하고서 쓰러지자 인조가 놀라 그 연유를 추궁하였다. 그러자 조씨의 궁녀가 “무당과 애란이 서로 내통하였다”고 고해, 화가 난 인조는 애란을 절도(絶島)로 유배하였다. 관련사료
애란의 사건이 마무리된 후 다시 궁중에 저주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소현세자궁의 궁녀 신생(辛生)이 고변하였다. 신생은 대궐 안 흉물이 묻힌 곳을 고발했을 뿐 아니라 관련자 10여 인을 지목하였다. 이들 가운데 여종 애순(愛順)은 공초과정에서 “강빈이 시켜 사람의 뼈를 구해오라고 했으며, 강빈의 어머니가 저주하는 물품을 들여보냈다”고 진술하였다. 또한 “임금의 수라상에 독약을 넣은 것은 수라간 궁녀 일례(一禮)의 소행인데, 그는 강빈과 결탁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강빈이 ‘세자가 봉림대군으로 정해졌으니 내 아들들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니 세자궁을 저주하고 독약을 넣는 등의 일을 대전(大殿)에 행한 것과 같이 하라’고 했다”고 진술하였다.
이처럼 관련자들이 강빈이 저주사건을 주도한 것처럼 진술하였지만, 사실 물증은 없었다. 이에 인조는 강빈의 어머니 예옥(禮玉)을 잡아와 세 차례의 심문을 하였다. 그러자 예옥은 “흉물인 뼈를 구해온 사람은 종 적복(赤卜)이며, 강문성(姜文星)의 첩인 종례가 그것을 가루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강빈이 ‘보낸 것을 잘 받았다’는 내용의 답서를 보냈다”고 진술하였다. 또한 “독약을 넣은 일은 유배지에 있을 때 최상궁의 편지를 보고서야 이러한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자복하였다. 관련사료
인조는 저주사건의 관련자들을 모두 처형했을 뿐 아니라 강빈을 옹호했던 장렬왕후(莊烈王后)를 경덕궁으로 이어시켜 강빈과의 교류를 막았다. 또한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기 전에 강빈의 형제들을 유배시켰다.
3 수라상에 독이 든 전복구이가 올라오다
소현세자가 사망한 후 강빈 주변의 인척, 궁녀, 관원들은 지위에 관계없이 유배되거나 각종 사건에 휘말려 처형되었다. 더욱이 강빈은 장녀를 병으로 잃어 더욱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강빈을 압박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646년(인조 24) 정월 3일 인조의 수라상에 올라온 전복구이에 독이 들어간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인조는 강빈을 의심하며 빈궁의 나인과 어주 나인(御廚內人)을 하옥한 후 심문하였다. 궁녀 정렬(貞烈), 계일(戒一), 애향(愛香), 난옥(難玉), 향이(香伊), 천이(賤伊), 일녀(一女), 해미(奚美) 등이 내사옥(內司獄)으로 끌려와 내시에게 국문을 당하였다. 아울러 후원 별당에 강빈을 감금하고 문에 구멍을 뚫어 음식과 물을 넣어 주게 하는 등 사람들의 접근을 일체 통제하였다.
그러나 소현세자 사후 각종 저주사건이 발생하여 인조가 궁궐 내 사람들에게 “강빈과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고 경계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와 내통하는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강빈의 지시 하에 임금의 수라상에 독을 넣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일들을 후궁 조씨(趙氏)의 모함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관련사료
원칙적으로 임금을 해하려는 반역사건의 경우 반드시 의금부에 회부하여 추국을 시행해야 했다. 대사간 조경(趙絅), 헌납 조한영(曺漢英), 정언 강호(姜鎬)·김휘(金徽) 등은 “이러한 독살사건은 역적이 수라를 맡은 궁인 사이에 몰래 숨어 있는 것으로 의금부에 회부하여 그 죄상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인조는 “사정을 밝히기 어려운 바가 있기 때문에 의금부에 회부하지 않고 궁궐 내옥에서 심문하였다”고 하였다. 이후 대신들의 주장에 따라 국청이 설치되었지만 관련자들이 자백하지 않고 모진 고문에 죽게 되어 수라에 독을 넣은 자의 실상을 끝내 밝혀 내지 못했다. 관련사료
4 강빈, 사사(賜死)되다
이후 인조는 강빈의 죄를 공론화하였다. 인조가 언급한 강빈의 죄상은 그녀가 소현세자와 심양에 있을 때 몰래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왕비로서 내전(內殿)의 칭호를 외람되이 사용했으며, 왕비가 입는 홍금적의(紅錦翟衣)를 만들어 놓았다고 하였다. 흉물을 파묻고 독을 넣은 것도 다른 사람의 소행이 아니라 강빈의 짓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인조의 말에 김류(金瑬) 등은 “홍금적의를 만들어 놓은 것은 부인들이 비단을 탐하는 마음에 그런 것”이라고 변명하며 용서해주기를 주청하였다. 관련사료 하지만 인조는 도성과 궁궐 내 수비를 강화하며 강빈을 옹호하는 관료들을 체직시키거나 파직하였다.
강빈의 처분을 놓고 국왕과 관료들의 논의가 대립하자, 인조는 자신을 옹호하는 김자점(金自點) 등을 주요 관직에 포진하였다. 그런 후 강빈을 폐출하고 사사하라고 명하였다. 관련사료 강빈의 사사 명령이 떨어지자 대신들의 반대는 점점 심해졌다. 이에 인조는 강빈 사사를 반대하는 대신들의 이름을 하나씩 거론하며 위협하였고, 더이상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대역죄인으로 처단하겠다고 단언하였다.
결국 강빈의 사사 명령이 떨어진지 한 달 만인 3월 15일, 인조는 세자빈 강씨를 폐출하여 사가에서 사사하였다. 또한 세자빈으로 책봉되면서 받은 교명 죽책(敎命竹冊), 세자빈 인(印), 장복(章服) 등은 모두 불태웠다. 『인조실록』에는 “의금부 도사 오이규(吳以奎)가 덮개가 있는 검은 가마로 강빈을 싣고 선인문(宣仁門)을 통해 나가니, 길가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이 담장처럼 둘러싸며 한탄하였다”고 당시의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 관련사료
5 숙종, 강빈의 억울함을 풀어주다
강빈 옥사는 죄상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는데 단지 인조의 추측만을 가지고서 법을 집행한 사건이다. 더욱이 인조는 강빈을 사사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손자인 강빈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내 거기에서 두 손자를 죽게 만들었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강빈의 사사를 거친 후 왕위에 오른 효종은 강빈에 대한 일을 언급하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1654년(효종 5) 김홍욱(金弘郁)이 홍수와 가뭄의 재변이 잇따르자 이의 대처 방안을 위해 의옥(疑獄, 의심스러운 옥사)이었던 강빈 옥사의 원통함을 해결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그러자 효종은 진노하며 의금부 도사를 보내 김홍욱을 압송하여 추국하였으며, 그는 국문 중 곤장을 맞다 사망하였다. 관련사료
결국 강빈 옥사에 대한 신원은 숙종대에 이르러 행해졌다. 1718년(숙종 44) 숙종은 강빈의 옥사에 대해 대신과 2품 이상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모두 원통한 사건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숙종은 공론(公論)에 따라 소현세자빈 강씨(姜氏)의 작위(爵位)와 명호(名號)를 회복하도록 하였다. 관련사료
강빈의 시호는 ‘민회(愍懷)’로 결정되었다. 이 시호는 백성들로 하여금 그가 지위를 잃고 죽은 것을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에서 취한 것이다. 관련사료 숙종은 강빈의 원통함을 씻어주기 위해 빠뜨린 전례가 없는지 극진히 신경을 썼으며, 이후 5월 21일 민회빈의 신주를 소현세자의 묘사(廟祠)에 함께 봉안하였다. 관련사료 이때 숙종은 친히 제문을 지어 강빈의 억울한 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