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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책 안성 보체 동래정씨 정홍순 종가 고문서(120冊 安城 保體 東萊鄭氏 鄭弘淳 宗家 古文書)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24.04.29|조회수43 목록 댓글 0

安城 保體 東萊鄭氏 鄭弘淳 宗家 古文書의 현황과 자료의 특징

  • 유지영‧조광현(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

1. 머리말

안성 보체 동래정씨 정홍순 종가 고문서는 정홍순(鄭弘淳, 1720~1784)의 종가에서 대대로 소장하고 있는 자료이다. 정홍순 가문은 대대로 정승과 문과급제자를 배출한 집안으로 웃대 선조는 정난종‧정광필‧정태화‧정홍순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이 집안에 남아있는 문서는 정태화의 지손인 정혁선(鄭赫先, 1666~1733)으로부터 그 손자인 정홍순 그리고 그 후대로 이어지는 정홍순 종가의 고문서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는 2010년 12월에 安城市 保體里에 있는 정진규 종손의 집을 방문하여 자료 조사를 실시하였다. 註 1) 조사를 마친 후에는 소장자의 동의하에 자료를 장서각으로 가져와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목록을 작성하였다. 이 글에서는 먼저 정홍순 종가의 가계와 주요 인물을 파악한 후, 고문서의 전체현황을 제시하고 유형별로 개관하고자 한다.



2. 가계와 인물

동래정씨 정홍순 종가는 정회문(鄭繪文)을 시조로 하고 있다. 정회문은 신라 경애왕 때 병부상서를 지낸 정완(鄭玩)의 아들이다. 경애왕 말년인 927년 견훤의 난으로 피신하였다가 931년에 돌아와 동래호장(東來戶長)을 지내며 선정을 베풀어 안일호장(安逸戶長)의 칭호를 받았다고 전한다.

동래정씨는 정회문 이후 몇 대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초에 보윤호장(甫尹戶長)을 지낸 후손 정지원(鄭之遠)을 1세(世)로 한다. 고려시대에 지원의 아들 정문도(鄭文道)는 안일호장, 문도의 아들 정목(鄭穆)은 좌복사(左僕射)를 지냈다. 이후에도 정택(鄭澤)은 태자찬선대부(太子贊善大夫)를 지냈으며, 정자가(鄭子家)는 전옥서령(典獄署令), 정필(鄭弼)은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역임하였다. 10세손 정승원(鄭承源)은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정해(鄭諧)는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냈다.

정해의 아들 정구령(鄭龜齡)은 음관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1424년(세종 6) 결성현감(結城縣監)을 제수받고 선정을 베풀어 후세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또한 덕행이 있어 문종(文宗)때 형조참의로 추증되고, 종종(中宗)때 증손 정광필(鄭光弼)이 영의정에 오르자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 말년에는 용궁현(龍宮縣)에 터를 잡고 마을 어귀에 3그루의 회화나무를 심었으며 곁에 삼수정(三樹亭)을 짓고 그의 호(號)로 삼았다고 한다.

정구령과 상산박씨(商山朴氏) 사이에서 태어난 정사(鄭賜, 1400~1453)는 1420년(세종 2)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뒤,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후 사헌부 감찰과 정언을 역임하고 이조‧예조‧형조의 낭관과 예문관직제학·진주목사를 역임하였다.

동래정씨는 정난종 대에 이르러 더욱 가문이 번창하게 되었다. 익혜공(翼惠公) 정난종(鄭蘭宗, 1433~1489)은 1456년(세조 2)에 생원‧진사시와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검열·대교·통례문봉례랑(通禮門奉禮郎)·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467년(세조 13)에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이듬해 호조참판으로 전임되었다. 1483년(성종 14)에는 주문부사(奏聞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평안도병마절도사·우참찬·이조판서·공조판서·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정난종은 훈구파의 중진(重鎭)으로 성리학에 밝았고, 성임(成任)과 함께 세조·성종 대의 일류 서예가로서 특히 조맹부체(趙孟頫體)에 뛰어났다. 1465년(세조 11)에 『원각경(圓覺經)』을 인쇄하기 위하여 정난종에게 주자체(鑄字體)를 쓰도록 하였는데, 이 활자가 을유자(乙酉字)이다.

정난종과 완산이씨(完山李氏) 사이에서 태어난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 1462~1538)은 1492년(성종 23) 진사에 오르고, 그 해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그 뒤 성균관학유·의정부사록·봉상시직장을 역임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직제학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는데, 임금의 사냥이 너무 잦다고 간했다가 아산(牙山)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후 부제학에 오른 뒤 이조참판·예조판서·대제학을 거쳐 1510년(중종 5) 우참찬으로 전라도도순찰사(全羅道都巡察使)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하고 병조판서에 올랐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가 1527년(중종 22) 다시 영의정에 올랐으며, 1531년(중종 26) 70세에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저서로는 『정문익공유고(鄭文翼公遺稿)』가 있다.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회덕서원(懷德書院), 용궁의 완담향사(浣潭鄕祠)에 향사되었다.

정광필의 4남이었던 정복겸(鄭福謙, 1501~1552)은 음관으로 출사(出仕)하여 강화부사(江華府使) 등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1533년(중종 28)에 부친인 정광필이 김안로(金安老)의 모함을 받아 유배길에 오르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아들 정유길(鄭惟吉)의 현달(顯達)로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정유길(鄭惟吉, 1515~1588)은 정복겸의 장남으로 태어나 1531년(중종 2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8년 별시문과에 장원하여 중종(中宗)의 축하를 받고 곧바로 사간원정언에 올랐다. 그 뒤 공조좌랑·이조좌랑·중추부도사·세자시강원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중종 39)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함께 동호서당(東湖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기도 하였다. 그 뒤 이조정랑·의정부사인·사헌부집의·홍문관교리·홍문관직제학을 거쳐 1552년(명종 7) 홍문관부제학에서 가선대부로 승자(陞資)하여 도승지가 되었다. 이 때 이황과 더불어 성학(聖學)을 진흥시켜야 함을 진언하였다고 한다. 이어 이조참판·예조참판·대사간·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72년(선조 5)에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명나라 사신 접반사가 되어 능란한 시문과 탁월한 슬기를 발휘하여 명나라 사신과 지기지간(知己之間)이 되었다. 그 뒤 우찬성·판의금부사·판돈녕부사를 거쳐 1581년(선조 14) 우의정이 되었으나, 명종 때 권신인 윤원형(尹元衡)·이량(李樑) 등에게 아부한 사람을 상신(相臣)에 앉힐 수 없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1583년(선조 16)에 우의정에 오르고, 그 이듬해 궤장(几杖)이 하사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충효와 근신을 근본으로 삼고 넓은 도량을 가지고 있어 포섭력이 강했으며, 큰일에는 대의를 가지고 과감하게 이를 처결하였다고 한다. 시문에도 뛰어났으며, 서예에도 능해 임당체(林塘體)라는 평을 받았다. 작품에 「한기비(韓琦碑)」가 있고, 저서로 『임당유고(林塘遺稿)』가 있다. 註 2)

정창연(鄭昌衍, 1552~1636)은 정유길과 원주원씨(原州元氏) 사이에서 태어나 1579년(선조 12)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갔고, 이조좌랑을 거쳐 동부승지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14년(광해군 6)에 우의정이 되고 이어 좌의정이 되어 기사(耆社)에 들고 궤장(几杖)을 받았다. 이 때 강화부사 정항(鄭沆)이 영창대군을 죽이자, 정온(鄭蘊)이 상소를 통해 강화부사의 처벌을 요구했다.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정온이 화를 당하자 정창연은 이원익(李元翼)과 더불어 상소하여 정온을 구해주었다. 이어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사퇴하고 두문불출하며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반정이 된 이후로 다시 관직에 나아가 좌의정이 되었다.

정광성(鄭廣成, 1576~1654)은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03년(선조 3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대교 등을 거쳐, 1605년 이후 정자·수찬·교리·지평 등 초년에 주로 삼사(三司)의 현직(顯職)을 역임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대비삭호문제(大妃削號問題)와 아울러 재차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부친 창연의 정청불참문제(庭請不參問題)로 인하여 탄핵을 받았으나 계속 등용되어 형조참의·우승지·남양부사·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냈고, 병자호란 후 벼슬에 뜻을 버리고 향리로 물러났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형조판서에 오른 뒤 부호군을 거쳐 지돈녕부사가 되었다.

정광성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주요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 중 장남인 익헌공(翼憲公) 정태화(鄭太和, 1602~1673)는 1624년(인조 2)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 1628년(인조 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1637년(인조 15) 세자시강원의 보덕이 되어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 심양(瀋陽)에 가기까지 당하관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31년(인조 9) 시강(試講)에서 우등으로 뽑혀 숙마(熟馬) 1필을 수상하는 문재(文才)를 보였다.

또 사간으로 있던 1636년(인조 14)에 청나라 침입에 대비해 설치된 원수부의 종사관에 임명되어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휘하에서 군무(軍務)에 힘쓰다가 병자호란을 맞자 황해도 여러 산성에서 패잔병을 모아 항전하는 무용을 보이기도 하였다. 1649년(인조 27) 48세의 나이로 우의정에 오르기까지 육조의 참의·참판, 한성부우윤·사간원대사간, 평안도·경상도의 관찰사, 도승지 등을 두루 지내다가 1644년 말부터 육조의 판서와 사헌부대사헌을 되풀이 역임하였다.

정태화는 성품이 온화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여 적대세력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뒷날에 사신(史臣)이 “조정의 의논이 자주 번복되어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으나, 그의 영현(榮顯)은 바뀌지 않았으니, 세상에서는 벼슬살이를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 그를 으뜸으로 친다.”고 평할 정도였다. 註 3)

1673년(현종 14) 심한 중풍 증세로 사직이 허락되기까지 20여 년 동안 5차례나 영의정을 지내면서 효종과 현종을 보필하였다. 1673년(현종 14) 다섯 번째의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난 지 6개월이 되던 달에 나이 72세로 죽으니, 현종은 3년 동안 늠록(廩祿)과 제수를 내리도록 특명하였다. 그 뒤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시·문을 모아 엮은 『양파유고(陽坡遺稿)』 2권 2책과, 1656년(효종 7)까지의 일기인 『양파연기(陽坡年紀)』 2권 2책이 있으며, 시조 1수가 전한다. 정태화의 아우 정치화(鄭致和)는 좌의정에, 정만화(鄭萬和)는 병조참판·대사간 등을 지냈다.

정태화의 장남 정재대(鄭載岱, 1628~1709)는 1659년(효종 10) 음관으로 동빙고별검‧장악원직장‧전생서주부를 거쳐 고양군수를 역임하였다. 그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708년(숙종 34)에 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정홍순 종가 문서상에 등장하는 가장 선대인 정혁선(鄭赫先, 1666~1733)은 정재대와 전주이씨 사이에서 제4남으로 태어났다. 1699년(숙종 25) 식년시에서 진사 1등 3위로 합격하여 1701년(숙종 27) 영희전참봉‧종묘봉사‧상서원직장‧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고, 1706년(숙종 32)부터는 평택현감을 비롯해 함흥판관‧음성현감‧호조정랑‧금산군수를 지냈다. 이후 1722년(경종 2)에 청주목사를 거쳐 인천부사와 밀양부사까지 두루 역임하였다. 정혁선은 목민관으로써 奸吏들을 엄히 다스려 기강을 바로잡았으며, 군수를 잘 정비하고 진휼에도 적극적으로 대처해서 암행어사와 관찰사, 절도사가 그를 선정관(善政官)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위의 문서는 정혁선이 금산군수로 재직할 때에 암행어사와 절도사가 선정관으로 추천하여 포상한다는 내용의 유서이다. 정혁선은 금산군수로 1720(경종 즉위)년부터 1722년(경종 2)년까지 2년 동안 재임했는데, 그때 농사를 권면하고 부역을 균등히 했으며 간리들을 적발하여 처벌하고, 군기(軍器)도 잘 수보(修補)했다고 경상좌도 암행어사 조영세(趙榮世)와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이 각각 포상을 건의한 것이다. 포상으로 표리 1습과 숙마 1필을 하사받았다. 그밖에 정혁선이 밀양부사로 부임했을 때도 백성들을 진휼(賑恤)하는 데에 경상도 중 으뜸이라는 평가로 가자(加資)를 받았다. 註 4)

정혁선과 연안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정석삼(鄭錫三, 1690~1729)은 재주와 능력이 뛰어나 일찍이 등과(登科)하였으나 강직한 성품 탓에 관직생활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1711년(숙종 37)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회강(會講) 때 그의 이름이 누설되었다는 수찬 홍중휴(洪重休)의 상소에 의하여 3년간 관직에 임용되지 못하였다. 註 5) 그 후 다시 서용(敍用)되어 1718년(숙종 44)에는 병조정랑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사과를 거쳐 1722년(경종 2) 사간이 되었다. 이 때 정석삼은 사헌부 장령 이광도·이경열과 사헌부 정언 조익명·조진희 등의 행동거지가 사헌부의 체모를 손상시킨다는 이유로 체차(遞差)할 것을 청했다가 오히려 홍문관과 사간원의 탄핵으로 파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註 6)

그러나 1724년(영조 즉위년)에 다시 사간에 임명되었으며, 이 후 승지·사과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또다시 영조의 즉위과정에 있어서 그의 처신이 문제가 되어 삼사의 탄핵을 받아 삭탈관작(削奪官爵)·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 다시 정석삼은 경종의 질환(疾患)을 포고하라는 중신(重臣)들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하며 중지할 것은 간언했다가 삼사의 탄핵을 받은 것이다. 영조는 정석삼의 뜻을 높게 여겨 경종의 질환을 포고하라는 명을 거두었다. 註 7)

그 후 영조는 강직한 정석삼의 품성을 눈여겨보았다가 1727년(영조 3) 특별히 승지로 임명하였고, 註 8) 그 뒤 정석삼은 형조참판·도승지·호조참판·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탕평책의 한 방법으로 전선(銓選)의 바른 시행을 논하였으며, 註 9)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1729년에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亮)이 일으킨 무신란(戊申亂)을 평정한 후 열린 추국(推鞫)에 의금부 당상으로 참여하였고, 이 때문에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그러나 녹권이 반포되기도 전인 40세의 이른 나이로 죽자 영조가 매우 슬퍼하며 정석삼의 강직함을 그리워하였다.

영조는 조정 대신들과 탕평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고(故) 참판 정석삼이 비록 경솔한 병폐가 있었지만, 만일 오늘날 생존해 군신(君臣) 사이로 있다면 마땅히 꺼리지 않고 전부 말했을 것이다."라며 한참 동안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고 한다. 註 10) 정석삼은 1772년에 무신년 이후 영조를 도운 공으로 영의정으로 증직되었고 치제(致祭)의 전을 받았다. 정홍순이 찬(撰)하고 조윤형이 쓴 묘비명에는 정석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공은 천부적 자질이 총명하고 사리에 통달하였다. 義를 보면 용기있게 행하였고, 평이한 것을 좋아하고 善을 좋아하였으며 남과 사귐에 격이 없었다. 항상 말하기를, “사람은 살아감에 정직해야 하니, 마음 둔 바를 마땅히 남이 쉽게 알도록 해야 한다. 바르고 칠하여 (마음을) 가려 보호하는 것은 나는 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잘못이 있으면 부끄러워하지 않고 스스로 말하였고, 어떤 이가 위험함의 근본이 되는 거라며 경계하면 빙그레 웃었다. 註 11)

정석삼과 전주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 충헌공(忠憲公) 정홍순(鄭弘淳, 1720~1784)은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중부(仲父)인 정석오(鄭錫五)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그는 20세인 1740년(영조 16) 진사시에 합격하고 5년 후인 1745년(영조 2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설서·이조정랑·지평·교리·이조참판 등을 거쳐 경기도와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경기도 관찰사 재임 시에 경종과 영조비의 능이였던 명릉(明陵)과 홍릉(弘陵)의 인산(因山)을 담당하였는데 흉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을 잘 완수하자, 영조는 윤음(綸音)을 내려 경기 지역의 조세를 감면해주기도 하였다.

정홍순은 무엇보다 호조판서와 선혜청당상으로 10년 간 재직하면서 재정관리에 능력을 발휘하여 당대 제일의 재정관으로 명성을 날렸다. 『정조실록』 「정홍순졸기」에서 사관은 그에 대해 “재주와 지모로 벼슬이 올라 정경(正卿)에 이르렀다. 여러 번 탁지(度支)와 혜국(惠局)을 맡았는데, 근세에서 이재(理財)를 잘하는 자로는 반드시 먼저 꼽는다. 금상(今上) 무술년(1778년, 정조 2)에 비로소 정승에 천거되었는데, 성질이 준엄하고 강직하며 매우 민첩하여 일을 헤아리는 데에 밝았다(중략)”라고 평가하였다.

정홍순은 1777년(정조 1)에 우의정이 된 이후에도 미세한 일에까지 검소와 절약으로 일관하였다. 이어 정조는 “이 대신은 벼슬한 40년 동안 재부(財賦)를 여러 번 맡았는데 번번이 아래를 이롭게 하는 정사를 하였고, 정승 자리에 있게 되어서는 일에 따라 말을 다하고 유속(流俗)을 따르지 않았으니, 규모가 간결하고 정리된 것이 조정에서 찾아도 많이 만나기 쉽지 않다.”고 평하였다. 註 12)

정홍순의 이러한 성품은 일화로도 많이 전해져 오고 있다. 조선시대 역대 인물들의 일화들을 뽑아 엮은 책인 『대동기문(大東奇聞)』 에는 정홍순과 관련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딸을 출가(出嫁)시킬 때 드는 혼수 비용을 절약했다가 나중에 집과 전답을 마련해 준 일화, 나랏돈 중에 깨진 엽전 하나를 붙이기 위해 자신의 엽전 2냥을 들였다는 일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장례를 절도 있게 주관했던 일화, 갓모를 빌려주었으나 약속을 어기고 가져다주지 않았던 한 선비가 20년 후에 호조좌랑(戶曹佐郎)이 되어 판서 홍순에게 인사를 왔다가 심임을 잃었던 과거 일로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일화 등 일의 규모와 책임을 중히 여긴 사례들이 소개되어 있다.

정홍순은 누구보다 효성이 남달랐다고 한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정홍순은 아버지 산소 옆에 기유재(己有齋)라는 묘재(墓齋) 짓고 추모하였다. 기유(己有)는 아버지인 정석삼이 기유년(己酉年)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비슷한 음을 따서 명명(命名)한 것으로 이때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라고 한다. 아버지의 묘비명도 자신이 직접 지었으며,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정경순(鄭景淳), 정지순(鄭持淳) 재종형제(再從兄弟)에게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 이때 지은 기문은 현재까지 소장자를 통해 잘 전해져 오고 있다.

정홍순은 어머니에 대해서도 효성이 남달랐다. 어머니 전주이씨는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증손녀(曾孫女)이자 인조(仁祖)의 현손(玄孫)이었기 때문에 특수한 상황에 놓여 친정과의 왕래를 끊고 있었다. 註 13) 이에 정홍순은 자주 어머니에게 외가(外家)의 안부를 알려드렸고, 실제 외가의 경제생활에도 도움을 주어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주고자 노력했다. 또한 조석(朝夕)으로 어머니의 안후(安候)를 살피는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일은 말할 것도 없고 병환을 손수 돌보기 위해 의술을 익히고 병간하였다. 이에 당시 사람들은 정홍순의 효성을 가리켜 ‘낙기이목(樂其耳目)의 윤리를 다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낙기이목은 『소학(小學)』에 나오는 말로 증자(曾子)가 강조했던 효의 덕목이다. 註 14)

효성이 지극했던 정홍순은 1784년(정조 8) 65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관민(官民) 모두가 현상(賢相)을 잃었다며 슬퍼했고, 정조는 정조철시(停朝撤市)하고 구재(柩材)를 하사했으며, 3년간 녹봉(祿俸)을 지급하라고 하교하였다. 정홍순의 시호는 1799년(정조 23) 3월에 정민(靖敏)으로 내려졌다가 동년 12월에 충헌(忠憲)으로 개시(改諡)되었다.

정홍순의 장남 정동교(鄭東敎, 1754~1809)는 1780년(정조4) 식년 진사시에 3등 14인으로 입격하였고, 1782년(정조 6)에 음관으로 의금부도사를 지냈으며, 동몽교관‧장악원주부‧공조좌랑‧군자감주부‧호조정랑‧제용감주부‧수원부판관·상주목사를 역임하였다. 호조정랑으로 재임할 때에는 상평통보가 잘 유통되지 않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십전통보(十錢通寶)를 주조할 것을 아뢰어 유통하게 하였다. 註 15) 정동교는 적처(嫡妻)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지 못하여 정동협(鄭東協)의 아들인 정한용을 입후(立後)하였다.

정동교의 가계를 이은 정한용(鄭漢容, 1768~1814)은 1795년(정조 19) 식년 생원시에서 1등 제5인으로 입격하였다. 이후 관력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사료와 고문서가 없어 확인할 수 없지만, 족보에 참봉으로 기재되어 있어 음관으로 진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한용은 네 아들을 두었으나 장남인 정기호(鄭基鎬)는 정노용(鄭魯容)의 후사를 이었고, 셋째와 넷째인 정기수(鄭基洙)와 정기례(鄭基澧)도 각각 정리용(鄭履容)과 정완용(鄭琬容) 집안으로 입양되었다.

정한용의 후사는 둘째였던 정기락(鄭基洛, 1804~?)이 이었다. 그는 1844년(헌종 10) 음관으로 선공감감역관을 지내고 곧이어 사포서별제‧사헌부감찰‧사직서령을 거쳐 1848년(헌종 14) 고령현감을 역임하였다. 이후에도 한산군수‧울진도호부사‧성산목사를 지냈다. 정기락은 반남박씨와의 사이에서 후사가 없자 아우였던 정기례의 아들 정선조를 입양하여 대를 이었다.

정선조(鄭善朝, 1839~?)는 관력에 대한 사료가 남아 있지 않아 관직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가 1872년(고종 9)에 작성했던 시권이 남아 있어 과거시험에는 도전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들 정인헌(鄭寅憲, 1865~1919)도 과거시험에 도전하여 1891년(고종 28)에 증광시에서 진사 3등 11위로 입격하였다. 정인헌은 정홍순 이후 정석삼의 묘소가 있는 현재의 보체리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고, 그의 아들인 정완모(鄭完謨, 1914~2002)는 보체리의 모든 토지와 재산을 마을 주민들에게 기증하였다고 한다. 현재 선산과 종가를 지키고 있는 소장자는 유명한 시인으로써 활동하고 있으며, 강직하고 공명정대했으며 검소했던 정홍순 종가의 가훈과 선조의 얼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3. 고문서의 현황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는 정홍순 종가 고문서를 󰡔한국고문서정리법(韓國古文書整理法)󰡕에 의거하여 분류하고 정리하였다. 註 16) 정홍순 종가 고문서는 교령류(敎令類)부터 서화류(書畫類)까지 다양한 문서군(文書群)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고신(告身)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분류·정리한 정홍순 종가 고문서는 23종 367점이며 전체 현황은 다음과 같다.

[표 1] 안성 동래정씨 정홍순 종가 고문서의 전체 현황

유형분류문서명점수관련 인물내용
敎令類敎書4鄭弘淳사명 훈유
令書2鄭弘淳사명 훈유
諭書9鄭赫先, 鄭弘淳포상, 밀부 전달
紅牌2鄭錫三, 鄭弘淳문과 합격
告身287鄭赫先, 鄭錫三, 鄭錫三 妻 全州李氏, 鄭弘淳, 鄭弘淳 妻 礪山宋氏, 鄭東敎, 鄭基洛관직 임명
令旨2鄭赫先관직 임명
追贈敎旨6鄭赫先, 鄭赫先 妻 延安李氏, 鄭錫三관직 추증
差帖5鄭弘淳, 鄭東敎, 鄭基洛관직 임명
祿牌4鄭弘淳녹봉 지급
批答1鄭弘淳비답
綸音1결전 탕감
疏箚啓狀類箚子1鄭弘淳사직 요청
所志1鄭弘淳녹봉 지급 요청
牒關通報類解由文書1鄭東敎관직 인계인수
證憑類完文1노비 소유 증명
試券22鄭赫先, 鄭錫三, 鄭弘淳, 鄭東敎, 鄭漢容, 鄭基洛, 鄭善朝, 鄭寅憲과거시험 답안지
明文文記類分財記1鄭赫先재산 상속
詩文類致祭文1鄭錫三致祭文
1
1
書畵類御製御筆1鄭弘淳御筆
3글씨
拓本10碑文·懸板 등의 탁본
합계357



4. 유형별 고문서 개관

1) 교령류(敎令類)

교령류는 총 11종 323점으로 교서(敎書) 4점, 영서(令書) 2점, 유서(諭書) 9점, 홍패(紅牌) 2점, 고신(告身) 287점, 영지(令旨) 2점, 추증교지(追贈敎旨) 6점, 차첩(差帖) 5점, 녹패(祿牌) 4점, 비답(批答) 1점, 윤음(綸音) 1점이 전하고 있다.

교서(敎書)는 정홍순이 1761년(영조 37)과 1762년(영조 38)에 각각 함경도 관찰사와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 될 때 받은 문서와 1722년(영조 48)과 1776년(정조즉위)에 남한산성수어사(南漢山城守禦使)에 임명될 때 받은 문서이다. 정홍순이 받은 4점의 교서는 국왕이 한 지방의 행정과 군사를 담당하는 관원에게 임명된 사실을 알리는 사명(使命)의 내용과 부임지를 잘 다스리라는 훈유(訓諭)의 내용으로 내려주는 사명훈유교서이다. 국왕이 내린 사명훈유교서를 통해 정홍순은 부임지에 소속된 부(府)·군(郡)·현(縣)의 수령과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를 통제하였다.

영서(令書)는 왕세자 또는 왕세손이 대리청정 할 때 발급하는 명령서로 국왕이 발급하는 교서에 해당하는 문서이다. 정홍순은 1756년(영조 32)에 왕세자였던 장헌세자(莊獻世子)로부터 경기도관찰사로 부임하여 부임지를 잘 다스리라는 영서를 받았다. 이후에도 1776년(영조 52) 2월에 남한산성수어사로 임명된 정홍순에게 왕세손 정조는 성지(城池)와 기계(器械)를 수보(修補)하는 등의 직책을 잘 수행하라는 뜻의 영서를 발급하였다.

유서(諭書)는 정혁선과 정홍순이 받은 포상유서(褒賞諭書)와 밀부유서(密符諭書)가 남아 있다. 포상유서는 국왕이 상급 관원의 보고를 통하여 공적이 있는 관원에게 표리(表裏)·숙마(熟馬)·아마(兒馬) 등을 내리면서 발급한 유서이다. 1722년(경종 2)에 금산군수로 재직하고 있던 정혁선은 경상좌도 암행어사 조영세(趙榮世)의 서계(書啓)로 인해 농사를 권면하고 요역을 면제한 공이 인정되어 표리 1습(襲)과 함께 유서를 받았다. 그밖에 1726년(영조 2)과 1732년(영조 8)에도 해당 절도사의 장계(狀啓)와 계본(啓本)으로 공이 인정되어 숙마 1필(匹)과 함께 포상유서를 받았다. 정홍순도 1757년(영조 33)에 경기도관찰사로 재직 할 때 영조로부터 관리와 백성의 근(勤)·만(慢)을 잘 다스렸다는 공을 인정받아 반숙마(半熟馬) 1필과 함께 포상유서를 받았다. 밀부유서는 국왕이 각 지방으로 부임하는 관찰사·절도사·방어사·유수 등에게 밀부의 우측을 내리면서 함께 발급한 유서이다. 남아 있는 밀부유서는 모두 정홍순에게 발급된 것으로 그가 경기도관찰사와 함경도관찰사, 남한산성수어사로 부임할 때 밀부와 함께 받은 것이다.

홍패(紅牌)는 1711년(숙종 37)에 정석삼이 식년시 문과에서 을과(乙科) 제3인으로 급제(及第)하고 받은 것과 정홍순이 1745년(영조21)에 정시(庭試)에서 병과(丙科) 제2인으로 받은 것이 전해진다. 정석삼과 정홍순의 경우 홍패와 함께 당시 과거시험에서 작성했던 시권도 함께 남아 있다.

고신(告身)은 정혁선 고신 23점(1701~1732), 정석삼 고신 50점(1713~1755), 정홍순 고신 185점(1745~1772), 정동교 고신 20점(1769~1794), 정기락 고신 9점(1846~1862)이 있다. 이 문서들은 연대기 자료들과 더불어 각 인물의 관직 이력을 확인하는데 유용한 자료가 된다. 특히 고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정홍순의 경우에는 초사(初仕)부터 치사(致仕)까지 남아 있는 고신으로 그 관력을 확인 할 수 있다.

고신에는 연호 옆에 가자, 별가, 대가 등의 사유를 기록하는데 이를 통해 고신이 내려진 이유를 살펴볼 수 있다. 정혁선의 고신 중 1732년(영조 8)에 통정대부 행밀양도호부사로 임명되면서 받은 고신에는 “善治善賑之公加資事 承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혁선은 밀양부사로 재임할 때인 1732년(영조 8)에 경상좌병사 이복휴(李復休)가 국왕에게 계본을 올려 군기(軍器)를 잘 수보(修補)하고 성첩(城堞)을 보강하는데 요역을 감축했다는 뜻으로 포상을 건의하여 동년 4월에 유서와 함께 숙마 1필을 하사받았다. 그 때문인지 동년 10월에는 백성을 잘 다스리고 진휼을 잘한 공로로 통정대부로 1계급 승자(陞資)하였다.

정동교는 아버지 정홍순의 자급을 모두 받아 통덕랑까지 올랐다. 1769년(영조 45) 이조에서 정동교에게 발급한 고신에는 통덕랑의 자급으로 올려주면서 연호 옆에 그 이유를 “父資憲大夫戶曹判書鄭弘淳 庚五辛三辛四壬四壬閏五癸五癸九丙四丙六丁三丁五丁十二戊七己七別代加”라고 기록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관원에게 내려준 별가를 자신이 받지 못하면 자(子)·서(壻)·제(弟)·질(姪) 등 친족에게 대신 주는 제도가 있었다. 자궁(資窮)이라 하여 정 3품 당하관까지 오른 자에 한해서는 더 이상 별가를 자신의 품계에 더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친족들에게 대신 주게 한 것이다. 자헌대부 호조판서였던 정홍순도 자궁이었으므로 그동안 별가로 받은 자급을 아들 정동교에게 모두 대가하였다. 경(庚)으로 시작하는 간지의 5월에 받은 자급과 신(辛)으로 시작하는 간지의 3월에 받은 자급 등을 포함하여 총 14번 받은 별가를 아들인 정동교에게 전해준 것이다.

따라서 정동교는 과거시험도 보지 않은 상황에서 정오품 통덕랑의 품계를 가진 셈이 되었다. 정동교가 진사시에 합격한 시기가 1780년(정조 4)이었으므로 11년 전에 이미 품계는 정5품까지 이르렀다. 정동교는 진사로 합격한지 2년이 지난 1782년(정조 6)에 이 품계를 바탕으로 문과를 따로 보지 않고, 음직으로 의금부도사로 출사(出仕)하였다.

영지(令旨)는 왕세자가 발급하는 임명장으로 국왕이 발급하는 4품이상 고신(敎旨)에 해당한다. 이 가문의 영지 2건은 1720년(숙종 46)에 왕세자였던 경종이 정혁선을 재령군수와 호조정랑으로 임명하면서 각각 발급되었다. 원래 정혁선은 도목정사(都目政事)에서 재령군수로 낙점(落點)되었다. 그러나 호조에서 정혁선이 업무를 잘했으므로 개차(改差)해서 호조정랑으로 계속 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국왕에게 아뢰었다. 국왕의 허락이 있자 이조에서는 일단 재령군수의 영지를 발급하고 다시 국왕의 승전(承傳)을 이유로 호조정랑 영지도 발급하였다. 註 17) 현재 남아 있는 영지 2점의 발급일자가 똑같은 이유는 이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차첩(差帖)은 정홍순, 정동교, 정기락이 각각 관직에 임명되면서 받은 구전차첩(口傳差帖)이다. 구전차첩은 7품이하 9품이상 관원에게 임명하는 차첩 중 사안이 시급하거나 또는 중요치 않은 경우 번거로운 절차를 생략하고 구전정사(口傳政事)를 통하여 발급한 임명장을 의미한다. 1746년(영조 22)에 정홍순이 권지승문원부정자로 임명되면서 받은 차첩과 1782년(정조 6)에 정동교가 의금부도사와 동몽교관으로 임명되면서 받은 차첩, 1844년(헌종 10)에 정기락이 선공감가감역관과 선공감감역관으로 임명되면서 받은 차첩이 남아 있다.

녹패(祿牌)는 정홍순이 1767년(영조 43)과 1768년(영조 44), 1769년(영조 45)에 각각 자헌대부(資憲大夫) 행충무위사직(行忠武衛司直) 및 행충무위부사직(行忠武衛副司直)에 해당하는 녹봉을 지급 받도록 병조에서 발급한 것으로 고신 위에 점련되어 있다.

비답(批答)은 1778년(정조 2) 우의정 정홍순의 거듭된 사직 요청에 대한 정조의 비답이다. 정홍순은 1778년(종조 2) 6월 15일에 도목정사에서 자신이 우의정에 낙점된 것과 관련해 그 직무를 다 할 수 없다고 상소를 통해 사직을 요청했으나 정조는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홍순은 재차 6월 19일에 사직을 요청하였고 정조는 “즉시 일어나 조정에 나와서 이때의 간난(艱難)을 홍제(弘濟)하라” 라는 비답을 내렸다. 註 18) 현재 정홍순 종가에는 이때 정조가 내렸던 비답 일부가 남아있다.

윤음(綸音)은 1757년(영조 33)에 영조가 기민(畿民)의 결전(結田)을 탕감(蕩減)해주라는 내용으로 내린 문서이다. 영조는 가뭄을 근심했으나 큰 비가 내리자 기뻐하며 금년에 두 번씩이나 산릉(山陵)의 부역에 시달린 기민(畿民)들에게 세금인 결전을 감해주고자 하였다. 따라서 윤음을 작성하게 하여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정홍순에게 보냈다.

 

2) 소·차·계·장류(疏·箚·啓·狀類)

소·차·계·장류는 차자(箚子) 1점, 소지(所志) 1점이 전하고 있다. 차자는 관리가 국왕에게 올리는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으로, 정홍순이 1783년(정조 7)에 추동등(秋冬等) 포폄에서 평가 관원의 폄제(貶題)를 수정하라는 국왕의 명을 받고 죄를 청하는 내용이다. 포폄은 관원을 대상으로 해마다 6월 15일과 12월 15일에 근무를 평가하는 제도이다. 경관(京官)의 경우 제조(提調)와 육조(六曹) 당상관(堂上官)이 소속 관원들을 평가했다. 폄제는 성적을 낮게 평가하면서 그 이유를 네 글자로 적었던 것을 의미한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였던 정홍순은 경관의 포폄에 참여해 관원을 평가하고 정조에게 보고했으나 폄제를 수정하라는 지시에 사직(辭職)을 청한 것이다. 정조는 ‘잘못된 것을 끌어서 쓰지 않았을 것이니 안심하며 사직하지 말고 더욱 업무에 힘쓰라.’라는 비답을 내렸다. 註 19)

소지는 1769년(영조 45) 3월에 정홍순의 사노(私奴) 순봉(順奉)이 호조(戶曹)에 올린 급록소지(給祿所志)로, 고신 위에 녹패와 함께 붙여져 있다. 순봉은 정홍순의 충무위부사직에 해당하는 하등(夏等) 녹봉(祿俸)을 전례에 따라 받게 해 달라고 호조에 요청하였고, 호조에서는 해유 유무와 월봉 유무를 살핀 후 ‘규례를 상고해서 제급하라.’라고 처분을 내려 주었다. 이에 순봉은 다시 급록소지를 병조에 제출해서 녹패를 발급받았다.

 

3) 첩·관·통보류(牒·關·通報類)

첩·관·통보류는 해유문서(解由文書)가 남아 있다. 해유는 관원의 교체시에 전임자와 후임자 사이에 인계·인수하는 절차를 이르는 말로 그 과정에서 작성된 문서가 해유문서이다. 정홍순종가에 남아 있는 해유문서는 상주목사였던 정동교가 후임자 이영소(李英紹)와 해유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것으로 해유첩정(解由牒呈)과 해유관(解由關)이 점련된 형태이다. 1808년(순조 8)에 상주목사로 부임한 이영소는 전임 상주목사 정동교로부터 인수받은 관아의 재산에 이상이 없다는 해유첩정을 경상도관찰사인 정동관(鄭東觀)에게 보냈다. 정동관은 첩정을 살피고 첩정을 해유관에 점련하여 호조로 이관(移關)하였다. 1년 뒤인 1809년(순조 9)에 호조에서는 경상도관찰사가 보내온 해유관에 의거하여 해유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뜻을 이조에 보냈고, 이조에서는 정동교에게 해유를 마쳤다는 조흘(照訖)을 기록하여 정동교에게 해유문서 일체를 발급하였다.

 

4) 증빙류(證憑類)

증빙류는 완문(完文) 1점, 시권(試券) 22점이 남아 있다. 완문(完文)은 1771년(영조 47)에 안성군(安城郡)에서 역관(譯官) 김진하(金振夏)에게 관노였던 명덕(鳴德)과 그 후소생을 탈하(頉下)시켜 준다는 증빙문서이다. 1763년(영조 39)에 주청사(奏請使) 계청역관(啓請譯官)으로 참여한 김진하(金振夏)에게 영조는 노비 1구(口)를 사급(賜給)하는 은전(恩典)을 베풀었다. 그러자 김진하의 호노(戶奴) 막돌이(莫乭伊)는 소지를 올려 사급 받을 노비를 누락되었던 비부(婢夫) 명덕으로 받고자 하였다. 당시 명덕은 안성군의 속안(續案)에 기재되어 있었고, 호조의 관(關)과 경기도관찰사의 감결(甘結)에 의거해 안성군수는 명덕을 속안에서 제외시킨다는 완문을 발급하였다.

시권은 1707년(숙종 33)부터 1891년(고종 28)까지 정혁선·정석삼·정홍순·정동교·정한용·정기락·정선조·정인헌이 각종 과거 시험에서 작성한 것이다. 이 가운데 정석삼과 정홍순이 문과에 급제한 시권, 정동교가 진사시에 입격한 시권, 정한용이 생원시에 입격한 시권도 남아 있다. 이처럼 남아 있는 시권은 정홍순 종가 사람들의 과거 응시 현황, 합격 현황, 시험 답안 내용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5) 명문·문기류(明文·文記類)

명문·문기류는 분재기 1점이 남아 있으며, 원래 한 문서였으나 결락되어 떨어진 상태이다. 분재기는 1727년(영조 3)에 정혁선이 장자(長子) 정석삼에게 재산을 별급(別給)하면서 작성한 것이다. 분재기에는 정혁선이 형제들과 함께 어려서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여 일찍 과거에 급제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정석삼은 분재기를 작성하기 16년 전인 1711년(숙종 37)에 21세의 젊은 나이로 문과 을과 제 3인으로 급제한 바 있었다.

 

6) 시문류(詩文類)

시문류는 치제문(致祭文) 1점, 시(詩) 1점, 부(賦) 1점이 남아 있다. 치제문은 1755년(영조 31) 12월 22일에 영조가 예조정랑(禮曹正郎) 최민(崔민{日+敏})을 보내 증좌찬성(曾左贊成) 정석삼의 영전(靈殿)에 올린 것이다. 시는 칠언절구(七言絶句) 2수(首)로 주희(朱熹)의 ‘수구행주(水口行舟)’와 소옹(邵雍)의 ‘감사음(感事吟)’을 쓴 것이다. 부는 『주역(周易)』의 “龍德正中”을 주제로 하여 지은 것이며, 절첩(折帖)형태로 되어 있다.

 

7) 서화류(書畫類)

서화류는 어제어필(御製御筆) 1점, 서(書) 3점, 탁본(拓本) 10점이 전해진다. 어제어필은 1770년(영조 46)에 영조가 “暮年逢春 深祝有年” 8글자를 우참찬 정홍순에게 내사(內賜)한 어필이다. 도승지 윤득우(尹得雨)가 전했으며, 어필에는 내사기(內賜記)와 함께 선사지인(宣賜之印)이 찍혀 있다.

서는 병풍에 썼던 글씨로 추정되는 1점과 오언절구(五言絶句)의 시를 쓴 글씨 2점이다. 8폭 병풍에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글씨는 『詩經』 『楚茨」의 내용을 쓴 것이다. 오언절구는 각각 송나라의 육유(陸游)가 쓴 「梅花」와 명나라 송렴(宋濂)의 「題倪元鎭耕雲圖」를 초서체로 썼다.

현전하는 탁본은 비문(碑文)과 현판(懸板) 등을 탁본한 것이다. 비문탁본은 1787년(정조 11)에 정조가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하기 위해 대로사(大老祠)를 짓고, 대로사비(大老祠碑)을 세웠는데 이 비를 탁본한 것이다. 또 정성왕후(貞聖王后)의 산릉(山陵)을 조성할 당시 능의 방위와 위치, 재궁(梓宮)의 크기, 박석(博石)의 크기 등을 새긴 상석(上石)을 탁본한 것도 남아 있다.

현판탁본은 주로 영조와 정조의 어제시(御製詩)가 기록된 현판을 탁본한 것이다. 1787년(정조 11)에 정조가 소령원(昭寧園)을 배알(拜謁)하고 기임각(祈稔閣)에 영조의 어제시인 「祈稔閣御製詩韻」을 봉안(奉安)하였다. 영조는 1753년에 어머니 숙빈최씨의 능인 소령원에 세워진 기임각에서 추수하는 광경을 친히 살피는 관예(觀刈) 의식을 하고 그 감회(感懷)를 시로 지었는데 정조가 그 시를 현판으로 새겨 기임각에 봉안한 것이다. 정조는 영조 시에 대한 화답시를 지어 함께 달았고 당시 동행한 신하들이 지은 시도 현판으로 제작하였다. 정홍순 종가에는 그 현판들을 탁본한 것이 모두 남아 있다. 그밖에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과 그의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충렬을 기리는 충렬정려문(忠烈旌閭門) 현판과 임청문(臨淸門) 현판을 탁본한 것도 남아 있다.



5. 맺음말

이상으로 안성 보체 동래정씨 정홍순 종가의 가계와 인물을 살펴보고, 정홍순 종가에 전해져 내려온 고문서를 유형별로 개관하였다. 현전하는 고문서에는 가장 선대 인물인 정혁선으로부터 정석삼‧정홍순‧정동교‧정한용으로 이어지는 가계의 인물별 생애와 삶의 자취가 남아있으며, 문서를 관리·보존해 온 후손의 손때가 묻어 있다.

정홍순 종가 고문서는 학문적으로도 의의가 있다. 정홍순이 받았던 교서와 영서, 영지와 고신은 조선시대 국왕과 왕세자 간의 통치행위를 비교할 수 있게 해주고, 고신에 기록된 연호방서를 통해 가자의 사유를 살필 수 있다. 특히 대대로 정승을 지낸 명문 가문에서 벼슬길에 나아가는 주요 방법이 선조의 가자를 대신 받는 대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정홍순의 고신에 붙어 있는 녹패와 급록소지는 당시 녹봉제도와 녹패 연구에도 도움을 준다.

이러한 가치를 지닌 정홍순 종가 고문서가 『고문서집성』 출간을 계기로 여러 방면의 연구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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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政院日記』

정진항, 『동래일사』, 대왕문화사, 1982.

東萊鄭氏大宗中, 『東萊鄭氏世譜 己未譜 復元本』, 起昌族譜社,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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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환, 「朝鮮時代 敎書 硏究」,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송철호, 「조선 시대 차첩(差帖)에 관한 연구-17세기 이후의 구전(口傳)에 관한 차첩(差帖)을 중심으로」, 『고문서연구』 35, 고문서학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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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동래정씨 대종중회(http://www.dongraejung.co.kr/)




[註 1]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의 ‘한국고문서 조사‧연구 및 보존처리 사업’에서 안성 동래정씨 정홍순 종가 고문서를 조사‧정리‧촬영하였다.

[註 2] : 정유길(鄭惟吉, 1515~158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참조.

[註 3] : 『현종실록』 4권, 1661년(현종 2) 윤7월 22일(기해).

[註 4] : 『영조실록』 32권, 1732년(영조 8) 10월 12일(병인).

[註 5] : 『숙종실록』 50권, 1711년(숙종 37) 5월 16일(갑진).

[註 6] : 『경종실록』 9권, 1722년(경종 2) 9월 19일(신축) ; 『경종실록』 9권, 1722년(경종 2) 9월 20일(임인).

[註 7] : 『영조실록』 5권, 1725년(영조 1) 4월 08일(을해).

[註 8] : 『영조실록』 12권, 1727년(영조 3) 7월 01일(을묘).

[註 9] : 『영조실록』 15권, 1728년(영조 4) 1월 17일(무진).

[註 10] : 『영조실록』 23권, 1729년(영조 5) 8월 18일(경신).

[註 11] : 鄭錫三 墓碑銘 : (중략) 公天資明達, 見義勇爲樂易好善, 與人無畦畛, 常言人之生也. 直處心當, 令人易知, 掩護塗澤, 非吾所能, 有過不恥, 自言人有以樞機爲戒者輒笑云. (후략)

[註 12] : 『정조실록』 17권, 1784년(정조 8) 1월 25일(신해).

[註 13] : 당시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조선으로 돌아와 급사했고, 세자빈인 강빈도 역모에 몰려 사사되었다.

[註 14] : 정진항, 『동래일사』, 대왕문화사, 1982, 178~180쪽.

[註 15] : 『정조실록』 38권, 1793년(정조 17) 12월 1일(경신).

[註 16] : 尹炳泰, 󰡔韓國古文書整理法󰡕,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4.

[註 17] : 『承政院日記』 1719년(숙종 45) 12월 28일 ; 『承政院日記』 1720년(숙종 46) 1월 02일 ; 『承政院日記』 1720년(숙종 46) 1월 04일.

[註 18] : 『承政院日記』 1778년(정조 2) 6월 15일 ; 『承政院日記』 1778년(정조 2) 6월 19일.

[註 19] : 『承政院日記』 1783년(정조 7) 1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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