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典續錄』•『大典後續錄』•『經國大典註解』解題
南 智 大1)
一三九七년 「경제육전」을 편찬한 이래 九〇년, 세조가 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한 지 三
〇년에 걸친 작업 끝에 一四八五년(성종 一六) 『경국대전』이 祖宗成憲으로 확정되어 頒行
되었으나, 조선왕조의 법전 편찬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법전 편찬이 계속된 가장 큰 이유
는 고정된 조종성헌만으로는 변화·발전하는 사회를 제대로 규율·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편찬되는 『대전속록』이나 『대전후속록』이 모두 영구 준행할 恒法만을 수록한다는
『경국대전』의 편찬 취지를 따랐으나 조문의 내용은 사회변화를 반영하여 더욱 세쇄해지기
마련이었으며, 그만큼 恒法으로서의 의미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一五세기 말에서 一六세기 전반의 조선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는 법전인 『대전속록』
『대전후속록』과 『경국대전주해』를 모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一. 『大典續錄』
현전하는 『大典續錄』은 一四九一년(성종 二二) 一〇월에 편찬작업을 시작하여 一四九二
년 七월말에 六권으로 초안을 완성하여 다시 대신과 성종의 심의를 거쳐 一〇월에 인출하였
으며, 전부터 준행하던 규정 외에 새로 만든 조문은 一四九三년 五월부터 준용한 六권 一책
의 법전이다.
원래 『대전속록』은 경제육전 謄錄의 후신이라 할 수 있다. 一四二六년(세종 八) 一二월
에 六典修撰色에서 경제육전을 편찬하면서 속육전 六책과 함께 永世的인 규정이 못되는 것
을 따로 모아 「謄錄」 一권을 만들어 올린 바 있었다. 또 세조 때에는 경국대전 편찬과정
에서 戶典을 가장 먼저 반행한 뒤 戶典謄錄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一四七四년(성종
五)에는 甲午大典과 함께 대전에 수록할 수 없는 七二조를 따로 모아 대전속록을 만들었다.
그런데 一四八五년 현전하는 乙巳大典을 반행할 때에는 따로 대전속록을 만들지 않았다. 아
마도 勘校廳에서 영구적인 대전의 편찬에 만족하고 일시적으로 시행할 조문을 모아 속록을
편찬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런데 최종 확정된 一四八五년의 『경국대전』에도 누락되거나 착오가 있는 조문이 있었
으며, 따로 속록을 편찬하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수교가 쌓여 법의 시행에 차질을 빚게
되자 속록의 편찬이 요청되었다. 이에 一四九一년 一〇월에 이르러 『경국대전』 시행이후
의 수교를 모아 간행하도록 하였으나, 모든 수교를 다 수록한다면 신법이 많아져 폐단이 따
를 것이니 영구히 시행할 만한 수교만을 가려 인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유보되었
다. 곧, 편찬방침에 수교 가운데 영세의 법이 될 만한 것을 반행하는 것으로 정해지고, 재상
과 각조 당상관 一人으로 受敎勘校廳을 두자는 건의에 따라 右贊成 어세겸, 廣川君 李克增
의 책임 아래 각조의 당상관 一員(이조 이집, 호조 권건, 예조 안호, 병조 김수손, 형조 김
1) 서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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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공조 김무)에게 감교를 맡기고 조문의 내용을 增減하는 경우는 왕의 재가를 받도록 하
였다. 감교청의 기본 임무는 대전이후의 수교 가운데 영구 시행할 것을 가려내 조문을 다듬
는 것이었으나, 더러 대전의 조문을 개정한 경우도 있었다.
『대전속록』의 항목은 『경국대전』에 준하여 설정하였다. 吏典은 官職 除授 署經 久任
褒貶 考課 祭享 差定 遞兒 雜令의 一〇항, 戶典은 諸田 田宅 倉庫 上供 支供 兵船載粮 收稅
漕轉 稅貢 徵債 徭賦 祿俸 唐物貿易 補軍資 雜令의 一五항, 禮典은 儀章 朝儀 待使客 祭禮
婚禮 取才 奬勸 惠恤 寺社 雜令의 一〇항, 兵典은 內命婦儀 官職 除授 試取 加階 遞兒 薦狀
符信 敎閱 給保 復戶 兵船 騎載馬 補充隊 奬勸 禁獵 驛路 捕虎 雜類의 一九항, 刑典은 決獄
日限 囚禁 推斷 逃亡 捕盜 贓盜 元惡 禁制 訴寃 賤妾子女 公賤 私賤의 一二항, 工典은 院宇
舟車 栽植 工匠 雜令의 五항으로 되어 있다.
『경국대전』과 비교하여 다르거나 새로운 항목을 찾아보면, 이전의 官職(←京官職 등) 署
經(←告身) 久任 祭享, 호전의 倉庫(←軍資倉 常平倉) 上供 祿俸(←祿科) 唐物貿易 補軍資,
예전의 婚禮(←婚嫁), 병전의 內命婦儀 官職(←京官職 등) 除授 加階 遞兒 薦狀 騎載馬 補充
隊 奬勸 禁獵 驛路 捕虎, 형전의 元惡(←元惡鄕吏) 賤妾子女(←賤妻妾子女) 등이다. 관직이
나 창고 등 『경국대전』의 비슷한 항목을 해당 조문이 적어 합친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의 항목이 행정실무와 연관되어 보다더 세분된 것 같다. 서명을 大典續錄이라 한 것은 대전
을 반행한 뒤의 敎令 가운데 恒法이 될 만한 것을 가려 편찬한다는 원칙 면에서 보면 『경
국대전』을 잇는 續大典이라 해야 할 것이나, 실린 조문의 내용에 細瑣한 것이 많아 이전의
「續錄」들과 성격이 비슷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문에는 一四八五년 이전
의 것들이 더러 있는데, 예컨대 吏典의 除授조에 一四七七년의 受敎인 생원진사를 保擧없이
서용하는 것이나 土官의 去官을 仕滿한 경우라도 六〇歲에 거관토록 한 것 등이다. 중종 말
『大典後續錄』이 시행된 뒤에는 大典前續錄이라고도 불렀다.
『대전속록』은 一五〇九년(중종 四)에 『경국대전』과 함께 다시 간행되었으나, 현전하는
것은 一六一三년(광해군 五, 계축)에 훈련도감활자로 重刊한 것이 가장 오래된 책이다.
二. 『大典後續錄』
『대전속록』이후 一五四二년까지 약 五〇년간의 성종·중종의 敎令 가운데 영세토록 준행
할 법령을 모은 六권 一책의 법전으로, 一五四二년(중종 三七) 가을에 편찬을 시작하여 一
五四三년 九월에 완성하여 一一월부터 준용하였다. 현전하는 最古本은 一六一三년(광해군
五) 훈련도감활자로 중간한 것이다.
후속록은 一五一三년(중종 八)에도 편찬한 바 있었으나 제대로 준용되지 못하였다. 一五一
三년(중종 八)에 연산군의 폭정을 거치는 동안 법령이 너무 번거로워졌다 하여 『대전속
록』 시행 후의 법령을 정비하기 위해 後續錄을 편찬하자는 건의에 따라 편찬하였으나, 시
행을 보류하자는 의견이 있어 미루어 오다 이듬해 一〇월에 간행하였다. 그 뒤에도 시행에
반대하는 의견이 강하였고 후속록에 수록된 법령이 受敎에 의해 폐지되는 경우가 많아 사실
상 법전 구실을 하지 못하다가 一五一五년 六월에 후속록에 실린 조문 가운데 없앨 만한 것
을 없애고 남은 것이 적으니 각사에서 수교를 칭하여 쓰도록 함으로써 법전으로서 후속록은
폐기되었다. 이 후속록은 전해지지 않아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一五四二년 후속록의 편찬은 영의정 윤은보, 좌의정 홍언필, 우의정 윤인경, 좌찬성 류관,
호조판서 성세창, 공조판서 류인숙 등이 勘校를 맡았으며, 『대전속록』 이후의 수교를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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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경국대전』의 편찬 취지에 따라 항구적인 법령으로 조문을 다듬어 정리한 것이다.
『대전후속록』의 항목 설정은 『대전속록』과 같이 『경국대전』을 따른 것 같다. 吏典은
官職 除授 褒貶 考課 差定 雜令의 六항, 戶典은 漕轉 稅貢 雜令의 三항, 禮典은 婚禮 立後
喪葬 禁制 諸科 奬勸 雜令의 七항, 兵典은 除授 給仕 試取 奬勸 番上 伴倘 迎送 禁火 遞兒
復戶 禁制 鍊才 廐牧 免役 留防 驛路 赴京 水軍 皂隸羅將 差定 城堡 軍器 敎閱 給保 雜令의
二五항, 刑典은 決訟日限 推斷 贓盜 禁制 賤妾子女 私賤 公賤 雜令의 八항, 工典은 營繕 院
宇 舟車 栽植 京役吏 工匠 柴場 雜令의 八항으로 되어 있다. 『경국대전』과 비교하여 다르
거나 새로운 항목을 찾아보면, 예전의 婚禮(←婚嫁), 병전의 除授 鍊才 水軍 皂隸羅將, 형전
의 決訟日限(←決獄日限) 賤妾子女(←賤妻妾子女) 등이나 항목의 순서는 특히 병전의 경우
아주 다르다.
三. 『經國大典註解』
安瑋 閔筌 등이 『경국대전』의 조문 가운데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나 용어를 주해하여
一五五五년(명종 一〇)에 간행한 책이다. 갑인자본(一권 二一장)이 유일본으로 규장각에 전
해지는데, 정사룡의 序文이 있다.
『경국대전』의 조문이 간결하면서도 뜻이 함축적이어서 그 문장과 실정에 능통하지 않고
는 법을 제대로 적용하기 어려워 모든 사람이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一五五
〇년(명종 五) 봄에 예조에 담당부서를 설치하고 좌통례 安瑋와 봉상시정 閔筌을 대전주해
관으로 임명하여, 안위와 민전은 『경국대전』 가운데 문장이 지나치게 간략하여 시행하는
데 가장 어려움이 있는 조문을 뽑아 주석하였고, 이것을 예조당상 정사룡 심통원 이몽필이
검토·정정한 뒤에 초고를 만들었으며, 다시 삼의정 심연원 상진 윤개의 검토를 거쳐 一五五
四년에 완성하여 그 이듬해부터 시행하였다. 예조당상과 삼의정의 검토를 거친 유권적 주석
이어서 법률의 효력이 있었다. 내용은 이전 一六항, 호전 一一항, 예전 七항, 병전 八항, 형
전 一八항, 공전 二항의 六二항목인데, 대부분 조문에 대한 주석이고 자구해석은 적다.2) 이
전의 取才, 호전의 量田, 예전의 奉祀, 병전의 番次都目과 入直, 형전의 賤妻妾子女와 私賤
등 항목의 조문에 대한 것이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이 책의 내용은 많지 않으나 경국대전
편찬 후 조선사회의 변화가 법 조문의 유권적 해석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대전속록』과 『대전후속록』은 아세아문화사에서, 『경국대전주해』는 단국대학교 동양
학연구소에서 각각 영인 간행한 바 있다.
2) 『경국대전주해』를 편찬할 때에 字句들도 주석하였으나 왕의 재가를 받지 않고 참고용으로 간직하였는데, 주
해관인 안위가 一五五四년 三월에 淸洪道觀察使로 부임하여 정부의 지시에 따라 그해 一〇월에 淸州에서
『경국대전주해』를 전집으로 字句註解를 후집으로 하여 함께 인쇄·간행하였다. 후집의 항목은 경국대전 명칭
의 주해를 비롯하여 이전 二八三항, 호전 七〇항, 예전 三一四항, 병전 五二항, 형전 九六항, 공전 一六항의
합 八三一항목이다. 후집은 안위가 서문을 썼으며 일본에 원본이 유일본으로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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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고 문 헌
박병호, 一九九五, 「『경국대전』의 편찬과 계승」, 『한국사』二二, 국사편찬위원회.
田鳳德, 一九八三, 「朝鮮王朝의 法과 法典編纂의 考察」, 『韓國文獻學硏究의 現況과 展
望』, 亞細亞文化社.
한국정신문화연구원, 一九九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