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록(海上錄)》 해제(解題)
윤병석(尹炳奭)
《해상록(海上錄)》은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왜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 본토에서 3년 동안 피수 생활(被囚生活)을 하다 귀국한 사인(士人) 정희득(鄭希得)의 피로 기록(被虜記錄)이다. 이와 유사한 것이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이라 할 수 있다. 《간양록》은 학계에 널리 알려진 편이나 정희득의 《해상록》은 그렇지 못하다. 그것은 《간양록》을 쓴 강항은 그래도 정유재란 중에 호조 판서의 속관(屬官)이라는 관리의 신분으로 활동 중 피로된 데다가 이미 당대에 널리 알려진 성리학자요, 따라서 일본 피수 중에도 문명이 높았던 까닭도 있다. 또한 그의 문인(門人)에 의하여 일찍이 그것이 간행되어 그 문학적 가치와 사료적 중요성이 지적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해상록》은 그 저자가 특별히 알려진 문인도 아니고 또한 그것이 저술된 후 곧바로 간행되지 못하고 초고본(草稿本)만이 후손의 집에 200년 가까이 비장되어 전해 오다가 정조 10년(1786)에야 그의 6대손 정간(鄭澗)의 주선으로 두 권으로 초간을 보았던 것이다. 그것도 겨우 100질(帙)의 한정판이었으며, 그 다음 해 약간의 재간이 있었으나 여하튼 그 후 희귀본이 된 것 같다. 그리하여 근대 사학과 식민지사관(植民地史觀)의 물결로 한일관계사(韓日關係史)나 임진ㆍ정유 왜란 관계의 사료가 많이 재발견되어 논의되는 중에도 《해상록》은 국내에서 이미 절판되다시피 되었던지 학계에 알려지지 못하였다. 그런데 최근 1960년대에 들어 일본 학계에서 이에 대한 소개와 그 영인(影印) 및 약간의 연구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아마 일제 침략과 그를 이은 식민지 연간에 일본 학자들에 의하여 한국 내에서 수취(蒐取)하여 간 것으로 생각하여 볼 수 있으나, 그에 대한 설명은 없다.
《해상록》의 저자 정희득의 생애와 활동 등에 관한 것은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다만 《해상록》 자술(自述) 속에 나타나는 단편적 기록 외에 그가 일본에서 귀국한 후로부터 125년이 경과한 경종 3년(1723)에, 그의 증손 정덕휴(鄭德休)의 주선으로 세자시강원 자의(侍講院諮議) 박광일(朴光一)이 찬술한 그에 관한 다음과 같은 각종 기록의 묘명(墓銘)이 참고된다.
公諱希得 字子吉 晉州人 曾祖諱伸部將 祖諱宗弼司評 考諱咸一察訪 妣咸平李氏 以萬曆乙亥生 二十五値丁酉亂 擧家避于七山海 忽於中洋遇賊 母夫人李氏 妻李氏 妹鄭氏 兄嫂朴氏 皆投水而死 並旌閭 事載新編三綱行實錄 公爲賊所執去 絶食五日不死 且念父親愼勿輕死 使我再見汝面之敎 隱忍至彼國晝夜泣血呼痛 以戀親悲切之語 感動倭徒 其酉聞而爲之惻然 遂許以生還 會華人同船 公以己亥七月返國 慟母非命 無異初終遂行追喪之禮以伸 至情制終 中癸卯進士 蓋公常抱窮天無涯之痛 自異國還後 遂廢擧業 而癸卯以親命不得己應擧 察訪公下世後 絶意科事 又息交遊 及至昏朝凶黨 設廢母疏於本縣 時邑宰朴昇元與公伯子穉相議驅逐 使不得接迹 其後凶徒中朴昇元遠配 時公年老 令子穉陳疏請釋 而疏則公所製也 公自此益無世慮 潛居守老 以崇禎庚辰十月十九日終 享年六十九歲 葬于金山亥座原
이를 근거로 관련 기록을 종합하면 정희득은 선조 8년(1575)에 전라도 함평 월악리(月岳里)에서 정함일(鄭咸一)과 함평 이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출생하여 인조 18년(1640)에 향제(鄕第)에서 작고하였다 그 자신은 말년에 부명(父命)을 어기지 못하여 1603년 즉 31세 때에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였으나, 그 후 과거를 단념하고 교우마저 끊고 은둔 생활로 마친 시골 선비다. 그러나 그 가계는 그 지방에서는 행세하던 양반인 모양으로 그의 부친 함일은 찰방(察訪)을 역임하였고, 조부 종필은 사평(司評), 증조 신(伸)은 부장(部將)을 각기 지냈다. 비록 정희득은 벼슬길은 단념하였지만 《해상록》에 나타난 그의 시문이나, 경기전 영(慶基殿令) 위백규(魏伯珪)가 지은 〈충효전(忠孝傳)〉에 그를, ‘骨相異凡 志氣非俗 文藝夙成 知忠孝之外無人道 故猶不汲汲於科第也’라고 한 것으로 보아도 시문에 능하고 지기(志氣)가 비속(非俗)한 것이 분명하다.
정희득이 왜군의 포로가 된 것은 25세 때이며, 이해 즉 1579년 9월 27일 전번에 임진란을 무사히 피란한 그들 일가는 이때에 난군의 북상을 피하여 한 척의 배를 타고 마침 지금의 영광군 연해에 해당되는 칠산대양(七山大洋)을 항해 중이었다. 그를 사로잡은 왜군은 아파국 번주(阿波國藩主)인 봉수하(蜂須賀)의 수군장 삼소칠랑(森小七郞)이 지휘하는 수군이었다. 이때 배에는 그의 부친 함일과 형 경득(慶得) 및 두 자녀가 탔었으며, 그의 모친 함평 이씨와 아내 이씨, 형수 박씨와 누이 등 4인은 왜군에게 욕을 당하느니보다 정절(貞節)을 지키려고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후에 정려(旌閭)되어 《신속삼강행실록(新續三綱行實錄)》에까지 기록되었다. 그달 29일 다경포(多慶浦)에서 그의 부친과 아이들은 노약(老弱)하다고 석방되어 귀가하고, 그의 형은 그와 함께 11월 26일에 100여 명의 다른 포로와 함께 일본에 끌려갔다. 대마도를 경유하여 그해 연말인 12월 30일에 봉수하의 거성(居城)인 지금의 덕도시(德島市)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긴 억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의 귀국은 3년째인 1599년 6월 29일 전라도 출신의 피로자 15인에 포함되어 이루어졌다.
《해상록》은 정희득이 억류 생활 중 시문을 비망기에 기록하였다가 귀국 후 보기(補記)하여 다음과 같은 목차로 저술한 것이다.
권지일(卷之一)
소(疏)
풍토기(風土記)
일록(日錄)
권지이(卷之二)
시(詩)
오언절구(五言絶句)
배율(排律)
장편(長篇)
칠언절구(七言絶句)
배율(排律)
장편(長篇)
서명(書名)은 원래, 만사(萬死)의 고난을 겪으며 간신히 생명을 보존하고 귀국하여 노부(老父)를 뵈었다는 뜻을 품은 《만사록(萬死錄)》이라 하였던 것인데, 그의 증손 정덕휴(鄭德休)가 100년이 지난 후 이를 간행하려고 몇 사람의 서문ㆍ발문과 충효록 등을 보충하고 《해상록》이라 개명한 것이다. 그 사정은 《해상록》에 수록된 자서(自敍)와 ‘名此日記一篇曰萬死錄仍記一絶’이란 시에 의하여 확인된다.
噫 余自丁酉避亂之初 至己亥還國之日 略有日錄 而其間喪亡之悲痛 舟揖之危險 枸勢之辛苦 倭賊之情形 至今苟存之恥 生還戚愴之懷 不能彈記 而掛一漏萬然 而彼中僧爲長老者 言語旣不通則情抱發之言語者必托之韻語然後 彼此之意可通也 故不揆陋拙 凡有接於耳目者 悉記而詩之 癸丑夏 余在憂中 偶閱篋笥中所藏萬死錄 竝庸編修以遺子孫 後之披覽者 其能無感愴之懷也耶 須護此錄幸甚 皇明萬曆四十一年癸丑初吉 月峯鄭希得書
《해상록》의 구성은 다음의 네 가지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첫째 권1의 소(疏), 둘째 일본의 견문기인 풍토기, 셋째 피수기(被囚記)인 일록(日錄), 넷째 권2의 피수 중의 시문이다.
첫째의 소(疏)는 귀국 직후 부산에서 올린 것으로, 포로가 된 전말과 일본에서의 피수 생활을 상세히 기술하고, 억류 중에 보고 들은 일본 국정을 논한 것이다. 둘째의 풍토기는 일본의 5기(五畿) 8도(道) 66주(州) 399군(郡) 2도(島)의 지리ㆍ역사ㆍ풍속ㆍ정정(政情)ㆍ군정(軍情) 등의 종합 기술에 관한 것이다. 일본의 견문기 내지는 국력 평가 기록으로, 우수한 편이나 그 내용이 대부분 강항의 《간양록》과 일치할 뿐 아니라 체재는 좀 다르더라도 문장까지 같은 것이라는 것은 이미 일인(日人) 학자의 연구에서도 언급된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임진ㆍ정유의 양차 왜란의 왜군 수나 참가한 장수의 명단 등은 독자적인 것이다.
壬辰倭寇軍數二十四萬(蒿卒類是甲卒不與) 賊將之數則輝元(入開寧 善山 尙州者) 其子秀元備前中納言秀家(入南別宮者) 增田衛門尉 ○ 筑前中納言金吾 ○ 中將政宗 ○ 石田冶陪小輔 ○ 戶田冶部小輔(入海道者) ○ 淺野彈政 ○ 其子左京大夫島津兵庫秀弘 ○ 肥前守龍藏寺 ○ 生駒雅樂 ○ 其子讚岐守一正 ○ 長曾我部土佐守盛親 ○ 蜂次賀阿波守家政 ○ 福島太雪 ○ 長崗越中守 ○ 賀藤主計淸正 ○ 藤堂佐渡守 ○ 中川修理大夫秀 ○ 福藁右馬助 ○ 山西攝津守行正 ○ 黑川甲斐守 ○ 早川主馬頭長岐 ○ 毛利壹岐守 ○ 毛利民部大夫 ○ 竹中源介 ○ 賀藤佐助 ○ 其餘如對馬島 壹岐諸將 不可勝數
丁酉入寇軍數十萬 賊將之數則秀家(入綾州和順者) 金吾(元帥也 鎭釜山) 安藝寧相秀元 ○ 左京大夫(丁酉冬鎭蔚山鄕曲者) 秀弘(鎭泗川 素號善戰者) 龍寺主計淸正(鎭蔚山者) 馬行正(鎭順天者) 甲斐守(鎭昌原ㆍ梁山等) 家政(陸至井邑 舟至靈光ㆍ鎭昌原) 讚岐守盛親(陸入羅州ㆍ靈光等) 賀藤佐馬助(舟至務安 鎭南海) 右馬助(鎭順天監軍者) 主馬頭(監軍者) 佐渡守(舟至務安) 秀城(監軍者) 壹岐守(監軍者鎭昌原) 大田飛彈守(監軍) 民部大夫(舟至務安) 池田伊豫守(入光州 殺拉尤甚 鎭泗川舟至珍島 死於舟上云) 來島守(敗死珍島) 垣見和泉守一直(監軍者) 其餘諸小將馬島守 及龍藏寺別將直茂 平利別吉川藏人廣家等 不可勝數
《해상록》의 핵심은 셋째의 일록과 넷째의 시문이라 하겠다. 그것은 우선 일록에서, 요즘 일기(日記)와 같이 시일을 밝히며 그가 피수 중에 겪은 모든 사정과 주요한 견문을 정확히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록의 시작은 피로되기 직전인 1597년 8월 12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날 그는 양친과 아내ㆍ형제ㆍ두 자녀와 함께 함평의 고향 집을 떠나 피란 길에 올랐다. 이 사실은 마침 그 다음날이 왜군의 남원성의 함락을 위한 총공격일이 되어 역사적 사실과 일치한다고 하겠다. 정희득 일가는 바다로 피란 길을 택하여 그달 19일에는 영광의 대안촌(大安村)에 도착하고, 그곳 둔전포(芚田浦)에서 조운선(漕運船) 한 척을 구하여 준비하였다. 그 후 9월 15일에 영광군 구수포(九岫浦)에서 온 가족이 승선하여 출항하였다. 그러나 역풍(逆風)으로 서쪽으로 가지 못하고 임병도(林炳島)에 9월 17일 정박하고, 다음 날 재원도(載元島)에 옮겨 25일까지 머물렀다. 26일에 순풍이 불어 안마도(安馬島)를 거쳐 북으로 가려 하였다. 그러나 27일에 이르러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칠산 대양(七山大洋) 중에서 왜선을 만나 피로되고 만 것이다.
피로된 정희득은 그 후 생환될 때까지 많은 시문을 지었는데, 그중 중요한 것은 일일이 기록하였다가, 넷째의 시문으로 편집한 것이다. 그러므로 셋째의 일기는 피수의 경과를 밝힌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권2의 많은 시문은 피로의 심회와 정경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몇 개의 시문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드디어 그해 말 일본 남해도 아파국(阿波國)이란 피수지에 도착하여 새해를 바라보는 심정을 ‘除夕到南海道阿波州’란 제목으로 읊었다.
또한 다음 날 아침, 즉 1598년 1월 1일 원단에는 같은 피수인인 최홍건(崔弘建)이 병으로 갑자기 죽으니, 피로자의 죽음이란 참혹하여, 그 시체가 번사(藩士)들의 칼날의 시험 대상물이 되었다. 시체는 무사들의 칼날로 갈기갈기 짤리어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는 이를 보고 일록에 기술하고 ‘埋崔德楊奠而哀之’라는 시제(詩題)로 읊었다. 정희득이 풍신수길(豐臣秀吉)의 죽음을 들은 것은 피수 2년째인 1598년 8월 17일이었다. 그날 일록에는 기쁜 마음을 기록하였다.
풍신수길이 이미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내란이 생길까 두려워, 그의 주변 인물들은 비밀에 붙이고 소금으로 절여서 그의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여 살아 있는 듯이 속인 것이, 마치 진 시황의 시체를 사구(沙丘)의 평대(平臺)에서 함양(咸陽)으로 옮길 때 살아 있는 것같이 하기 위하여 포어취(鮑魚臭) 즉, 썩은 고기의 냄새를 지독히 풍기게 하였다는 고사를 끌어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반드시 자중지란(自中之亂)이 생길 것이므로 그때는 피수인들이 생환, 귀국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록과 시문은 이와 같이 그의 피수 생활 중에 스스로 경험한 것이거나 견문한 것을 근본으로 저술된 것이기 때문에, 그 높은 문학적 가치뿐 아니라 사료적인 중요성이 강조될 수 있는 기록인 것이다. 임진ㆍ정유의 7년 전란 중에 왜군은 전투원ㆍ비전투원 또는 남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무수한 우리나라 사람을 납치 혹은 포로로 하여 그들 본국으로 끌고 갔다. 그중에는 정희득과 강항처럼 전후에 송환되어 환국한 사람도 적지 않으나, 그곳에 영영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한 수에 비하면 수십 분의 1도 안 될 것이다. 그중에는 비전(肥前)에서 유전 도자기[有田燒]를 창시한 도공(陶工) 이삼평(李參平), 축전(筑前)에서 고취(高取) 가마를 창시한 귀화인(歸化人) 팔장(八藏), 비후(肥後)에서 팔대(八代) 가마를 창시한 도공 존해(尊楷), 풍전(豐田)에서 상야(上野) 가마를 창시한 위의 존해, 살마(薩摩)에서 살마 가마를 창시한 도공 신(申)ㆍ박(朴)ㆍ이(李) 등 근대까지 일본 도자기 발달에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부터 피수 기록(被囚記錄)을 남기지 않았고, 요행히 귀국할 수 있었던 사람들도 강항의 《간양록》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 《해상록》은 강항의 《간양록》과 아울러 임진ㆍ정유 왜란 중의 문학적 가치가 높은 일본 피수 기록으로서 쌍벽을 이루는 것이라 일컬어도 좋을 것 같다.
1974년 12월 5일
[주-D001] 1960년대에 …… 시작하였다. : 현재 《월봉해상록》의 원문은 2종이 있다고 소개되었다. 하나는 1786년에 정간(鄭澗)이 100질(帙)을 간행한 것으로, 이것의 1질은 일제시 한국에 와서 활동하던 금서룡(今西龍)의 수장본(收藏本)으로 지금은 그의 아들 금서춘추(今西春秋)가 소장하고 있다 하며, 다른 하나는 정간의 초간 익년인 1787년에 같은 판본으로서 서ㆍ발만 약간 변경하여 간행한 것 1질이 동경대학에 소장되어 있다고 소개되었다. 그 영인되어 일본 천리대학(天理大學)에서 간행하는 조선학보의 부록으로 제23집 (《월봉해상록》 상 197~238면(面))과 제25집 (《월봉해상록》 하 182~224면(面)) 및 제26집 (《월봉해상록》보영)에 소개되었다. 아마 일제 식민지 연간에 한국에서 수취하여 간 것인 듯하다. 《월봉해상록》의 소개의 글이나 해제 연구에 관한 것은, 방파이정(邦波利貞)의 〈월봉해상록 고석〉(月峯海上錄攷釋 : 조선학보 제21ㆍ22 합연집 수록)과 중촌영효(中村榮孝)의 〈月峯海上錄について〉(조선학보 제24집 수록) 및 석원도박(石原道博)의 〈月峯海上錄について〉(조선학보 제23집 수록), 금서춘추의 〈月峯海上錄の取上げられたいきさつ〉(조선학보 제26집 수록) 등이 있다.[주-D002] 인조 18년 …… 작고하였다 : 이 묘명에 그의 출생과 작고 연대는 간지(干支)로 만력 을해(萬歷乙亥)에 출생하여 숭정 경진(崇禎庚辰)에 작고하였다고 명시되어 향년 66세인 셈인데, 그 묘명에 또 향년 69세라 하였으니, 어느 한쪽이 잘못된 것이다.[주-D003] 일인(日人) …… 것이다 : 중촌영효(中村榮孝)의 〈月峯海上錄について〉 참조.
ⓒ 한국고전번역원 | 윤병석(尹炳奭) |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