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세 김희수 金羲壽1760~1848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23.10.31|조회수8 목록 댓글 0

29세 희수羲壽


자는 이응以凝, 호는 동원東園이시니 약봉 부군藥峯府君 주사손主祀孫 계운啓運공
의 둘째 아드님이시다.
영조英祖 36년 경진(1760) 3월 7일에 나셨다. 어머님은 한양조씨시니 옥천玉
川 선생 덕린德鄰의 증손이시고 통덕랑通德郞 준도遵道의 따님이시다. 공이 골상이 
청수하시고 의표儀表가 준수하시어 호매한 기개가 있었다. 글 읽기를 시작하자 
재종숙 성암惺庵공 현운顯運에게 배웠다. 공부에 근고勤苦의 공을 쌓아 얻지 않으
면 놓지 아니하였고 글쓰기에 특히 정성을 기울이셨다. 어릴 때에 백형伯兄 곤수
坤壽공이 하늘 천天 자를 작은 종이에 쓰신 것을 보시고 이르기를 “하늘 형체形體
를 어찌 이렇게 작게 표시하여 되겠는가?” 하시고 큰 붓에 먹물을 듬뿍 묻혀 대
청마루에 가득 차게 쓰시니 보는 어른들이 경탄하였다.
어릴 때부터 천성이 효순孝順하여 부모님 말씀을 잘 받들었다. 집에 오리 한 
마리를 길렀는데 아버님께서 잘 기르라고 하시는 명을 받아 보살피다가 하루는 
사나운 개가 물어 죽였다. 공은 친명親命을 잘 지키지 못하였다 해서 종일 울었
다. 9세 때 형님을 따라 영양英陽 주실의 외가에 가셨는데 그때 외가에는 월하공
月下公(조운도趙運道)·마암공磨巖公(조진도趙進道)·만곡공晩谷公(조술도趙述道) 같은 
큰 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공은 날마다 그 어른들 밑에서 배우고 묻고 하여 행지行止와 학문이 많이 진취
되었다. 외가도 지극히 가난하여 끼니를 잘 잇지 못하였으나 조금도 괴로운 빛
이 없으셨다. 만곡 선생晩谷先生이 “이 아이가 어린 나이답지 않게 학문에 정성이 
있고 괴로움을 참을 줄 아니 뒤에 반드시 군자君子다운 선비가 되리라.” 하셨다. 
뒤에 공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릴 때는 성질이 아주 조급해서 비복婢僕들이 말
을 잘 듣지 아니하면 그만 매질을 하여 피가 흐르는 것을 봐야 마음이 풀렸는데 
하루는 손이 찾아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사람을 많이 보았으나 도령 같은 
의젓한 분은 보기도 드물었는데 다만 분노憤怒를 참지 못하고 감정 나는 대로 하
면 장래에 큰 발전을 하기가 어려우니 어찌 성정性情을 참고 마음을 누르지 아니
하는가?’하므로 나는 아주 마음을 고쳐 그 후부터는 한 번도 매질을 하지 않았
다.” 하셨다.
매일 백형님과 여러 종반님들과 서실書室에 단정히 앉아 여름에는 글짓기요 
겨울에는 글을 읽었는데 조금도 쉬지 않고 힘썼으며 마음에 맞는 글을 볼 때에
는 침식을 잊고 공부하셨다. 뒤에 관례冠禮를 하고 상주尙州 홍씨 집에 장가 가셨
으니 그 집은 홍목재洪木齋 여하汝河 선생의 후손으로 유림의 명가名家인데 공이 
보고 들은 소득이 많았다.
이때 아버님 처사공處士公께서는 십세종택十世宗宅을 받들어 문호가 크고 제사
와 문사의 일로 바쁘고 번성하여 빈객이 쉴 사이가 없었으나 공은 매일 의관을 
정제하고 자리에 모시어 좌우로 주선하여 조금도 해이하지 아니하셨다. 어머님
을 뵈러 중문中門안에 들어가실 때에도 편복便服으로는 가지 아니하시며 기운을 
내리고 순한 낯빛으로 어기지 아니하고 받들었다. 큰사랑 중간에 병풍을 가리
고서 책을 읽고 글씨를 쓰셔서 여러 해 공을 쌓으시니 문장과 시는 고아古雅하여 
반고班固·양웅揚雄의 풍이 있었고 서법의 힘차기는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의 
체에 따랐으며 서한 왕복이나 기사 서술이 다 넉넉하고 정아精雅하여 덕행德行있
는 자의 말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시도 평담平澹하여 아로새기고 기교를 부린 자
취가 없었다.
공은 젊을 때부터 사양하고 청렴하여 물욕이 적어서 세상의 모든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을 즐기지 않고 오직 고금의 서적을 각별히 사랑하셨다. 경전經傳이 닳
고 떨어진 것이 있으면 기워서 보수하고 선현유적을 모아서 연대별로 편차編次
하여 장정한 것이 4책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도 종가에 비치 진장珍藏하게 하였
다. 과거를 보러 가시면 반드시 형님 명지名紙를 먼저 만들어 내고 다음에 자기 
것을 내셨다. 백형 곤수공坤壽公께서 이르시기를 “군도 이제는 늙었으니 지금부
터는 각기 제 것부터 만들어 내게 하라”하셨더니 공은 축연縮然히 대답하시기를 
“저는 입신양명立身揚名한 재질이 형님에 따를 수 없을 뿐 아니라 가정에서 기대
하고 바라는 것이 형님에게 있습니다. 형님이 이름을 내시는 것이 곧 아우의 일
이니 어찌 따로 생각을 내어 되겠습니까?” 하셨다.
계씨 이수공頥壽公이 양자로 남의 집에 나가시어 또 아들이 없이 일찍 돌아가
셨는데, 공이 그 기일忌日에 가셔서 과수로 있는 제수님의 가긍한 모습에 마음
이 아프셔서 곧 둘째 아들 진덕鎭德으로 그 뒤를 잇게 하셨다. 순조純祖 4년 갑자
(1804)에 모부인 상고를 당하시어 어린아이가 젖줄 떨어진 듯이 애통하시어 겨
울에도 여막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고 여름에도 질대絰帶를 풀지 않으셨다.
3년상을 마치고 증광생원시增廣生員試에 합격하시고서 정시庭試를 보러 가셨을 
때의 일이다. 동방진사同榜進士인 이진사李進士 주령周齡공과 시험장에 같이 들어
가기로 약속을 하셨는데 들어가서 들으니 이진사가 시험장 문 앞에서 죽었다 하
기로, 공은 시험도구를 거두어가지고 나오셔서 친히 그 시체를 거두어 염습하는 
절차를 하여 천리 길을 반구返柩하시어 보살펴 주시니 세상에서 모두 의롭다고 
여겼다. 
아버님 처사공處士公의 연세가 높으시고 백씨공도 노쇠하시니 공이 지성으로 
주야로 모시고서 침식과 모든 일을 모두 친히 보살펴 받드셨다. 혹 병환이 드시
면 옷을 벗지 못하시고 밤에 잠자지 않으시고 간호하시고 처사공이 설사를 하시
니 공이 그 변을 맛보고서 나으실까 징험하셨다. 이렇게 십년을 지나서 순조純祖
17년 정축丁丑(1817)에 대고를 당하시니 공의 연세도 이미 60에 가까운 터이나 
애통하신 나머지에 뼈만 남으셔서 곡읍哭泣하실 때에 소리를 못 내실 지경이셨
다. 묘소에 가시는 이외에는 이웃집에도 가신 일이 없으시고 분가하신 집이 가
까이 있었으나 3년 내에 한 번도 가신 일이 없으시고 백씨공과 형제분이 여막에
서 잠시도 떠나시지 아니하셨다. 
3년상이 끝나시고 영양英陽 단곡丹谷으로 우거하셨으니 영양에는 선세先世의 
별업別業있는 곳이고 또 외가도 있으시므로 거기에 가시면 향중선비들이 모두 
나와서 맞으셨다. 농부를 만나시면 농사짓는 말을 하시고 젊은 사람에게는 효제
孝弟하는 일을 가르치시고 배우러 오는 자에게는 지성으로 교도하여 알기 쉽게 
계몽하셨다. 그러나 형제분이 오래 떠나있기가 어려워서 가신지 7년 만에 운곡
雲谷으로 돌아오셨으니 백씨공이 계신 집과는 두어 마장의 거리가 되었으나 조
석으로 문후하여 아무리 비바람이라도 폐한 일이 없었다. 따스한 낯으로 엄부같
이 섬기고 어린이같이 보호하여 극진히 하셨는데, 무자년戊子年(1828)에 백씨공
이 또 하세하시고 말았다. 뒤를 이어 종질宗侄 부자가 계속하여 요절夭折하니(진
종鎭宗공 정유년(1837) 졸, 형락亨洛공 병신년(1836)졸) 공이 홀로 우뚝하게 계시고 큰
집이 기울어져 가게 되자 슬픔을 금치 못하시고 마냥 사묘祠廟에 배알하실 때는 
눈시울을 적실 때가 많으셨다. 우리 종가가 그때에 부지하여 기둥처럼 떠받치고 
오늘까지 내려오신 것은 공의 협보挾輔하신 힘이 많은 것이다.
연세가 80이 지나셔도 정력과 총명이 쇠하지 아니하시어 빈객의 영송이나 서
찰·만제문의 수응도 다 친히 하셨고 남이 와서 병풍·정각의 현판글씨를 청하
면 다 들어주셨으나 글씨가 소장 때와 다름이 없었다. 종족宗族들이 공을 위하여 
기영회耆英會를 설치하여 해마다 잔치가 열리게 되었다. 매년 봄날이 화창할 때
에 화수花樹 모임이 열릴 때면 공이 산건山巾 야복野服으로 사빈泗濱이나 도연陶
淵·백운정白雲亭·선유정仙遊亭에 학처럼 흰 머리털을 날리면서 간소한 풍류로 
거니시는 것이 신선같이 보였다.
송암松庵에 모였을 때 60 이상 되시는 참석하신 어른들이 수십 명이나 되셨다. 
그분들 명함을 열기列記하고 그 나이수를 계산하셔서 옛날 낙영고사洛英故事를 
모방하였다. 그중 높으신 일곱 분의 춘추를 합치니 500여 세가 되기에 이름 하
기를 천일회千一會라고 하였으니 이 회첩會帖은 공께서 쓰신 글씨이시다. 이때에 
다시없는 성사盛事라고 하였다.
공이 86세가 되실 때에 두 아드님이 다 예순이 넘으셔서 환갑을 지나시니 공
은 시가詩歌 3장을 지어 악보樂譜에 올려 방중지악房中之樂을 삼았으니 운곡雲谷
한 갈피가 봉래·방장의 신선세계가 된 듯하였다. 3년을 지나서 무신년(1848)
이 되어 89세의 고령이시나 정신과 기력이 감손되지 않았는데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 “밝은 곳에서는 하늘을 속이지 않고[明不欺天], 어두운 곳에서는 귀신을 속
이지 않고[幽不欺神], 안으로는 마음을 속이지 않고[內不欺心], 밖으로는 사람을 속
이지 않는다[外不欺人]”는 웅씨熊氏의 말 16자를 써서 벽에 붙여서 좌우명座右銘
으로 하시고서 손자 석락奭洛을 송암松庵에 가서 글을 잘 읽으라고 훈계하여 보
내시고, 고종考終하시던 날 아침에도 지구知舊에 편지도 쓰시고 방·마루를 쓸고 
금침을 털고 하셨는데 감기 기운이 계시더니 저녁때가 지나서 유연히 떠나셨다. 
원근에서 듣고서 모두 애도하여 달려와 조상하였다.
다음해 기유년己酉年에 비리실飛鯉谷에 권장權葬하였다가 다음해에 운정화곡雲
亭樺谷에 이장하고 뒤에 또 아휴阿休로, 또 뒤에 망천輞川 있는 부인 홍씨 묘에 합
장하였다. 초취는 홍목재洪木齋 후손 윤충胤忠의 따님이시니 일찍 돌아가시고, 후
취는 진산강씨晋山姜氏 복조復祖의 따님이시니 3남 2녀를 두셨다.
큰 아드님은 진건鎭健이다. 다음은 진덕鎭德과 진림鎭林이니 두 분 다 출계出系
하셨다. 사위는 임정운林精運·강명규姜命奎이다. 증손 두병斗秉이 문과에 급제하
였고 지금 5대 주손 시경時敬이 내앞[川前] 고택古宅에 살고 있다

 

成均生員東園金公墓誌銘 幷序 -정재 류치명

 

公諱羲壽。字以凝。姓金氏。新羅宗姓。在麗有諱龍庇。太子詹事。襲封義城君。入我朝。有諱漢啓。集賢學士。端廟遜位。棄官歸。三世諱璡。國子生。贈吏曹判書。號靑溪。有五賢子。長諱克一內資寺正。次諱守一察訪。生諱澈承宗祀。生諱是榲。崇禎處士。拜官不起。贈執義。卽瓢隱先生也。四世諱敏行。以風儀見稱。爲公曾祖。祖諱始元。以敬窩烋曾孫入承。考諱啓運。又以旁支。嗣祖諱始亨。於所后祖。實從父弟也。妣漢陽趙氏。玉川諱德鄰曾孫。士人遵道女。元陵庚辰公生。儀表瀅秀。異俗曺。九歲。就學于晩谷趙公。趙公亟加愛賞。其爲童幼。善承受。應唯敬對。先公畜一兒鴨。命看護。爲狂犬所噬。以不能謹守。涕泣竟夕。在慈闈。亦不恃愛而狎。有臨池之癖。見伯氏書天字曰。天體豈若是眇小乎。攬水筆。畫一圓圈子。盡幾架廳

壁。筆興豪橫。先公持宗事。門戶闊大。屣履塡階。公自稍長。以及旣冠。常整冠束帶。將命於前。暇則與伯氏退入私房。課製日勤。矻矻忘倦。從事塲屋。必先寫伯氏券。旣老猶然。己巳。陞上庠。晩寓英之丹谷。土人爲之割土以居之。旣而捲歸故里。兄弟聯牀對晤。風雨不廢。及伯氏不在。則每涕淚緣睫。與宗族。徜徉於白雲仙亭之間。葢金氏世居。列置亭館於沿江上下。風流韻致。爲世豔歎。耄及則亦延接不倦。情意周洽。一日朝起。躳掃室。拂拭衾褥。向夕感疾。逌然而逝。享年八十九。實憲宗十四年也。初葬飛鯉谷。後遷白雲亭西樺谷壬坐之原。配缶林洪氏。木齋汝河之後。處士胤忠女。不育。後配晉州姜氏。處士復祖女。三男鎭健,鎭德出,鎭林出。二女林精運,姜命奎。鎭健男奎洛,翊洛,奭洛出。女李琔。鎭德男元洛,禹洛出。女金樂雲,金濟殷。鎭林男幼。女李晩洙,李性浩。二幼。奎洛男蘭植夭。林男致鐸,致博,致益,致復,致鍾。姜男𨬔,𨪌注書。公冲淡寡慾。機械不萌。忮求不生。孝敬之良心眞切。忠厚之本性渾全。事親則服勤忠養。病致憂。喪致哀。率禮不懈。事兄則如手如足。至老愈摯。與人和而無間。御下寬而善恕。未嘗有粗戾苛刻之言。葢其天資淳厚。全乎赤子之心。而不知人己計較之爲何事也。若其江山之樂。文墨之趣。與衆共之。而人或未必知公之樂也。今其往迹已息。而詩章筆畫之在人者。亦可見其流出性情。而得古人之遺法矣。公旣享有壽耉。而二子年踰華甲。白首斑衣。稱觴於前。豈非和氣。有以致之歟。致明以十世契家之舊。竊慕其眞心懿行。而歎其不可復覩於今世。公之孫奎洛。以公從姪鎭宇之狀。責以幽竁之誌。則有不可辭者。謹綴以叙之。且銘之曰。

吾聞全乎天者。必無僞於己。以之爲子弟則職必修。爲父兄則家必祉。若其疎曠之襟。淳古之氣。求之前世。亦鮮其倫。吾以誌其幽。以告後之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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