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계 홍씨(缶溪 洪氏) 증시: 1명
*홍귀달(洪貴達)1438년(세종 20)∼1504년(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
시호: 문광(文匡) 중종 2년(1507) 증시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겸선(兼善), 호는 허백당(虛白堂)·함허정(涵虛亭).
아버지는 증판서 효손(孝孫)이며, 어머니는 노집(盧緝)의 딸이다.
관직: 문과급제. 한림. 옥당. 경주부윤·대사성·지중추부사·대제학·대사헌·우참찬·이조판서·호1460년(세조 6) 강릉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464년 겸예문에 등용, 예문관봉교로 승직하였다.
1466년 설서가 되고 선전관을 겸하였다.
이듬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공조정랑에 승직하면서 예문관응교를 겸하였다.
1469년(예종 1) 교리가 되었다가 장령이 되니 조정의 글이 모두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사예가 되었을 때 그를 외직인 영천군수로 내려 보내려고 하자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이 “그는 글을 잘하여 조정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하니 외직전출이 취소되고 홍문관전한과 예문관전한이 되었다. 이어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뒤 직제학‧동부승지를 거쳐 충청감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 도승지로 복직하였으나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의 폐출(廢黜)에 반대하다가 한때 투옥되었다.
1481년(성종 12)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483년 《국조오례의주(國朝五禮儀註)》를 개정하고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그뒤 형조와 이조의 참판을 거쳐, 경주부윤‧대사성‧지중추부사‧대제학‧대사헌‧우참찬‧이조판서‧호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를 역임한 뒤 좌참찬이 되었다.
15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직전에 열가지 폐단을 지적한 글을 올려 왕에게 간하다가 사화가 일어나자 좌천되었다.
1500년 왕명에 의하여 《속국조보감(續國朝寶鑑)》‧《역대명감(歷代名鑑)》을 편찬하고,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504년 손녀(彦國의 딸)를 궁중에 들이라는 왕명을 거역하여 장형(杖刑)을 받고 경원으로 유배 도중 교살(絞殺)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에도 능하였으며, 성격이 강직하여 부정한 권력에 굴하지 않았다. 모두들 몸을 조심하라 하였으나 태연히 말하기를 “내가 국은을 두터이 입고 이제 늙었으니 죽어도 원통할 것이 없다.” 하였다.
중종반정 후 신원(伸寃)되었다. 함창의 임호서원(臨湖書院)에 제향되고, 저서로는 《허백정문집(虛白亭文集)》이 있다.
홍귀달(洪貴達)의 본관은 의흥(義興)의 부계(缶溪)로서 자는 겸선(兼善)이요, 호는 함허정(涵虛亭)인데 또한 허백정(虛白亭)이라고도 한다. 세조조에 급제하여 벼슬은 좌참찬에 이르렀다. 연산조(燕山朝)에 죄를 입어 경원(慶源)으로 귀양을 갔다가, 귀양간 땅에서 죽었다. 문장은 아담하고고 꿋꿋하고 전실하고 예스러웠다. 오랫동안 대제학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 강원 감사(江原監司)가 되었을 때, 〈유삼일포(遊三日浦)〉라는 글의 서문에, “자고로 신선은 죽지 않아서 혹 이름을 바꾸고 형용을 고쳐 다시 천 년 후에 노는 것이나 사람은 알지 못하나니, 영랑(永郞)의 무리가 오늘 이 자리에도 있지 않다는 것을 어찌 장담할 수 있으랴.” 하였고, 시에 이르기를
삼일포의 명성을 옛날에 들었더니 / 昔聞三日浦
이제야 사선정에 올랐네 / 今上四仙亭
물은 흰 소반 같은 바위에 부딪치고 / 水拍白銀盤
산은 푸른 옥 병풍을 두른 듯하여라 / 山圍蒼玉屛
하늘이 공허하니 채색 구름이 아롱졌고 / 天空彩雲濕
돌이 늙었으니 가을빛이 맑도다 / 石老秋光淸
신선 간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 仙人去己遠
옛 정자에는 기둥도 남아 있지 않구나 / 古亭今無楹
그 당시 놀이터로 되었던 곳 / 當時遊戱處
구름 밖에서 생황과 퉁소소리 들리네 / 雲外笙簫聲
천년 만에 다시 내가 오니 / 千載復吾人
여섯 글자(永郞徒遊賞地)가 오히려 선명하게 보이네 / 六字看猶明
바람은 영랑호에 높고 / 風高永郞湖
달은 안상정에서 떠오른다 / 月出安商汀
외로운 술잔 배를 대는 곳 / 孤尊泊舟處
여기가 바로 봉래 영주라오 / 此固云蓬瀛
하였다. 본집(本集)
○ 경원(慶源)으로 귀양가서, 성남루(城南樓)에 올라가 시를 짓기를
서울을 떠난 한 몸이 절역에 던져져서 / 去國一身投絶域
높은 성 오월에 남루에 올랐도다 / 高城五月上南樓
하늘과 땅은 들어오고 들어와 두 눈에 남아 있는데 / 乾坤納納存雙眼
연회석상은 시끄럽고 시끄러워 백 가지 근심을 잊겠구나 / 尊俎喧喧失百憂
가생은 왕의 사부였음을 슬퍼한들 쓸데없고 / 賈生不用傷王傳
유자후는 어찌 유주 고을만 한탄하는고 / 子厚何須恨柳州
어느 강산이 나의 있을 곳 아니랴 / 底處江山非我有
옛이나 이제나 사람의 세상은 본래부터 떠 있는 것임을 / 古今人世本來浮
하였다. 본집(本集)
○ 강원 감사로 만기가 되어 돌아오는 길에 예천(醴泉)을 지나던 차 객사(客舍)에서 지은 시에
앞 마을 저녁 연기 속에 까마귀 깃들었는데 / 前村煙瞑己臧鴉
객사는 침침하여 밤이 시끄럽지 않다 / 客舍沈沈夜不譁
깊은 숲 달 밝은데 두견새는 울고 / 深樹月明啼杜宇
넓은 뜰엔 봄이 다하여 배꽃이 떨어지네 / 廣庭春盡落梨花
노쇠한 얼굴을 거울에 대하니 해마다 다르고 / 衰容對鏡年年換
병든 눈으로 글자를 보니 글자마다 빗나가네 / 病眼看書字字斜
꿈속에 그리던 산천을 내일은 밟으리니 / 夢裏溪山明日去
문 앞에 흐르는 물 있는 곳이 바로 내 집이로세 / 門前流水是吾家
하였다. 동상
정헌대부 이조 판서 겸 경연관 지사 춘추관 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시 문광 호 허백당 홍 선생 행장〔正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諡文匡公虛白洪先生行狀〕 -입재 정종로
선생의 휘는 귀달(貴達)이고 자는 겸선(兼善)이며 성은 홍씨(洪氏)이다. 그 선조는 중국 사람으로 당(唐)나라 초기에 신라에 와서 남양(南陽)에 거주한 자가 있어서 드디어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이 되었다. 그 뒤에 여러 곳에 흩어져 살았는데, 부계(缶溪)에 거주한 자가 곧 선생이 본관으로 하는 분이다. 고려 시대에 휘 란(鸞)이 비로소 드러나 현달하였고 내시(內侍)를 지낸 휘 문영(文永)에 이르러 상주(尙州)로 이거하였다. 문영의 아들 휘 순(淳)은 사재감(司宰監)을 지냈고, 순의 아들 휘 득우(得禹)는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득우의 아들 휘 효손(孝孫)은 예조 판서에 증직되었고, 그 부인은 부사직(副司直)을 지냈으며 본관이 안강(安康)인 노집(盧緝)의 따님인데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되었다. 득우는 선생의 조부이고 효손과 그 부인은 선생의 부모인데, 모두 선생이 귀하게 된 덕분으로 벼슬에 추증되는 영광을 받았다. 정통(正統) 무오년(1438, 세종20)에 선생이 함창(咸昌) 양적리(羊積里)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 특출한 자질을 가지고 있어서 총명하고 빼어났다. 이미 학교에 들어가서는 스스로 힘쓰고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집에 책이 없어서 남에게 빌려서 읽었는데 반드시 외우고서 되돌려 주었다. 12세 때 천자께서 북쪽으로 순수(巡狩)하신다는 말을 듣고 개연(慨然)히 눈물을 흘리며 “천하 사람들이 거꾸로 매달리듯 고통을 받겠구나.”라고 말하니, 식자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성장하여서 경전과 제자백가에 대대적으로 힘을 쏟아 푹 잠겨 공부를 쌓고 쌓아 해박한 지식으로 이치를 관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선생의 뜻은 구도(求道)에 더욱 절실하여 성현의 글에 잠심(潛心)하고 복응(服膺)하여 반드시 자기 몸에 선(善)을 두려고 하였다. 문장을 지음에는 넉넉하고 광대하여 스스로 여유로움을 으뜸으로 삼았다.
기묘년(1459, 세조5)에 국자시(國子試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신사년(1461, 세조7)에 임금이 친히 임하여 치른 대책문 시험에 합격하였는데, 전형관이 선생의 답안지를 보고 기뻐하며 “뒷날 우리의 의발(衣鉢)을 전수받을 이는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문충공(文忠公) 서거정(徐居正)도 선생을 문장을 주도할 솜씨라고 추천하니 처음에 삼관직(三館職)을 시험하여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와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를 역임하였다. 이때 임금이 문무의 재능을 겸비한 자를 명하여 선전관(宣傳官)으로 삼았는데, 선생이 선발되었으니 문신 겸 선전관의 직책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정해년(1467, 세조13) 북관(北關)의 전역(戰役)에 선생이 원수(元帥)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을 보좌하여 계책을 돕고 항오(行伍)를 정돈하는 데 공로가 많았다. 난리가 평정되자 단계를 뛰어넘어 공조정랑 겸 예문관응교에 임명되었는데, 이 벼슬은 장차 문형(文衡)을 관장할 자를 임명하는 것이다.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전직되었고 예문관 응교를 겸하는 것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자리를 옮겨 시사를 말함에 간절하고 곧았으며 당시의 소차(疏箚)가 모두 선생의 손에서 지어졌다. 체직되어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 임명되었다. 이조(吏曹)에서 선생을 외직에 임명하려고 하자, 문충공(文忠公) 서거정이 계장을 올려 홍모(洪某)는 문한직(文翰職)에 있는 것이 마땅하고 외직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에 특별히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에 임명되었다. 일찍이 경연에서 임금을 모시면서 연한(燕閒)의 때 야대강의(夜對講義)를 하여 영원한 규범으로 삼기를 청하니, 임금께서 가납하시었다. 경연에서 야대강의는 대개 선생의 건의로 시작된 것이다.
임금께서 장차 송도(松都)에 행차하려 할 때 당시 재상이 여악(女樂)을 대동하여 가도록 청하였다. 선생께서 경연에 들어가 임금을 모시면서 불가함을 극언하니, 임금께서 놀라며 얼굴 모습을 바꾸고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없었다면 실수할 뻔했다.”라고 하고 즉시 명령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그 후에 정전(正殿)의 회례연(會禮宴)에 또한 여악을 사용하지 말도록 명령하였으니, 선생의 말씀에 깊이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있다가 직제학(直提學)에 승진하고 승정원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기해년(1479, 성종10) 가을에 호서(湖西) 관찰사가 되었다가 어떤 일로 체직되었다. 얼마 후 가선대부 계급과 형조 참판에 특진되었다가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전직되었다. 이때 선생의 집은 남산 아래에 있었는데, 집 곁의 언덕에 정자 하나를 지어 허백당(虛白堂)이라 편액하고 함허자(涵虛子)로 자호하였다. 선생이 공무에서 퇴근하여 폭건(幅巾)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서 거기에서 흥얼거리며 시를 읊조리니 말쑥한 모습이 세상을 잊어버린 자와 같았다.
신축년(1481, 성종12) 여름에 사신의 임무를 띠고 명나라에 천추절(千秋節)을 축하하러 갔다. 이에 앞서 사신의 행차가 요양(遼陽)을 지날 때 역참(驛站)에서 오직 하루 동안의 비용만 지급하였기에 비록 몸이 아파 지체하고 비가 와서 길이 막혀도 절대로 더 이상 음식을 주지 않아 사신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매우 곤궁하였다. 선생이 서장관 신종호(申從濩)와 함께 명나라의 예부(禮部)에 하소연하여 넉넉한 음식을 지급하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로부터 중국에 사신 가는 자들은 영원히 이 은택을 받게 되었다. 돌아오다가 용만(龍灣)에 도착하여 어머니 정부인(貞夫人)의 초상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분상(奔喪)하였다.
갑진년(1484, 성종15)에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고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승급되었다. 외직으로 나가 관동(關東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학교를 세우고 군민(軍民)들을 주휼했다. 공무의 여가에 삼일포(三日浦)의 사선정(四仙亭)을 유람하다 바위에 시를 지어 남겼는데, 그곳의 사람들이 돌에다가 새겨 정자 안에 두었다. 이때 아버지 판서공(判書公)이 이미 연로하였기에 선생께서 해직을 빌어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문안 인사를 드릴 것을 청하였다. 대개 국법에 관찰사가 관할 지역을 넘어서 가는 관례가 없었기 때문에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관직을 띠고서 아버지를 찾아뵙게 하였다.
을사년(1485, 성종16) 가을에 체직되어 재차 형조 참판이 되었으나 아버지의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요청하여 경주(慶州) 부윤이 되었다. 기유년(1489, 성종20) 봄에 대사헌(大司憲)의 벼슬로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차자를 올려 집에 돌아가 아버지를 봉양할 것을 빌었으나 윤허받지 못했다. 그 해 3월에 판서공의 상을 당하였다. 선생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상에 모두 삼 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신해년(1491, 성종22)에 탈상하고 판서공의 묘소 서쪽에 조그만 집을 지어 애경당(愛敬堂)이라 이름하여 부모를 사모하는 뜻을 붙였다.
얼마 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임명되자 개연(慨然)히 사문(斯文)을 흥기시키는 일로 자임하여 유생들의 재능에 따라 학업을 시켜 가르치고 면려함을 다방면으로 하니, 원근의 선비들이 풍문을 듣고 구름 같이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한 번 선생의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는 자들이 걸핏하면 백 명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임금에게 건의하여 대성전(大成殿) 곁에 향실(香室)을 건립하였고 또 존경각(尊經閣) 북쪽에 향관청(享官廳)을 세웠는데, 거기의 서문과 기문을 찬술하여 건물에 걸었다. 이때 대제학이 결원이 되어 임금께서 그 대신할 인물을 찾는 데 어려워하며 자리를 비워 둔 지 여러 달이 되었는데, 선생이 조정에서의 인망을 한 몸에 받았다.
임자년(1492, 성종23) 봄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급하였다. 그리고 지중추부사로서 홍문관 대제학과 예문관 대제학 및 성균관 지사(成均館知事)를 겸임하였다. 차자를 올려 홍문관의 학사(學士)는 나이 제한 없이 매달 제술(製述)시험을 보도록 할 것이며, 또 연소자 중에 재행(才行)이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여 윤번제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도록 청하였는데, 임금께서 윤허하였다.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전직되었고 얼마 후 이조 판서로 자리를 옮겼으나 문형(文衡)의 자리는 옛날 그대로 겸직을 유지하였다. 마침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라는 왕명이 있었는데, 선생께서 본래부터 앓고 있던 풍질(風疾)이 재발하여 면제되기를 청하니 법사(法司 사헌부)에서 왕명을 꺼리고 회피한다는 이유로 탄핵하여 파면되었다. 선생이 남산 아래에 물러나 한가하게 지냈는데 당시 친구들과 즐겁게 술을 마시며 시를 짓거나 혹은 투호놀이를 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으니, 보는 자들이 공경(公卿)을 지낸 귀인인 줄 알지 못했다.
갑인년(1494, 성종25)에 다시 벼슬하여 호조판서 겸 동지경연사와 동지춘추관사에 임명되었다. 이해 겨울에 성종이 돌아가시자 삼도감(三都監) 제조(提調)로 왕릉을 조성하는 일을 관리하고 감독하였다. 연산군 을묘년(1495, 연산군1)에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품하였다. 차자문을 올려 불교를 배척하는 유생(儒生)을 구제하였다. 여름에 명나라 사신 왕헌신(王獻臣)이 고명(誥命)을 가지고 옴에 선생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다. 왕헌신은 성격이 까다롭고 엄준하여 좀처럼 허여하지 않았으나, 선생을 보고는 흔연히 기뻐하며 본래부터 사귀던 사람과 같이 대하였다. 왕헌신은 그 뒤에 본국에 돌아가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선생의 안부를 물었다. 선생은 얼마 후 또다시 우참찬에 임명되었고 다시 대제학을 겸하였다. 조금 있다가 좌참찬에 승진되었고 겸직은 그전과 같았다.
무오년(1498, 연산군4)에 《성종실록(成宗實錄)》을 찬술하였다. 이해 여름에 사화가 일어났다. 선생이 오랫동안 문형(文衡)을 맡았기에 김일손(金馹孫)의 사초(史草)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에게 아뢰지 않았기 때문에 심문받아 좌천되었지만, 얼마 후 실록 편찬의 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형의 직책에 복귀되었다. 가을에 의금부 지사(義禁府知事)를 겸하였다. 이때 임금의 포학함이 날로 심하였는데, 대간들이 충간하였던 일로 폄직되거나 죽는 경우가 서로 줄을 이었다.
기미년(1499, 연산군5)에 선생이 상소하여 충간을 물리치는 것에 대해 논한 것이 수천언(數千言)이었으니,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이 들어보니 자신을 망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여색을 좋아하는 자는 반드시 망하고, 나라를 망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충간을 물리치는 자는 반드시 망한다고 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자신의 몸을 다스리는 것과 같습니다. 혈기가 하루라도 순환하지 않으면 몸이 위태롭고, 언로(言路)가 하루라도 통하지 않으면 나라가 위태로우니, 이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또 말하기를 “인주(人主)는 굽혀야 할 곳이 없지만 오직 대간(臺諫)에게는 굽혀야 하니 굽혀서 그의 말을 따라하여 치도(治道)가 백왕(百王)에서 높이 우뚝 뛰어나게 되면 이른바 인주의 의견을 굽히는 것은 잠시이지만 나라의 안녕은 길이 펴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인주(人主)의 사냥 놀이를 충간하였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근래에 안으로 우레와 우박으로 재앙의 기미를 보였고 밖으로 오랑캐들이 환란을 일으키니, 마땅히 상하로 임금과 신하가 서로 덕을 닦아 재앙을 막고 환란을 없애는 것에 힘써야 합니다. 사냥하여 짐승을 잡는 것을 비록 종묘(宗廟)에 제수를 받들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만, 오랑캐들에게 지금 피살되거나 사로잡히는 자는 모두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적자(赤子 백성)들입니다. 적자들이 살해되고 포로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자제(子弟 임금과 신하)들이 그것을 긍휼히 여기지 않고 도리어 사냥하여 짐승을 잡아 효도를 극진히 하고자 한다면 제사를 받는 어버이들(선왕과 선후)은 그것을 흠향하시겠습니까.”
옛날 관례에 합문(閤門)을 열어 놓고 임금이 경연강의를 들으며 강의가 끝나면 대간이 먼저 일어나 그 일을 논하고 홍문관이 그 뒤를 잇는다. 그 외에 입시(入侍)한 사람들은 반드시 임금이 돌아보며 질문하는 것을 기다리고 나서 말을 꺼내며, 말을 할 때도 매우 강하게 주장하지 않고 사체(事體)의 당연한 도리에 따라 완곡하게 말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홀로 분연(奮然)히 말하기를 “신하가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해야 하고 할 말을 다하여 기피하지 않을 따름이니, 저는 사체가 어떠한 일인지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라고 하면서 매양 입시할 때마다 반드시 오랜 시간 동안 논계(論啓)하였다.
경신년(1500, 연산군6)에 또 차자를 올려 비융사(備戎司)를 설치할 것을 청하고, 상소하여 11조항을 진술하였다. 그 1조항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인주(人主)의 일신은 만물의 으뜸이며 인주의 일심(一心)은 만화(萬化)의 근원입니다. 몸을 닦지 않고 마음을 바르게 하지 않고서 천하와 국가가 다스려지며 백관과 만민이 바르게 되는 것은 있지 않습니다. 부열(傅說)이 고종(高宗)에게 고하여 “생각하는 것을 시종일관 학문에 둔다.”라고 말하였으니, 일념을 시종토록 항상 학문에 둔다는 말입니다. 시인(詩人)이 성왕(成王)을 칭송하여 “배움이 선왕의 학문을 이어 밝혀서 광명함에 이르고자 한다.”라고 말하였으니, 학문을 계속하여 광명하게 됨을 어느 때도 중간에 끊어짐이 없게 한다는 말입니다. 전하께서는 춘추가 아직 젊고 학문을 두루 익히지 않았으니, 성현의 치심(治心)과 양성(養性)의 요체에 혹 미진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정히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는 데 오직 날이 부족할 때입니다. 고인이 말하기를 “오늘 배우지 않고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말며, 금년에 배우지 않고 내년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라고 하였으니, 무릇 학문하는 공부는 그 급함이 이와 같으니, 하물며 인군(人君)의 학문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제삼왕(二帝三王)의 마음가짐과 정치하였던 법을 스승으로 삼아 부지런히 경연(經筵)에 납시어, 하루에 다시 하루를 더하고 또 밤으로 낮을 이으며, 공부를 하다가 말다가 하는 것이 없어서 누적되어 몇 년이 지나면 자연 성학(聖學)이 더욱 높아지고 치도(治道)가 더욱 융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 2조항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처음이 있지 않음이 없으나 능히 마침이 있기는 드물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인정(人情)의 상도(常道)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천하의 일에 그 시작을 잘한 사람은 그 마침도 잘합니다. 그 시작은 있고 그 마침이 없는 경우는 있지만, 그 시작이 없고 그 마침이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시작을 신중히 하는 것을 중시하였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잘 마무리하는 경계를 거울삼고 시작을 삼가는 도를 돈독히 하여, 일상생활에서 현명한 사대부를 접하는 시간은 많게 하고 환관궁첩(宦官宮妾)과 가까이 지내는 시간은 적게 하여, 경(敬)을 처소로 삼아서 감히 안일하고 나태하지 않아 항상 적국(敵國)과 외환(外患)이 장차 앞에 이를 것 같이 한다면, 자손만세토록 뽕나무 밑동에 매어 놓은 듯 견고하고 반석(盤石)처럼 안정되게 하는 방법이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 외에 언로를 넓히고[廣言路], 좋아하며 숭상하는 취미를 신중히 하며[愼好尙], 상벌을 명백히 밝히고[明賞罰], 병사의 정원을 걱정하며[憂兵額], 수령을 잘 선발하고[擇守令], 사신의 행차를 점검하며[檢使行], 군병에게 휴식하는 제도를 만들고[休軍兵], 영선을 정지하는[停營繕] 것 등과 같은 여러 조항은 모두 궁궐의 비사(秘事)에 관련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반복하여 풍간함에 구구절절이 간절하고 곧았다. 임금이 불평스러운 마음이 쌓인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이에 이르러 크게 성내었다. 그때 마침 선생이 간간이 사사로운 마음을 행하는 것이 있다고 무고하는 자가 있었다. 임금이 즉시 그 일을 의금부에 내려서 조사하게 하고 인하여 경연관과 대제학 그리고 의정부 좌참찬 등의 관직을 빼앗고 산직(散職)에 좌천시켰다. 홍문관에서 계장을 올려 “과실은 미미한데 벌은 과중하니 중신(重臣)을 대우하는 예가 아닙니다. 하물며 문형의 임무는 아무 사람이나 차지하기에 마땅한 자리가 아니니, 원래 관직에 복귀하도록 청합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더욱 노하였다.
계해년(1503, 연산군9)에 외직으로 나가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되었다. 내폐인(內嬖人 임금에게 총애받는 여인)이 수차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으로 선생에게 청탁하였지만 선생은 허락하지 않았다. 드디어 위에서 참소의 죄로 얽어매고 또 다른 일로 없는 죄를 만들어 내어 악지(惡地)를 가려서 경원(慶源)에 유배를 보냈다. 선생이 집안 식구들과 영결하여 말하기를 “내가 함창(咸昌)의 한 농부로 경상(卿相)의 지위에 올랐으니 성공한 것도 나로부터 말미암았고 실패한 것도 나로 말미암았으니 또한 다시 무엇을 한하리오.” 하고는 기쁜 얼굴로 귀양길에 올랐다.
조금 뒤에 다시 무오당인(戊午黨人)에 대하여 죄를 더하는 논의가 있게 되자, 선생을 경옥(京獄)으로 잡아 올리게 하였는데 행차가 단천(端川)에 이르자 왕명을 받든 관원이 말을 타고 달려와 한 장의 공문서를 주었다. 공이 개봉하여 보고는 조용히 교수형을 받아 죽었으니, 그날은 홍치(弘治) 갑자년(1504, 연산군10) 6월 22일이었다. 이때 선생의 아들들은 모두 해도(海島)에 귀양을 갔기에 오직 몇 명의 종들이 선생을 그곳에 간략하게 장례 치렀다. 중종이 반정하자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증직시켰고 특별히 부의와 제사를 내렸으며, 태상시(太常寺)에서 문광(文匡)이란 시호를 내리도록 논의하였다. 선생의 아들들도 모두 방면(放免)되었기에 드디어 선생의 널을 받들고 고향으로 돌아와 판서공(判書公) 묘소 아래 해좌(亥坐) 언덕에 장례를 지낼 수 있었다.
오호라! 선생은 홍의(弘毅)하고 독실(篤實)한 자질에다가 해박하고 오랜 기간의 공부로 인하여 평소 한가하게 거처할 때 반드시 옷깃을 정돈하고 바른 자세로 앉았기에 엄연하기가 마치 산이 우뚝 솟은 것 같았다. 항상 경전의 가르침에 시선이 떠나지 않아 밤에도 낮을 이어서 책을 보았다. 평소 공부한 것은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제거하는 데 더욱 힘을 쏟았기에 확고한 태도로 외물에 흔들리지 않았다.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뜻을 혹 잠시도 느슨하게 한 적이 없었다. 덕을 충양(充養)함을 이미 오래함에 영화(英華)가 밖으로 저절로 드러나 깊고 깊게 그 학문이 심오하였으며 향기롭고 향기롭게 그 도덕이 빛났다. 발현하여 문장이 되고 드러나서 업적이 되었다. 바야흐로 성종의 지우(知遇)를 입어 중앙직과 지방직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논의하고 건백(建白)하며 실행하고 행동함이 정대하고 광명하였다.
항상 ‘제왕(帝王)의 학문은 무엇을 먼저 하고 뒤에 할 것인가를 아는 데 있으니, 몸과 마음에 근본하여 정치를 하는 데 적용할 것으로 이와 같이 할 따름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전후로 진술하여 경계한 것이 이것을 반복하고 강조하여 반드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시무(時務)를 처리하고자 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대개 요순(堯舜)의 임금과 요순의 백성으로 만드는 책임을 자임하였다. 비록 연산군 같은 음학(淫虐)한 군주라 할지라도 우리 임금을 구제불능의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반드시 허물이 없는 지경에 들여놓으며 도리에 당면하도록 유도하고자 하였다. 선생이 계옥(啓沃)하고 진선폐사(陳善閉邪)하기를 마치 명철한 군주와 의로운 임금을 섬기는 자가 하는 것 같이 함이 있었고, 도거(刀鉅)와 정확(鼎鑊)이 앞에 있는 것을 염두에 둔 적이 없었다. 이것은 선생의 성대한 충애(忠愛)의 뜻과 지성측달(至誠惻怛)의 마음이 실제로 평소 수양한 심오함과 덕을 많이 쌓은 것에 근본하여, 순수(純粹)하고 백직(白直)함이 도의(道義)에서 흘러나오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선생의 학문의 높은 조예를 여기서 더욱 볼 수 있다. 어찌 다만 바른 논의를 견지하여 임금 앞에서 직간(直諫)하며 의리를 쟁집(爭執)하다가 귀양 가서 죽는 화를 당하여 큰 절의가 되는 것에 그치겠는가.
선생은 김점필재(金佔畢齋), 조매계(曺梅溪), 성용재(成慵齋)와 도의(道義)의 교제를 맺어 당시 사군자(四君子)로 일컬어졌다. 일찍이 성현(成俔)ㆍ권건(權健)과 함께 왕명을 받들어 《역대명감(歷代明鑑)》을 찬술하여 서문(序文)과 함께 올렸는데, 큰 요체는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함을 주로 하여 치도(治道)에 도움이 되게 한 것이었다. 호부 낭중(戶部郎中) 기순(祈順)이 조서를 받들고 우리나라에 왔을 때 서 문충공(徐文忠公)과 서로 창수하였는데, 기순이 운자(韻字)가 많은 시를 지어 문충공을 궁지에 몰고자 하여 〈등루부(登樓賦)〉 60여 운의 시를 지었다. 이때 선생이 문충공을 대신하여 즉시 차운하여 지으니, 기순이 한참 동안 칭찬하였다. 이에 세상에서 비문과 서ㆍ발문(序跋文)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모두 선생의 문하에 돌아가, 한 편이라도 받으면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선생에 있어서 여사(餘事)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었다. 나의 선조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이 일찍이 선생의 유집에 서문을 써서 “성종의 유명한 경상(卿相)이 되기는 쉬웠고 폐조(廢朝 연산군)의 직신(直臣)이 되기는 어려웠네. 보불(黼黻)과 같은 문장을 짓기는 쉬웠고 박실(樸實)한 충간의 말을 하기는 어려웠네.”라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백세의 정론(定論)이다. 선생이 어렵게 여겼던 것은 도덕에 한결같이 근본하는 것이었으니 또한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선생은 어버이를 섬김에 사랑과 공경이 모두 지극하여 부모님의 뜻을 잘 이어받아 따르며 마음을 기쁘게 해 드렸다.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림과 맛있는 음식을 마련함을 곡진히 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상례에 슬픔을 극진히 하고 제사에 정성을 지극히 하여 혹시라도 유감이 없게 하였다. 형제에게 돈독하여 함께 우애롭게 지냄에 수족과 같이 여겼다. 궁핍하여 귀의할 데가 없는 자매의 자식 즉 생질들에게 집을 지어 주어 거처하게 하고, 성장하여서는 혼례를 시켜 주었다.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어서 문정(門庭)이 엄숙하였다. 성품이 화평하면서도 포용성이 있어 현명하고 불초한 사람 관계없이 만남에 매우 정성스러웠다. 그러나 혹 의리가 아닌 것으로 요구하는 데 이르면 절교하고 돌아보지 않았다.
선생의 부인 정경부인(貞敬夫人)은 상산 김씨(商山金氏)로 낙성군(洛城君) 김선치(金先致)의 후손이며 사정(司正)을 지낸 김숙정(金淑貞)의 따님이다. 현명하면서도 부도(婦道)가 있었고 선생의 배필이 되어 덕에 어긋남이 없었다. 갑자년(1504, 연산군10) 4월에 죽었다. 5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언필(彥弼)은 시를 잘 짓는 명성이 있었으나 요절하여 후사가 없다. 둘째 언승(彥昇)은 현감을 지냈으며 두 아들 복창(復昌)과 복명(復明)은 기유년의 변란에 모두 원통하게 죽었으나 신원되었다. 셋째 언방(彥邦)은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를 지냈는데, 두 아들을 두었으니 완(琬)은 장사랑(將仕郞)을 지냈고 염(琰)은 요절하였다. 넷째 언충(彥忠)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지냈으며 호는 우암(寓庵)인데, 세 아들을 두었으나 모두 요절하였다. 다섯째 언국(彥國)은 참봉(參奉)을 지냈는데, 외아들 경삼(景參)은 음직으로 사과(司果)에 보임되었으니 곧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다. 선생의 두 딸은 봉사(奉事)를 지낸 고극형(高克亨)과 참봉(參奉)을 지낸 유희청(柳喜淸)에게 각각 시집갔다. 경삼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덕록(德祿)은 음직으로 사정(司正)에 보임되었으며 둘째 덕희(德禧)는 음직으로 사용(司勇)에 보임되었다. 사정(司正) 덕록의 아들은 호(鎬)로 대사간(大司諫)이 되었고, 대사간 호의 아들 여하(汝河)는 사간(司諫)을 지냈으며 부제학(副提學)에 증직되었다. 여하의 아들 상문(相文)은 참봉을 지냈고 상민(相民)은 익위사(翊衛司)를 지냈으며 상훈(相勛)은 통덕랑을 지냈다. 사용을 지낸 덕희의 아들로 예약(禮約)은 사용(司勇)을 지냈고 수약(守約)은 장사랑(將仕郞)을 지냈으며 호약(好約)은 찰방(察訪)을 지냈다. 예약의 아들은 여량(汝量)이고 수약의 아들은 하량(河量)으로 학행(學行)이 있었다. 호약의 아들은 준량(浚量)이다. 여량의 아들은 극기(克己)이고 하량의 아들은 극가(克家)이며 준량의 아들은 극인(克仁)이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만력(萬曆) 무자년(1588, 선조21)에 사림들이 임호서원(臨湖書院)을 건립하여 선생을 제향하였다. 지금 서원의 유림들이 선생의 행장이 아직도 없는 것으로 나에게 그 일을 부탁하였다. 스스로 생각해 보니 나는 늦은 시기에 태어난 소자(小子)로 어찌 감히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재촉함이 매우 간절하고 또 내가 선생의 외손에 해당되기에 의리상 또한 사양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드디어 가승(家乘)과 국사(國史)와 그리고 비명(碑銘)에 실려 있는 것을 두루 채록하여 삼가 거친 말로 위와 같이 서술한다. 비록 선생의 성대한 덕의 만분의 일도 천양하기에 부족하지만, 구구한 저의 경모하는 사사로운 마음을 붙일 수 있다면 혹 저의 바람에 가까울 것이다.
行狀 立齋鄭宗魯撰
先生諱貴達。字兼善。姓洪氏。其先中國人也。唐初。有來居于南陽者。遂爲東韓大姓。其後散居諸處。而在缶溪者。卽先生貫也。麗有諱鸞。始著顯。至內侍史諱文永。移居尙州。子諱淳。司宰監。子諱得禹。贈天官亞卿。子諱孝孫。贈夏官卿。配。副司直安康盧緝之女。贈貞夫人。是爲先生考若妣。而以先生貴。推榮焉。正統戊午。先生生於咸昌羊積里。幼有異質。聰明穎秀。旣入學。自力不怠。家無書。從人借讀。必成誦乃還之。年十二。聞天子北巡。慨然流涕曰。天下倒懸矣。識者咸異之。嘗從鄕師受魯論。儼然端坐。潛心求道。要必有諸己。甘鹽虀。窮日夜而不倦。旣淹貫諸子。爲文章。優游閎肆。以適意爲宗。己卯。解國子。辛巳。對親策登第。主司得其券。喜曰。他日傳吾家衣鉢者必此人也。徐文忠居正亦推以主文手。初試三館職。歷藝文館奉敎,侍講院說書。時命才兼文武者爲宣傳官。先生膺焉。文兼之職。昉於此。丁亥北關之役。先生佐元帥許忠貞琮。協籌整伍。功爲多。事平。超拜水部郞。兼藝文應敎。是選也。惟將典文衡者膺之。轉藝文校理。兼帶如故。遷司憲府掌令。言事切直。一時疏箚。皆出先生手。遞授成均館司藝。銓部擬外授。徐文忠啓洪某宜文翰職。不可出。特授藝文典翰。兼弘文典翰。嘗筵侍。請於燕閒時夜對講義。以爲永規。上嘉納焉。經席夜對。蓋自先生始也。上將幸松都。時相請以女樂隨。先生入侍。極言不可。上愕然改容曰。微爾言。幾乎失矣。卽命停之。後於正殿禮宴。亦命勿用女樂。以深有悟於先生言也。俄陞直提學。擢承政院都承旨。己亥秋。觀察湖西。以事遞。尋特授嘉善階。佐貳秋曹。移拜漢城右尹。時先生有第在南山下。就傍皐築一亭。扁以虛白。而自號涵虛子。每公退。幅巾藜杖。嘯詠其中。蕭然若遺世者。辛丑夏。奉使賀千秋節。先是使行之過遼陽也。站唯給一日資。雖病淹雨滯。絶不復餽。賓旅坐窘甚。先生與書狀官申從濩訴禮部。得奏可。自後進朝者永賴焉。還到龍灣。聞貞夫人喪。奔赴。甲辰。除天官亞卿。進階嘉靖。出按關東。興學校。恤軍民。公務之暇。遊三日浦四仙亭。有留詩于石。邑人爲刻。置于亭上。時判書公已老。先生上章請解職歸覲。蓋以國法。方伯無越封例故也。上特命帶職而覲。乙巳秋。遞。再貳秋曹。丙午。爲便養乞外。尹慶州。己酉春。以大司憲召還。上箚乞歸養。不允。三月。丁判書公憂。前後喪。皆廬墓終三年。辛亥。服除。構小屋於判書公墓西。名曰愛敬堂。以寓慕父母意。尋拜成均館大司成。慨然以興起斯文自任。因材命業。訓勵多方。遠邇韋布。聞風雲集。願一經指授者動以百數。建白立香室于聖殿傍。又立享官廳于尊經閣之北。而撰序記以揭之。時大提學缺。上難其代。虛位數月。朝望咸薦於先生。壬子春。進階資憲。兼兩館大提學知成均館事。上箚請弘文館學士勿苟年限。令製月課。且選其年少有才行者。分番賜暇讀書。上從之。轉議政府右參贊。尋遷天官卿。兼帶文衡如故。適有朝京之命。先生發素患風疾。乞兔。法司以憚避劾罷之。先生退閒於南山下。與一時朋舊歡飮賦詩。或投壺以爲樂。見者不知其爲黃閣貴也。甲寅。起拜地部卿。兼同知經筵,知春秋館事。是年冬。成廟禮陟。以三都監提調。管護玄宮事。燕山乙卯。增秩正憲。上箚救斥佛儒生。夏。王行人獻臣來錫命。先生爲遠接使。王性峭峻。少許可。見先生。欣然若素交。其後遇東人。必問先生起居。已而。又入政府。拜右參贊。復兼大提學。俄陞左參贊。兼帶如故。戊午。撰成宗實錄。夏。史禍起。以先生久典文衡。見金馹孫史草。而不爲啓聞。被勘左遷。尋以實錄未畢。復文衡職。秋。兼知義禁府事。時主虐日甚。臺諫以言事貶戮者相繼。己未。先生上疏論拒諫累千言。其略曰。臣聞亡身之事非一。而好色者必亡。亡國之事非一。而拒諫者必亡。治國猶治身也。血氣一日不運則身危。言路一日不通則國殆。此必然之理也。又曰。人主無所於屈。惟屈於臺諫。屈而從其言。使治道高出百王。則所謂暫屈而求伸也。又諫其畋遊曰。近者內則雷雹示災。外則戎狄搆患。宜上下交修。以弭災消患爲務。獵獲雖曰奉宗廟。今之被殺擄者。皆先王先后之赤子也。赤子被殺擄。而子弟不之恤。顧欲以獵獲致孝。則親其享之乎。舊例。開閤受講。講畢。臺諫先起論事。弘文館繼之。自餘入侍者。必待顧問乃言。言之不甚力。諉以事體當然。先生獨奮然曰。人臣有懷必達。盡言無諱而已。吾不知事體爲何物。每入侍。必移晷論啓。庚申。又上箚請設備戎司。疏陳十一條。其一略曰。人主一身。萬物之宗。人主一心。萬化之原。未有心不正身不修。而天下國家之理。百官萬民之正者也。傅說之告高宗曰。念終始。典于學。言一念終始。常在於學也。詩人之頌成王曰。學有緝煕于光明。言繼續而光明之。無時間斷也。殿下春秋尙少。學問未遍。其於聖賢治心養性之要。或有所未至。此正日新又新。惟日不足之時也。古人云。勿謂今日不學而有來日。勿謂今年不學而有來年。凡爲學工夫。其急也如此。況人君之學乎。願殿下以二帝三王存心出治之法爲師。勤御經筵。日復一日。繼之以夜。無所作輟。積之以年。則自然聖學益高。治道益隆矣。其二略曰。靡不有初。鮮克有終。此人情之常也。雖然。天下之事。其始善者其終亦善。有其始而無其終者有矣。未有無其始而有其終者也。故古之人。重謹始也。願殿下鑑善終之戒。敦謹始之道。日用之間。接賢士大夫之時多。親宦官宮妾之時少。敬以作所。無敢豫怠。常若敵國外患將至于前。則子孫萬世。苞桑之固。盤石之安。其道在此。其餘若廣言路。愼好尙。明賞罰。憂兵額。擇守令。檢使行。休軍兵。停營繕諸條。皆關宮禁祕事。而反覆開諷。言言切直。主積不平已久。至是大怒。會有告先生簡涉行私者。主卽下其事。因奪經筵大提學參贊等官。左授散職。弘文館啓過微罰重。非所以待大臣。況文衡之任。非人人所宜據。請復之。主愈怒。癸亥。出爲京畿監司。有內嬖家數以非理干請。先生不聽。遂搆讒於上。又以他事羅織。擇惡地。流于慶源。先生與家人訣曰。我以咸昌一田卒。致位卿相。成亦自我。敗亦自我。亦復何恨。怡然就道。旣而。有戊午黨人加罪之議。令建赴京獄。行到端川。承命官馳至。授一策書。先生開覽從容。神色不亂。遂遇害。實弘治甲子六月二十二日也。時先生諸子俱配海島。唯僮僕數人。稿葬其地。及中廟改玉。贈左贊成。特致賻祭。大常諡曰文匡。諸子亦蒙放。遂得扶櫬還鄕。葬于判書公墓下子坐之原。嗚乎。先生以穎悟篤實之資。加之以講明踐履之工。閒居燕處。必整襟危坐。儼若山峙。常目典訓。夜以繼晝。而平生用力。尤在於克祛已私。確然不以外物動心。敬天畏人之意。無時或弛。充養旣久。英華自著。淵淵乎其學問之博也。郁郁乎其道德之光也。發而爲文章。展而爲事業。方其際遇成廟。出入中外。論建施爲。正大光明。常謂帝王之學。在於知所先後。而本之於身心。施之於有政。如斯而已。故前後告戒。未嘗不反覆於斯。而必欲格君心。措時務。蓋以堯舜君民之責自任。雖如燕山淫虐之主。未嘗以爲吾君不能。而必欲納之於無過。引之以當道。其所以啓沃陳閉者。有如事明君誼辟者之爲。曾不知刀鋸鼎鑊之在前也。是其藹然忠愛之意。至誠惻怛之心。實本於平日所養之深。所積之厚。純粹白直。無非從道義中流出來。而先生造詣之極。於此尤可見矣。豈特持正論。面折廷爭。以取竄殛之禍。爲其大節而已哉。先生與金文簡,曹文莊,成慵齋。爲道義交。時以四君子稱。嘗與成俔,權健。承命撰歷代明鑑與序文以進。大要主勸戒以裨益治道。當祁戶部順奉詔而來也。與徐文忠相唱酬。祁欲以多窮之。作登樓賦六十餘韻。先生代文忠立次之。祁贊賞良久。世之求碑碣題識者。皆歸先生門。得一語。莫不以爲榮焉。然斯則先生之餘事也。先祖文莊公嘗序先生文集曰。爲成廟之名卿易。爲廢朝之直臣難。爲黼黻之文章易。爲樸實之諫說難。此固爲百世之定論。而若其所以難者。則其一本於道德。又安可誣也。先生事親。愛敬兼至。承順怡悅。溫淸滫瀡。靡不曲盡。而喪致哀。祭致誠。無或有憾。篤於兄弟。與之友于如手足。姊妹之子窮無歸者。館於家而嫁娵之。治家有法。門庭肅然。性和而有容。人無賢不肖。接之諄諄。至或以非義干之。截然不顧焉。配貞敬夫人商山金氏。洛城君先致之後。司正淑貞之女。賢而有婦道。配君子無違德。甲子四月卒。有五男二女。男長彥弼。有能詩聲。早殀無後。次彥昇。縣監。有二子。復明,復昌。己酉之變。俱冤死得伸。次彥邦。弘文博士。有二子。琬。將仕郞。琰。早殀。次彥忠。弘文校理。號寓庵。有三子。皆殀。次彥國。參奉。有一子。景參。蔭補司果。卽奉先生祀者也。女高克亨。奉事。柳希淸。參奉。景參有二子。長德祿。蔭補司正。次德禧。蔭補司勇。出繼將仕郞。司正子鎬。官至大司諫。子汝河。官至司諫。贈副提學。子相文。參奉。相民。翊衛。相勛。通德郞。相晉。通德郞。司勇子禮約。司勇。守約。將仕郞。好約。察訪。禮約子汝量。司勇。守約子河量。有學行。號誠齋。好約子浚量。汝量子克己。河量子克家。浚量子克寅。餘不錄。萬曆戊子。士林立臨湖書院。以先生及表藍溪,蔡懶齋,權桐溪四賢入享焉。乃者院儒以先生行狀之尙闕然。屬宗魯役焉。自惟晚生小子。何敢當是任。顧其敦迫甚切。且在外裔之末。義亦有不容辭者。遂爲之備採家乘國史與碑銘所載。謹以蕪語。就加序次如右。雖不足以闡楊盛德之萬一。然以寓夫區區景慕之私。則或庶幾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