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봉한(洪鳳漢) 1713년(숙종 39)∼1778년(정조 2). 조선 후기의 문신.
시호: 익정(翼靖) 思慮深遠曰翼 寬樂令終曰靖
사려가 깊고도 원대한 것을 익(翼)이라 하고
너그럽고 즐거워하여 제 명(命)대로 편안히 살다 죽은 것을 정(靖)이라 한다
봉호: 영풍부원군(永豊府院君)
정조 8년(1784) 시장 없이 증시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익여(翼汝), 호는 익익재(翼翼齋).
중기(重箕)의 손자로, 현보(鉉輔)의 아들이며,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장인이다.
1735년(영조 11) 생원이 되고, 음보(蔭補)로 참봉에 등용되어 세자익위사세마로 있을 때인 1743년 딸이 세자빈(惠慶宮洪氏)으로 뽑혔다.
이듬해 세마로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 계속 승진하여 다음해 어영대장에 오르고, 이어 예조참판으로 연접도감제조(延接都監提調)를 지낸 뒤, 1752년 동지경연사가 되었다.
이듬해 비변사 당상이 되어 청인(淸人)들이 애양책문(靉陽栅門) 밖에서 거주하며 개간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임진절목(臨津節目)〉을 찬진하였다.
1755년 구관당상(句管堂上)‧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이어 좌참찬에 승진하였으며, 1759년 세손사(世孫師)가 되었다.
1761년 이천보(李天輔)‧민백상(閔百祥) 등이 자살하자, 뒤를 이어 우의정에 발탁되고, 그해에 좌의정을 거쳐 판돈령부사를 지낸 뒤 영의정에 올랐다. 한때 세자문제로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좌의정으로 복직된 후, 영조의 정책에 순응하여 많은 업적을 이룩하였다.
특히, 당쟁의 폐해를 시정하고 인재를 발탁할 것 등의 시무6조(時務六條)를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고, 백골징포와 환곡작폐의 엄금, 은결(隱結)의 재조사 등을 단행하게 하여 국고를 채우고 백성의 부담을 경감하도록 하였다.
1768년 재차 영의정이 되었다.
이때에는 울릉도의 사적을 널리 조사한 내용을 책으로 엮어 그곳에 대한 영토의식을 높였다.
1771년 영중추부사로 있던 중, 반대세력의 활동에 의하여 사도세자의 아들 은신군(恩信君) 진(禛)‧은언군(恩彦君) 인(䄄)의 관작이 삭탈되고 나아가 세손(世孫: 뒤의 정조)까지 그 권위가 위협당하게 되었을 때 이를 막다가 삭직되고 청주에 부처되었으나 홍국영(洪國榮)의 기민한 수습으로 풀려나온 뒤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사도세자의 장인이며 세손(정조)의 외할아버지라는 왕실의 외척으로서 영조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의 친정 인물인 김구주(金龜柱) 세력과 권력을 다투어, 영조대 중반 이후 김구주 중심의 남당(南黨)에 대립하였던 북당(北黨)의 중심인물로 평가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 노론‧소론 대립의 여진 속에서 1762년 영조의 명령으로 세자가 폐위되고 죽음을 당할 때에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하여 후일 정적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영조가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는 등 세자에 대한 처분을 뉘우치자, 그 사건을 초래하게 한 김구주 일파를 탄핵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한편, 세자 죽음의 전말을 상세히 적은 〈수의편(垂義篇)〉을 찬술하여 반대파를 배격하는 구실로 이용하였다.
정조 연간에는 그의 행적에 대한 시비가 정파대립의 중요한 주제가 되어, 그를 공격하는가 또는 두둔하는가의 여부가 벽파(僻派)와 시파(時派)를 구분하는 한 기준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영조를 도와 조선 후기 문화부흥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는 국정 운영에 대한 주장을 정조가 친히 편찬한 《어정홍익정공주고(御定洪翼靖公奏藁)》가 있으며, 그밖에 《정사휘감(正史彙鑑)》‧《익익재만록》 등이 있다.
고(故) 봉조하 홍봉한(洪鳳漢)에게 즉시 시호(諡號) 하사의 은전을 거행하라는 하교
아, 천리와 인정은 실제로는 하나이다. 그래서 천리에 없는 것은 인정으로 용서할 수 있고 인정에 온당한 것은 곧 천리와 부합된다. 세상에 어찌 천리를 벗어나는 인정이 있겠으며 또한 어찌 인정을 벗어나는 천리가 있겠는가. 내가 홍 봉조하의 일에 대해 한번 유시하고 싶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었는데, 지금 또 유시하지 않고서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아, 봉조하가 조정에 있었을 때의 시말은 사람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이다. 대개 그 문장의 풍부함과 모책의 민첩함으로는 가령 한미한 처지에서 스스로 출세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오히려 밝은 시대에 큰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몸을 폐부(肺腑)에 의탁하여 지위가 높고 빛나게 되어서는 항상 나랏일을 자기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고 뜻을 정성스럽게 하여 부지런히 해서 우러러 선대왕께서 맡겨 주신 바에 부응하였다. 그가 건의하여 폐지하거나 새로 설치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안으로는 각사와 밖으로는 각도에서 지금까지 따라 본보기로 삼는 것이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으니, 사업을 운영하고 처리함에 칭찬할 만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만 년에는 불행한 일들을 많이 당하였는데, 자취를 의심하여 마음가짐까지 주벌하려 하고 하찮은 허물을 찾아 들추어내어 죄를 성토하려는 자들이 마침내 어지러이 일어났다. 반세기 동안 똑같은 말들을 하여 곧 공의(公議)처럼 굳어졌기 때문에 윤음에서 또한 혹 이런 말들을 따라 하면서도 머뭇거리며 뒤돌아보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사실을 세밀히 궁구해 보아도 마침내 아무런 실제적인 자취가 없었다.
김귀주(金龜柱)나 정이환(鄭履煥) 등이 전후로 상소하여 논한 것이 세 가지인데, 첫 번째는 모년(某年)의 일이다. 내가 차마 다시 제기하지 못하여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선대왕께서 손을 잡고 하교하셨던 것을 되뇌었으니 또한 다시 논변할 것이 없다. 두 번째는 인삼(人蔘)에 관한 일인데, 그 당시 도제조(都提調)가 상소하여 봉조하를 위해서 진달하여 변론하였으니, 이에 관한 말은 또한 이미 근거 없는 것이 되었다. 세 번째는 사사로이 접견했을 때 나눈 이야기에 관한 일이다. 이러이러하다는 말의 맥락은 또한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상세히 말하였으니, 어찌 따로 뜻한 바가 있던 것이겠는가. 실로 다른 뜻은 없었다. 사석에서 자연스럽게 만나 볼 즈음에는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다 말하여 언급하지 않는 바가 없었는데 너무 지나치게 우려하는 마음으로 훗날에 대한 가설적인 논의를 했던 것이다. 더구나 내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찌 궁중에서 주고받은 말이 마침내 외간에서 꼬투리로 삼을 거리가 되어 이러한 하나의 큰 죄안을 이루게 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아, 이로써 죄를 삼는다면 봉조하가 기꺼이 마음으로 복종하려 하겠는가.
홍인한(洪麟漢)의 범죄를 가지고 봉조하 집안의 누로 삼아 끊임없이 헐뜯고 있는데, 이 또한 그렇지 않은 바가 있다. 착하고 악한 사람의 구별은 동기간이라는 것에 관계되지 않으니, 예로부터 그러하였다. 논의와 취지 사이에서조차 왕왕 서로 갈라지고 괴리가 생겨 거의 아주 모르는 사람보다도 더 심한 경우가 있었다. 유인궤(劉仁軌)가 현달하자 그 동생은 승침(升沈)을 이유로 원망하였고, 조약(祖約)이 임용되자 그 형 조적(祖逖)은 품계를 어지럽힌다고 말하였다. 신법(新法)이 행해지는데 그 동생은 영당(影堂)에서 곡하였고, 경제(經制)가 새로 만들어졌는데 그 형은 가묘(家廟)에서 울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일은 이루 셀 수도 없이 많으니, 공적과 과실을 두고 어찌 형과 동생의 관계라고 하여 뒤섞어 평가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역적 홍인한은 평소 자기 형에게 공손하지도 협조적이지도 않았으니, 따로 문정(門庭)을 세웠던 정상을 놓고 누군들 그 일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모르겠는가.
그의 흉패한 버릇은 봉조하가 깊이 우려하고 몰래 가슴 아파한 일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궁(慈宮)께서도 그러하셨으니, 이는 내가 익히 듣고 익히 아는 바이다. 그런데 기강을 범하고 난역을 범함에 미쳐 의리로써 단죄하였으니, 봉조하에게 있어서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래서 병신년에 내린 돈유(敦諭)에서 이미 그 형제가 상관없는 사이라는 뜻을 보였고, 무술년에 지은 치제문(致祭文)에 안세(安世)에게 연고가 많았고 유하혜(柳下惠)가 불행했다는 구절을 적었다. 정이환(鄭履煥)이 지어 올린 토역(討逆)에 관한 반교문(頒敎文)의 어구에서 그 말이 편벽된 데서 나왔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임인년 겨울에 홍수영(洪守榮)을 녹용(錄用)하면서 또한 변론한 바가 있었다. 그러니 내가 결단코 의심스러워하지 않았음을 이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밝혀야 할 한마디 말이 있으니 봉조하는 곧 자궁의 아버지이자 나의 외조부이다. 그러니 그가 나에 대해서 어찌 터럭만큼이라도 정성이 부족할 리가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이른바 천리에는 없는 바여도 인정으로는 용서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이유로 하여 죄를 더하려 하는 것은 우리 자궁의 마음을 슬프게 할 뿐만 아니라 그 마음의 자취를 밝히지 않은 채 한갓 의심스러운 단서만을 가지고 외손자로 하여금 그 외조부를 해치게 하는 것이니, 또한 어찌 천리와 인정에 벗어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나 소자는 자궁을 믿고 살아왔는데 왕위에 오른 이래로 한 가지 일로도 우러러 위로해 드린 적이 없고 한갓 어그러지고 과격한 논의로 도리어 걱정을 끼쳐 드릴 뿐이었으니, 이것이 내가 한을 품고 우려하면서 하루도 잊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대개 자궁의 마음을 위로하여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곧 현재로서 첫 번째 도리인데, 봉조하가 온전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된 이후에야 자궁의 마음을 위로하여 기쁘게 할 수 있고 자궁의 마음이 위로되어 기뻐하시게 된 이후에야 나의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이른바 인정에 편안한 바는 곧 천리와 부합된다고 한 것이다.
아, 역적 홍인한의 일은 생각하자니 마음이 아프다. 한 부의 《명의록(明義錄)》은 밝게 백세에 드리워진 천지의 떳떳한 법과 의리로서,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는 도리가 이에 힘입어 실추되지 않았다. 그러나 홍인한은 이를 망친 괴수였으니, 가령 봉조하가 만의 하나 그 사이에서 간섭하여 문제 삼을 만한 자취가 있거나 성토할 만한 죄가 있었다면 내가 어찌 감히 사사로움을 가지고 공의를 해치며 은혜로움 때문에 의리를 덮어 버리겠는가.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지 않다. 추구한 바가 본래 달라 청탁(淸濁)이 쉽게 구별되니, 일이 백간(白簡)과는 무관하고 이름이 단서(丹書)에 실려 있지 않다. 그런데도 그의 억울함을 풀어 주기 위해 변론하는 데 대해 무슨 의구심을 가질 것이 있어서 우러러 자궁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내가 인정과 천리 사이에 참작해 헤아리고서 이렇게 하교하게 된 것이다.
이제 자궁의 마음을 위로해 드릴 방도는 분명하게 밝혀 드리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하교가 한번 내려가면 봉조하가 깨끗이 완전한 사람이 될 것이고 평소의 공적도 앞에서 논한 바와 같으니, 시호 하사의 은전을 거행하지 않을 수 없다. 홍문관으로 하여금 잘 알도록 하라.
정조대왕이 지은 홍 익정공(洪翼靖公) 봉한(鳳漢) 치제문
갑인의 해 / 甲寅之歲
정월 초하루 아침에 / 月正元朝
묘정(廟庭)에 진하(進賀)하기 위하여 / 將賀于庭
백관들이 모두 모여들었네 / 來汝百僚
이때에 자궁께서는 / 是時慈宮
수가 육순에 오르시니 / 壽躋六旬
주 나라의 외는 면면함을 노래하고 / 周瓜頌緜
요임금의 명협(蓂莢)에는 봄기운 머물렀네 / 堯莢留春
태평의 기상이 있고 / 泰平有象
길경이 무궁하니 / 吉慶无疆
많은 복을 끼쳐서 / 詒爾多福
하늘의 은혜를 입음이 성대하다네 / 荷天穰穰
아득히 내가 나게 된 근본을 생각하니 / 緬惟自出
또한 우리 공에게서 비롯했다네 / 亦粤我公
공은 성명의 시대를 만나 / 公際聖明
그 공적을 크게 떨쳤네 / 奮厥績庸
선왕이 심려로 의탁하고 / 託以心膂
친하기로는 폐부의 관계였으니 / 親則肺腑
안으로나 밖으로나 / 之內之外
화려하고도 성대하였네 / 以華以膴
성력은 철저하고 / 徹底誠力
정신은 빛났으니 / 燁如精神
갑병과 전곡에 있어 / 甲兵錢穀
맡은 일마다 능숙하게 처리하였네 / 事事經綸
손에는 사절을 쥐고 / 手持四節
발은 오영을 밟았으니 / 足遍五營
일을 맡아서 향하는 곳마다 / 投之所向
예리한 칼날을 맞이하는 듯하였네 / 如刃其迎
호조와 혜민서에 / 地部惠局
지극히 많은 폐단을 제거하니 / 弊去蝟毛
국가의 재용(財用)이 넉넉해져서 / 盈盈坻京
백성들이 또한 수고롭지 않았도다 / 民亦不勞
십 년 동안 균축(勻軸)을 잡아 / 十載秉軸
큰 내를 건네주는 배와 노가 되어 / 巨川舟楫
묘당에서 제시한 정책을 모아 편집하니 / 彙輯廟謨
글이 책 상자에 넘쳐났네 / 動溢箱篋
가만히 역대의 재상을 헤아려 봐도 / 默數宰輔
손가락으로 어찌 두 사람을 꼽을 수 있으리오 / 指豈僂貳
아, 복록의 성대함은 / 猗歟福履
문의공(文懿公)으로부터 비롯하였네 / 肇自文懿
한 나라 만석군(萬石君)에 견줄 수 있고 / 比漢萬石
당 나라 곽 영공(郭令公)에 비기겠으니 / 擬唐郭令
선을 쌓음의 넉넉함은 / 善積有餘
공에게서 가장 성대하였네 / 於公爲盛
공의 연세가 지금 / 公齡于今
살아 계신다면 여든하나인데 / 九九箕疇
아들 손자 증손이 / 若子孫曾
그 수가 공의 연세와 서로 같다네 / 厥數相侔
세월의 흐름과 함께 사람도 불어나 / 歲與人增
천으로 만으로 헤아려 / 計以萬千
나라에 있어서는 진진하고 / 在國振振
가정에 있어서는 면면하리라 / 在家緜緜
공이 이러한 복을 가지고 / 公將是福
우리 자궁을 도우심에 / 佑我慈宮
자궁께서 이 복을 두시어 / 慈宮有之
이에 나의 몸에 미쳤다네 / 爰及予躬
전성의 광채가 빛남에 / 前星耀彩
남극이 빛을 더하여 / 南極添光
치성하고 번창하게 하여 / 俾熾而昌
천황이 성하게 흐르도록 하소서 / 滾滾天潢
정경부인의 곤범은 / 貞敬梱範
곧 공의 어진 배필이니 / 寔公賢配
예천과 영지가 / 醴泉靈芝
어찌 근원이 깊지 않으리오 / 遐不深漑
이에 좋은 날을 택하여 / 爲選良辰
함께 향기로운 제사를 드리니 / 同奠苾芬
자궁의 생각을 / 慈宮之思
소자의 글로 적었나이다 / 小子之文
일이 우연치 않으니 / 事不偶爾
어찌 내년을 기다리리오 / 奚待明年
공은 돌아가셨어도 복은 남았으니 / 公歸福留
그 이름이 냇물과 같으리라 / 其至如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