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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호(諡號) 2.

*한치형(韓致亨)1434년(세종 16)∼1502년(연산군 8).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24.02.23|조회수44 목록 댓글 0

*한치형(韓致亨)1434년(세종 16)∼1502년(연산군 8). 조선 초기의 문신.

시호: 질경(質景) 忠正無邪曰質, 由義而濟曰景 연산군 8년(1802) 증시

충성스럽고 정직하여 간사함이 없어서 질(質)이라 했고

의리에 의하여 성사하여서 경(景)이라 했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통지(通之).

아버지는 절(𥑇)이며, 어머니는 중군총제(中軍摠制) 조서(趙敍)의 딸이다.

1451년(문종 1) 18세로 군직에 음보(蔭補)된 뒤 감찰‧장령‧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을 거쳐, 1467년(세조 13) 장례원판결사가 되었다. 같은해 5월 좌부승지에 오르고 이어 우승지‧좌승지를 거쳐, 그해 12월 이조참판에 특승되었다.

1468년 예종 즉위 직후에 함길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다시 호조참판이 되었으며, 성종이 즉위한 뒤,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책록되고 청성군(淸城君)에 봉하여졌으며, 형조판서에 승진되었다. 그뒤 개성부유수‧경기도관찰사‧한성부판윤, 호조와 병조의 판서를 거쳐, 1481년에 좌참찬에 올랐다. 연산군 즉위 직후 좌찬성으로 대사헌을 겸하였고, 우의정을 역임한 뒤 1498년(연산군 4)에는 좌의정으로서 유자광(柳子光)‧노사신(盧思愼) 등과 함께 무오사화에 깊이 관여하였다. 1500년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죽은 뒤인 1504년 갑자사화 때, 일찍이 그가 연산군의 생모인 윤비(尹妃)를 폐출시킨 모의에 가담하였다 하여 윤필상(尹弼商)‧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부관참시되고 일가가 몰살되었으며, 중종반정 후 신원되었다.

그의 고모가 명나라 성조(成祖)의 비(妃)가 된 관계로 성종 때에 주청사(奏請使)‧성절사(聖節使)‧사은사(謝恩使) 등으로 여러 차례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황제의 은총을 받았다.

 

議政府領議政淸城府院君韓公墓誌銘 홍귀달(洪貴達) 찬

 

公諱[致亨]。字某。淸州人。其上世。久顯于高麗。遠祖文忠公諱[康]。忠烈朝贊成事。玄祖思肅公諱[偓]。忠宣朝佐理功臣。高祖諱[方信]。恭愍朝政堂文學。諸公事業。具于史。曾祖諱[寧]。贈兵曹判書。祖諱[永矴]。贈議政府領議政。考諱[]。贈視公爵。妣中軍摠制[趙敍]之女。公生十八而仕。歷事世廟,睿廟,成廟及我上。夙夜凡五十二年。入柏府。爲監察掌令大司憲。廟綱振。上銀臺。爲左副,左右承旨。出納允。典選而用捨公。度支而財用足。宣化兩道。棠陰有遺愛。勒勳鍾鼎。獜閣煥丹靑。判京兆。歷司寇,司馬。姦猾息而軍政擧。典樞密兼摠府。倚任重而人望巍。歷三台摠百揆。心膂一人。柱石明堂。民方仰其庇庥。一疾彌留。下能起視事者累月。一日。家人夢見有黑衣數十。肩綵輿從天下。前後威儀甚盛。公忽乘輿。騰空而去。寤而侯已卒。實弘治壬戌十月壬寅也。於是乎公年六十九矣。是年十二月丙午。禮葬于楊州西山梨洞之原。遵國典也。公有族姑韓氏。嘗入朝。爲先帝宮人。被累朝眷遇。有聖旨要族姓來。以故韓族屢入京。成化中。公充奏請使。奏對明審。擧措中禮。皇帝特賜犀帶一腰以還。滿朝歆嘆。以爲東人受天子寵脊。古今一人耳。公天稟異常。通明礭實。慮事周。知幾神。筮仕來。踐歷多而無一失。及爲相。凡國家事。晝思夜度。列書貼諸璧。坐臥寓目。有得於心。輒啓請施行。故自在相位。廢無不擧。利無不興。民甚便之。公先娶讓寧大君[禔]之女。有一女。適司圃別座[林有▓]。生四男二女。男曰[世昌,世芳世蕡世]。女幼。繼室以府使[禹埏]女。無嗣。有孼子曰獅子。旣窆。貴達以嘗忝末僚受知深。故誌且銘。光昌,宣陵。相繼治隆。我聖繩之。以撫大東。際遇列聖。代有英雄。憲憲我公。歷事盡忠。安危休戚。帶礪始終屹立廟堂。犀帶有赫。是天子賜。萬人以目。庶幾遐齡。民受其祿。綵輿下迎。天奪何遠。魂無不之。魄此之宅。千秋萬歲。高岸深谷。有欲徵之。此其遺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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