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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호(諡號) 2.

*이세화(李世華) 1630년(인조 8)∼1701년(숙종 27). 조선 후기의 문신. 시호: 충숙(忠肅)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23.09.08|조회수20 목록 댓글 0

*이세화(李世華) 1630년(인조 8)∼1701년(숙종 27). 조선 후기의 문신.

시호: 충숙(忠肅) 危身奉上曰忠。執心決斷曰肅。숙종 27년(1701) 증시

자신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드는 것을 충(忠)이라하고,

마음을 굳게 가져 결단성 있는 것을 숙(肅)이라한다.

본관은 부평(富平). 자는 군실(君實), 호는 쌍백당(雙栢堂)·칠정(七井).

병조정랑 계록(繼祿)의 증손으로, 희재(熙載)의 아들. 생부는 이재(以載).

병조정랑 이계록(李繼祿)의 증손으로, 이이재(李以載)의 아들이다. 큰아버지 이희재(李熙載)의 양자로 들어갔다.

1651년(효종 2) 상상(上庠: 진사를 가리킴.)에 올랐으며, 165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정언‧장령 등을 거쳐 황해도‧평안도‧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689년(숙종 15) 경상도관찰사를 지내고 서호(西湖)의 향리로 돌아갔다. 그해 인현왕후(仁顯王后)폐비설을 듣고 반대소를 올렸다. 소에 판서 오두인(吳斗寅)과 그의 이름이 전면에 올라 있는지라, 숙종은 분노하여 밤중에 친국하였다.

그는 국문에서 “국사로 인해 죽기를 원했는데 이제 그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고 하고, “다만, 신의 죽음이 성덕에 누를 끼칠까 두려우며, 신에게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다 하더라도 옥리에게 맡겨 다스리게 하면 될 것을 밤새도록 친국하니 옥체를 상할까 두렵다.”고 형간(刑諫)하였다.

다음날 정주로 유배가다 풀려나와 파산(坡山)의 선영 아래로 돌아왔다. 갑술환국 후 1694년 4월 대사간‧호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고사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인현왕후복위도감제조로 차정한다는 말을 듣고 곧 상경하였다.

그뒤 의금부사 겸 지경연사‧세자빈객에 오르고,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6조 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저서로는 《쌍백당집》이 있다. 풍계(豊溪)의 충렬사(忠烈祠)에 향사되었다

 

정조대왕이 지은 충숙공(忠肅公) 이세화(李世華) 치제문

 

빛나고 빛나는 고풍이여 / 炳炳高風

만부에 특출하도다 / 萬夫之特

절의는 고송과 같았으니 / 節如孤松

쌍백이란 당호(堂號)가 마땅하네 / 堂宜雙柏

윤강(倫綱)을 일으켜 세운 대의는 / 扶倫大義

나약한 사람을 서게 하였네 / 懦夫其立

한 서원에서 제향을 누리니 / 一院俎豆

백대에 추앙하여 공경하네 / 百世矜式

관원을 보내어 대신 잔을 드리게 하니 / 伻官替酹

직절(直節)을 숭상한 덕에 보답함일세 / 酬以尙直

 

이조 판서 충숙(忠肅) 이공(李公) 신도비명 갑신년(1704, 숙종 30)

 

금상(今上) 15년(1689) 기사 4월에 쌍백당(雙栢堂) 이공 세화(李公世華) 군실(君實)이 영남 관찰사의 부절(符節)을 반납하고 서호(西湖)의 전사(田舍)로 돌아와 있었는데, 곤전(坤殿 인현왕후 )이 장차 사가로 물러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놀라 일어나 대궐에 나아갔다.

공은 처음에 홀로 상소를 올리려 하였는데, 파직당하거나 한산직(閑散職)에 있는 조사(朝士)들이 평시서(平市署)에 함께 모였는데 판서 오두인(吳斗寅) 이하 온 자가 80여 명이나 된다는 말을 듣고는, 공이 마침내 제공(諸公)들과 상의하여 상소문을 초하고 응교(應敎) 박태보(朴泰輔)가 붓을 잡고 상소문을 써서 올렸으나 저녁이 되도록 비답(批答)이 내리지 않았다. 이에 공은 말씀하기를 “이 모임도 한 조정이니, 한 번 상소하고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청원을 허락 받기를 기약해야 한다.” 하였다.

밤 2경이 될 무렵 대궐 안에 불빛이 대낮처럼 밝았는데, 전달하여 고함치는 소리가 땅을 울리더니, 상이 대궐 뜰에 친국(親鞫)을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오공(吳公)과 공은 이름이 상소문의 앞 열에 있고 박군은 상소문을 썼다 하여 모두 나아가 국문을 받았다. 상이 ‘상소문을 지은 자가 누구인가?’ 하고 물으시자, 공은 아뢰기를 “박태보는 오직 붓을 잡았을 뿐이요, 내용을 초하고 말을 만든 것은 실로 신들이 했습니다.” 하였다. 상은 더욱 진노하여 고문을 가해서 거의 죽게 되었으나 공은 큰 소리로 아뢰기를 “신이 평소 국사를 위하여 죽고자 하였는데 이제야 소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다만 혹시라도 성상의 덕에 누가 될까 두려우며, 또 신의 죄가 비록 용서하기 어려우나 옥리에게 맡겨 죄를 다스리면 충분할 터인데 밤새도록 친히 국문하시니, 어찌 성상의 옥체를 상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듣는 자들은 공을 일러 형벌로 간하였다 하였다.

다음날 상은 정주(定州)로 유배할 것을 명하였다. 공이 감옥을 나가자, 사서인(士庶人)들이 길을 메우고는 다투어 공의 얼굴을 한번 보려 하였다. 저녁에 도성문 밖에서 유숙하였는데, 사대부와 선비들은 평소 아는 이와 알지 못하는 이를 막론하고 다투어 와서 문안하였다. 들것에 실려 7일 만에 금천(金川)에 이르렀는데, 병이 더욱 위독하여 말을 하지 못하였다. 조금 소생하기를 기다려 30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유배지에 도착하였다. 공은 얼마 안 있다가 은혜를 입고 석방되어 파산(坡山)에 있는 선영의 아래로 돌아와 일생을 마칠 계획을 하였다.

갑술년(1694) 4월 상이 크게 감동하고 깨우치시고는 공을 대사간에 임명하고 얼마 후 호조 판서로 발탁하였다. 공은 굳이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으나 곤전복위도감 제조(坤殿復位都監提調)에 차임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서글퍼하며 말씀하기를 “내 곤전을 위하여 대궐에서 성상께 부르짖었으니, 죽어야 마땅하나 죽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늘날을 만나 장차 다시 책봉(冊封)하는 일을 감독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길을 떠나 근교에 이르렀을 때, 또 수어사(守禦使)에 임명하는 명령이 내렸다. 서울에 들어오자, 도성 백성들은 공을 우러러보고 감탄하였으며 부로(父老)들은 혹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었다.

아, 기사년의 일은 폭풍이 불고 벼락이 치듯 갑자기 일어나서 이 사건에 저촉된 자는 부서져 가루가 되었고 이 말을 듣는 자들은 넋을 잃었다. 그러나 공이 치대(置對)한 말을 보면 스스로 한 번 죽는 것을 마음에 달게 여겨 위로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을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미 흔들리거나 굽힘이 없었고 또 과격함이 없었으며 논리가 곧고 말이 공손해서 법연(法筵)에서 군주와 조용히 대화할 때와 같이 간곡하였다. 그 당시 성상의 노여움이 다소 누그러진 것과 후일에 성상의 마음이 크게 깨달으신 것이 모두 공의 힘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으니, 공의 큰 담력과 도량, 돈독한 충성심이 진실로 종묘사직을 보호한 것이다. 어찌 다만 비분강개하여 한번 상소문을 올린 것을 가상하다고 할 뿐이겠는가.

나는 공과 일찍부터 한 조정에서 벼슬하는 기쁨이 있었으나 오히려 서로 익숙히 알지는 못했는데, 갑자년에 함께 연경에 사신으로 가서 만 리 길을 오가느라 공을 매우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갑술년 교화가 다시 펴질 적에 의정부에서 서로 주선한 것이 또한 3, 4년이었으니, 비록 내 감히 공이 나를 알아주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나는 스스로 공을 잘 안다고 생각하였다.

이제 공의 아들 도사(都事) 정진(廷晉)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찾아와서 공의 신도비문을 나에게 부탁하였고, 공의 아우 집의군(執義君) 세유(世維)가 편지로 다시 청하였다. 아, 공의 아우와 아들은 반드시 공이 남기신 뜻을 알 것이니, 그렇다면 공이 나를 아셨음을 또한 알 수 있다. 내 이에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가장을 살펴보니, 공은 관향이 부평(富平)이다. 증조 휘 계록(繼祿)은 병조 정랑으로 특별히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니, 임진왜란에 연안성(延安城)을 도와 지킨 공로 때문이었다. 조고 휘 덕순(德純)은 직산 현감(稷山縣監)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선고 휘 희재(熙載)는 장릉 참봉(長陵參奉)으로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니, 2대를 추증한 것은 공의 귀함 때문이었다. 선비는 정경부인에 추증된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복룡(伏龍)의 따님이다.

생부이신 휘 이재(以載)는 경학에 밝고 훌륭한 뜻과 행실이 있었으며 효행으로 알려졌는데, 병자호란 후에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배위 부안 김씨(扶安金氏)는 고려조 문정공(文貞公) 구(坵)의 후손이요 종성 부사(鍾城府使) 휘 치원(致遠)의 따님이다. 종성공은 광해군 때에 정언으로 입대(入對)하여 지극히 간하고는 관과 띠를 벗어놓고 나오니, 세상에서는 그의 충직한 절개를 칭찬하였다.

공은 숭정(崇禎) 경오년(1630, 인조 8)에 출생하여 15세에 백부 참봉공에게 양자갔다. 23세에 상상(上庠 성균관 )에 오르고 5년 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뽑혔으며, 전직하여 박사에 이르고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을 겸하였다. 천거로 주서(注書)에 임명되고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으며, 예조 좌랑으로 옮겼다가 병조 좌랑으로 옮겼는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오랫동안 병조를 맡게 할 것을 청하여 반년이 지나서야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 평양 판관(平壤判官)으로 나갔다가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며, 석방되어 돌아오자 김공이 수어사(守禦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민 부인(閔夫人)의 상을 당하였으며, 상복을 벗고 다시 종사관에 임명되고 병조 정랑과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다. 홍양 현감(洪陽縣監)으로 나갔는데, 현이 다시 주(州)가 되자 규례대로 목사로 승진하였다. 상이 광주 부윤(廣州府尹)을 엄히 선발할 것을 명령하였는데 가망(加望)하여 공을 제수하였다. 이에 수어사 이공 완(李公浣)은 언제나 공을 칭찬하여 나의 스승이라 하였다. 체직되자 호남(湖南)의 해방(海防)을 순무(巡撫)하도록 명하였으며, 호조 참의와 승지를 거쳤다.

이때 공은 상소하여 동춘당(同春堂) 송공(宋公)을 추삭(追削)하자는 의논은 선정(先正)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지극히 말하였으며, 또 윤휴(尹鑴)가 제멋대로 방종하고 권대재(權大載)가 군주의 비위를 맞추어 순종하는 죄를 말하였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서로 글을 올려 공을 유배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상은 다만 삭탈관직하여 축출할 것을 명하였다.

서용(敍用)된 다음 중비(中批)로 다시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승정원에서 아뢰어 체직되고 판결사(判決事)에 제수되었으나 사헌부에서 탄핵하여 체직되니, 이는 모두 지난번의 상소문 때문이었다.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나갔는데, 상은 경연에 납시어 이르기를 “이모(李某)의 재주와 기국(器局)이 충분히 한 방면을 담당할 수 있는데, 근래 번병(藩屛)의 임무에 의망(擬望)하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하니, 전조(銓曹)에서는 부득이 황해도 관찰사를 제수하였다.

경신년(1680, 숙종 6) 교화가 다시 베풀어지자, 발탁하여 평안도 관찰사로 제수하였다가 본도의 절도사(節度使)로 고쳐 임명하였으며 다시 관찰사를 제수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이 심복(心腹)과 조아(爪牙)의 임무를 맡길 만함을 알고는 연달아 양국(兩局)의 대장(大將)에 의망하였으나 사헌부에서 근거 없는 말로 공을 중상하니, 공은 연달아 상소를 올려 체직되었다.

돌아와 형조 참판에 제수되고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는데, 연경에 가는 부사(副使)로 부름을 받고 들어와 호조 참판이 되었으며, 연경에 갔다가 복명(復命)하고 전라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병으로 체직되었다. 한성부 판윤과 총관(摠管)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질병으로 사은숙배하지 않았다. 장단 부사(長湍府使)로 나갔다가 경상도 관찰사로 옮기니, 전후로 세 번 제수되었다.

공은 경상도에 부임한 다음 공주(公主) 집안의 차인(差人)에게 곤장을 쳤다가 엄한 분부가 내려 체직되어 돌아왔는데, 마침내 기사년에 상소를 올린 일이 있게 되었다. 새로 은혜를 입게 되자, 곤전(坤殿)의 책례(冊禮)가 이루어져 품계가 올라가고 말을 하사받았으며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겸하였다.

공은 절수(折受)하는 폐단과 상(賞)을 지나치게 하사하는 일을 가지고 봉사(封事)를 올려 간절히 간하였는데, 엄한 비답이 내리자, 의금부에서 대명(待命)하였다. 얼마 후 상은 마음을 열어 풀어주시고 지경연(知經筵)과 세자 빈객(世子賓客)을 겸하게 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청백리(淸白吏)를 선발하였는데, 공은 청렴함과 근신함으로 선발되어 품계를 올려 판의금부사 겸 내의원제조(判義禁府事兼內醫院提調)에 임명되었다.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지부(地部 호조 )를 맡았으며 공조, 형조, 이조를 전전하였다.

교리 유봉서(柳鳳瑞)가 주의(注擬)의 하찮은 일을 들어 공을 배척하면서 지극히 나쁜 말을 하자, 간관과 경연관들은 모두 공의 충성스러움을 아뢰고 나쁘게 말한 자가 무함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공은 오히려 책임을 지고 체직되었다. 한성부 판윤과 병조 판서에 제수되었는데, 또다시 상소를 올려서 상전(賞典)이 너무 지나침을 아뢰었는바, 말씀한 내용이 너무 솔직하였으므로 상이 파직을 명하니, 이때 공의 나이가 69세였다.

공은 집안식구를 다 데리고 호상(湖上)으로 나가며 말씀하기를 “금년도 해가 저물었으니, 내년 봄이면 내 나이가 70이다. 비록 다시 늙고 노둔한 몸을 채찍질하려 하나 끝내 국가의 일에 유익함이 없으니, 어찌 한갓 예의를 무너뜨리고 국가의 제도를 범하겠는가.” 하고는 뜰에 잣나무 두 그루를 심어 놓고 날마다 그 사이에서 시를 읊곤 하였다.

상은 특별히 한성부 판윤과 참찬에 제수하였으나 공은 사은숙배하지 않았다. 장릉(莊陵)을 고쳐서 봉토(封土)하는 일을 맡도록 명하니, 공은 비록 치사하려 하였으나 군주가 불러서 시킨 일을 감히 사양할 수 없다 하여 즉시 달려가 일을 마쳤다. 품계가 올라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나이가 70이 되었다 하여 쉬기를 청하고 고양(高陽)의 집으로 돌아왔다. 체직되고 참찬(參贊)에 제수되었는데, 성상께 환후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병을 무릅쓰고 대궐 아래에 나아가자, 다시 병조 판서를 제수하였다. 일곱 번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자, 상소문을 남겨 두고 곧바로 떠나왔다가 죄에 걸려 파직되었으며, 특별히 서용되어 참찬에 제수되었다.

곤전(坤殿)에 의약청(議藥廳)을 설치한다는 말을 듣고 또다시 가마를 타고 들어가자, 형조 판서를 제수하였는데, 복상(卜相)과 의약청의 일이 끝나자 즉시 돌아왔다. 다시 이조 판서를 제수하였는데, 공은 연달아 글을 올려 굳이 사양하다가 도목정(都目政)이 기한을 넘겼다 하여 또다시 죄에 걸려 파직되었다.

말질(末疾)이 있어 낫지 않으므로 치료하기 위하여 서울에 들어가니, 상은 어의를 보내어 약물을 하사하였다. 병이 더욱 심해져서 정침에서 별세하니, 바로 신사년(1701, 숙종 27) 8월 15일이었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은 놀라고 서글퍼하여 휼전을 더하기를 매우 지극히 하였다. 관학 유생(館學儒生)들이 반열을 정하여 와서 곡하였고, 평소에 아는 부곡(部曲)들이 모두 집앞에 모여서 목이 메도록 통곡하고 돌아갔으며, 왕릉의 역사를 할 때 함께 일한 공장(工匠)들이 모두 와서 부의를 올렸다.

10월에 파주(坡州)에 있는 선영의 아래에 장례하였다. 상은 은혜를 더하여 영의정을 추증하였으며, 파주 유생들의 상소에 따라 풍계(豐溪)의 충렬사(忠烈祠)에 합향(合享)하고 또 정려를 세우도록 명하였으며,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공은 신장이 보통 사람을 넘지 못하였으나 의표가 엄숙하고 후중하여 산처럼 우뚝하였으며, 성품이 침착하고 강의(强毅)하며 독후(篤厚)하였다. 천성이 지극히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웠으며, 세상을 구제할 수 있는 재주를 겸하여 현종(顯宗)에게 가장 인정을 받았다. 당저(當宁)가 뒤를 이어 즉위하셨는데, 선왕의 유지를 따라 나라를 맡아 다스릴 수 있는 그릇이라고 인정하여, 사람들이 떠들어 비난하는 가운데에서 강력히 보호하였으며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던 가운데에서 특별히 선발하였다. 그러다가 국가에 큰 변고가 있자, 공은 윤리 강상을 높이 세워서 천추에 길이 남겼다.

기타 집안에 거처할 때의 행실과 관직에 있을 때의 정사의 훌륭함은 이루 다 셀 수 없으며 또한 굳이 쓸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내 일찍이 함께 일하며 직접 본 것을 말하겠다.

연경에 갈 때에 요동(遼東)의 경계에 들어가니, 눈이 많이 내리고 날씨가 몹시 추워서 수행하는 사람들 가운데 도로에서 쓰러져 죽는 자가 속출하였다. 공은 그때마다 가마를 멈추고 눈 위에 앉아 옷을 갖추어 시신을 염습(殮襲)하였으며, 비록 밤이 깊어도 반드시 들것에 태워 숙소에 이르게 하였다. 새벽에 일어나 보면 담장과 벽 사이에 얼어 죽은 자가 또 서로 이어졌는데, 공은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염습하게 하고 털방석으로 싸게 하였으며, 이것이 부족하자 가마의 장막을 잘라서 더 보태었다. 호인(胡人)들이 모여서 이것을 보고 감탄하기를 “인자한 사람이다. 예전에 조선 사람이 이곳에 왔을 적에 보니, 말 앞에서 서서 죽은 자가 있는데도 보지 못한 것처럼 외면하였으니, 그들이 하물며 친히 그 시신을 염습하기를 이처럼 하였겠는가.” 하였으니, 공의 인자한 마음과 어진 명성이 이민족(異民族)을 감동시킴이 이와 같았다.

영남 관찰사가 되었을 적에 내수사(內需司)에서 절수(折受)하는 글이 본도(本道)에 내려온 것이 서로 이어졌으며 그 넓이가 몇 고을에 이어지니, 국가의 세금이 크게 줄어들었다. 내수사의 차인(差人)들이 백성들을 잡아가고 윽박질러, 그들이 지나간 곳은 병화를 입은 것처럼 되었다. 이에 공은 그들의 죄를 따져 곤장을 치고 치계(馳啓)하여 지극히 논하였다. 상이 노하여 엄한 전교를 내리시니, 신하가 감히 들을 수 없는 내용이어서 조정에서는 이 때문에 모두 두려워하였다. 이에 내가 여러 공들과 약속하여 함께 간쟁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강력히 아뢰어서 마침내 풀려날 수 있었으니, 이는 진실로 직언을 잘 따르시는 성상의 거룩한 덕이 계시기에 아래에 있는 자들이 우러러 믿고서 말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공이 충절을 위하여 의리에 죽을 수 있음을 미리 볼 수 있는 것이 이와 같았다.

호조의 판서가 되었을 적에 중국에서 사온 놋쇠를 대내(大內)로 들이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공은 입시하여 아뢰기를 “이 물건을 대내로 들이는 것은 명분이 없으니, 신은 결코 명령을 받들 수 없습니다.” 하여 수많은 말씀을 아뢰니, 상이 이 때문에 명령을 중지하였다.

내가 나아가 성상 앞에서 축하하기를 “지금 모든 조정의 신하들은 자신이 그 직책을 맡고 있으면 으레 모두 성상의 명령을 받들어 따를 뿐인데, 지금 아무개는 지성으로 간하였고 전하께서는 그 말을 가상히 여겨 받아들이셨습니다. 늙은 신하가 이러한 거룩한 일을 보게 되니, 축하드리는 구구한 정성을 이루 다할 수 없습니다.” 하니, 성상의 말씀이 온화하여 간곡히 응답하셨는바, 공이 힘써 성의를 쌓아서 성상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음이 이와 같았다.

청백리를 뽑을 때에 내가 이 일을 관장하였으니, 이는 바로 60년 동안 거행하지 않던 일이었다. 비록 선배와 장덕(長德)으로서 절개와 지조가 크게 드러나 혁혁하여 사람들이 직접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도 그에 대한 평론이 해가 지나면 혹 이동(異同)의 말이 없지 않았으나 공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들이 모두 찬동하여 똑같은 말로 칭찬하고 허여하였으니, 이는 공에게 있어 비록 한 가지 일에 불과하나 공이 정성스러운 마음과 진실한 행실로 한 세상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음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또 우리나라 사대부들은 서울을 집으로 삼고 녹봉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아 일생을 마쳐서, 자기 힘으로 농사지어 먹고 노후에 쉬는 자가 적었다. 그러나 공으로 말하면, 직책을 떠나면 그때마다 초야로 돌아가 손수 낫과 호미를 잡고 몸소 파종하고 수확하여 스스로 야인(野人)의 수고로운 일을 하였다. 그러므로 진퇴하는 즈음에 주저하지 않았다.

나이가 이미 70에 이르자 즉시 벼슬을 내놓고 돌아갈 것을 청하여, 비록 양전(兩銓 이조와 병조 )에 연달아 제수하고 은혜로운 전지(傳旨)와 엄한 명령이 번갈아 내렸으나 공은 끝내 나가지 않았으니, 이는 또한 한 번 이조 판서 사양한 것을 천 길 높이 나는 봉황새에게 견주었던 것보다 훨씬 높다 하겠다.

공은 평소 술을 좋아하여 술자리를 만나면 언제나 많이 마셨는데, 호조에 있을 적에 술을 경계하는 상의 전지가 있자 6년 동안 술을 끊었다가 물러날 것을 청한 뒤에야 비로소 조금 마셨다. 의논하는 자들은 혹 공의 이름이 금구(金甌)에 들었으나 결국 정승의 지위에 오르지 못했다 해서 세도(世道)를 위하여 애석히 여긴다.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 말한다면, 공의 드높은 큰 절개는 진실로 논할 필요가 없으며, 5도(道)에 교화를 펴고 6부(部)를 두루 거쳐 공적이 일에 남아 있고 이익과 은택이 백성들에게 미친 것이 많았다. 참으로 질박하고 정직하다는 칭찬과 청렴결백하다는 명성이 조정에 오직 공 하나뿐이고 둘이 없었으며, 마침내 말년에 또 용퇴(勇退)로 끝마쳤으니, 설령 공이 다시 정승이 되었다 한들 어찌 이보다 더 나을 수 있겠는가. 또 별세한 뒤에 영광스럽게 추증한 것은 성상께서 일찍이 공에게 명하려고 하시던 관직을 내리신 것이니, 유명(幽明)의 사이에 무엇이 다르겠는가.

배위인 정경부인 설씨(薛氏)는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계조(繼祖)의 7대 손이요 학생 시망(時望)의 따님이다. 어려서는 특이한 자질이 있었고 장성해서는 훌륭한 덕이 있었다. 시부모를 섬기고 남편을 받들 적에 깨끗이 하는 데 부지런하고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는 데 힘썼으며, 비녀와 귀고리와 의복을 팔아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여러 누이와 동서들과 화기애애하게 지내고 첩과 계집종과 하인들을 대할 적에 곡진히 은혜가 있으니, 친족과 원근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공보다 3년 먼저 태어나 21세에 공에게 시집왔고 공보다 31년 먼저 별세하였다. 장례는 공의 묘소에 부장하였는데, 묘역은 같으나 봉분을 달리 하였다.

1남은 바로 명문(銘文)을 청한 자이고, 두 딸은 현감 박세집(朴世集)과 참봉 김태수(金台壽)에게 출가하였다. 측실(側室)은 4남을 두었으니, 만호(萬戶) 정현(廷賢), 정량(廷良), 정선(廷善), 정수(廷壽)이고, 세 딸을 두었으니, 장녀는 첨사(僉使) 유상만(柳尙萬)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어리다. 정진(廷晉)은 종제(從弟)의 아들 형원(亨元)을 양자로 삼았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부평 이씨는 / 富平之李
고려 초부터 비롯되었는데 / 肇自麗初
대광이 명성을 날려 / 大匡颺聲
후세에 많은 복록을 물려주었네 / 垂後裕如
대대로 그 전통을 이어 / 世承厥緖
부자가 정승이 되었으며 / 子父繼相
전후에 상소를 올려 / 前後疏封
공이 그보다 더 높을 수 없었네 / 功莫與尙
본조에 들어와 / 入于本朝
문신이 크게 이어졌다오 / 文籍蟬聯
증조는 창의하여 / 曾公倡義
이정암(李廷馣)과 연안성(延安城)을 지켰는데 / 與馣守延
연세가 길지 못하니 / 維年不永
슬퍼하고 추증하여 제문을 지었네 / 哀贈有誄
조고와 선고는 / 維祖維考
덕은 높으나 지위가 낮았다오 / 德崇位庳
쌓임이 이미 오래니 / 其積旣久
발복이 큰 것 당연해라 / 其發宜大
독실히 공을 탄생하니 / 篤生夫公
국가가 의뢰하는 바라오 / 邦國攸賴
재주와 정성을 다하고 / 竭其才誠
충성과 사랑을 바쳤도다 / 獻其忠愛
두 조정에 인정을 받고 / 受知兩朝
일찍 재상의 지위에 올랐는데 / 蚤致卿宰
나라에 변고가 있으니 / 國有變故
큰 절개가 비로소 높았네 / 大節始卓
서리와 눈을 만나지 않으면 / 不遇霜雪
어찌 소나무와 잣나무를 알겠는가 / 何知松柏
모의의 큰 윤리가 / 母儀大倫
공을 얻어 안정되었는데 / 得公而定
함께 일한 세 분 중에 / 同事三人
공만이 아무 탈이 없었다오 / 公獨無恙
성상의 마음 한 번 깨달으니 / 淵衷一悟
공이 다시 들어와 사례하고 / 公復入謝
장추가 다시 바로잡히니 / 長秋再正
공은 다시 들어가 축하하였네 / 公復入賀
공이 처음 정직하게 간하여 / 公初正諫
군주의 마음을 크게 거슬렸는데 / 逆于君心
오랜 뒤에는 마침내 따르니 / 久而乃從
이는 감동함이 깊어서라오 / 見感之深
몸을 잊고 상을 받듦이 / 忘身奉上
오직 공의 충성이었네 / 維公之貞
잘못을 고치면 다 우러르니 / 更也皆仰
오직 군주의 현명함이라오 / 維君之明
군주와 신하가 덕을 합하여 / 君臣合德
태평성세를 이루려 하였네 / 期躋大猷
총재와 사마 / 冢宰司馬
임무가 실로 막중하나 / 柄任實優
일이 평탄하기 어려움은 / 事之難平
예로부터 그러하였으니 / 從古所記
공의 지위와 명망으로도 / 以公位望
오히려 뜻과 같지 못하였네 / 猶莫如意
공의 나이 또한 칠십에 이르니 / 公年亦至
돌아가 쉴 것을 급히 고하였네 / 遽告歸休
호연히 떠나감을 / 浩然之行
그 누가 만류하겠는가 / 其誰得留
백성들이 복이 없어 / 民之無祿
하늘이 남겨 두지 않으시니 / 天又不遺
영화롭게 상상을 추증하고 / 寵贈上相
예로 충렬사(忠烈祠)에 배향하였네 / 禮享忠祠
공의 시종을 생각하건대 / 念公始終
온갖 선이 구비되었도다 / 衆善備矣
그중에 큰 것을 들었으니 / 擧其大者
딴것은 다 말하지 않노라 / 他不一二
공은 한 아들 두었으니 / 公有一子
효의 근원을 알았네 / 知孝之元
덕을 기록하고 행실을 찬양하여 / 紀德贊行
잊지 않을 것을 도모하노니 / 以圖不諼
나의 말 화려하지 않으나 / 我言無華
또한 공의 본래 뜻이라오 / 亦公之志
이것을 바른 돌에 새겨서 / 刻之貞石
무궁한 후세에 보이노라 / 示于無止

 

吏曹判書忠肅李公神道碑銘 甲申 약천 남구만 (南九萬) 찬

 

今上之十五年己巳四月。雙柏堂李公世華君實納嶺節歸西湖田舍。聞坤殿將遜私第。驚起詣闕。初欲獨疏。且聞罷散。朝士齊會平市署。吳判書斗寅以下來者八十餘人。公遂與諸公相議草疏。朴應敎泰輔執筆書疏入。至暮批不下。公曰此會亦一朝廷。不可一疏而止。當以得請爲期。夜向二鼓。闕內火光如晝。傳呼之聲振地。命設親鞫于闕庭。吳公及公以名在疏前列。朴君以寫疏。俱就鞫。上問製疏者爲誰。公曰泰輔唯執筆耳。命意措語。實臣等之爲。天威益震。拷掠殆絶。公抗聲曰臣平日願爲國事死。今得所願。第恐或累於聖德。且臣罪雖罔赦。付諸一獄吏治之足矣。達夜親鞫。不瑕有傷於玉體乎。聞者謂之刑諫。翌日命竄定州。出獄。士庶塡街爭願一覩。暮宿都門外。薦紳章甫知與不知。競來候問。擔舁七日到金川。病益篤不能言。待少穌。三十日始到配。未幾恩釋。還坡山先塋下。爲終焉計。甲戌四月。上大感悟中。拜公爲大司諫。俄擢戶曹判書。固辭不起。聞差坤殿復位都監提調。愴然曰吾爲坤殿叫閽。當死而不死。獲覩今日。將董重冊之役。此其可辭。行詣近郊。又有守禦使之命。入京都民聳觀咨嗟。父老或有垂涕者。嗚呼。己巳之事。風霆猝發。觸之者糜碎。聞之者魄喪。而觀公置對之辭。甘心於自當一死。不忘於上格君心。旣無撓屈。且無激發。理直辭遜。委曲如法筵之上吁咈之際。當其時天威之少霽。及後日淵衷之大覺。俱不可謂非公之力。其膽量之大。忠款之篤。誠是社稷之衛。豈特慷慨一疏之爲可尙而已哉。余與公早有同朝之喜。而猶未之相熟也。歲甲子同使燕。往返萬里。得公甚悉。及甲戌更化。相周旋於廊廟者又三四年。雖未敢謂公之知余。余則自謂知公矣。今公之胤都事廷晉齎狀踵門。以公神道之文託余。公弟執義君世維以書申請。噫。公弟若子。必知公遺意。然則公之知余。亦可知矣。余於此其何忍辭。按狀公籍富平。曾祖諱繼祿。兵曹正郞特贈吏曹參判。以壬辰倭變。助守延安城功也。祖諱德純。稷山縣監贈吏曹判書。考諱煕載。長陵參奉贈左贊成。兩世追封。以公貴也。妣贈貞敬夫人驪興閔氏。同樞伏龍之女。生父諱以載。明經有志行。以孝聞。丙子亂後不應擧而終。配扶安金氏。麗朝文貞公坵之後。鍾城府使諱致遠之女。鍾城公光海朝以正言入對極諫。脫帽帶而出。世稱其直節。公以崇禎庚午歲生。年十五爲後於伯父參奉公。二十三登上庠。後五年擢文科。選承文院正字。轉至博士。兼奉常直長。薦拜注書。陞典籍。移禮曹佐郞。遷兵曹。判書金佐明請久任。過半歲拜正言。出平壤判官。坐事編配。及赦還金公辟守禦從事。丁閔夫人憂。旣吉復辟從事。拜兵曹正郞掌令。出洪陽縣監。縣復爲州。例陞牧使。上命極擇廣州府尹。加望授公。守禦使李公浣每稱公爲我師。及遞命巡撫湖南海防。歷戶曹參議承旨。上疏極言同春堂宋公追削之論之爲醜正。且言尹鑴縱恣。權大載承順之罪。兩司交章請竄。上只命削黜。旣敍中批再除慶尙觀察使。政院啓遞。除判決事。臺臣劾遞。俱以前疏也。出羅州牧使。上臨筵曰李某才器足當一面。近不擬於藩臬之任何也。銓曹不得已除黃海觀察使。庚申更化。擢拜平安觀察使。改拜本道節度使。復拜觀察使。朝廷知公可託以腹心爪牙。連擬兩局大將之望。臺臣有以躛言中公。連疏得遞。還拜刑曹參判。出咸鏡觀察使。以燕行副价召入。爲戶曹參判。復命拜全羅觀察使。病遞。除京尹摠管。皆移疾不拜。出長湍府使。移慶尙觀察使。前後三除也。旣赴任。以杖主家差人。有嚴旨遞歸。乃有己巳疏事。及被新渥。坤殿冊禮成。進階賜馬。兼知義禁府事。以折受之弊賞賜之濫。上封事切諫。有嚴批。待命禁府。俄賜開釋。兼知經筵世子賓客。時朝廷選淸白吏。公以廉謹被選。進階拜判義禁府事兼內醫提調。病遞地部。轉工刑吏三曹。校理柳鳳瑞斥注擬微事。語極謬戾。諫官筵臣並白公忠藎。以言者爲誣。公猶引咎遞。拜判尹兵判。又疏陳賞典之過越。語多直截。命罷職。於是公年六十九。盡室出湖上曰。今歲云暮。明春則吾年至矣。雖復策勵朽鈍。終無益於國事。何徒壞禮坊而犯國制乎。對樹雙柏於庭。日哦其間。特敍判尹參贊不拜。命敦莊陵改封事。公雖將乞身。不敢辭召役。卽赴竣事。進階拜禮判。引年乞休。歸高陽村舍。遞授參贊。聞上候違豫。舁疾造闕下。復判兵曹。七辭不許。留疏徑去坐罷。特敍除參贊。聞設坤殿議藥廳。又舁入。除刑判。卜相議藥罷。卽還。復除吏判。連章固辭。以大政過時。又坐罷。有末疾不遂。爲便醫入京。上遣御醫賜藥物。病浸谻。卒於寢。卽辛巳八月十五日也。訃聞上震悼。所以加卹者甚至。館學生序班來哭。平日部曲咸集于門。失聲而歸。陵役時工匠皆來致賻。十月葬于坡州先兆之次。上加恩贈領議政。以坡州儒生疏。合享于豐溪忠烈祠。又命旌表門閭。賜諡曰忠肅。公長不踰中人。儀觀嚴重。嶷然如山岳。沈毅篤厚。有忠孝至性。濟之以救時之才具。受知顯考最深。及當宁嗣服。遵先王遺旨。許以國器。力保於衆咻之中。特簡於久廢之際。及國有大故。樹立倫常。永垂千秋。其他居家處官。內行政事之美。不可勝悉。亦不必書也。雖然以余所嘗共事與親見者言之。赴燕時入遼界。雪大下寒特甚。從人僵死於道者相繼。公輒停轎雪坐。具衣斂屍。雖夜深必使舁及宿所。曉起見之。凍死牆壁間者又相枕。公脫所著斂之。以毛薦裹之。不足則割轎帳益之。胡人聚觀嗟歎曰仁人也。前者東使之至於斯。見有立死於馬前而若無覩者。矧肯親斂其屍若是乎。公之仁心仁聞。感動殊類者有如此。其按嶺南也。內司折受章下本道者相續。跨連數州。官稅大縮。差人作挐咆哮。所經如兵火。公數罪杖之。馳啓極論。上敎之嚴。有不敢聞。朝廷爲之惴慄。余約諸公共爭叩頭力陳。乃得解。此固我聖上轉圜之盛德。在下者所仰恃以盡言。然公之必能伏節死義。可以先見者有如此。其判度支也。有唐豆錫內入之命。入侍啓曰。此物之入無名。臣決不敢承命。開陳累百言。上爲之寢其命。余進賀上前曰。凡今朝臣職在有司則例皆奉承上命而已。今某能至誠規諫。殿下嘉納其言。老臣覩此盛美。不勝區區獻賀之忱。天語溫諄。應答如響。公之務積誠意。力能回天者有如此。淸白吏之選也。余管其事。此乃六十年久曠之擧。雖先輩長德節操表著。赫赫在人耳目者。評議經年。或不能無異同之言。至於公。衆口翕然。一辭稱許。此在公雖一節。然公之誠心實行。見信於一世者有如此。且我國士夫。以京爲家。以祿爲養。以終其身。其能食其力而休其老者尠矣。若公去職則輒歸田。手把釤鏄。身親播穫。自服野▼之勞。故能不濡滯於進退之際。年旣至。卽乞身。雖連授以兩銓。恩旨與嚴命交下。終不起。其亦高於一辭吏書。比鳳翔千仞者矣。公居常愛酒。遇輒引滿。在度支日。有旨戒麴糱。斷飮者六年。乞休後始細傾矣。議者或以公名入金甌。未果延登。爲世道惜。以余言之。公之卓然大節。固無論已。若其旬宣五路。踐歷六部。績庸之在事。利澤之及物者多矣。樸直之稱。氷檗之聲。在朝亦無二。乃於晩節。又以勇退終焉。設令公更贊辨章。顧何以有加。且身後寵贈。蓋聖上用嘗欲以命公者。幽明之間。抑何異也。配貞敬夫人薛氏。玉川府院君繼祖之七代孫。學生時望之女。幼有異質。長有淑德。事尊章奉君子。勤於腆洗。勞於旨蓄。至於鬻簪珥衣服。無少靳也。遇諸姊妯娌。和氣藹然。處妾媵婢僕。曲有恩惠。宗黨遠近。咸稱道之。生先公三年。年二十一歸公。卒先公三十一年。葬祔公。同塋而異墳。一男卽請銘者。二女適縣監朴世集,參奉金台壽。側室四男。萬戶廷賢,廷良,廷善,廷壽。三女長適僉使柳尙萬,次幼。廷晉以從弟之子亨元爲嗣。銘曰。

富平之李。肇自麗初。大匡颺聲。垂後裕如。世承厥緖。子父繼相。前後疏封。功莫與尙。入于本朝。文籍蟬聯。曾公倡義。與馣守延。維年不永。哀贈有誄。維祖維考。德崇位庳。其積旣久。其發宜大。篤生夫公。邦國攸賴。竭其才誠。獻其忠愛。受知兩朝。蚤致卿宰。國有變故。大節始卓。不遇霜雪。何知松柏。母儀大倫。得公而定。同事三人。公獨無恙。淵衷一悟。公復入謝。長秋再正。公復入賀。公初正諫。逆于君心。久而乃從。見感之深。忘身奉上。維公之貞。更也皆仰。維君之明。君臣合德。期躋大猷。冢宰司馬。柄任實優。事之難平。從古所記。以公位望。猶莫如意。公年亦至。遽告歸休。浩然之行。其誰得留。民之無祿。天又不遺。寵贈上相。禮享忠祠。念公始終。衆善備矣。擧其大者。他不一二。公有一子。知孝之元。紀德贊行。以圖不諼。我言無華。亦公之志。刻之貞石。示于無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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