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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호(諡號) 2.

*최언휘(崔彦撝) 868년(경문왕 8)∼944년(혜종 1). 신라말 고려초의 문신.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24.04.10|조회수19 목록 댓글 0

*최언휘(崔彦撝) 868년(경문왕 8)∼944년(혜종 1). 신라말 고려초의 문신.

시호: 문영(文英)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신지(愼之)‧인연(仁渷). 최치원(崔致遠)의 종제이며, 문하평장사 최항(崔沆)의 할아버지이다. 885년(헌강왕 11)18세로 당(唐)에 들어가 예부상서(禮部尙書) 설정규(薛廷珪)와 같은 방(榜)으로 과거에 급제했다. 그때 발해(渤海)의 재상 오소도(烏炤度)의 아들 광찬(光贊)이 함께 급제했는데, 소도가 당에 사신와서 보니 그 아들의 이름이 언위의 밑에 있었다. 그래서 표(表)를 올리기를 ‘신이 옛날 입조(入朝)해서 급제했을 때 이름이 이동(李同)의 위에 있었으니, 이제 신의 아들 광찬도 당연히 언위의 위에 올려야 합니다.’ 했지만 언위의 재주와 학문이 훨씬 우수했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다.

. 909년(효공왕 13)에 귀국하여 집사성시랑 서서원학사(執事省侍郞瑞書院學士)를 제수받았다. 935년(태조 18)에 신라가 망하자 고려에 가서 태자사부(太子師傅)가 되고, 문한(文翰)을 위임받았으며, 벼슬이 대상 원봉대학사 한림원령 평장사(大相元鳳大學士翰林院令平章事)에 이르렀다. 본래 성품이 너그럽고 글을 잘하여 태자사부로 있을 때 궁원(宮院)의 액호(額號)는 모두 그가 찬정(撰定)한 것이었으며 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최치원‧최승우(崔承祐)와 함께 일대삼최(一代三崔)라 한 것으로도 그의 문명은 짐작되는 바이다.

또한, 서법(書法)도 남달리 아름다워 성주사(聖住寺)의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와 같은 비문을 쓰기도 하였으며, 〈낭원대사오진탑비명 朗圓大師悟眞塔碑銘〉‧〈법경대사자등지탑비명 法鏡大師慈燈之塔碑銘〉 등을 찬하기도 하였다.

아들로는 최광윤(崔光胤)‧최행귀(崔行歸)‧최광원(崔光遠)‧최행종(崔行宗) 등이 있었는데, 최광윤은 진(晉)에 유학을 가던 중 거란에게 붙잡혀갔으나 재주를 인정받아 오히려 관직에 등용되어 구성(龜城)에서 근무하던 중, 거란군이 고려를 침범할 것을 알고 고려에 서신으로 알려와 광군(光軍) 30만을 설치하게 하였다. 최행귀도 오월국(吳越國)에 유학하여 비서랑(祕書郞)이 되었다. 정광(政匡)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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