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원(李陽元) 1526년(중종 21)∼1592년(선조 25).
시호: 문헌(文憲) 勤學好問曰文。行善可紀曰憲。영조 41년(1765) 증시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행동이 착하여 본보기가 될 만한 것을 헌(憲)이라 한다.
시장: 영의정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찬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춘(伯春), 호는 노저(鷺渚).
정종의 아들인 선성군(宣城君) 무생(茂生)의 현손이며, 이원부령(利原副令) 학정(鶴汀)의 아들이다. 퇴계 이황(李滉) 문인이다.
1555년(명종 1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그뒤 저작(著作)을 거쳐 1563년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해에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들어가 객사한 정사(正使) 김주(金澍)를 대신하여 명나라의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가 고려의 이인임(李仁任)으로 잘못 기재된 것을 바로잡고 돌아와 그 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그뒤 평안도‧충청도‧경기도의 관찰사, 형조판서‧대제학‧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590년(선조 23)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3등에 책록되고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봉하여졌으며, 이듬해 우의정에 승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수도의 수비를 맡았으나 한강방어의 실패로 양주(楊州)로 철수, 분군(分軍)의 부원수(副元帥) 신각(申恪)과 함경도병마절도사 이혼(李渾)의 군사와 합세하여 해유령(蟹踰嶺)에 주둔, 일본군을 맞아 싸워 승리한 뒤 영의정에 올랐다.
이때 의주에 피난하고 있던 선조가 요동(遼東)으로 건너가 내부(內附)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탄식하며 8일간 단식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어릴 적에 이중호(李仲虎)에게 수학하였는데 성품이 충후하고 박학하였으며, 흑백의 논쟁에 치우치지 않았고 또한 시문에도 능하였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한산부원군노저 이공시장〔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漢山府院君鷺渚李公諡狀〕
선묘(宣廟) 임진년(1592, 선조25)에 나라가 혼란한 즈음에 명을 받아, 위급한 때에 위용을 세워 죽음에 이를 때까지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이로 노저(鷺渚) 이 상공(李相公)이 있었다. 이 당시의 일이야말로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왜구가 침입해 들어왔을 때 신립(申砬)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이 크게 요동하고 상은 장차 서쪽으로 피난을 가려고 하였다. 처음에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에게 명하여 남아서 서울을 지키게 하였는데, 대신이 공이 있다고 아뢰자, 상이 다시 명하여 공을 대장으로 삼아 도성에 남게 하고, 상은 즉시 피난을 떠났다.
공은 수하에 병졸이 한 사람도 없었기에 바로 남은 백성을 수습해 모집하여 막아 지킬 계획을 하였다. 당시에 한강을 막고 있던 도원수(都元帥)김명원(金命元)공의 군대가 무너지고 적이 진격하여 서울에 접근하자, 공은 성을 지킬 수 없다고 짐작하고 물러나 양주(楊州)에 진을 쳤다. 이윽고 전하는 말에 주상이 장차내부(內附)하리라고 하니, 공이 탄식하며 “나랏일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라고 하고, 한번 죽어 나라에 보답할 것을 맹세하고는 드디어 여드레 동안 밥을 먹지 않았다. 공의 셋째 아들이 종사관(從事官)으로 군중(軍中)에 있으면서 울며 음식을 들도록 청하였으나 공은 “내가 중한 부탁을 받았으나 힘이 부쳐 적을 쳐부수지 못하였다. 또 주상의 행차가 장차 요동(遼東)으로 건너간다고 하니, 살아서 무엇 하겠느냐. 지금이 바로 내가 죽을 때이다. 다시는 말하지 마라.”라고 말하고 이어서 눈물을 흘리니 막사 안의 병사들이 모두 숨을 죽이며 쳐다보지 못하였다. 드디어 피를 몇 되나 토하고 군중에서 세상을 마치니 때는 임진년 7월 1일이었다.
공의 성은 전주 이씨(全州李氏)이고 휘는 양원(陽元)이며 자는 백춘(伯春)이다. 고조할아버지 휘 무생(茂生)은 공정대왕(恭靖大王정종(定宗))의 넷째 아들로서 선성군(宣城君)에 봉해졌다. 증조할아버지 휘 말정(末丁)은 병산군(屛山君)이고, 할아버지 휘 천수(千壽)는 지산군(知山君)이다. 아버지 휘 학정(鶴丁)은 이원군(利原君)이니, 이원군은 곧 지산군의 사촌 동생 비홍령(飛鴻令) 휘 난손(蘭孫)의 아들인데 지산군이 양자로 들였다. 공이 귀하게 되자 병산군, 지산군, 이원군이 모두 차례대로 품계가 추증되었다. 어머니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군수 휘 정창(鄭瑒)의 따님으로, 가정(嘉靖) 병술년(1526, 중종21)에 공을 낳았다.
몇 해 뒤 이원군이 세상을 버렸는데, 공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으나 남달리 영특하여 번거롭게 지도하지 않아도 문장이 울연(蔚然)히 일찍 성취하여 열대여섯 살에 벌써 대단한 명성이 있었다. 독실하고 인자한 데다 도량이 컸고, 기쁨과 노여움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당시 여론에서 문학에 뛰어난 선비로서 벼슬길에 나아가 한 시대를 보좌할 자로 공을 기대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을묘년(1555, 명종10)에 생원, 진사 두 시험에 입격하였다.
병진년(1556)에 명종이 시행한 성균관 알성시에서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기용되었다. 이어 천거로 예문관에 들어가한림(翰林)이 되었다. 이윽고 홍문관의 정자와 저작에 녹선되었고 수찬에 올라 독서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니, 모두 최상의 선발이었다.
이 당시는 사대부 중에 재주와 학문으로 명망이 있는 이들이 조정에 수없이 많았지만 공보다 앞설 이가 없었으니, 막 관직에 임명되었음에도 이렇듯 태산북두같이 명망이 높았다. 병조로 옮겼다가 지제교(知製敎)로 녹선되었고 사간원 정언으로 옮겼다가 또 홍문관으로 들어가 교리(校理)가 되었으며, 얼마 되지 않아 이조 정랑을 배수하였고, 의정부 사인으로 옮겼다.
계해년(1563)에 나라에서 변무선계사(辨誣璿系使)를 보내니 공이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북경에 갔다가 정사(正使)김주(金澍)가 병으로 죽자 공이 정성을 다해 전대(專對)하였다. 천자를 감동시켜 마음을 돌리게 함으로써, 바로잡은 칙명을 받들고 돌아왔다. 귀국하자 상이 크게 기뻐하며 상을 매우 후하게 내리고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를 가자(加資)하였으며 호조 참의를 배수하였다. 병조 참지, 대사간(大司諫)을 거치며 그 사이에 승지가 되었고,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이조 참의를 배수하였다.
정묘년(1567)에 도승지로 옮겨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명종의 병세가 매우 위독해지자 공이 영의정이준경(李浚慶)공과 함께 대궐에 들어가서 세자를 세우는 교지를 받들고,덕흥군(德興君)의 사저(私邸)에서 선조대왕을 맞이하여 궐로 들어가 즉위하게 하였다. 당시 갑작스러운 위기에 종사(宗社)의 존망이 호흡하는 사이에 달려 있었는데, 공이 승정원에 있으면서 일 처리를 치밀하고 신중하게 하니, 일각도 채 못 되어 반석같이 안정되었다. 이공이 이 일로 공을 더욱 의지하고 중시하였다.
무진년(1568, 선조1)에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경오년(1570)에 병으로 해임되었다가 겨울에 동지 하사(冬至賀使)가 되었다.
신미년(1571)에 대사헌을 배수하였고 또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다.
계유년(1573)에 또 사은사(謝恩使)가 되었다.
을해년(1575)에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나갔다가 이윽고 대사헌을 배수하였다. 2년 뒤에 다시 이조 참판이 되었다.
무인년(1578)에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
경진년(1580)에 부름을 받고 나가 부제학(副提學)을 배수하였다. 겨울에 특별히 승진하여 형조 판서가 되었다.
임오년(1582)에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병술년(1586)에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기축년(1589)에 천거로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에 임명되어 문형(文衡)을 잡았다. 공은 스스로 요직을 많이 거쳤다 하여 매번 완강히 사양하였으나 결정이 되면 그만두니 상이 더욱 중히 여겼다.
경인년(1590)에 특별히 의정부 우찬성으로 승진하였다.
신묘년(1591)에 우의정에 임명되고 광국 공신(光國功臣)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책봉되었으니, 계해년(1563, 명종18)에 종계(宗系)를 바로잡은 공로 때문이었다.
공이 물러나 양주에 주둔하였을 때 왜적은 승기(勝機)를 타서 예봉이 매우 날카로웠는데, 공이 모집한 병사들은 모두 시정(市井)의 늙고 병든 자들이라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공은 그래도 격문으로 남병사(南兵使) 이혼(李渾)과 부원수(副元帥) 신각(申恪)을 불러 왜적을 게재[蠏峴] 아래에서 요격(邀擊)하여 크게 무찔러 70여 급의 머리를 베고, 명성령(明城令)이작(李綽)을 급히 보내어 행재소에 승첩을 아뢰도록 하였다. 왜구가 깊이 들어오고부터 패전의 보고가 날마다 이어졌는데, 이때에 와서 비로소 승첩을 알리자 상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이작을 소견(召見)하여 특별히 품계를 통정대부로 올려 주고, 공은 승진시켜 영의정으로 삼았다.
아, 이 당시에 공의 공적이 과연 어떠했던가. 그러나 공의 뜻이 어찌 다만 한 번의 승첩만으로 나라에 보답한 것이라 여기고서 그만두려 했겠는가. 하늘이 그의 충정을 가엽게 여겨 도와주지 않으니 끝내 성취할 것은 다만 한 번의 죽음뿐이었다. 충신과 지사(志士)가 어찌 천년이 지난 뒤에라도 슬피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자가 이천(伊川)에 있으면서 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하며 배로 관을 호송하여, 해미(海美)에 장사 지내게 했으니 수(壽)가 67세였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고명한 데다 학문을 더 보태어 선을 좋아하고 옛것을 좋아함이 늙을수록 독실하였다. 성리학을 제대로 아는 학자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몸을 낮추어 만나 보았고, 종족이나 친구 중에 몹시 궁한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아낌없이 도와주었다. 풍채와 격조가 장중하고 심원하여 구차하게 말하거나 웃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의 깊이를 엿볼 수 없었다. 선조 때 조정의 신하들이 동서로 나뉘어 각각 자기의 당을 만들 때 공은 홀로 남아 어느 한쪽에도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았다.
일찍이 야대(夜對)에서 상이 술을 권하고 직접 시를 지어 공에게 화답하게 하였는데, 그 노래에,
까마귀야 검지 말아라 / 鴉兮莫黑
백로야 희지 말아라 / 鷺兮莫白
흑백이 어지러이 다투는데 / 黑白之紛如兮
수리는 홀로 어찌하여 검지도 희지도 않으냐 / 雕獨胡爲乎不黔不白
하자, 공이 즉시 이어서 화답하기를,
붉다고 해도 내가 아니고 / 謂朱非我兮
푸르다 해도 내가 아니네 / 謂綠非我
붉고 푸른 것이 현란하지만 / 朱綠之眩晃兮
또한 내가 지닌 어여쁨은 아니네 / 又非我之娜也
님은 어찌 나를 모르시는가 / 君胡爲兮不我知
나를 얼룩덜룩 물들었다 하시네 / 謂我兮染夏
하였는데, 그제야 상이 공은 동서의 편당이 없음을 알고 더욱 훌륭하게 여겼으니, 군신간의 만남이 이처럼 성대하였다. 공이 이로 인하여 자호를 노저라고 하였다.
일찍이 삼도(三道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관찰사를 역임하면서 크고 작은 일을 헤아려 처리할 때 물 흐르듯 결단하여 사의(事宜)에 맞지 않는 것이 없어서 재임한 곳마다 명성과 치적이 드러났다. 양전(兩銓)의 판서를 여러 번 역임하면서 한결같이 공정함을 견지하여, 감히 청탁을 행하는 자가 없었다. 나라가 위태로운 때를 만나서는 빈손으로 중임을 받아서 강개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고, 격문으로 병사를 모집해 군대를 편성하여 먼저 큰 적을 헤아려 보고 제대로 승첩을 거두었으며, 죽음을 삶같이 여겨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으니, 군자가 죽을 자리를 제대로 얻은 것이라고 말할 만하다. 근본을 둔 곳이 없다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공은 젊어서 이소재(履素齋)이중호(李仲虎)에게 수업을 하여 언제나 《소학》의 가르침으로 몸을 다스렸다. 또 퇴도(退陶이황(李滉)) 선생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으며 기대를 듬뿍 받았고,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과 사이가 좋아서, 도의(道義)로 서로 절차탁마하였다. 승지에 추증된 공의 셋째 아들시경(蓍慶)이 왜적을 격퇴하다 죽어 시신을 찾지 못하자 초혼하여 공의 묘 곁에 장사 지냈다. 어질구나, 아버지의 사업과 미덕을 계승하여 떨쳤구나.
부인 정경부인(貞敬夫人) 유씨(柳氏)는 군수 휘 유간(柳幹)의 따님이다. 부도(婦道)가 있고 공을 잘 섬겼으며, 공보다 1년 뒤에 죽어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3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 서경(犀慶)은 현감이고, 차남 귀경(龜慶)은 증(贈) 좌찬성이며, 삼남 시경은 증 좌승지이다. 장녀는 이조 판서 성영(成泳)에게, 차녀는 군수 조희식(趙希軾)에게 시집갔다. 귀경의 손자 익로(翼老)는 벼슬이 직강(直講)에 이르렀고, 익로의 아들 우정(宇鼎)은 벼슬이 예조 판서에, 우진(宇晉)은 벼슬이 승지에, 우겸(宇謙)은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으며, 우진의 아들 도원(道原)은 벼슬이 주서(注書)에 이르렀다. 시경의 손자 규로(奎老)는 벼슬이 필선(弼善)에 이르렀다.
공은 박학하고 문장에 능하였다. 밝은 시대를 만나 책무는 경연의 자리에서 컸고 지위는 정승까지 높이 올랐다. 위로는 군왕의 덕을 아뢰고 아래로는 당시의 정사를 조화롭게 잘 다스렸으니 찬란하게 볼만한 것이 어찌 이에 그치겠는가. 애석하게도 전란을 겪으면서 집에 모아 놓은 것들이 흩어져 버려 고증할 길이 없다. 다만 평생의 큰 이력들만 모아서 봉상시에 올려 시호를 내리는 전례(典禮)를 청한다.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漢山府院君鷺渚李公諡狀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撰
當宣廟壬辰。受命於板蕩之際。立慬於危急之秋。鞠躬盡瘁。死而後已者。鷺渚李相公是已。于時事尙忍言哉。倭冦至。申砬敗報聞。京師大震。上將西幸。初命柳文忠公成龍留守京城。大臣有以公白。上更命公爲大將留都。上卽去邠。公手下無一兵。方收募遺民爲拒守計。時。都元帥金公命元壁漢江兵潰。賊進薄京城。公度城不可守。退屯楊州。已而。傳言上將內附。公喟然曰。國事無可爲矣。誓一死報國。遂不食八日。公之三子以從事在軍中。泣請進食。公曰。吾受重寄。力敝不能勦滅賊。又聞乘輿將渡遼。安用生爲。是吾命卒之時。勿復言也。仍泣下。帳下士皆掩抑莫能仰視。遂嘔血數升卒于軍。時壬辰七月一日也。公國姓。諱陽元。字伯春。高祖諱茂生。以恭靖大王第四子。封宣城君。曾祖諱末丁屛山君。祖諱千壽知山君。考諱鶴丁利原君。利原卽知山從父弟飛鴻令諱蘭孫之子而知山子之。及公貴。屛山知山利原。皆差貤贈階。妣東萊鄭氏。郡守諱瑒之女。嘉靖丙戌生公。數歲。利原君卒。公雖幼孤。然英睿絶類。不煩指道。文辭蔚然夙就。十五六。已有盛名。惇惠有器度。喜怒不形于色。世論文學士可出以佐時者。莫不屬望於公。乙卯。中生進兩試。丙辰。明廟謁太學試士。公闡乙科。調承文院。薦入藝文館爲翰林。已而錄弘文館正字著作。陞修撰。賜暇湖堂。皆極選也。當是時。士大夫以才學名者林立於朝。莫有先之。財釋褐。負山斗之望如此。移騎省選知製敎。轉司諫院正言。又入玉堂爲校理。尋拜吏曹正郞。遷議政府舍人。癸亥。國家送辨誣璿系使。公以書狀赴京。上价金澍病卒。公竭誠專對。感回天聽。奉改正勅還。至國。上大悅。賞賚甚優。特加通政階。拜戶曹參議。歷兵曹參知大司諫。間爲承旨。由弘文館副提學。拜吏曹參議。丁卯。遷都承旨。特陞嘉善。明廟疾大漸。公與首相李公浚慶。入奉建儲旨。迎宣祖大王於德興君第。入卽位。時倉卒危疑。宗社存亡在呼吸。公處喉舌。慮事纖密周愼。未移刻而磐石之。李公以此益倚重公。戊辰。拜慶尙道觀察使。庚午。病免。冬。爲冬至賀使。辛未。拜大司憲。又出爲全羅道觀察使。癸酉。又爲謝恩使。乙亥。出守松京。俄拜大司憲。後二年再爲吏曹參判。戊寅。出爲平安道觀察使。庚辰。召拜副提學。冬。特陞爲刑曹判書。壬午。拜兵曹判書。丙戌拜吏曹判書。己丑。薦授兩館大提學。秉文衡。公自以所踐歷顯要甚。每堅辭。得準乃已。上尤器重之。庚寅。特陞議政府右贊成。辛卯。拜右相。策光國功臣漢山府院君。以癸亥改宗系勳也。公之退屯楊州也。賊乘勝銳甚。公所募皆市井老羸無能爲。公猶檄召南兵使李渾。副元帥申恪。邀擊賊蠏峴下。大破之。斬首七十餘級。馳遣明城令綽。奏捷行在。自冦深。敗報日相繼。至是。始有捷奏。上大喜。卽召見綽。特陞通政階。陞公爲領議政。嗚呼。當此時。公之勳績。果何如也。然公之意。豈亶欲以一捷爲報國而止。天不吊其衷。畢竟所成就。直一死耳。忠臣志士。安得不於悒於千載之下也。世子在伊川。聞公歿。遣人吊祭。浮海護送喪。葬于海美。壽六十七。公天資高亮。輔以學問。樂善嗜古老益篤。聞人有眞知性理之學者。必傾身與相待見。宗族故人有竆急。輒資赴無所惜。風調凝遠。不苟爲言笑。人莫能窺其際。宣祖朝朝臣分東西。各自爲黨。公獨立不偏倚。嘗夜對。上旣命觴自爲歌。屬公和之。歌曰。鴉兮莫黑。鷺兮莫白。黑白之紛如兮。雕獨胡爲乎不黔不白。公卽賡以歌曰。謂朱非我兮。謂綠非我。朱綠之眩晃兮。又非我之娜也。君胡爲兮不我知。謂我兮染夏。於是上知公無所左右。益賢之。其際遇之盛如此。公因以此自號鷺渚。嘗按察三道。大小規置裁斷若流。無不中機宜。所在著名跡。屢判兩銓持一公。請托無敢行。及當國危。徒手受重任。慷慨雪涕。激募成軍。先嘗大敵。克有捷獲。視死如生。不負所學。可謂君子之得其死矣。此豈無所本而然哉。公少從履素齋李仲虎受業。動以小學律身。又從遊退陶先生門。深見期詡。與寒岡鄭先生逑友善。以道義相切磋。公之第三子贈承旨蓍慶。擊倭死之。骸不得。招魂而葬公之墓側。賢哉趾美也。配貞敬夫人柳氏。郡守諱幹之女。有婦道能事公。公歿一年卒。合葬公墓。生三男二女。長犀慶縣監。次龜慶贈左贊成。次蓍慶贈左承旨。女長適吏曹判書成泳。次適郡守趙希軾。龜慶孫翼老官至直講。翼老子宇鼎官至禮曹判書。宇晉官至承旨。宇謙官至校理。宇晉子道原官至注書。蓍慶孫奎老官至弼善。公博學能文章。遭遇明時。責丕經幄。位極公相。上而啓沃君德。下而爕贊時政。斐然可觀。奚止於此。惜乎。閱歷兵燹。家集散佚。旣無以攷證。只撮其始終大節。奉以獻于太常氏。以請易名之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