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영(李正英) 1616년(광해군 8)∼1686년(숙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
시호: 효간(孝簡) 慈惠愛親曰孝。正直無邪曰簡。 숙종 37년(1711) 증시
인자하고 은혜로우며 어버이를 사랑으로 섬김이 효(孝)이고,
바르고 곧으며 사사로움이 없는 것을 간(簡)이라 한다.
시장: 영의정 만정(晩靜) 서종태(徐宗泰) 찬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수(子修), 호는 서곡(西谷).
아버지는 호조판서 경직(景稷)이며, 어머니는 첨지 오경지(吳景智)의 딸이다.
1636년(인조 1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소현세자가 심양(瀋陽)으로 갈 때 사서로 시종하였고, 귀국하여 정언‧수찬‧응교‧검열‧대교‧봉교‧전적을 역임하였다.
1642년 예조좌랑을 거쳐 1649년 효종이 즉위한 뒤 다시 정언‧교리‧헌납 등을 지냈다.
1657년(효종 8) 종부시정‧사인‧사간을 거쳐 1659년 병조참의‧좌승지를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 1) 부총관‧병조참판‧대사간을 거쳐 1666년 예조참판, 이듬해 도승지에 이어 판윤이 되었다.
1669년 우윤으로 보전문서사관(寶篆文書寫官)이 되었으며, 1672년 한성부판윤으로 다시 동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4년 산릉도감제조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1677년(숙종 3) 형조판서로 시관이 되어 부정을 저지른 죄목으로 철원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이어 판돈령부사가 되고, 1685년 판의금을 거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전서(篆書)와 주서(籒書)에 뛰어났으며, 글씨로는 〈민기신도비(閔箕神道碑)〉‧〈이순신명량대첩비(李舜臣鳴梁大捷碑)〉‧〈영안위홍주원비(永安尉洪柱元碑)〉‧〈호판이경직비(戶判李景稷碑)〉‧〈판추김시양비(判樞金時讓碑)〉‧〈감사강홍중비(監司姜弘重碑)〉‧〈형참이소한비(刑參李昭漢碑)〉‧〈정여창비(鄭汝昌碑)〉‧〈예참홍주국비(禮參洪柱國碑)〉 등 다수가 있다.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이공(李公) 신도비명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찬
공은 휘는 정영(正英), 자는 자수(子修), 호는 서곡(西谷)으로 종성(宗姓) 출신이다. 정종(定宗)은 아들이 열다섯이니, 그 열 번째가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이다. 3세(世)를 지나 함풍군(咸豐君) 계수(繼壽)에 이르니, 이분이 공의 고조가 된다. 증조는 증(贈) 찬성(贊成) 휘 수광(秀光)이요, 조부는 동지중추부사 휘 유간(惟侃)이요, 부친은 호조 판서 효민공(孝敏公) 휘 경직(景稷)으로 효성으로 정려(旌閭)가 섰다. 모친 보성 오씨(寶城吳氏)는 첨지중추부사 경지(景智)의 따님이다.
공은 광해 8년인 병진년(1616) 6월 16일에 태어났다.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모친이 돌아가니, 동향 사람 청평군(靑平君) 심륜(沈惀)이 가엾게 여겨 첩실(妾室) 변씨(邊氏)로 하여금 거두어 기르게 하였고, 그 부인 윤씨(尹氏)가 또 직접 가르쳤다. 청평군이 외군(外郡)에 있는 경우가 많아 공을 데리고 가니, 12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경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효민공이 가서 보았으나 공이 아직 부친의 얼굴을 알지 못하였다. 청평군이 말을 해 준 뒤에 알게 되어 부친에게 절을 하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비 오듯 눈물을 쏟으니, 좌객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때부터 가정에서 수학(受學)하였다. 조부가 아직 무양(無恙)하여 효민공 형제가 몸소 극진히 봉양하였다. 공은 닭이 울면 일어나 소세하고 머리를 빗고서 부친과 숙부를 따라서 조부의 처소에 이르러 부축해 드리고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가려운 곳을 긁어드리는 것을 할아버지의 뜻에 맞게 하고 한가할 때는 글 읽기를 쉬지 않으니, 계모(繼母) 이씨 부인(李氏夫人)이 가상히 여기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효민공이 복상(服喪) 중이었을 때에 공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병자년(1636, 인조14)에 등제하였다. 곧이어 병난(兵難)을 만나 효민공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어가(御駕)를 호종하니, 공이 이씨 부인을 모시고 강도(江都)로 들어가 쌀을 져 나르고 땔나무를 하여 조석으로 공궤(供饋)하였다. 강도가 함락되자 모친을 모시고 나오면서 자식은 버린 채 돌아보지 않았다.
정축년(1637)에 괴원(槐院)에 분관(分館)되었다.
무인년(1638)에 사국(史局)으로 들어가 검열과 대교가 되었으며 주서로 옮겨졌다가 봉교에 천전되고 전적으로 승천(陞遷)하였으나 친혐(親嫌)으로 인해 조용되지 못하였다.
경진년(1640)에 부친상을 당하여 집상(執喪)에 예를 다하였다.
임오년(1642)에 상기를 마치고 예조 좌랑이 되었으며 정언으로 천전되었다. 체차되어 병조 좌랑이 되고 다시 정언에 제수되었으며 사서에 이직되었다.
계미년(1643)에 세자를 따라 심양(瀋陽)에 가서 일에 따라 올바르게 규간(規諫)하였다. 정명수(鄭命壽)가 노적(奴賊)의 위세를 빌려 공갈하고 협박하여 뇌물을 얻고자 하였다. 세자가 걱정하자, 공이 홀로 아뢰기를, “저군(儲君)께서 여기에 계시니 또한 작은 조정입니다. 묻는 것이 있으면 당연히 스스로 답변해야 하지 어찌 멀리 있는 본조(本朝)까지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답을 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정명수가 기가 꺾여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겨울에 세자를 따라 우리나라로 돌아와 예조 좌랑에 체배(遞拜)되었으나 일로 인해 파직되었으며 병조 좌랑에 서용되었다.
을유년(1645, 인조23)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정해년(1647)에 상기를 마치고 병조 좌랑을 거쳐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
무자년(1648)에 영동(嶺東)과 영남(嶺南)을 염문(廉問)하였고 수찬을 거쳐 교리에 천전되었으며 중간에 정언이 되었다.
기축년(1649, 효종 즉위년) 겨울에 장릉(長陵)의 애책문(哀冊文)을 써서 올렸는데 자급이 낮다 하여 단지 구마(廐馬)만 하사하였다. 한학 교수(漢學敎授)를 겸하였고 기내(畿內)를 염문하였다.
경인년(1650)에 헌납과 수찬이 되었다. 일에 연루되어 파직되었으나 곧 서용되었다.
신묘년(1651)에 교리가 되었다. 입시하여 임금 앞에서 부제학 이지항(李之恒)의 탐오함을 논핵하였는데 간관이 도리어 공을 배척하였다. 이 때문에 하옥되었으나 언관(言官)의 말에 힘입어 풀려났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파산(罷散) 상태로 있었다. 뒤에 이지항이 실각하자 특별히 서용되어 다시 수찬이 되었고 사서를 겸하였다. 그러나 일로 인해 파직되었다가 교리로 서용되었다. 이조 좌랑이 되었으나 고과를 중(中)으로 맞아 또 해직되었다가 다시 수찬에 배수되었고 이조 정랑에 천전되고 문학을 겸하였다. 조석윤(趙錫胤), 박장원(朴長遠)이 일을 말하다가 찬적(竄謫)되자 공이 상소로 간하였는데 임금의 뜻에 거슬려 정사(呈辭)하여 체차되었다.
갑오년(1654)에 부응교로 천전되었다. 홍우원(洪宇遠)이 간언으로 인해 죄를 입었는데 대각이 이미 명을 환수하기를 청해 놓고 곧바로 정지하였다. 옥당이 언관을 논박하여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노하여 모두 출척하여 보외(補外)하였다. 그래서 공이 가산 현감(嘉山縣監)이 되었다. 가산은 작은 고을로 대로(大路) 변에 위치해 있고 또 무인(武人)이 수령이다 보니 그 백성들이 곤궁하고 피폐하였다. 공은 부임하여 지친 자를 쉬게 하고 파리한 자를 소생시키고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었으며, 미염(米鹽)과 재물을 부서(簿書)에 정연하게 기록하니 아전의 간사한 행위가 용납될 수 없었으며, 교량과 관우(館宇) 및 응접에 소용되는 기구 등 빈려(賓旅)를 맞이하기 위한 것들을 모두 부족하거나 결여되지 않게 하였으며, 향약(鄕約)을 정비하고 좋은 스승을 골라 고을의 자제를 가르치고 몸소 권면하고 힘쓰니, 2년 사이에 민풍(民風)이 크게 변하였다. 관서(關西)는 호강(豪强)과 무단(武斷)의 풍속이 많았다. 고을에 교활한 아전이 있었는데 감영의 위세를 믿고서 관리를 능멸하고 백성의 재물을 빼앗았다. 심지어 매질까지 해가며 곤궁하고 약한 자들을 사사로이 위협하자 공이 그 죄를 다스리고 빼앗은 재물을 돌려주었다. 서리가 또 앙갚음하려고 계책을 꾸미자 공이 그 정황을 알고 순사(巡使)에게 말하여 그 죄를 끝까지 처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순사가 이미 승낙해 놓고 다시 태도를 바꾸었다. 공이 마침내 이 서리를 장살(杖殺)하니,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그렇지만 공 역시 함부로 죽인 것으로 인해 체포되었다. 혹자가 공에게 사실대로 대답하지 말도록 권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춘천(春川)으로 귀양 갔다가 특별히 강서(江西)로 이배(移配)되었다. 가산의 백성들이 공이 백성을 위하다가 죄를 입은 것을 원통해하여 위로하고 음식을 주는 발길이 이어졌고 도로에서 보호하였으며, 인근 고을에서도 온 자가 많았다.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이 각각 공을 위해 비문을 세워 덕정을 칭송하였다. 이듬해에 풀려나 돌아왔다.
정유년(1657, 효종8)에 종부시 정에 서용되었다. 상의원 정으로 옮겼으며, 사인으로 이배(移拜)되었고 필선과 보덕을 겸하였다. 세 차례 사간이 되어 이민구(李敏求)를 서용하라는 명을 환수하게 하였다. 연이어 응교, 부응교가 되었다. 7월에 동부승지로 승진하고 좌승지에 이르러 체차되었다. 형조 참의와 참지를 역임하였다.
기해년(1659)에 은대(銀臺)로 돌아왔고 체차되어 참지가 되었으며 다시 좌승지가 되었다. 대행왕(大行王)의 명정(銘旌)을 써서 올려 자급이 올랐다.
경자년(1660, 현종1)에 부총관(副摠管)이 되었으며, 병조 참판에 옮겨 제수되었다. 대사간에 배수되어 정사의 잘못과 백성의 폐막에 대해 논하였으며, 체차되어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신축년(1661)에 연경(燕京)에 사신을 갔고 돌아와 우윤이 되었으며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다시 대사간이 되어 조형(趙珩)을 국문(鞫問)하는 것에 대해 간쟁하니, 상이 노하여 관작을 삭탈하였다.
갑진년(1664, 현종5)에 서용되어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공은 민력의 피폐가 관향곡(管餉穀)을 마구 거두는 데에서 기인한 것임을 익히 알고 있는지라 번다하고 가혹한 것을 모두 견감해 주고 오직 절약하여 비용을 줄이는 것으로 근본을 삼으니, 창고에 쌓인 곡식이 전보다 몇 배가 늘게 되었다.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조사하여 역말로 조정에 보고하여 혁파하였으며, 변새(邊塞)의 성루(城壘)는 멀고 외진 곳이라 종전에는 이르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모두 몸소 일일이 순시하였으며, 그곳 자제들을 모아서 각각 그 기예를 시험하고 곤궁한 자와 늙은 자를 불쌍히 여겨 옷감을 마련해 주고 효자와 열부를 포상하여 정문(旌門)을 세워주었으며, 행차가 그 집에 이르면 후히 무휼(撫恤)하였다. 그리하여 변방의 백성들이 뛸 듯이 기뻐하였으니, 난생 처음 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병오년(1666) 봄에 임기가 차 예조 참판이 되었는데 포로가 도망하여 돌아온 일이 발각되어 우리 조정에 힐문하려고 사신이 나오게 되자 공으로 하여금 머물러 대응하게 하였다. 이에 공이 만상(灣上)으로 달려가니, 청나라 사신이 끝까지 캐묻고 통관(通官)이 따라서 위협하였다. 그렇지만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날마다 빈사(賓使 김좌명(金佐命))와 더불어 투호(投壺)를 하고 활쏘기를 하였다. 조정이 뇌물을 주는 것을 허락하였지만 공은 내켜하지 않고 아뢰기를, “통관은 본디 힘을 쓸 수 없으니, 일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대간의 탄핵을 당하고 말았으니, 뇌물을 지나치게 썼다는 이유였다. 서용되어 형조 참판에 배수되었고 병조 참판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지신사가 되었으며 체차되어 좌윤이 되었다.
무신년(1668)에 지신사, 형조 참판, 대사간을 역임하였고 이조 참판이 되었다가 탄핵을 당하였으며 호조 참판이 되었다. 절사(節使)가 되어 다녀온 공으로 자급이 오르고 판윤이 되었으나 또다시 관서 때의 일로 탄핵을 받아 새로 받은 자급을 환수당하였다. 조정이 처음에는 민폐(民弊)를 염려하여 관향(管餉)의 조곡(糶穀)을 줄이고 포(布)를 거두었으나 이내 다시 중지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이익을 다투다가 믿음을 잃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여 상이 공에게 편의에 따라 수량을 채워 넣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그 보충하고 바꾼 내역이 문부(文簿)에 갖추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정만화(鄭萬和)가 공의 후임이 되어 공이 값을 줄이고 뒤섞어 기록했다고 지목하였고, 내직으로 들어와 간장(諫長)이 되어서는 은밀히 동료를 사주하여 공을 논핵하게 하니, 박공 장원(朴公長遠)이 “공은 청렴과 근실함으로 자신을 지켰으니,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는가.” 하면서 소장을 올려 공을 변호하였다. 공은 이로부터 가솔을 모두 이끌고 해도(海島)로 들어가서는 소명(召命)에도 나오지 않았다.
신해년(1671, 현종12)에 개성 유수(開城留守)에 배수되었다. 기근과 역병이 계속 이어졌는데 공이 마음을 다해 구휼한 덕에 목숨을 건진 자가 매우 많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조 판서에 발탁되고 판윤으로 이배되었으며, 빈사(賓使)가 되었다. 겨울에 절사(節使)에 충차(充差)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은(謝恩)을 겸하게 되어 부사(副使)가 되었다. 전후로 연경에 사신을 다녀올 때에 보따리에 든 것은 서적뿐이었다. 돌아와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공조 판서로 옮겼다.
계축년(1673)에 천릉(遷陵)하는 역사를 감동(監董)하여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자급이 올랐다. 중간에 일로 인해 하옥되어 파직되었으나 서용되어 지의금부사가 되었다.
갑인년(1674)에 또 공조 판서를 맡았고 산릉(山陵)의 역사를 감동하여 자급이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올랐다. 가을에 또 숭릉(崇陵)의 역사를 감동하였다. 일을 마치고 나서 자급이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오르고 이조 판서가 되었으나 또다시 탄핵을 당해 체차되고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소명에 나오지 않은 일로 파직되었다가 판윤에 서용되었다. 윤휴(尹鑴)가 금송(禁松)을 작벌(斫伐)하자 공이 해직을 청하면서 이를 논하니, 군소배(群小輩)들이 더욱 공을 미워하였다. 윤휴가 비로소 중용되어 온 세상이 그에게로 쏠렸으나 유독 공만이 윤휴를 두고 마음가짐이 바르지 않다고 하였는데 윤휴가 실각하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공의 선견지명을 인정하였다. 일에 연루되어 해직(解職)되어 판중추부사가 되었고 형조 판서를 맡았으며 체차되어 다시 판윤이 되었다.
병진년(1676, 숙종2)에 대비(大妃)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일로 부사(副使)가 되어 사신을 다녀온 공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자급이 올랐고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판윤을 겸하였다. 판돈녕부사로 이배되었으며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숭릉의 사초(莎草)에 관한 일로 하옥되어 파직되었다가 판돈녕부사에 서용되었으며 형조 판서를 겸하였다.
정사년(1677, 숙종3)에 또 시제(試題)가 기휘(忌諱)를 범한 일로 하옥되어 철원(鐵原)으로 귀양 갔다.
무오년(1678)에 용서를 받고 해도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판돈녕부사에 서용되었으며 형조 판서를 겸하였다. 체차되어 판윤에 배수되었다. 투서(投書)에 연루되어 해직되었으나 이내 다시 판윤이 되었다. 특별히 좌찬성에 제수되었으나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 체차되어 다시 판돈녕부사가 되었으며 판윤을 겸하였다.
경신년(1680)에 허견(許堅)과 이남(李柟)의 역옥(逆獄)이 일어나자 한밤중에 판의금부사에 배수되어 유문(留門)한 상태에서 부름을 받고 들어가 국문에 참여하였으나 작은 일로 인해 해직되었다. 공조 판서를 겸하였고 예조 판서에 옮겨 제수되었으며 빈사(賓使)가 되어 서도(西道)에 나갔다.
임술년(1682)에 형조 판서에 배수되었다.
계해년(1683)에 또다시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갑자년(1684)에 경사(慶事)로 인해 음식을 하사하자 모두 족당(族黨)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하사를 영예로 여긴 것이다.
을축년(1685)에 나이를 이유로 치사(致仕)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기사(耆社)에 참여하였다.
병인년(1686)에 병이 심해져 또다시 치사하니, 어의(御醫)를 보내 병세를 살피게 하고 약물을 하사하였다. 공은 병이 이미 손을 써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부축을 받고 일어나 앉아 손수 소장을 써서 사은하였고, 사후(死後)의 일을 빠짐없이 세세히 일러주었는데, 염습과 장례는 검소함을 따르고 제사는 간소하고 정갈하게 하는 데에 힘쓰며 시호를 청하지 말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부인을 물리치고 가까이 있지 못하게 하였고, 임종 때에 정신이 맑지 못하였으나 친척과 문병 온 사람들과 작별하고 평온히 서거하니, 병인년 4월 2일의 일이요, 향년 71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철조시(轍朝市)하였고, 조제(弔祭)와 치부(致賻)를 예법대로 하였다. 이달 윤5월 3일에 과천(果川) 북쪽 작현(鵲峴)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효민공의 묘소와 5리(里) 떨어진 곳이다. 관서의 선비와 백성들이 서로 부의를 전하는 것이 마치 명령에 달려가는 것 같았다.
공은 효성과 우애를 타고났고 가정의 훈도를 받아 품행이 남보다 뛰어났다. 일찍 오씨 부인을 여읜 것을 지극한 통한으로 여겨 어미젖을 먹고 있는 아이를 보면 문득 슬픔에 젖어 눈물을 흘렸고 매번 기일(忌日)이 되면 시종일관 애통해하였다. 임종 때에 자식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살아생전에 어머니의 얼굴을 모른다. 죽어서 만약 지각이 있다면 돌아가 슬하에서 모실 것이니, 나를 어머니의 무덤 발치에 묻어주면 다행이겠다.” 하였다. 효민공이 거상(居喪) 중에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몸이 야위자 온 힘을 다해 보살펴드렸고 부친이 옷을 입지 않으면 감히 먼저 방한복을 입지 않았다. 청평군 내외를 부모처럼 섬겨서 청평군이 돌아가자 복만 입지 않았을 뿐 아비를 잃은 듯이 하였으며, 변씨가 죽자 신주를 세우고 제사하였다. 항상 자식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지난날에 심씨(沈氏)가 아니었다면 내 어찌 오늘날이 있었겠는가.” 하였다. 계부(季父) 백헌공(白軒公 이경석(李景奭))을 부모처럼 섬겨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모두 여쭈었고 가르침을 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관서(關西)에 있을 때에 색다른 음식이 생기면 감히 먼저 맛을 보지 않았으며, 계부가 돌아가자 궤연(几筵)을 떠나지 않았고 1주기가 지난 뒤에야 평상시의 침소로 돌아와 거처하였다. 형제와 자매를 대할 때에 우애가 지극하였으니, 중형(仲兄)이 매우 곤궁하여 공에게 의지하여 끼니를 이었고 자녀들을 성취시킬 때에도 공의 도움이 꼭 필요하였으며, 중형이 죽자 어린 조카들을 거두어 양육하였다. 그 막내가 와서 공부하게 되자 울면서 회초리를 치며 말하기를, “이렇게 하지 않고서도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내가 어찌 차마 이리 하겠는가.” 하였는데 그 조카가 급제하였을 때에 공이 또 울면서 말하기를, “이제야 우리 형님을 지하에서 뵐 수 있겠구나.” 하였다. 손위 누이와 옆집에 살았는데 조석으로 가서 살펴보고 적은 음식이라도 반드시 나누어 먹었다. 형의 딸이 역병에 걸리자 몸소 구완하여 자제가 반복하여 말렸는데도 듣지 않았다. 곤궁한 친족을 두루 보살펴 혼인과 상사에 돌보아 주고 도움을 줄 때에 반드시 그 힘을 다하였다. 자식을 가르칠 때에는 엄하게 하였으니, 자식들이 종일토록 시좌(侍坐)하고 있으면서 공이 묻지 않으면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고, 자식들의 잘못은 반드시 준엄하게 책망하여 용서하지 않았다. 항상 《자경편(自警編)》을 책상 위에 놓아두고 사군(事君)과 처신(處身)의 준칙으로 삼았다.
심양에 있을 때부터 영릉(寧陵)의 지우를 입었는데 어찰(御札)과 어제(御製)를 상자에 간직해 가보로 전하였고 이따금 깨끗이 손을 씻고 엄숙하게 낭송하면서 서럽게 울곤 하였다. 작은 일을 들추어내어 곧다는 이름을 얻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봉공(奉公)하여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온실(溫室)의 경계를 본받아 일찍이 사람들에게 공무에 관해 말한 적이 없었으니, 옥사(獄事)를 다스릴 때에는 사람들이 옥사의 상황에 대해서 물으면 벌써 잊었다는 말로 답하였다. 궐정(闕庭)에 출입할 때에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었고 겸손하고 성실하며 온화하고 관후하여 사람들을 대할 때에 급하게 말하거나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으며 한가로이 있을 때에 지루해하는 마음과 게으른 모습이 전혀 없었다. 방을 깨끗이 소제하고 궤안을 반드시 정돈하고서 온종일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말을 하거나 웃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김공 좌명(金公佐命)과 박공 장원(朴公長遠)이 모두 당대의 빼어난 명류(名流)였는데 이들과 모두 마음을 허여해 벗으로 사귀었다. 늘 한 창려(韓昌黎 한유(韓愈))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는 내가 하찮게 여기는 바이다.”라는 구절을 암송하면서 말하기를, “말속(末俗)을 경계할 수 있다.” 하였으니, 세상이 공을 훌륭하게 여기는 것도 이 때문이고 공을 노여워하는 것도 이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공은 재물에 초연하였다. 심양에 다녀올 때 여장(旅裝)이 갖추어지지 않자 노복 하나가 백금(百金)을 주고 자신의 노비 문서를 샀는데 그 반만 받고 나머지는 돌려주었고, 돌아올 때에 자루에 남은 노자가 있자 모두 동행했던 의원(醫員)에게 나누어 주었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공에게 제방을 쌓아 밭을 만들 것을 요구하였으나 공은 거절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누차 사송(詞訟)을 담당하는 아문의 장(長)을 맡았으나 뜰에는 사사로이 청탁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으며 지위가 삼공(三公)의 반열에 있었으나 대문이 쓸쓸하여 참새 그물을 칠 수 있을 정도였다. 일찍부터 필연(筆硯)에 종사하여 전주(篆籒)에 두루 통하였으니, 위로 전각의 편액(扁額)으로부터 아래로 진신(搢紳)의 비갈(碑碣)에 이르기까지 공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투호와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일찍부터 술을 가까이하여 이따금 술로 인한 실수가 있었는데 관서(關西)에 부임하게 되었을 때에 백헌공이 글을 써서 경계하니, 종신토록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만년에 서교(西郊) 밖에 집을 짓고 동산을 가꾸고 도서(圖書)를 모았는데 ‘보만(保晩)’이란 편액을 걸고서 여생을 보냈다.
전 부인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부사(府使) 장세(長世)의 따님으로 공보다 47년 먼저 별세하였다. 처음에 오씨 부인의 묘 아래에 장사 지냈다가 뒤에 공의 무덤에 부장(祔葬)하였다.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 만성(晩成)은 목사이고, 딸은 참판 송광연(宋光淵)에게 시집갔다. 후 부인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학생(學生) 기선(基善)의 따님으로 학문에 두루 통달하고 지식이 해박하였다. 공보다 5년 뒤에 별세하여 역시 공의 무덤에 부장하였는데 묘혈(墓穴)은 같이 쓰고 묘실(墓室)은 달리하였다. 1남 6녀를 두었으니, 아들 대성(大成)은 지평이고 딸은 현감 김창국(金昌國), 학생 홍치상(洪致祥), 승지 윤지인(尹趾仁), 진사 조하언(曺夏彦), 부사 심정보(沈廷輔), 사인(士人) 임사원(任士元)에게 시집갔다.
만성은 아들이 없어 아우의 아들 진유(眞儒)를 데려와 후사로 삼았다. 대성은 5남 2녀를 두었으니, 맏이는 바로 진유이고 그다음은 진검(眞儉), 진휴(眞休), 진급(眞伋), 진위(眞偉)이다. 송광연, 김창국, 심정보는 모두 아들이 없다. 홍치상은 1남을 두었으니, 태유(泰猷)이다. 윤지인은 4남을 두었으니, 맏이는 심(審)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조하언은 4남을 두었으니, 맏이는 명종(命宗)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임사원은 5남을 두었으니, 모두 어리다. 진유는 2남 1녀를 두었으니, 어리다.
대성이 송 참판(宋參判)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신도비명을 부탁하였다.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삼가 행장에 의거하여 공적과 행적을 차례로 기술하고 그 끝에 시를 붙인다. 시는 다음과 같다.
석문공과 백헌공에 대해서는 / 石門白軒
세상이 그 어짊을 허여하였나니 / 世歸其賢
그 효성과 그 충성을 / 惟孝惟忠
뉘라서 필적하겠는가 / 誰與齊肩
공은 선대의 명성을 이어 / 有嗣厥聲
선대보다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 勿懈于先
독실하게 실천하여 / 執行醇實
절조를 굳게 지켰다네 / 載貞以堅
분경(奔競)의 풍조를 누를 만하였으니 / 可鎭躁競
곱게 보지 않음은 당연한 일 / 宜莫我姸
공은 우뚝하게 지위에 있다가 / 公孤有位
나이 일흔에 기로소에 들었고 / 耆耋有筵
옥관자에 서각대를 두르고서 / 戴玉垂犀
단아한 모습으로 진퇴하였네 / 進退躚躚
빗돌에 명문을 새기니 / 刻銘山石
그 내용 틀림이 없다네 / 陳辭不愆
후세 사람들이 이를 믿고서 / 來之信之
천년만년 제사를 받들리라 / 歷祀萬千
判敦寧李公謚狀 만정당(晩靜堂) 서종태(徐宗泰) 撰
公諱正英。字子修。號西谷。系出國姓。定宗恭靖大王別子德泉君諱厚生。生諱孝伯。新宗君。生諱貴丁。莞城君。生諱繼壽。咸豐君。寔爲公高祖。曾祖諱秀光。贈左贊成。大父諱惟侃。同知中樞贈領議政。考諱景稷。號石門。行戶曹判書贈領議政謚孝敏公。以孝旌閭。妣貞敬夫人寶城吳氏。僉知景智之女。以萬曆丙辰生公。幼有美質。不喜嬉戱。器宇異凡兒。其在庭也。進退唯諾之節。油油翼翼。悉有規度。見者已識其爲法家子弟。石門公與弟議政白軒公。每於雞鳴。候于父母寢所。公必先盥櫛。而候石門公。隨而進候於王父母。未嘗懈也。二公多夙夜于朝。公左右扶侍。同樞公。至厠牏之事。悉躬尸之。甚宜同樞公意。稍有隙則日讀諸經書。吾伊不輟。文藝夙成。及同樞公之喪。至期處外舍。以石門公在憂。不赴擧。制除。始就試。二十一。擢丙子別試文科。未唱榜而有寇難。石門公扈駕南漢。公奉母李夫人入江都。負米採薪。以爲供。及虜入事急。得一款段。護李夫人。一子在襁褓。未及提挈。徒涉氷雪。彷徨海岸。適有一船來濟全。家人以爲至誠所感。丁丑。選補槐院。戊寅薦入史館。由檢閱。轉待敎。移注書。公工筆翰。嫺於記注。觀者屬目。遷奉敎。陞典籍。因白軒公秉銓。避親例不調。庚辰。遭石門公憂。處喪盡禮。終喪不脫衰。未練。菜果不近於口。李夫人被疾。公躬執湯煎。承奉愉適。有人不能及者。夫人歎其誠孝。未覺其非己出也。服闋。拜禮曹佐郞。移司諫院正言。兼春秋館記事官。歷兵曹佐郞。又拜正言。遷侍講院司書。癸未。從世子于瀋中。隨事規諷。深得宮僚體。賊奴命壽。托言有査問事。招本朝備邊諸臣甚急。蓋與狡譯馨長。相表裏。恣行虛喝。世子詢問僚屬。公奮然曰。儲君在此。羣僚咸造。亦一小朝廷。如有問。自此宜有對。何可遠煩本朝。倘有此事。吾輩當呈文該衙門。賊奴氣沮。不復言。冬。陪東宮東還。遞拜禮曹佐郞。以微事罷。旋拜兵曹。乙酉。遭李夫人憂。秉禮如前喪。丙戌。參玉堂選。丁亥。制除。由兵曹。拜副修撰。以繡衣。廉問嶺東嶺南左道。連拜館職。己丑。移正言。彈江原監司柳碩當國哀。食肉公座。辭甚截直。屢遷玉堂,諫院。寫進長陵哀冊文。有陞資之命。以職未準。因臺言收還。受廏馬之賜。拜校理。兼漢學敎授。承命廉問畿內。前後褒黜公嚴。愜於公議。庚寅。由校理。再移獻納。有星變。疏陳修省之道。指語剴切。承優批。以館職違牌罷。旋敍校理,獻納。兼實錄都廳,漢學敎授。日月遷除。在三司。間拜騎省。辛卯。以校理。入侍前席。論玉堂之長不廉狀曰。臣羞以爲長官。右之者紛然斥公。上命廷尉問。言路執不可。遂罷職。亡何。特敍。上察公直言不避當路也。拜修撰,兼司書。不參試射罷。敍校理。移授吏曹佐郞。銓郞世號極選。得之不能無資。援公名論。宜早在是選。而素簡靖。不事交游。今始拜。論者以爲遲。以功喪未成服。不參考課。貶遞。人稱其嚴於禮節。還修撰。復兼實錄都廳。陞吏曹正郞,兼文學,校書館校理。帶三字銜。趙公錫胤,朴公長遠。言事被謫。公陳疏請寢。承嚴批辭遞。拜副校理,獻納。又辭遞。甲午。歷校理,吏曹正郞。陞拜副應敎。洪宇遠以言被譴。臺閣請收還。旋卽停論。公與館僚陳箚遞之。上震怒。特補嘉山縣監。關邑謠。俗懻忮。公以革弊興學爲先。理米鹽。簿書井井。吏不得容其奸。以至館宇橋梁饔餼之待賓旅者。咸修而無廢。頒呂氏鄕約。以淑民風。而不率敎者。曉以八刑之科。擇置訓長。敎邑民之秀者。而親自考課。二年之間。俗丕變。士彬然嚮學。旁邑諸生。多來學焉。邑有悍民稱刁瞷。夤緣蹊逕。攘窮民土田臧獲。又私設刑具以脅之。公治其罪而還其所奪。其民潛附淸使通官。將生事于本邑。公詗其狀。言於按使。按使始從而終違。蓋賕入之也。公憤曰。吾寧受擅殺之罪。何可養蛇虺。以害良善乎。遂杖殺之。衆咸快焉。按使以擅殺聞。就詔獄。或言直以杖殺爲供。勘律必重。不如稍遷就其辭。公曰。吾平生誦高允之言。不可易操而欺吾君。終以實對。配春川。命移本道江西縣。赴配也。嘉山及旁郡人。多來逆中路。隨至配所以護之。蓋悍民族類寔繁故也。嘉之士民。樹碑頌德惠。周年賜環。丁酉。敍拜宗簿寺,尙衣院正。移舍人,兼弼善,輔德,中學敎授,實錄都廳。三拜司諫。改副應敎,應敎。加階拜承政院同副承旨。轉至左遞。爲刑曹參議,兵曹參知。己亥。還拜承旨。遞拜兵曹。書進堂額。宣醞。賜文房諸具。孝廟大喪。初拜承旨。寫進銘旌。進嘉善階。遞拜副摠管,兵曹參判。拜大司諫。連上封事。陳政疵民瘼。顯廟皆優批嘉納。移都承旨兼觀象監提調。辛丑。以副价。赴燕還。拜漢城府右尹兼同知義禁。改大司諫。重臣以微眚被拿鞫。公以刑不上大夫爭之。上怒命竄。用言者。降以削職。甲辰。敍授平安道觀察使。公以前此按本道之人。常務斡轉財貨。以見材諝而致有公私俱病。凡係聚斂之政。一切蠲除。唯以節縮浮費。爲裕財之本。謹守法度。斤斤淸嚴以自律而束下。倉庾所積。倍蓰舊案矣。巡審之日。咨詢民間疾苦。次第驛聞而罷行之。窮塞遠砦。從前使車之所不到。靡不遍歷。以觀山川形便。所過聚文武子弟。各試其藝。而仍行勸懲。窮民之尤甚寒窶者。給衣資。年八十以上者。給絹絮。訪問孝烈著者。啓請旌閭。或躬至其家。厚加存恤。邊民鼓舞之。丙午。任滿。拜禮曹參判。先是。被擄人有走回者。淸國使來。以不卽刷還。有嘖言。朝廷欲令公自當。命仍其任。而大臣諷白軒公。通其意。公曰。苟有急。死且不避。吾固欲自當。況有朝令乎。卽馳進灣上。査使問曰。曾聞于朝乎。公曰未也。通官輩。危喝百端。公不爲動。與儐使金公佐明。日投壺射帿。意象安閒。金公歎服以爲不可及。朝廷爲慮。事將不測。許令行賂周旋。公曰。吾習知彼中事。事機已成者。非通官所能容力。況可爲自紓禍。敢過費公貨乎。例遺之外。無甚增益。而臺言謬。以是論罷。聞者冤之。敍拜刑曹參判,副摠管。遷兵曹兼金吾。再授都承旨。改左尹。戊申。又拜都承旨,刑曹參判,大司諫。應求言旨。上疏條陳時務。承優批。尋移吏曹參判兼同知成均。不悅者論之。公歷敭華塗。入銓貳。人望所歸。而忽有是參。時議咸駭。公素不樂要路。無少介意。屢疏祈免。溫批慰諭。遞拜戶曹參判,同知義禁。以冬至使加階。爲判尹,諫官。以關西時事論罷。仍改正新資。先是。朝廷慮餉穀太殷。而爲民弊。初令減糶而貿布。旋命中寢。公以爲事近爭利。令歸失信。屢啓論爭。上命付監司。隨便措畫。以充本穀。公夙夜拮据。以他穀還備旣多。方値歲歉。以其布換銀貨。要以待豐取穀。文簿昭在。而以其只錄元數。未曾區別開坐。其後按使不能詳察其實。臺官又過信流言論之。及其行。査事悉白。無毫毛跡。而噎媢者持之不已。久堂朴判書長遠。常曰。以李某甫之淸謹自守。寧有是耶。在政路。連擬公淸選。臺諫雖移攻之而不悔。又陳疏訟公冤。公自是益無意於當世。遂挈家歸海庄。屢有除命。不就。己酉。以貞陵寶篆書寫官。有召旨。不得已入。拜右尹除命。寫訖歸辭遞。辛亥。拜開城留守。値歲惡。饑癘溢目。公殫心賙救。親監其賑所。全活甚衆。赴召。書進王世子嬪敎命文。受廏馬之賜。未幾。擢授刑曹判書兼掌樂院提調。遞拜判尹兼內資提調,都摠管。以遠接使西出。爲冬至正使。使事兼謝恩。降副使。前後燕行。行李蕭然。橐中只圖章書籍而已。觀者美之。還拜知樞判工曹。癸丑。差遷陵都監提調。因事就理罷。用敦匠勞。加正憲階。敍拜知義禁,備邊司提調。上御春塘臺。試文武。公承命入射。上特取覽所中箭。重歎賞。面賜廏馬。甲寅春。仁宣王后喪。以工曹判書。監董山陵。書進謚冊銘旌。事竣。賞加崇政。八月。顯廟賓天。又差監董之任。移議政府左參贊。大臣以公熟諳山陵事。啓遞參贊。還工曹。承命寫誌文。加崇祿。拜吏曹判書兼知經筵。黨人惡其異己而彈之遞。授知樞。三違試官召牌罷。尋敍拜判尹兼歸厚署提調。時尹鑴恣斫京山禁松。人不敢言。公因辭疏。陳其狀。時議大恚。以崇陵寢閣事。臺諫論罷。上特命勿罷。仍得遞兼司䆃寺提調,都摠管。拜判中樞府事,刑曹判書兼瓦署提調。遞拜判尹。丙辰。以進王大妃徽號副使。進輔國資。送西。爲知中樞。仍兼判尹。移拜判敦寧府事兼判義禁。崇陵莎草有崩頹。有拿命。奏當收職牒。命只罷職。敍復判敦寧兼刑曹判書,備局提調。丁巳。爲增廣會試試官。賦題無他意。而臺官以觸時諱誣論之。同諸試官。皆就拿。公配鐵原。明年。放還。直歸海庄。敍拜判敦寧兼刑曹判書,造紙署提調。屢疏乞遞。溫批不許。遞拜判尹。因李鳳徵疏斥。陳章待罪。批旨以前者試題。出於無情。鳳徵之言。已知其爽實爲敎。時凶賊有湞投書江都。謀禍搢紳。多引退處諸卿宰。而公名在其中。至詗察及門。公卽詣闕外待命。有敎勿待命。解判尹。旋復拜。特授左贊成。諫官因嫌怨嗛公者。請改正。終不允。時相陳公情難安。始許遞。還判敦寧兼判義禁判尹。辭遞金吾。庚申。逆獄起。鞫事急。夜拜判義禁。入參議讞。因事遞金吾。獄竟。參從勳。兼工曹判書,司宰監提調。移禮曹判書。以儐使西赴還。拜判義禁,內局提調。壬戌。上臨春塘臺。又射中帿。命面給廏馬。拜刑曹判書,判敦寧。又兼判金吾。甲子。以慈懿大妃周甲。命賜仁祖朝侍從臣食物。公與焉。拜箋陳謝。盡以分諸親黨。榮上賜也。乙丑。公年七十。引禮乞致仕。累疏不許。入耆老社。丙寅。公疾示憊。復申休致之請。上遣太醫。看病賜藥物。異數也。公病已革。而扶坐流涕陳疏。以伸感戴之意。遂命後事。殮葬皆從儉素。祭祀必務簡潔。俾勿請謚求挽。屬纊前一日。悉屛諸婦女。親戚來問者。皆請入見與訣。神明不爽。怡然委命。告終于居第之正寢。卽四月初二日也。春秋七十一。訃聞。輟朝二日。弔祭賻贈如例。逾閏月至五月。葬果川北鵲峴里坐酉之原。距石門公墓五里而近。遵公遺戒也。公之喪。大夫士識公者。咸咨嗟相弔曰。朝亡德人矣。市巷惜曰。失賢宰相矣。關西士民。以文通喩一道曰。李公有德惠於我。以米作木一事。尤出恤民至意。而橫被汙辱。民實寒心。今聞喪。宜各備賻儀。以表沒世不忘之意。列邑爭斂物致之。如趨公令。嗚呼。此誠公誦出於平素之有以感動。豈以一朝勢利而得之者。哉同樞公世稱厚德君子。石門公與白軒公秉忠孝之節。並列於朝。蔚爲一世楷範。有萬石君之謹篤。有柳公綽之和莊。世之論士大夫之有家法者。必以公家爲首。公之德美。不獨本於天資。而以少長擩染於典訓之中也。公凝重寬夷。而內蘊剛毅。平居寡言笑。容儀莊整。人自起敬。及其接物。謙和之氣。藹然達於色辭。孝友篤至。實有高出古人者。生而失恃。生平以不識慈顏。爲至痛。自兒時。每見人母子乳哺之樂。雖在飛走。輒自泫然。諱日含恤。無異初喪。石門公連遭憂。毀瘠殆不保。饘粥之供。公必親執。不任僮使。始吳夫人之喪。公生甫三月。同里靑平君沈惀憐之。使其小室邊取養。而其夫人敎以書。公仍隨靑平。連在外郡。年十二。始還京師。靑平家賓集。石門公亦在座。公未嘗識大人面。靑平命公拜之。公長跪於前。泣涕汍瀾。觀者感歎。及長。事靑平內外甚至。喪致深哀。祭必與而助之。邊小室死。服緦。立主而祀之。遇忌。幷齋沐茹素。終身不衰。石門公沒。移其孝於白軒公及其夫人。未嘗曠日廢省。公退。必在白軒公第。擎跪執事。如孺少時。事無大小。必稟而行之。少有過差。白軒公正色鐫責。不以崇顯而有所饒。公抑首惶懼。若無所容。退必改而從命。見者歎其各盡慈敬也。白軒公。在鼎軸。遭北嘖。栫棘西塞。公思慕。靡日不隕淚。求差公幹往省之。及按關西。得美味。未奉白軒公。則不先食。常於令辰。備膳羞。奉白軒公。與諸子姓稱觴。盡怡愉之歡。寢疾則躬侍湯藥。不解帶。及喪。哀痛無異憂制。時公年已近耆。而至卒哭居廬次。期而始復寢。每謁其夫人而歸。語輒哽咽。夫人有疾。時値方喪。任敦匠。晨夕無暇。則每趂曉鍾。詣夫人所。承候而後。始赴公衙。待伯仲姊妹。友愛亦至。仲氏家貧。常待公俸祿而擧火。公備資裝。而婚嫁其子女。仲氏早歿。其子未冠笄者。公皆率養於家。時撻其季子德成。泣而曰。人無敎督而可能成立乎。不如此則吾忍以此加汝。其至誠惻怛如此。德成文學夙就。而擢第。又悲喜出涕曰。吾可以見吾兄地下矣。與仲姊聯屋而居。朝夕省視。盤飧雖少必分。家人順其意。必設貳簋。伯兄女染癘瀕死。公躬自救視。子弟更諫不聽。終賴而回甦。敦睦之誼。及於九族。周其窮乏如不及。昏喪不能辦者。悉力顧助。以是莫不愛戴而如歸焉。理家甚嚴。子弟終日侍坐。未有問。未敢以閒語進。有過則不以己長而弛其敎。庭閫之內。常肅如也。少時好近杯觴。酒中或面斥人過。不少假。前後困跲。多坐此。赴關西時。白軒公以書戒之曰。受國重寄。不可不戒飮。公自是終身不復飮。人以爲難。此公刑家淳行之槩也。事君行己。一以自警編爲準則而飭勉。尤用力於勿欺之訓。自在瀋中。深被孝廟眷知。屢承章翰之賜。又受便面。親題一絶詩幷十襲。藏於箱篋。自奉諱以來。時盥手莊誦而感泣。遷陵之役。受監董之命。自謂攀髥之痛。庶可少伸。大小工徒。不委郞僚而必自監焉。在朝不喜摘抉人細過。以沽直名。至係國家大體。生民休戚。必極言竭論。以冀開廣上心。一心奉公。夙夜匪懈。每當享官。雖隆寒。必澡浴。至老不變。當入前席。宿齋預戒。必書對命者。謹於溫室樹之戒。未嘗以言語。輕傳於人。屢按重獄。深戒鍛鍊。常務平反。緩獄之謗四至而不自卹。至情罪關於犯上。則持議嚴峻。至抗疏力辨。不顧其論之有異同也。出入禁庭。進止有常處。過逵路。由一旁。必避輦路。都民識之曰。此家二大夫獨行此禮。白軒公亦然故云也。仁顯王后冊封。淸使至。儐使未及於灣。淸使怒而恣喝。公特受儐接之命。至松都。淸使以王后親受誥命爲辭。公抗言斥之曰。我國秉禮。雖下賤婦人。尙不見外人。王妃豈有親受之理。若終持之。勑使當留此。我國當馳遣咨請命大國。仍責象胥曰。爾等不能周旋回彼意。當用極律。淸使乃止。此公立朝節行之槩也。素性恬沖。不喜紛華。晩而營第城西僻巷。拓林園。聚圖書。手書四書大易等書。沈潛玩索而讀之。扁其堂曰保晩。日夕逍遙以自適。每日晨起。正衣冠。淨掃一室。几案必整。竟夕危坐。手不捨書籍觚翰。非公故。罕出門。登朝以來。足不踐勢利之途。口不道偏黨之論。雖世之論歧。而不相悅者不得加以訾毀焉。公於財賄素脫疎。居家未嘗問有無。臨財必以苟得爲戒。在外職。微物亦無送遺於家者。遼瀋之行。路資難備。有一僕以百金自買。公曰。一口價豈至此乎。受其半而還之。東還。橐中有餘資。悉與太醫之在同舍者。家事屢空。人有從容言。吾輩將堤海爲田。公若與之。不出費而可得腴田。公不許曰。吾雖貧。以忝先人爲懼。蓋石門公官至六卿。而不營一畒田故也。多處詞訟之地。而無私謁請託。位班三事。而門庭蕭然如寒士。得喪華槁之際。隨遇而安。屢遭齮齕。備更橫逆。而不自欿然而爲戚。獨以關西事。常慨歎曰。吾之心事。可質神明。而謬當財穀之任。受其汙辱。躬自悼矣。尙誰尤哉。在玉堂。有一中官。使涓人問候。公命摽出之。自瀋還也。有中官請見。後在西藩。又有因偏裨求謁者。其人卽公史官時。偕與奉命者。及在瀋中。猝患風病。承東宮命來救者。公皆揮斥不相接。其守法之嚴類此。早工隷書。旁通篆籀。爲近世名家。國家金石扁額及搢紳碑碣。不出公手者鮮矣。此公澹雅之趣之槩也。蓋公行有本源。承其家懿。推而著于朝。爲忠勤素絲之節。經閱時變。而操履純白。爲一世之完人。福祐流於後嗣。可謂篤行君子。昭代名卿矣。公凡再娶。靑松沈氏。贈貞敬夫人。文化柳氏貞敬夫人。俱出名家。閫範甚備。沈出一男晩成。進士敦寧府都正。女適參判宋光淵。柳出一男大成。文科禮曹參議。六女壻。府使金昌國,洪致祥,參判尹趾仁,參奉曹夏彥,府使沈廷輔,士人任士元。都正無子。以大成子眞儒爲後。文科奉敎。大成五男。長眞儒,眞儉文科吏曹佐郞,眞休生員壯元,眞伋洗馬眞偉進士。女崔尙觀。內外孫曾玄摠百有餘人。公之諸子遵治命。不請謚于朝。近因筵臣陳白。朝旨令法應得謚者。皆請易名如國典。於是。參議公以謚狀。謬屬不佞宗泰。宗泰記昔以通家子。屢拜公牀下。瞻挹德儀。竊仰先輩淵偉之風。欽服于中雅矣。不得以無文辭。謹据宋參判光淵所爲狀。掇其著者。論撰如右。以告于太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