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한국의 시호(諡號) 2.

*이건명(李健命) 1663년(현종 4)∼1722년(경종 2). 시호: 충민(忠愍) 危身奉上曰忠。大慮克就曰貞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23.09.09|조회수5 목록 댓글 0

*이건명(李健命) 1663년(현종 4)∼1722년(경종 2).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의 한 사람.

시호: 충민(忠愍) 危身奉上曰忠。大慮克就曰貞。1725년(영조 1) 증시

자신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드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큰 생각을 능히 성취함을 정(貞)이라 한다.

시장 없이 증시(不待諡狀)

제향처: 과천 사충서원(四忠書院), 흥덕(興德) 동산서원(東山書院), 나주 서하사(西河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圃齋). 영의정 경여(敬輿)의 손자로,

이조판서 민서(敏敍)의 아들이다.

1684년(숙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6년 춘당대문과에 을과로 급제, 설서(說書)에 임명되고 수찬‧교리‧이조정랑‧응교(應敎)‧사간을 역임하였으며, 169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우승지‧대사간‧이조참의‧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717년 그의 종형 이이명(李頤命)이 숙종의 뒤를 이을 후계자 문제로 숙종과 단독 면대하였던 정유독대(丁酉獨對) 직후, 특별히 우의정에 발탁되어 왕자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의 보호를 부탁받았으며, 숙종상(肅宗喪)에 총호사(總護使)로서 장례를 총괄하였다.

이어 경종 즉위 후 좌의정에 승진하여 김창집(金昌集)‧이이명‧조태채(趙泰采)와 함께 노론의 영수로서 연잉군의 왕세자책봉에 진력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반대파인 소론의 미움을 받았다.

1722년(경종 2) 노론이 모역한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전라도 흥양(興陽)의 뱀섬〔蛇島〕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앞서 주청사로 청나라에 가 있으면서 세자책봉을 요청하는 명분으로 경종이 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위증(痿症: 양기가 없어 여자를 가까이 하지 못하는 병)이 있다고 발설하였다는 죄목으로 소론의 맹렬한 탄핵을 받아 유배지에서 목이 베여 죽임을 당하였다.

재상으로 있을 때 민생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특히 당시의 현안이던 양역(良役)문제에 있어서 감필론(減疋論: 군포 2필을 1필로 감하자는 주장)과 결역전용책(結役轉用策: 수령이 私用으로 쓰고 있는 田結雜役價를 전용하여 감필에 따른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자는 방책)을 주장하여, 뒷날 영조 때의 균역법 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시문에 능하고 송설체(松雪體)에 뛰어났다. 송시열(宋時烈)을 학문과 정치의 모범으로 숭배하였으며, 김창집 형제 및 민진원(閔鎭遠)‧정호(鄭澔) 등과 친밀하였다.

1725년(영조 1) 노론정권하에서 신원되어 충민(忠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 흥덕(興德)의 동산서원(東山書院), 나주의 서하사(西河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시문과 소차(疏箚)를 모은 《한포재집》 10권이 있다

 

右議政忠愍李公墓誌銘 幷序○代仲父 민우수(閔遇洙) 찬

 

景廟辛丑。冊今上爲世弟。奸凶不便。結幽陰逞志。論竄建儲諸臣。已而設誣獄。戮殺四大臣。將以上及於儲宮。而其未能者天也。寒圃李公。卽四大臣之一。而受禍尤慘。盖國朝待大臣厚。其有賜死。鮮用極刑。而四大臣。公獨如此。是必有最見嫉者存耳。然公之死。不以其死爲悲。而以儲宮未保爲憂。以今而言則公果無所恨矣。諱健命字仲剛。寒圃其號也。系出世宗大王別子密城君琛。高祖諱克綱。奉常寺僉正。贈議政府左贊成。曾祖諱綏祿。驪州牧使。贈議政府領議政。祖諱敬輿。領議政謚文貞。號白江。考諱敏叙。吏曹判書大提學。謚文簡號西河。出後從祖叔父訓鍊院都正贈兵曹判書諱厚輿。公卽西河公之次子。而妣貞敬夫人原州元氏。左議政斗杓之女。公以癸卯十月十三日辰時生。幼穎悟。文藝夙成。甲子進士。丙寅登謁聖文科。被翰林薦。未付。丁西河公憂。己巳凶黨削之。甲戌改紀。除侍講院說書。陞司書歷兵曹佐郞拜弘文館副校理。時彝倫再叙。而國賊未討。公上疏極論之。以吏曹佐郞出爲北評事。還朝乞養爲沃溝縣監。召還玉堂。又極論時相護逆之罪。其人於公。有通家好而不爲顧。陞應敎歷司諫院司諫,司憲府執義宗簿寺正。復爲應敎。疏論時弊數千言。又應旨陳疏。請愼命令嚴薦法罷冗兵汰胥吏。又論良役之弊。上皆嘉納。歷掌樂院正,侍講院輔德。爲議政府舍人。承命廉問于湖西。充書狀赴燕。由應敎擢拜承政院同副承旨。爲養出牧忠州。一年罷還。叙拜吏曹參議。歷成均館大司成兵曹參知。爲司諫院大司諫。仁顯王后喪期未畢。進定嘉禮吉日。公言其非禮。上從之。以承旨繳還公主家給錢之命。上爲减其數。移弘文館副提學。復爲大司諫。論飢民領還本土之非仁政。時有軍制變通之議。又指陳訓局制置之失。有曰時平則竭一國而養之。有事則驅市人而戰之。盖名言也。歷兵工禮三曹參議。擢授江華府留守。翌年以大司成還。移吏曹參判。歷漢城府右尹,戶禮曹參判,都承旨。間兼備局提調,世子賓客。出爲京畿觀察使。秩滿還亞銓。丁內艱。沒喪拜司憲府大司憲。以禮參疏言太廟攝享。北漢動駕。在數日之內。事有未安。上命退行幸之期。移副學。嘗於筵席。論朋黨之弊曰。今之議者多以建極爲言。極者至正至當之謂。而後世誤以中訓極。中字又誤認爲至寬至厚。其弊至於含糊苟且。不分善惡之歸。人君若以至正至當。臨照於上。是非黜陟。一出於正。則朋黨可消矣。考官李墪行私發覺。公於稠坐中偶言科塲不嚴狀。大爲墪黨齮齕。屢疏辨析。上燭其被誣。已而陞拜知敦寧府事。旋移吏曹判書。力辭遞。歷議政府右參贊,刑曹判書,漢城府判尹,大司憲。復爲吏判。因同僚之起閙。屢疏遞。拜戶曹判書。移兵曹判書。特除判義禁府事。尋又以特旨拜議政府右議政。庚子肅廟昇遐。奸凶覬得志。迭起投匭。公與首揆金公昌集明言正色。以鎭人心。時景廟疾深痼無嗣。臺官李廷熽疏請建儲。上下其事廟堂。公與金公及原任大臣李公頤命,趙公泰采。率羣僚入對。陳其可。上許之。又請入禀大妃。諸臣退竢閤門外。五更上御樂善堂。召諸臣入。手指案上二封書。一卽御書延礽君三字。一卽慈殿諺敎。而有曰孝廟血屬。先王骨肉。唯主上與延礽君而已。豈有他議。公卽進詣案前。捧而讀之。聲淚俱發。諸入侍者莫不掩泣。令承旨書傳旨。以今上爲世弟。自後奸凶謀益急。大禍兆矣。已而臺官趙聖復請依先朝故事東宮參聞政事。是夜上下備忘。令世弟代理。大小國事。並裁斷。公聞報亟起詣闕。欲請反汗。而崔錫恒已先請對。收寢前命矣。公遂上箚陳戒。請愼擧措。無底于悔。又曰一重臣深夜請對。有違常規。而政院率爾啓禀。宜加警責。以杜後弊。過數日。上又下備忘。令世弟聽政。公率羣僚庭請還收。又請入對而終不許。前後批旨。有曰予病非一朝之比。十餘年積傷之致。又曰火升之際。精神索莫。昏不覺察。又曰今日代理。不過依丁酉已行之事。最後有曰近來火證頻發。不得覺察。至於使左右考例擧行。如是而可以爲國乎。此予至誠之言。左右可乎。世弟可乎。諸大臣惶恐涕泣。乃上箚。略曰當初大小國事。並令裁斷之敎。實國朝以來所未有者。臣等决不敢奉承。至於丁酉事。自是先朝裁定。且有節目區別。而聖敎出於至誠惻怛。亦安敢一向違拒。以傷殿下之心哉。乞命有司只依丁酉節目。禀旨擧行焉。箚入。趙泰耈輩潛由宣仁門入對。諸公因此同入請寢前命。上於彼此所達。都無應答。遂以備忘及前後批旨。奉置榻前而出。盖拒諸公之請。對導泰耈而潛入。皆宦妾締交奸凶而爲之也。時凶徒恃有奧援。咆哱於朝堂。錫恒尤跳踉。公厲聲叱責。錫恒稍沮。先是金公爲冊封奏請使。公言其不可遠出。自請替往。及出疆。一鏡等諸賊之疏出。而備忘從中下。羣凶充滿於朝矣。於是以聯箚爲案。栫棘諸大臣於絶島。日夜謀所以傾儲位而殲士類者。世弟至涕泣求出閤。慈殿下哀痛之敎。臚列宦妾輩謀危東宮狀。凶徒恐其跡露。不加根治。宦妾有飮藥徑斃者。獄遂竟。及公竣事而歸。奸凶大失圖。則虎龍變書上。而逮捕四出矣。公還到我境。赴謫羅老島。過郊凶徒謂之盤桓近郊。至罪押去都事。已而金李兩大臣並自謫中被逮。中途受後命。仍行孥籍。於是殺公之計日急。捏添罪案。請對連啓。謂承依允之命。發遣宣傳官。莅謫所而加慘刑。時壬寅八月十三日也。越七日報至。公殊無驚動意。進食如常。問儲宮安否外。無他語。亟取筆以保護東宮之意。草遺疏授家人。寄書告訣於親戚。臨命賦一詩。有許國丹心在。死生入彼蒼之句。遂就戮。是日天慘氣凄。大風振海。島人爲之沸咽。聞者皆流淚。始藁葬于德山蘿淵。二子被收從瘞。家産沒入官。公死後趙公亦不免焉。嗚呼。當是時。士林之禍烈矣。然其忠逆之辨。只係景廟有疾無疾。而景廟之有疾。夫豈可諱者耶。景廟旣有疾患。則建儲烏得以不急也。旣建儲則遵先朝故事。參决庶務。亦非不可者也。只是事體重大。而不免卒遽。故齊請反汗。且求入對。而批敎屢下。哀痛惻怛。則其不敢違拒。亦其宜也。然聯箚直是不得已者。旣得入對。復伸前請。而上亦無一言可否。則其還納前後批敎。亦事勢然也。獨其時國勢旒綴。凶徒墻立。而宦妾居其間。出沒如鬼蜮。是以逆順名實之際。不能無疑眩。而陰謀得肆。蜚語交騰。外廷諸臣雖欲扶持調護。主客俎肉之勢異矣。歷論前史事變之至難者。盖無如此時。則諸公之畢竟一死。又烏得免乎。然國家之得有今日。實惟當日諸公之力。而公議難誣。史乘具在。諸公之心。其亦無愧矣。今上乙巳。誅流奸凶。命復四公官爵。易名致祭。公得謚忠愍。以禮改葬。立祠江上。並俎豆之。丁未上忽進用一番人。追奪四公官謚。毁其祠。戊申亂後。只復公及趙公官。後又復其謚。此又乙巳後屈伸之案也。公聰明豈弟。樂易多恕。風姿端凝。志慮沉詳。盖所謂金玉其人也。遇事不動聲氣而善應變。又表裏坦然。不設鉤距。人樂爲用。判度支長本兵。俱有能名。董役山陵。不煩而事集。當時稱之。公久處銓衡言議之任。積被宵人憎嫌。至於建儲之議。多所主張。以是仇嫉益甚。卒置之極刑。然公自靖之義。斯無憾矣。其受禍輕重。又奚足較哉。公爲文章。條鬯明白而善往復。筆法精敏。所寫金石甚多。然公不甚自喜。獨眷眷於國事。常謂良役之弊。不可不一革。條其利害。裒成一冊。以聞于朝。事雖不行。後之謀國者。得有考焉。公娶光山金氏承旨萬均之女。早卒。後娶安東金氏郡守壽賓之女。先公九年卒。始各葬。公之改葬交河也。遷而並祔。辛亥因長陵遷奉。又移葬于本縣梅谷坐坤之原。前夫人無子。後夫人三男。勉之進士。性之過房早圽。述之。伯季俱贈司憲府持平。乙巳愍典也。長女適進士金喜慶。次適進士洪鏡輔。側室女三。具泰勳,具弘柱其婿也。一未行。勉之四子復祥,德祥,徹祥,得祥。女婿閔百善。述之二子後祥,衍祥。女婿柳敬養。余與公夙有世好。又通籍於一歲中。立朝四十年。步武相接。出處略同。而其心期之相與。在儕流爲最。及至辛丑。余雖班聯差後。亦嘗與聞於末議。畢竟或死或不死。盖無非命也。公之入燕。餞於西郊之外。離筵酒悲。已判死別。乃於星山謫中。逖聞公死。心驚肉顫。控愬無因。及後還朝。雖大義粗伸。跡益不安。中間變故。又無所不有。而世道日非。沉寃日積。今於幽堂之誌。不暇述其平日事行。而獨取受禍始末。反復不已者。其意亦悲矣。銘曰。

在當時嶺海之投碪鈇之加。猶冀其寃之一雪。及今日官銜如故。謚冊重煥。而寃之白也無日。是將輾轉膠固。國不國而人不人。又奚特公之寃。吾以是歔欷煩酲。直欲上愬乎穹蒼而不可得。唯有抱持此義。以竢乎百世之定論。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