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한국의 시호(諡號) 2.

*정존겸(鄭存謙) 1722년(경종 2)∼1794년(정조 18).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23.09.11|조회수26 목록 댓글 0

 

 

 

*정존겸(鄭存謙) 1722년(경종 2)∼1794년(정조 18). 조선 후기의 문신.

시호: 문안(文安) 勤學好問曰文 好和不爭曰安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화합을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 것을 안(安)이라 한다

정조 18년(1794) 시장 없이 증시(不待諡狀)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대수(大受), 호는 양암(陽菴)·양재(陽齋)·원촌(源村).

좌의정 유길(愉吉)의 8대손, 우의정 치화(致和)의 5대손, 문상(文祥)의 아들이다.

도암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1750년(영조 26) 생원시에 합격하고, 다음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754년에는 횡성현감으로 나갔다가 다시 내직으로 교리‧승지 등을 지냈다. 승지로 있을 때 1761년 4월 장헌세자(莊獻世子)가 영조 모르게 관서 지방을 유람, 순행하고 돌아오자 영조는 세자의 서유(西遊)에 관여한 심발(沈橃)‧유한소(兪漢簫)‧이수득(李秀得) 등을 파면시켰는데 이때 그도 파면되었다.

그뒤 다시 등용되었으나 1772년 당론을 주장하였다 하여 북청으로 정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 관계에 복귀, 이조판서를 지냈다.

1775년 홍인한(洪麟漢)을 탄핵하는 소를 올려 세손을 보호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 시파(時派)로서 우의정에 발탁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781년 《영조실록》과 《경종수정실록》 편찬의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을 겸직하였고, 다음해 동지사(冬至使)로 부연(赴燕),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다시 우의정으로 세자사부(世子師傅)를 겸하였다.

1791년 영의정에 이어 영중추부사로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철저한 시파로서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영의정 정존겸(鄭存謙)이 면직을 청한 상소에 대한 비답 -정조대왕-

 

답하노라. 소를 살펴보고 경의 진심을 잘 알았다. 거듭 경을 재상에 임명할 때에 승지를 보내어 마음속에 쌓인 말을 전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별유(別諭)가 사양하는 글보다 우선하는 것은 그 예가 매우 드문 까닭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 임금이 되고 나서 덕망 있는 재상을 간택하였는데 경이 그때 맨 처음 이 간택을 받았으니, 나의 뜻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아, 이제 경을 재상으로 세운 지가 겨우 7년인데, 세상의 도리와 조정의 기상은 몇 단계 아래로 떨어진 정도만이 아니다. 의리가 어두워지고 막혔는데 누가 능히 붙들어 세우겠으며, 기강이 시들고 쇠미해졌는데 누가 능히 진작하여 쇄신하겠는가. 묘당은 날로 잗달아지고 대각은 점점 흐리멍덩해지니, 비유하건대, 사람의 몸에 온갖 병이 마구 침범하였는데도 오히려 그대로 방치한 채 모른 척하면서 약을 쓰지 않는 셈이니, 이는 진실로 어떠한 때이겠는가. 다스려 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두루 자문할 만한 곳이 없으니, 하루 이틀 지나는 사이에 나라를 다스리는 효과가 막연한 실정이다. 매양 이 생각을 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벽을 돌면서 방황을 하곤 하는데, 비록 경처럼 오직 나랏일을 염려하는 정성으로도 또한 어찌 모두 알 수 있겠는가.

재상은 어느 것인들 중요한 직임이 아니겠는가마는 영의정은 좌의정이나 우의정에 비해 더욱 중요하다. 근년 이래로 이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을 일일이 헤아려 보면 겨우 한두 원로(元老)뿐이었다. 지난번에 경의 사직을 허락해 준 것은 경을 버리려는 것이 아니었고, 이번에 새로 임명한 것은 결정을 한 지가 오래되었다. 이러한 때의 이러한 직임을 경이 아니면 누가 맡겠는가. 상참(常參)을 하라는 명을 내렸으니, 경은 부디 즉시 일어나 일을 살피도록 하라.

 

영부사 정존겸(鄭存謙)이 치사(致仕)를 청하는 상소에 대한 비답 신해년(1791)

 

답하노라. 소를 살펴보고 경의 진심을 잘 알았다. 경은 나이가 이미 많고 병도 깊어졌기에 힘을 다해 반열에 나오는 것은 결단코 강요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내가 경을 보살피고 대우함에 어찌 처음부터 끝까지 무결(無缺)하게 해 주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처음 즉위하여 경을 재상에 임명한 것이 어찌 괜히 그랬겠는가. 온 세상이 남을 헐뜯고 비방하여 예악과 형정(刑政)은 모두 권력을 노리어 농간질하는 흉악한 무리들이 참람되게 훔쳐 가는 바가 되었다. 그때 진신(搢紳)들의 말하기 어려웠던 우려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경은 분연히 나서서 용단(勇斷)을 내렸으니 거취(去就)가 구차하지 않았다. 남들은 더러 독선(獨善)한다고 경을 나무라기도 하였으나, 추기(樞機)의 비밀은 마땅히 귀신조차도 엿보지 못하도록 해야 되는 것이다. 지난 을미년 겨울을 기억하건대, 빈객(賓客)을 사직하는 상소 내용 중에, “필부가 포부를 품었으나 이미 지난 일이니 어쩔 수 없고, 철인(哲人)은 기미를 알아채니 장래의 일에 힘써야 한다.”고 말한 것이 있고, 또 말하기를, “하늘 높이 치솟는 물결이 옆으로 빈 배에까지 미치고 활시위에 다친 새는 굽은 나무를 보고도 놀란다.”고 하였다. 대체로 이 몇 구절의 말은 곧 경이 의뢰한 바이고 내가 마음으로 허여한 바였다.

그러나 이제는 끝났다. 경이 지금 나이가 많고 또 병까지 있어 벼슬을 그만두게 해달라는 간청이 이와 같이 절실하니, 경으로 하여금 한가하게 살면서 편한 마음으로 몸조리를 하도록 해 주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예경(禮經)의 대신을 공경하는 뜻에 부합하는 것이니, 상소에서 청한 바는 특별히 그대로 시행하기를 허락하고 봉조하의 직함을 내려 주노라. 이제부터 경은 영원히 조정을 사별(謝別)하게 되었으니, 자못 서글프고 허전한 생각이 든다. 교문(敎文)을 임전(臨殿)하여 면전에서 주고 싶은데, 경은 조정에 나와 친히 받을 수 있겠는가? 이어 승지를 보내어 아울러 경연에서 내린 교지를 전하게 하니, 경은 힘을 헤아려 부주(附奏)하도록 하라.

 

봉조하(奉朝賀) 정존겸(鄭存謙)의 죽음을 애도하는 하교 시호를 하사하면서 내린 하교를 덧붙여 주냄 -정조대왕-

 

가장 먼저 이 대신을 정승으로 뽑았던 것은 을미년(1775, 영조51)에 올린 상소가 호감이 갔기 때문이었다. 삼가고 두려워하는 한마음은 옥을 잡고 있듯이 하고 가득한 물그릇을 받들듯이 하여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올랐어도 사람들이 비난함이 없었으니, 이 어찌 남들보다 한 등급 높은 것이 아니겠는가. 몇 해 동안 앓아 온 탓에 만나 보지 못한 지 오래되었는데 이번에 서거하였다 하니 애통함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졸한 봉조하 정존겸의 집에 성복(成服)하는 날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하루 전에 또한 승지를 보내어 치조(致弔)하라. 녹봉은 3년 동안 실어 보내 주고, 시호의 하사를 장례 치르기 전에 행하도록 홍문관에 분부하라.

정 봉조하의 집에 장례 치르기 전에 시호를 하사하라고 명한 바 있다. 그런데 듣자니, 그 집안의 법도에서는 시호 청하는 글을 지어 올리지 않기 때문에 비록 시호 내리는 은전이 있긴 했어도 대부분 특례(特例)에서 나왔다고 한다.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과 익헌공(翼憲公) 정태화(鄭太和)가 배향될 때와 동평도위(東平都尉) 정재륜(鄭載崙)이 의빈(儀賓)이 될 때와 정간공(貞簡公) 정탁(鄭琢)과 정민공(貞敏公) 정홍순(鄭弘淳)의 경우에는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않았고, 고 정승 정유길(鄭惟吉), 정창연(鄭昌衍), 정지연(鄭芝衍), 정지화(鄭知和), 정치화(鄭致和), 정재숭(鄭載嵩)의 경우에는 시장을 올리지 않아 시행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한 가문에 11명의 재상과 의빈이 모두 삼가 가법을 지켰는데, 또 어찌 강요할 수 없는 것을 강요하겠는가. 홍문관으로 하여금 시장을 기다리지 말고 거행하도록 하라. 또 듣건대, 대신이 치사(致仕)한 뒤로 병 때문에 명(命)에 사은하지 못한 탓으로 상름(常廩)도 받지 않아 아직까지도 태창(太倉)에 남아 있다고 한다. 진작 그런 줄 알았으면 실어 보내도록 하였을 터인데, 애석하게도 이제 그만이다. 호조는 연조(年條)를 헤아려 아울러 즉시 주가(主家)에 전달되도록 하라.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