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상・제례

나이가 들면서 의도치 않게 마주하게 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죽음일 것이다. 자신의 주변과 가족들 가운데 많은 경험과 기억을 공유한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을 겪는 순간 죽음과 장례가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것 같다. 남아있는 산 사람과 이미 죽은 이의 마지막 시간. 그를 위해 치러지는 이 예식에서 그의 의사를 물을 수 없으니, 남아있는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며 가장 후한 예식으로 배웅하고자 한다. 가장 후한 의식으로 그를 송별하는 것이 남아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만큼 상주는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보편적인 방식을 선택하게 되고, 그 안에서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므로 장례란 여러 가지 의례 중에서도 가장 변화하기 어려운 것이다. 또한 그 시대와 사회의 생사관・영혼관이 반영된 현상으로 역사의 긴 호흡으로 보자면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교문화에서 죽음은 혼(魂)과 백(魄)의 분리로 이해된다. 『의례(儀禮)』에 ‘사람이 죽으면 혼(魂)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魄)은 땅으로 돌아간다.’는 구절은 이러한 관념의 표현이다. 때문에 유교식 장례절차는 초혼(招魂), 즉 혼을 부르는 절차로부터 시작한다.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사망 직후 시신을 보지 않은 사람이 지붕에 올라가 북쪽을 향해 망자의 속적삼을 흔들며 망자의 성, 이름, 주소를 부르며 “복(復:돌아오라), 복, 복!”하고 세 번 외친다. 이는 육체를 빠져나간 혼을 불러 돌아오게 하여,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기를 염원하던 마음을 담은 행위였던 것이다.
| 가치관의 전환과 장례법의 변화 |
우리 역사에서 정치세력과 사상의 전환이 동시에 일어난 시기가 바로 고려와 조선의 교체기였다. 고려는 불교의 가치관과 의례가 보편적이었던 국가였으나, 조선은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유교 국가를 지향하면서 성립하였다. 국가의 이념지향이 변화하였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변화를 수반하게 된다. 이것은 곧 불교적 세계관하에 형성된 생활 풍습과 의식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재평가함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성리학에 입각한 생활 양식의 확산을 이루고자 하였다. 사대부들에게는 주자의 『가례』가 그 전범이 되었고, 백성들에게는 교화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사회질서를 보급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의례, 의식은 그 변화를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대상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의 위정자들은 건국 초부터 유교사회의 확립이라는 목표 하에 불교의례를 유교 의례로 전환하는 정책을 집중적으로 실시하였는데, 상장례는 그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였다.
| 장례방식의 변화 |
장례는 망자에게 안식처를 마련해 주는 의식이다. 유교 이념에서는 망자의 시신을 산사람과 마찬가지로 대우하였다. 그런 까닭에 양지바른 곳을 택해 조상의 시신을 잘 모시는 것을 자식의 도리라 여겼다. 이는 곧 장례 절차로 구체화 되었으며 조선 사회의 매장법의 근거가 되었다. 『맹자』 「등문공장구」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상고시대 부모가 죽어도 장사지내지 않던 시대가 있었다. 부모가 죽자 시체를 들어다가 구덩이에 버렸는데, 뒷날 자식이 그 곳을 지나다보니 여우와 살쾡이가 시체를 뜯어먹고 파리와 모기가 엉겨서 빨아먹고 있었다. 자식은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눈길을 돌리고 바로 보지 못하였다. 자식은 곧 집으로 가서 들것과 가래를 가지고 돌아와 흙으로 시체를 덮었다.
상고시대 장사지내는 풍습이 아직 없던 시절, 우연히 부모의 시신을 다시 마주하게 된 아들이 차마 바로 볼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하고 부모의 시신을 매장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조상의 시신을 매장하는 것이 효의 관념에서 비롯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매장법이 유교의 효 관념에 근거한다면 이전 사회는 어떠했을까? 고려는 불교의 윤회사상에 근거하여 시신을 화장하면서 극락왕생하거나 좋은 곳에 환생하기를 바랐다. 화장은 3일장으로 거행되었고, 타고 남은 유골은 재로 날리거나 유골함에 넣어 수습하여 관에 넣어 매장하였다. 때문에 관의 크기는 유골함을 넣을 정도면 충분했다. 현재 남아 전해지는 고려시대의 관들이 대부분 길이 1미터 내외의 소형 조립식 석관인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화장법은 고려말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유학자들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불교에서는 시신을 뜨거운 불 속에 넣어 모발을 태우고 피부를 익혀 뼈만 남기며 심한 자는 뼈를 태워 그 재를 날림으로써 물고기나 날짐승에게 선사하고, 이렇게 해야 천당에 갈 수 있고 서방정토에 갈 수 있다고 하는데 이는 아비도 모르는 오랑캐의 법으로 따를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불교에서는 화장법을 윤회와 극락왕생을 위한 길로 받아들였던 것에 반해, 유학자들의 눈에는 조상의 신체를 훼손하는 불효 행위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조선건국 이후에는 효(孝) 관념에 입각하여 화장법을 매장법으로 대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태조 4년(1395) 6월 사헌부의 건의로 전·현직 관료를 막론하고 3일장과 화장을 모두 금하고, 사망한 달을 넘겨 매장하는 유월장(踰月葬) 또는 그 다음달에 매장하는 삼월장(三月葬)을 시행하게 하였다. 이것은 중국의 한・당시기 대부(大夫)는 삼월장, 사(士)는 유월장을 치르게 한 규정에서 비롯되었는데, 여기에는 망자의 소생을 바라는 효 관념과 함께 현실적인 이유도 작용했다. 매장법을 거행하기 위해서는 관 제작을 비롯한 택산(擇山)과 같은 준비 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대까지 많은 이들이 불교식 화장법을 고수하여, 성종대에는 처벌을 동반한 강력한 규제책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성종 5년 4월 기묘일의 기사에 따르면 『대명률』에 따라 화장한 자를 처벌하는데, 이를 유도한 자는 동일한 죄로 다스리고 이를 검거하지 못한 관리들과 가까운 이웃까지 처벌대상에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이를 건의한 예조에서는 『대명률』의 관련 조항인 「상장조(喪葬條)」의 ‘시신을 화장한 자는 장(杖) 1백대’라는 조문과 「발총조(發塚條)」의 ‘시마(緦麻)이상의 존장의 시체를 훼기하는 자와 자손으로 조부모나 부모의 시체를 훼기하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는 조항을 인용하고 있어 화장을 시신훼기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국가적 차원에서 강력하게 화장 금지정책을 시행함에 따라 점차 유교식 매장법으로 이행하였는데, 이는 『경국대전』 「예전」에 ‘4품 이상은 삼월장, 5품 이하는 유월장’으로 규정함으로써 법제화 되었다.
| 사회 면면의 변화들 |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행하면서 장례방식의 변화가 추진되었던 것은 결국 세상을 환생과 윤회의 굴레로 보았던 불교적 세계관을 유교적 세계관으로 전환시켰기 때문이다. 유교에서는 불교적 윤회사상을 비판하고, 사람의 탄생과 죽음을 혼백의 응취와 해산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한 번 몸에서 분리되어 하늘로 올라간 혼과 땅에 묻힌 백은 다시 결합할 수 없다. 그럼에도 죽은 이를 예우하였던 것은 효의 발현이기도 하지만, 나와 피를 나눈 친족들을 동일한 기(氣)를 나누어 가진 특별한 관계로 여겼기 때문이다. 즉 지금 나의 상황과 현실은 나와 같은 기를 나누어 가진, 산에 묻힌 선조들의 상태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매장법이 확산되면서 좋은 입지에 자신의 선조를 모시고 음덕(蔭德)을 바라는 열망은 이러한 관념에서 비롯된 것인데, 조선후기에는 이를 중시하는 경향이 점차 심해져 길지를 찾기 위한 경쟁이 심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불법적으로 남의 묘역에 투장하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하층민들도 이러한 경쟁에 참여하였는데, 그들의 경우 법적으로 정해진 묘역의 범위가 없었으므로 분묘를 마련하고 지키는 것에서도 취약하였다. 때문에 그들은 불법적인 투장을 선호했는데,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몰래 다른 집안의 묘역에 묘를 쓰는 암장(暗葬), 밤을 틈타 묘를 쓰는 승야투장(乘夜偸葬)이 행해지기도 하였고, 투장사실이 발각되지 않도록 봉분을 조성하지 않는 평장(平葬)도 선호하였다. 일단 투장에 성공하면 투장묘인 것이 밝혀져도 후손이 아니면 파낼 수 없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다른 사람의 분묘를 훼손하는 사굴(私掘)은 유배형에 이르는 중죄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하층민들은 이렇게 투장한 뒤에 종종 숨어버리곤 했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묘지를 쓰는 일과 분산(墳山)을 조성하는 일이 중요해진 만큼 송사의 대부분은 이와 관련한 산송(山訟)이었다. 그런데 이 산송이라는 것은 조상의 묘가 한 곳에 모여 있고, 이를 관리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발생 가능한 것이다. 조상의 묘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보면 때마다 관리하는 일도 어려울뿐더러 세대가 흘러다가 보면 윗대의 묘지는 실전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흔히 선산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고 실제 조성된 이후에야 산송분쟁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선산의 조성에 앞서 혼인형태에 대해 먼저 짚고 넘어 갈 부분이 있다. 장례법에 혼례방식이 무슨 상관성이 있을까 싶겠지만, 혼인행태 즉 혼인 후 남녀가 어디에 거주하며 누구에게 의지하는지는 이후 가족의 관계, 나아가 사후 묘지관리나 제사를 담당하는 후손을 결정하게 되는 중요한 문제이다.
현재까지도 ‘시집’은 ‘가는 것’이고, 신부 측 부모는 딸을 ‘보내는 것’으로 여겨 식장에서 눈물짓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이러한 관념은 우리의 유구한 역사 가운데 비교적 뒤늦게 형성된 조선후기의 것이다.
여성이 결혼하여 시가로 들어가 살게 되는 조선시대의 결혼풍속과 달리 고려시대에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라 하여 신부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신부집에서 혼인생활을 시작하였다. 고구려에도 비슷한 혼인방식인 ‘서옥제(婿屋制)’가 있었다. 하지만 서옥제의 경우 신혼살림을 신부집에서 시작할 뿐, 결국 남편쪽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것인데, 남귀여가혼의 경우에는 최종 거주지가 남편측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오히려 혼인 후 대부분 신부측 주변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사망한 뒤에도 처가의 묘역에 묻히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는 남성의 입장에서 부계 조상들의 분묘가 여기저기 흩어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이러한 경우 먼 조상의 분묘를 관리하는 일이 쉽지 않다. 또한 남귀여가혼 사회에서는 양측적 친속관념이 강하게 작용하였기 때문에 부계 중심의 먼 조상의 분묘까지 관리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지도 않았다. 16세기 대표적 유학자인 이황의 경우에도 증조부 묘소에 35년 만에 제사 드렸다는 기록이 있어 먼 조상의 분묘관리가 철저히 이뤄지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지금과 같이 철저히 부계중심의 사회로 전환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전기 『주작가례』에 근거한 복상제가 법제화 될때 모계 및 처계의 상복이 축소되고 부계친족을 중심으로 한 복상제가 마련되었다. 또한 혼인의 형태도 점차 시집살이 혼으로 전환되면서 부계친족을 중심으로 한 친족관념이 강해졌고 이에 따라 조선 후기에 이르러 부계중심의 분산 조성이 보편화 되었던 것이다.
| 참고문헌 |
김경숙, 「양반들의 죽음과 조상숭배의 실상 – 상・제례와 조상숭배」, 『조선 양반의 일생』 규장각 교양총서 2, 글항아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