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義天) 1055년(문종 9)∼1101년(숙종 6). 고려의 천태종(天台宗)을 창종한 고승.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24.04.10|조회수14 목록 댓글 0

의천(義天) 1055(문종 9)1101(숙종 6). 고려의 천태종(天台宗)을 창종한 고승.

성은 왕씨(王氏). 이름은 후(), 호는 우세(祐世),

아버지는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이며,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李氏)이다.

시호: 대각국사(大覺國師).

1. 출가와 수업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1세에 문종이 왕자들을 불러 누가 출가하여 복전(福田)이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출가를 자원하였다.

1065(문종 19) 514일에 경덕국사(景德國師)를 은사로 삼아 출가하여, 영통사(靈通寺)에서 공부하다가 그해 10월 불일사(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때부터 학문에 더욱 힘을 기울여 대승과 소승의 경논 삼장(三藏)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서적 및 제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이처럼 학문에 정진하였기 때문에, 스승인 경덕국사가 죽자 그의 강의를 대신 맡게 되었고, 훌륭한 강의로 인하여 명성을 온 나라에 드날리게 되었다.

1067(문종 21) 7월에는 왕으로부터 우세라는 호와 함께 승통(僧統)의 직책을 수여받았다.

2. 정원법사와 교유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불교를 더욱 깊게 연구하기 위하여 송나라에 유학을 계획하였고, 당시 송나라의 정원법사(淨源法師)가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편지를 통하여 서로 교유하였다. 그에 따라 송나라 불교계의 동향도 알게 되어 유학의 뜻을 굳히고 부왕에게 알렸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일단 유학의 결심은 중단되었지만, 정원법사와의 교유만은 계속되어 그의 초상을 얻어 보기도 하고, 화엄보현행원참의(華嚴普賢行願懺儀)등 그의 저서를 모두 탐독할 정도로 두 사람 사이는 가까워졌다.

3. 송나라 유학

문종이 죽은 뒤인 1085(선종 2) 4월에 그는 왕과 어머니에게 편지를 남기고 송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수개(壽介) 2명의 제자를 데리고, 정주(貞州)에서 배를 타고 5월에 송나라 판교진(板橋鎭)에 도착하여 송나라 왕에게 입국하게 된 이유와 동기를 알렸다.

송나라의 철종은 7월에 수도 변경(汴京)의 계성사(啓聖寺)에 머물게 하고 그에게 유성법사(有誠法師)를 천거하여 교유하도록 하였다. 유성법사는 원래 화엄의 대가였으므로 서로가 걸맞은 상대였다. 두 사람은 화엄의 깊은 사상과 현수(賢首)의 천태교판(天台敎判)에 대하여 다르고 같은 문제에 관하여 의견을 교환하였다.

그뒤 상국사(相國寺)에서 운문종(雲門宗)의 종본(宗本)을 방문하였고, 또 흥국사(興國寺)에서 인도 승려 천길상(天吉祥)을 만나 인도에 대한 여러가지 사정과 학문을 배웠다. 변경에서 여러 달을 보낸 뒤 항주(杭州) 대중상부사(大中祥符寺)의 정원법사에게로 가서 화엄경》‧《능엄경》‧《원각경》‧《기신론등의 사상과 천태와 현수의 교학에 대하여 토론을 하고, 또 여러 종파의 학승들도 많이 사귀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자변대사(慈辨大師)와 영지사 원소율사(元炤律師)와의 교유가 깊어 천태교관과 계율과 정토교학에 관하여 폭넓은 담론을 나누기도 하였다.

특히, 의천이 출국할 때 많은 불교관계 전적을 가지고 갔기 때문에 이곳 항주에 많은 학승들이 모여들었고, 그 전적을 중심으로 뜻깊은 토론도 전개되었다. 그 당시 송나라 학계는 무종(武宗)의 불교탄압과 9대에 걸친 전쟁으로 인하여 불교관계 서적들이 거의 없어진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고려에서 지엄(智儼)공목장(孔目章)》‧《화엄수현기(華嚴授玄記)》‧《무성섭론소(無性攝論疏)》‧《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와 현수의 화엄탐현기(華嚴探玄記)》‧《기신론별기(起信論別記)》‧《법계무차별론소(法界無差別論疏)》‧《십이문론소(十二門論疏)》‧《삼보제장문(三寶諸章門)등과 청량(淸凉)정원신역화엄경소(貞元新譯華嚴經疏), 규봉(圭峯)화엄론관(華嚴論貫)등을 가지고 갔기 때문에, 그를 찾아온 여러 학승들을 만나 담론할 기회를 많이 가지게 된 것이다.

4. 귀국과 불경간행

그때 본국에서는 선종이 모후의 간절한 뜻을 받들어 송나라 왕실에다 의천의 귀국을 청하는 글을 보냈다. 이에 1086213일 항주에서 배편으로 변경에 오게 되었는데, 정원법사도 함께 배를 타고 전송하였다.

송나라의 서울에서 얼마 동안을 지낸 다음 수주의 진여사(眞如寺)에 가서 자예(子睿)의 사리탑을 참배하였고, 다시 천태산으로 가서 지의(智顗)의 탑을 참배하고 발원문을 지어 바쳤다. 이 발원문은 본국인 고려에 돌아가면 천태교학을 널리 선양하겠다는 서원이 중심내용이었다.

, 명주(明州) 육왕광리사(育王廣利寺)에 가서 운문종의 회련(懷璉)을 만난 뒤, 1086520일 출발하여 6월에 불교전적 3천여권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선종은 태후와 함께 봉은사(奉恩寺)에 행차하여 귀국을 환영하였다.

귀국한 뒤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정리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송나라의 고승들과 서적편지 등을 교환하면서 학문에 더욱 몰두하였다.

특히, 정원에게는 화엄경의 세 가지 번역본과 이 경을 봉안할 장경각 건립비로 금 2천냥을 보냈다. 정원은 장경각을 건립하고 그 경을 봉안하였는데, 이 때문에 혜인원(惠因院)을 고려사(高麗寺)라 하였으며, 여기에는 의천의 소상(塑像)을 봉안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흥왕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그는 요나라송나라일본 등에서 불교서적 4천여권을 수집하고 국내의 고서도 모았으며,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이들 경서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간행목록으로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3권을 편집하였다. 이 교장총록의 안제목은 해동유본현행록(海東有本現行錄)’이라 하였으며, 줄여서의천목록(義天目錄)’의천록(義天錄)’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은 삼장(三藏)의 정본 외에 그 주석서인 장소(章疏)만을 수집하여 목록을 작성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일이다. 신편제종교장총록의 상권에는 경의 장소 5612,586, 중권에는 율의 장소 142467, 하권에는 논의 장소 3071,687권이 각각 수록되었는데, 모두 합쳐 1,0104,740권이 된다. 흥왕사 교장도감에서는 이 목록에 의하여 간행하였으며, 이를 고려속장경(高麗續藏經)이라고 한다.

5. 천태종 개창

그뒤 선암사(仙巖寺)와 홍원사(洪圓寺)를 거쳐 해인사에서 심신을 정양하고 있었는데, 숙종이 왕위에 올라 초청하였으므로 다시 흥왕사에 돌아와 강의를 계속하였다.

1097(숙종 2) 2월에 국청사(國淸寺)가 완성되자, 같은해 5월에 제1대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강의하였다.

이때에 전국에서 모여든 고승들이 무려 1천명을 넘었다.

이때 처음으로 천태종의 개립을 보게 되었으며, 그뒤 1099년에는 제1회천태종의 승선(僧選)을 행하고, 2년 후에는 국가에서 천태종 대선(大選)을 행하였다. 이로써 천태종은 세상에서 공인된 한 종파가 된 것이다.

숙종의 열렬한 외호를 받아 국청사를 천태종의 근본도량으로 하여 천태교학을 강의하니, 당대의 신진학승들이 거의 다 천태종으로 모여들었다. 그 중에서도 구산선문의 선종과 화엄종의 유능한 승려들이 대부분 천태종으로 오게 되었다.

6. 사상과 저술

의천은 원래 화엄종계통의 승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천태교학을 열심히 연구하고 천태종을 개립하게 된 까닭은 천태의 근본사상인 회삼귀일(會三歸一)일심삼관(一心三觀)의 교의로써 국가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과 교()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신라 중엽 이후부터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직접 마음을 깨달아 부처가 되려는(不立文字直指人心見性成佛)’ 입장을 표방한 선이 전래되어 점차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고, 그것은 자연히 교종과의 대립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 말기에는 교단이 선과 교로 양립되어 일대 파란을 겪게 되었다.

특히, 고려에 들어와서는 태조 때부터 목종 때까지는 선종이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현종 이후부터 화엄종을 비롯한 교종이 세력을 얻어 선종에 정면으로 맞서게 되어, 선과 교의 대립은 더욱 심각하게 되었다. 의천은 이러한 고려불교의 폐단을 바로잡아 교단을 정리하고, 정도를 밝혀 올바른 국민사상을 확립시키려고 하였는데, 그러한 근본이념을 천태사상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의천은 불교전적을 정비하고, 고려속장경을 간행하였으며, 송나라에 유학하여 새로운 문화를 수입하였고, 천태종을 세워 교단의 통일과 국가발전을 도모하는 등 많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이러한 업적 외에 의천은 폭넓은 견문과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신편제종교장총록3권을 비롯하여, 화엄관계 전적에서 그 핵심사상만을 뽑아 모은 신집원종문류(新集圓宗文類)22, 불교학에 도움이 되는 문장을 모은 석원사림(釋苑詞林)250, 의천의 제자들이 그의 행적과 시 등을 모은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23권과 대각국사외집(大覺國師外集)13, 간정성유식론단과(刊定成唯識論單科)3, 천태사교의주(天台四敎儀註)3, 계악권선면학(誡惡勸善勉學)1, 권수를 알 수 없는 팔사경직석(八師經直釋), 소재경직석(消災經直釋)등이 있다. 이러한 저술 외에도 의천은 화엄경180권을 비롯, 국어로 번역하여 강의한 것이 300여권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 저술들이 거의 없어지고 현재는 신편제종교장총록3권과 대각국사문집, 대각국사외집의 낙장본, 원종문류, 석원사림의 일부, 간정성유식론단과의 서문만이 전하여오고 있다. 그의 문하에서 교웅(敎雄)징엄(澄儼)수개 등 160여 고승이 배출되어 고려불교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비는 영통사와 선봉사(僊鳳寺)에 건립되었다.

 

천태종(天台宗) 시조(始祖) 대각국사(大覺國師) 비명(碑銘) (題額)

남숭산(南崇山) 선봉사(僊鳳寺) 해동(海東) 천태종 시조 대각국사의 비명과 서문(序文)

조산대부(朝散大夫)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상서(尙書) 이부시랑(吏部侍郞) 지제고(知制誥)에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下賜) 받은 신() 임존(林存)은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문인(門人) 천수사(天壽寺) 의학(義學)이며, 월남사(月南寺) 주지(住持) 묘오(妙悟)와 삼중대사(三重大師) () () 덕린(德麟)은 선지(宣旨)를 받들어 비문(碑文)과 아울러 전액(篆額)을 쓰다.

 

인종(仁宗) 임금께서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지 10년이 되는 대연헌(大淵獻) 장월(壯月) 7일에 존()에게 명하여 해동(海東)의 천태종(天台宗) 시조(始祖) 대각국사의 비명(碑銘)을 지으라 하시므로 곧 표상(表狀)을 갖추어 그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어명(御命)을 어찌할 수 없어서 감히 재배(再拜)하고 머리를 조아려 이르기를, “일찍이 듣건대 비로자나(毗盧遮那) 부처님이 계시는 화장장엄세계중(華藏莊嚴世界中)에 나타낸 바 제불세계(諸佛世界)를 미래겁(未來劫)이 다하도록 설명하여도 가히 다 설()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오직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계시는 비로자나 부처님이 곧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편만(遍滿)하시며, 비로법중(毗盧法中)에 가장 친근(親近)함이 됨이어든, 하물며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이 세상에 출현함에랴! 서천축국(西天竺國)과 이곳과는 멀지 않은 거리(距里)이다. 큰 구름이 두루 덮혀 일우(一雨)로 동점(同霑)하는 같은 하늘 밑에 있어서, 마땅히 함께 점덕(霑德)을 입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신라에 불법(佛法)이 전래됨으로부터 우리 태조(太祖)께서 만세(萬世)의 창업(創業)을 이룩함에 이르러, 서천축국의 마후라(摩睺羅) 삼장법사(三藏法師)가 초청하지 않았으나 스스로 찾아왔다. 이 때 우리나라에 불법이 장래에 크게 흥왕(興旺)할 것임을 알고 더욱 원력(願力)에 의지하며, 완성된 정력(定力)과 신비한 공덕(功德)으로 손모(孫謀)를 후손에게 전해주어 불교를 홍양(弘揚)하는 것으로써 첫째의 의무를 삼았다. 그리하여 오대(五代)를 지나 송조(宋朝)에 이르기까지 가끔 명승(名僧)을 선발하여 바다를 건너 구법(求法)케 하였으나, 기근(機根)이 국한되어 겨우 일종(一宗)의 종지(宗旨)만을 얻어 그의 종도(宗徒)에게 전수(傳授)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국사는 부처님을 대신하여 이 세상에 나왔으나, 오히려 문도학법(問道學法)하는 형식을 거쳐 선조의 가풍을 계승하여 문도학법을 전하였으니, 마치 우담바라(優曇鉢花)가 한 번 나타난 것과 같다고 하겠다.

국사는 문조(文祖)의 넷째 왕자로서 어머니는 인예태후(仁睿太后)이다. 휘는 석후(釋煦), 자는 의천(義天)이다. 이성(二聖)이 국사와 더불어 숙세(夙世)로부터 숙연(夙緣)을 심어 묘하게 부() () ()의 인연(因緣)이 일시에 계합하였다. 국사는 날 때부터 특이함이 있었으며, 점점 장성하면서 예능을 행함이 마치 성인(成人)과 같았다. 11세 때 문종(文宗)의 숙지(宿志)를 받들어 경덕국사(景德國師) 난원(爛圓)을 은사(恩師)로 하여 삭발염의(削髮染衣)하고 사미계를 받았다. 그로부터 현수교관(賢首敎觀)화엄경을 수학(受學)하다가 경덕국사가 입적(入寂)한 후에도 그 도제(徒弟)와 더불어 강학(講學)을 중지(中止)하지 않았다. 또 널리 모든 종파를 회통(會通)하니 학자들이 함께 모여 강론(講論)함에 있어 무릇 얻은 바가 초월하고 비범하여 마치 노사(老師) 또는 구참(久叅)과 같이 여러 종파와 다방면에 걸쳐 정통(精通)하지 않음이 없었다. 문조(文祖) 23년에 우세(祐世)라는 호를 하사하고 승통직(僧統職)을 내렸다.

이로부터 사방에서 찾아오는 학인(學人)의 근기를 헤아려 수기설법(隨機說法)을 하되, 성스러운 도량(道場)에서 사자후(師子吼)를 발하여 백천법문(百千法門)을 연설하여 인천(人天)의 한량없는 대중을 제도코자 하여 장차 자신이 얻은 바의 견해로써 이를 사람들에게 질문하여 믿음을 당시인들에게 취하려 했다. 그러므로 일찍이 입송구법(入宋求法)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문종(文宗)이 마음으로는 허락하였으나 왕손(王孫)이라는 신분 때문에 공적으로 지시를 내리지는 못하였다. 그 후 선조(宣祖)가 즉위한 다음 계속 여러번 요청하였는데, 선조도 결정하기 어려워서 군신회의(群臣會議)에 회부하였으나, 이 때에도 역시 대제(大弟)인 귀중한 신분으로써 바다를 건너는 것이 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숙종(肅宗)이 아직 번저(藩邸)에 있을 때, 어느 날 국사와 함께 인예태후(仁睿太后)를 배알(拜謁)하고 이야기하던 중, 우연히 이 부분에 언급하여 이르기를, “천태삼관(天台三觀)은 최상진승법(最上眞乘法)이나, 이 나라에 이 종파가 아직 세워져 있지 아니함은 참으로 가석(可惜)한 일이므로, ()이 이에 대한 깊은 뜻을 가지고 있사옵니다라고 하였다. 태후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으며, 숙조(肅祖)도 또한 외호(外護)가 되기를 원하였다.

선조 3년에 이르러 스스로 때가 다가온 줄 알고 다시 구법(求法)을 위한 출국을 요청하였는데, 이 때에도 비록 군신회의에서는 저지를 당하였으나, 이성(二聖)의 마음은 국사의 뜻에 따르고자 하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호연(浩然)히 송나라로 가는 선박 탈 것을 결심하여 48일에 드디어 해양을 건넜다. 최초로 밀주(密洲)의 경계에 도착하였다. 철종황제(哲宗皇帝)가 이 소식을 듣고, 경사(京師)에 있는 계성원(啓聖院)에 영치(迎置)하였다. 몇일 후 수공전(垂拱殿)에서 국사를 접견하되, 예우(禮遇)가 융숭하며 지극하였다. 이때 국사께서 고명한 대덕(大德)스님을 두루 참방(叅訪)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황제는 화엄법사(華嚴法師)인 유성(有誠)에게 명하여 별원(別院)에 와서 있게 하고, 국사가 가는 곳마다 수행(隨行)토록 하였다. 대저 성인(聖人)은 자신의 굴욕은 꺼리지 아니하고, 항상 겸선(兼善)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 장홍(萇弘)과 사양(師襄)과 노담(老聃)과 담자(郯子)등을 스승로 섬기면서 배웠던 것이다. 국사는 밀주(密州)에서 부터 경사(京師)에 이르기까지 일법(一法)을 알거나, 일행(一行)을 가지는 스님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두루 찾아가서 자문(咨問)하였으며 또한 고청(固請)하여 제자(弟子)의 예()로써 친견하고 새로운 종지(宗旨)를 문답(問答)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따라서 현수(賢首)와 천태(天台)의 교판(敎判)의 동이부분(同異部分)과 이 양종(兩宗)의 유묘(幽渺)한 뜻에 대한 그 설명 듣기를 곡진(曲盡)히 하였다. 그 후 상국사(相國寺)에 나아감으로부터 원소종본선사(元炤宗本禪師)를 친견하였는데, 원소가 법상에 올라 앉자 설법(說法)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국사를 찬양하는 게송(偈頌)을 설하였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만리(萬里)의 홍파(洪波)를 타고, 불법(佛法)을 위해 몸을 잊고 선재(善財)를 본받았던가! 생각건대 염부제(閻浮提)에서는 참으로 희유(希有)한 일이니, 마치 우담바라(優曇鉢花) 꽃이 불속에서 핀 것과 같네라 하였다. 또 흥국사(興國寺)에 가서는 서천(西天)에서 온 천길상(天吉祥) 삼장법사(三藏法師)를 만나 약 한 달 동안 있으면서 인도 불교의 현황을 자세히 문학(問學)하였다.

철종에게 표장(表章)을 올려서 항주(杭州)에 있는 화엄좌주(華嚴座主)인 정원법사(淨源法師)의 강하(講下)에 가서 수업하여, 본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황제는 이를 받아 들여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 양걸(楊傑)을 보내어 동반케 하였다. 금산(金山)을 지나면서 불인료원선사(佛印了元禪師)를 배알하니, 이는 희세(稀世)의 만남이어서, 마치 부자(夫子)가 온백설자(溫伯雪子)를 만나고 나서 우리의 만남은 대화가 필요없고 목격하면 바로 그기에 도()가 있다고 하는 것과 같았다. 이어서 곧 항주(杭州)에 도착하여 정원법사(淨源法師)를 참견(參見)하였다. 법사는 국사를 보고 법기(法器)가 비상(非常)함을 알고, 늦게 만나게된 것을 한탄하면서, “()를 전해 주는 것으로써 나의 할일을 삼는다라고 하였다. 또 여항(餘杭)의 산수(山水)가 천하에 제1이므로 모든 종파의 노덕(老德)들이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여 연좌(宴坐)하고 있으나, 이들은 천하를 두루 살펴본 견문(見聞)이 많았다. 국사는 왕족의 애착을 끊으며 권세를 잊고, 만리(萬里)의 해외에서 불법(佛法)을 구하니 비록 도()를 쌓고, ()을 간직하여 입을 다물고 법을 전해주지 않지만, 그래도 오히려 쌀 궤짝을 비우며 물품 창고를 털어 시물(施物)을 가지고 줄을 이어 스님을 찾아 오므로, 제종(諸宗)의 법의(法義)가 다분히 여기서 얻게 되었다.

다음해인 1087년에 선종(宣宗)이 모후(母后)의 뜻을 송의 철종에게 전달하여 국사를 환국(還國)토록 명하여 줄것을 표청(表請)하였다. 이로 인하여 철종은 국사를 궐내(闕內)로 불러 귀국하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황제에게 하직 인사를 고하고, 귀국 길에 오르고자 하였다. 이때 천태종승(天台宗僧)인 자변대사(慈辯大師) 종간(從諫)이 부촉시(付囑詩) 한 수를 지어 수로(手爐)및 여의(如意)등과 함께 증정하였다. 국사가 송나라에 가기 이전에 이미 자변대사의 고명(高名)을 들은 지 오래였다. 그리하여 이미 항주에 이르러서는 특히 자변(慈辯)에게 천태일종(天台一宗)의 경론(經論)을 강설해 주도록 청하여 항상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인 양걸(楊傑)과 그리고 모든 제자들과 함께 청강(聽講)하였으므로, 이제 이와 같이 부촉(付囑)하는 시를 지어 주었던 것이다. 경화(京華) 이르니, 황제께서 또 수공전(垂拱殿) 서 접견하고 여기서 마지막으로 몇일 머물라고 했다. 다시 궐내(闕內) 들어가 귀국 인사를 드리고, 항주에 있는 정원법사(淨源法師) 처소에 이르니, () 날마다 화엄경(華嚴經)의 대의(大義)를 강설해 주었다. 강의가 끝나고 향로와 불자(拂子)를 줌으로써 부법(付法)하는 신표(信表)로 삼았다.

그 다음 천태산(天台山)으로 가서 지자대사(智者大師)의 부도(浮圖)에 참배하고 발원문(發願文)을 지어 탑전(塔前)에서 서원(誓願)하여 이르기를, “일찍이 듣건대 대사(大師)께서 판석(判釋)한 오시(五時) 팔교(八敎)의 교판(敎判)이 동류(東流)한 일대성언(一代聖言)을 궁진(窮盡)하지 않음이 없사옵니다. 본국에도 옛날 체관(諦觀)스님이 있어서 천태교관(天台敎觀)을 전승(傳承)하였으나, 이제 그 승습(承習)이 단절된지 이미 오래입니다. 제가 이제 분심을 발하여 몸을 잊고, 스승을 찾아 도()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미 전당(錢塘) 자변(慈辯)의 강하(講下)에서 천태 교관(敎觀)을 품수(稟受)하였사오니, 훗날 본국에 돌아가서 신명을 다하여 전양(傳揚)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명주(明州) 아육왕산(阿育王山) 광리사(廣利寺)에 가서 대각양연선사(大覺懹璉禪師)를 친견하였는데, 인종(仁宗)이 이 스님을 존중하여 복전(福田)을 삼았다. 이제 이 노사(老師)를 여기에서 귀의하였다. 즉 대각국사가 대각선사에게 문법(問法)하였으므로, 대각회련선사가 법상(法床)에 올라 설법함을 만났으니, 심히 본래 출국한 뜻과 계합하였다. 이미배를 타고 본국의 경계에 도달하여는, 곧바로 허락없이 임의로 출국한 죄를 내려달라는 표상(表狀)을 올렸다. 그러나 왕은 벌을 주는 대신 크게 포상하라는 조칙(詔勅)을 내리고, 궁내에 영입하여 구법도상(求法途上)에 따른 여고(旅苦)를 위로하는 예모(禮貌)가 융성하여 자못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국사께서 송나라에서 구법한 것은, 두루 선지식을 참방(參訪)하여 문법(問法)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보고 느낀 바를 영부(靈府)에 깊이 새겨 두었다. 그리고 국사가 구해 온 경서중(經書中)에 반이상은 아직 본국에 유행(流行)하지 않는 귀중한 경들이었다. 구법일행(求法一行)이 헤어질 무렵 주객(主客)인 군신(君臣)이 모든 선() () 제공(諸公)들에게 이르기를, 옛 부터 바다를 건너 구법한 이가 많았지만, 어찌 승통(僧統)께서 한 차례 상국(上國)에 가서 있는 바 천태(天台) 현수(賢首) 남산(南山) 자은(慈恩) 조계(曹溪) 서천범학(西天梵學)등 제종(諸宗)을 일시(一時)에 전래함과 같겠는가! 참으로 홍법(弘法)하는 대보살(大菩薩)의 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진실한 의체(義諦)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울 뿐만이 아닌 것이다. 옛날 공자(孔子)가 위()나라로 부터 노()나라로 돌아온 연후에야 비로소 낙정(樂正)과 아송(雅頌)에 각각 그 경지를 얻은 것과 같이, 국사가 송으로부터 귀국한 뒤에야 모든 종파의 교리가 각기 그 정법(正法)을 얻었다. 하물며 천태일종(天台一宗)은 비록 체관(諦觀)과 지종(智宗)의 무리에서부터 그 남상(濫觴)을 두었으나, 이 땅에서 아직 그 종()을 세우지 아니하여 학자가 끊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음에랴!

법화경에 이르기를, “일월등명(日月燈明)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사제(四諦) 십이인연(十二因緣) 육바라밀(六波羅密) 등을 설()하였다. 부처님께서 사리불(舍利弗)에게 이르시되, 여래(如來)는 다만 일불승법(一佛乘法)만으로써 중생을 위해 설하실뿐, 여승(餘乘)인 저 이승(二乘)이나 또는 삼승법(三乘法) 등은 전혀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이 자리를 떠나지 아니하고 이승과 삼승을 회통(會通)한 원묘(圓妙)의 일법(一法)에 대한 진관(眞觀)이 이미 보살영락경에 갖추어 있고 공관(空觀) 가관(假觀) 중도제일의체(中道第一義諦)는 보처대사(補處大士)인 미륵보살이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계승받았다. 여래께서 열반하신 후, 500여 년에 이르러 이단(異端)이 봉기하므로 용수보살이 지도론을 지어 중도(中道)의 이치를 발명하였다. 그러므로 형계담연(荊谿湛然)이 이르기를, 하물며 삼관(三觀)이 따로 있겠는가! 본종(本宗)의 영락일가(纓絡一家)의 교문(敎文)은 멀리로는 불경(佛經)을 품수하였으되, 법화(法華)로써 종골(宗骨)을 삼고, 지론(智論)으로써 지남(指南)을 삼았다. 용수보살로부터 형계(荊谿)에 이르기까지 천태(天台)9()가 된다. 그 교()가 중국에서 대행(大行)한지 이미 요요(廖蓼)히 사백여년이 되었건만, 이 땅에는 아직도 입종(立宗)하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개 여래께서 오랫 동안 유지(遺旨)에 대하여 묵묵하신 것은 이는 장차 그 법을 감당할 만한 스님을 기다려 전법(傳法)하고자 함이었다. 대임(大任)을 맡을 만한 재질(才質)은 제종(諸宗)의 학문에 있어 고심(刳心)하지 않음이 없다. 그리하여 국사께서는 스스로 다짐하여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현수(賢首)와 천태(天台) 양종(兩宗)은 그 시절인연이 도래하였으므로 구법하고 돌아와서 최초로 왕에게 올린 표상(表狀)에 이르기를, “만리(萬里)의 홍파(洪波)를 타고, 백성(百城)의 선우(善友)를 친견하여 두루 진교(眞敎)를 심문(尋問)함은 오로지 부왕(父王)인 문종(文宗)의 성서러운 위력(威力)을 의뢰한 것이며, 천태종과 현수종지(賢首宗旨)까지 깊이 연구 하였아옵니다. 진수(晉水)와 고산(孤山)의 종지(宗旨)에 있어서는 외람되게 노불(爐拂)까지 전해 받았으니, 이는 기구(箕裘)를 잘못 승사(承事)한 것이 아닌가하고 저으기 걱정되옵니다라 하였다. 이에 따라 가히 홍도(弘道)할 만한 자를 모집하였는데, 덕린(德麟) 익종(翼宗) 경란(景蘭) 연묘(連妙) 등이 각기 그의 도제(徒弟)를 거느리고 모아드니 모두 제자(弟子)의 행렬에 속하였다. 태후(太后)께서 예전에 세웠던 대원(大願)을 다시 발하여 가감(伽監)을 창건하여 국청사(國淸寺)라 이름하고 불교를 크게 선양(宣揚)하여 진행(進行)하다가, 대원(大願)이 이루지지 못하고 1083년에 선가(僊駕)께서 상천(上天)하고 숙조(肅祖)가 왕위를 계승하고 건축불사를 계속하여 공사가 끝난 다음, 국사를 청하여 주지(住持)를 겸임하게 하였다.

국청사의 낙성법회(落成法會)에 법가(法駕)께서 친히 행림(幸臨)하시고, 천태일종(天台一宗)의 학자와 모든 종파의 석덕(碩德)들이 무려 수천명이 국사의 도풍(道風)을 들으려고 모여왔다. 국사께서 법좌(法座)에 올라앉아 해조음(海潮音)을 떨쳐 미증유법(未曾有法)인 일종묘의(一宗妙義)를 연설하시니, 무상근기(無上根機)는 다분히 중도(中道)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터득하였다. 숙종이 또 대원(大願)을 세워 천수사(天壽寺)를 창건하여 천태교관(天台敎觀)을 홍포하려 하다가 낙성(落成)을 보지 못하고 용어(龍馭)께서 귀궁(貴弓)하시고 예고(睿考)가 왕위를 이어받아 숙종의 대원을 완성하므로써 영원히 삼한(三韓)을 비호하였으나, 아직도 사방에서 병란(兵亂)이 일어나 창생(蒼生)은 도탄에 빠졌으나, 오직 이 해내(海內)에서만은 편안하여 아무런 근심이 없다. 평화스럽게 닭이 울고, 개가 짖음이 사경(四境)에 달하였다. 남자는 밭에서 농사 짓고, 녀자는 집에서 배를 짜면서 그 부수(富壽)를 잃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인력(人力)의 소치(所致)이겠는가? 그 중요한 원인은 국사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지 이미 오래된 말세에 신명(身命)을 돌보지 않고, 멀리 해외에 가서 법보(法寶)를 전해 와서 이 땅에 법륜(法輪)이 무궁토록 한 것에 기인한 것이며, 따라서 태후와 숙종, 그리고 지금의 인종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지극한 정성을 발하여 수희찬탄하며 외호(外護)하였기 때문이다.

또 선대의 뜻을 계승하여 불사(佛事)를 완성시켜 묘법(妙法)으로 하여금 상주(常住)케하였으니, 제불(諸佛)의 호념(護念)한 바의 때문이며, 제천(諸天)의 옹위(擁衛)한 바의 힘이 아니겠는가! 국사가 입적(入寂)함에 책서(冊書)를 보내 국사(國師)로 봉하고 시호를 대각(大覺)으로 추증하였다. 이 보다 앞서 이미 숙종이 대각이란 이자(二字)로써 국사의 호를 삼으려 하였으나, 국사가 간절히 사양하기를, “대각은 부처님의 덕칭(德稱)이어늘, 어찌 감히 외람되게 의거(依據)할 수 있겠습니까라면서 끝내 받아들이지 아니했었다. 이 때에 이르러 유사(有司)로 하여금 국사의 시호(謚號)를 논의케 하였으나, 역시 대각이란 이 이자(二字)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옛날 영공(靈公)이 죽어서 사구(沙丘)에 묻으려고 땅을 파던 중 석곽(石槨)이 나타났는데, 다음과 같은 명()이 새겨져 있었다. “영공이 탈취(奪取)하여 묻힐 것이다라 하였으니, 대저 영공이 다시 영공이 된 것이 이미 오래라고 하였다. 이런 사실로써 관찰하여 보건데, 이제 국사가 또한 대각이 된 것이 이미 오래라고 하겠다. 또 국사가 입송하여 구법하는 도중 항주(杭州)에 있을 때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인 양걸(楊傑)이 이르기를, “어제 아침 송자(松子)로 끓인 죽을 받아 먹을 때, 정자사(淨慈寺)의 종본장로(宗本長老)가 이르러 오므로 죽을 차려 드렸더니, 장로(長老)께서 깜짝 놀라서 말하기를, ‘내가 수년전 용산사(龍山寺)에 투숙하였다.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한 대접의 잣죽을 주거늘, ‘당신은 누구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동방(東方) 부동불국(不動佛國)에서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오늘 이 죽도 그 때 꿈에 보았던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대저 국사가 증득(證得)한 바의 지견(知見)이 모두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경계(境界)인 즉 그의 나타내는 바 사실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대선사(大禪師)인 순선(順善)과 선사(禪師)인 교웅(敎雄)과 유청(流淸)은 모두 국사의 법손(法孫)이다. 서로 의논하여 말하되, 우리 천태종은 이 땅에 유행(流行)하지 않던 것을 국사가 처음으로 제창(提唱)하여 힘을 다해 창립하였다. 저 달마대사가 진단(震旦)에 있어 선종(禪宗)의 시조(始祖)인 것과 같은데도 지금까지 비기(碑記)가 없으니, 만약 비를 세워 국사의 행상(行狀)을 새겨두지 아니하면, 그 방임(放任)한 일로 후세에 이르러 우리들에게 돌아올 허물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법손의 의견을 모아 임금께 상주(上奏)하였더니, 임금께서 국사의 덕을 존중하고 도를 흠모하여 유덕(遺德)의 깊은 뜻을 길이 빛나게 하고자 국사의 비()를남숭산사(南崇山寺)에 세우도록 명하고, 법손으로 하여금 상속(相續)하여 주지(住持)해서 그 유교(遺敎)를 전양(傳揚)하며 단절(斷絶)함이 없도록하라 하였다. 국사의 위대한 업적을 촬략(撮略)하여 명()하노라.

일체법(一切法) ()한 것을 설()하려 하건만

분별심(分別心) 가지고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모든 법() ()했지만 그대로 현상(現象_일새

육경(六境)에 집착하나 본래(本來)가 가명(假名)일 뿐.

이 이치(理致) 어찌하여 다할 수 있겠는가.

현상계(現象界) 그대로가 본래(本來)로 없는 것을.

()과 공() 그 자체(自體)는 동체(同體)서 갈라진 것

이렇게 보는 것을 중도(中道)라 이름하네.

()따라 궁구하여 본체(本體)를 발명(發明)하면

뚜렷한 원각(圓覺)자리 우주를 비추리라.

삼세(三世)에 두루하신 일체(一切)의 부처님도

모두가 이 길따라 정각(正覺)을 성취했네.

우리의 대각국사(大覺國師) 서송(西宋)에 유학하여

천태(天台)의 삼지삼관(三止三觀) 교관(敎觀)을 전해왔네.

임금이 명령하여 숭산(崇山)에 터를 닦아

천태종(天台宗) 시조(始祖)이신 대각(大覺)의 비()를 세우다.

남숭산(南崇山) 높고 높아 웃뚝히 솟았는데

비석(碑石)도 산()과 함께 영원(永遠)히 함께 하리.

    문인(門人) 천수사(天壽寺)의 대지(大智)와 덕천(德遷)스님은 비문을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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