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장權檣(1489~1529)|
증 통정대부 홍문관 부제학 행 봉렬대부 호조 정랑 겸 춘추관 기
주관 제촌 권 공의 묘갈명[贈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行奉列大夫戶曹
正郎兼春秋館記注官霽村權公之墓碣銘] _ 이돈우李敦禹∙
효종 병인년(1650)에 기묘명현己卯名賢∙1인 제촌霽村 선생에게 홍문관 부제학이 추증되
었으니, 실로 세상에 드문 특별한 은혜였다. 100여 년 뒤에 선생의 방계 후손 인하人
夏∙2가 선생의 유고를 가지고 나에게 비문을 청하면서 “방계 선조의 묘비가 오래되어
이끼가 끼고 삭았는데, 또 추증된 사적이 실리지 않아 이제 새로 세우려고 하니 갈명을
부탁드립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하찮은 후생이라 백번 절하고 사양했지만, 의리상 감
히 거절할 수 없는 바가 있어 공손히 유고를 받아서 다음과 같이 쓴다.
선생의 이름은 장檣이고, 자는 제보濟甫이며, 성은 권씨權氏이고, 본관은 안동이며, 고
려 태사 행幸의 후손이다. 중세에 예의 판서 인靷은 공의 고조부이고, 현감을 지내고
이조 참판에 증직된 계경啓經은 공의 증조부이다. 호군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증직된
곤琨은 공의 할아버지이고, 생원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사빈士彬이 공의 아버지이다. 정
경부인에 증직된 어머니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사재감 주부 당塘의 따님이고, 소정공昭靖
公 곤坤의 손녀로 홍치 2년 기유년(1489)에 선생을 낳았다. 나면서부터 재능과 지혜가 뛰어나고 풍채가 좋고 의기가 당당하였는데, 장성해서는 더욱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널리 배우고 힘써 행하니 옛 군자의 풍도가 있었다. 정 덕 계유년(1513)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기묘년(1519)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과 청송聽松 성 수침成守琛과 함께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었으며, 전시殿試에 응시하기 전에 식년문과에 급 제하여 예문관 검열에 뽑혔고, 여름에 홍문관 정자 겸 경연사경經筵司經에 발탁되었다. 얼마 안 되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당시의 명현들은 귀양을 가거나 죽임을 당하였지만, 선생은 이듬해(1520)에 예문관 봉교로 승진하였다가 성균관 전적에 올랐고, 사헌부 감찰로 옮겼다. 신사년(1521)에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왔고, 임오년(1522)에 기묘사화의 일로 음애陰厓 이자李耔, 모재慕齊 김안국金安國과 함께 배척당하여 진보 현감으로 나갔다. 정해년 (1527)에 직강으로 있다가 형조와 공조의 낭관으로 옮겼고, 기축년(1529)에 호조 정랑이 되었다. 얼마 안 되어 금산 군수에 제수되어 부모님을 봉양하기에 편리해졌으나, 억지로 부 임하는 도중에 위독해져 집으로 돌아와 6월 13일에 별세하니 향년 41세였다. 예천醴 泉 북쪽 귀미촌龜尾村 남향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뒤에 통정대부 홍문관 부제학 겸 경 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에 증직되었다. 숙부인淑夫人에 증직된 부인 함양박씨咸陽朴氏는 사직 효증孝曾의 따님이고, 묘는 공의 무덤 오른쪽 언덕에 있다.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호금好金이고, 딸들은 차례로 류회원柳恢源·박창朴菖·생원 박열 朴悅에게 시집갔다. 호금은 3남을 두었는데, 맏아들 방昉은 주부를 지냈고, 둘째는 병昞 이고, 셋째는 왕旺이다. 방은 2남을 두었는데, 맏아들 상중尙中은 별제를 지냈고, 둘째 는 상립尙立이다. 상중은 2남을 두었는데, 맏아들은 지鋕이고, 둘째 도鍍는 문과에 급제 하여 정자를 지냈으며, 내외 자손들은 많아서 기록하지 않는다. 오호라! 선생은 강하고 굳센 모습과 진실한 학문으로 안으로는 충정 선생忠定先生∙3에 게 직접 가르침을 받아서 덕을 이루었고, 밖으로는 여러 훌륭한 선비와 도의로써 사귀 었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밖은 온화하고 너그러우면서도 안은
굳세고 올바르니, 남이 감히 사사로이 간여하지 못하였다. 진보 현감이 되어서는 밝고 은혜롭게 정사를 베푸니,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편안 히 여겼다. 사헌부 감찰이 되어 옥사를 판결하고 도적을 다스릴 때는 숨겨진 죄상을 적발하는 것이 마치 귀신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감복하였으니, 진실로 좋은 때를 만나 그 쓰임을 다하게 하였다면, 덕행과 사업이 반드시 당세에 빛나고 역사책에 눈 부시게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간신들이 권세를 잡아 외직으로 배척하여 그 포부를 하나도 펴지 못하였고, 하늘이 또 목숨을 가로막아 뜻을 품은 채 세상을 마쳤 으니, 어찌 우리 유가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충정 선생이 공경하는 아우로 인정하였고, 기묘사화에 관련 된 어진 인물들이 또 그 학문을 추천하였으며,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은 그 실제의 덕 이 공경할 만하다고 칭송하였고,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 선생이 덕을 기록한 행장을 지었 으니, 영원토록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충정공이 경외하는 아우이면서 以忠定畏弟
화담 청송 이름을 나란히 했고 與花松齊名
음애 모재 더불어 배척당해도 同陰慕被斥
성상의 은혜 입어 포상 받으니 蒙聖朝褒榮
선생의 업적이 없어지지 않으리라 斯足不朽於先生也
예천 북쪽 귀미촌 언덕에다가 醴泉之北龜尾之原
선생의 옷과 신을 갈무리하니 實惟先生衣履之藏也
오호라! 천추에 백 세가 지나가도록 鳴呼千秋百世兮
듣는 자 일어나고 지나는 자 공경하니 宜其聞者興過者式
땔나무 하는 자여 해치지 말게 樵者勿傷也
통정대부 행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한산韓山 이돈우李敦禹가
삼가 짓다.
옛적 비석은 가정 임진년(1532)에 세웠는데, 지문誌文은 있지만 갈명이 없어서 408년
이 지난 기묘년(1939) 겨울에 다시 세우고, 후손 상로相老∙4가 앞면을 쓰고, 방계 후손 연
섭延燮이 뒷면을 쓰다
贈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行奉列大夫戶曹正郎兼春秋館記注官霽村
權公之墓碣銘
_ 李敦禹
我顯孝王丙寅 贈己卯名賢霽村先生 職文衡亞長 實曠也異恩也 後百餘年 先生從後孫
人夏 持先生逸稿 求顯刻之文於敦禹 曰從先祖墓碑 年久苔蝕 且贈秩事蹟不載焉 將謀
改竪 願有以銘之 顧後生蔑識 當百拜以辭 而義有所不敢已者 謹拜受而撰次之 先生諱
檣 字濟甫 姓權氏 系出安東 高麗太師諱幸後 中世有諱靷禮儀判書 啓經縣監 贈吏曹
參判 琨護軍 贈吏曹判書 士彬生員 贈領議政 實先生高曾祖考 妣贈貞敬夫人 坡平尹
氏 司宰主簿塘女 昭靖公坤孫 以弘治二年己酉 生先生 生而岐嶷 器宇軒昂 及長聰穎
強記 博學力行 有古君子風 正德癸酉 中司馬 己卯與徐花潭敬德 成聽松守琛 同入賢
良薦 未及殿試 登式年文科 選補藝文館檢閱 夏擢弘文館正字兼經筵司經 亡何 士禍作
一時名賢 幷被竄殛 明年 敍遷奉教 陞典籍 移司憲府監察 辛巳充書狀官 赴京師 壬午
以己卯事 與李陰厓耔 金慕齊安國 同被斥 出監眞寶 丁亥直講 轉刑工郎 己丑移户曹
正郎 尋除金山郡守 以便養 強赴道病㞃還家 以六月十三日終 享年四十一 葬醴泉北龜
尾午向 後贈通政大夫 弘文館副提學 兼經筵參贊官 春秋官修撰官 配贈淑夫人 咸陽朴
氏 司直孝曾女 墓祔右麓 生一男三女 男好金 女適柳恢源朴菖朴悅生員 好金三男 昉
主簿 昞旺 主簿二子 尙中別提 尙立 别提二子 鋕 鍍文科正字 內外雲仍多不綠 於乎
先生以剛毅之姿 醇正之學 內從忠定先生 薰炙以成德 外與諸名碩 磨礱以道義 孝於親
友於兄弟 外寬和而內剛正 人莫敢干以私 爲眞寶也 爲政明惠 吏畏民安 爲秋官郎也
决獄治盜 摘伏如神 衆皆畏服 苟使遇其時 究其用 則德行事業 必焜耀當世 輝映簡策
而不倖權奸用事 擯斥外位 不能一展其蘊 而天又閼其年 齎志而卒世 其非吾道之不倖耶
雖然忠定先生 許以畏弟 己卯諸賢 又薦其學問 寒岡鄭先生 稱其實德之可敬 荷塘權先
生 有紀德之狀 可徵於百世矣 銘曰 以忠定畏弟 與花松齊名 同陰慕被斥 蒙聖朝褒榮
斯足不朽於先生也 醴泉之北龜尾之原 實惟先生衣履之藏也 鳴呼千秋百世兮 宜其聞
者興過者式 樵者勿傷也
通政大夫 行承政院同副承旨 兼 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 韓山 李敦禹 謹撰
舊碑立於嘉靖壬辰 有誌無銘 後四百八年 己卯冬改竪 後孫 相老書面 傍裔 延燮書陰
출전:判書公派金石文集刊行委員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