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자점〔榛子店〕
우연히 진자점 지나며 / 偶過榛子店
아득히계문란떠올리노라 / 遙憶季文蘭
옛 역에 봄은 다시 왔건만 / 古驛春重到
요동성(遼東城)에 학은 돌아오지 않네/ 遼城鶴未還
부질없이 벽에다 시를 써서 남기니 / 空留題壁字
어느 곳이 지아비 그리던 산이런고 / 何處望夫山
채녀를 속량해 주는 사람 없어 / 蔡女無人贖
멀리서 한나라 초승달 바라봤으리/ 遙瞻漢月彎
[주-C001] 연운기행(燕雲紀行):
임인년(1782, 정조6) 겨울, 동지 겸 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로 연경(燕京)에 가게 되었다. 정 상공(鄭相公) 존겸(存謙)이 정사(正使)였고, 홍 학사(洪學士) 문영(文泳)이 서장관(書狀官)이었다.[壬寅冬 以冬至兼謝恩副使赴燕 鄭相公存謙爲正使 洪學士文泳爲書狀官.]
[주-D001] 진자점:
이 작품은 이계가 1782년(정조6) 동지 겸 사은사 부사로 연경에 가서 사신의 임무를 마치고 해를 넘겨 1783년에 연경을 떠나 귀국하는 여로에 진자점을 지나며 지은 시이다. 진자점은 오늘날의 진자진(榛子鎭)으로 풍윤현(豐閏縣)과 사하역(沙河驛) 중간 지점에 있는 작은 성이다. 평성 ‘산(刪)’ 운의 측기식 수구불용운체 오언율시이다.
[주-D002] 계문란(季文蘭):
계문란은 명(明)나라 말기에 청(淸)나라 사람들에게 잡혀 노예가 되어 심양(瀋陽)으로 끌려간 강남(江南) 출신의 여인인데, 사행 여로에 있는 진자점의 어느 청루(靑樓)의 벽에 남긴 시가 있어 조선 사신들의 글에 자주 올라 유명하였다. 남구만(南九萬)의 《약천집(藥泉集)》 제2권 〈진자점 벽(壁)에 쓰여 있는 계문란의 시운에 차운하다〉라는 시의 주에 관련 내용이 상세한데 다음과 같다. “난주(灤州)의 진자점 벽에 먼지가 뒤덮인 가운데 시가 쓰여 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낭자를 한 몸 옛날 화장함을 부질없이 가여워하고, 길 가는 여인 월나라 비단 치마를 바꾸었네. 부모의 생사 어느 곳에서 알까, 봄바람 심양에 올라오는 것 애통하네.[椎髻空憐昔日粧, 征裙換盡越羅裳, 爺孃生死知何處, 痛殺春風上瀋陽.]’라고 하였으며, 그 아래에 쓰여 있기를, ‘이 계집종은 강주(江州) 우상경(虞尙卿)의 아내이다. 남편은 죽음을 당하였고, 이 계집종은 포로로 잡혀 왕장경(王章京) - 장경은 군대를 거느리는 오랑캐의 직책이니, 우리나라의 초관(哨官)과 같은 것이다. - 에게 팔려갔다. 무오년 정월 21일에 눈물을 뿌리며 벽을 털고 이것을 쓰노니, 천하에 유심(有心)한 사람들이 있어 이것을 보고 가엾게 여겨 구원해주기를 바라노라. 이 계집종은 또한 비루하고 속됨을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니, 아, 서글프다. 계집종의 나이는 21세이니, 계(季) -아래 두 글자가 지워졌음- 수재(秀才)의 딸이고, 어머니는 진씨(陳氏)이며, 오라비 이름은 국상(國庠)이니, 부학(府學)의 수재(秀才)이다. 계문란-아래 글자가 지워졌음-’ 하였다.”라고 한 기록이 보인다.
[주-D003] 요동성(遼東城)에 …… 않네:
돌아오지 않는 계문란을 비유한 것이다. 요동성에 학에 대해서는, 요동 사람이었던 정영위(丁令威)가 영허산(靈虛山)에서 신선술을 배운 후에 학이 되어 돌아와 성문의 화표주(華表柱)에 머물렀는데, 그때 한 소년이 활을 들고 쏘려 하자 학이 공중을 배회하며 말하길, “새여! 새여! 정영위가 집을 떠나 천 년 만에 돌아왔는데, 성곽은 그대로건만 사람들은 다르네. 어찌 신선을 배우지 않고 무덤만 즐비할고?”라고 하더니 마침내 높이 하늘로 사라졌다고 한다. 《搜神後記》
[주-D004] 채녀(蔡女)를 …… 바라봤으리:
계문란을 채녀에 비유한 것이다. 채녀는 후한(後漢) 때의 학자인 채옹(蔡邕)의 딸인 채염(蔡琰)을 가리킨다. 흉노(匈奴)의 포로가 되어 오랑캐 땅에서 12년 동안 살다가 조조(曹操)의 구원을 받고 중국에 돌아온 뒤 비분강개의 심정을 읊으며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을 지었다고 한다. 《樂府詩集 琴曲歌辭 胡笳十八拍》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이승현 (역)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