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仲樑
李仲樑字公幹, 號賀淵, 永川人。 聾巖賢輔子。 燕山甲子生。 中宗戊子司馬, 甲午文科。 歷檢閱、說書、三司、直提學, 至觀察使。 宣祖壬午卒。
公天性朴直, 處事緻密。 惡浮薄輕淺之習, 人有漫浪遊怠者, 必曰: “天之生物, 各有所爲。 縱未能爲眞事業, 治農則必期取禾三百, 欲獵則亦須庭有懸貆, 豈宜無所用心而恬於素食乎?”
嘗守永川郡, 莅以厚德, 發號令, 順民情, 不尙剸煩之政, 而上下孚, 人物遂, 至今以循吏稱。
公恬於仕宦, 雅好溪山。 所居泉石頗勝, 林園花竹, 池沼亭榭, 晩年退休之樂, 亦庶幾先人之高蹈。 弟叔樑撰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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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량李仲樑(1504~1582)| 묘갈명 병서墓碣銘 幷敍 _ 김도화金道和∙3 문순공文純公 퇴도退陶 부자夫子께서 효절공孝節公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선생의 성리학과 절행節行에 관한 행장을 지으면서 어진 자제들의 덕행과 문장의 성대함 을 빠짐없이 말하였으니, 군자의 귀한 글이 어찌 영원토록 믿을 만한 증거가 되 지 않겠는가. 효절공의 넷째아들 중량仲樑은 자가 공간公幹이고 호가 하연賀淵이다. 홍치 갑자년 (1504) 9월 19일에 태어났으니 문순공보다 겨우 세 살이 적지만, 고향을 떠나 공 부한 것이나 뜻을 둔 것이 같아서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과거에 급제하기까지 늘 함께하였으며, 같은 해(1534)에 벼슬길에 나아갔다. 출처가 독실하여 또 모든 일을 문순공에게 물어보고 그 기준을 따랐으므로 선생의 처음과 끝이 문순공의 기준과 같았을 것이니, 이만하면 군자라고 일컬을 만하지 않겠는가. 선생은 풍채가 준수하고 총명이 과인하여 배움에 나아가자마자 문장의 뜻을 환 하게 깨달아 닦달하거나 감독할 필요가 없었다. 여덟 살에 영양永陽(영천)의 임소 로 효절공을 따라가 효절공의 명을 받들어 시를 지어 올렸는데, 글에 나타난 기 품이 놀라울 만큼 빼어나 효절공이 더욱 기특하게 여기고 아끼며 항상 크게 되리 라고 기대하였다. 갑신년(1524)에 용문龍門 조욱趙昱∙1 공과 함께 적산사赤山寺에서 글을 읽었고, 무자년(1528)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갑오년(1534)에 급제하여 곧바로 승문원에 분관分館∙2되었다가 예문관 검열로 뽑혀 들어갔다. 병신년(1536)에 대교에 올랐고 얼마 안 되어 봉교로 옮겼다. 정유년(1537)에 시강원 설서에 제수되었다가 승정원 주서로 옮겼는데 어떤 일로 면직되었다. 5월에 모친상을 당했고 기해년(1539)에 삼년상을 마치자 다시 봉교가 되었다가 얼마 뒤에 전적에 올랐다. 경자년(1540)에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고 사간원 정언에 올랐다가 사헌부 지평으로 옮겼고 병조 정랑으로 바뀌었다. 임인년(1542)에 경기도 도사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효절공이 늙어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오시자 선생이 잔치를 베풀고 술잔을 올려 장수를 비니 벼 슬아치와 사대부 및 도로에서 구경한 사람들이 모두 감탄해 마지않았으며, 얼마 뒤에 황해도 도사와 바꾸었다. 계묘년(1543)에 부모님을 봉양할 수 있도록 애걸하여 영천永川 군수에 제수되었 는데, 이때 효절공이 자헌대부로 품계가 올라 분황焚黃∙3의 추은追恩을 입었다. 선생이 잔치를 베풀고 마을 어른들을 두루 초청하여 할아버지께서 하셨던 옛일을 이으니, 문순공이 시를 지어 “노래자∙4처럼 색동옷으로 장수함을 받들었고, 모의∙ 처럼 격문으로 불로 신선 봉양하네[萊衣昔奉靈椿樹 毛檄今供不老仙].”라고 하며 축하하 였다. 기유년(1549)에 조정에 들어가 종부시 정이 되었고 얼마 뒤 삼척 부사에 임명되 었으며 경술년(1550)에 청송 부사와 바꾸었는데, 고향 가까이에서 어버이를 모시 기 위해서였다. 갑인년(1554) 정월 보름에 맏형 벽오碧梧 문량文樑이 긍구당肯構堂 을 중수하였는데, 둘째 형 호암虎巖 희량希樑과 아우 환암串巖 계량季樑이 모두 가 까운 읍을 애걸하여 부임하였다. 공무가 한가할 때마다 3형제가 저마다 관아의 술을 가져와 긍구당에 모여서 잔치를 열고 술잔을 올렸다. 효절공은 여전히 건 강한 모습으로 흰 도포에 무소뿔로 만든 허리띠를 차고 의젓하게 앉았으며, 여러 자식과 손자가 둘러서서 술을 마시며 즐기니 바라보면 마치 신선 중의 한 사람 같았는데, 그해에 또 안동 부사로 옮겼다. 을묘년(1555)에 효절공이 돌아가시자 선생이 지극한 공경과 깊은 슬픔으로 장례 를 치르고 3년 동안 시묘하였다. 삼년상이 끝나자 바로 사헌부 장령에 올랐는데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6이 시를 지어 감탄하며 기렸다. 무오년(1558)에 사도시 정 에 임명되었고 얼마 뒤 사간원 사간으로 옮겼다가 곧바로 홍문관 교리로 뽑혀 들어갔다. 기미년(1559)에 집의로 옮겼고, 곧 응교에 임명되었다가 직제학으로 옮겨 제수 되었으며 7월에 경상도 재상어사灾傷御史에 차임되었다. 임무가 끝나고 복명하자 동부승지에 올랐고, 9월에 말미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문순공과 함께 효절공이 반형班荊∙7한 옛일을 본떠 만대정晩對亭에서 모임을 열고 시를 지어 읊었다. 경신년(1560)에 우부승지에 임명되었고 얼마 안 되어 좌부승지로 옮겨 왕명 출 납을 합당하게 하니 주상께서 마음을 기울여 아끼고 돌보셨다. 선생이 밤낮으로 이어지는 업무에 지쳐 벼슬에서 물러나려는 뜻으로 문순공에게 편지로 물으니 문순공이 “왕명 출납은 자신에게서 말미암는 것이 아니므로 작은 허물이 없을 수 없지만, 나랏일을 위해 홀로 고생하는 신하의 일상사입니다. 오직 힘써 노력하며 죽을힘을 다할 뿐이니 어찌 질병을 타고난 사람처럼 나랏일을 스스로 포기하려고 하십니까?”라고 답하였다. 이에 선생이 병을 무릅쓰고 직무를 수행하여 위로는 성상께서 융숭하게 보살펴주시는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어진 벗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오랫동안 머물면서도 돌아가지 않았는데, 이는 평소에 품은 뜻이 아니 었다. 얼마 뒤에 예조 참의로 옮겼다가 체임되어 부호군이 되었고, 신유년(1561)에 중추부로 나갔다가 우승지에 임명되었다. 임술년(1562)에 상주 목사에 제수되었고 계해년(1563)에 경주 부윤으로 옮겼는데, 모두 한결같이 백성들이 처한 상황을 살 펴 전횡과 번잡함을 숭상하지 않으니 지금도 어진 원님이라는 칭송이 자자하다. 갑 자년(1564)에는 맏손자를 도산에 보내어 배우게 하였고, 8월에 군액軍額∙8이 모 자라 파직당했다가 을축년(1565)에 다시 중추부에 서용되었다. 정묘년(1567)에 명종대왕께서 승하하시자 궁궐에 달려가 곡하였고 영해 부사에 제수되었다. 영해는 해안 방어 때문에 자주 무신이 임명되어 백성들에게 함부로 세금을 거둬들이니 백성들이 뿔뿔이 달아나 암읍巖邑∙9으로 불렸다. 선생은 부임 한 즉시에 아전을 엄중히 단속하고 백성을 구제하니 반년이 되지 않아 새롭게 교 화되었으며, 향교鄕校와 해안루海晏樓를 중수하였다. 인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품고 “해안 사람 교화는 내가 할 일 아니므로, 도연명을 본받아서 내 맘대 로 살고 싶네[安邊化俗非吾事 欲學淵明任去留].”라는 시를 쓰고 마침내 사직하고 고향 으로 돌아왔다. 신미년(1571)에 공조 참의에 제수되었고, 겨울에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어떤 일 때문에 파직되었다. 임오년(1582) 3월 19일에 운명하니 향 년 79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주상께서 매우 슬퍼하시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 사 지내게 하였고, 9월에 예천醴泉 효망산孝望山의 동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 선생은 성품이 침착하고 도량이 드넓어 도에 가까운 자질을 갖추었다. 효절공 의 집안에서 태어나 효성과 우애로 가풍을 잇고 충직과 신의로 자신을 닦아 일상 의 행위가 유가의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참으로 이른바 훌륭한 아버지에 훌 륭한 자식이었다. 또 문순공의 망년지우忘年之友로 문예의 마당에서 갈고 닦으며 도덕의 동산에서 무젖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때마다 느낌을 가지지 않음이 없었다. 아침저녁 으로 함께 지내며 때마다 익히지 않음이 없어 마치 단청과 옻이 물들이고 비와 이슬이 길러주는 것 같았으니, 이와 같음에도 어찌 능히 군자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날마다 드러나는 행실에 조금의 허물도 없었으니, 어버이를 모심에 집에 있을 때는 지물志物의 봉양∙10으로 음식이 시렁에 넘쳤고, 외직을 맡았을 때 는 전성專城의 봉양∙11으로 영광이 마을에 빛났다. 시절마다 축수하는 술잔을 올 리니 봄날 같은 화기가 집안에 가득하고 화락한 낯빛은 남을 감동시키기에 충분 하였으니, 비록 옛날의 효자인 증삼曾參과 민자건閔子騫이라고 하더라도 여기에 무 엇을 보태겠는가. 어버이를 모시는 그 마음을 미루어 형제간에 우애로워 함께 공부하며 성장 하면서 저절로 천륜天倫의 스승과 벗이 되었으니, 나아가서는 조정에서 나란히 명성을 떨쳤고 들어와서는 집안에서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늙어서도 침상을 함께 하여 스스로 상산사호商山四皓∙12라고 일컬었으니 천현天顯∙13과 식호式好∙14의 도타 운 정이 참으로 어떠했겠는가. 선조의 제사를 받들 때는 한결같이 효절공이 지은 제례祭禮를 따르고, 재숙 齊宿∙15할 때는 반드시 제삿날보다 앞서 어육魚肉을 준비하여 마치 선조의 신령이 그 자리에 계신 것처럼 정성을 다하였다.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을 때는 타고난 품성이 소박하고 신중하여 급하게 허둥대는 기색이 없었고, 거처할 때는 반드시 겸손하여 태만한 모습이 없었다. 옷은 몸을 가리면 되었고 음식은 배를 채우면 충분하여 비록 화무華膴∙16의 직을 두루 거치고 여러 차례 고을을 맡았어도 쓸쓸 하기가 마치 가난한 선비와 같았으니, 보는 이들도 그가 현달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사람을 대할 때는 겉치레를 하지 않고 반드시 신의信義를 위주로 하였고, 일을 처리할 때는 도리에 맞게 헤아려 당장 편한 것을 꾀하지 않았다. 또 추파秋坡 송기수宋麒壽∙17와 인재忍齋 홍섬洪暹∙18과 오상吳祥∙19 등과 오랫동안 교분을 나누 어 자주 학문을 강론하고 시문을 주고받는 즐거움을 누렸다. 평소 자연을 매우 아껴 공무가 한가할 때는 널리 좋은 경치를 찾아다녔으며, 또 경치 좋은 정자를 좋아하여 하연賀淵에 만대정晩對亭을 짓고 금양錦陽 곁에 송당松堂을 세웠으며, 또 거주하던 예천의 간곡干谷에 완열정玩閱亭과 침간정枕澗亭을 짓고 생애를 마치고 자 하였다. 문장을 지을 때는 오로지 이치가 뛰어난 것을 위주로 하여 의미가 심오하였다. 벗들과 주고받은 편지나 임금 곁에서 강론하며 아뢴 문장 중에는 분명 후세에 전 해진 것이 많겠지만, 여러 번 병란을 겪어 책 상자는 텅 비었고 시고詩稿 몇 편만 남았을 뿐이니 또한 안타깝지 아니한가. 안동의 영천이씨는 군기감 소윤을 지낸 헌軒이 처음 안동 선성宣城(예안)의 분천 汾川에 터전을 잡았는데, 이분이 선생의 5대조이다. 고조부 파坡는 의흥 현감을 지 내고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고, 증조부 효손孝孫은 통례문 봉례를 지내고 이조 참 판에 추증되었으며, 할아버지 흠欽은 인제 현감을 지내고 의정부 좌참찬에 추증 되었다. 아버지 현보賢輔는 숭정대부 중추부 지사를 지냈는데 이분이 바로 효절공 이고,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안동권씨는 충순위 효성孝誠의 따님이다. 부인 거제반씨巨濟潘氏는 습독習讀 사형士泂의 따님이다. 외동아들 부장部將 영승 令承은 진성이씨 찰방 수령壽苓의 여식에게 장가들어 7남 2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사원士愿과 둘째 사약士約은 후손이 없고, 셋째는 충순위 사홍士弘이고, 넷째는 장사랑 사민士敏이다. 다섯째 도사都事 사순士純이 출계하여 효절공의 제사를 모셨 고, 여섯째는 충순위 사성士誠이며 막내는 사윤士潤이다. 맏딸은 승지 조우인曺友 仁, 둘째는 송상락宋尙洛에게 시집갔다. 사홍의 아들은 참봉 창운昌運이다. 사민의 맏아들은 호군 태운泰運이고 둘째는 명운溟運이다. 사순의 맏아들은 동추 영운榮運이고 둘째는 응운應運이다. 사성의 맏아들은 정운廷運이고 둘째는 사예司藝 휴운休運이며 셋째는 계운啓運이다. 태운의 아들은 원직元直과 진사 형직亨直이다. 명운의 아들은 생원 자秶이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대대로 문장과 학문을 닦아 유림의 기대를 받았고, 군자의 음덕으로 자손이 보답을 받음이 이에 더욱 증명되었으니, 또한 위대하지 아니한가. 후손 유재裕載와 양연瀁淵이 비석을 마련하여 무덤에 세우려고 못난 나에게 묘갈 명을 부탁하니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어 마침내 행장의 내용에 따라 대략을 서술하고 명銘을 붙이니, 다음과 같다. 퇴계와 일찍부터 사귀었으며 宗師宿契 훌륭한 아버지가 모범이 되니 賢父典型 어떠한 덕행인들 가다듬었고 何德不修 어떠한 학문인들 이루시었네 何學不成 마량∙20처럼 형제 중에 뛰어났으며 馬家白眉 순숙∙21의 집에 모인 현인 같아서 荀里德星 청백한 가풍이 전해지는데 淸白家傳 주자와 정자를 배우시었네 讀朱課程 집안에 거처하며 화락하였고 居庭婉悅 조정에 나가서는 강명했지만 立朝剛明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乃尋初服 고상한 품행을 견줄 데 없네 高躅莫京 맑고도 시원하여 멋스러웠고 蕭灑風致 여유롭게 지내며 즐기셨지만 優逸衿靈 안개 속 표범∙22의 얼룩이었고 霧豹留斑 아홉 깃 봉황∙23의 깃털이었네 苞鳳颺翎 백세토록 이어질 후손들에게 百世在後 찬란하게 빛남을 보여주리니 掲示光晶 이 세상 무수한 군자들이여 凡百君子 새긴 명을 자세히 살펴보시게 視此刻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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