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流 이행원李行源 墓碣銘[許穆]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24.04.11|조회수40 목록 댓글 0

名流

이행원李行源 墓碣銘[許穆]

 

公諱行源, 字百初韓山郡人。 高麗判門下之後也。 曾祖贈吏曹判書、鵝山君, 祖贈領議政、韓安君。 父贊成、贈領議政德泂。 母高靈申氏, 禮曹參判之女也。

仁祖十六年, 公三十六, 以公卿子初授陵寢郞。 其年, 上親試士, 登丙科及第, 補承文院副正字。 明年, 改政院注書。 又明年, 遷春坊說書, 尋復爲注書, 陞成均典籍, 轉禮曹佐郞, 移兵曹, 陞正郞。 本曹古事, 曹郞一人掌軍布出納之數, 末弊擅出惟所爲, 不問公私, 人亦莫怪也。 公意惡之, 避不管其事, 曹中竊多之。 尋改諫院正言, 移司憲持平。 壬午, 爲畿省都事, 後再入諫院爲正言, 選玉堂爲修撰。 贊成公卒, 旣三年, 復爲修撰。

公素不樂於世路, 亦不與人交驩往來, 不以仕宦爲心。 仁祖特選公, 旣廉問北界。 己丑, 孝宗立, 又受命再出北邊, 條上節鎭諸邊邑不法、兵民積弊, 上皆用之。 北邊遐遠, 文學絶少, 白上請頒賜經史諸書, 以勸子弟, 子弟擧於鄕者, 令官給資遣詣京試, 定爲令式。 庚寅, 復爲修撰, 三上疏辭之, 出爲靈巖。 靈巖, 南海上大邑, 去京師絶遠, 百事廢壞。 其積弊甚者, 逋租虛簿至七千。 公力申當省, 悉蠲之。 尋坐前守事, 卒就理, 配西海之楊山。 靈巖父老, 至刻石追思不已。 丁酉, 敍爲海西省都事。 己亥, 爲蔚山, 辭不赴。 辛丑, 以成均直講出爲通川。 甲辰, 復爲直講, 陞司藝。 公素多病, 亦不樂於朝, 求出爲靑松。 丁未某月日, 歿於官, 年六十五。 公方廉簡, 通藉三十年, 未嘗以利害易其操, 亦未嘗營立尺寸以爲私。 善與人忠愛, 自童子時, 見人之急, 必資其有無。 道遇溺水死者, 廢日躬救視活之, 贊成公聞之曰: “兒必受其報。” 蓋其天性然也。 家居善於父母、昆弟。 公之仲述初賢而無命, 四十五, 遽積疾乃死, 公終身痛之, 未嘗對人言死事。

淑人河東鄭氏, 正言應斗之女也。 生二男: 萬慶壽慶。 萬慶, 生員; 壽慶, 承文博士。 女壻三人: 洪箕錫權愈南尙熏。 , 承政院注書。 內外子孫甚多, 其成人者六人。 萬慶, 生員, 壽慶箕錫婿鄭樴尙熏迪明。 其銘曰:

簡而不誇, 直而剛。 事明義正, 北方之人, 多公德惠彌長。

 

이행원李行源의 묘갈명(墓碣銘) 허목(許穆)

공(公)의 휘(諱)는 행원(行源), 자(字)는 백초(百初)로 한산군(韓山郡) 사람이다. 고려 때의 판문하(判門下)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예(後裔)로, 증조(曾祖)는 이조 판서에 추증된 아산군(鵝山君) 이뇌(李)이고, 조(祖)는 영의정에 추증된 한안군(韓安君) 이오(李澳)이며, 아버지는 우찬성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이덕형(李德泂)이다. 어머니는 고령 신씨(高靈申氏)로 예조 참판 이담(李湛)의 딸이다.

인조 16년(1638년) 공이 36세 때에 공경(公卿)의 자제로서 처음 능침랑(陵寢郞)에 임명되었는데, 그해 임금이 친히 선비들을 시험보일 때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보임되었다. 다음 해에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바뀌고, 또 다음 해에 춘방 설서(春坊說書)로 전임(轉任)되었다가 얼마 후 다시 주서가 되었고,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하였으며,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거쳐 병조로 옮겨 정랑(正郞)에 승진되었다. 본 병조의 고사(故事)에 낭관 한 사람이 군포(軍布)를 출납하는 일을 맡는데, 말폐(末弊)가 되어 마음대로 내주어도 하는 일이 공인지 사인지를 묻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지도 아니하였다. 공은 내심 이것을 미워하여 이 일을 피하고 관장하지 아니하니 병조 안에서 모두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얼마 있다가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바뀌고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옮겼다.

임오년(壬午年, 1642년 인조 20년)에 경기 도사(京畿都事)가 되었다가 다시 사간원에 들어가 정언이 되고, 옥당(玉堂)에 뽑히어 수찬(修撰)이 되었다가 찬성공이 졸(卒)하매 3년상을 마치고 다시 수찬이 되었다. 공은 평소부터 출세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또한 남과 교제하며 왕래하지도 않아 벼슬살이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인조의 특선으로 북계(北界)를 순찰하며 민정을 조사한 일이 있었고, 기축년(己丑年, 1649년 인조 27년)에 효종(孝宗)이 즉위하매 또 명을 받고 재차 북변에 나가서 절진(節鎭)의 여러 변읍(邊邑)들이 불법을 자행하여 병민(兵民)에게 쌓인 폐단을 조목조목 아뢰자, 임금이 모두 받아들여 시행하였다. 북변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학문이 있는 사람이 극히 적으므로 임금께 아뢰어 경서(經書)와 사기(史記) 등 서적을 나누어 주어 그곳 자제들을 권면해서 자제들 중에 향시(鄕試)에 합격한 사람은 관(官)에서 여비를 주어 경시(京試)에 나아가도록 법식으로 정하자고 청하였다.

경인년(庚寅年, 1650년 효종 원년)에 다시 수찬이 되었는데, 세 번 상소하여 사양하고 영암 군수(靈巖郡守)로 나갔다. 영암은 남해(南海) 지방의 큰 고을이었지만 서울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온갖 일이 퇴폐하였는데, 그 적폐(積弊) 중 심한 것은 조세(租稅)를 포털한 허위 장부가 무려 7천 석에 달하는 것이었다. 공이 해당 감영(監營)에 힘써 아뢰어 모두 감면시켜 주었다. 얼마 있다가 전임자의 사건에 연루(連累)되어 끝내 심문을 받고서 서해(西海)의 양산(楊山)으로 귀양 가게 되니, 영암의 늙은이들이 나서서 비석에 공적을 새겨 추모(追慕)하기를 마지 않았다. 정유년(丁酉年, 1657년 효종 8년)에 사면되어 황해도 도사가 되고, 기해년(己亥年, 1659년 효종 10년)에는 울산 군수가 되었지만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신축년(辛丑年, 1661년 현종 2년)에는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있다가 통천 군수(通川郡守)로 나갔고, 갑진년(甲辰年, 1664년 현종 5년)에 다시 직강이 되었다가 사예(司藝)로 올랐다.

공은 본래 잔병이 많고 경직(京職)에 있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청송 군수(靑松郡守)를 희망해서 나갔다가 정미년(丁未年, 1676년 현종 8년) 모월 모일에 관직에 있으면서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65세이다.

공은 항상 청렴 간결하여 관료 생활 30여 년에 한번도 이해 때문에 자기의 지조를 바꾼 적이 없고, 또 사사로이 자신을 위하여 조금도 재산을 모으지 않았다. 성실과 사랑으로 남을 대하여 어릴 적부터 남의 급한 사정을 보면 반드시 있고 없는 것을 살펴 도와 주었다. 한번은 길을 가다가 물에 빠져 죽게 된 사람을 보고서 해가 지도록 몸소 간호하여 살아나도록 하였는데, 찬성공이 이 소문을 듣고 말하기를, “이 애는 틀림없이 그 응보(應報)를 받을 것이다.” 하였으니, 대개 그의 천성이 그러하였다. 가정에서는 부모와 형제들에게 잘하였다. 공의 중형(仲兄) 술초(述初, 이광원(李光源)의 자)는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명(命)이 없어 45세에 갑자기 병이 들어 죽었으므로, 공이 평생토록 이 일을 가슴아프게 생각하여 한번도 남에게 죽음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숙인(淑人)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정언 정응두(鄭應斗)의 딸이다. 아들 둘을 낳았는데, 이만경(李萬慶)과 이수경(李壽慶)으로 이만경은 생원이고 이수경은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이다. 사위는 세 사람으로 홍기석(洪箕錫)ㆍ권유(權愈)ㆍ남상훈(南尙熏)인데, 권유는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이다. 친손ㆍ외손이 매우 많았는데 그중에서 성인(成人)이 된 사람이 여섯이다. 이만경의 아들 이온(李薀)은 생원이고, 이수경의 아들은 이육(李淯)ㆍ이서(李湑)이며, 홍기석의 사위는 정직(鄭樴), 권유의 아들은 권호(權頀), 남상훈의 아들은 남적명(南迪明)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간결하면서 자랑하지 않고 곧으면서도 굳세어서, 일은 분명히 하고 의리는 공정히 하였으므로 북녘 백성들이 공의 덕혜(德惠)를 칭송함이 더욱 장구(長久)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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