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형李鎭衡 1723~ 1781 禮曹參判贈吏曹判書李公墓誌銘 幷序○丙午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24.03.25|조회수20 목록 댓글 0

예조 참판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된 이공 묘지명병서병오년〔禮曹參判贈吏曹判書李公墓誌銘幷序丙午

 

정종대왕(正宗大王정조(正祖))이 30년 동안 동궁(東宮)에서 덕(德)을 기르며 동궁의 관리들을 널리 선발하여계옥(啓沃)의 도움을 받을 적에 당대에 명망이 뛰어난 인물을 다 뽑았다. 남곡(南谷) 이공(李公) 휘 진형(鎭衡)은 그중에서도 뛰어난 분인데, 공은 공명(功名)에 잘 처신해서 덕을 시종으로 한결같이 지켜 살아서는 영화를 누리고 죽어서는 애도를 받았으니, 아! 아름답다.

공은 자가 평중(平仲)이니, 계통이 영릉(英陵세종(世宗))의 별자(別子)인 밀성군(密城君) 휘 침(琛)으로부터 나왔다.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된 휘 상윤(尙胤)과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이조 참의에 추증된 휘 정량(廷亮)과 이조 참판에 추증된 휘 용(墉)은 바로 공의 증조와 조고와 선친이 되니, 3대의 추증은 공의 귀함 때문이었다. 참판공이 군수를 지낸 동래 정씨(東萊鄭氏) 형진(亨晉)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경종(景宗) 3년 계묘년(1723) 3월 7일에 참의공의 경산(慶山) 임소(任所)에서 공을 낳았다.

계유년(1753, 영조29) 생원시에 합격하였는데, 창방(唱榜)한 지 겨우 10일 만에 정시(庭試) 병과(丙科)에 급제하고백씨(伯氏) 참판공과 동방급제(同榜及第)하여 당(堂)에 오르니, 국학(國學)과 사방의 선비들이 빙 둘러 모여 말하기를 “오늘날의 문장(文章)이다.”라고 하고는 다투어 보면서 기뻐하였다. 갑술년(1754) 괴원(槐院승문원(承文院))에 예속되고, 정축년(1757)에 천거로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었는데, 모두 기주관(記注官)의 재주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무인년(1758) 약원(藥院내의원(內醫院))에 직숙(直宿)한 공로로 6품으로 승진해서 내직으로는 병조의 좌랑과 정랑, 사간원의 정언(正言)과 헌납(獻納)과 사간(司諫), 사헌부의 지평(持平)과 장령(掌令)과 집의(執義), 홍문관의 교리(校理)와 부응교(副應敎), 춘방(春坊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사서(司書)와 필선(弼善)과 보덕(輔德), 종부시와 봉상시의 정(正), 통례원의 통례(通禮)를 지냈으며, 외직으로는 제원 찰방(濟原察訪)과 태천 현감(泰川縣監), 경상 도사(慶尙都事)를 지냈다. 이는 바로 당하관(堂下官)의 이력인데, 춘방의 관직을 가장 오랫동안 지냈다.

경진년(1760)에 현륭원(顯隆園사도세자(思悼世子))이 온천(溫泉)에 행행(幸行)할 때 동궁의 관료로 배종하였고, 신사년(1761)에 언관으로 동궁을 입대(入對)해서 경계하는 말씀을 올린 것이 많았다. 제원 찰방에 부임한 지 4개월 만에 역로(驛路)가 되살아났다. 태천(泰川) 고을을 다스릴 적에 청렴하고 위엄이 있어서 형벌을 베풀지 않고도 아전과 백성들이 모두 복종하니, 부임한 지 겨우 열 달 만에유애비(遺愛碑)가 세워졌다.

영남 지방에서 시험을 관장하였는데 선비들이 모두 공평함을 칭송하였고, 법연(法筵경연(經筵))에서 시강(侍講)할 적에 임금에게 말을 살피고 간언(諫言)을 올리게 하는 덕을 넓혀 퇴폐한 풍속을 쇄신할 것을 청하였으며, 강하는 글을 통해 경계의 말씀을 올리자, 영조가 가납(嘉納)하였다. 궁관(宮官)에 있은 지 4년 만에 건릉(健陵정조(正祖))의 지우(知遇)를 받아 아침저녁으로 강마(講磨)하고 좌우에서 보도(補導)하였다.

이때 동궁이 어려움과 위태로움을 만났는데,추기(樞機)를 경계하여이연(离筵)에서 주고받은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영조가 승하하자, 고부 주청사(告訃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에 갔는데, 상은 하교하기를 “이(李) 아무개는 바로 내가 춘궁으로 있을 때의 관료인데, 강학할 때 내가 고문(顧問)한 바가 많다. 지금 만 리 길을 떠나는데, 늙고 병든 것이 안타깝다.” 하시고는 인삼과 약재, 별반전(別盤纏별도로 주는 노자)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공은 자신을 청백하고 신중하게 단속해서 행장(行裝)이 쓸쓸하니, 일행이 두려워하여 조심하였다.

복명(復命)하기 전에동벽(東壁)에 제수되었고, 책봉을 마친 일로 인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라 노비와 전결(田結)을 하사받고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가 여러 번 전직하여 우승지에 이르렀다. 그 사이에 병조의 참의와 참지, 호조의 참의를 지냈다. 무술년(1778) 영조의 영정을 영희전(永禧殿)에 봉안할 적에 예방승지(禮房承旨)를 맡은 공로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좌승지에 제수되고 공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工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제수되었다.

상은 공이 연로한데도 자식이 없음을 가엽게 여겨 특명으로 공의 종형(從兄)의 아들 긍연(兢淵)을 데려다가 양자로 삼게 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경은 바로 기쁨과 슬픔을 국가와 함께하는 사람인데 지금 비로소 후사가 있으니, 내 마음이 매우 기쁘다.” 하니, 공은 대답하기를 “부자(父子)가 있은 뒤에 군신(君臣)이 있는 것이 바로 인륜의 차례인데,신의 부자는 마침내 군신이 있은 뒤에 부자가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좌승지에 제수되었다.

기해년(1779) 강화도 유수가 되었는데, 상은 인견(引見)하고 음식을 하사하고서 영광스러운 운한(雲漢왕의 시문(詩文))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

남곡산인 또한 세상 사람의 심정이니 / 南谷山人亦世情
강화도를 안찰하러 가는 길에 깃발이 빛나네 / 沁州出按耀旗旌
사랑스럽게 오사모 쓴 예쁜 아이가 무릎에 앉았고 / 佳兒繞膝烏紗喜
영광스러운 왕의 고명에 늙은 부인이 활짝 웃네 / 老婦開顔紫誥榮
공명이 나의 힘 때문이라고 말하지 마오 / 莫道功名由我力
하늘의 해가 그대의 정성 비춘 것을 알아야 하네 / 從知天日照君誠
아득한 길에 잠시의 이별 오히려 염려스러우나 / 莾蒼少別猶關念
낙양성에 복사꽃 만발할 때 돌아올 것이네 / 歸趁桃花滿洛城

공은 은혜로운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한마음으로 봉직하였다. 그리하여 봉급을 털어서 축성(築城)하는 공사를 견고히 하고 어물 값을 올려서 헐값으로 매매되는 병폐를 바로잡았는데, 그 기간이 백 일도 되지 않았다.

이때 조정에서 강화도가 통어영(統禦營)을 겸했다 하여 정이품(正二品)을 유수(留守)로 삼을 것을 의논하니, 상은 교체되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옮겨 제수하였다. 이 지역은 재화의 이익이 풍부하여 관청에 벼슬하는 자들 대부분이 뇌물에 의한 정사를 공공연히 행하였는데, 공은 몸가짐을 청렴하고 근엄하게 하였고 겸하여 절약을 실천해서 폐단이 많은 기존의 정사를 바꾸어, 습속(習俗)이 거의 혁파되었다. 상은 공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는 관찰사에게 명하여 병의 차도를 묻게 하고 이어서 어찰(御札)을 내려주고 인삼과 약재를 하사하였으며, 또 공의 아들에게 명하여 역마를 타고 가서 간호하게 하였다.

얼마 후 승지에 제수되어 부름을 받고 돌아왔으며,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과 대사헌, 호조참판 겸 도총부총관(戶曹參判兼都摠府副摠管)을 역임하였으며, 전설사(典設司)와 선공감(繕工監)의 제거(提擧)가 되었다. 경자년(1780) 다시 도승지에 제수되고, 예조 참판으로 동지경연실록사(同知經筵實錄事)를 겸하였으며, 주사(籌司비변사)의 당상에 차임되고 경기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경기도는 사무가 매우 많았으나, 마치 한직(閑職)에 있는 듯이 노련하게 처리하여 목소리와 기운을 크게 소비하지 않고도 여러 일이 절로 다스려졌다.전재(田災)를 인정해 줄 것을 청하여 세금을 억울하게 내는 백성들이 없고, 죄수들을 자세히 살펴 감옥에 억울한 죄수가 없게 되니, 일 년이 되기도 전에 도 전체가 편안하였다.

신축년(1781) 병으로 사직하고 대사헌에 제수되었는데, 또다시 병으로 체직되었다. 상은 여러 번 진귀한 약재를 하사하였고, 조정에 임어하여서는 누차 말씀과 전교에 드러내어 측은하고 가련하게 여겼는데, 이해 9월 1일에 별세하니 향년이 59세였다.

병이 위독했을 적에도 정신이 희미해지지 않고 평소와 똑같이 아드님에게 명하기를 “군주의 은혜가 하해(河海)와 같이 넓은데 털끝만큼도 보답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한스럽다.”라고 하고는 이어서 절구 한 수를 불러 쓰게 하기를 “갑자기 가을 매미 따라 바삐 껍질을 벗으니, 옥 같은 하늘 은 같은 바다 참으로 아득하네. 신령스러운 바람은 떠나가는 나의 소매를 우선 재촉하지 말라, 임금의 은혜 보답하지 못한 한 하나가 길기도 하네.〔忽逐秋蟬脫殼忙, 瑤天銀海正蒼茫. 靈飈且莫催征袂, 未答君恩一恨長.〕” 하고는 마침내 더 이상 다른 말씀은 하지 않고 오직 대궐의 소식을 두세 번 물었으니, 이때 산실청(産室廳)을 설치한 지가 이미 기년이 지났기 때문이었다.

부음이 알려지자, 상은 전교하시기를

“이 사람은 바로 내가 옛날 동궁으로 있을 때의 관료이다. 병이 비록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나 뜻밖에 갑자기 서거했다는 부음을 들으니, 놀랍고 슬픈 마음을 어찌 말로 다 하겠는가. 즉시 호조로 하여금 원래의 부의(賻儀) 외에 갑절의 수량을 더 지급하게 하라. 또 잠저(潛邸동궁)에 있을 때의 궁료(宮僚)가 서거하면 의례히 귀후서(歸厚署)의 관판(棺板)을 지급하였으니, 이 사람에게 이 준례를 어찌 아낄 수 있겠는가.”

라고 하고는 준례를 참조하여 제사(題辭)를 매겨 지급하며 준례에 의거하여 조문하고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는데, 치제할 때에는 하교(下敎)를 기다리라고 명하였다. 또 전교하시기를

“내가 글공부에서 득력(得力)한 것은 이 궁료에게 힘입은 바가 크고 지금까지도 받아 사용하여 도움을 받은 것이 적지 않다. 더구나갑오년(1774)과 을미년(1775) 간에 만일 이 궁료가 입을 조심하고 기미를 살피지 않았더라면, 역신(逆臣)인 심상운(沈翔雲)온실 나무와 같다.’는 말이 반드시 대리청정(代理聽政)하기 전에 나왔을 것이다.명의록(明義錄)에는 이 사람의 이름이 비록 등재되지 않았으나 공(功)을 실로 잊기 어려웠는데, 아! 이제 이미 끝났구나. 구원(九原)에 있는 사람을 살려 일으키기 어려우니, 내 미처 정경(正卿판서)의 자리에 두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지금 특별히 판서로 추증하노라.”

하시고는 이조 판서로 추증하고 겸직을 준례와 같이 내렸다.

3개월이 지난 무신일에 양주(楊州)의 북두천(北斗川) 건좌(乾坐)에 장례하였다. 소상(小祥) 하루 전에 상은 직접 제문을 지어서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은 인간 세상에 / 卿在人間
과객처럼 잠시 있었는데 / 寄如過客
몸을 거두어 하늘로 돌아가니 / 斂歸太空
매미가 껍질을 벗은 것과 같네 / 蟬脫其殼
홀로 충군애국을 하여 / 獨有忠愛
죽거나 살거나 지조가 견고하였네 / 生死固結
임종할 때 지은 시 한 편은 / 臨化一詩
참된 충심에서 흘러 나왔네 / 赤腔流出
내가 세손일 때부터 / 予從貳邸
경을 얻어 친구로 삼았는데 / 得卿爲友
어렵고 위태로운 상황에도 / 時維囏危
아침저녁으로 좌우에서 보조하였네 / 昕夕左右
어리석은 듯이 자신을 거두어 감추어 / 卷懷如愚
맑은 지조가 혼탁한 세상에 물들지 않았네 / 涇不渭濁
작고한 다음 달에 내려준 세 가지 은전이 / 次月三節
어찌 공적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겠는가 / 豈曰酬績
별세한 뒤에 추증을 해서 / 歿後貤贈
비로소 평소의 기약에 부응하였네 / 始副常期
소탈한 흉금과 명쾌한 언변으로 / 疏襟爽語
나를 흥기시킨 자가 누구인가 / 起予者誰
궁중의 연회에서 취한 몸을 부축하였는데 / 宮筵扶醉
고개를 드는 잠깐 사이에 옛 자취가 되었네 / 俛仰成塵
열 줄의 제문에 술 한 잔을 올려 / 十行一酌
군신간의 의리를 표하노라 / 表予君臣

계묘년(1783) 봄에 상은 또 다음과 같이 하교하였다.

“을미년(1775)과 병신년(1776) 간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흉악한 무리와 난신의 무리들이 마음으로 결속해서 좌우에서 엿보고 밤낮으로 선동하니,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하고 협박한 것이 거의 끝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여러 달 동안 옷을 벗고 잠을 자지 못하였는데, 지금 그 일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마음속으로 놀라고 꿈속에서도 놀란다.

당시에 증 판서 이(李) 아무개와 같은 자가 나의 궁료가 되어서 한마음으로 왕실을 보좌하여 근심하고 애를 태운 것이 얼굴과 눈에까지 드러났다. 그래서 성질을 참는 의리로써 나를 인도하고 어려움에 대처하는 방도로써 나를 권면하니, 그 성대한 충심이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비록 화를 일으키려고 갖은 계책을 쓰는 적당(賊黨)이라 하더라도 능히 그의 무한한 충심을 간파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몇 년 이래로 세상의 변고가 거듭 발생해서 별별 일이 다 있었는데, 경수(涇水)가 깨끗한 위수(渭水) 때문에 더 혼탁해지지 않고 향기 나는 훈초(薰草)가 악취 나는 유초(蕕草) 때문에 변하지 않듯이 시종(始終) 한 절개를 지켜서 어디에 처하든 더욱 견고했으니, 비록 그를 일러 깜깜한 밤의 밝은 별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보다 지나치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경의 덕을 두터이 여겨 잊지 못하고 그리는 마음 더욱 깊어져 장차팔좌(八座)의 품계로 올려서 쇠퇴한 세속 사람들을 경계하고 면려하려고 했었는데, 결행하지 못하였다.

별세한 뒤의 추증에 비로소 내가 평소 마음먹었던 것을 사용하니, 매번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서글프고 애석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다. 지난 번 치제(致祭)할 때 이미 나의 뜻을 보였는데, 백성의 윤리가 점점 어두워지고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이러한 때에 증 판서와 같은 자를 어느 곳에서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아! 국가에 시호를 내리는 은전(恩典)이 없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인물에게 내려주지 않고 어떤 사람에게 내려주겠는가. 증 판서 이(李) 아무개에 대해 홍문관으로 하여금 시호를 의논하게 하라. 나의 이 전교는 바로 경 자신의 한 편의 행적이니, 또한 굳이 시장(諡狀)을 기다려서 시호를 지을 필요가 없으므로 일체(一體) 다 알도록 하라.”

하고는 시호를 ‘충간(忠簡)’이라 하였으니, 여기에서 공의 군신간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특이하고 눈빛이 사람을 쏘아보듯 강렬하였다. 참의공(參議公)이 특별히 사랑하여 말씀하기를 “반드시 우리 가문을 번창하게 할 것이다.” 하였다. 여러 아이들과 장난하며 놀이할 적에 반드시 스스로 장수가 되어서 아이들을 법도 있게 단속하였다. 6세에 모친상을 당하고서 마땅한 양육을 받지 못하여 마침내 고질병을 얻었다. 9세에 처음으로 취학(就學)하였는데, 밝은 지혜를 천성으로 타고나서 책을 반권도 읽기 전에 큰 진보가 있었다.

이때도암(陶菴) 이 선생(李先生)이 참의공을 방문하였다가 공이 높은 재주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반성하도록 말로 꾸짖기를 “9세인데도 아직 《사략(史略)》을 읽고 있는가. 나로 하여금 크게 부끄럽게 한다.”하니, 공은 잠을 자고 밥을 먹는 것을 잊을 정도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썼다.

차츰 자라자 문예(文藝)가 크게 진전하여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널리 꿰뚫었으며, 음양(陰陽)과 술수(術數),()ㆍ오()의 병서(兵書)에 널리 통달하였다. 또 필법의 요해(要解)를 터득하여 일찍이 종이를 허비하지 않고서도 초서(草書)와 해서(楷書)에 모두 체격(體格)을 이루었다. 부친상을 당하여 몸을 훼손해서 거의 생명을 잃을 뻔하였으나, 또한 학업에 힘쓰기를 폐하지 않았다.

공은 경학(經學)을 근본으로 삼아 시문(詩文)과 공령(功令과거(科擧))의 글을 지었는데, 또한 전심(專心)하지 않아도 잘하였으나 즐거워하는 바가 여기에 있지 않았다. 평소 독서하고 연찬(硏鑽)하기를 밤낮을 다하도록 그치지 않았고, 기억하고 외는 것을 잘하여 읽었던 여러 책을 외울 경우에 수십 일이 지나도 그치지 않으니, 총명함이 이와 같이 뛰어났다.

기국(器局)과 도량(度量)이 활달(豁達)해서 기쁨과 노여움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았으나, 남의 옳지 못함을 보면 장차 자신이 오염될 것처럼 여겼다. 편안하고 고요하고 소탈하고 과묵하였으나, 혹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다가 취하면 격앙(激昂)되고 강개(慷慨)한 목소리로 천고(千古)의 일을 담론(談論)하였는데, 장강대하(長江大河)를 터서 바다로 주입하듯이 통창(通暢)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지 수십 년에 구차히 당세에 영합(迎合)하지 않아서 기구(崎嶇)하고 영락(零落)하였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으며, 한 그릇의 밥과 표주박의 음료도 여러 번 걸렀으나 집식구에게 살림살이를 묻지 않았고, 때를 편안히 여기고 순하게 대처하여 즐거움으로 근심을 잊었다.

그러다가우항(遇巷)에 이르러서는보살펴주시는 성상의 은혜가 융숭해서경월(卿月)의 지위에 올라 벼슬길이 크게 열렸으나, 몸을 단속하기를 빈한(貧寒)하고 검소하게 해서 생활이 곤궁할 때와 다름이 없었다. 항상사치함과 검소함의 어려움과 쉬움을 들어서 아드님을 경계하였고, 평소 자신을 감추고 숨겨서 조금도 드러내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상이 매번 찬탄하시기를 “경은있어도 없는 듯하고, 가득해도 빈 듯하다.’고 이를 만하다.” 하고, 항상 요우(僚友)로 대하여 번번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남곡(南谷)’이라고 불렀으니, 집이 남산 아래에 있어서 이것으로 호를 삼았기 때문이다. 사양하고 받는 데 엄격해서서도(西道) 수령의 비단을 물리치고역관(譯官)들의 재화(財貨)를 배척하였다.

강화 유수로 있을 적에 내려진 임금의 교서에 “왕명을 받들고 연경에 갔을 적에얼음과 황벽나무 같은 깨끗한 지조가 드러났다.”라는 말씀이 있었는데, 공은 기뻐하지 않으며 말씀하기를 “내가 연행(燕行)에서 나귀 한 마리를 사왔으니, ‘얼음과 황벽나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백악산(白岳山)에서 복거(卜居)하였는데 혹자가 깊고 궁벽함을 혐의하자, 공이 말씀하기를 “옛사람은저택을 마련할 적에 궁벽한 곳에 정했으니,어찌 의도한 뜻이 없었겠는가.”라고 하였다.

배위인 정부인(貞夫人)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좌윤(左尹) 필정(弼正)의 따님인데, 부인의 규범을 모두 갖추었다. 공보다 4년 뒤에 태어났고 공보다 8년 뒤에 별세하였는데, 상(喪)을 당하자 왕이 특별히 내탕고(內帑庫)에 명해서 후하게 부조하게 하였으니, 특별한 예우였다. 공의 묘 왼쪽에 부장하였다.

긍연(兢淵)은 문과 급제하고 승지(承旨)를 지냈는데, 2남 3녀를 두었다. 아들 근(根)은 생원시에 장원했는데, 정조가 선조(先祖)를 생각하여 후손을 등용해 주어 벼슬이 군수이고, 본종(本宗큰집)에 양자로 갔다. 주(株)는 둘째 아들로서 공의 제사를 주관하였는데, 또한 조용(調用)을 명하였으나 미처 관직을 제수하기 전에 별세하여 교관(敎官)에 추증되었다. 딸은 정낙수(鄭樂綏), 김노준(金魯俊), 조재방(趙在昉)에게 출가하였다. 교관의 아들은 희청(煕淸)으로 지금 직장(直長)이고, 사위는 서유회(徐有會)이다. 군수의 양자인 희은(煕殷)은 지금 현감이고, 사위는 홍재승(洪在承)이다. 희청은 3녀를 두었으니, 희청의 세 사위는 유진정(兪鎭鼎), 박최하(朴㝡夏), 유진구(兪鎭球)이다. 현감의 두 아들은 헌요(憲堯), 장요(章堯)이고, 두 딸은 어리다.

공은 신체가 허약하였으나 성품과 도량이 존엄(尊嚴)하여 마치 솜으로 쇠를 싼 듯하였다. 그러므로 영조 말년을 당하여 붕당(朋黨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이 만들어지고 세도(世道)가 모두 상실되어 위태로운 형상이이극(貳極)에까지 미쳤을 적에, 기미를 살펴 은밀히 돕고 힘을 다해 조호(調護)해서 칼날을 드러내지 않고 목적한 바를 묵묵히 성취하여 끝내 사태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주역》 〈건괘(蹇卦) 육이(六二)〉에 이른바 ‘왕의 신하가 국가의 어려움에 충성을 다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동료였던 권흉(權兇)에게 몸의 지조를 잃지 않고 외로이 짝할 무리가 없이 확연(廓然)히 독립하여 세상의 더러운 때에 물들지 않았다. 그리고 현명한 군주와 어진 신하가 뜻이 잘 맞아 세상에 보기 드문 한 번의 만남을 이루었는데, 총애 받는 것을 놀란 것처럼 여겨 겸손하고 공손하고 조심하였으니, 마땅히 무궁한 후세에 훌륭한 명성을 드리울 것이다.

공은 평소 말씀하기를 “병약하여 물러나 직접 농사지을 수가 없어서 마침내 유사(有司)를 속이고 요행으로 과거에 급제함을 면치 못했으니, 이후부터는 모두 내 분수 밖의 일이다.”라고 하고는 벼슬길에 오른 뒤에 겪은 일들을 기록하여 《외물록(外物錄)》이라고 이름하였으니, 벼슬이 외물이 됨을 안다면 누가 능히 벼슬을 얻고 잃는 데에서 교만하고 방자하여 절개를 잃게 하겠는가.

사대부가헌면(軒冕)의 영화만 알고 물러나 쉬는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면취생몽사(醉生夢死)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공이 평소 맹세하고 원한 것은 장차 사직(辭職)을 청하여 물러나 강호(江湖)에서 살면서 만년을 즐기려고 한 것이었는데,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의 고상한 마음과 심원한 운치를 여기에서 또한 상상할 수 있다.

나는 공과 누대(累代)의 우호(友好)가 있어서 공의 풍절(風節)을 일찍부터 칭송하였는데, 공의 증손인 희청이 조고(祖考)인 승지공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 우리 할아버지를 가장 잘 아는 분으로는 오직 선생이 살아계신데, 선생께서 또 노년이 되셨으니, 지금 명문을 짓지 않는다면 장차 어떻게 아름다운 덕을 후세에 천양(闡揚)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하였으나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여 마침내 병을 무릅쓰고 명문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강직하고 강직한 이공이여 / 侃侃李公
계통이 왕족에서 나왔네 / 出自天潢
정조를 만나 / 遭逢正廟
충성과 현량함을 바쳤네 / 效厥忠良
정조는 말씀하시기를 / 正廟曰咨
아, 그대의함장을 가상히 여기노라 / 嘉乃含章
세자궁에서 아침저녁으로 / 朝夕承華
계도함이 크게 드러났네 / 啓迪孔彰
을미년과 병신년을 만나서 / 屬時乙丙
세도가 현황이 되었네/ 世道玄黃
기미를 분별하고 그림자를 살펴서 / 辨幾察影
소양을 곁에서 도왔네 / 夾介少陽
궁내의 일을 밖으로 누설하지 않고 / 內言不出
스스로 거두고 감추었네 / 用自斂藏
위태로움을 편안함으로 전환하니 / 轉危爲安
정성이 푸른 하늘을 감동시켰네 / 誠格穹蒼
군자가 신밀하여 / 君子愼密
끝내 곧은 절개를 길이 지켰네 / 乃終永貞
평탄하나 험난하나 절개 변치 않아 / 夷險一節
성명한 군주에게 지우를 받았네 / 受知聖明
때에 따라 힘을 기르고 몸을 감추어서 / 遵養時晦
행실을 가다듬고 명예를 세우니 / 砥行立名
무엇으로 이것을 이루었는가 / 何以致此
전심하여 경서를 연구하였기 때문이네 / 玩心硏經
떳떳한 도가 바루어져 백성들이 흥기하니/ 經正民興
어찌 선하지 않으리오 / 何用不臧
이 때문에 명철한 사람들이 / 所以明哲
휘황하게 두루 비추었네 / 旁燭煌煌
천구와 운로에서 / 天衢雲路
벼슬이 크게 진보할 참이었는데 / 進步將將
하루아침에 세상을 싫어해서 / 一曙厭世
신을 벗듯 바삐 세상을 하직하였네 / 脫屣其忙
하늘은 어찌 조금 더 수명을 늘려주어 / 胡不少假
임금을 돕는 것을 끝내게 하지 않았는가 / 用卒贊襄
은혜로운 윤음이 거듭 내려와 / 恩綸荐降
공의 후손을 거두어 주고 죽은 공을 돌보았네 / 收存恤亡
임금님이 옛날을 추억하시니 / 宸情追舊
더 오래도록 공을 잊지 못하시네 / 彌久不忘
조정의 신하들을 일일이 선발해보지만 / 歷選在廷
공에게 필적할 사람이 드물다오 / 鮮與儔匹
처음 마음이연하에 있어서 / 烟霞初心
강호에서 만년을 보내려 하였네 / 江湖晩節
천사만종의 부귀를 / 千駟萬鍾
자기 것이 아닌 외물로 여겼네 / 視以外物
이것이 바로 공이 평소에 / 是公平生
스스로 마음속에 간직한 것이었으나 / 中自蘊結
임금님의 특별한 대우에 감동하여 / 感戴殊遇
차마 곧바로 결별하지 못했네 / 未忍便訣
옥 같은 하늘과 은 같은 바다에 / 瑤天銀海
유한이 그치지 않네 / 遺恨不滅
우뚝한 북두천의 산에 / 有屹斗岡
그윽한 묘소가 있네 / 有幽其室
밝고 밝은 구천의 길에 / 炯炯窮泉
깊고 넓은 혈성이네 / 濊濊腔血
내 명문이 아첨하지 아니하여 / 我詞不諛
백 세의 후대에 질정할 수 있네 / 百世是質

 

[주-D001] 병오년:

1846년(헌종12)으로, 매산의 나이 71세 되던 해이다.

[주-D002] 계옥(啓沃):

신하가 자기의 식견으로 임금이나 세자를 잘 계도(啓導)하는 것을 이른다. 《서경》 〈열명(說命)〉에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재상인 부열(傅說)에게 “그대의 마음을 열어 나의 마음을 적시라.[啓乃心, 沃朕心.]”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주-D003] 백씨(伯氏) 참판공:

공조 참판을 지낸 이진항(李鎭恒, 1721~?)으로, 자는 경백(經伯)이다.

[주-D004] 유애비(遺愛碑):

선정(善政)을 베푼 관리에게 그 지방 백성들이 은혜를 기리기 위해 세운 선정비(善政碑)를 이른다.

[주-D005] 추기(樞機):

추(樞)는 문의 지도리이고 기(機)는 쇠뇌의 오늬를 먹이는 곳인바, 중요한 기관으로 곧 말을 가리킨다. 《주역》 〈계사전(繫辭傳)〉에 “말과 행실은 군자의 추기이다.[言行, 君子之樞機.]”라고 보이며, 이천(伊川) 정이(程頤)는 〈언잠(言箴)〉에서 “하물며 이것(말)은 몸의 추기이니,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우호를 내기도 한다.[矧是樞機, 興戎出好.]”라고 하였다.

[주-D006] 이연(离筵):

세자에게 경사(經史)를 강의하고 교육하는 자리를 말한다. 서연(書筵) 또는 주연(冑筵)이라고도 한다.

[주-D007] 동벽(東壁):

홍문관의 4품 이상인 직제학(直提學), 전한(典翰), 응교(應敎), 부응교(副應敎)를 가리킨다.

[주-D008] 부자(父子)가 …… 차례인데:

《주역》 〈서괘전(序卦傳)〉에 “천지가 있은 뒤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뒤에 남녀가 있고, 남녀가 있은 뒤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뒤에 부자가 있고, 부자가 있은 뒤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은 뒤에 상하가 있다.[有天地然後有萬物, 有萬物然後有男女, 有男女然後有夫婦, 有夫婦然後有父子, 有父子然後有君臣, 有君臣然後有上下.]”라고 보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9] 전재(田災):

재해를 입은 토지의 전세(田稅)를 면제해주는 것을 말한다.

[주-D010] 갑오년과 …… 것이다:

‘갑오년(1774, 영조50)과 을미년(1775) 간’은 당시 세손인 정조가 건강이 좋지 않았던 영조의 왕위를 잇기 위해 대리청정을 받을 무렵으로, 세손은 진작부터 권력의 핵심을 장악하고 있던 외척 세력의 협박 속에서 대리청정과 왕위 계승을 저지당하고 있었는데, 이때에는 정도가 더 심하였다. 세손은 홍국영(洪國榮)과 서명선(徐命善) 등에게 비호를 받으며 끝내 을미년 12월에 대리청정을 시작하였는데, 대리청정하던 12월 21일에 심상운(沈翔雲)이 시무책을 올리면서 세손의 측근에 ‘온실의 나무’를 말하지 않을 자가 있는지를 물어 세손의 측근 궁료들을 축출하려고 하였다. 심상운은 외척의 중심 세력인 정후겸(鄭厚謙), 홍인한(洪麟漢) 등이 끌어들인 인물로, 병신년(1776) 정조가 왕위에 오르고서 이 무리들을 대대적으로 처벌하였는바, 이 내용은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말이다. ‘온실의 나무’는 한나라 성제(成帝) 때 박사(博士)였던 공광(孔光)이 온실전(溫室殿)과 궁중에 심겨 있는 나무가 무슨 나무냐는 어떤 사람의 질문에 묵묵부답한 데서 유래하여 궁중의 비밀스러운 일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英祖實錄》 《正祖實錄》 《漢書 卷81 孔光傳》

[주-D011] 명의록(明義錄):

김치인(金致仁, 1716~1790) 등이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올라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던 홍인한(洪麟漢), 정후겸(鄭厚謙) 등을 사사(賜死)한 일을 기록한 책이다.

[주-D012] 작고한 …… 은전:

정조가 부음을 듣고서 호조로 하여금 원래의 부의(賻儀) 외에 갑절의 수량을 더 지급하게 한 것과, 귀후서(歸厚署)의 관판(棺板)을 지급하게 한 것과, 준례에 의거하여 조문하고 치제(致祭)한 것 세 가지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주-D013] 계묘년 …… 하교하였다:

이 전교는 《정조실록(正祖實錄)》 7년 2월 11일의 기사에 그대로 보인다.

[주-D014] 팔좌(八座):

재신(宰臣)의 반열에 있는 여덟 명의 고위 관료를 이르는 말로, 각 시대마다 지칭하는 바가 약간씩 다른데, 동한(東漢) 시대에는 육조(六曹)의 상서(尙書)와 영(令)과 복야(僕射)를 가리켰다. 조선 시대에는 흔히 판서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주-D015] 도암(陶菴) 이 선생(李先生):

도암은 이재(李縡, 1680~1746)로,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ㆍ한천(寒泉),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1702년(숙종28) 알성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대제학을 거쳐 좌ㆍ우참찬에 이르렀다.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외암(巍巖)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한 낙론(洛論)을 주도하여 한원진(韓元震) 등의 호론(湖論)을 반박하였다. 저서로는 《도암집》 등이 있다.

[주-D016] 손(孫)ㆍ오(吳):

춘추 시대 제(齊)나라 손무(孫武)와 전국 시대 위(衛)나라 오기(吳起)의 병칭으로, 병법가(兵法家)를 대표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주-D017] 우항(遇巷)에 이르러서는:

우항은 군주를 골목에서 만난다는 뜻으로, 주인공이 세손인 정조를 보좌할 때를 이르는바, 《주역》 〈규괘(睽卦) 구이(九二)〉에 “군주를 골목에서 은밀히 만나면 허물이 없으리라.[遇主于巷, 无咎.]”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주-D018] 경월(卿月):

재신(宰臣)의 고위 관료를 이르는 말로 시대마다 지칭하는 바가 약간씩 다른데, 조선 시대에는 흔히 판서를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서경》 〈홍범(洪範)〉에 “임금은 해를 살펴야 하고, 경은 달을 살펴야 하며, 낮은 관리들은 날을 살펴야 합니다.[王省惟歲, 卿士惟月, 師尹惟日.]”라는 데에서 온 말이다.

[주-D019] 사치함과 …… 쉬움:

검소한 데로 들어가기는 어렵고 사치한 데로 흐르기는 쉽다는 말로, 이 내용은 송(宋)나라 장지백(張知白, ?~1028)의 “검소함으로부터 사치함에 들어가기는 쉽고, 사치함으로부터 검소함에 들어가기는 어렵다.[由儉入奢易, 由奢入儉難.]”라는 말을 원용한 것이다. 《古今事文類聚 别集 卷18 儉約 貴亦尚儉》

[주-D020] 있어도 …… 듯하다:

증자(曾子)가 안연(顔淵)의 겸허한 덕성(德性)을 칭찬한 말로 《논어》 〈태백(泰伯)〉에 보인다.

[주-D021] 서도(西道) 수령의 비단: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 따르면 서북 지역의 특산물이 비단을 짜는 명주였는데, 서도인 황해도와 평안도의 수령이 비단을 뇌물로 많이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해도는 24개 군현 가운데 15개 고을이 유명 산지이고, 평안도는 41개 군현 모두가 생산지였으며, 함경도는 함흥ㆍ영흥ㆍ정평ㆍ고원ㆍ안변ㆍ덕원ㆍ문천ㆍ이원ㆍ홍원ㆍ북청ㆍ단천ㆍ길주ㆍ명천 등지가 주요 산지였다.

[주-D022] 역관(譯官)들의 재화(財貨):

조선 시대 중국으로 가는 사신(使臣)과 그 원역(員役)들에 대해 중국에서도 인정하는 사무역(私貿易) 자금의 정액(定額)이 팔포(八包)였는데, 처음에는 팔포의 물화를 관에서 지급하였다가 조선 후기에 와서는 스스로 마련해 가는 것을 허용하는 제도로 바뀌었고 그 허용 대상도 원역으로 한정되었는바, 원역 가운데 특히 역관(譯官)이 사무역의 중심이 되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많은 역관들이 재화를 뇌물로 이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포(包)는 일정한 양으로 포장된 인삼(人蔘)을 헤아리는 단위로, 처음 은화(銀貨)로 가져가던 것이 세종 연간 이후 금지되고 인삼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이때 기본 단위가 10근이었으나 사무역의 이익이 많아지면서 인조(仁祖) 대 이후로는 1인당 80근까지 가져갈 수 있도록 허용되었고 이를 팔포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후 현종(顯宗) 대에 다시 인삼이 귀해지면서 은화로 바꾸어 80근 정도에 해당하는 은화 2000냥을 1인당 팔포의 기준으로 삼고 당상관에게 1000냥을 더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영ㆍ정조 연간에는 은화도 귀해져 팔포를 채우기도 힘들게 되자 다시 인삼이나 피잡물(皮雜物) 등을 섞어 가져가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1797년(정조21)에는 허용되는 인삼의 양이 120근까지 늘어났고, 이후로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度支志 外篇16 八包事實》 《萬機要覽 財用編5 燕行八包》

[주-D023] 얼음과 …… 지조:

원문의 ‘빙벽(氷蘗)’은 얼음물을 마시고 쓰디쓴 황벽나무(소태나무)를 씹는다는 뜻으로, 절조를 굳게 지키면서 청백하게 사는 것을 비유한다.

[주-D024] 저택을 …… 정했으니:

이 내용은 한(漢)나라의 재상 소하(蕭何)가 항상 궁벽한 곳에다 전택(田宅)을 마련하여 담장도 두르지 않고 살면서 “후세에 어진 자손이 나오면 나의 검소함을 배울 것이요, 불초한 자라도 세력가에게 빼앗기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史記 卷53 蕭相國世家》

[주-D025] 이극(貳極):

두 번째로 높은 자리라는 뜻으로 태자나 세자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당시 세손이던 정조를 가리킨다.

[주-D026] 동료였던 권흉(權兇):

세자시강원의 동료였던 홍국영(洪國榮, 1748~1781)을 가리킨다. 이진형이 필선(弼善), 보덕(輔德)으로 있을 때, 홍국영은 겸문학(兼文學), 겸사서(兼司書)로 시강원의 동료였는데, 정조 즉위 후 세도정치를 자행하다가 축출되었다. 홍국영의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덕로(德老)이다. 영조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를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說書)ㆍ사서(司書)가 되었고, 벽파(僻派)의 탄압 속에서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을 보호한 공로를 세웠다. 정조가 즉위한 뒤에 두터운 신임을 받아 동부승지를 지내고 도승지에 올라 대제학,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나 누이동생을 정조의 빈(嬪)으로 들이고, 은언군(恩彦君) 이인(李䄄)의 아들인 담(湛)을 완풍군(完豐君)에 봉하여 왕의 후계자로 삼기를 도모하는 등 세도정권의 유지에 힘쓰다가 효의왕후(孝懿王后) 독살 시도가 발각되어 축출되었다.

[주-D027] 헌면(軒冕):

높은 관리가 타는 초헌(軺軒)과 머리에 쓰는 면류관을 뜻하는바, 높은 벼슬이나 이에 따르는 부귀영화를 비유한다.

[주-D028] 취생몽사(醉生夢死):

정신이 흐리멍덩하여 죽는 날까지 마치 취몽(醉夢) 중에 있는 것처럼 아무 의미 없이 일생을 보내는 것을 뜻하는 말로, 명도(明道) 정호(程顥)가 “간사하고 허탄하고 요망하고 괴이한 말들이 서로 다투어 일어나서 생민(生民)의 귀와 눈을 가리고 온 천하를 더럽고 혼탁한 데에 빠트리므로, 아무리 고명한 재지(才智)를 소유한 자라도 보고 들은 데에 얽매여서 취생몽사의 지경이 되어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醉生夢死, 不自覺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二程文集 卷12 明道先生行狀》

[주-D029] 함장(含章):

아름다운 자질을 속에 간직하고 밖으로 표출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주역》 〈곤괘(坤卦) 육삼(六三)〉에 “아름다움을 속에 품고 있어 곧은 덕을 지킬 수 있다. 혹 나라의 일에 종사하여 이룸이 없더라도 끝내는 좋아질 것이다.[含章可貞, 或從王事, 无成有終.]”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30] 을미년과 …… 되었네:

‘을미년(1775, 영조51)과 병신년(1776, 정조 즉위년)’은 세손인 정조가 외척 세력에 의해 협박을 받으며 가까스로 즉위한 때이고, ‘현황(玄黃)’은 《주역》 〈곤괘(坤卦) 상륙(上六)〉에 “용이 들에서 싸우니, 그 피가 검고 누렇다.[龍戰于野, 其血玄黃.]”라고 보이는데, 싸움으로 인해 검고 누런 피가 사방에 뿌려진 모습을 비유한 것인바, 이 내용은 정조 즉위 때의 어지러운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주-D031] 소양(少陽):

소양궁(少陽宮)의 줄임말로,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東宮)의 별칭이며, 또한 동방(東方)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D032] 떳떳한 …… 흥기하니:

이 내용은 《맹자》 〈진심 하(盡心下)〉의 “군자는 떳떳한 도를 회복할 뿐이니, 떳떳한 도가 바루어지면 서민이 선에 흥기하고 서민이 흥기하면 사특함이 없어질 것이다.[君子反經而已矣. 經正則庶民興, 庶民興, 斯無邪慝矣.]”라는 구절을 원용한 것이다.

[주-D033] 천구(天衢)와 운로(雲路):

‘천구’는 걸릴 것 없는 공중이라는 뜻으로, 벼슬길이 훤히 트여 있음을 비유하는바, 《주역》 〈대축(大畜) 상구(上九)〉에 “저 하늘 거리이니, 형통하리라.[何天之衢, 亨.]”라고 보이는데, 그 〈상전(象傳)〉에 “‘저 하늘 거리’라는 말은 도(道)가 크게 행해진다는 것이다.”라고 풀이하였다. ‘운로’는 청운로(靑雲路)와 같은 말로 벼슬길을 뜻한다.

[주-D034] 연하(烟霞):

안개와 노을이라는 말로, 풍광이 뛰어난 산수(山水)나 한적하게 지낼 수 있는 자연을 비유한다.

[주-D035] 천사만종(千駟萬鍾):

‘천사’는 4천 필(匹)의 말 또는 4필의 말이 끄는 천대의 수레이고, ‘만종’은 많은 녹(祿)인바, 부귀 또는 부귀한 사람을 비유한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사)해동경사연구소 | 연석환 (역) | 2020

 

禮曹參判贈吏曹判書李公墓誌銘幷序○丙午

正宗大王毓德春宮三十年。博選宮僚。用資啓沃。聞望盡一世之勝。南谷李公諱鎭衡其尤者。而公善處功名之際。一德終始。死生哀榮。於乎休哉。公字平仲。系出英陵別子密城君諱琛。贈司僕寺正諱尙胤。南原府使贈吏曹參議諱廷亮。贈吏曹參判諱墉。是爲公曾祖祖禰。三世之贈。用公貴也。參判公聘東萊鄭氏。郡守亨晉之女。以景宗三年癸卯三月七日。擧公于參議公慶山任所。癸酉中生員試。唱名甫浹辰。擢庭試丙科。與伯氏參判公聯榜。循堂國學四方之士環集曰。今世文章也。爭覩爲快。甲戌隷槐院。丁丑薦爲承政院注書。咸稱記注才。戊寅用藥院直宿勞陞六品。內而兵曹佐郞,正郞。薇院正言獻納,司諫。栢府持平,掌令,執義。玉署校理,副應敎。春坊司書,弼善,輔德。宗簿,奉常寺正。通禮院通禮。外而濟原察訪,泰川縣監,慶尙都事。卽堂下踐歷。而處春坊最久。庚辰以宮僚陪從顯隆園溫泉幸行。辛巳以言官入對東宮。多所陳戒。莅濟原四朔。驛路用蘇。爲政泰川廉明有威。不施鞭扑而吏民咸服。上任纔十月。有遺愛碑。掌試嶠南。髦士擧頌其公平。侍講法筵。請益恢察言來諫之德。激勵頹風。因文進戒。英廟嘉納。處宮官四年。受知于健陵。朝夕講磨。左右輔導。時値艱危。戒在樞機。口不出离筵酬酢。及英廟賓天。以告訃奏請書狀官赴燕。上敎曰李某卽余春宮時僚官。講學之際。多所顧問。今當萬里之行。老病可悶。命給蔘料及別盤纏。公律己淸愼。行槖蕭然。一行悚戢。未復命除東壁。以封冊竣事。加通政階賜奴婢田結。拜承政院同副承旨。屢轉至右承旨。間經兵曹參議參知戶曹參議。戊戌奉安英廟影幀于永禧殿。敍禮房勞陞嘉善。拜左承旨。工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上憐公年老無子。特命取公從父兄子兢淵爲子。仍敎曰卿卽國家同休戚之人。而今乃有後。予心欣悅。對曰有父子而後有君臣。卽人倫之序。而臣之父子。乃是有君臣而後有父子也。復拜左承旨。己亥居留沁都。引見賜饌。寵以雲漢曰南谷山人亦世情。沁州出按耀旗旌。佳兒繞膝烏紗喜。老婦開顔紫誥榮。莫道功名由我力。從知天日照君誠。莾蒼少別猶關念。歸趁桃花滿洛城。公感激恩遇。壹心營職。捐廩而堅築城之役。增價而矯貿魚之弊。其間未百日也。時朝議以沁都兼統禦營。用正二品爲留守。上惜其遞。移拜開城留守。是土也。貨利輻湊。居官者類多政以賄成。公持躬淸嚴。濟以節約。承弊易變。習俗幾革。上聞公病篤。命道臣問加減。仍下御札賜蔘劑。又命公胤子乘馹往省。尋除承旨召還。歷漢城府右尹,大司憲,戶曹參判,兼都摠府副摠管。提擧典設司,繕工監。庚子再除都承旨。以禮曹參判,兼同知經筵,實錄事,差籌司堂上。拜京畿觀察使。處劇如閒。不煩聲氣。而衆事自理。請給田灾。民無枉徵。審讞罪囚。獄無寃辜。未周歲一路晏如。辛丑以病辭。拜大司憲。又以病遞。上數降珍劑。臨朝愍惻。屢形辭敎。是歲九月一日下世。享年五十九。病革神精不變。詔胤子曰君恩如河海。而涓埃莫報。是可恨也。仍呼寫一絶曰忽逐秋蟬脫殼忙。瑤天銀海正蒼茫。靈飈且莫催征袂。未答君恩一恨長。遂不復言。惟問闕中消息至再三。時產室設廳。已過期矣。訃聞敎曰此人卽舊時宮僚也。病雖沈綿。不料遽聞長逝之報。驚怛何言。卽令該曹元致賻外倍數加給。在邸時宮僚卒逝則例給歸厚署棺板。此人此例。豈可靳惜。命照例題給。弔祭依例。而致祭命待下敎。又敎曰予之文字間得力。多賴此宮僚。至今受用。資益不些。况在甲乙之際。倘非此宮僚之愼口審幾。則逆雲溫室樹之說。必發於聽政之前。明義之書。名雖不載。功實難忘。噫嘻今焉已矣。九原難作。惜未及置之正卿。今日特贈判書。贈吏曹判書。兼銜如例。越三月戊申。葬于楊州北斗川乾坐。小祥前一日。上親製文賜祭曰。卿在人間。寄如過客。斂歸太空。蟬脫其殼。獨有忠愛。生死固結。臨化一詩。赤腔流出。予從貳邸。得卿爲友。時維囏危。昕夕左右。卷懷如愚。涇不渭濁。次月三節。豈曰酬績。圽後貤贈。始副常期。疎襟爽語。起予者誰。宮筵扶醉。俛仰成塵。十行一酌。表予君臣。癸卯春敎曰。乙丙事。尙何言哉。兇徒亂孼。結締腸肚。左右傍伺。日夕交煽。凡所以恐動予危逼予者。殆無紀極。予之不得解衣而寢者。積有日月。至今追思。心驚夢愕。時則有若贈判書李某。爲予宮僚。一心王室。殷憂焦慮。至達面目。慰予以忍性之義。勉予以處囏之道。藹然忠赤。有足感歎。雖以賊黨百端媒糱之謀。亦莫能窺其涯涘。逮夫數年以來。世變層生。無所不有。而涇不渭濁。薰不蕕化。終始一節。隨處彌堅。雖謂之昬夜明星。未見其過實。肆予曰篤不忘。傾嚮冞深。擬將晉秩八座。警勵頹俗。而未之果焉。歿後貤贈。始用所常期者。每一念至。不勝慘惜。向來致酹。已示予意。而當此民彝漸晦。人志靡定之日。如贈判書者。何處得來。噫。國無節惠之典則已。不然不加於此等之人。而加於何人。贈判書李某。令弘文館議謚。此傳敎便是自家一編行蹟。亦不必待狀而爲之。一體知悉。謚曰忠簡。是可以見公君臣之際也。公生稟異質。眼光射人。參議公鍾愛殊絶曰。必大吾家。與羣兒戲。必自爲將。約束有法。六歲遭內艱。撫養失宜。遂致貞疾。九歲始就學。而朗慧成性。讀未半卷。而綽有長進。時陶庵李先生訪參議公。已聞公有高才。反辭而責之曰九歲猶讀史畧乎。使人大慚。公發悱勉學。至忘寢食。稍長文藝驟進。淹貫經史。旁通陰陽術數及孫吳之書。又解墨妙。未嘗費紙。而草楷俱成軆格。丁外艱。毁瘠幾滅性。而亦不廢勵業。本之經術。而發之爲詞章功令之文。亦不專意而工。然所樂不在是也。居恒伊吾鑽硏。竆晝夜不休。長於記誦。誦所讀諸書。閱數旬而猶未盡。其聰悟絶倫如此。器量恢達。喜慍不形。而見人不是。若將凂己。恬靖簡默。而或値酒酩酊。激昂慷慨。談論千古。如决江河而注之海。釋褐數十年。不苟合當世。嶔崎落拓。而不少介懷。簞瓢屢空。而不問家人產業。安時處順。樂而忘憂。逮夫遇巷。恩眷隆摯。位躋卿月。晉塗大闢。而禔躬寒素。無異處竆。嘗擧奢儉之難易。以戒胤子。居常務自韜晦。不少槩見。上每歎曰卿可謂有若無實若虛。常待之以僚友。輒呼南谷。以家南山下也。仍以爲號焉。嚴於辭受。却西倅之帛。斥象譯之貨。沁都時敎書有銜命燕京。冰檗著操之語。公不悅曰吾於燕行貨一驢。冰檗之云。能不愧乎。卜居岳麓。或嫌其深。公曰昔人置田宅必於竆僻。豈無意乎。配貞夫人密陽朴氏。左尹弼正女。閫範咸備。生後公四歲。歾後公八歲。及喪特命內帑。從厚賻助。異數也。祔公墓左。兢淵文科承旨。有二男三女。男根魁生員。正廟念先故錄後。官郡守。繼后本宗。株以次嫡尸公祀。亦命調用。以未及除職而歾。贈敎官。女適鄭樂綏金魯俊趙在昉。敎官男煕淸今直長。女徐有會。郡守糸子煕殷今縣監。女洪在承。煕淸三女兪鎭鼎朴㝡夏兪鎭球。郡守二男憲堯章堯。二女幼。公體貌脆弱。而性度尊嚴。若以綿裹鐵然。故當英廟季世。邦朋樹黨。世道交喪。危逼之形。至及貳極。而審幾密贊。竭力調護。不露鋒穎。默而成之。竟措於安。是所云王臣謇謇。匪躬之故者乎。且不失身于同僚之權兇。塊然無徒。廓然獨立。不獲世之滋垢。明良際會。曠世一値。而居寵若驚。謙恭寅畏。其垂令名於無窮也宜哉。公雅言病羸不任退耕。遂不免欺有司倖科第。自玆以往。皆分外也。記通籍后行止。名之曰外物錄。知其爲外物。誰能使驕泰隕穫於得失哉。士大夫只知軒冕之榮。而不知休退之樂者。何異於醉生夢死哉。將乞身而退。以娛晩景於江湖之上。是公之所矢願而未就者。然其高情遠韻。亦可以想象也。不佞與公有屢世之好。夙誦公風節。公曾孫煕淸。以其祖承旨公之狀來。謂不佞曰今世之知吾祖最深者。惟子在。子又及耄矣。不及今爲之銘。將何以闡揚德美於後世乎。不佞辭非其人而不獲。遂力疾而爲之銘。銘曰。
侃侃李公。出自天潢。遭逢正廟。効厥忠良。正廟曰咨。嘉乃含章。朝夕承華。啓迪孔彰。屬時乙丙。世道玄黃。辨幾察影。夾介少陽。內言不出。用自斂藏。轉危爲安。誠格穹蒼。君子愼密。乃終永貞。夷險一節。受知聖明。遵養時晦。砥行立名。何以致此。玩心硏經。經正民興。何用不臧。所以明哲。旁燭煌煌。天衢雲路。進步將將。一曙厭世。脫屣其忙。胡不少假。用卒贊襄。恩綸荐降。收存恤亡。宸情追舊。彌久不忘。歷選在廷。鮮與儔匹。烟霞初心。江湖晩節。千駟萬鍾。視以外物。是公平生。中自蘊結。感戴殊遇。未忍便訣。瑤天銀海。遺恨不滅。有屹斗岡。有幽其室。炯炯竆泉。濊濊腔血。我詞不諛。百世是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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