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녕부 도정 증 이조 참판 조공 묘지명병서○무신년〔敦寧府都正贈吏曹參判趙公墓誌銘幷序○戊申〕
맹자가 말씀하기를“사람은 지조가 있어서 하지 않는 바가 있은 뒤에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다.”라고 하셨으니, 가릴 바를 알아서 능히 하지 않는 바가 있는 분은 근고(近古) 사람들을 차례로 뽑아보건대 오직 관아재(觀我齋) 조공(趙公)일 것이다.
영조(英祖) 을묘년(1735, 영조11) 세조(世祖)의 어진(御眞)을 거듭 모사(摹寫)할 적에, 예조(禮曹)에서 공이 평소 그림 그리는 방법을 잘 안다고 해서 왕명(王命)으로 공을 불렀다. 공은 이때 의령(宜寧)의 임소(任所)에 있었는데, 명에 응하지 않고 말씀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면 화사(畫師)와 무엇이 다르겠는가.자신의 신분에 맞는 부름이 아니면 가지 않는 것이 옛 도이다.”라고 하면서 의금부 옥리를 상대하다가 끝내 고신(告身)을 빼앗기는 벌에 처해졌다.
무진년(1748)에 또다시 숙종(肅宗)의 어진을 모사할 적에 상이 공의 이름을 거론하자, 여러 신하들이 공을 낭관(郎官)으로 차임(差任)하려 하였는데, 상은 예전의 일에 노하여 특별히 체직하고 다만 들어와서 참여하여 감독하게 하였다. 공은 즉시 나와 명에 응하면서 말씀하기를 “감독할 뿐이라면 어찌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경연관이 공이 붓을 잡도록 명을 내려주시기를 청하자, 공이 그 사람을 주시(注視)하니, 상이 웃으며 “이 사람이 경을 눈여겨본다.”라고 하시고는 이어서 공에게 묻기를 “너는 능히 붓을 잡고 화상을 그릴 수 있느냐?”라고 하셨다. 상의 전교(傳敎)가 간곡하니, 공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오늘의 일은 을묘년과 다름이 없다.”라고 하여 죽기를 맹세하고 강력히 사양하기를
“신하의 의리는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는 경우가 있으니, 만일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다면 비록 끓는 물속과 뜨거운 불속이라도 사양하지 않고 뛰어들 것입니다. 그러나기예를 가지고 임금을 섬기는 것으로 말하면, 성인이 이것을 《예경(禮經)》에 드러내어 선비의 반열에 끼지 못하게 하였으니,신이 비록 미천하나 어찌 스스로여러 사(史)들과 같은 반열에 처하여 의관(衣冠)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또 국가에서 도화서(圖畫署)를 설치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자리를 만든 것이니, 신하가 군주를 섬김은 각기 마땅한 방법이 있습니다. 신(臣)의 앞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니, 감히 어명(御命)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아무런 흔들림 없이 격렬한 말소리로 범안(犯顔)하였는데, 상은 얼굴빛이 변하더니 또 하교하시기를 “네가 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구나.”라고 하셨다.
좌우 신하들이 서로 계속해서 비방하고 논척하자, 상은 손을 저어 만류하며 말씀하기를 “내가 막 사람들에게 환심(歡心)을 얻어 대사(大事)에 정성을 다하였으니, 다시 말하지 말라.” 하시고는 외부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셨으나, 끝내 또 견책(譴責)이 그치지 않았다. 이날 공의 행동을 본 자들은 경악(驚愕)하여 서로 돌아보지 않는 이가 없었고, 평소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도 물러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그가 하는 바를 살펴보건대 참으로 군주를 섬기는 체통을 알고 있으니,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상은 매번 공을 언급할 때면 번번이 “꼿꼿하고 결백하다.”라고 칭찬하였고, 관직을 주의(注擬)할 때에 공의 이름을 보면 반드시 비점(批點)을 내렸다. 공은 임금의 물음에 대답하여 아뢰는 것이 분명하고 간절하여 번번이 임금을 깨닫게 하여, 처음에는 위엄을 세우고 노여워하시다가 끝내는 혜량(惠諒)하셨으니, 이것이 어찌 구차히 탐하여 이룬 것이겠는가. 도암(陶菴이재(李縡)) 이 문정공(李文正公)이 일찍이 감탄하기를 “이리도 훌륭하구나, 조모의 사람됨이여! 어찌 속류(俗流)들이 미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이당초 사관(祠官)에 제수되었는데허가 없이 산의 나무를 벤 일로 금오(金吾의금부)에 나아가 심리를 받았다. 의금부에서 형률을 의정(議定)하여 결장(決杖)을 하고 속전(贖錢)을 받지 않기로 감률(勘律)하니, 여러 침랑(寢郞능참봉)들은 녹(祿)을 보존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으나, 공은 준엄한 법조문을 인용하여 스스로 단죄(斷罪)하고 말씀하기를
“국가에서 속전(贖錢)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장차 염치(廉恥)를 기르고 치욕(恥辱)을 멀리 하게 하려는 것이니, 법의 뜻이 매우 훌륭하고 사대부를 대우하는 것이 박하지 않다.그림을 그린 의관(衣冠)과 괴이한 장복(章服)을 착용하는 것도 고인(古人)은 부끄러워하였는데,피부를 드러내어 치욕을 받는 것은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을묘년에 여러 사람들이 크게 비방하여 의리를 왜곡하니, 뜻을 낮추어 구차히 화를 면하는 것은 해도 괜찮을 듯한데, 공은곤궁에 처해서도 더욱 형통하여스스로 자기 뜻을 이루기를 기약하였다. 옥에 갇혀 있을 적에 공의 죄를 판정하였는데, 청(淸)나라의 사면령이 며칠 있지 않으면 장차 이를 상황이었다. 고식(姑息)적으로 공을 아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공이 서글퍼하여 말씀하기를 “사대부가 어찌 오랑캐에게 사면을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여러 당상관을 재촉해서 감률(勘律)하게 하여 귀양 갈 것을 자청하니, 이와 같은 것이 어찌 이른바 ‘하지 않는 바가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휘가 영석(榮祏)이고 자가 종보(宗甫)이고 본관이 함안(咸安)이니, 신라 때 원윤(元尹)을 지낸 정(鼎)을 시조로 삼는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휘 려(旅)가 있었으니, 장릉(莊陵단종(端宗))과 광릉(光陵세조(世祖))의 때를 만나서 매월당(梅月堂김시습(金時習)) 등 여러 현자들과 뜻을 같이 하여 함께 〈생육신전(生六臣傳)〉에 들었다. 휘 순(舜)은 이조 참판이니,무오사화(戊午士禍) 때의 명현(名賢)이 되었다.휘 감(堪)은 주부(主簿)인데 학행(學行)으로 집의(執義)에 추증되었는데, 율곡(栗谷)과 우계(牛溪) 두 선생이 크게 탄복하였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일(鎰)은 평시서 영(平市署令)으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니, 혼조(昬朝광해군(光海君)) 때금용(金墉)의 변고를 당하여 항거하는 소(疏)를 올려서 정인홍(鄭仁弘)의 죄를 바로잡았다.
조고 휘 봉원(逢源)은 동지중추(同知中樞)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김상헌(金尙憲))을 사사하여 우재(尤齋) 송 문정공(宋文正公송시열(宋時烈))에게 천거를 받았고, 후생들을 잘 가르쳐 농암(農巖김창협(金昌協))과 삼연(三淵김창흡(金昌翕)) 등 제현(諸賢)이 모두 그 문하에서 나왔다. 선고 휘 해(楷)는 순창 군수(淳昌郡守)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자제와 조카처럼 우재(尤齋)를 복종하여 섬겼다. 선비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참봉(參奉) 유(游)가 그 선고이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나서 마음과 눈이 닿는 것이면 모두 능히 배워서 알았다. 차츰 자라자배움에 일정한 곳이 없어서약관이 되기 전에 이미 명성이 크게 회자되었다.
계사년(1701, 숙종27)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무술년(1718)에 처음 벼슬해서 장릉 참봉(章陵參奉)이 되었으며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와 상서원(尙瑞院)과 공릉(恭陵)의 직장(直長), 장원서(掌苑署)의 별제(別提), 사헌부의 감찰(監察), 제용감(濟用監)과 사복시(司僕寺)와 전생서(典牲署)의 주부(主簿), 의금부의 도사(都事), 호조 좌랑, 형조 정랑, 종묘서 영(宗廟署令), 사옹원(司饔院)과 사도시(司䆃寺)의 첨정(僉正), 광흥창 수(廣興倉守)를 지냈다. 외직으로는 연기(燕岐), 제천(堤川), 적성(積城), 의령(宜寧), 안음(安陰)의 현감과 배천 군수(白川郡守)를 지냈다.
병자년(1756, 영조32)에 인원성모(仁元聖母숙종의 계비(繼妃) 인원왕후)의 수(壽)가 칠순에 오름으로 인해서 추은(推恩)하는 은전이 있어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고 첨지중추(僉知中樞)와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에 제수되었다.
임인년(1722, 경종2)에백씨(伯氏)인 유수공(留守公)이 사화를 당하여 귀양을 가자,공도 또한 관직을 버리고 입을 닫고서 그대로 일생을 마칠 것처럼 하였다. 무신년(1728)에군흉(群兇)들이 또다시 군대를 일으켜 반란하였다.공은 이때 외직으로 제천 현감을 맡고 있었는데,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마땅하게 조처하니, 이로써 온 경내가 평안하였다.
을묘년(1735, 영조11)부터 조정 관료들에게 배척을 받아 십수 년 동안 폐출되어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는데, 이는 보통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공은 스스로 만족해하였다. 배천 군수로 있을 적에 새로운 법령이 준엄하고 급하니, 여러 군들은 앞 다투어 전결(田結)을 누락했다고 스스로 탄핵하였다. 공은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군의 백성들이 거듭 곤궁해질 것이다.”라고 하고 일부분을 남겨 두어 한 지방의 급한 사정을 느슨하게 펴주었다. 공은 비록 이 때문에 유배를 갔으나 상은 곧바로 용서할 것을 명하시고 “이야말로허물을 보면 인(仁)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경연의 하교가 이처럼 정중하니, 의논하는 자들이 감복하였다.
공은 향년 76세로 신사년(1761) 3월 27일에 별세했는데, 5월 경자(庚子)일에 부인의 묘를 파고 파주의 유산(遊山) 간좌(艮坐)에 합폄(合窆)하였다. 계윤(季胤셋째 아들 조중첨(趙重瞻))의 추은(推恩)으로 인하여 공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을 추증하고 겸직을 준례와 같이 내렸다.
배위인 정부인 연안 이씨(延安李氏)는 현감으로 판서에 추증된 하조(賀朝)의 따님으로 문정공(文貞公) 단상(端相)이 그 조고(祖考)인데, 규문(閨門)의 법도를 모두 구비하였다. 3남을 낳았는데, 중희(重希)와 중환(重睆)은 효행으로 정려문을 받았으나 모두 요절하였고, 중첨(重瞻)은 동중추(同中樞)이다. 세 딸은 군수 홍계능(洪啓能), 판서 김경(金熲), 이담(李潭)에게 출가하였다. 중희의 계자(繼子)는 관진(寬鎭)이고, 중환의 계자는 광진(匡鎭)이다. 동추(同樞)의 아들은 환진(桓鎭), 광진(匡鎭), 상진(常鎭)이고 사위는 참판 민기현(閔耆顯)과 김재선(金在璿)과 김관순(金觀淳)이다.
속(涑)과 택(澤)과 박정양(朴正陽)의 아내는 환진의 소생이고, 급(汲)은 광진의 소생이고, 흡(潝)은 상진의 소생이며, 김재선의 계자(繼子)는 감역(監役) 명현(命鉉)이다. 속의 4남은 민식(敏植), 돈식(敦植), 교식(敎植), 효식(斅植)이고, 택의 아들은 규식(圭植)이며, 사위는 진사 유경환(兪景煥)이다.
공은 천성적으로 효성을 타고났다. 일찍 부모님을 모두 잃고서 늙을 때까지 서글픈 마음을 머금어 부모님이 쓰시던 물건을 보면 반드시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났고 말씀하다가 부모를 언급하면 번번이 눈물이 뺨을 적셨다. 사당이 다른 집에 있었으나 천신(薦新)하고 제향(祭享)할 적에 재계(齋戒)와 소식(素食)을 하고 공경을 지극히 해서 정(情)과 예(禮)가 모두 극진하였는데,노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근력(筋力)으로 예를 행하였다.정성을 다하여 재물을 모아서 선영의 묘소에 큰 비(碑)를 세웠고, 선대(先代)의 문헌들을 모으되 크고 작은 것들을 모두 정리하였다.
또세부(世父)의 남은 원고를 수습해서 판각하여 발행하니, 《손암집(損菴集)》이 이것이다. 누님과 유수공(留守公)을 부모처럼 섬겼고, 백씨(伯氏), 중씨(仲氏조영록(趙榮祿))와 함께 이웃하여 단란하게 살면서춘진(春津)의 즐거움이 있었으며, 아들과 조카를 가르칠 적에 엄하고 법도가 있었다.
장자(長子)가 일찍 죽고 늦게 낳은 아들이 손자와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공부를 가르치고 덕을 진작시킬 적에 사소한 것도 너그러이 용서하지 않아서 과거(科擧) 외에 성현(聖賢)의 공업(功業)이 있음을 알게 하였고 선철의 언행으로써 가르쳤다.계해년(1743)에 형의 아들인 충헌공(忠憲公)이 일을 말하다가사태가 장차 예측할 수 없는 위태로운 상황이어서 온 집안이 경황이 없었으나, 공은 도리어 가상히 여기고 장려하여 화복(禍福) 때문에 마음이 동요하지 않았다.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했을 적에는 혁혁한 명예를 구하지 않고 오로지 백성들의 고충을 살펴 어루만져 위로하였고 호강(豪强)하고 교활한 자들을 제거하였다. 또 향교를 수리하여 유학의 교화를 밝혔다. 간간이 노인들을 모아서두 동이의 술로 잔치를 베푸니,이것은 바로나이를 물어 노인을 보양하는 예이다. 공무의 여가에 마음껏 산수(山水)를 즐겨 그윽한 곳을 찾고 명승지를 골라 유람하였는데, 이를 통해 백성들의 고통을 탐문하고 선유(先儒)들의 고상한 자취와 시인들의 유풍(遺風)을 탐방하였으니,풍아(風雅)의 유람에 가까웠다.
정치를 할 적에는 청렴하고 검약하며 유학(儒學)으로 문식(文飾)하였으며, 자상하고 인자하여 인정을 곡진히 베풀었다. 이 때문에 베푼 사랑이 백성들에게 남아 있어서, 부고(訃告)가 이르자 남쪽 백성들이 은혜에 감읍(感泣)하였고 사람들이 각각 발이 부르트는 것도 꺼리지 않고 달려와서 부의를 전하였다.
공은 일찍이 목숨과 여색, 벼슬, 재물을 사람의 네 가지 큰 욕망으로 여겨 밤낮으로 조심하였다. 말년에는 또 맹세하여 말씀하기를 “지금 이후에야 거의 면하게 되었다.지기(志氣)가 더욱 쇠약해지니 말년에 절개를 더욱 경계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공이 자기 몸을 다스린 대략이요, 한 절개를 시종일관한 것이다.
문장과 글씨, 그림에 뛰어나 세상에서 ‘삼절(三絶)’이라고 칭하였다.가주(可洲) 안중관(安重觀)은 문장을 보는 안목이 온 세상에서 최고였는데, 유독 공을 추존하여 미치지 못할 듯이 하였다. 시는성당(盛唐)을 배우고 말년에는진간재(陳簡齋)를 좋아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림의 묘법(妙法)을 묻자, 공이 말씀하기를 “그림을 보고 그대로 따라 그려서 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니, 사물에 나아가서 진경(眞景)을 그려야 비로소 살아있는 그림이 된다.”라고 하였다.
시와 문장에 깊은 조예가 있고 묘하게 깨달았으며 그림 그리는 것을 통해 터득한 것이 많았다. 필법이 매우 웅건하고 훌륭하여 여러 체(體)를 모아서 하나의 격식(格式)을 이루었는데, 마치 날아가듯 휘호(揮毫)하여 휙휙 소리가 났다. 말년에동현재(董玄宰)를 좋아하였는데, 이는 재주와 성정(性情)이 비슷하였기 때문이다.
공은 모습이 우뚝한 대나무와 같고 절개가 단단한 돌과 같았으며, 평소 뜻이 임천(林泉)에서 살고자 하여 영화(榮華)와 이익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비록 억지로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고명(高明)한 것에 전심치지(專心致志)하여 항상 경각심(警覺心)을 가지고 있었다.
서실(書室)을 깨끗이 청소하고 도서와 책상을 질서정연하게 놓았으며, 꽃나무를 가꾸어 그윽한 감상을 돕는 것을 좋아하니, 즐거운 뜻이 서로 이어졌다. 손님과 벗을 대하면 지팡이를 잡고 자리를 옮기고서 정성을 다해 수작(酬酢)하여 온화하고 담박한 풍치(風致)를 드러내니, 바라보면 신선계(神仙界)의 사람과 같았다.
공의 집안은 대대로 시(詩)와 예(禮)에 돈독하였으니, 이어받은 연원(淵源)이 있었다. 조고와 선고 2대에는 화양(華陽송시열(宋時烈))에게서 전습(傳習)을 하였고, 공은 또간암(艮庵) 이 문간공(李文簡公)을 따라 배웠다. 이 때문에 아버지와 스승의 가르침을 외고 본받은 것이 몸에 흡족하게 충만하여 마치 세 끼 식사를 매일 하듯이 고아(高雅)한 말씀이 입에서 끊이지 않았다.
매번 지방관의 일을 맡아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을 스스로 서글퍼해서 번번이 심장을 가리키며 탄식하기를 “내가 사우(師友)를 저버린 것이 많다.”라고 하였다. 《주서(朱書)》를 전공하였고 여러 학설들을 두루 상고해서 끊임없이 반복하여 공부하였으니,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함이 이와 같았다.
부자(夫子)가 사람의 선을 논할 적에 반드시 부형과 사우에 근원하신 것은 후덕함이 지극한 것이니,이것은 바로 공을 두고 말한 것이다. 오호라! 우리부자께서 강자(剛者)를 보지 못한 것을 한탄하셨으니,사람은 한 몸을 가지고 살면서 위엄에 두려워하고 이익에 병들어, 험난함이 가득한 세상에서 능히 자신의 지조를 온전히 지키는 자가 드물다. 그런데 공과 같은 분은큰일에 임하여 절개를 빼앗을 수 없었으니, 진실로 군자다운 사람이 아니겠는가.
나는 일찍부터 공의 풍도와 의리에 감복해서공을 위하여 채찍을 잡는 일이라도 사양하지 않으려고 하였다.공의 현손(玄孫)인 민식(敏植)이 묘지문을 청하니, 나약한 나의 가슴이 격동하여 감히 굳이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생각건대부끄러운 말이 없는 것이 채백개(蔡伯喈)가 곽유도(郭有道)에 있어서와 같을 것이다.명문은 다음과 같다.
함안의 파산에 영기가 빛나 / 巴山炳靈
예부터 명현이 많았네 / 古多名賢
공이 또 탄생하니 / 公又挺生
차례를 이어 선조를 닮았네 / 纘序象先
성품이 강하고 기운이 깨끗하며 / 性剛氣淸
뜻이 높고 행실이 온전하였네 / 志高行全
도를 실천함이 간략하고 / 爲道簡易
조리가 치밀하였네 / 條理微密
마음을 보존함이 결백하고 정직하며 / 存心白直
법도를 지킴이 엄하고 엄하였네 / 尺度嚴栗
먼저 큰 뜻을 확립하였으니 / 先立其大
풍절이 우뚝하였네 / 卓乎風節
움츠리지 않고 피하지 않으니/ 不撓不逃
그 절개를 만부도 빼앗을 수 없었네 / 萬夫莫奪
무엇으로써 이것을 이루었는가 / 何以致之
근본을 보존하였기 때문이네 / 本之則存
강한과 갱장은 / 江漢羹墻
화양과 지촌이요/ 華陽芝村
오매불망 끊임없이 연구한 것은 / 寤寐鑽繹
고정의 뛰어난 이론이었네 / 考亭名論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 魯無君子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것을 취했겠는가/ 斯焉取斯
만일 뜻과 사업을 다 펼쳤더라면 / 苟展志業
어디에 쓴들 마땅하지 않았겠는가 / 何用不宜
명당에서는 동량이 되고 / 明堂棟樑
태묘에서는 준이가 되었으리라/ 太廟尊彝
이름과 실제가 순수하여 / 名實純粹
당세의 스승이 되었으니 / 爲當世師
공을 삼절로 칭찬하는 것은 / 贊公三絶
얕게 아는 것이네 / 淺之爲知
전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 有不可傳
아득히 심원하고 광대한 교화라네 / 大化冥茫
파주의 높고 높은 유산에 / 律律遊岡
도끼와 당과 같이 엄연한 무덤이 있네 / 儼若斧堂
한 기운이 매우 신령스러우니 / 一氣孔神
올라가 아름다운 광채가 되었네 / 騰有晶光
글을 깊은 무덤에 올리니 / 薦章玄隧
명문에 덕을 나열하였노라 / 矢德于銘
진실로 훌륭한 명망이 / 允矣標望
천년토록 길이 남으리라 / 永垂千齡
[주-D001] 무신년:
1848년(헌종14)으로, 매산의 나이 73세 되던 해이다.
[주-D002] 사람은 …… 있다:
이 내용은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보인다.
[주-D003] 자신의 …… 것:
이 내용은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옛날에 제 경공(齊景公)이 사냥할 적에 우인(虞人)을 정(旌)으로 불렀는데, 오지 않으니, 장차 그를 죽이려 하였다. 이에 대해 공자께서 그를 칭찬하기를 ‘지사(志士)는 자신의 시신이 도랑에 버려질 수도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용사(勇士)는 죽음을 당해 머리가 잘릴 수도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한다.’라고 하셨으니, 공자는 여기에서 무엇을 취하셨는가? 자기의 신분에 맞는 부름이 아니면 가지 않는 것을 취하신 것이다.[昔齊景公田, 招虞人以旌, 不至, 將殺之. 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 孔子奚取焉? 取非其招不往也.]”라고 보인다.
[주-D004] 기예를 …… 하였으니:
이 내용은 《예기》 〈왕제(王制)〉에 “무릇 기예를 잡고서 윗사람을 섬기는 자는 축(祝)ㆍ사(史)ㆍ사자(射者)ㆍ어자(御者)ㆍ의사(醫師)ㆍ복서(卜筮)ㆍ백공(百工)이다. 무릇 기예를 잡고서 윗사람을 섬기는 자는 일을 두 가지 이상 하지 않으며 관직을 옮기지 않으며 자기 고을을 나가서는 사(士)의 반열에 끼지 못하니, 대부의 집에서 벼슬하는 자도 자기 고을을 떠나서는 사의 대열에 끼지 못한다.[凡執技以事上者, 不貳事, 不移官, 出鄕不與士齒. 仕於家者, 出鄕不與士齒.]”라고 보인다.
[주-D005] 여러 …… 있겠습니까:
사(史)는 도화서(圖畫署)에서 그림을 전문으로 그리는 화사(畫史), 회사(繪史) 등의 화원(畫員)으로, 그림 그리는 기예만 뛰어나면 되는 사람들이다. 목숨을 바쳐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선비는 이들과 격이 다르므로 같은 반열에 있는 것을 수치로 여김을 이렇게 비유한 것이다. 이 내용은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백이(伯夷)는 섬길 만한 군주가 아니면 섬기지 않으며, 벗할 만한 사람이 아니면 벗하지 않으며, 악한 사람의 조정에 서지 않으며, 악한 사람과 더불어 말씀하지 않더니, 악한 사람의 조정에 서는 것과 악한 사람과 더불어 말하는 것을 마치 조복(朝服)과 조관(朝冠)을 입고 진흙과 숯 더미에 앉은 듯이 여겼으며, 악을 미워하는 마음을 미루어서 생각하기를 향인(鄕人)과 함께 서있을 때에 향인의 관(冠)이 바르지 않으면 망망연(望望然)히 떠나가 마치 장차 자신이 더럽혀질 듯이 여겼다. 이 때문에 제후(諸侯)들 중에 비록 그 사명(辭命)을 잘하여 찾아오는 자가 있더라도 받아주지 않았으니, 받아주지 않은 것은 이 또한 나아감을 좋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라는 말을 원용한 것이다.
[주-D006] 당초 사관(祠官)에 제수되었는데:
사관(祠官)은 사당(祠堂)을 관리하거나 제사를 맡은 관직으로, 무술년(1718)에 처음 벼슬로 장릉 참봉(章陵參奉)이 되었던 것을 가리킨다. 《承政院日記 肅宗 44年 12月 27日》
[주-D007] 그림을 …… 부끄러워하였는데:
중국 상고(上古)의 우(虞)나라 때에 죄를 지은 사람에게 그 죄를 상징하는 이상한 그림을 의관이나 장복(章服)에 그려 넣어 형벌을 대신하였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더 수치스럽게 여겨 죄를 범하지 않은 것을 이른다. 《漢書 卷23 刑法志》
[주-D008] 곤궁에 …… 형통하여:
이 내용은 《주역》 〈곤괘(困卦) 단(彖)〉의 “험하나 기뻐하여 곤궁하여도 형통한 바를 잃지 않으니, 오직 군자(君子)일 것이다.”라는 말을 원용한 것이다.
[주-D009] 무오사화(戊午士禍) …… 되었다:
무오사화는 무오년(1498, 연산군4)에 김일손(金馹孫, 1464~1498) 등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유자광(柳子光, 1439~1512)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한다. 그러나 조순이 무오년에 여러 명현들과 함께 화를 입었다는 기록은 자세하지 않고, 을묘년(1495, 연산군1)에 영의정 노사신(盧思愼, 1427~1498)이 대간(臺諫)의 간언을 거부한 국왕의 행동을 “지당하신 분부입니다.”, “영주(英主)의 위엄 있는 결단입니다.”라고 칭송했던 것에 대해 정사년(1497)에 사간원 정언(正言)인 조순이 노사신을 탄핵하며 “노사신의 살코기를 먹고 싶다.”라고 극언했다가 파직된 것이 사료에 보인다. 《燕山君日記 1年 7月 12日, 3年 7月 23日》
[주-D010] 금용(金墉)의 …… 바로잡았다:
‘금용의 변고’는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킨 일을 말하는바, 이때 서인과 남인 세력이 대부분 정계에서 쫓겨나고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항거하는 소(疏)를 올려서 정인홍(鄭仁弘)의 죄를 바로잡은 사실’은 자세하지 않으나, 이희조(李喜朝)가 조일(趙鎰)의 묘갈(墓碣)에 적은 후기(後記)에 “옛날 광해군 초기에 정인홍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퇴계(退溪) 이황(李滉) 두 선생을 무함하였는데, 공이 제생(諸生)으로서 경기의 유생들을 인도하여 거듭 소장(疏章)을 올려 변론하여 배척하였다.[昔當光海初, 鄭仁弘之誣毁晦退兩先生也, 公以諸生, 倡率畿儒, 屢上章辨斥.]”라고 한 것이 일례(一例)가 될 것 같다. 《芝村集 卷24 平市令贈參判趙公墓碣後記》 금용은 본래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의 성(城)으로 위(魏)나라 명제(明帝)가 만든 것인데, 그 뒤에 사마사(司馬師)가 위주(魏主)인 조방(曹芳)을 폐위시켜 이곳으로 옮기게 하고, 진(晉)의 양후(楊后), 민회태자(愍懷太子), 가후(賈后)를 폐하여 모두 이곳에 유폐시키는 등 황족을 이 성에 유폐시킨 사례가 많았다. 《讀史方輿紀要 河南 河南府 洛陽縣》
[주-D011] 배움에 …… 없어서:
이 내용은 《예기》 〈내칙(內則)〉의 “서른 살이 되거든 아내를 두어 비로소 남자의 일을 다스리며, 널리 배워 일정한 곳이 없으며 친구에게 공손히 하되 그의 뜻을 살핀다.[三十而有室, 始理男事, 博學無方, 孫友視志.]”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스승을 두지 않고 오직 선(善)을 스승으로 삼아 널리 배운다는 말이다.
[주-D012] 백씨(伯氏)인 …… 가자:
백씨는 조영석(趙榮祏)의 맏형인 조영복(趙榮福, 1672~1728)으로, 신임사화 때 소론의 배척을 받아 선산(善山)으로 유배 간 것을 이른다. 조영복의 자는 석오(錫五), 호는 이지당(二知堂)이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1714년에 증광 문과에 급제하고 충청도 관찰사, 개성 유수 등을 지냈다. 《陶谷集 卷17 開城府留守趙公墓誌銘》
[주-D013] 군흉(群兇)들이 …… 반란하였다:
군흉은 소론(少論)과 남인(南人)의 일부 세력을 가리키는바, 무신년에 이들이 영조와 노론(老論)을 제거하고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을 추대하고자 반란을 일으켰다. 무신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무신란’이라고도 하고 이인좌(李麟佐)가 거병했다고 해서 ‘이인좌의 난’이라고도 한다.
[주-D014] 허물을 …… 것이다:
이 내용은 《논어》 〈이인(里仁)〉에 “사람의 허물은 각각 그 종류를 따르니, 허물을 보면 인을 알 수 있다.[人之過也, 各於其黨, 觀過, 斯知仁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15] 노년이 …… 행하였다:
노쇠한 사람이 몸의 근력을 다하여 예를 행하려고 하면 자칫 건강을 해칠 수 있기 때문에 고례(古禮)에 근력으로 예를 행하는 것을 경계하였는데, 조영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정성을 쏟아 예를 행하였다는 말이다. 이 내용은 《예기》 〈곡례 상(曲禮上)〉의 “가난한 사람은 재물을 가지고 예를 행하지 않고, 늙은 사람은 근력을 가지고 예를 행하지 않는다.[貧者不以貨財爲禮, 老者不以筋力爲禮.]”라는 구절을 원용한 것이다.
[주-D016] 세부(世父):
조영석의 백부(伯父)인 조근(趙根, 1631~1690)으로, 자는 복형(復亨), 호는 손암(損菴)이다. 송시열의 문인이다. 1666년(현종7)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교리, 충청도 도사 등을 지냈다. 저술로 《손암집》이 있다.
[주-D017] 춘진(春津)의 즐거움:
형제간에 우애롭게 지내는 즐거움을 말한다. 춘진은 춘진(椿津)으로도 쓰는데, 남북조 시대 후위(後魏)의 양춘(楊椿)과 양진(楊津) 형제를 가리킨다. 두 사람은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양진이 자사(刺史)로 있을 적에 철마다 좋은 음식이 생기면 매번 서울에 있는 형인 양춘에게 인편을 통해 음식을 부쳤는데, 보내지 못할 경우 먼저 입에 넣지 않았다고 한다. 《北史 卷41 楊播列傳》
[주-D018] 계해년에 …… 말하다가:
충헌(忠憲)은 조중회(趙重晦, 1711~1782)의 시호로, 맏형인 조영복(趙榮福)의 아들인데, 1743년(영조19) 정언(正言)으로 있을 적에 왕이 사묘(私廟)에 친림(親臨)한 일과 심양(瀋陽)에 다녀온 사행(使行)에 대하여 논하다가 관직을 삭탈당한 것을 말한다. 《英祖實錄 19年 11月 28日》 《梅山集 卷34 吏曹判書致仕奉朝賀謚忠憲趙公神道碑銘》 사묘(私廟)는 임금의 사친(私親)의 사당으로, 영조의 생모인 숙빈(淑嬪) 최씨(崔氏)의 사당을 말한다.
[주-D019] 두 …… 베푸니:
《시경》 〈빈풍(豳風) 칠월(七月)〉에 “9월에 서리가 내리거든 10월에 마당을 깨끗이 쓸고 두 동이의 술로 연향을 베풀어 염소와 양을 잡아 저 공당으로 올라가서 저 뿔잔을 드니, 만수무강하리로다.[九月肅霜, 十月滌場, 朋酒斯饗, 曰殺羔羊, 躋彼公堂, 稱彼兕觥, 萬壽無疆.]”라는 구절을 원용한 것으로, 본래 이 시는 백성들이 임금을 위해 1년 내내 열심히 일하고 1년의 마지막 달에 마당을 쓸고 양을 잡아 임금이 계신 곳에 바치며 술잔을 들어 만수무강하기를 기원하는 시인데, 여기서는 고을의 노인들이 만수무강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인용하였다.
[주-D020] 나이를 …… 예:
노인의 나이를 물어 그 나이에 맞는 혜택을 베풀어 노인을 봉양하는 예를 다하게 하였던 옛날의 예를 이르는바, 《예기》 〈왕제(王制)〉에 “80세가 된 자는 그의 한 자식을 부역에 종사하지 않게 하고, 90세가 된 자는 그의 온 집안 식구를 부역에 종사하지 않게 하였다.[八十者, 一子不從政. 九十者, 其家不從政.]”라고 보인다.
[주-D021] 풍아(風雅)의 유람:
풍아는 《시경》의 국풍(國風)과 대아(大雅)ㆍ소아(小雅)를 말하는데, 전하여 바르고 고상한 시문(詩文)을 비유하는바, 고상한 시인의 유람이라는 말이다.
[주-D022] 지금 …… 되었다:
《논어》 〈태백(泰伯)〉에, 증자가 병이 들자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기를, “이불을 걷고서 내 발을 살펴보고 내 손을 살펴보아라. 《시경》에 이르기를, ‘두려워하고 삼가서 깊은 못에 임한 듯이 하며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하라.’ 하였는데, 이제야 내 몸이 다치는 죄를 면할 수 있게 되었구나. 제자들아![而今而後, 吾知免夫, 小子!]”라고 한 데에서 온 말로, 부모가 남겨준 몸을 훼손시키지 않고서 죽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조영석이 말년에 평생 절개를 지켜온 것을 회고한 말로 사용하였다.
[주-D023] 가주(可洲) 안중관(安重觀):
안중관(1683~1752)으로,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국빈(國賓), 호는 가주ㆍ회와(悔窩)이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 위솔(世子翊衛司衛率)이 되었고, 공조 좌랑, 제천 현감 등을 지냈다. 성리학에 침잠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문학과 경세학(經世學)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저술로 《회와집》이 있다.
[주-D024] 성당(盛唐):
당나라의 문풍(文風)을 초당(初唐), 성당, 중당(中唐), 만당(晩唐)으로 구분하는바, 성당은 당나라 현종(玄宗)의 개원(開元) 연간(713~741)으로부터 대종(代宗)의 대력(大曆) 연간(766~779)에 이르기까지의 당시(唐詩)가 전성(全盛)하던 시기를 이르는데, 이때 대표적인 시인이 왕유(王維)와 맹호연(孟浩然),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고적(高適)과 잠삼(岑參) 등이다.
[주-D025] 진간재(陳簡齋):
북송과 남송 교체기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문신인 진여의(陳與義, 1090~1138)로 간재는 호이고, 자는 거비(去非)이다. 휘종(徽宗) 정화(政和) 3년(1113)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남송 때 고종에게 발탁되어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시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는데 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를 배워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삼종(三宗)’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국가 존망의 위기였던 정강(靖康)의 난 때 스스로 겪었던 비참한 경험 등을 반영하여 두보와 흡사한 비장한 시풍의 시를 지었다.
[주-D026] 동현재(董玄宰):
동기창(董其昌, 1555~1636)으로, 자는 현재, 호는 사백(思白)ㆍ향광거사(香光居士),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명나라 말의 서화가로 글씨와 그림에 모두 뛰어났으며, 시문에도 능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회화를 북종화(北宗畵)와 남종화(南宗畵)로 나누어 분석한 이론이 유명한데, 그의 그림 및 화론(畫論)은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주-D027] 간암(艮庵) 이 문간공(李文簡公):
이희조(李喜朝, 1655~1724)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동보(同甫), 호는 간암ㆍ지촌(芝村), 시호는 문간이다. 부제학 이단상(李端相)의 아들이고 송시열의 문인이다. 1680년(숙종6) 경신환국이 있은 뒤 유일(遺逸)로 출사하여 이조 참판, 대사헌 등을 지냈다. 1721년(경종1) 신임사화로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사대신이 유배당할 때 영암(靈巖)으로 유배되었다가, 철산(鐵山)으로 이배 도중 죽었다.
[주-D028] 부자(夫子)가 …… 것이니:
부자는 공자를 가리키고, 이 내용은 《논어집주》 〈공야장(公冶長)〉에 “군자답다, 이 사람이여!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러한 덕을 취하였겠는가?[君子哉若人! 魯無君子者, 斯焉取斯?]”라고 한 데에 대한 소씨(蘇氏)의 주(註)에 “다른 사람의 선을 칭찬할 적에 반드시 그 부형과 사우에 근본을 두어 말하는 것은 후덕함이 지극한 것이다.[稱人之善, 必本其父兄師友, 厚之至也.]”라고 보인다.
[주-D029] 부자께서 …… 한탄하셨으니:
이 내용은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나는 강한 자를 아직 보지 못하였다.[吾未見剛者.]”라고 한 것을 말하는바, 사람이 욕심이 있으면 강할 수 없고 강하면 욕심에 굽히지 않는데, 공자 당시에 그러한 강한 자가 없음을 한탄한 것이다.
[주-D030] 큰일에 …… 아니겠는가:
이 내용은 《논어》 〈태백(泰伯)〉에 증자(曾子)가 “임금의 어린 아들을 부탁할 만하며 백 리 되는 나라의 국정을 맡길 만하고 큰일에 임하여 절개를 빼앗을 수 없다면 군자다운 사람인가? 군자다운 사람이다.[可以托六尺之孤, 可以寄百里之命, 臨大節而不可奪也, 君子人與? 君子人也.]”라고 한 말을 일부 인용한 것이다.
[주-D031] 공을 …… 하였다:
마부(馬夫)가 되어 말채찍을 잡고 기꺼이 그의 수레라도 끌고 싶을 정도로 상대방의 덕을 흠모한다는 말이다. 《사기(史記)》 권62 〈관안열전 찬(管晏列傳贊)〉에 “가령 안자가 지금 이 세상에 살아 있다면, 내가 비록 그를 위해 말채찍을 잡는다 하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받들어 모시겠다.[假令晏子而在, 余雖爲之執鞭, 所忻慕焉.]”라는 사마천(司馬遷)의 말에서 유래하였다.
[주-D032] 부끄러운 …… 것이다:
백개(伯喈)는 후한(後漢) 때 학자인 채옹(蔡邕, 132~192)의 자이고, 유도(有道)는 후한 때의 명사(名士)인 곽태(郭泰, 128~169)의 호이다. 곽태는 고전에 박통하여 제자가 수천 명이었으며 명성이 경사(京師)에 자자하였는데, 채옹이 그의 비문을 짓고 노식(盧植)에게 말하기를 “내가 비명(碑銘)을 지은 것이 많았는데 모두 그 사람의 덕을 칭송하는 것이 부끄러웠으나, 오직 이 사람의 비문에는 그러한 부끄러움이 없다.”라고 하였는바, 매산도 조형석의 비문을 지으면서 이와 같다는 말이다. 《後漢書 卷58 高士傳》
[주-D033] 움츠리지 …… 않으니:
이 내용은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의 “북궁유가 용을 기른 것은, 피부가 찔려도 움츠리지 않고 눈동자가 찔려도 피하지 않은 것이다.[北宮黝之養勇也, 不膚撓, 不目逃.]”라는 말을 원용하였다.
[주-D034] 강한(江漢)과 …… 지촌(芝村)이요:
‘강한과 갱장(羹墻)’은 스승을 비유한 말이고, ‘화양(華陽)과 지촌’은 조영석의 스승인 송시열과 이희조를 가리킨다. ‘강한’은 공자가 죽은 뒤에 제자들이 유약(有若)의 모습이 공자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공자를 섬기던 예로 그를 섬기려고 하자, 증자(曾子)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공자께서는 강한으로 씻는 것과 같으며, 가을볕으로 쪼이는 것과 같아서 깨끗하여 더할 수 없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滕文公上》 ‘갱장’은 옛날 요(堯) 임금이 붕어한 뒤로 순(舜) 임금이 3년 동안 요 임금을 앙모한 나머지, 앉아 있으면 요 임금이 담장[牆)에서 보이고, 밥을 먹을 때면 요 임금이 국[羹)에서 보였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63 李固列傳》
[주-D035] 고정(考亭):
송(宋)나라 유학자 주자(朱子)로, 복건성(福建省) 건양현(建陽縣)에 있는 고정에 살며 강학하였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주-D036] 노(魯)나라에 …… 취했겠는가:
이 내용은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제자인 자천(子賤)을 평하면서 “군자답구나 이 사람이여!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러한 덕을 취하였겠는가.[君子哉, 若人! 魯無君子者, 斯焉取斯?]”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인데, 여기서는 조영석이 송시열과 이희조에게 배워 훌륭해졌음을 표현한 것이다.
[주-D037] 명당(明堂)에서는 …… 되었으리라:
명당은 옛날 주(周)나라 때 정무(政務)를 보던 곳으로 태산(泰山)에 있었는바, 명당의 동량(棟樑)은 조정을 이끌어갈 큰 재목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태묘(太廟)는 종묘(宗廟)이고, 준(尊)과 이(彝)는 고대의 제사, 조빙(朝聘), 연향(宴享)에 쓰인 중요한 주기(酒器)의 이름인바, ‘태묘의 준이’는 나라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을 빗댄 것이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사)해동경사연구소 | 연석환 (역) | 2020
敦寧府都正贈吏曹參判趙公墓誌銘幷序○戊申
孟子云人有所不爲而後。可以有爲。知所擇而能有所不爲者。歷選近古。其惟觀我齋趙公乎。英廟乙卯。重摹世祖御容。儀曹以公素解畫法。用上命召公。公時在宜寧任所。不膺命曰。如此者。與畫師何異。非其招不往古道也。竟對吏。抵告身之律。戊辰又重摹肅廟御眞。上擧公名。諸臣差公郞官。上怒前事特遞。只令入參監董。公卽出膺命曰。監董而止。何嫌焉。筵臣請屬公執筆。公注目視其人。上笑曰是熟視卿矣。仍問汝能執筆乎。辭敎委曲。公自念今日事。與乙卯無異。矢死力辭曰人臣之義。見危授命則有之。苟可以報効。雖湯火亦無所辭。至若執技事上。聖人著之禮經。俾不與士齒。臣雖微賤。詎可自同衆史。汙辱衣冠乎。且國家置圖畫署。政爲此地。人臣事君。各有其方。臣有死已矣。不敢聞命。辭氣激烈。犯顔無所撓。上色變。又敎曰汝不知予意攸在。左右相繼詆斥。上揮手止之曰。予方得人之歡。盡於大事。其勿復言。命勿令外人知。卒又讁責不已。是日觀公之爲者。莫不愕然相顧。素不悅公者。退語人曰察其所爲。儘識事君之體。大非容易人。上每語及公。輒褒以介潔。注擬間見公名必批下。盖公奏對明剴。動悟宸聽。始加威怒。終獲見諒。豈苟然哉。陶庵李文正公嘗贊歎曰有是哉。某之爲人。豈流俗可及。公始拜祠官。以木根就理金吾。議律勘以决杖而不受贖。諸寢郞或幸於保祿。而公引峻文自當曰國家徵贖。將以長廉遠恥。法意甚美。待士夫不薄。畫衣冠異章服。古人猶恥之。况露肌膚受辱乎。乙卯則衆口噂沓。曲成義理。降志苟免。宜若可爲。而公處困益亨。期於自遂。及在囚而議讞也。胡赦不日將至。人或以姑息愛公。公慨然曰士大夫安用胡赦爲。趣諸堂勘律。自請行遣。若是者豈非所云有所不爲者哉。公諱榮祏字宗甫。咸安人。以新羅元尹鼎爲初祖。入本朝有諱旅。値莊光之世。與梅月諸贒。同志同傳。有諱舜吏曹參判。爲戊午名賢。有諱堪主簿。以學行贈執義。爲栗谷牛溪兩先生所傾服。是爲公高祖也。曾祖諱鎰平市署令。贈吏曹參判。當昬朝金墉之變。抗疏正仁弘罪。祖諱逢源。同知中樞贈吏曹參判。師淸陰金文正公。爲尤齋宋文正公所薦引。惠訓後生。農淵諸賢。皆出其門。考諱楷淳昌郡守。贈吏曹參判。服事尤齋如子姪。妣晉州姜氏。參奉游其考也。公生稟絶倫。心目所到。學無不能。稍長游學無方。未弱冠聲譽已滿口。癸巳進士。戊戌筮仕。爲章陵參奉。遷司饔院奉事,尙瑞院恭陵直長,掌苑署別提,司憲府監察,濟用監司僕寺典牲署主簿,義禁府都事,戶曹佐郞,刑曹正郞,宗廟令,司饔院司䆃寺僉正,廣興倉守。外而爲燕岐,堤川,積城,宜寧,安陰縣監。白川郡守。丙子因仁元聖母壽躋七旬。有推恩之典。陞通政除僉知中樞,敦寧府都正。壬寅伯氏留守公被士禍流竄。公亦棄官塞兌。若將終身。戊申羣兇又擧兵叛。公以此時出宰堤川。不動聲氣。而措置得宜。一境賴安。自乙卯見忤朝廷。十數年放廢艱食。人所難堪。而公則自得也。白川時新令嚴急。列郡爭以漏結自劾。公歎曰如此則吾民重困。留零殘以紓一方之急。公雖以此徒配。旋命宥曰斯可以觀過知仁。筵敎鄭重。論者感服。公享年七十六而卒于辛巳三月二十七日。五月庚子。穿夫人墓合窆于坡州遊山艮坐。因季胤推恩贈公嘉善大夫吏曹參判。兼銜如例。配贈貞夫人延安李氏。縣監贈判書賀朝女。文貞公端相其祖也。閫範咸備。擧三男重希,重睆以孝旌閭俱殀。重瞻同中樞。三女適洪啓能郡守,金熲判書,李潭。重希繼子寬鎭。重睆繼子匡鎭。同樞男桓鎭,匡鎭,常鎭。女參判閔耆顯,金在璿,金觀淳。涑,澤,朴正陽妻。桓鎭出。汲匡鎭出。潝常鎭出。金在璿繼子命鉉監役。涑四男敏植,敦植,敎植,斅植。澤男圭植。女進士兪景煥。公性於孝。蚤喪怙恃。終老含恤。覩物必興慕。語及輒泫臉。廟在異宮。而薦享齋素致敬。情文俱盡。耄及而猶以筋力爲禮。殫誠鳩財。樹顯刻于墓隧。裒輯先世文獻。鉅細畢擧。又收世父零稿。剞劂而行之。損菴集是也。事姊氏及留守公如父母。與伯仲氏比屋團圝。有春津之樂。敎子姪嚴而有法。長子早亡。晩育如孫。而授課振德。不少假借。俾知科擧外有聖賢事業。詔以往哲言行。癸亥兄子忠憲公言事。事將不測。擧家皇皇。而公反嘉與。不以禍福動心。莅邑不求赫譽。專撫摩鋤強猾。旣又修治黌序。用闡儒化。間聚耆耉。朋酒讌樂。乃問年養老之古義也。公餘放情山水。尋幽選勝。因之採訪民隱及儒先遐躅。韻士遺風。庶乎風雅之觀焉。爲治廉約。文以儒術。慈詳惻怛。曲盡人情。以故遺愛在人。訃至南民泣惠。不憚重繭。人各致賻焉。公嘗以生色宦財。爲人四大欲。夙夜兢愼。晩復矢言曰今而後。庶幾免夫。而志氣益衰弱。晩節尤可戒。是爲公律己大略。而一節終始者也。文章書畫。世稱三絶。安可洲重觀文眼空一世。獨引重公若不可及。詩學盛唐。晩喜陳簡齋。有請畫玅者。公曰以畫傳畫。所以非也。卽物寫眞。乃爲活畫也。於詩文深造玅悟。因畫而得者爲多云。筆法逎逸。合衆體成一格。揮灑如飛。颯颯有聲。晩愛董玄宰。才性近也。公貌如孤竹。介如堅石。雅意林泉。不屑榮利。雖勉從祿仕。而玩心高明。居恒警醒。淨掃書室。圖書几案。秩然有序。喜植花卉。用供幽玩。樂意相關。如對賓朋。撰杖移席。酬酢罔倦。以發冲澹之趣。望之如神仙中人。公世篤詩禮。淵源有自。祖禰兩代。傳習華陽。公又從艮庵李文簡公學。以故誦法父師者。淪浹充盈。其所雅言。若飮食之在口。每自傷辱身吏役。輒指心而歎曰。我負師友多矣。專門朱書。傍稽衆說。周復不已。其老而好學如此。夫子論人之善而必本於父兄師友。厚之至也。其公之謂乎。嗚呼。吾夫子以未見剛者爲歎。人有一身而被威怵利疚。夷險百塗。能全其守者鮮矣。如公者。可以臨大節而不可奪。豈不誠君子人哉。直弼夙服公風義。雖爲之執鞭而不辭。公玄孫敏植謁幽堂之誌。懦衷攸激。未敢固讓。竊謂無愧辭。如伯喈之於郭有道焉。銘曰。
巴山炳靈。古多名賢。公又挺生。纘序象先。性剛氣淸。志高行全。爲道簡易。條理微密。存心白直。尺度嚴栗。先立其大。卓乎風節。不撓不逃。萬夫莫奪。何以致之。本之則存。江漢羹墻。華陽芝村。寤寐鑽繹。考亭名論。魯無君子。斯焉取斯。苟展志業。何用不宜。明堂棟樑。太廟尊彝。名實純粹。爲當世師。贊公三絶。淺之爲知。有不可傳。大化冥茫。律律遊岡。儼若斧堂。一氣孔神。騰有晶光。薦章玄隧。矢德于銘。允矣標望。永垂千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