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여朴宗輿 1766~ 1815 瑞興府使朴公墓誌銘 幷序○丙申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24.03.25|조회수16 목록 댓글 0

서흥 부사 박공 묘지명병서병신년〔瑞興府使朴公墓誌銘幷序丙申

 

우리 선사(先師)인 근재(近齋) 박 선생(朴先生)에게 훌륭한 아드님이 있었으니, 휘는 종여(宗輿)이고 자는 원득(元得)으로, 서흥 부사(瑞興府使)를 지냈다. 선생은 도덕이 세상의 유종(儒宗)이 되어 성인(聖人)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서 의리를 지키고 행실을 깨끗이하였다.원자궁(元子宮)의 요속(僚屬)에 임명된 것을 사양하자, 성상(聖上)의 노여움이 크게 진동해서 화를 장차 측량할 수 없게 되니, 온 집안 식구들이 황송하여 울면서 간(諫)하고 출사할 것을 권하였으나, 공은 홀로 삼가 부친을 힘써 도와 끝내 완전한 절개를 이루게 하였다.

공이 출사를 결정할 시기가 되었을 적에 내가 거취를 묻자, 공이 말씀하기를 “우리 집안은 원래 대대로 지키는 의리가 있으니, 출사하지 않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비슷한 종류를 채워서 의리의 지극함에 이른다면비록 종신토록 스스로 벼슬하지 않더라도 후회할 것이 없으나, 반드시 때를 헤아린 뒤에 동해야 합니다.”라고 하였고, 친척들도 모두벼슬하지 않는 것은 의리가 아니라고출사를 권하였다. 공은 억지로 벼슬에 종사하였으나, 근심하고 즐거워하지 않아 항상애통한 마음을 참고 원통한 마음을 머금어 절박한 심정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는 뜻을 보존한 채 생을 마쳤으니, 이와 같은 분을 ‘부친의 뜻을 잘 계승한 자이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은 관향이 반남(潘南)이니, 선대에 문정공(文正公) 휘 상충(尙衷)이 덕업(德業)과 절의(節義)로 고려 말에 이름이 드러났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평도공(平度公) 휘 은(訔)이 공렬(功烈)로 이름이 드러났고, 여러 번 전하여 문강공(文康公) 휘 소(紹)에 이르러 도학(道學)이기묘명현(己卯名賢)의 추앙을 받았는데 호가 야천(冶川) 선생이니, 공은 야천 선생의 9세손이다. 뒤에 휘 태원(泰遠)이 있었으니 황주 목사(黃州牧使)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휘 필리(弼履)는 통덕랑(通德郞)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휘 사석(師錫)은 공주목 판관(公州牧判官)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으니, 바로 공의 고조와 증조, 조고 3대이다. 찬성공이 두 아드님을 두었으니, 장자는 휘가 윤원(胤源)인 근재 선생이고, 다음은충헌공(忠獻公) 휘 준원(準源)이다.

선생의 배위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처사(處士) 시관(時筦)의 따님이니, 문충공(文忠公) 상용(尙容)이 선조이다. 영조 42년 병술년(1766) 11월 21일에 공을 낳으니, 이날이 양지(陽至동지(冬至))였다. 찬성공이()이 와서 회복하는 뜻을 취하여 소자(小字아명(兒名))를 ‘양지’라고 지어 주었다. 이보다 앞서김 유인(金孺人)이 큰 과일 꿈을 꾸고 임신하였으므로 선생이 박괘(剝卦)의 상구(上九) 효사(爻辭)를 취하여 이름을 지어 주었다.

공은 총명과 지혜가 뛰어나서 선생에게 수학할 적에 한 번 보고 들은 것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약관이 되기 전에 이미 육적(六籍육경(六經))을 침잠(沈潛)하여 공부하였고, 박사업(博士業과거공부)을 할 적에 시와 변려문(騈儷文)을 더욱더 잘하였다. 어버이의 명령에 따라서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합격 여부에 담담하였는데,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자 과거공부를 포기하였다.

계해년(1803) 강릉 참봉(康陵參奉)에 제수되니, 충헌공을 통해 은혜를 입은 것이다. 공은 “국법에 따르면 아들과 사위를 먼저하고 아우와 조카를 뒤에 한다.”라고 하여 종제(從弟)에게 양보하였는데, 충헌공이 심하게 책망하고 허락하지 않으니, 공은 전심(專心)으로 봉직하였다. 일찍이 침원(寢園)의 의물(儀物)이 소략함을 한탄스럽게 여겨 여러 번 대종백(大宗伯예조 판서)에게 글을 올려서 의물을 다소나마 구비하게 하였다.

을축년(1805)에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바뀌었는데, 공은관원이 매양 직접 학동(學童)을 구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 일찍이 스스로 요구한 적이 없었다. 병인년(1806)에 한성부 주부(漢城府主簿)로 승진하였는데 송사(訟事)를 공정하고 분명하게 다스렸고, 관절(關節부정한 청탁)이 행해지지 않았다. 정묘년(1807)에 경모궁 영(景慕宮令)으로 옮겼다가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로 바뀌었으며, 홍천 현감(洪川縣監)에 제수되었다가 반년을 채우기 전에 고양 군수(高陽郡守)로 옮겼다.

고양군에는 귀척(貴戚) 집안의 버려진 전장(田莊)이 있었는데, 거주민들이 개간한 지 백여 년이 되었다. 관찰사가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하자, 공은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진다는 이유를 들어 심리(審理)하지 않다가 끝내 인혐(引嫌)하여 체직하였다.

무진년(1808)에 사옹원 첨정(司饔院僉正)에 제수되고, 기사년(1809)에 대흥 군수(大興郡守)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옮겼다. 연안은 바닷가의 고을이어서 상선(商船)이 모여들어 이익을 다투고 송사를 하는 풍속이 있었는데, 공은 인자하고 명철하게 다스렸다.

흉년을 만나자, 공은 마음을 다하여 백성들을 구휼하여 구제하였고 창고를 털어 보조해주어 굶어 죽거나 병든 백성이 없었다. 녹봉으로 받은 쌀에서 남은 것을 관원들이 준례에 따라 높은 값으로 팔려고 하자, 공이 “백성의 장(長)이 된 자가 어찌 이익을 탐한단 말인가.”라고 책망하고는 싼 값에 팔라고 명하여 백성들을 이롭게 하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신미년 겨울에 청천강(淸川江) 이북 지방에 난리가 일어나니,형세가 무섭게 번지는 들불과 같이 급박하였다.

공은월성군(月城君) 이정암(李廷馣)의 고사(故事)를 원용해서 성을 수비하는 계책을 강구하여 방어할 준비가 이미 갖추어졌는데, 곧바로 체직되었다. 계유년(1813)에 서흥 부사(瑞興府使)에 제수되었는데, 고을이 큰 길가에 위치한데다가 해를 거듭하여 기근이 들자, 공은 먹고 자는 것도 잊고서 힘을 다하여 어려움을 구제하였다.종형(從兄)인 참찬공(參贊公)이 편지를 보내어 경계하자, 공은 말하기를 “분우(分憂)의 직분을 다하고자 하니, 감히 몸을 아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환자곡(還上穀)을 거둘 적에 남은 포흠(逋欠)이 있었는데, 도내의 수령들이 모두 상사(上司)에게 일을 완료했다고 보고하였으나, 공은 홀로 사실대로 자수하여 죄를 받기를 청하였다. 누적된 피로로 인하여 병이 생겨 임소(任所)에서 별세하니, 바로 을해년(1815) 2월 18일이었다. 향년이 50세이다. 양주(楊州) 노원면(蘆原面) 봉화현(烽火峴) 축좌(丑坐)의 언덕에 반장(返葬)하였다.

원배(元配)인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규복(奎復)의 따님인데,선생이 자부(慈婦)의 묘지명을 지어서 효도하고 공경한 행실을 드러내었다.이장하여 공의 묘 왼쪽에 부장(祔葬)하였다. 계실(繼室)인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딸은 요절하였고, 아들 운수(雲壽)는 전(前) 부사(府使)이다. 부사의 아들 제근(齊近)은 진사이고, 딸은 어리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청순(淸純)해서 안팎이 통철(洞徹)하였고,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훈도(薰陶)되고 관감(觀感)한 바가 있어서 행실이 전형(典型)에서 위배되지 않았다.

어버이를 섬길 적에는 뜻을 받들어 봉양하여옥을 잡고 가득한 물을 받드는 공경이 있었으며,콩과 물을 먹는 것도 여러 번 걸렀으나 마음이 화락하였다. 선생이 기뻐하지 않는 기색이 있으면 항상 관을 벗고 엎드려 명을 기다렸는데 물러가라고 명하지 않으면 감히 물러가지 않았으며,발을 뻗게 하고 요를 덮어드리는 등의 기거(起居)를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대신 살피게 하지 않았다.

선생이 일찍이혈증(血證)이 있었는데, 공은 반드시측투(廁牏)를 세척하였기 때문에 손이 터지고 손가락이 갈라졌으나, 번번이 소매로 덮어 가려서 선생에게 보이지 않게 하였다. 선생이 병석에서 오랫동안 병환을 앓자, 시탕(侍湯)하면서 애를 태우고 밤낮으로 울부짖었으며, 임종할 적에는 손가락에 피를 내어 입에 넣어 드렸고,지척(指尺)으로 헤아려서 심의(深衣)를 만들어서마음이 흡족하도록 장례의 예를 지극히 하였다. 묏자리를 널리 구하여 별세한 지 다섯 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장례하였으며, 지나치게 슬퍼하여 거의 생명을 잃을 정도로 몸을 훼손하였다.

사자(嗣子)가 천연두에 걸려서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세속에서는 이러한 경우에 궤연(几筵)의궤전(饋奠)거애(擧哀)와 분향(焚香)을 하는 것을 기피하므로 모든 사람들이 우선 정지하라고 권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그대로 행하였다. 또 아들이 부인의 내실(內室)에 있다는 이유로 직접 가서 질병을 살피지 않았는데, 충헌공이 인정에 가깝지 않다고 책망하자 비로소 들어가서 보았다. 그러나 병풍으로 가려 부부유별(夫婦有別)의 윤리를 지켰으니, 예법에 엄격함이 이와 같았다.

공은 병을 무릅쓰고 선생의 언행을 기술하였는데 눈물이 흘러 종이를 적시니, 옆에서 보는 자들이 감동하여 울었다. 마침내 한 권의실기(實記)를 만들어서 선생의 진실한 행적을 영원히 살펴볼 수 있는 자료를 갖추었다.

충헌공을 아버지처럼 섬겨서 비바람이 치는 날에도혼정신성(昏定晨省)의 문안을 거르지 않았으며,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반드시 여쭙고서 행하니, 충헌공이 부자간의 지기(知己)로 허여하였다. 충헌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아들에게는 말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너에게는 숨기는 것이 없다.”라고 하였고, 궁중에서 숙직할 때에 번번이 편지를 보내어 그리워하는 뜻을 말하였다.

충헌공이 별세하자, 공은 슬프고 그리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여 말이 충헌공에 미치면 반드시 오열하였다. 종형제들과 서로 동기간처럼 대우하여, 기질이나 취향이 제각각이었으나 화락하게 지냈다.

서모(庶母)에게 충후(忠厚)하면서도 공경하게 대하였는데, 이러한 도리를 종족과 인척들에게도 베풀어 진실한 뜻이 성대하니, 모두에게 환심을 얻었다. 아들을 의로운 방법으로 가르쳐서 잘못이 있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공은 어릴 때부터 병을 자주 앓아서 건강했던 때가 거의 없었으나,점필(佔畢)을 폐하지 않아문리밀찰(文理密察)하여깊고 은미한 뜻을 궁구하였다.

학문은 고원(高遠)한 것을 힘쓰지 않고 오직 일상생활에서 곳에 따라 검속하여 절대로 방심하지 않았으며, 고심(苦心)이 지나쳐서 모든 일을 바른 도리를 찾을 때까지 사색하고서 행하였다.

“사람의 도리 중에는 예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라고 해서,잡복(雜服)을 강구하여 고금을 참작하고 본말(本末)을 포괄하니, 사람들이 찾아가서 바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공은 몸소 예를 극진히 실천한데다가 또 남을 지도하는 것을 꺼리지 아니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유감이 없이 예를 따르게 하였다. 자신을 받드는 것이 빈한하고 검소해서 왕왕 매우 견디지 못할 때가 있어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으니, 공의 방에 들어간 자들은 곧 맑은 바람이 자리에 가득함을 느꼈다.

공의 가문이 한창 성할 적에 요직에 있는 자들이 공에게 과거 볼 것을 권하기도 하고 공을유작(儒爵)에 의망하기도 하였으나,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명경(明經)과 제술(製述)은 헤아려 의론할 수 있는 바가 아니요, 영달한 자리도 평소 바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 때문에 소신대로 할 수 없을 듯하였으나, 공은 입을 막고 은둔하여 빈객을 접하지 않으며 옥설(玉雪)처럼 결백한 지조를 지켜서 한 점의 티끌도 오염되지 않았다. 항상 자신을 채찍질해서 혹시라도 선조의 규범에 위배될까 두려워하니, 이것이 이른바명예와 절개가 있는 선비는 염치를 알고 겸양의 예를 닦아서 구차한 소득을 이롭게 여기지 않고 시속에 따라 구차히 부화뇌동하지 않아서 오직 의리를 따라 처신한다.’는 것이다.

공은 친구들과의 교분이 두터웠으며 또 내가 일찍부터 선생의 뜰에서 물 뿌리고 청소했다는 이유로 나를 골육(骨肉)과 같이 대우하여 선생의 행장을 짓게 하였는데, 글을 미처 완성하기 전에 공이 갑자기 별세하였다. 내가 탈고를 한 뒤에 나아가 질정할 곳이 없으니, 옛날과 지금의 일을 회상하노라면 애통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운수(雲壽)가 나에게 공의 묘지문을 부탁하니, 내가 공의 덕을 깊이 알기 때문이었다.공이 별세하고 30년이 흐르는 동안 상음(賞音)이 영원히 끊겼으니, 내가 공의 명문을 짓지 않으면 종신토록 거문고를 타지 않는 한()을 어떻게 풀겠는가.마침내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어진 부형이 있음을 즐거워하니/ 樂有賢父
진실로 훌륭한 자제가 되기 어렵네 / 固難爲子
아, 우리 공이여 / 猗歟我公
능히 선친의 아름다움 이어갔네 / 克趾先美
마음에 굳게 지키기로 맹세해서 / 矢心秉執
선친의 뜻과 일을 계승하였네 / 踐述志事
굳게 지킨 것은 무엇이었는가 / 所秉維何
존화양이의 대의였네 / 尊攘大義
벼슬함과 은둔함이 비록 다르나 / 出處雖殊
귀결은 끝내 일치하였네 / 終歸一致
먼저 큰 것을 세웠으니 / 先立其大
넉넉한 아름다움이 있었네 / 有裕厥懿
종신토록 소원한 것은 / 沒齒願言
옳은 의리를 이루는 것이었네 / 一箇是字
사천 필의 말과 만종의 녹은 / 千駟萬鍾
공의 평소 뜻이 아니니 / 非我素志
영화로움을 거두어 / 斂却英華
몸을녹사에 감추었네 / 晦身祿仕
과격하지도 변절하지도 않으니 / 不激不渝
편안히 평소 행하던 것이었네 / 是安素履
어찌 집안의 훌륭한 아들이었을 뿐이리오 / 詎但稱家
진실로 나라의 뛰어난 선비였네 / 允矣國士
노원면 산의 오래된 송백이 / 蘆山老柏
추운 겨울에도 말라 죽지 않네 / 歲寒不死
살아서는 순응하고 죽어서는 편안하니/ 死生順寧
신명의 이치에 질정할 만하네 / 可質神理
비석에 새길 진실한 글을 써서 / 琢辭紀實
묘소에 바치네 / 載納玄隧
아첨하지 않는 진실한 명을 지어 / 我銘不諛
지기에게 보답하노라 / 用報知己

 

[주-D001] 병신년:

1836년(헌종2)으로, 매산의 나이 61세 되던 해이다.

[주-D002] 우리 …… 박 선생(朴先生):

근재(近齋)는 매산의 스승인 박윤원(朴胤源)의 호로, 자는 영숙(永叔),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1792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평생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여 김창협(金昌協)ㆍ이재(李縡)ㆍ김원행(金元行)의 학통을 계승한 적전(嫡傳)이 되었으며, 다시 문하의 매산에게 학통을 전수해 신응조(申應朝)ㆍ임헌회(任憲晦)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성리학의 중요한 학파를 형성하였다.

[주-D003] 원자궁(元子宮)의 …… 것:

무오년(1798, 정조22)에 우의정 이병모(李秉模, 1742~1806)가 박윤원을 원자궁(元子宮) 강학청(講學廳)의 요속(僚屬)에 천거하자, 정조가 윤허하여 임명한 일을 말한다. 《承政院日記 正祖 22年 1月 11日, 17日》 그러나 박윤원은 이병모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청나라 황제를 너무 높인 것을 이유로 출사하지 않았다.

[주-D004] 비슷한 …… 이른다면:

언뜻 비슷해 보이는 종류들을 정밀한 의리에 입각하여 궁극적으로 따져본다는 말로, 맹자가 만장(萬章)에게 “자네가 생각하기에 왕자(王者)가 나온다면 장차 지금의 제후들을 모조리 몰아서 죽이겠는가, 아니면 가르쳐도 고치지 않은 뒤에야 죽이겠는가? 자기의 소유가 아닌 것을 취하는 자를 도둑이라 이르는 것은 종류를 채워서 의리의 지극함에 이른 것이네.[充類至義之盡也.]”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孟子 萬章下》

[주-D005] 벼슬하지 …… 아니라고:

이 내용은 자로(子路)가 세상을 버리고 은거하는 노인에 대해 말한 것으로, “벼슬하지 않는 것은 의리가 아니니, 장유(長幼)의 예절도 없애서는 안 되는데 군신(君臣)의 의리를 어떻게 없앨 수 있겠는가. 자기 일신을 깨끗이 하고자 큰 인륜을 없애는 짓이다.”라고 보인다. 《論語 微子》

[주-D006] 애통한 …… 뜻:

남송(南宋)이 원수인 금(金)나라에 화친을 구걸하여 받아들여지자, 사람들이 지난날의 일은 잊어버리고 기뻐하는 것에 대하여 주자가 비판하여 말하기를 “더 이상 애통한 마음을 참고 원통한 마음을 머금어 절박한 심정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라고 말하여 천하의 대방인 예법을 보전하는 사람이 없다.[無復分毫忍痛含冤迫不得已之言, 以存天下之防者.]”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朱子大全 卷24 與陳侍郞書》

[주-D007] 기묘명현(己卯名賢):

1519년(중종14)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류(士類)를 일컫는다.

[주-D008] 충헌공(忠獻公) 휘 준원(準源):

충헌은 박준원(1739~1807)의 시호로, 순조의 생모인 수빈(綏嬪) 박씨(朴氏, 1770~1822)의 부친이다. 1790년(정조14)에 수빈이 원자를 낳자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고, 순조가 즉위한 뒤에 공조 판서, 금위대장(禁衛大將) 등을 지냈다.

[주-D009] 양(陽)이 …… 뜻:

복괘(復卦)는 양효(陽爻)가 밑에서부터 생겨나 점차 자라나기 시작하는 형상이어서, 전통적으로 이를 길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 뜻을 취한 것이다. 《주역》 〈복괘(復卦)〉 괘사(卦辭)에 “그 도를 반복하여 7일 만에 와서 회복하니,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反復其道, 七日來復, 利有攸往.]”라고 하였는데, 그 단전(彖傳)에 “‘그 도를 반복하여 7일 만에 와서 회복함’은 하늘의 운행이요, ‘가는 바를 둠이 이로움’은 양강(陽剛)이 자라나기 때문이니, 복(復)에서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주-D010] 김 유인(金孺人)이 …… 주었다:

《주역》의 〈박괘(剝卦)〉는 산지박(山地剝)으로 오직 상구(上九)만이 양효(陽爻)인데, 상구의 효사에 “상구는 큰 과일이 먹히지 않음이니, 군자는 수레를 얻고 소인은 집을 허물리라.[上九, 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 하였는바, 김씨 부인이 태몽으로 큰 과일 꿈을 꾸었기 때문에 군자가 수레를 얻는다는 효사의 내용을 취하여 이름을 ‘종여(宗輿)’라고 지어 주었다는 말이다.

[주-D011] 관원이 …… 것:

동몽교관은 학동들을 가르치는 종9품의 말단직인데,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교관이 학동들을 찾아가 가르쳤다는 말로,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예에는 와서 배운다는 말은 들었고 찾아가서 가르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라고 보이며, 《주역》 〈몽괘(蒙卦)〉에는 “몽은 형통하니, 스승인 내가 동몽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동몽이 나에게 구함이다.”라고 보인다.

[주-D012] 신미년 …… 일어나니:

청천강은 평안도 안주(安州)와 가산(嘉山) 사이를 가로질러 서해로 흘러가는 강인바, 신미년(1811) 12월에 청천강 이북 지역에서 시작된 홍경래(洪景來)의 난을 가리킨다.

[주-D013] 월성군(月城君) 이정암(李廷馣):

월성(月城)은 경주(慶州)의 고호로, 월천(月川)이라고도 하는데, 이정암(1541~1600)이 임진왜란 때 연안(延安)에서 공을 세워 사후에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월천군 또는 월성군이라고 칭해졌다. 이정암의 본관은 경주, 자는 중훈(仲薰), 호는 월당(月塘)이다. 1572년(선조5) 연안 부사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어 부민(府民)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황해도로 들어가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의병을 모집, 연안성을 지키던 중에 왜장 흑전장정(黑田長政)과 치열한 싸움 끝에 승리하여 그 공으로 황해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사후 1604년에 연안을 수비한 공으로 선무 공신(宣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월천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주-D014] 종형(從兄)인 참찬공(參贊公):

의정부 좌참찬을 지낸 박종경(朴宗慶, 1765~1817)으로, 박준원(朴準源)의 차남이다. 박종경의 자는 여회(汝會), 호는 돈암(敦巖)이다. 신유년(1801)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부수찬, 이(吏)ㆍ호(戶)ㆍ예(禮)ㆍ형(刑) 4조(曹)의 판서, 좌참찬 등을 지냈다.

[주-D015] 분우(分憂)의 직분:

‘분우’는 백성들의 생활을 걱정하는 임금의 마음을 나눈다는 뜻으로, 지방관의 직임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주-D016] 선생이 …… 드러내었다:

박윤원이 지은 〈자부유인한산이씨묘지명(子婦孺人韓山李氏墓誌銘)〉을 가리킨다. 《近齋集 卷30》

[주-D017] 옥을 …… 있었으며:

효자가 어버이를 봉양할 적에 매우 조심함을 뜻하는바, 《예기》 〈제의(祭義)〉에 “효자는 옥을 잡은 듯이 하며 물건이 가득한 그릇을 받들 듯이 하여 성실하고 전일하여 감당하지 못하는 듯이 하며 장차 잃을 듯이 여긴다.[孝子如執玉, 如奉盈, 洞洞屬屬然, 如弗勝, 如將失之.]”라고 보인다.

[주-D018] 발을 …… 기거(起居):

자식이 정성을 다하여 살펴야 할 부모의 앉을 자리나 누울 자리 등의 기거를 가리키는 말로,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앉을 자리를 펼 적에는 어느 쪽으로 향하실 것인지를 물으며, 누울 자리를 펼 적에는 어느 쪽으로 발을 뻗으실 것인지를 묻는다.”라고 보인다.

[주-D019] 혈증(血證):

혈과 관련되어 생긴 병증을 통틀어 일컫는데, 주로 패혈증(敗血症)을 가리킨다.

[주-D020] 측투(廁牏):

《사기》 권103 〈만석군열전(萬石君列傳)〉에 “시중드는 사람에게 물어 어버이의 속옷과 측투를 취하여 직접 빨고 청소했다.[竊問侍者, 取親中裙厠牏, 身自浣滌.]”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이에 대한 해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진작(晉灼)의 주(注)에는 ‘작은 적삼’이라 하였고, 서광(徐廣)의 주에는 ‘화장실 담장’이라 하였으며, 맹강(孟康)의 주에는 ‘변기통’이라 하였다.

[주-D021] 지척(指尺)으로 …… 만들어서:

‘지척’은 ‘손가락 자’라는 뜻으로, 주자가 말한 심의제도(深衣制度)의 치수에 맞추어 심의를 만들었다는 말이다. 1치(寸)는 가운뎃손가락[中指]의 가운뎃마디[中節]의 길이로, 10치가 1자(尺)가 되는바, 《주자대전》 권68 〈잡저(雜著) 심의제도〉에 “마름질할 때에는 가는 백포를 쓰고, 길이를 잴 때에는 지척을 쓴다.[裁用細白布, 度用指尺.]”라고 하였는데, 그 아래에 “중지의 중절을 치로 삼는다.[中指中節爲寸.]”라고 부연설명을 하였다.

[주-D022] 궤전(饋奠):

장례 동안 매장하기 전까지 제사 형식을 갖추지 않고 음식을 올리는 일을 말한다.

[주-D023] 거애(擧哀):

상사(喪事)가 났을 때, 초혼(招魂)하고 나서 상제(喪制)가 머리를 풀고 슬피 울어 초상난 것을 알리는 의식을 말한다.

[주-D024] 실기(實記):

박종여가 선친 박윤원의 언행을 기록한 《근재실기(近齋實記)》를 말한다. 홍직필이 쓴 〈제근재선생실기후(題近齋先生實記後)〉에 의하면, 당시 초고는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간행되지는 못하였고, 현재는 관계 기록만 각 문집에서 산발적으로 발견될 뿐이다.

[주-D025] 혼정신성(昏定晨省):

어버이를 모실 적에 날이 어두우면 잠자리를 챙겨드리고 새벽에는 문안하는 효성을 이르는바, 원문처럼 줄여서 ‘성정(省定)’ 또는 ‘정성(定省)’이라고도 쓴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의 “자식이 된 자는 어버이에 대해서,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 인사를 올려야 한다.[昏定而晨省]”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주-D026] 점필(佔畢):

스승이 경의(經義)를 풀어 가르치지 않고 단지 책만을 읊는 것을 가리켰는데, 뒤에 독서 또는 송독(誦讀)을 두루 가리키게 되었다. 《예기》 〈학기(學記)〉에 “지금 가르치는 자들은 일상에서 보는 간독(簡牘)만을 읊을 뿐이다.[今之教者, 呻其佔畢.]”라고 하였다.

[주-D027] 문리밀찰(文理密察)하여:

《중용장구》 제31장에 보이는데, 주자의 《집주》에 “문(文)은 문장(文章)이고, 이(理)는 조리(條理)이고, 밀(密)은 상세(詳細)함이고, 찰(察)은 명변(明辨)함이다.”라고 풀이하였다.

[주-D028] 잡복(雜服):

고대의 예법에 규정된 여러 가지 복식 제도(服飾制度)로, 《예기》 〈학기〉에 “잡복을 배우지 않으면 능히 예에 편안하지 못하다.[不學雜服, 不能安禮.]”라고 보이는바, 정현(鄭玄)의 주에 “잡복은 면복(冕服)과 피변(皮弁) 따위를 이른다.”라고 풀이하였다.

[주-D029] 유작(儒爵):

조선 시대 후기에 유학에 뛰어난 재야 학자인 산림(山林)에게 준 벼슬로, 이것을 받은 사람은 관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면서 군주의 덕을 보도(補導)하고 국정을 자문해 주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 고종 22년 8월 26일 기사에 공조 판서 이응신(李應辰)이 올린 상소에 “산림(山林)에 유작(儒爵)을 둔 취지는 장차 임금의 덕을 보도하고 다스리는 방도를 자문하게 하려는 것이고, 그저 한가로이 동산에서 양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山林之有儒爵, 將以輔導君德, 咨詢治道, 非徒養閒丘園而已.]”라고 보인다. 산림은 성균관의 좨주(祭酒)를 지낸 자를 이르는바, ‘좨주’란 옛날에 회동(會同)하여 향연(饗宴)을 베풀 적에 존장(尊長)이 먼저 술을 따라 땅에 부어 신(神)에게 제사한 데서 나온 말이다. 매산 역시 이 관직을 역임하여 ‘홍산림’, 또는 ‘홍좨주’라고 불렸다.

[주-D030] 명예와 …… 처신한다:

이 내용은 송나라 구양수(歐陽脩)의 〈논포증제삼사사상서(論包拯除三司使上書)〉에 “대저 이른바 명예와 절개가 있는 선비란 염치를 알고 겸양의 예를 닦아서, 구차한 소득을 이롭게 여기지 않고 시속에 따라 구차히 부화뇌동하지 않아서 오직 의리를 따라 처신합니다. 그리고 시퍼런 칼날도 피하지 않는 용기가 있고 나뭇가지를 꺾는 것처럼 쉬운 아부를 하지 않는 지조가 있어서 오직 의로운 절개를 지키니, 조정에서 벼슬하면 진퇴와 거동이 모두 천하의 본보기가 됩니다.”라고 보인다. 《唐宋八大家文鈔 巻30 廬陵文鈔》

[주-D031] 공이 …… 풀겠는가:

‘상음(賞音)’은 지음(知音)과 같은 말로, 박종여가 별세한 뒤 30년 동안을 매산이 자신을 알아준 벗이 영원히 끊어진 채로 지냈는바, 춘추 시대 거문고의 명인인 백아(伯牙)와 청음(聽音)에 조예가 깊었던 그의 친구 종자기(鍾子期)의 지음 고사를 원용한 말이다. 《列子 湯問》 이 묘지명의 제목 주석에 지은 시기를 병신년(1836)이라고 적어놓았으니, 박종여가 별세한 해(1815)로부터 따지면 21년이 지났으므로 여기에서 20년이 지났다고 하거나 앞의 창작 시기를 수정해야 할 것으로 보이는데, 정보가 자세하지 않다.

[주-D032] 어진 …… 즐거워하니:

이 내용은 《맹자》 〈이루 하(離婁下)〉의 “정도에 맞는 자가 맞지 않는 자를 길러 주며, 재주 있는 자가 재주 없는 자를 길러 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훌륭한 부형이 있는 것을 즐거워한다.”라는 말을 원용한 것으로, 박종여의 집안에 어진 아버지인 근재 박윤원과 어진 종형인 박종경이 있었음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주-D033] 존화양이(尊華攘夷):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배격하는 《춘추》의 의리인데, 여기서는 명나라를 높이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존명배청(尊明排淸)의 의리를 가리킨다.

[주-D034] 녹사(祿仕):

녹봉을 위한 벼슬이라는 뜻으로,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벼슬함은 가난 때문이 아니지만, 때로는 가난 때문에 벼슬하는 경우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주자의 《집주(集註)》에 “벼슬함은 본디 도를 행하기 위해서이나, 또한 집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었거나 혹은 도가 때와 맞지 않아서 단지 녹봉을 받기 위해 벼슬하는 경우가 있다.[仕本爲行道, 而亦有家貧親老, 或道與時違, 而但爲祿仕者.]”라고 보인다.

[주-D035] 살아서는 …… 편안하니:

이 내용은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살아서는 하늘의 이치에 순응하고 죽어서는 편안하다.[存吾順事, 沒吾寧也.]”라는 말을 원용한 것이다.

[주-D036] 묘소:

원문의 ‘현수(玄隧)’는 원래 무덤으로 통하는 어두운 길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무덤을 가리킨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사)해동경사연구소 | 연석환 (역) | 2020

 

瑞興府使朴公墓誌銘幷序○丙申

吾先師近齋朴先生。有肖子曰瑞興府使諱宗輿字元得。先生道德爲世儒宗。以尊聖人攘夷狄爲己任。秉義自靖。辭宮僚之命。天怒大震。禍且不測。擧家惶懔。泣諫勉出。而公獨仰贊彌力。終成其完節焉。逮公筮仕。不佞叩其去就。公曰吾家自有世守底義理。欲無出。不佞曰充類至義。雖沒身自廢而無悔。必量而後動。親懿皆勸以不仕無義。公黽俛從宦。而悒悒不樂。常存忍痛含冤迫不得已之意。以畢其生。若是者可不謂善繼人之志者耶。公潘南人。先世文正公諱尙衷。以德業節義顯麗季。入本朝平度公諱訔。以功烈著。累傳至文康公諱紹。道學爲己卯名賢所推重。號冶川先生。公其九世孫也。後有諱泰遠。黃州牧使贈吏曹參判。諱弼履通德郞贈吏曹判書。諱師錫公州牧判官贈左贊成。卽公高曾祖三世也。贊成公有二子。長諱胤源。卽近齋先生。次忠獻公諱準源也。先生配安東金氏。處士時筦之女。文忠公尙容其先祖也。以英宗四十二年丙戌十一月二十一日生公。是日陽至也。贊成公取來復之意錫小字。先是金孺人夢碩果有娠。故先生取剝之上九而命名焉。聰慧絶倫。受學于先生。閱耳目者不復忘。未勝冠已沉潛六籍。治博士業。尤工於詩儷。以親命應擧。而於得失澹如也。及永感而遂廢。癸亥拜康陵參奉。因忠獻公推恩也。公以國法先子婿而後弟姪。讓于從弟。忠獻公切責不許。公壹心營職。嘗歎寢園儀物疎略。累牒宗伯得稍備。乙丑換童蒙敎官。官每自求童蒙。公恥之未嘗自求。丙寅陞漢城府主簿。莅訟公明。關節不行。丁卯移景慕宮令。換儀賓府都事。除洪川縣監。未半年換高陽郡守。郡有貴戚家廢庄。爲居民墾闢者餘百年。道伯要還本主。公以厲民不聽理。竟引嫌决遞。戊辰拜司饔院僉正。己巳除大興郡守。尋換延安府使。邑濱海。商舶湊集。俗趨利健訟。公莅之以仁明。値歲惡。殫心賑濟。蠲廩以補之。民無捐瘠。俸米餘者吏欲按例售高價。公責曰爲民長者。詎可賭利。命從輕而利民。民大悅。辛未冬。淸北亂作。勢急燎原。公援李月城廷馣故事。講究守城之策。指揮已定旋遞。癸酉除瑞興府使。邑處孔路。且經荐饑。公竭力矯捄。至忘寢食。從兄參贊公移書戒之。公曰欲盡分憂。敢恤我躬。收糶餘逋。一路咸報竣上司。而公獨首實請勘。因積瘁成疾。卒于任所。卽乙亥二月十八日也。享年五十。返葬于楊州蘆原面烽火峴坐丑原。元配韓山李氏奎復女。先生述墓銘。用著孝敬。移祔于墓左。繼室慶州金氏。擧一男一女。女殀。男雲壽前府使。府使男齊近進士。女幼。公天資淸粹。表裏洞徹。自幼薰襲觀感。不離典刑。事親以志爲養。有執玉奉盈之敬。菽水屢空。而樂意融融。先生有不豫色。輒免冠而伏。不命退則不敢退。趾袵起居。未或人代。先生嘗有血證。公必浣滌廁牏。手指皴裂。輒覆之以袖。不俾先生見焉。先生積淹床笫。侍湯焦熏。號泣晝夜。及易簀割指進血。量指尺製深衣。恔心於終事。博求宅兆。五月始克襄。哀毁幾滅性。嗣子患痘疹瀕危。俗忌饋奠擧哀焚香。咸勸以姑停。而行之不疑。且以處內室。不親視疾。忠獻公責以不近人情。始入診。遮屛幛存內外之限。其嚴於禮防如此。力疾述先生言行。流涕沾紙。傍觀感泣。遂成一部實記。備永世考信焉。事忠獻公如父。省定不避風雨。事無大小。必稟而後行。忠獻公許爲父子間知己。嘗云不言於吾兒者。於汝則無隱。在禁直輒移書以道思想之意。及歿公悲慕不已。語及必嗚咽。與從父兄弟。相須如同氣。氣味不齊而怡怡如也。待庶母篤厚而敬。施及宗族姻戚。眞意藹蔚。咸得其歡心。敎子以義方。有過不少貸。公自幼善病。殆欠少康。而不廢佔畢。文理密察。極深硏幾。其學不騖高遠。惟於日用常行。隨處繩檢。罔或弛放。用心過苦。臨事思繹。得正而後已。謂人道所重。莫過於禮。講究雜服。酌古今該本末。人多就正。公旣自盡于身。又不憚指導。俾各率禮無憾焉。自奉寒儉。往往有大不堪者而無難色。入其室者。便覺淸風滿座。方公門闌之盛也。當路者或勸公决科。或擬公儒爵。公笑曰經術非所擬議。榮顯亦非素願。當是時左右擸掇。若不能自在。而塞兌遵晦。不通賓客。玉雪自持。不染點塵。常自策礪。或恐有違於先矩。是所云名節之士。知廉恥修禮讓。不利於苟得。不牽於苟隨。惟義之所處者歟。公篤於故舊。而以不佞夙供灑掃於先庭。視遇如骨肉。俾述先生狀德之文。文未及就。而公遽歿矣。及已屬藁。靡所就質。俯仰今昔。不勝愴慟。雲壽謁不佞以幽堂之誌。以知德者深也。哭公三十年。賞音永絶。靡我銘公。何以舒終身不鼓琴之恨乎。遂爲之銘曰。
樂有賢父。固難爲子。猗歟我公。克趾先美。矢心秉執。踐述志事。所秉維何。尊攘大義。出處雖殊。終歸一致。先立其大。有裕厥懿。沒齒願言。一箇是字。千駟萬鍾。非我素志。斂却英華。晦身祿仕。不激不渝。是安素履。詎但稱家。允矣國士。蘆山老柏。歲寒不死。死生順寧。可質神理。琢辭紀實。載納玄隧。我銘不諛。用報知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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