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조 정랑 김공 묘지명병서○을사년〔禮曹正郞金公墓誌銘幷序○乙巳〕
명릉(明陵숙종)이 즉위한 초년에대행대왕(大行大王)이 빈소에 있다 하여 대강(對講)을 정지하니,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간(諫)하였으나 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곽세건(郭世楗)이라는 자가 여러 소인들의 사주를 받아서 우재(尤齋) 송 문정공(宋文正公송시열)을 모함하였는데, 말이 지극히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자, 대신(臺臣)이 그를 먼 변방으로 귀양 보낼 것을 청했으나, 상은 이 또한 따르지 않았다.
예조 정랑(禮曹正郞) 김광진(金光瑨) 공이 크게 한탄하기를 “두 가지는 금일에 막대한 우환이 된다. 이는 국가의 흥망성쇠에 관계되니, 내가 어찌 벼슬이 미천하다 하여 말하지 않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항장(抗章)을 올려서 극론(極論)하였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금의 덕이 성취됨은 반드시 학문에 의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옛 성왕(聖王)은 반드시 학문을 힘쓰는 것을 급선무로 여겨서, 비록 춘추가 한창 젊으시고 기운이 굳게 정해진 뒤라도 부지런히 힘써서 학문을 미치지 못할 듯이 하였습니다. 더구나 성상께서는 지금 춘추가 어리시니, 더더욱 어찌 단 하루인들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습니까. 명종(明宗)과 선조(宣祖)가 승하하셨을 때에는 모두 졸곡(卒哭) 전에 유신(儒臣)들의 건의로 인하여 개강(開講)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열성(列聖)께서훌륭한 법칙을 만들어 후손을 편안하게 하신 뜻이니, 어찌 전하께서 마땅히 본받아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성인(聖人)의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자질이 여러 왕보다 훨씬 뛰어나시지만, 춘추가 아직 어려서 견문이 넓지 못하시고 일상생활 속에만기(萬幾)가 모여드니, 만일 학문하는 공력으로 지식을 열어 밝히고 성정(性情)을 함양하지 않는다면, 어찌 왕위를 본원(本原마음)을 바르고 깨끗하게 해서 널리 응대하고 곡진히 감당하는 자리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또 전하께서 내년이면 이미지학(志學)의 나이가 되시는데, 학문하는 방도는 진전하지 않으면 퇴보하게 마련입니다. 여염(閭閻)의 선비라도 만일 제때에 학문을 힘쓰지 않으면 때를 놓칠까 염려되는데, 하물며 전하께서는 온몸으로 종묘사직과 백성들을 돌보셔야 하는 중한 책임을 맡으셨으니, 오늘날 배우고 배우지 않음은 참으로 국가의 안위(安危)의 기틀에 관계됩니다. 그런데 어찌 작은 예절을 굳게 지키면서 변통할 의리를 생각하지 않아,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광음(光陰)을 그대로 앉아서 흘려보낸단 말입니까.
그리고 판부사(判府事) 송시열은 학문이 연원(淵源)이 있고 일찍 중한 명망을 지니고 있어서 효종께 특별히 발탁해주신 은혜를 입었고세 임금께 지우(知遇)의 은혜를 입어백발로 산림에서 한 마음으로 나라를 근심하고 있으니, 금일 전하께서 의지하고 중하게 여길 자와 사림(士林)이 높이고 우러를 자 중에 송시열과 같은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곽세건이 마침내 감히 선왕의 유의(遺意)라고 칭탁하여 ‘차례대로 법에 의거하여 처벌해야 한다’는 말을 창도(倡道)해서 송시열을 불측(不測)한 지경에 빠뜨리고자 합니다. 아! 그의 의도가 어찌 다만 송시열 한 명을 겨냥해서 말한 것이겠습니까. 반드시 충현(忠賢)들을 일망타진하고 사림(士林)을 어육(魚肉)으로 만들어서 전하의 조정을 공허하게 만든 뒤에야 그만두고자 하는 것이니, 계책이 참혹하다 할 만합니다.
전하께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시는 도리에 있어서는, 추방하고 유배 보내는 법도 또한말감(末減)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마침내 과거를 정지하는 작은 벌로 견책(譴責)을 간략히 보이셨고, 양사(兩司)에서 쟁집하였는데도 윤음을 아직도 내리지 않으시니, 신은 전하께서 어진 자와 간사한 자를 변별하는 방도에 있어서 미진함이 있는 듯하다고 여깁니다. 어진 자와 간사한 자는 흑색과 백색을 뒤섞을 수 없고 향기로운 풀과 악취 나는 풀을 뒤섞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분명히 구분됩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성왕(聖王)이 이것을 살필 적에는 행여 정밀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변별할 적에는 행여 일찍 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그의 어짊을 알면 임무를 맡기고서 의심하지 않았고 간사함을 알면 배척하고서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군자로 하여금 믿는 바가 있어서 충성을 다할 수 있게 하고, 소인으로 하여금 두려워하는 바가 있어서 감히 간사한 계책을 부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번이라도 분별하지 못하면 반드시 옳고 그름이 뒤섞이고 등용하고 내치는 것이 마땅함을 잃어 점점 사림을 해치고 국가를 혼란하게 만들면서도 끝내 깨닫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곽세건을 통렬히 배척해서 추방하고 유배 보내는 법을 드러내 보여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폐하께서 악을 미워하는 엄격함과 간사한 사람을 분별하는 밝은 지혜가 있음을 알게 한다면, 간사한 자들이 저절로 숨을 죽이고 조정이 저절로 안정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은 괴이한 마귀의 무리가 반드시 장차 기회를 정탐하여 자취를 이어 일어나서 조정이 안정될 날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상소문이 들어가자 엄한 비답(批答)을 내려서 공을 파직시키니,공은 전야(田野)로 물러나서 원망하고 후회하는 기색이 없었다. 우암이 조정에 나가게 되자 공 또한 버려졌다가 다시 기용되어 거듭 성균관의 직책에 제수되어,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남과 뜻을 굽히고 편 것이 우암과 똑같았으니, 이것이 이른바‘천리마의 꼬리에 붙어서 행실이 더욱 드러났다.’는 것이다.
공은 자가 진옥(晉玉)이니, 계통이 광주(光州)에서 나왔다. 휘 자현(自賢)은 비순위(備巡衛)의 낭장(郞將)이었고, 아들 구경(九冏)은 문과에 급제하고 주부(主簿)로 있다가 사건에 연좌되어 길주(吉州)로 유배 갔는데, 그대로 그곳에 거주하였다. 여러 번 전하여 휘 국상(國祥)과 효행으로 천거되어 부령부 훈도(富寧府訓導)에 제수된 휘 경헌(景憲)과 휘 호겸(好謙)에 이르렀는데, 세 분은 공의 3대 선조이다. 선비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언수(彦壽)가 선고이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하루에 수천 자를 외웠으며, 장성해서는 더욱더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육경(六經)을 널리 통달하였다. 효종 갑오년(1654)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고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니, 예조 정랑과 호조 좌랑, 성균관의 직강(直講)과 사예(司藝), 겸 춘추기사관(春秋記事官)ㆍ편수관(編修官), 수성 찰방(輸城察訪), 홍원 현감(洪原縣監), 삼화 현령(三和縣令)이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관청에서 정무를 볼 적에 평온함과 검소함으로써 자신을 단속하여 부임한 곳마다 민심을 얻어서 백성들이 부모와 같이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홍원에 부임하였을 적에 현종이 암행 어사의 장계로 인하여 칭찬하고 유시(諭示)하기를 “그대는 본 도에서 성장하여 그 지방의 물정을 잘 아는구나. 아문(衙門)의 권속(眷屬)이 매우 적고 자기 몸을 돌보는 것도 또한 간소하게 해서 조심하여 봉직(奉職)하였고, 자세하고 분명하게 정사(政事)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데 마음을 쏟았구나. 그래서 대동(大同)의 부역을 보조하고 추위에 떠는 군인들에게 옷을 입혀주어서 백성들이 다 칭송하고 기리니, 참으로 가상하다.” 하고는 이어서 표리(表裏) 1습(襲)을 하사하니, 특별한 예우였다.
공은 평소 조중봉(趙重峯) 선생을 흠모해서 중봉의 복사(鵩舍)의 유적을 찾았는데홍원의 장보(章甫유생(儒生))들이 중봉 선생을 위하여 사당을 세우려 하였다. 공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나의 뜻이다.” 하고는 창고를 털어 부역에 제공하자, 이웃 고을의 원이 이 말을 듣고 다투어 권면하여 공을 도와서 사당을 준공하였으니, 여기에서 또한 공이 덕을 숭상하고 어진 이를 높이는 정성을 볼 수 있다.
삼화 현령을 사직하게 되자, 다시는 서울에 가지 않고 임천(林泉)에서 한가로이 10여 년을 노닐다가 별세하니, 바로 무인년(1698) 3월 12일이다. 출생한 을축년(1625)으로부터 향년 74세가 된다. 처음 임명역(臨溟驛) 동산(東山)에 장례하였다가 시전리(時典里) 오좌(午坐)로 이장하니, 선영을 따른 것이다.
배위인 경주 최씨(慶州崔氏)는 통덕랑(通德郞) 길남(吉男)의 따님인데, 공의 묘에 부장하였다. 7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 만영(萬英)은 통덕랑이고, 만웅(萬雄)은 만호(萬戶)이고, 만걸(萬杰)은 승의랑(承議郞)이며, 만최(萬最)는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이고, 만종(萬宗), 만식(萬式), 만태(萬泰)는 모두 통덕랑인데, 만태는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딸은 현윤장(玄允章)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먼 지방에서 분기(奮起)하여 일찍 스스로 수립하였는바, 비록 낮은 관료에 있었으나 만일 임금의 덕을 도울 수 있었다면 반드시 기피함이 없이 항거하는 말을 하여 지위를 벗어남을 꺼리지 않았을 것이니,‘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가서는 임금의 허물을 보완할 것을 생각한다.’는 경지에 가까운 분이다. 도(道)를 호위하고 간사함을 물리치다가 배척을 당하고도 후회하지 않은 것으로 말하면, 또한 식견이 투철하고 지킴이 확고했음을 증험할 수 있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호기로워 명절(名節)을 좋아하였다. 우재(尤齋송시열)를 높이고 숭상하는 것 또한 고심(苦心)에서 나왔으니, 어찌 뜻과 기운이 서로 감동하여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공의 6대손 기형(璣衡)이백사(百舍)의 먼 길을 발이 부르트도록 달려와서묘지명을 여러 번 청하였는데, 기형은 학문을 좋아해서 능히 선대의 아름다움을 이어왔다. 나는 공의 풍렬(風烈)에 감복하고 또 기형의 지극한 정성을 아껴서 마침내 병을 무릅쓰고 명문을 짓는다.
대궐에 한 자 되는 상소를 올리니 / 尺疏籲閽
기절이 빼어났네 / 踔乎氣節
왕을 바로잡고 현자를 붙들어 주니 / 格王扶贒
맹세한 마음이 매우 간절하였네 / 矢心苦切
처음의 생각을 이루어 / 克遂初服
잠홀을 영원히 사절하였네 / 永謝簪笏
몸과 이름이 모두 완전하니 / 身名俱完
공과 비견할 사람 드무네 / 尠與倫匹
후한 덕으로 후손에게 많은 복을 남겼으니 / 德厚遺贏
하늘이 길함을 도운 것이네 / 天祐其吉
내가 명문을 무덤에 바치니 / 納銘玄隧
백세토록 질정할 수 있네 / 百世可質
[주-D001] 을사년:
1845년(헌종11)으로, 매산의 나이 70세 되던 해이다.
[주-D002] 대행대왕(大行大王):
임금이 죽은 뒤 시호(諡號)를 아직 올리기 이전의 칭호로, 숙종 즉위년인 1674년에 승하한 현종(顯宗)을 가리킨다.
[주-D003] 곽세건(郭世楗)이라는 …… 않았다:
곽세건(1618~1686)은 허목(許穆)의 문인으로, 1674년 현종이 승하하자 숙종이 송시열에게 현종의 지문(誌文)을 짓도록 명하였는데, 곽세건이 상소하여, 송시열이 두 차례의 예송(禮訟)에서 효종을 서자(庶子)로 간주했던 점을 논척하면서 지문을 짓도록 한 명을 거둘 것을 청하였다. 이에 당시 지평으로 있던 이수언(李秀彦)이 상소하여 남을 무함한 곽세건의 죄를 다스려 북쪽 변방으로 내칠 것과 송시열에게 밝게 유시하여 혐의를 풀어줄 것을 청하였으나, 숙종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일을 말한다. 《肅宗實錄 卽位年 9月 25日, 10月 5日》
[주-D004] 훌륭한 …… 뜻:
이 내용은 《시경》 〈문왕유성(文王有聲)〉의 “풍수 옆에도 기 곡식이 자라는데, 무왕이 어찌 이곳에 천도(遷都)하는 것과 같은 큰일을 하지 않으리오. 그의 자손들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고, 그의 아들에게 편안함과 도움을 주려 함이니, 무왕은 참으로 임금답도다.[豐水有芑, 武王豈不仕? 詒厥孫謀, 以燕翼子, 武王烝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5] 만기(萬幾):
왕이 매일 처리해야 하는 번다한 정무를 형용한 말이다. 《서경》 〈우서(虞書) 고요모(皐陶謨)〉에 “안일함과 욕심으로 제후들을 가르치지 말아서 삼가고 두려워하소서. 하루이틀 사이에도 기미가 만 가지나 됩니다.[一日二日萬幾.]”라고 보인다.
[주-D006] 지학(志學)의 나이:
학문에 뜻하는 나이라는 뜻으로 15세를 가리킨다. 공자가 일찍이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하였다.” 하였는데, 이는 《대학장구》의 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의 도(道)에 뜻한 것이라 한다. 《論語 爲政》
[주-D007] 세 …… 입어:
송시열이 효종 때 발탁되어 현종, 숙종 때까지 유종(儒宗)으로 받들어졌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주-D008] 말감(末減):
죄인에게 형법을 적용함에 있어 법률이 허용하는 한 가장 가벼운 규정을 적용하여 처벌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9] 상소문이 …… 파직시키니:
김광진이 올린 위의 상소는 《승정원일기》 숙종 즉위년 10월 6일의 기사에 보이고, 숙종이 상소에 대해 엄한 비답을 내려 김광진을 파직시킨 것은 《숙종실록》 즉위년 10월 6일과 7일의 기사에 보인다.
[주-D010] 천리마의 …… 드러났다:
파리가 천리마의 꼬리에 붙으면 천 리를 갈 수 있다는 말로, 전하여 학덕(學德)이 높은 이와 종유(從遊)함으로써 명성을 얻게 되는 뜻으로 쓰인다. 《사기》 권61 〈백이열전(伯夷列傳)〉에 “안연(顔淵)이 비록 학문이 독실하나 천리마 꼬리에 붙어 행실이 더욱 드러났다.”라고 보이는데, 그 주에 “파리가 천리마 꼬리에 붙어 천 리를 가는 것으로, 안회(顔回)가 공자로 인하여 이름이 드러난 것을 비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안연은 안회의 자인 자연(子淵)을 약칭한 것이다.
[주-D011] 공은 …… 찾았는데:
조중봉(趙重峯)은 조헌(趙憲)으로, 중봉은 그의 호이고, 복사(鵩舍)는 ‘복사(服舍)’라고도 하는바 귀양살이 하는 집을 말하는데, 조헌이 함경도 길주(吉州)에 정배되었으므로 길주에서 귀양살이 하던 유적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조헌은 상소를 올려 시폐(時弊)를 극론하다가 1589년(선조22)에 길주 영동역(嶺東驛)에 정배되었으나, 이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宋子大全 卷207 重峯趙先生行狀》 《重峯集 卷13 北謫日記》 한(漢)나라 때 가의(賈誼)가 좌천되어 장사왕(長沙王)의 스승으로 있을 적에 올빼미가 날아와서 앉았는데, 초(楚) 지방 사람들은 올빼미를 ‘복(服), 복(鵩)’이라 하였다. 이에 가의는 저습(低濕)한 장사에서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조짐임을 알고는 슬퍼하면서 〈복조부(鵩鳥賦)〉를 지었는데, 이후로 복사는 좌천되었거나 유배 갔을 때 사는 집을 이르게 되었다. 《史記 卷84 屈原賈生列傳》
[주-D012] 나아가서는 …… 생각한다:
이 내용은 《효경(孝經)》 〈사군(事君)〉에 “군자가 임금을 섬길 적에,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나서는 허물을 보완할 것을 생각하여, 임금의 좋은 점을 받들어 순종하고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라고 보인다.
[주-D013] 백사(百舍)의 …… 달려와서:
백사는 3,000리로, 매우 먼 길을 고생고생하며 찾아가는 것을 말한다. 《장자》 〈천도(天道)〉에 “사성기(士成綺)가 노자(老子)를 찾아뵙고는 말하기를 ‘백사를 발이 부르트면서도 찾아뵙는 것을 중지하지 않았습니다.[百舍重趼而不敢息.]’ 하였다.”라고 보인다.
[주-D014] 잠홀(簪笏):
관직자가 사용하는 관(冠)을 고정시키는 비녀와 수판(手板)으로 흔히 관직이나 관원을 비유하는데, 여기서는 높은 벼슬을 말한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사)해동경사연구소 | 연석환 (역) | 2020
禮曹正郞金公墓誌銘幷序○乙巳
明陵嗣服之初。以大行在殯停講對。諸臣迭諫而靳許。時有郭世楗者。受羣壬指嗾。誣詆尤齋宋文正公。語極凶悖。臺臣請屛裔。而亦不從。禮曹正郞金公光瑨喟然嘆曰。二者爲今日莫大之憂。是係國家興替。曷可以官微而不言。遂抗章極論曰。君德成就。必資於學。故古聖王必以懋學爲急務。雖春秋鼎盛。志氣堅定之後。尙且孜孜。學如不及。况在冲年。尤豈容一日少緩。明宗宣祖皆於卒哭前。因儒臣建白。許令開講。玆豈非列聖貽謨燕翼之意。而殿下之所當法者乎。殿下聖質生知。高出百王。春秋尙幼。見聞未廣。而日用之間。萬幾沓臻。苟非學問之功。開明知識。涵養性情。則其何能端本淸源。以爲泛應曲當之地乎。且殿下明年則已及志學之年。而爲學之道。不進則退。雖在閭閻士子。苟不及強勉。則猶懼其後時。况殿下以一身任宗社生民之重。今日之學與不學。實係國家安危之幾。何可膠守末節。不思通誼。坐失難得之光陰乎。判府事臣宋時烈學有淵源。早負重名。蒙孝廟拔擢之私。被三朝知遇之恩。白首林下。一心憂國。今日殿下之所倚重。士林之所宗仰者。孰有如時烈者哉。郭世楗乃敢托以先王之遺意。倡爲次第按法之說。欲陷之於不測之地。噫嘻。此其意豈但爲一時烈而發也。必欲網打忠贒。魚肉士林。空殿下之朝廷而後已。其爲計可謂慘矣。在殿下明示好惡之道。放流之典。亦云末減。而乃以停擧薄罰。略示譴責。兩司爭執。兪音尙閟。臣恐殿下於辨別賢邪之道。有未盡也。夫贒邪之分。如黑白之不可相混。薰蕕之不可相雜。故古聖王察之惟恐其不精。辨之惟恐其不早。知其賢也則任之勿貳。知其邪也則斥之勿疑。使君子有所恃而得以盡其忠。小人有所畏而不敢逞其詐。一有不辨。則必至於是非混淆。用舍乖宜。馴致戕害士林。敗亂國家。而終莫之悟者有之。可不懼哉。今若痛斥世楗。顯加放流之典。使一國之人。咸知殿下有疾惡之嚴辨邪之明。則奸邪自當屛息。朝著自當寧靜。不然臣恐怪鬼之輩。必將偵伺希望。接跡而起。而朝著無時可靖矣。䟽入下嚴批罷職。公屛田野。無怨悔色。及尤齋造朝。公亦起自幽廢。重拜泮職。進退屈伸。與尤翁同。是所云附驥尾而行益顯者歟。公字晉玉。系出光州。有諱自賢。備廵衛郞將。子九冏文科主簿。坐事徙吉州。仍居焉。累傳至諱國祥,諱景憲。以孝薦授富寧府訓導。諱好謙。卽公三世也。妣陽川許氏。彦壽其考也。公生稟聰慧。日誦數千言。旣長彌自刻勵。博通六籍。孝廟甲午。中明經科。歷官內外。禮曹正郞,戶曹佐郞,成均館直講司藝,兼春秋記事官編修官。輸城察訪,洪原縣監,三和縣令。餘不盡記。公處官恬約自守。所至得民心。愛戴如父母。莅洪原。顯廟仍繡啓褒諭曰爾生長本道。頗解物情。衙眷甚少。自奉亦簡。小心奉職。爲政詳明。志在愛民。補大同之役。衣軍人之寒者。民皆稱譽。誠爲可嘉。仍賜表裏一襲。異數也。雅慕趙重峯先生。尋其鵩舍遺躅。洪原章甫爲重峯建祠。公喜曰此吾志也。捐廩供役。隣倅聞風競勸。助竣其事。亦可見公尙德崇贒之誠也。及謝三和之紱。不復跡京師。優遊林泉十餘年而卒。卽戊寅三月十二日也。距其生乙丑。爲七十四歲。始窆于臨溟驛東山。遷于時典里午坐。從先兆也。配慶州崔氏。通德郞吉男女。附公墓。擧七男一女。男萬英通德郞,萬雄萬戶,萬杰承議郞,萬最武科折衝,萬宗,萬式,萬泰皆通德郞。萬泰以文鳴世。女適玄允章。公奮起遐陬。蚤自樹立。雖在下僚。苟可以裨補君德。必抗言不諱。不嫌其出位。庶幾進思盡忠。退思補過者歟。至若衛道闢邪。擯斥而靡悔者。亦可驗見徹而守確也。公負性帶氣。愛好名節。尊尙尤齋。亦出苦心。豈非以志氣相感而然哉。公六代孫璣衡。百舍重繭。累請幽堂之文。璣衡好學。克紹先休。余旣服公風烈。又愛其肫誠。遂力疾而爲銘曰。
尺疏籲閽。踔乎氣節。格王扶贒。矢心苦切。克遂初服。永謝簪笏。身名俱完。尠與倫匹。德厚遺贏。天祐其吉。納銘玄隧。百世可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