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문(?∼1888) 근대/종교인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24.10.24|조회수5 목록 댓글 0

윤봉문(?∼1888) 근대/종교인
천주교인의 병인박해(1866~1873) 중에 영일군 기계면 지촌리가 고향인 윤사우(尹仕佑, 스타니슬라오)
가 양산을 거쳐 거제 옥포리에 와 전교활동을 했는데, 윤봉문은 윤사우의 둘째 아들이다. 세례명은 베드
로이다. 형 경문과 함께 교회회장직을 맡아 신자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전교에 힘쓰는 한편, 자신의 
수계(守戒)에도 열심이었다. 
1887년 11월 병인박해 후 처음으로 당시 대구본당 초대 신부였던 김보록 신부가 판공 성사를 주기 위
해 거제를 방문하자 자신이 가르치던 예비자 15명을 영세입교시켰다. 
그러나 그 한 달 후 뜻밖에도 이 지역에는 공식적인 박해가 아닌 사사로운 탄압의 바람이 일어 윤봉문
제1장 경남의 역사인물(721명) 381
은 진수부·주남이·한상필 등과 함께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이때 대부분의 신자들은 모두 뇌물을 두고 
풀려났지만 윤봉문은 천주학의 괴수라고 해서 통영으로 압송되었다. 
수차례에 걸친 문초와 혹형을 받으면서도 그는 배교와 밀고의 강요를 결연히 물리치지만, 결국 그는 진
주로 보내어져 처형하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진주에서 3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던 그는 1888년 2월 22일 올가미에 목이 졸려 순교했다. 그의 시신
은 진주 장재실에 안장됐다가 후에 유족들에 의해 진목정 족박골 산으로 이장되었다. 진목정은 지금의 
거제 옥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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