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신년(1596, 선조 29) 1월 초8일 용양龍驤 의병장들이 원원사願遠寺에 모이니, 승장僧將 찬홍贊弘이 술과 안주를 성대하게 마련하였다. 술이 한 차례 돌자 제형諸兄들이 모두 자리를 치며82) 큰 소리로 말하였다. 가의賈誼처럼 회초리를 꺾어 중항中行을 매질하고83) 종군終軍이 갓끈을 청하여 월왕越 王을 매단 것84)처럼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도다. 남몰래 한밤중에 팔뚝을 걷어붙이고 칼을 어루만지며 북쪽으로 머리를 돌리면 마음이 어느새 조령鳥嶺 위로 달려가고 눈물 이 절로 용만龍灣 서쪽으로 흩날린 것이 얼마나 많은 세월이던가. 이에 내가 말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즉시 팔공산八公山 아래로 달려가 왜놈들의 종자를 다 없앤 뒤라야 어 깨에 진 짐을 풀어 몸을 보전하고 나라의 은혜에 티끌 같은 보답이라도 바치게 되는 것 이니, 이제부터 날을 잡아 속히 다 같이 출발합시다. 82) 자리를 치며:이 부분의 원문이 ‘推席’인데 문맥이 순조롭지 못하고, 사의사실기에 ‘椎席’으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풀이하였다. 83) 가의(賈誼)처럼……매질하고:중항(中行)은 한 문제(漢文帝) 때 환관(宦官) 중항열(中行說)을 말한 다. 한 문제 때 선우(單于)가 형제의 의리를 맺자던 약속을 어기고 배반하자, 종실의 딸을 옹주 (翁主)로 삼아 선우알지(單于閼氏)에게 시집보내면서 중항열에게 데리고 가게 하였다. 중항열은 원하지 않는 사행길을 떠나서는 선우에게 항복하고, 그의 총애를 받으며 한나라에 대항하는 계책 을 제시함으로써 한나라에 큰 부담을 안겨줬다. 당시에 가의가 문제에게 올린 장문의 글 속에 “신의 계책을 따른다면 중항열을 항복시켜 그의 등에 매질을 가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漢 書 卷48 「賈誼傳」) 84) 종군(終軍)이……것:한 무제(漢武帝) 때 종군이 18세의 나이로 박사 제자(博士弟子)에 선발되고 이어 간대부(諫大夫)에 발탁되었는데, 그가 20세 때에 무제가 남월(南越)을 굴복시키기 위해 그를 사신으로 보내려 하자, 종군이 남월에 사신으로 나가기를 자청하면서, 긴 밧줄[長纓] 하나만 주면 남월 왕을 묶어서 궐하(闕下)에 바치겠다고 한 것을 말한다.(漢書 卷64下 「終軍傳」) 2월 초9일 영남의 좌우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보내 3월 초3일에 일제히 대구大丘 영중營中에 모이 기로 하였다. 2월 12일 새벽에 신구神駒가 마구간에서 뛰며 두 번 우니, 박인국이 크게 승리할 조짐이라고 자 부하였다. 2월 29일 백춘伯春과 함께 자인慈仁 삼거리에 도착하니, 손자 태영泰英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쫓아 와서 도착하였다. 3월 초1일 팔공산 아래에 이르니, 적병 수천 명이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동일원董一元·해생解生 등에 게 몰려 문경聞慶에서 날마다 아래로 내려와서 팔공산에 머물고 있었다. 3월 초3일 열읍의 의병장들이 벌과 구름처럼 운집하였다. 백춘伯春·남득의南得義·이준李俊·박회무朴 檜茂·이시발李時發·문희성文希聖·박태회朴泰回 등 8인에게 나누어 출생 연도와 거주지와 성명 을 기록하게 하였다. 류원직柳元直 청지淸之 무인 류심柳襑 여길汝吉 임신 류덕룡柳德龍 군현君見 정묘 권사도權師道 여홍汝弘 병인 이주도李周道 백행伯行 경진 이존성李存性 경지敬之 임오 권사민權師閔 효사孝思 계해 남윤선南胤先 효숙孝叔 기축 정사성鄭士誠 자명子明 이추李樞 기중機仲 계해 남자훈南自薰 언화彦和 무진 김윤사金允思 이득而得 임자 김태金兌 사열士悅 신유 김익金翌 현보 顯甫 정미 안발安潑 달원達原 임자 김득렴金得磏85) 치정致精 을사 김극후金克厚 백돈伯敦 기미 권탁연權卓然 상언尙彦 정미 김봉조金奉祖 효백孝伯 임신 윤탕민尹湯民 군거君擧 정사 남득인南得仁 원보元甫 계축 남득례南得禮 문보文甫 갑자 이인충李遴忠 공신公信 을축 이흘李屹 경앙景仰 무진 이선충李選忠 숙신叔信 기미 안우安遇 성지性之 김희맹金希孟 자순子淳 계유 김원金元 사선士善 을축 변회진卞懷珍 계헌季獻 정미 권보權甫정서 鄭恕 추경推卿 정사 이경李璟 숙헌叔獻 무신 이약李鑰 계보啓甫 임신85) 김득렴(金得磏):저본은 ‘金得’인데, 인명자료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김득렴의 자는 치정(致 精), 호는 도봉(道峯),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김언련(金彦璉)의 아들이다 정헌鄭憲 경성 景誠 기미이진 李珍 옥이 玉爾 을묘권순 權詢 중자 仲咨 신해권첨 權詹 성오 省吾 경진이익 李釴86) 위보 衛甫 을해김집 金潗 활원 活源 무오금영주 琴英奏 해중 諧仲변희일 邊喜一 갑술 甲戌남봉한 南鳳翰 상거 祥擧 무인김시추 金是樞 자유 子由 경진권훤 權暄 명보 明甫 정사변중일 邊仲一 을해손수기 孫守己 사정 思正 병인권순민 權舜民 사호 士皥 경진신경립 辛敬立 군직 君直 무오권초 權礎 자임 子任 을축신강립 辛剛立 이직 而直 무오권흡 權潝 자원 子源 갑술 박태회朴泰回 창보昌甫 무인 박협朴協 경중景仲 무신 권우직權友直 경보敬甫 신미 박중윤 朴仲胤 경술 景述 임술안종례 安宗禮 문중 文仲 신미손부 孫溥 택원 澤遠 무인김영 金泳 경함 景涵 계유86) 이익(李釴):저본에는 ‘釴’이 ‘鈛’로 되어 있는데 오기로 보아 바로잡았다. 사의사실기에도 ‘釴’ 으로 되어 있고, 권강(權杠)의 방담집(方潭集)에 ‘和李衛甫釴韻’이라 한 것이 보인다 류복기柳復起 성서 聖瑞 을묘김위 金渭 경청 敬淸 을축류지잠 柳知潛 무자 손윤남孫胤男 백선伯善 임술 이상은안동安東 거주 채몽연蔡夢硯 정응 靜應 신유성낙선 成樂善 즉최 卽最 신미이경배 李景培 가화 可華 무오서승후 徐承後 백유 伯裕 계해민겸 閔謙 여익 汝益 기묘배덕일 裵德馹 사순 士純 무오채응귀 蔡應龜 이종택李宗澤 인가 仁可 경오정광선 鄭光先 자회 子晦손처약 孫處約 박충후朴忠後 임자최인 崔認 최동보崔東輔 박충윤朴忠胤 정사이상은 대구大丘 거주 이시립李時立 신우 信遇87) 임신권복시 權復始 백원 伯元 병진최계종 崔繼宗 경승 慶承 경오김난서 金鸞瑞 사상 士祥 계해87) 신우(信遇):저본은 ‘遇’ 자가 공란인데, 사의사실기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서사적徐思迪 길보 吉甫 병진이의잠 李宜潛 병연 炳然남의록 南義祿 계수 季綏 신해손로 孫魯 여유 汝唯권사악 權士諤 명언 明彦손시 孫時 순백 順伯권응생 權應生 명세 命世손엽 孫曄 문백 文伯 갑진김광복 金光福 경원 慶源 기축이상은 경주慶州 거주 조이함曺以咸 극정 克貞 갑자조이정 曺以鼎 극응 克凝 신미노기종 盧起宗 백승 伯承88)조경 曺瓊 중헌 仲獻 기미조덕기 曺德驥 언성 彦成 정유전삼성 全三省 군면 君勉 계유정세아 鄭世雅 화숙 和叔 을미조일기 曺逸驥 군전 君展 경술정안번 鄭安藩 영보 寧甫 갑술곽영탁 郭永鐸 경인 敬仁 을해전삼달 全三達 군경 君烱 경오서도립 徐道立 중수 仲修 경진이상은 영천永川 거주 88) 백승(伯承):저본은 ‘承’이 ‘永’으로 되어 있는데, 사의사실기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노기종(盧 起宗)의 자는 백승(伯承), 호는 지헌(止軒),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지족헌(知足軒) 준(遵)의 아들 이다. 손흥효孫興孝 행숙 行叔구찬조 具贊祚 계응 季膺 임자금경 琴憬 언각 彦覺 계축김기 金圻 사숙 士叔 정미금응각 琴應角 금응우琴應羽 경인 景仁조수붕 趙壽朋 기묘남의각 南義慤 을해이운 李芸 여성 汝盛 무진조석붕 趙錫朋 을유89) 류영문 柳榮門 화백 華伯 정축류의 柳誼 사의 士宜 무신이상은 예안禮安 거주 남사필南士弼 여휴 汝休 기사조검 趙儉 자순 子淳 경오조전 趙佺 여수 汝壽 병자조광의 趙光義 경제 景制 계묘주식 朱植 경립 景立 계축오수눌 吳受訥 사신 士愼 을축조건 趙健 여강 汝剛 경오박응장 朴應長 백인경白仁鏡 이정 而正 갑인이숙 李菽 백중립白中立 89) 을유:저본은 ‘己酉’이나, 전후 정황으로 볼 때 조목(趙穆)의 아들 조석붕(趙錫朋, 1585∼1657)이 분명하여 수정하였다. 조석붕의 생년인 1585년의 간지가 을유이다 이시청李時淸 화숙 和叔 경진남사명 南士明 여회 汝晦 정사이태운 李泰運 경회 慶會 경오신준민 申俊民 사수 士秀 무신이함 李涵 양원 養源 갑인신원영 申元英 사선 士善 을사신덕룡 申德龍 운서 雲瑞 병인권의범 權宜範 사헌 士憲 무오박희안 朴希顔 여우 汝愚 무진정승서 鄭承緖 효백 孝伯 경오남율 南慄 신원걸申元傑 사종 士宗 경술이번 李蕃 무진남경생 南慶生 응화 應和 임신신정립 申挺立 경탁 景卓 병자이형운 李亨運 붕거 鵬擧 기묘남사문 南士文 여욱 汝郁 을묘백현룡 白見龍 문서 文瑞 계묘김인제 金仁濟 공망 公望 계사이상은 영해寧海 거주 금응훈琴應壎 훈지 壎之 경자이광승 李光承 군술 君述 경자조목 趙穆 사경 士敬 갑신금경 琴憬 언각 彦覺 계축금결 琴潔 탁경 濯卿손흥제 孫興悌 이율李嵂 제보 濟甫 기묘남인각 南仁慤 이형남李亨南 태숙 泰叔조득로 趙得老 이리李峛 정축이인복 李仁福 무술이상은 예안禮安 거주 김경제金經濟 경열 景悅 기묘정이성 鄭以惺 정이오鄭以悟 김경철金經澈 언함 彦涵 임신박원개 朴元凱 순보 舜輔 경진조기원 趙基遠 경진 景進 을해변서 卞緖 경원 景遠조영원 趙榮遠 경인 景仁 정축김원성 金遠聲 여선 汝宣고상로 高尙魯 사성 思省권의중 權宜中 의백 宜伯 정미채득호 蔡得湖 보원 步遠 무인권대훈 權大勳 경열 景烈박의 朴義 의길 宜吉 신해성여송 成汝松 직경 直卿 무인성협 成浹 사열 士悅 병진황정간 黃廷幹 공직 公直 무오성의 成義 의길 宜吉 신해고인계 高仁繼 선승 善承 갑자박원량 朴元亮 사명 士明 무진채득해 蔡得海 치원 致遠 신미채득강 蔡得江 달원 達遠 갑술김득룡 金得龍 덕윤 德潤 갑자 김원진金遠振 사선 士宣 기미신언희 申彦熙 최대립崔大立 권몽주權夢周 김언령金鶠齡 서로 瑞老 신축김신년 金申年 권이수權已壽 김정金珽 경온 景溫 정사이상은 상주尙州 거주 강두명姜斗明 명지 明之 정묘성소업 成紹業 이술 而述 병자윤백언 尹伯彦 사미 士美 무술신빈 辛賓 방로 邦老 경신성여신 成汝信 공실 公實 병오이상은 진주晉州 거주 조언방曺彦邦 덕후 德厚 갑자박성렬 朴成烈 비원 棐元 경술윤숙 尹潚 사연 士淵 계축이돈 李焞 백명 伯明이세웅 李世雄 이환李煥 이경李烱 숙명 叔明이찬 李燦 중명 仲明장열 張悅 화숙 和叔 갑인이상은 용궁龍宮 거주 성탁成卓 박유朴瑜 백헌 伯獻 병자손의갑 孫義甲 의백 宜伯 정미이상은 창녕昌寧 거주 장여핵張汝翮 문거 文擧 을해장세희 張世禧 중길 仲吉 무술장여한 張汝翰 봉거 鳳擧 무진안영수 安榮壽 경부 慶夫 신미이형남 李亨南 태숙 泰叔이진남 李鎭南 방숙 方叔 경신이경남 李慶南 선숙 善叔 계유이직도 李直道 정행 正行 을해신경회 申慶會 사우 士遇 무진박유의 朴惟義 호선 好善안영수 安榮壽 경부 慶夫김중웅 金仲熊 공망 公望 경신박수겸 朴守謙 백익 伯益 임술이낙 李諾 여유 汝唯 병인김지 金潪 준원 浚原 갑자박수약 朴守約 시보 施甫 정묘박수검 朴守儉 신보 愼甫 을해이미도 李味道 중열 仲悅 갑자박비호 朴匪虎 위로 渭老 병오이호음 李好音 여회 汝懷 병인이개립 李介立 대중 大仲 병오이영문 李榮門 인백 仁伯 무신이홍경 李弘經 문통 文通 신사이형곤 李亨坤 형지 亨之 신사 이정곤李挺坤 정지 挺之 계미이수곤 李秀坤 수지 秀之 경인이상은 예천醴泉 거주 최정호崔挺豪 시응 時應 계유김복흥 金復興 경이 慶而 정사권평 權平 득중 得中남영 南爃 사수 士秀 무신이상은 함창咸昌 거주 이여해李汝諧 순거 舜擧이여련 李汝璉 국보 國寶 기사박경전 朴慶傳 효백 孝伯 계축김진 金軫 천극 天極 기유김명원 金鳴遠 시달 時達박경 朴烱 이회 而晦이렴 李濂 이철李澈 사함 士涵이운룡 李雲龍 경회 慶會 임술이상은 청도淸道 거주 문희철文希哲 경진 景進 을축문희현 文希賢 경술 景述 갑신권완 權腕 언명 彦明 갑자김선계 金善繼 효백 孝伯 계해이응의 李應義 의백 宜伯 기사김순룡 金舜龍 여윤 汝允 계축권준 權晙 여인 汝寅 기미신흡 申洽 이호 而浩 신축 안윤옥安潤屋 사반 士胖 병오권소 權昭 명중 明仲 임인신지남 申智男 명원 明遠 기미이상은 진보眞寶 거주 박회무朴檜茂 중식 仲植 을해박종무 朴樅茂 수식 秀植 임오이희음 李希音 여순 汝純 기묘이휘음 李徽音 여흡 汝翕 을해권대준 權大準 을해황겸 黃㻩 이상은 영천榮川 거주 최현崔晛 계승 季昇 계해정방준 鄭邦俊 군필 君弼 정사최산립 崔山立 입지 立之 경술최철 崔喆 중길 重吉 경진이상은 선산善山 거주 손기성孫起誠 경흠 景欽 갑자안국보 安國步 신재 藎哉박수춘 朴壽春 경로 景老 임신이상은 밀양密陽 거주 김우련金遇鍊 가성 可成 임자김우용 金遇鎔 가변 可變 을사김극창 金克昌 사효 士孝 갑술박몽량 朴夢亮 국서 國瑞 무오안천민 安天民 각보 覺甫 을묘 최경지崔敬止 신보 愼甫 을묘최희지 崔熙止 명보 明甫 신미이춘암 李春馣 문원 聞遠 을축이상은 자인慈仁 거주 정사서鄭士恕 합천陜川 거주 곽천성郭天成 해남海南 거주 오여벌吳汝橃90) 제보 濟甫 기묘함안 咸安 거주 김현룡金見龍 덕보 德普 경술김원룡 金元龍 인보 仁甫 신유권여정 權汝精 자중 子中 정묘김우정 金宇淨 사원 士源김우결 金宇潔 사순 士淳 병인심희청 沈希淸 계축김천목 金天穆 순중 純仲 정묘이추 李追 희원 希遠 계축이상은 연일延日 거주 이대임李大任 사중 士重 갑술서방경 徐方慶 군길 君吉 임인90) 오여벌(吳汝橃):저본은 ‘橃’이 ‘撥’로 되어 있으나, 오여벌 문집의 전기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서극인徐克仁 중임 重任 정묘이상은 장기長鬐 거주 박진朴瑨 사온 士溫 정묘박환 朴瓛 사중 士重 무인한산두 韓山斗 사첨 士瞻 병진박영령 朴永齡 원로 元老 신유이식 李植 입지 立之 계유손기룡 孫起龍 사현 士見 임술남억명 南億命 미로 眉老 무신권사성 權師聖 시가 時可 을해박수서 朴守緖 경승 景承 정묘이상은 풍기豊基 거주 이춘수李春秀 군실 君實김백일 金百鎰 중보 重甫송희순 宋希淳 송희철宋希哲 김경金璥 송희달宋希達 이상은 삼가三嘉 거주 한홍례韓弘禮 한규韓珪 한홍지韓弘智 박천朴芊 천지 芊之이상은 산음山陰 거주 김홍언金弘彦 의숙 毅叔이동함 李東 승원 升遠 계유이동지 李東志 인수 仁叟 경오이동빈 李東馪 인원 仁遠 경오이동엽 李東燁 인회 仁晦 신미이동응 李東膺 을묘이상은 합천陜川 거주 정섭호鄭燮護 정섭함鄭燮咸 정섭문鄭燮文 이상은 경산慶山 거주 신철申澈 언함 彦涵 임신정이성 鄭以惺 여오 汝悟윤사휘 尹士輝 광원 光遠 신유김사지 金四知 여신 汝愼 정사이상은 영덕盈德 거주 조사겸趙士謙 병술조사성 趙士誠 이실 而實 갑신조사집 趙士諿 무자이상은 태안泰安 거주 장형蔣珩 계진 季珍 정축유석증 兪昔曾 이성 而省 경오김순생 金順生 화백 和伯 병오안주 安湊 병오권진 權縉 운경 雲卿 임신 민철閔澈 대원 大源민항 閔沆 김열金洌 자청 子淸 신사류비 柳斐 사화 士華 병인조명립 趙命立 여정 汝正 기묘김효성 金孝誠 권굉權 문경 文卿 신사성인후 成麟厚 경진 敬振신득록 申得祿 응수 應綏 갑자권문계 權文啓 중질 仲質 기유박의 朴義 의길 宜吉 신해신경일 申敬一 성보 惺甫 신해 강극유 姜克裕 의계 懿季 임술이대림 李大臨 자길 子吉 무진박지우 朴知遇 경이 慶而 임오박지술 朴知述 임자정운붕 鄭雲鵬 경유 景遊 계축이형욱 李馨郁 덕무 德懋 신해이두망 李斗望 사앙 士仰이상은 서울 거주 양통한梁通漢 박희근朴希根 양의梁鸃 송의인宋宜仁 이상은 동래東萊 거주 이수필李秀弼 이몽란李夢鸞 안근安瑾 안시명安諟命 사명 士明 을축안이명 安以命 사신 士愼 정묘이상은 양산梁山 거주 박몽서朴夢瑞 경망 景望 기유최흥국 崔興國 강후 康侯정인헌 鄭仁獻 사전 士全호민수 扈民秀 사언 士彦이열 李說 천뢰 天賚이대립 李大立 여수 汝秀 정사이화 李華 군실 君實진봉호 陳奉扈 이대인李大仁 여원 汝元이영춘 李榮春 이상은 흥해興海 거주 여대로呂大老 성우 聖遇금산 金山 거주 박종남朴從男 선술 善述 무오의흥 義興 거주 박몽거朴夢琚 숙옥 叔玉 무신의성 義城 거주 변속邊涑 심원 深遠 신유배천 白川 거주 박제인朴齊仁 중사 仲思 정유이휴복 李休復 사장 士章 무진함안 咸安 거주 정인희鄭麟熙 개령開寧 거주 홍충걸洪忠傑 수부 秀夫 정사남양 南陽 거주 권경호權景浩 병오함창 咸昌 거주 성윤문成允文 갑진순천 順天 거주 고언백高彦伯 교동喬洞 거주 이대기李大期 당시 의흥 현감義興縣監초계 草溪 거주 유양좌兪良佐 군필 君弼 신축김응성 金應聖 중시 仲時 병진김성진 金聲振 고령高靈 거주 조형도趙亨道91) 경달 景達 경산 현령慶山縣令조동도 趙東道 경망 景望청송 靑松 거주 송정백宋廷伯 공보 公輔 기사김해 金海 거주 한효일韓孝一 경일 敬一 임오남양 南陽 거주 국윤성鞠允成 경수 景修 정축담양 潭陽 거주 이李 을해단성 丹城 거주 주의수朱義壽 웅천熊川 거주 정여린鄭如麟 나주羅州 거주 문관도文貫道 중기 重器 경술 하양 현감河陽縣監보성 寶城 거주 승적承迪 태고 太古서울 거주 당시 경산慶山박경우 朴慶祐 계수 季綏 계유죽산 竹山 거주 91) 조형도(趙亨道, 1567∼1637):저본은 ‘亨’이 ‘享’으로 되어 있으나, 인명자료에 의거하여 수정하였 다. 조형도의 자는 대이(大而)·경달(景達), 호는 동계(東溪),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박진영朴震英 실재 實哉 기사함안 咸安 거주 박성朴惺 호 대암大菴현풍 玄風 거주 강찬姜纘 안음安陰 거주 손수경孫守慶 이선 而善 병오충주 忠州 거주 김문룡金文龍 운보 雲甫김득경 金得鏡 청하淸河 거주 이시발李時發 양구 養久 기사청주 淸州 거주 곽천성郭天成 해남海南 거주 장희춘蔣希春 인경 仁敬 병진윤홍명 尹弘鳴 응시 應時 을축서인충 徐仁忠 방보 邦輔 갑인김흡 金洽 덕호 德浩 경술류정 柳汀 여원 汝元 정유류백춘 柳伯春 영형 領亨 임술류태영 柳泰英 자실 子實 정묘 이응춘李應春 태영 泰英 경자이봉춘 李逢春 계영 季英 병오박손 朴孫 을묘이응벽 李應璧 여완 汝完 계해울산 蔚山 거주 이원익李元翼 공려 公勵 정미호가 오리梧里이고, 당시 체찰사體察使이다. 서울 거주 류성룡柳成龍 이현 而見 임인호가 서애西厓·농환재弄丸齋이고, 도체찰사都體察使이다. 안동安東 거주 김태허金太虛 여실 汝實 을묘 울산 군수蔚山郡守밀양 密陽 거주 박의장朴毅長 사강 士剛 을묘 경주 부윤慶州府尹영해 寧海 거주 손기양孫起陽 경징 景徵 기미 호 송간松澗 신녕 현감新寧縣監밀양 密陽 거주 권응수權應銖 권응전權應銓 김대관金大寬 신녕新寧 거주 김시약金時約 괴산槐山 거주 문희현文希賢 경술 景述 갑신 문희철文希哲 경진 景進 을축보성 寶城 거주 황경림黃慶霖 경서 景瑞 병인김거 金鐻 가화 可和하양 河陽 거주 3월 20일 천사장天使將 이눌李訥, 격의장激義將 이여량李汝良에게 편지를 보냈다. 군사는 신속神速함을 귀하게 여기는 것에 대하여 우리 형께서 늘 적을 대적할 때마다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여러 번 승리한 위엄을 바탕으로 귀순한 대중을 위무하여 행 군하여 서쪽으로 오시지 않습니까. 지금 영남의 수천 명 의사들이 다 한마음을 먹고 있는 데, 이런 즈음에 두 형께서 영광스럽게 임하시면 적병들이 바라보기만 해도 놀라고 지혜 가 도모하기에 못 미치고 용맹이 과감함에 미치지 못하여 마치 마른 잎사귀를 취하는 듯 할 것입니다. 만일 굳건한 성 아래에 머물러 있다 보면 적당들이 중국 장수들에게 밀려 다 아래로 내려오게 될 것이니, 이는 실로 존망이 달린 때입니다. 이 기회를 어겨 대중의 마음이 떠나게 되면 대사大事를 이룰 가망이 없어집니다. 또 영남 좌우도의 의병장들이 속한 곳이 없으니 조속히 불러 회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마에 손을 얹고 바라고 기 다립니다. 3월 29일 각읍 의병장들이 군사들에게 병기를 단련하고 기예를 시험하였으며, 날마다 군량을 운 송하는 일을 하였다. 4월 초2일 인국仁國을 운량장運粮將으로 삼았다. 4월 초10일 큰비가 매우 급하게 쏟아지니, 적병이 이로부터 물러가 잠복하였다 4월 22일 의흥 현감義興縣監 이대기李大期, 신녕 현감新寧縣監 손기양孫起陽, 의성 현령義城縣令 여대로 呂大老가 밤중에 장막으로 와서 말하였다. 경주 부윤慶州府尹 박의장朴毅長이 승급한 것이 바로 누구의 공입니까. 당신이 용양龍 驤의 원수로서 천 명에 이르는 호걸스럽고 용감한 군사를 모았고, 또 신구神駒가 나는 새처럼 달려서 왜놈들의 강한 쇠뇌와 날카로운 칼도 미칠 수 없었으니, 당신은 참으로 하늘이 내린 장수입니다. 신묘한 전략을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저 곽거병霍去病은 한漢나라 조정의 한 명의 장수일 뿐인데도 오히려 흉노를 섬멸할 뜻을 가졌습니다. 더욱이 우리들은 적개심에 불타는 수천 명의 의병이니, 이미 파멸된 왜놈들을 섬멸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4월 23일 새벽에 몰래 적정賊情을 염탐하였다. 잠복한 지 한 달 남짓 되었는데도 노략질을 하지 못하여 양식이 떨어지자 점점 산허리로 내려왔다. 의병장들이 열을 지어 진을 치고 세 겹으로 웅거하며 팔방오색기八方五色旗를 만들어 그 위에 “자오장子午將이 3만 명을 거느리 고 조령鳥嶺에서 오고, 묘유장卯酉將이 4만 명을 거느리고 안의安義에서 오고, 무진장辰戌將이 2만 명을 거느리고 상주尙州와 선산善山에서 오고, 축미장丑未將이 2만 명을 거느리고 경주 慶州와 울산蔚山에서 온다.”라고 하였다. 또 큰 깃발을 만들어 명나라 장수가 보낸 격서檄 書를 쓰기를 “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산 위로 습격한다.”라고 하였다. 72고을의 수만 명 군사가 산 아래에서 가로막고 때때로 서남쪽 진중에 세워 두었다. 이에 적들이 바라보고 크게 두려워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모두 내려올 즈음에 좌우의 의병장들이 거짓으로 약 간 후퇴하여 장사진처럼 늘어섰다. 적들이 과연 평지에 주둔하였다. 우감패雨甘霈와 사유 석沙有石이 진중에 고하였다. 왜인들의 속성이 몸은 무겁고 다리가 짧아 빨리 달리지 못하니 지금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보병과 기병으로 돌격하면 마치 손을 뒤집듯이 쉽게 박멸할 수 있다. 군사들이 모두 그 말에 수긍하였다. 4월 26일 서남쪽 의병장들이 와서 축하하기를 “용양龍驤의 호칭이 과연 들은 바와 같도다.” 하 였다. 4월 29일 중영장中營將 이대기李大期가 와서 손자 태영泰英을 보고서 “효손孝孫이 장군보다 낫습니다.” 하고, 차고 있던 칼을 증정하였다. 5월 초2일 월성月城 진영으로 군대를 돌렸다. 5월 초6일 방어사防禦使 곽재우郭再祐가 전 한림翰林 성안의成安義와 더불어 창녕昌寧에서 적을 막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백춘伯春·태영泰英·박인국朴仁國에게 군사 289명을 거느리고 당일에 출발하도록 하였다. 6월~7월 권농勸農하였다. 8월 초2일 권응수權應銖가 정예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창녕昌寧으로 달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8월 초4일 백춘伯春과 태영泰英이 한 달 동안 전장을 달리다가 비로소 돌아왔다. 이날 그들의 형체 를 보니 쇠잔한 모습이 이미 드러났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피곤하였다. 내가 슬퍼 눈물 을 흘리니 좌우에서 모두 놀랐다. 내가 말하였다. 네가 우리 가문의 종손으로 6~7년 동안 몸을 잊고 싸웠으니 누가 의롭지 않다고 하 겠는가. 이제부터는 군사를 거느리지 말고 가묘家廟를 보존하면서 여생을 보내도록 하 라. 나같이 늙은 사람은 이미 의병에 가담하였으니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한들 무슨 여 한이 있겠는가. 두 번 말하지 않을 터이니 너는 스스로 신중하도록 하라. 6년 동안 말을 달린 나머지 군졸들의 심장의 살을 도려내었고 몸 깊이 고치지 못한 고질이 생겼으니 다시 군대를 거느리지 못하겠다. 또한 군사란 정예로워야지 수가 많은 것은 의미가 없 다. 숫자만 많고 정예롭지 못하면 옛날 사람이 그 장수를 적에게 넘겨준다고 하였다.92) 그리고 즉시 군사를 해산하였다. 92) 정예롭지……하였다:한(漢)나라 경제(景帝) 때 조조(晁錯)가 “기계가 예리하지 않으면 자기의 군 졸을 적에게 넘겨주게 되고, 군졸을 쓸 수 없으면 장수를 적에게 넘겨주게 된다.[器械不利 以其 卒予敵也 卒不可用 以其將予敵也]”라고 한 것을 말한다.(漢書 卷49 「晁錯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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