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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중국사

원과 고려와의 관계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24.09.12|조회수24 목록 댓글 0

고려가 원나라에 세공을 바치기로 한 것은 칭기즈칸 13년인 1218년의 일이다. 세공의 품목은 처음에는 군량미로 쌀 1천 석을 바치기로 하였다. 그 후 고려의 특산물인 금은, 피륙, 수달피 등을 포함한 귀중품을 보냈는데 그 수량이 어마어마하였다. 몽골에서는 해마다 저고여(著古與)라는 관리를 고려에 보내 이 막대한 양의 세공을 거둬들였다.

1244년 저고여 일행이 고려의 공물을 싣고 압록강을 건널 때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저고여 일행이 습격을 받아 공물은 모두 빼앗기거나 압록강에 수장되고 저고여도 죽임을 당하였다. 역사서에는 이것이 도적의 소행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거듭되는 몽골의 착취에 분개한 고려 조정이 배후에서 조종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쨌든 몽골에서는 이것이 모두 고려의 소행이라 하여 일방적으로 국교 단절을 선언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칭기즈칸이 죽고 태종 오고타이가 즉위했다. 그는 즉위 3년 후 고려에 침략의 마수를 뻗쳤다. 저고여 등 몽골 사신을 살해한 죄를 묻는다는 것이 침략의 구실이었다.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이(撒禮塔)는 고려의 국경 수비대장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내 위협하였다.

“나는 몽골의 장수 살리타이다. 빨리 항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복하지 않으면 도륙하고 말겠다.”

고려의 국경 수비대장은 싸워보지도 않고 벌벌 떨며 항복하고 말았다. 그뿐 아니라 몽골군의 향도 노릇을 하여 성을 지키는 장수들에게 항복을 권고하는 이적 행위까지 저질렀다.

그러나 고려군의 항전도 대단하였다. 항복 권고에도 불구하고 죽기로 싸워 몽골군을 괴롭혔다. 구주 병마사(龜州兵馬使) 박서(朴犀)를 비롯하여 김중온(金仲溫), 김경손(金慶孫) 등이 구주에서 분전하여 몽골군에게 타격을 주었으나 압도적인 몽골군의 공격을 끝까지 감당할 수는 없었다.

무장한 몽골병

몽골병은 기동성 높은 기마전에 능한 유목민의 특성을 보여준다. 활과 칼은 말 위에서 다루기 쉽도록 작게 만들었다. 15세기경 명대의 회화

고려에서는 강화를 요청하였고 강화가 성립되자 몽골에서는 72명의 다루하치(達魯花赤)를 두어 고려를 다스리게 하였다. ‘다루’는 진압한다는 뜻의 몽골말이고, ‘하치’는 그것을 시행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들 다루하치들의 횡포는 극에 달했다. 그들의 착취는 심지어 좁쌀 한 알에까지도 손을 뻗쳐 백성들을 못살게 굴었다. 고려는 다루하치들의 횡포를 탄원하는 사신을 몽골에 보냈으나 번번이 억류당할 뿐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고려에서는 몽골의 처사에 차츰 분노를 느껴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고려는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골과 항전할 결의를 굳혔다. 몽골군이 육전에는 강하지만 수전에는 약하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강화도의 천도 문제는 권신 최우(崔瑀)에 의해 강행되었다. 당시 고려는 무신의 집권 시대로 최충헌(崔忠獻)이 집권한 이래 그의 아들 최우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강화도로 천도함으로써 30년간에 걸친 고려의 몽골 항전이 시작되었다.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몽골에서는 대군을 출동시켜 고려를 침공하였다.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한 것은 몽골에 대한 배신이며 선전포고 행위라고 판단한 것이다. 전후 6차에 걸친 몽골군의 침공으로 고려의 국토는 유린되고 백성들은 약탈에 시달리고 죽임을 당하였다. 저항하는 적은 한 치도 용서하지 않는 것이 몽골군의 속성이었다.

태종 오고타이의 사후 황후의 섭정 기간 5년(1241~1246)과 정종 구유크의 사후(1248) 3년, 그리고 후계자 분쟁 등 몽골 내부의 사정 때문에 얼마 동안 몽골은 고려를 침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계자 문제가 일단락되자 호전적인 몽골군은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

특히 헌종 몽케칸 4년(1254)에서 그 다음해에 걸친 몽골군의 침공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원나라 군대(복원도)

《신원사(新元史)》의 기록에 의하면, “몽골군이 지나는 곳마다 살상자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고 몽골에 잡혀간 포로의 숫자가 20만 명이 넘었으며 군현(郡縣)이 모두 불타 버렸다.”고 하였으니 그 잔학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몽골에서는 무슨 조건을 내걸고 그토록 고려를 유린했단 말인가?

몽골의 요구 조건은 고려에서 당초 바치기로 약속한 세공을 복원시키고 국왕은 강화도에서 육지로 환도할 것, 그리고 국왕이나 태자가 몽골에 입조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태가 계속되는 가운데 강화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최씨 정권이 몰락하고 태자 전이 몽골에 입조했다. 이것이 헌종 몽케칸 9년(1259), 고려 고종 46년의 일로 그 전 해인 고려 고종 45년의 쿠데타로 고려 국왕의 권력이 강화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고려의 태자 전이 만나야 할 몽골국의 몽케칸은 당시 남송을 공략하기 위해 사천에 원정 중이었다. 몽케칸을 만나기 위해 멀리 사천을 향하여 여정에 올랐던 태자는 도중에서 몽케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죽었으므로 태자는 쿠빌라이를 만나기 위해 남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몽케칸과 왕자들

이 무렵 남송의 호북 지방 공략에 나섰던 쿠빌라이는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급히 몽골로 귀환하던 중이었다. 태자 전은 양양에서 귀환 중인 쿠빌라이와 만났다. 태자 전을 만난 쿠빌라이는 크게 놀라고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고려는 만리 밖에 있는 나라로 당의 태종도 능히 복종시키지 못하였다. 이제 그의 세자가 스스로 여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곧 하늘의 뜻이다.”

쿠빌라이와 태자 전의 만남은 몽골과 고려의 관계 개선에 좋은 계기가 되었다.

쿠빌라이는 태자 전을 데리고 몽골의 개평부(開平府)에 이르러 지금까지의 무력 침공에 의한 탄압책을 버리고 회유책으로 전환하였다.

태자 전이 개평부에 머물러 있는 동안 고려에서는 고종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찍이 고려는 몽골의 고려 국왕의 입조 요구를 국왕이 병중이라는 이유로 미루어 왔는데 이것은 터무니없는 구실이 아니었다. 태자 전의 입조에는 원래 인질의 뜻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쿠빌라이는 태자 전을 귀국시켜 고려 국왕으로 삼았다. 그가 바로 원종(元宗)이다.

그 다음해 쿠빌라이는 후계자 싸움에서 승리하여 칸의 자리에 오르니 이 사람이 원의 제4대 세조이다. 쿠빌라이는 고려에서 몽골군을 철수시키는 한편 약탈을 일삼던 다루하치도 철수시킴으로써 지금까지의 무력 침공 정책에서 회유책으로 대고려 정책을 전환하였다. 이어 포로로 삼았던 백성들을 모두 고려로 송환하고 변방의 장수들에게도 약탈을 엄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칭기즈칸의 시대로부터 고려의 태자 전이 쿠빌라이의 조정에 입조하기까지 40년에 걸친 고려의 항쟁은 종지부를 찍고 원에 예속되는 시대가 열렸다.

[출처] 원과 고려와의 관계|작성자 새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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