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왕조 일대의 명군으로 불리던 효종 홍치제(弘治帝)가 홍치 18년(1505) 5월 36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자 황태자 주후조(朱厚照)가 뒤를 이었다. 이 이가 무종(武宗) 정덕제(正德帝)이다. 정덕제는 금욕주의적인 아버지 홍치제와는 달리 탐미주의적이었다. 그는 정덕 2년(1507) 8월 역사상 처음 듣는 ‘표방(豹房)’이라는 이름의 건물을 서화문 근처에 세웠다. 이 건물은 외관상 이슬람 사원과 비슷하였으나 내부는 해괴망측할 만큼 환상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정덕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곳에 머물며 유흥과 환락에 빠져들었다.
정덕제는 자연 정치에는 무관심해져 실권은 환관 유근이 장악하였다.
유근이 사례감의 장관으로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것은 정덕 원년(1505)이었다. 그는 관직을 알선하고 거액의 사례금을 받는 수법으로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았다. 그가 실각했을 때 몰수된 재산이 황금 250만 냥, 은 5천만 냥, 그 밖의 보물류를 합하여 국가 세입의 수배에 달했다 하니 그의 부정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관리 임명은 원래 이부상서(내무 장관)의 소관 업무였으나 이부상서 장채(張綵)도 유근과 결탁하여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려 하였다. 뇌물을 받은 것은 유근만이 아니고 장채도 마찬가지였다. 엄청난 권력을 바탕으로 재산을 모은 유근은 황제 교체기에 흔히 일어나는 권력구조의 변화문제가 염려스러웠다. 유근은 심복인 장채와 이 문제를 신중히 논의하였다.
장채가 그의 계책을 말하였다.
“지금 폐하께는 아들이 없으니 황족 가운데서 황제를 세우게 될 것입니다. 그때 유약(幼弱)한 황족을 골라 세운다면 우리들의 지위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장채의 말을 들은 유근은 조금 안심이 되었으나 황제가 죽기 전의 일을 생각하니 또한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가장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천자가 되는 길이었다. 유근의 생각은 여기까지 이르렀다. 때마침 유근의 형이 죽어 그의 장례일에는 관리들이 회장(會葬, 장례에 참례함)할 것이므로 그 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러나 유근의 거사 계획은 같은 환관인 장영(張永)의 고발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장영이 유근의 모반을 고발할 때 정덕제는 술에 취해 있으면서, “모반할 테면 제멋대로 하라지.”라고 말하며 별로 놀라거나 걱정하는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자유분방한 방탕아 기질의 정덕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천자의 자리 따위 누구에게든 당장 내주고 싶은 심정이었는지 모른다. 유근 일당은 모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정치를 멀리하고 유흥에 빠진 정덕제 시대에는 뇌물이 성행하면서 정치가 문란해지고 민란이 자주 일어났다.
〈맹촉궁기도〉
명대 화가 당인의 그림으로 당시의 미인상을 알 수 있다.
정덕 5년(1510)에 일어난 유육(劉六)·유칠(劉七)의 난은 그 이름도 듣기 어색한 ‘뇌물의 난’이라 불렸다. 얼마나 뇌물이 판을 치고 황금 만능의 시대였으면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을까 의심이 날 지경이다. 이 ‘뇌물의 난’을 통해 당시의 부패상을 한번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유육과 유칠은 형제지간으로 본명은 유총(劉寵)·유신(劉宸)이었다. 문안(북경과 천진 사이) 출신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용맹이 뛰어났기 때문에 지방의 관리가 치안 유지를 위하여 그들을 이용했다. 말하자면 경찰 대행 업무와 비슷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도적을 체포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보여 표창을 받을 정도로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당시 사회 현상은 아무리 공적이 있어도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공적을 인정받을 수 없고, 공공기관과 관련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뇌물을 바치는 풍조가 만연되고 있었다. 당시 최고의 집권자였던 환관 유근의 부하 양홍(梁洪)이라는 자가 유육·유칠에게 뇌물을 요구했다가 거절을 당하자 그 보복으로 조정에 고발하였다.
“유육·유칠은 도적의 무리입니다.”
표창을 받아야 할 유육·유칠은 억울하게 도적의 누명을 쓰고 정부측으로부터 토벌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조정에서는 유근의 심복인 포도어사(捕盜御史) 영고(寧杲)와 유상(柳尙)을 보내어 이들을 토벌토록 하였다. 궁지에 몰린 유육 등은 할 수 없이 진짜 도적의 괴수인 장무(張茂)에게로 도망쳐 들어갔다.
장무의 휘하에는 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었는데 대부분은 세금을 내지 못해 도망쳐 온 자, 죄를 짓고 도망쳐 온 자들이었다. 장무의 무리는 날이 갈수록 점점 증가되어 세력이 확대되었다.
이 같은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참장(參將) 원표(袁彪)를 토벌사로 삼아 대군을 동원하여 장무 토벌에 나섰다. 동원된 병력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장무로서는 무력으로 대항해봤자 승산이 없었다. 이들은 작전을 바꾸었다. 돈만 있으면 죽을 사람도 살릴 수 있는 황금 만능의 시대였으므로 유육·유칠은 뇌물로써 사태를 수습하여 위기를 모면할 공작을 폈다.
다행히 유근의 심복인 환관 장충(張忠)이 장무와 동향으로 바로 이웃에서 살던 사이였으므로 유육 등은 이 인연을 이용하여 장충을 만나 교섭을 진행시켰다. 교섭 결과 뇌물의 액수는 은 2만 냥으로 낙착되었는데 최종 결정권자인 유근에게 바칠 은 1만 냥은 별도 지불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유육 등은 은 3만 냥을 염출하는 방법을 연구하였으나 최종 결론은 국고를 털 수밖에 없었다. 도적의 구명(救命) 공작금을 마련하기 위해 또 도적질을 해야 하는 상황에 몰린 것이다. 국고를 털기 위해서는 더 많은 무리를 모으지 않으면 안 되었으므로 그들은 서둘러 준비를 진행시켰다. 준비가 진행되는 가운데 그들은 더 큰 것을 노리게 되어 마침내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유육 등은 패주성(하북성 문안 북쪽)을 공략하여 수비대장을 죽이고 기세를 올리며 많은 군중들을 모았다. 이들 가운데는 조수(趙鐩)라는 사대부가 있었는데 그는 반란을 피하던 중 아내가 반란군에게 잡히자 맨주먹으로 두 사람의 반란군을 죽이고 반란군에게 잡힌 자였다. 유육은 그의 호기와 용맹에 감동하여 포박을 풀어주고 동참할 것을 설득하여 가담시켰다. 조수는 반란군의 간부가 되자 사대부다운 명령을 전군에 내렸다.
“살인·약탈·겁탈을 일체 금한다.”
조수가 반란군에 가담함으로써 이 반란군은 정의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종이돈
명대에 종이돈이 발명되었다. 최초의 종이돈은 엄밀히 말하자면 어음과 같은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혜안백(惠安伯) 장위(張偉)를 총병관에 임명하고, 우도어사(右都御史) 마중석(馬中錫)을 군무 제독으로 삼아 반란군 토벌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런데 장위·마중석은 모두 귀족 출신으로 군사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토벌보다는 귀순 공작에 힘을 쏟았다.
때마침 조정군의 참장 상옥(桑玉)이 유육·유칠 형제를 추격한 끝에 민가에서 그들을 포위하였다. 유육·유칠은 몇 사람의 부하밖에 거느리지 않았기 때문에 독 안에 든 쥐가 되고 말았다. 위기에 몰린 이들은 상옥에게 두둑한 뇌물을 보냈다. 그러자 상옥은 포위망을 늦추었고, 그 사이에 반란군의 제언명(齊彦名)이 원군을 거느리고 달려와 유육 형제는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 후 반란의 규모는 더욱 확대되었다. 반란군은 두 갈래로 나누어 유육 형제와 제언명은 산동으로 향하고, 양호(楊虎)·조수는 하남으로부터 산서로 향해 공격을 가하였다. 이들은 종횡 무진으로 각 주·현을 마구 짓밟아 피해 지역이 점점 늘었다. 지나는 곳마다 노략질과 살상이 심하여 무인지경을 이루었다.
마중석은 산동 덕현(德縣)에 진을 친 유육의 군영에 견여(肩輿, 어깨에 메는 임시로 만든 간단한 수레)를 타고 단신으로 들어가 유육을 만나 이해득실을 들어 귀순할 것을 권유하였다. 유육은 솔직히 본래 반란을 일으킬 마음이 없었고 우발적으로 끌려들어간 것이 사실이었으므로 마중석의 권유에 따라 귀순을 고려했다. 그러나 동생 유칠의 의견은 달랐다.
“기호지세(騎虎之勢, 범을 타고 달리는 듯한 기세로 중도에서 그만둘 수 없는 형세)는 중간에 그칠 수 없습니다. 하물며 환관이 천하의 권리를 장악하고 있는 이때에 아무리 마중석이 생명을 보장한다는 등 갖가지 조건을 제시한들 그것이 지켜질지 극히 의문스럽습니다. 환관들의 내키는 대로 내뱉는 한마디에 죽임을 당할 가능성도 적지 않습니다.”
유칠의 말을 듣고 보니 유육도 그렇게 생각되었다. 유육은 귀순할 생각을 철회하였다.
유육 형제가 거느리는 수만의 군중은 하북·산동을 횡행하고, 양 호·조수가 거느리는 13만의 병졸과 5천의 기병은 강소·호북에까지 세력을 뻗쳤다.
토벌군의 책임자인 장위·마중석은 이따금 북경의 조정에 승전보를 올렸으나 이것이 모두 허위 보고임이 밝혀져 전적 불량이라는 이유로 북경으로 소환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투옥되었다. 이들을 대신하여 새로 파견된 병부시랑 육완(陸完)과 부도어사 팽택(彭澤)은 부지런히 승전보를 올리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롭고, 그렇다고 허위 보고를 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보통 양민을 습격하여 승전을 가장했다.
유육의 군대도 관군이 추격하면 양민을 방패로 내세웠기 때문에 무고한 양민들이 관군과 반란군 가운데서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다.
이러한 사태가 이어지는 동안 조정군의 도독과 도어사, 지휘관이 자주 교체되면서 많은 전사자를 냈다.
결국 선부(宣府, 북쪽 변방과 가까운 곳)의 군사와 요동의 군대가 동원되어 출동함으로써 유육 등의 반란 사건은 어렵게 진압되었다. 유육은 한구(漢口, 호북성)의 싸움에서 익사하고 유칠과 제언명은 진강(강소성)까지 후퇴했다가 배를 버리고 낭산(狼山)으로 들어갔으나 육완군에 포위되었다. 제언명은 전사하고 유칠은 자살로 최후를 마쳤다. 조수는 강하(江夏, 호북성)까지 도망쳤으나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돼 처형되었다. 유육 등의 반란군이 섬멸된 것은 정덕 7년(1512) 8월이었다.
뇌물 문제로 시작된 반란은 뇌물 에피소드를 남기면서 어렵게 끝났다. 이 반란으로 인한 국고의 지출은 중앙에서만도 은 2백만 냥에 달했고, 반란에 휩싸인 각 지방의 재정은 빈털터리가 되었다.
유육의 반란과 때를 같이하여 강서·사천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사천에서는 남정서(藍廷瑞)라는 자가 순천왕(順天王)이라 일컫고 10만 명의 무리를 모았으나 정부의 계략에 말려들어 사로잡히고 그의 부하 요마자(廖麻子)가 탈출하여 최후까지 저항하자 조정에서는 토벌 사령관을 해임하고 유육의 반란을 진압한 팽택을 기용함으로써 어렵게 진압할 수 있었다.
[출처] 명나라 정치의 부패와 민란|작성자 새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