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의 창업
곤양의 대전
후한을 창시한 광무 황제 유수(劉秀)의 자는 문숙(文叔)으로 그는 장사(호남성)의 정왕(定王) 유발(劉發)의 후손이다. 전한의 경제가 유발을 낳고, 유발은 용릉후(舂陵侯) 유매(劉買)를 낳았다. 유매 때부터 대대로 용릉후의 자리를 이어오다가 3대째에 이르러 황제에게 청원하였다.
“용릉은 저습지대이므로 살기가 불편하니 영지를 다른 곳으로 바꾸어주십시오”
이 청원이 받아들여져 남양(하남성)의 백수향으로 전봉되었다. 이곳을 그대로 용릉이라 부르고 용릉후 일족들이 모두 이주하여 살았다. 유매의 막내아들 유외(劉外)가 회(回)를 낳고 회는 남돈(南頓) 현령 흠(欽)을 낳았는데 이 흠이 남돈에서 유수를 낳았다.
유수가 태어날 무렵 한 줄기의 볏잎에서 9가닥의 이삭이 패는 길조가 나타났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수(秀)’로 지었다. 이보다 앞서 어떤 철인이 용릉을 바라보면서 말하였다.
“운수대통이로군, 상서로운 구름이 저렇게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으니!”
이렇게 상서로운 조짐이 나타난 가운데 태어난 유수의 인상은 누가 보아도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유난히 높은 코에 이마 중앙의 뼈가 해 모양으로 두둑하여 관상가들이 귀인의 상으로 말하는 ‘융준일각(隆準日角)’의 인상이었다.
어느 날 채소공(蔡少公)이라는 사람이 유수의 집 앞을 지나가다가 유수를 보고 말하였다.
채소공은 도참1) 을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러자 마침 한자리에 있던 손님이 물었다.
“그렇다면 국사공(國師公)2) 유수를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이를 지켜보고 있던 유수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손님께서는 무슨 이유로 내가 천자가 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는 겁니까?”
유수는 소년 시절 “벼슬을 한다면 집금오(執金吾), 장가를 든다면 음여화(陰麗和).”라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집금오란 황제의 신변 경호와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책임자로 보는 사람들이 위압감을 느끼도록 항시 위엄 있고 화려한 옷차림을 갖추었으며, 순찰시에는 많은 기마 부대를 거느리고 위풍당당히 행진하였다. 젊은 시절의 유수는 그 화려하고 위풍당당한 모습이 무척이나 부러웠던 모양이었다.
음여화는 당시 남양군 신야현의 호족 음씨의 딸로 절세 미녀였다. 젊은 시절의 유수는 화려한 관직에 오르고 미인을 아내로 맞이하기를 꿈꾸는 일반 청년과 다를 바가 없었다.
후에 광무제 유수는 그의 소원대로 절세의 미녀 음여화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고, 집금오의 자리를 훨씬 뛰어넘은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비단 깔개
17년 신시(新市)·평림군(平林軍)이 일어나자 남양 지방에서도 군사를 일으켜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하남성 완현 출신 이통(李通)은 마침내 유수와 상의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유수의 형 유연(劉縯)의 자는 백승(伯升)이다. 원래 성질이 과격한 그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한왕조 부흥을 외치며 평소 가업은 돌보지 않고 재산을 던져 천하의 영웅호걸과 사귀기를 좋아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평소 친교가 있던 식객들을 사방에 보내어 군사를 모집하는 한편 유연 자신도 용릉의 자제들에게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두려워 도망치면서 그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백승의 부하로 들어가면 그의 과격한 성질 때문에 전투에서 패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유수가 붉은 장군의 옷차림에 관을 쓰고 돌아다니자 모두가 안심하였다.
“유수와 같이 근엄한 인물이 싸움터에 나가려 하시다니!”
유연이 다시 사람들을 보내 각 지방에 주둔하고 있는 제장들을 설득하자 신시·평림·하강 등 여러 군단이 속속 모여 들어 그 수가 수만에 이르렀다. 이렇게 많은 군단으로 불어나자 이를 통솔할 인물을 추대하자는 의논이 일어났다. 제장들은 한왕조의 혈통을 이은 유씨를 천자로 세워 백성들의 여망에 부응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남양 출신 호족들과 하강병의 장수 왕상 등은 유연을 추대하려 하였으나, 신시·평림군의 장수들은 유연의 명석한 두뇌와 지나친 결단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유현(劉玄)을 세워 경시(更始) 장군이라 칭하고, 유연을 대사도(大司徒), 유수를 장군으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이들 경시제의 반란군과는 별도로 여모(呂母)라는 과부가 자식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모은 집단을 ‘적미군(赤眉軍)’이라 칭하여 번숭(樊崇)의 지휘 아래 동쪽에서 반란을 일으켜 왕망군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왕망은 태사 경상(景尙)과 경시 장군 왕당(王黨)을 파견하여 진압하려 하였으나 도리어 적미군에게 패배하였다. 유현이 경시 장군이라 일컬었다는 사실은 위에서 언급한바 한쪽은 반란군이고 한쪽은 왕망의 정부군이라는 이야기다.
왕망은 지황(地皇) 3년(22)에 태사 왕광(王匡)을 파견하여 적미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앞서의 태사 경상은 적미군의 번숭에게 죽임을 당했다. 녹림군에도 왕광이라는 지도자가 있었는데 왕망의 태사 왕광과는 동명이인이다. 왕망은 또 염단(廉丹)을 경시 장군으로 삼아 왕광과 합류시켰다.
정부군과 반란군을 식별하기 위하여 반란군이 붉은 물감을 눈썹에 칠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정부군과 반란군의 복장이 똑같았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적미군과 정부군의 제2차 전투에서도 적미군이 승리하여 왕광은 격퇴되고 염단도 살해되었다.
이즈음 적미군의 병력은 10만 대군으로 증강되어 있었다. 적미군의 간부들조차 이렇게 막강한 대군사력으로 늘어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승리하는 쪽에 가담하려는 군중 심리가 작용하게 마련이다. 적미군이 연전연승을 거두자 군사력이 많이 증강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동마차
유현이 장군으로 추대된 곳은 남양군에 있는 육수(淯水)가에서였다. 얼마 후 유현을 황제의 위에 오르게 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자 유연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남양 지방과 동쪽의 적미군이 크게 위엄을 떨치고 있는 이때에 우리가 황제를 세운다면 적미군도 지지 않고 또한 황제를 세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왕망을 멸망시키기 전에 내전으로 번질 우려가 있습니다. 황제를 일컫기보다는 차라리 왕이라 칭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곳 남양으로부터 북상하여 곤양(昆陽)을 평정한 다음 낙양을 정복하고 다시 서쪽으로 나아가 장안을 함락한 후라야 비로소 중원의 주인이 되는 것이니, 지금 단계에서 황제를 일컫는다는 것은 시기 상조라는 것이 유연의 반대 이유였다.
그러나 신시군 출신의 간부 장앙(張卬)이 칼을 빼어들고 즉위식 강행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유현이 경시제로서 황제 위에 올랐다. 황제 위에 오르고 군신들의 조회를 받게 되자 어쩔줄을 모른 경시제가 “나는 아무것도 모르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소.” 하며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해 식은 땀을 흘리며 손을 흔들 뿐 한마디 말도 못했다. 이에 호걸들은 몹시 실망하였다.
유현의 즉위는 신시·평림계 장수들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실현되었으나 그 이면에는 야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허수아비 황제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왕망은 경시제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대군을 출동시켰다. 총사령관에는 대사공 왕읍(王邑)이 임명되었다. 왕읍은 왕망의 사촌동생으로 동원된 군대는 1백만 명이었다. 왕망은 이 군대를 ‘호아오위병(虎牙五威兵)3) ’이라 일컫는 한편 병법 63가(家)의 도사들도 출동시켰다.이들 병법 도사들은 각기 특색이 있는 도서나 기구 등을 휴대하고 출동하여 장관을 이루었고, 그 위에 엄청난 보물과 맹수들까지도 동원하였다.
“풍요로움과 위엄을 과시함으로써 산동(함곡관 동쪽)의 반란군을 위압하라.”
이것이 왕망이 노린 이번 작전이었다.
왕망군은 행군하면서 엄청난 보급 물자와 보물, 특수한 기구 등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면서 상대방에게 공포심을 주는 한편 백성들에게 왕망 정권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어디에 가담할까 망설이는 자들에게 왕망군에 가담하지는 않을망정 적어도 반란군에 지원하려는 생각은 단념하도록 하는 효과를 노린 일종의 시위 작전이었다.
총사령관 왕읍이 낙양에 이르렀을 때 그의 병력은 42만 명이었다. 그들은 보기 드문 거인 거무패(巨無覇)를 진지를 지키는 장교로 임명하고 호랑이·표범·물소·코끼리 등 맹수를 앞세워 사기를 돋우는 한편 호왈백만이라 칭하니 펄럭이는 깃발은 천 리까지 이어졌다.4)
경시제의 제장들은 왕망군의 이 같은 우세함을 보고 모두 놀라 곤양성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병법 63가의 도사들을 총동원하여 종군하게 한 것은 작전 미숙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병법에는 여러 유파가 있게 마련인데 왕망은 우열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모두 동원하였다. 실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이 63파의 도사들이 서로 자기의 병법을 관철시키기 위해 각자의 의견을 가지고 입씨름을 벌일 것이니 어느 겨를에 실전에 응용할 수 있겠는가?
호왈백만이라고 했지만 실제 병력은 40만 명이었으며 군량의 보급도 엉망이고, 명령 계통도 서지 않았다.
이들 왕읍이 거느린 대군은 우선 곤양성에 다다랐다. 이때 곤양성은 유수가 지키고 있었다. 유수는 왕봉(王鳳)에게 8, 9천 명의 군사를 줘 곤양성을 굳게 지키게 하고, 자신은 원군을 모집하기 위하여 겨우 13명의 말탄 군사만을 거느리고 급히 남문으로 빠져나왔다.
왕망의 육완령
왕망이 반포한 육완의 령. 소금과 철, 술의 전매와 광산업, 어업, 야동주전을 국영화한다는 내용이다.
23년 6월 왕읍의 대군은 곤양성을 수십 겹으로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었다. 화살이 비오듯 쏟아져 성 밑에 있는 군대와 주민들은 물을 길러 갈 때도 덧문짝을 지고 다녀야 했다. 전차가 마구 성벽을 쾅쾅 부딪치는 바람에 성벽 지하도가 패이고 곤양성은 함락 직전의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이때 유수가 3천 명의 원군을 거느리고 나타나 불의의 기습으로 적의 본진에 돌격해 들어가 대승을 거두었다.
왕망의 40만 대군이 유수에게 대패한 원인은 왕망군의 작전 미숙에 있었다. 왕망군에는 무려 63파나 되는 병법가들이 있었기 때문에 의견도 각양각색이었다.
“곤양은 조그마한 성입니다. 그런데도 경시군은 1만 명의 병력으로 수비하고 있으니 성에 비하여 수비병이 많습니다. 따라서 공격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곤양성을 함락해봤자 대세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것입니다. 또 반란군의 총수인 경시제 유현은 이곳에 없고 완성(宛城)에 있으니 이곳 곤양성은 그대로 두고 완성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일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포위한 바에야 함락하지 못하면 체면이 서지 않을 뿐 아니라 황제로부터 문책당할 것입니다.”라고 반박하였다.
작전회의는 갑론을박이 되풀이될 뿐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 결국 총사령관 왕읍의 주장대로 곤양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으나 공격 방법에 있어서도 의견이 분분하였다. 장군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포위 작전을 벌일 때는 완전 포위를 피하고 한 쪽에 도망칠 수 있는 길을 틔워놓으면 포위당한 쪽에서는 도망칠 것을 생각하여 죽기로써 싸울 마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곤양성을 탈출한 경시군의 장병은 틀림없이 경시제가 있는 완성으로 들어갈 것이니 이렇게 되면 완성의 경시군 본부는 공황(恐慌) 상태에 빠져 저절로 항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총사령관인 왕읍은 끝까지 완전 포위를 주장하였다.
“손자병법에서 말한 도망칠 길을 틔워놓아야 한다는 것은 대등한 전쟁 상태에서 적용해야 할 병법이고, 이번 싸움은 아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하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
왕읍의 눈에는 적을 완전히 섬멸하고 승전고를 울리는 모습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가량
시황제가 도량형을 배포한 것을 본떠 왕망이 만든 되로 신왕조의 필연성을 오행사상에 근거해 설명한 명문이 새겨져 있다.
반면 유수는 원래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로 평판이 나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결단을 내리기까지는 신중을 기하다가 일단 결단을 내리면 물불 가리지 않는 용감한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신중한 면만을 알 뿐 결단을 내린 후의 행동은 전혀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3천 명 군사의 선두에 서서 포위군을 급습하는 유수를 보고 성안에 있던 왕봉과 그의 장병들은 모두 다 ‘저 조심성 많은 유수가 맨 앞에 서서 돌격하는 것을 보니 성 밖에서 많은 원병을 모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여 용기백배, 성문을 열어젖히고 출격하였다.
왕읍이 지휘하는 정부군은 40만 대군이었으나 명령 계통과 질서가 엉망진창이 되어 겨우 1만여 기의 경시군에게 본진을 유린당하고 패주하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폭풍우가 몰아쳐 하천이 범람하는 바람에 익사한 군사의 수만도 1만 명이 넘는 참패였다. 이것이 중국 전사상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을 무찌른 것으로 유명한 ‘곤양의 싸움’이다.
현재의 곤양
곤양의 싸움은 천하의 대세를 가름하는 운명의 일전이었다. 양다리를 걸치고 천하의 형세를 관망하던 사람들은 왕망의 대군이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곤양의 싸움을 계기로 하여 각지에서는 왕망 정부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졌다. 백만 대군이라 호언하던 왕망의 정부군은 떼를 지어 고향으로 도망쳤다. 그들의 입을 통하여 왕망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이 전국적으로 퍼지니 결과적으로 그들은 반왕망 진영의 선전원과 같은 구실을 하였다.
정보통으로 이름난 왕망도 각 지방에 선전 대원을 파견하여 “경시제 유현의 무리들을 모두 죽여 없앴다.”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실제 전투에 참가했던 장병들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누구 하나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왕망은 선전 싸움에서도 패배한 셈이었다.
그러나 경시군 내부에서도 커다란 사건이 발생하였다. 경시제 유현이 유수의 형 유연을 죽인 사건이었다. 무능하고 인망마저 없었던 유현은 항시 ‘이대로 나가다간 내 자리를 유연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유연을 경계하고 있었다.
유연의 부장 유직(劉稷)은 유현의 황제 즉위를 강력히 반대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유현이 황제에 즉위한 뒤 장군에 임명했을 때도 이를 거부하였다. 이미 즉위한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였으니 반역이라고 단정한 경시제 유현은 그의 심복들과 모의하여 유직을 체포, 처형하였다. 이때 유연은 자신의 부하에 관한 일이라 이를 강력히 반대했지만 경시제는 유연도 같은 죄목으로 그날 처형했다.
동한의 기사
경시제의 진영은 이 사건으로 분열의 위기에 직면했지만 유수의 신중한 행동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유수는 형의 억울한 죽음에 대하여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고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경시제에게 사죄하는 여유를 보였다. 그리고 형 유연의 장례 의식도 거행하지 않고, 평소 가깝게 지내던 친척과 친구와의 교제도 끊었다. 그는 자신의 과오에 대하여 말할 뿐 곤양 싸움의 수훈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유수의 범상하지 않은 지혜와 인내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경시제 유현도 곤양의 싸움에서 수훈을 세운 유수에 대해 트집잡을 일이 없었다. 경시제는 오히려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유수를 파로 장군(破虜將軍)에 임명하고 무신후(武信侯)에 봉하였다.
이때 장안의 황제 왕망은 정신 착란 상태에 빠져 침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오직 술과 전복만을 먹었으며 병서를 읽다가 피곤하면 안석에 기댈 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최발(崔發)이란 자가 왕망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하였다.
“옛날에는 나라에 큰 재앙이 있으면 하늘을 우러러 곡(哭)을 하여 구원을 빌었다 합니다. 폐하께서도 군신을 거느리시고 남교에 납시어 앙천대곡(仰天大哭)5) 하시어 구원을 빌어 보심이 좋을 듯합니다.”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지푸라기라도 붙들려고 버둥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왕망은 최발의 말을 받아들여 곡할 자를 선발하도록 하였다. 마침내 이색적인 통곡 경연 대회가 벌어졌다. 소리가 구슬퍼 사람의 간장을 에는 듯한 울음을 내는 자에게는 무조건 낭(郎)의 벼슬이 내려졌다. 낭은 200석의 녹을 받는 숙위관(宿衛官)이었다. 이렇게 해서 임명된 낭의 숫자가 무려 5천 명에 이르렀다 하니 정말 한심한 일이다.
한편 경시제는 왕광으로 하여금 낙양을 공략하도록 하고 장안 방면의 공략은 신도건(申屠建), 이송(李松)에게 맡겼다. 이들이 진격하는 동안 가담해오는 자가 잇따라 우광(于匡), 등엽(鄧曄) 등이 합류하였다. 이들은 그 지방 출신으로서 지리에 밝았기 때문에 단숨에 장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맨 먼저 왕궁에 쳐들어간 것은 등엽의 부하 왕헌(王憲)이었다. 왕헌은 선평문(宣平門)을 깨고 들어가 궁에 불을 질렀다. 불길이 치솟자 왕망은 허둥지둥 불을 피하여 선실(宣室)로 들어가 두병(斗柄)6) 을 끌어안고 앉으며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내리셨으니 한나라 군대가 감히 나를 어찌 하겠느냐?” 하며 큰소리쳤다. 이 두병을 끌어안고 있으면 백만의 대군도 그 앞에 꿇어 엎드린다는 것이다. 왕망은 이것을 진정으로 믿었으나 물론 허사였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왕헌이 선평문으로 들어간 것은 9월 무신일이고 왕망의 신하들이 왕망을 부축하여 연못 가운데 있는 점대(漸臺)로 옮긴 것은 경술일 이른 아침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왕망은 무려 3일 동안이나 궁중에서 버틴 것이다.
경술 저녁 무렵에야 왕헌의 군대가 점대에 올라가 왕망의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왕망의 살을 저미고 뼈를 잘라 가졌다. 그 살과 뼈를 조금이라도 빼앗아 가지려고 서로 다투다가 수십 명이 짓밟혀 죽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왕망의 살을 조금이라도 가져가면 공으로 인정되기 때문이었다.
왕망의 머리는 경시제가 있는 곳으로 보내져 저잣거리에서 효수되었다. 백성들은 왕망의 머리를 때리거나 칼로 찔렀고 그 혀를 잘라 먹기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강에서 최후를 마친 항우의 몸뚱이는 다섯 갈래로 잘라졌지만 왕망의 몸뚱이는 수천 갈래로 나뉘었다. 역사의 냉혹함을 새삼 느낄 수 있겠다.
왕망을 죽인 것은 두오(杜吳)라는 사람이고 목을 자른 사람은 공빈취(公賓就)였다. 왕헌은 자칭 한의 대장군이라 일컫고 궁중에서 빼앗은 옷을 제멋대로 입고 궁중의 거마(車馬)도 제 마음대로 사용하였다. 물론 수레에는 황제의 깃발을 달고 다녔다. 왕헌의 이 같은 행동을 본 부하들은 약탈 집단으로 변하여 재물은 물론, 후궁의 미녀들까지도 먼저 갖는 게 임자라며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
얼마 후 경시제로부터 장안 공략을 명령받고 파견된 신도건·이송이 장안에 입성하였다. 그들은 왕헌을 체포하여 목을 베었다. 왕망의 전국 옥새와 천자의 수레, 깃발을 제멋대로 사용했으며 궁녀를 약탈했으니 대역부도라는 죄목이었다. 장안의 입성과 때를 같이하여 낙양도 함락되었다. 이때 낙양을 공략한 것은 경시군의 간부 왕광이었고 낙양을 수비하던 정부군의 책임자는 태사 왕광(王匡)이었다. 동명이인의 왕광이 왕광을 잡아죽인 것이다.
경시제 유현은 일단 낙양에 들렀다가 곧바로 장안으로 달려갔다. 황제로서 상속받을 무진장한 유산이 장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시제 유현이 장안에 이르러 장락궁에서 군신들의 조회를 받게 되었다. 경시제가 전전(前殿)에 오르자 관리들이 서열에 따라 차례로 뜰 가운데 벌여 서니 그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숙연하였다. 경시제는 부끄러워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자리만 뜯고 있을 뿐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장안에 들어온 경시제의 정치는 한마디로 말해 제멋대로였다.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궁전 뒤뜰에서 잔치만 벌였다. 경시제는 우대사마(右大司馬) 조맹(趙萌)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고, 이 여인을 총애하여 일체의 정사를 조맹에게 위임하였다. 조맹은 방종한 인물로서 마음 내키는 대로 살인을 하였다. 충직한 신하가 조맹의 비위 사실을 호소하자 경시제는 그 자리에서 그의 목을 베게 하였다. 한나라의 부흥을 그리워하던 백성들의 마음은 차츰 왕망의 시대가 오히려 그립다고 생각할 지경이었다.
권좌에 오르거나 그 근처에 가게 되면 일종의 부패 심리가 생기는 것이 우리 인간의 속성인 모양이다. 권좌에 오르기까지 긴장 상태가 길면 길수록 반작용은 더욱 커지는 것일까? 경시제를 황제로 옹립한 신시·평림계의 무리들도 다분히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맨 먼저 입성한 왕헌을 처단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뒤이어 장안에 들어온 경시제의 본군도 왕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인간의 속성을 드러낸 것이다.
이 무렵 유수는 경시제로부터 하북을 평정하라는 임무를 명령받았다. 경시제는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낙양에서 서쪽으로 장안에 들어왔으나, 유수는 반대로 군대를 거느리고 동북쪽으로 떠나게 되었다. 동북 지방에 난립해 있는 군벌들을 경시제에게 귀순시키기 위해서였다. 경시제 정권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은 유수로서는 크나큰 행운이었다.
경시제의 입장에서 보면 유수는 거북스런 존재였을 것이다. 유수의 입장에서도 경시제의 정권 안에 있으면 시기와 의혹의 대상이 되어 언제 숙청될지 늘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숙청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광무제 유수의 능
왕랑과의 싸움
당시 하북에서는 한단 출신 왕랑(王郞)이 하북에서 요동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는 강력한 정권을 수립하고 있었다. 그 지방의 호족들까지도 경시제의 정권 밑에 들어가는 것을 불명예로 여길 정도로 경시제의 인망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러면 왕랑이란 인물은 도대체 어떠한 인물인가? 그는 일개 복술가에 불과하였다. 그는 자신의 인망을 높이기 위하여 자칭 전한 시대 성제(成帝)의 아들 자여(子輿)라고 칭하였다. 자신의 어머니가 성제 때의 가수였는데 성제의 총애를 받아 왕랑을 낳았다는 것이다. 당시 미천한 신분인 그의 모친은 황후 조씨가 왕랑을 해칠까 두려워 다른 사람의 자식이라고 속였기 때문에 자신이 무사히 살아날 수 있었다고 사칭하였다. 그런데 성제에게 숨겨 놓은 자식이 있다는 소문은 오래 전부터 있어 이보다 십수 년 전에도 “내가 성제의 아들이다.”라고 자칭하며 궁궐에 나타나는 자가 있어 왕망에게 죽임을 당한 사건도 있었다.
이 같은 연유로 백성들은 왕랑의 말을 믿고 따랐으며 그를 천자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 하북 지방의 황족들까지도 왕랑을 천자로 추대하는 데 적극 협력하였다.
궁궐 화상석
경시제로부터 하북 평정의 명령을 받은 유수는 하북에 진군하여 군현을 지날 때마다 죄수들을 석방하는 한편 왕망의 가혹한 법령을 해제하고 한나라 때의 제도를 회복하였다. 군현의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여 앞을 다투어 술과 고기를 가지고 나와 장병들을 맞아 위로하였으나 유수는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됩니다.”라며 일체 받지 않았다.
남양 출신 등우(鄧禹)라는 사람이 말채찍을 쥐고 유수를 따라 하남성에 이르렀다. 유수가 등우에게 물었다.
“귀공께서 나를 이곳까지 따라온 것은 혹시 나를 섬기어 벼슬을 얻고자 함이 아닙니까?”
등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명공의 위엄과 덕이 사해만민에게 미치게 되는 날, 소생도 견마(犬馬)7) 의 공을 세워 그 이름을 청사에 남기고자 할 따름입니다. 제왕의 사업은 막중 대업입니다. 지금 경시제는 범용한 인물일 뿐 제왕의 대업을 이룰 만한 인물이 못 됩니다. 명공이야말로 천하의 영웅들을 설득하여 내 편으로 끌어들이고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만민의 생명을 구제하는 주인공이 되신다면 천하를 평정하기는 족히 염려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등우의 말을 들은 유수는 크게 기뻐하여 등우를 참모로 삼아 천하 평정 계획을 함께 의논하였다.
소모양 등불
필부필부도 한평생을 살아가려면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게 마련인데 하물며 왕조를 창립하는 제업에 있어서야 어찌 어려움이 없겠는가? 광무제 유수도 왕랑군에 쫓기어 한때 위기를 맞은 적이 있었다.
유수가 계성(蓟城)을 공략하자 계성의 백성들은 뜻밖에도 유수를 배반하고 왕랑측에 가담하였다. 위험을 느낀 유수는 곧바로 성에서 탈출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남쪽으로 달렸다. 무루정(蕪蔞亭)8) 에 이르러 한숨을 돌리고 있었는데 풍이(馮異)가 뜨끈뜨끈한 팥죽을 쑤어 바쳐 허기를 면하였다. 계속 달려 요양현(饒陽縣)에 이르렀을 때는 먹을 것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유수 일행이 하곡양(下曲陽)에 이르렀을 때였다.
“왕랑의 추격병이 가까이 있습니다.”
급보가 날아들었다. 유수의 군대는 당황하여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고 급히 호타하(滹沱河)를 향해 달렸으나 척후병이 돌아와 보고했다.
“호타하가 얼음이 얼지 않아 배가 없이는 건널 수 없습니다.”
앞에는 강이 가로막혀 있고 뒤에서는 적병의 추격이 급하니 진퇴유곡이었다. 유수는 무심코 왕패(王覇)를 불러 말하였다.
“다시 한 번 호타하에 가서 확인해보고 오라.”
왕패는 얼음이 얼지 않았다고 사실대로 보고하면 군 전체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거짓을 보고했다.
“얼음이 두껍게 얼어 충분히 건널 수 있습니다.”
유수의 군대가 호타하에 이르러 보니 천우신조였는지 호타하는 완전히 결빙되어 있었다. 유수의 군대는 용기백배하여 도강을 거의 완료하고 5, 6기만이 미처 건너지 못했는데 갑자기 얼음이 풀려버렸다.
유수의 군대는 계속 도망쳐 남궁(南宮, 기주)에 이르렀다. 폭풍우를 만나 길가의 빈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풍이는 섶을 가져오고 등우는 섶에 불을 붙였다. 유수는 아궁이의 불을 쬐며 젖은 옷을 말렸다. 풍이는 또 보리밥을 지어 유수에게 올렸다.
한나라의 토용
유수의 도망 행진은 계속되었다. 이들 일행은 하박성(下博城, 신도 부근)에 이르렀을 때 길을 잃었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 감각마저 잃었는데 흰옷을 입은 한 노인이 나타나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실망하지 마시오. 신도(信都) 태수 임광(任光)이 당신들을 위하여 성을 굳게 지키고 있으니 신도 땅으로 가시오. 이곳에서 80리밖에 안 되는 거리이니 용기를 내시오.”
유수는 다시 말을 달려 신도로 향했다.
이때 기주(冀州)·유주(幽州) 일대는 모두 왕랑에게 항복하였으나 오직 신도 태수 임광과 화융(和戎) 태수 비융만이 버티고 있었다. 유수의 군대가 그곳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은 임광은 크게 기뻐하여 성 밖까지 나와 유수를 맞이하였고 비융 또한 이들과 합류하였다. 용기를 얻은 유수는 이곳을 발판으로 가까운 현읍(縣邑)에서 군대를 모집하여 정병 4천 명을 모았다. 유수는 인근 군현에 격문을 보내고 한단을 공격하여 전세를 만회하였다. 그러자 먼저 왕랑에게 항복했던 장수들이 유수에게로 돌아왔다. 유수는 다시 군사를 이끌고 광아성(廣阿城, 거록)을 점령하였다.
어느 날 유수는 지도를 펼쳐 등우에게 보이며 말했다.
“천하의 군현이 이렇듯 넓은데 이제 겨우 한 고을을 얻었소. 어느 겨를에 이 넓은 천지를 얻는단 말이오?”
그러자 등우는 이렇게 간하였다.
“지금 천하는 난마(亂麻)처럼 어지러워 어진 임금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마음은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어진 임금이 나라를 일으키는 데는 오로지 덕의 있고 없음에 달려 있는 것이지, 땅의 크고 작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걱정은 마시옵고 인덕을 베푸는데 힘쓰셔야 합니다.”
경시 2년(24) 5월 유수는 마침내 한단을 함락하고 도망치는 왕랑을 추격하여 목을 베었다. 곤양의 대전에 이어 불과 1년 만에 다시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어차도
준마가 끄는 마차 양쪽에 호위무사가 앉아 있다.
유수는 한단에서 왕랑과 지방 호족들 사이에 오고 간 수천 통의 비밀문서를 입수하였으나 그는 이 문서를 제장들이 보는 앞에서 불살라버렸다.
“왕랑과 내통한 자들은 이것으로써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은 유수가 녹록치 않은 정치가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장안의 경시제는 왕랑을 평정한 유수의 공적을 치하하고 사자를 보내 소왕(蕭王, 패군 소현)에 봉한다는 전지를 내렸다. 그리고는 군대를 해산하고 장안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경감(耿감)이 유수에게 진언하였다.
“장안의 경시제는 천하 만민을 편안히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이번 기회에 경시제의 곁을 떠나 사해를 평정하고 천자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장군이 취할 사업입니다. 하북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다는 구실을 내세워 경시제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유수는 경감의 말에 따라 자립하기로 뜻을 굳히고 아직 평정되지 않은 하북의 반란 집단들을 토벌하기로 하였다. 이는 아주 터무니없는 구실은 아니었다. 아직도 10여 개의 반란 집단들이 남아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동마군(銅馬軍)이 가장 강하였다. 유수는 이들 동마군을 포양(蒲陽)에서 대파하고 항복을 받았다.
이즈음 적미군이 서쪽 장안을 공략할 것이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들 적미군이 만약 장안을 공략하여 깨뜨리고 나면 관중까지도 넘볼 것이므로 등우를 전장군(前將軍)에 임명하여 휘하 정병 3만 명을 주어 관중을 지키게 하고, 유수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연나라·조나라를 공략하여 반란 집단을 모두 평정하였다.
소왕 유수가 회군하여 중산부(하북)에 이르자 제장들이 천자의 칭호를 올렸으나 소왕은 이를 거절하였다. 그 후 기주 남평극(南平棘)에 이르렀을 때 제장들이 또다시 천자로 칭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소왕이 또 거절하자 경순(耿純)이 간하였다.
“우리들이 가족과 친척과 고향을 버리고 대왕을 따라 싸움터에서 몸바쳐 싸우는 것은 대왕의 천하통일 대사업을 도와 반룡부봉(攀龍附鳳)9)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대왕께서 좋은 기회를 물리치시고 제장들의 의사를 꺾으신다면 장수들은 실망한 나머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장병들이 뿔뿔이 흩어진다면 다시 모으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풍이 또한 강력히 진언하였다.
“제장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천자의 위에 나아가심이 옳을 것입니다.”
그래도 유수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때마침 유생 강화(强華)라는 사람이 관중으로부터 적복부(赤伏符)10) 를 받들고 왔는데 거기에는 ‘유수가 군사를 일으켜 무도한 도적들을 물리치고 마침내 천명을 받아 천자가 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제장들은 이 도참설을 들어 다시 천자의 위에 오를 것을 간청하였다. 유수는 더 이상 사양할 수가 없어 마침내 호남(鄗南, 직례성 호현 남쪽)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연호를 건무(建武)로 고쳤다. 이때가 25년 6월의 일이고, 이 이가 후한의 시조 광무 황제이다. 광무 황제는 그 후에 낙양을 수도로 정하였다.
전왕의 금인
한무제가 전왕에게 하사한 옥새. 왕망 정권 때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나 광무제 때 다시 한왕조에 귀순했다.
적미군과의 충돌
광무제 유수가 호남에서 제위에 오름으로써 천하의 대세는 장안의 경시제와 광무 황제 유수, 그리고 적미군의 삼파전으로 압축되었다.
그러면 여기서 지금까지 적미군의 동정에 눈을 돌려보자.
적미군의 내부에서는 진로 문제에 의견이 엇갈리고 있었다. 병사 개개인은 고향을 그리워한 나머지 그들의 고향인 산동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였으나 이와 반대로 서쪽으로 진출하자는 것이 적미군 간부들의 의견이었다. 만약 산동으로 진출할 경우 고향을 그리워하는 병사들이 뿔뿔이 흩어져 제멋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적미군은 해체된다는 것이 간부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경시제의 타락한 정치로 백성들의 마음이 날로 이탈하고 있다는 소식은 적미군의 간부에게도 전해지고 있었다. 인심을 잃은 집단과 싸워본 경험이 있는 그들은 경시제를 공격하는 데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동쪽으로 돌아가려는 병사를 서쪽으로 진출시키자면 그들을 설득할 구실이 있어야 했다. 가장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서쪽으로 진출할 경우 장안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수많은 재물을 모두 차지할 수 있다고 구체적으로 유혹하는 방법이었다. 적미군의 간부 번숭·봉안(逢安)·서선(徐宣)·사록(謝祿)·양음(楊音) 등은 이 같은 말로 병사들을 설득하여 30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장안을 목표로 진출하였다.
경시제는 장군 소무(蘇茂)를 보내 적미군을 막게 하였으나 소무는 대패하였다. 이어서 승상 이송(李松)이 파견되었으나 3만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주하였다. 적미군의 연전연승이었다.
군웅과 적미군의 진로
지금까지 적미군에는 강력한 정신적 지주가 될 만한 인물이 없었다. 다만 군중에 산동 출신 무당이 있어 항시 성양경왕(城陽景王)을 신으로 받들어 제사를 지냈는데 그들이 믿은 것은 이 신앙뿐이었다.
성양경왕은 한고조의 손자 유장(劉章)이다. 유장의 형 유양은 제왕이고, 그는 주허후였다. 여씨 정권을 무너뜨릴 때 맨 먼저 여산의 목을 벤 공으로 주허후에서 성양왕으로 승진되었다. 빛나는 무공을 세웠기 때문에 산동 지방에서는 사람들에게 복을 내려주는 신으로 숭앙되고 있었다. 성양경왕의 의사가 무당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전해진다고 믿는 일종의 민간 신앙이었다.
유장
200년 전에 죽은 영웅신의 영험보다도 살아 있는 사람을 상징적 존재로 내세우는 것이 단결력을 더 강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적미군은 성양경왕의 후손을 찾아 그를 천자로 옹립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한낱 도적의 집단에 불과하였던 적미군이 왕조를 세우려는 집단으로 변신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성양경왕의 후손은 70여 명이나 되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정통에 가까운 사람은 유무(劉茂)·유분자(劉盆子)·유효(劉孝) 세 사람이었다. 이들 가운데 누구를 천자로 세우느냐가 문제였다. 상징적 존재이므로 누가 되든 상관 없다고 생각한 적미군은 추첨으로 결정하기로 하였다. 3개의 표찰 가운데 1개의 표찰에만 상장군이라고 써서 함에 넣고 연령순에 따라 제비를 뽑기로 하였다. 상장군의 표찰을 뽑은 것은 맨 마지막으로 뽑은 15세의 유분자였다.
유분자는 혈통은 황족이었지만 어려서부터 불우하여 글을 전혀 배우지 못하고 양을 치는 목동으로 성장한 소년이었다. 당시 이 소년의 모습은 머리는 마구 흐트러지고 맨발에 누더기 옷을 걸쳤으며 얼굴은 땀으로 얼룩져 꾀죄죄한 모습이었다. 이런 소년이 갑자기 천자로 옹립되어 적미군의 장졸들이 모두 신하의 예로 배례를 올리자 유분자는 벌벌 떨며 울음을 터뜨리려 하였다. 이때가 바로 광무제 유수가 즉위식을 가진 때와 거의 같은 무렵이었다.
이보다 앞서 정월에 방망(方望)·궁림(弓林) 등이 안정공(安定公) 유영(劉嬰)을 천자로 세워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았으나 경시제가 파견한 승상 이송의 군대에게 격파당한 사실이 있었다.
같은 해 4월 사천에서는 군벌 공손술이 성도(成都)에서 군사를 일으켜 황제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성(成)’이라 하니 이것은 한왕조의 부흥을 표방한 것이 아니고 새로운 왕조의 창건을 표방한 세력이었다.
당시 백성들이 한결같이 바란 것은 ‘질서 있는 사회’였다. 그들이 알고 있는 질서 있는 사회는 전한 왕조였으므로 전한의 시대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할 정도로 질서에 굶주려 있었다. 장안은 절망 상태에 빠져 있었다. 전한 후기 때 혼란을 왕망의 신정권이 바로 잡기를 기대하였으나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켰다. 왕망 정권을 무너뜨리고 환호 속에 장안에 입성한 경시제 정권 또한 백성들을 실망시키고 말았다. 이런 때 적미군이 소년 황제 유분자를 옹립하고 장안을 공략해 들어간 것이다.
적미군이 장안을 공격하자 경시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하여 탈출, 고릉(高陵)으로 도망치고 고란과 장군들은 모두 적미군에 투항하였다. 일단 탈출했던 경시제도 얼마 후 장안으로 돌아와 적미군에 투항하고 장사왕에 봉해졌다.
장안에 입성한 적미군 또한 경시제 정권과 마찬가지로 통치 능력이 없어 무질서한 상황은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경시제 정권의 무능으로 장안은 황폐화되어 있었으나 적미군은 황폐화된 장안을 부흥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수탈할 생각만 했다. 적미군 간부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산동의 병사들을 “장안으로 들어가면 무진장한 재물들이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설득했으나 장안에는 가질만한 재물은 거의 바닥나 있었고 식량마저 걱정해야 할 형편이었다.
이듬해 정월이 되자 장안성 안의 식량은 완전히 떨어져버렸다. 적미군이 3개월 동안에 다 먹어치웠기 때문이었다.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진 적미군은 궁전이든 민가이든 가리지 않고 불을 지르고 서쪽으로 향하였다. 먹고 살기 위한 약탈 행위이었다.
경시제는 이보다 앞서 사록(謝祿)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적미군의 소행이 너무나 혹독하였기 때문에 경시제에게 동정을 보내는 백성들이 있어 경시제를 살려 둘 경우 그를 옹립하려는 자들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으나 이 같은 행위는 자멸 행위에 불과하였다.
적미군은 폭도화되어 서쪽으로 향했으나 농(隴)의 외효(隗囂) 군대에게 격퇴당하여 다시 동쪽으로 패주하였다. 기진맥진한 적미군은 굶주리고, 추위에 얼어 죽어 사망자가 거리를 메웠다. 그들은 다시 장안으로 들어왔으나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눈이 뒤집힌 그들은 역대의 왕릉을 파헤치고 부장품을 꺼냈으나 이를 먹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다시 동쪽으로 길을 재촉하였다.
이들 적미군의 잔당 10여 명만이 의양(하남성)을 향해 몰려오자 광무제 유수는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대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적미군의 간부 번숭은 그들이 옹립했던 유분자와 승상 서선을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광무제 유수는 휘하 군마를 한군데 모아 정렬시키고 항복한 적미군의 군신에게 보이면서 물었다.
“그대들은 행여 항복한 것을 후회하지나 않겠는가?”
승상 서선은 머리를 조아리면서 답하였다.
“저희들은 호구(虎口)를 벗어나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온다는 생각으로 항복하였습니다. 항복한 것을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할 뿐 조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광무제는 감탄하며 말하였다.
“경이야말로 철중쟁쟁(鐵中錚錚)11) 이요, 용중교교(庸中佼佼)12) 로다.”
그리고는 항복한 사람 모두에게 낙양에 있는 전답과 가옥을 하사하고 유분자는 황제의 숙부인 조왕의 가신으로 삼았다. 이듬해 유분자가 실명하자 광무제는 형양 지방에 토지를 하사하여 평생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었다.
일찍이 광무제 유수가 왕랑과의 싸움에서 왕랑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진정왕(眞定王) 유양(劉楊)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었다. 유양을 끌어들이는 조건으로 그는 유양의 처조카인 곽씨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유수가 소년시절부터 그리워하던 절세의 미녀 음여화와 결혼한 것은 그로부터 일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광무제 유수는 제위에 오른 이듬해에 모반했다는 죄목으로 유양을 살해하였다. 한왕조의 부흥이라는 견지에서 본다면 준황족의 방계에 지나지 않는 유수보다도 떳떳한 황족인 진정왕 유양 쪽이 훨씬 정통에 가까웠다. 그 위에 왕랑을 제압하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 일도 있고 해서 은근히 유양을 경계하고 있다가 적당한 기회를 보아 모반죄를 뒤집어씌워 주살했던 것이다.
적미군에서 항복한 간부 번숭·봉안도 일단 사면하였다가 그 후에 모반죄를 적용하여 주살하였고 오직 서선만이 목숨을 보전하였다. 번숭·봉안은 위험 인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온화한 인정과 정도를 앞세우는 광무제 유수도 천하를 다스릴 때는 경계해야 할 인물을 철저히 배격하는 일면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적미군을 평정한 후 남은 것은 농(감숙성)의 외효와 촉(사천)의 공손술을 평정하는 일이었다.
건무 8년(31) 광무제는 농을 공략하고 있는 잠팽(岑彭)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사람은 만족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괴로워한다. 농을 평정하면 다시 촉 땅을 바라볼 것이다. 한 번 군사를 출진시킬 때마다 내 머리의 흰털이 자꾸 늘어만 간다.”
광무제는 이 편지에서 원정군을 보낼 때마다 자신의 흰머리가 늘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원정군의 노고를 생각하면 자신도 괴롭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인간의 욕망이란 한이 없는 것이어서 농을 평정하면 다시 촉을 바랄 것이라 하여 자신도 일개 인간으로서의 번뇌가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득롱망촉(得隴望蜀)’이란 고사성어는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
잠팽은 원래 완성의 싸움에서 항복한 왕망의 관료였으나 광무제는 그를 중용하였다. 건무 9년 외효는 병사하고 이듬해 그의 아들 외순이 항복함으로써 농은 평정되었다.
외효는 경시 원년에 군사를 일으켜 건무 초년까지 천수군에서 자칭 서주(西州) 상장군이라 일컫던 자였다. 그는 어느 날 마원(馬援)을 성도에 보내 공손술의 사람됨을 살펴보고 오라고 하였다. 마원은 원래 공손술과 잘 아는 사이였으므로 ‘공손술은 나를 보면 옛날과 같이 반가이 맞으며 기뻐할 것이다.’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를 찾아갔다.
마원
마원은 쌀로 농과 촉의 지형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마원을 맞이하는 공손술은 아주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뜰 좌우에 어마어마한 호위병을 벌여 세우고 마원을 인견하였다. 마원은 그들 수행원들에게 말하였다.
“지금 천하에는 수많은 영웅이 있어 자웅을 겨루고 있는 이때에 공손술은 겸양의 덕으로 국사를 맞이할 줄 모르고 쓸데없는 외관만을 꾸미려 하니 이래서야 어떻게 천하의 명사들을 오래 머물게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서둘러 돌아오고 말았다. 마원은 외효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자양(子陽, 공손술의 자)은 우물 안의 개구리입니다. 무턱대고 자신을 높이려고만 하니 상대할 인물이 못 됩니다. 낙양의 광무제 유수에게로 마음을 돌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외효는 마원의 의견을 받아들여 마원에게 친서를 휴대하고 낙양에 나아가 광무제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마원은 낙양에 나아가 궁궐 문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궁중으로 들어갔다. 광무제는 선덕전(宣德殿) 회랑 아래에서 관도 쓰지 않고 두건만을 쓴 수수한 모습에 웃음띤 얼굴로 마원을 반갑게 맞이하면서 말하였다.
“경이 외효·공손술 두 사람 사이를 왕래하면서 유세객 노릇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제 경의 당당한 모습을 보게 되니 반갑구료.”
마원은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하였다.
“지금의 형세는 임금될 사람이 신하될 사람을 고를 뿐만 아니라 신하될 자도 또한 임금될 사람을 골라 섬겨야 할 때입니다. 신은 원래 공손술과 동향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친한 사이였으나 전번에 공손술을 만나기 위해 촉 땅으로 갔었던바 공손술은 뜰 좌우에 어마어마한 호위병을 벌여 세운 가운데 신을 접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전혀 면식이 없는 신이 멀리서 와 배알을 청했는데도 폐하께서는 어떻게 제가 자객이나 간사한 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아시고 손쉽게 만나주셨습니까?”
광무제는 싱긋 웃으면서 답하였다.
“그대는 자객이 아니고 유세객이기 때문이오.”
마원이 정중하게 말하였다.
“천하가 어지러우매 사람들은 배반하기를 밥 먹듯 하고 제왕을 자칭한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지금 폐하를 대하고 보니 도량의 넓으심이 고조와 비슷한 줄로 아옵니다. 신은 비로소 제왕에게는 선천적으로 보통 사람이 따를 수 없는 덕을 갖추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마원이 돌아오자 외효가 물었다.
“동쪽 광무제의 사람됨은 어떻습디까?”
“광무제는 재질이 총명하고 무용이 뛰어날 뿐 아니라 지략에도 뛰어나 감히 세상 사람들이 따를 바가 아닙니다. 도량이 넓고 기우(氣宇) 광대한 점은 고조와 비슷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경학(經學)에도 뛰어나 널리 군서를 섭렵하여 정치에 정통하고 말솜씨 또한 막힘이 없으니 고금을 통하여 일찍이 비교할 인물이 없습니다.”
“경은 광무제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고조보다도 낫단 말씀이오?”
마원이 대답하였다.
“고조보다 낫다 못하다 비평을 할 수는 없습니다만, 광무제는 정무에 열중하고 일거수일투족이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습니다. 술도 즐기지 않는 아주 근엄한 장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마원의 말을 들은 외효는 마음속으로 별로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경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광무제가 고조보다 나은 것처럼 생각되는구료.”
얼마 후 외효는 그의 장자 외순을 광무제에게 인질로 보내고 귀순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배반하였다.
청동 부거
감숙성 무위현에서 발견한 거마 행렬의 한 부분으로 묘주가 장군이었음을 나타낸다. 《후한서》 〈여복지〉에는 현령 이상의 거마 행렬에 부거를 가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거는 임금이 거동할 때 여벌로 따라가던 수레를 일컫는다.
마원이 광무제의 행재소에 나아가 알현을 청하였다.13) 광무제는 재차 마원에게 외효를 설득하여 귀순시키도록 하고 광무제 또한 친히 간절한 내용의 서한을 보냈으나 외효는 끝내 듣지 않고 공손술에게 귀순하여 그의 신하가 되었다. 공손술은 크게 기뻐하여 외효를 삭녕왕(朔寧王)에 봉하고 크게 우대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광무제는 부득이 외효와 공손술을 토벌하기로 하였다. 이때 마원은 광무제 앞에 나와 쌀로 농과 촉의 지형도를 만들어 산과 골짜기를 가리키면서 일일히 진격로를 설명하였다. 광무제는 “이제 오랑캐는 내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훤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였다. 한군이 진격하자 외효는 서성(西城, 익주)으로 도망쳤지만 병고와 굶주림에 못 이겨 죽고 그의 아들 외순이 항복함으로써 농 지방은 완전히 평정되었다.
광무제는 대사마 오한(吳漢)을 장수로 삼아 먼저 파견되었던 정남 대장군 잠팽의 부대와 합류하여 공손술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때 잠팽은 형문(荊門, 호북성)의 산 밑에서 전선 수십 척을 정비하여 수상 공격을 시도하려 하였고, 오한은 이를 반대하였다. 오한이 반대하는 이유는 배로 공격할 경우 조졸(漕卒)14) 이 많아 식량이 많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두 장수의 의견이 엇갈리자 오한은 광무제에게 글을 올려 그 지시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광무제는 잠팽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대사마는 보병·기병으로 싸우는 육전에는 익숙하지만, 수전에는 익숙하지 못하다. 형문의 공격에 대하여는 정남공(征南公, 잠팽)에게 일임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한다.”
이에 잠팽은 전선을 이끌고 진군하여 가는 곳마다 무인지경처럼 공격해 들어가니 공손술의 군대는 크게 동요되어 물에 빠져 죽는 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잠팽은 다시 진격을 계속하여 강관(江關)에 상륙하여 전군에게 노략질을 절대 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공손술은 이를 보고 잠팽을 크게 두려워하여 자객을 망명자로 위장시켜 밤중에 잠팽을 암살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 오한이 육로로 진격해 들어와 잠팽의 군대와 합류하여 성도를 공격, 함락하고 공손술을 주살하였다. 이로써 천하는 모두 평정되어 질서와 평화를 향한 후한 왕조의 힘찬 행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