申公濟 1469 ~1536 高靈 希仁 伊溪 貞敏
判書申公濟 公神道碑銘 [申光漢]
公姓申, 諱公濟, 字希仁, 與光漢同曾祖。 惟吾申氏, 系出高靈, 遠祖諱成用, 始以文顯于高麗, 子孫之登第者, 八繼十同, 至于今不絶。 麗之季, 有諱德隣, 官至禮儀判書、寶文閣大提學。 是生諱包翅, 是爲高祖, 入我朝, 常居閑不仕, 世宗大王徵拜司諫院大司諫, 後以工曹參議終。 是生曾祖諱檣, 官至嘉靖大夫、工曹左參判、世子左副賓客。 自玄祖及高祖及曾祖三世, 非但文獻相承, 筆法俱絶, 其所書屛障, 多爲士大夫家寶藏。 曾祖有子五人, 而曰諱叔舟, 是吾皇祖, 四參勳盟, 功在宗社, 官至議政府領議政, 封高靈府院君, 贈諡文忠公。 以故曾祖贈封一如文忠。 曰諱末舟, 卽公之皇祖也, 夙負雅望, 歷仕淸班, 然素性沖澹, 不榮宦達。 後尹全州府, 一謝病便不起, 有別業在淳昌, 作亭于伊川之上, 號歸來, 遂老焉。 府尹娶薛氏, 生勵節校尉諱洪。 洪取獻陵直卞鈞之女, 以天順己丑生公。 後以公貴贈府尹吏曹參判, 贈校尉兵曹判書, 而乃於曾祖以有文忠之贈不及焉。
公幼有英氣, 及長, 學行日進, 書藝絶倫, 所與游皆一時聞人。 府尹、薛夫人俱在堂, 而校尉、卞夫人先逝。 公年未成童, 連喪居廬, 戚愈成人。 嘗患腫幾不救, 宗兄三魁先生從濩撫之曰: “天乎人乎? 此兒命至斯歟?” 其友鄭希良曰: “君宰相器, 不宜如此而已也。” 疾果瘳, 府尹、薛夫人撫愛益重。 弘治丙午, 中進士一等。 乙卯, 登第。 自始祖至公, 登第者九世, 而唯校尉早卒未第, 故曰八繼, 其所謂十同者, 在吾家。 公始以善書權知承文院副正字, 遷藝文館檢閱, 又遷承政院注書, 入玉堂爲修撰, 所歷皆淸選也。 時府尹尙無恙, 公乞便養。 己未, 由兵曹佐郞出爲綾城縣令, 賦政寬簡, 吏民畏愛。 癸亥, 遭府尹公憂, 居廬于淳昌, 綾城去昌近, 綾之人絡繹而來, 有號泣而不忍去者。 正德丙寅, 服闋, 拜司諫院獻納, 累遷正郞、掌令。 是年秋, 中宗靖國, 參原從功。 又爲薛夫人乞歸養, 出刺南原府, 治如綾城, 而德化過之。
戊辰, 遭薛夫人憂。 旣除, 拜議政府檢詳, 尋陞舍人。 舊事中書郞官例不除外職。 時倭寇嶺南, 兵火之中, 公私掃蕩, 昌原府尤甚。 朝廷擇文武全才可鎭禦者, 以公爲府使。 至則導宣德義, 流亡復業, 府庫充溢, 於是焚逋欠文卷, 民皆忭舞。 簡其秀, 敎以儒業, 學校又興。 觀察使薦公于朝曰: “勤謹廉能, 吏畏民懷。” 有旨褒美, 特加通政, 尋拜慶尙水軍節度使, 以病不行。 丁丑, 出按江原道, 以弘文館副提學召還。 戊寅, 遷承政院同副承旨, 陞右副, 自右副超嘉善, 節度咸鏡北道。 公在外則召以館職, 在內則授以節鉞, 將相之望於是乎係焉。 在北地未幾, 戎虜多歸化者。
己卯, 以事罷還, 出按忠淸道。 庚辰, 入爲戶曹參判。 明年, 又出按慶尙道, 道地大物衆, 爲道者多不堪簿牒, 公處之裕如。 公餘選勝嘯詠, 若無事事者, 民有美公之政者曰: “淸廉若水, 剖決如流。” 南民至今稱之不衰。 嘉靖壬午, 如京師朝正。 越乙酉, 拜吏曹參判。 丁亥, 特超資憲, 陞判書, 任專銓衡, 公素簡剛淸愼, 門無私謁, 時論重之。 戊子, 遷議政府左參贊、兼同知成均館, 自此常兼是職。 冬, 遷戶曹判書, 又兼世子左副賓客。 公以地重固讓, 政府白以輔養莫如老成, 以故不遞。 久典民部, 掌國計盡其區畫。 京畿飢, 中廟重賑恤, 命公往莅, 臺諫以六卿無故出外爲言乃止。
公嘗愛淳昌水石, 別構一亭于歸來之傍, 扁以蘊眞, 自號伊溪主人, 頗有退休之志。 辛卯, 出按平安道。 癸巳, 入判漢城府, 時姦兇用事, 黨比煽亂, 朝中士大夫擯斥殆盡。 公知爲所忌, 明年又出按咸鏡。 丙申, 同知中樞府事。 時光漢在驪江, 不見公久, 投書問公曰: “僻居無聞, 未審尊兄今做何官?” 公答曰: “安得僻居無聞?” 蓋有味於退休也。 未幾以病卒于京, 享年六十八。 訃聞, 上命輟朝, 遣禮官弔祭, 賻有加。 越明年, 葬于楊州治洪福山南麓。
公風姿溫粹, 鬚髥秀美, 襟懷高雅, 好古守正, 遇事剛果。 以名義自砥礪, 出入將相二十餘年, 終始一節, 爲權倖忌嫉, 幾危者屢, 處之超然。 少好學問, 至老不廢, 於書無不記覽。 又善草隷, 雖繁簿滿案, 操筆臨帖不休, 常處一室, 唯以文墨自娛。 人有勸公爲子壻求官, 則曰: “家傳文獻, 累世冠冕, 吾又位極。 人孰不欲富貴? 而吾家獨專之耶?”
夫人李氏, 宗室湖山君昭平公鉉之女。 賢而有禮, 內治亦正, 家有二妾, 撫以恩惠, 閨門雍穆。 生五男五女。 夫人與公生同年月, 後公十年而卒于丙午, 越明年正月葬與公同塋。 男長漣, 中武科, 官至郡守, 無子, 先夫人歿; 次澻, 有一男碩潾; 次泠, 有一女, 適偰喜男; 次瀿, 繕工監奉事, 有一男三女; 次浤, 有四男一女, 皆幼。 女長適生員偰謙, 生一男四女: 男曰延年。 女長適尹申, 二女適生員郭藩, 三女適李思卿, 餘幼。 安從㙉生三男一女: 男曰彦鈞、彦鎔、彦鏛, 鎔中進士。 女適弘文館修撰李友閔。 次適司諫院司諫柳忠寬, 生一男一女: 男曰樘, 中進士。 女適安馥。 次適鄭彦慤, 今爲京畿觀察使, 生四男五女: 男曰惕、惧、愼、愊, 惕登己酉第, 爲承文院副正字。 女適參奉金希舜, 二女適李纘金, 三女適方獻忱。 次適尹希老, 生二男二女: 男曰崇福、崇祿。 女長適鄭應祥。 側室有三男四女: 男曰沫、濺、涎。 女長適尹䳽年, 次適司譯院正朴長年, 次爲節度使尹倓妾, 次適鄭璉。 內外諸孫百有餘人, 而不能遍記。 仁者之後, 宜其如是之盛也。
公卒之後, 夫人襄事且畢, 而監司鄭君持行狀詣余曰: “吾聘君家世如是, 德業如是, 而神道不顯。 宜銘者莫如公, 盍列以揚之?” 嗚呼! 惟吾門世襲文獻, 在前代尙矣。 自近世言之, 我世宗大王初置集賢殿, 極選能文之士而爲學士, 吾曾祖始授副提學, 名錄玉堂首題。 吾祖文忠公繼爲大學士, 典文衡。 吾從兄從濩三魁, 年纔始仕以禮部亞卿早卒。 雖未及典文衡, 於《東國輿地志》以文章鳴於世云。 又有從兄文敏公用漑, 官至左議政, 號二樂亭, 爲大學士, 典文衡。 惟吾大兄, 唯以善書繼家聲, 文衡不及焉, 此正趙子昂所謂“吾以書名, 文譽不及焉”者也。 兄旣歿矣, 而後死者得與於斯, 雖其忝竊之甚, 亦家世積慶之餘也。 今者敍兄之德美, 以及先世而不之辭者, 以吾從太史氏之後, 蓋不敢辭也。
覽者當知其實錄也, 於是乎銘。 銘曰:
鬱鬱高靈, 世篤生材。 孰茂樹德? 歷久彌培。 條遠支分, 文獻相承。 猗吾大兄, 天與多能。 惟文惟武, 禮樂足徵。 經營四方, 莫與爭功。 台階可踐, 事業方隆。 權姦忌正, 陰謀秉鈞。 觀時卷懷, 石介如神。 擬踵歸來, 庶遂蘊眞。 渙渙淸伊, 可以濯塵。 一疾不憖, 大昳何嗟? 龍騰寶墨, 絶藝傳家。 斯文雖遠, 糟粕猶驚。 三魁堂閉, 二樂亭扃。 惟兄又逝, 疇繼家聲? 顧余微末, 忝玆文衡。 願揚厥美, 以列幽明。
신공제[申公濟]의 신도비명(碑銘) 신광한(申光漢)
判書申公神道碑銘
공(公)의 성(姓)은 신씨(申氏)이고, 휘(諱)는 공제(公濟)이며, 자(字)는 희인(希仁)인데, 나 광한(光漢)과는 증조(曾祖)가 같다. 생각건대, 우리 신씨의 계보(系譜)는 고령(高靈)에서 나왔는데, 원조(遠祖) 휘 성용(成用)에 이르러 비로소 문장(文章)으로 고려(高麗)에서 현달하여, 자손 중에 등제(登第)한 이가 팔계십동1)(八繼十同)으로 지금에 이르러서도 끊어지지 않았다. 고려 말에 휘 덕린(德隣)은 관직이 예의 판서(禮儀判書)ㆍ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에 이르렀는데, 덕린이 휘 포시(包翅)를 낳으니 곧 고조(高祖)가 된다. 포시는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도 항상 한가롭게 거처하면서 벼슬하지 않다가 세종 대왕(世宗大王)이 불러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임명하였고, 그 후에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마쳤다. 포시가 증조(曾祖) 휘 장(檣)을 낳았는데, 장은 품계가 가정 대부(嘉靖大夫)에 이르렀고 관직이 공조 좌참판(工曹左參判)ㆍ세자 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에 이르렀으니, 현조(玄祖)로부터 고조(高祖)ㆍ증조(曾祖)에 걸친 3대는 문헌(文獻)이 서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필법(筆法)이 모두 절륜(絶倫)하였으므로 그들이 쓴 병장(屛障, 병풍(屛風)을 말함)은 사대부의 집에서 보물처럼 소장되는 경우가 많았다.
증조는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그중휘 숙주(叔舟)는 나의 할아버지로서 네 번 훈맹(勳盟)에 참여하여 공(功)이 종사(宗社)에 있었고, 관직은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이르렀으며, 고령 부원군(高靈府院君)에 봉해졌고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諡號)를 추증받았다. 이런 까닭에 증조(曾祖)의 증봉(贈封)이 한결같이 문충공(文忠公)과 같았다.
휘 말주(末舟)는 곧 공의 할아버지인데, 일찍부터 청반(淸班)의 벼슬을 두루 거치리라는 기대를 받았으나, 공은 천성이 맑고 담백하여 출세하는 것을 영예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후에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임명되었으나 한 번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나서는 다시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별장이 있는 순창(淳昌)의 이천(伊川) 가에 정자를 지어 귀래(歸來)라고 불렀는데 마침내 거기에서 노년(老年)을 보냈다.
부윤은 설씨(薛氏)에게 장가들어 여절 교위(勵節校尉) 휘 홍(洪)을 낳았고, 홍은 헌릉직(獻陵直) 변균(卞鈞)의 딸에게 장가들어 천순(天順) 기축년(己丑年, 1469년 예종 원년)에 공을 낳았다. 그 후에 공이 귀해짐으로 말미암아 부윤은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교위는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으나 증조에 대해서는 문충의 추증이 있었으므로 미치지 않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기(英氣)가 있었고, 성장해서는 학행(學行)이 날마다 진보하였으며, 서예(書藝)가 절륜(絶倫)하였고, 교유하던 이들은 모두 당대의 이름 있는 인사들이었다. 부윤과 설부인이 모두 생존해 있을 때 교위와 변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므로 공의 나이 미처 성동(成童, 15살 이상의 나이를 말함)이 되기도 전에 연이어 상을 당해 여막(廬幕)살이를 하였는데 애통해 함이 성인보다 지나칠 정도였다. 한번은 종기를 앓았었는데, 거의 고칠 가망이 없을 지경에 이르자, 종형(宗兄)인 삼괴(三魁) 선생(先生) 신종호(申從濩)가 공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천명(天命)인가! 인명(人命)인가! 이 아이의 운명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하였고, 그의 벗 정희량(鄭希良)은 말하기를, “군은 재상(宰相)의 그릇인데, 이와 같을 뿐임은 마땅치 않다.” 하였다. 병이 마침내 위독해졌으므로 부윤과 설부인이 어루만져 사랑함이 더욱 중하였다.
성화(成化) 병오년(丙午年, 1486년 성종 17년)에 진사시(進士試) 제1등으로 합격하였다. 을묘년(乙卯年, 1495년 연산군 원년)에 등제(登第)함으로써 시조(始祖)로부터 공에 이르기까지 9대가 등제하게 되는 셈인데, 오직 교위만이 일찍 세상을 떠나 등제하지 못했던 까닭에 팔계(八繼)라고 한 것이요, 그 이른바 십동(十同)이란 우리 집안에 있다.
공은 처음에 글씨를 잘 쓴다는 이유로 권지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로 옮겼으며, 또 승문원 주서(承文院注書)로 옮겨 있다가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에 들어가 수찬(修撰)이 되는 등 역임한 자리가 모두 청직(淸職)이었다. 이때에는 부윤이 오히려 무양(無恙)하였으나 공이 봉양(奉養)을 위하여 외직(外職)을 청하였다. 기미년(己未年, 1499년 연산군 5년)에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능성 현령(綾城縣令)으로 나갔는데, 부정(賦政)이 너그러워 까다롭지 않았으므로 이민(吏民)들이 외경(畏敬)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503년 연산군 9년)에 부윤공의 상을 당하여 순창(淳昌)에서 여막(廬幕)살이를 하였는데, 능성과 순창의 거리가 가까워 능성의 백성들이 연이어 와서 호읍(號泣)하며 차마 떠나가지 못하는 자들이 있을 정도였다. 정덕(正德) 병인년(丙寅年, 1506년 연산군 12년)에 3년상을 마치고 나서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자리를 옮겨 정랑(正郞)ㆍ장령(掌令)으로 옮겼는데 그해 가을에 중종(中宗)이 나라를 바로잡으매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참여되었다. 그러나 또 설부인의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청하여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나아갔는데, 다스림은 능성 때와 같았으나 덕화(德化)는 그곳보다 나았다.
무진년(戊辰年, 1508년 중종 3년)에 설부인의 상을 당했다가 3년상을 마치고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에 임명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사인(舍人)으로 승진되었다. 전례(前例)에 중서 낭관(中書郎官)은 으레 외직에 임명되지 않았는데, 이때에는 왜구가 영남(嶺南)에 침입하여 병화(兵火)의 여파(餘波)로 공사(公私)가 소탕(掃蕩)되매 창원부(昌原府)가 더욱 극심하였으므로 조정에서 문무(文武)의 자질을 겸비하여 백성을 진정시키고 적을 막아낼 수 있는 자를 가려 공을 부사(府使)로 삼았다. 공이 부임하자 덕의(德義)를 이끌어 펴서 유망(流亡)했던 백성들이 직업을 회복하게 되고, 부고(府庫)가 차고 넘쳤고, 이에 포흠 문권2)(逋欠文券)을 불살라 버리자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며 춤을 출 정도였다. 한편 그중준수(俊秀)한 이들을 가려 유업(儒業)을 가르치자 학교가 다시 흥성하였다. 관찰사가 이러한 사실을 조정에 천거하며 말하기를, “근면하고 청렴하며 유능하여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잘 따릅니다.” 하였다. 이에 아름다운 덕을 기린다는 교지(敎旨)가 있어 통정 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특별히 가자(加資)하였다. 얼마 안 되어 경상도 수군 절도사(慶尙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나가지 못하였다. 정축년(丁丑年, 1517년 중종 12년)에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가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소환(召還)되었다. 무인년(戊寅年, 1518년 중종 13년)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옮겼다가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되었고, 우부승지에서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오르면서 함경북도 절도사(咸鏡北道節度使)에 임명되었다. 공이 외직(外職)에 있을 때는 관직3)(館職)으로 불러들이고, 내직(內職)에 있을 때는 절월4)(節鉞)을 내어주었으니, 장수(將帥)와 재상(宰相)의 명망이 있었으므로 내직과 외직이 연계(連繫)가 된 것이었다. 북쪽 지방에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융로(戎虜) 중에 귀화(歸化)한 자가 많았다.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년)에 어떤 일로 인해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갔다. 경진년(庚辰年, 1520년 중종 15년)에 조정으로 들어와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었고, 다음 해에 또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경상도는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서 도를 다스리는 자가 대부분 부첩(簿牒)을 감당하지 못하였으나 공은 여유있게 일을 처리하였으며, 공무(公務) 중에 여가가 나면 명승지를 가려 시를 읊조리는 등 마치 무사(無事)한 사람 같았다. 백성 중에 공의 정사(政事)를 아름답게 여기는 자가 있어, “물처럼 청렴하고, 물 흐르듯 부결(剖決)한다.”고 말하는 등 남도의 백성들이 지금까지 쇠함없이 이를 칭송한다.
가정(嘉靖) 임오년(壬午年, 1522년 중종 17년)에 경사(京師)에 가서 조정(朝正)하였다. 몇 해 지나 을유년(乙酉年, 1525년 중종 20년)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임명되었다가 정해년(丁亥年, 1527년 중종 22년)에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특별히 오르면서 판서(判書)에 승진되어 전형(銓衡)을 전임(專任)하게 되었는데, 공이 평소에 강직하고 맑고 신중하여 집에 사적으로 청탁하는 이가 없었으므로 당시의 논의가 이를 무겁게 여겼다.
무자년(戊子年, 1528년 중종 23년)에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옮기면서 동지 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겸임하였는데, 이때부터 항상 이 직책을 겸하였다. 겨울에 이조 판서로 옮기면서 또 세자 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을 겸임하게 되매 공이 지위가 중하다는 이유를 들어 굳이 사양하자, 정부(政府)에서 “세자(世子)를 보양(輔養)하는 데는 노성(老成)한 공만한 사람이 없다.”고 아뢰었으므로 벼슬을 갈지 않았다.
오래도록 민부(民部, 호조(戶曹)의 별칭)를 맡아 나라의 계책을 관장하면서 규모있게 운영하였다. 이때 경기도에 기근이 들어 중종이 진휼(賑恤)을 중히 여겨 공에게 가서 일을 맡으라고 명하자, 대간(臺諫)에서 육경(六卿)이 이유없이 외직으로 나간다는 것으로 아뢰었으므로 이에 중지되었다.
공이 일찍이 순창의 물과 바위를 사랑하여 귀래정(歸來亭) 곁에 정자 하나를 지어 온진(蘊眞)이란 편액을 내걸고서 이계 주인(伊溪主人)이라 자호(自號)하였으니, 이는 자못 관직에서 물러나 쉬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
신묘년(辛卯年, 1531년 중종 26년)에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나갔다가 계사년(癸巳年, 1533년 중종 28년)에 조정으로 들어와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간흉(奸兇)이 권세를 농단하고 당파(黨波)를 결성(結成)하여 난(亂)을 선동하여 조중(朝中)의 사대부가 거의 모두 빈척(擯斥)당하자, 공이 그들에게 꺼린 바 됨을 알고서 다음 해에 또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나갔다. 병신년(丙申年, 1536년 중종 31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나 광한(光漢)이 여강(驪江, 여주(驪州)를 말함)에 있으면서5) 공을 만나보지 못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편지를 보내어 공에게 묻기를, “궁벽한 곳에 사는 지라 소식을 듣지 못하였으니, 모르겠습니다만 존형(尊兄)은 지금 어떤 관직에 있는지요?” 하였다. 공이 답장에 이르기를, “어찌하면 궁벽한 곳에 살며 소식을 듣지 못하는 처지를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대체로 (나의 편지에서) 관직에서 물러나 쉬는 것을 음미함이 있었던 것이다. 얼마 안 되어 병으로 경저(京邸)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8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임금이 철조(輟朝)를 명하는 한편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제(弔祭)하고, 부의(賻儀)하는 예(禮)에 더함이 있었다. 이듬해에 양주(楊州) 치소(治所) 홍복산(洪福山) 남쪽 기슭에 장사지냈다.
공은 모습이 온화하고 순수하였고, 용모가 수려(秀麗)하였으며, 고아(高雅)한 뜻을 마음에 품고서 옛 것을 좋아하고 정도(正道)를 지켰으므로 일을 만나서는 과단성이 있었다. 또한 명분(名分)과 의리(義理)에 대해 스스로 갈고 닦아서 장수(將帥)와 재상(宰相)으로서 내외직(內外職)을 출입하던 20여 년 동안에 시종 절개가 한결같아 권행(權倖)에게 꺼리고 미워하는 바가 되어 거의 위태롭게 된 것이 여러 번이었으나 초연하게 이를 대처하였다.
공은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늙어서도 폐하지 않았고, 서예(書藝)에 있어서는 기람(記覽)하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특히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를 잘 써서 비록 장부(帳簿)가 번다하고 안건(案件)이 가득하였으나 붓을 잡아 첩(帖)에 임하기만 하면 그침이 없었으며, 항상 일정한 방에 거처하면서 오직 문묵(文墨)으로써 스스로 즐겼다.
공에게 공의 자서(子壻)들을 위해 관직을 구해줄 것을 권하는 자가 있으면, 곧 말하기를, “집안에 문헌(文獻)이 전해 오고 여러 대에 걸쳐 벼슬을 하였으며, 나의 지위도 극에 달하였다. 사람으로 누군들 부귀하고자 하지 않겠는가마는 우리 집안이 이를 독점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부인 이씨(李氏)는 종실(宗室)인 호산군(湖山君) 소평공(昭平公) 현(鉉)의 딸로서 현명하면서도 예의를 갖추었으므로 집안이 또한 바루어졌고, 집에 첩(妾)이 둘 있었으나 은혜(恩惠)로써 다독거려 주었으므로 규문(閨門)이 화목하였다. 5남 5녀를 낳았다. 부인은 공과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나 공보다 10년 뒤인 병오년(丙午年, 1546년 명종 원년)에 세상을 떠나 다음 해 정월에 공과 합폄(合窆)하였다.
장남 연(漣)은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관직이 군수(郡守)에 이르렀으나 아들이 없었으며 선부인(先夫人)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다음 수()는 1남을 두었으니, 석린(碩潾)이요, 다음 영(泠)은 1녀를 두었는데 설희남(偰喜男)에게 시집갔으며, 다음 번(瀿)은 선공감 봉사(繕工監奉事)로 1남 3녀를 낳았다. 다음 굉(浤)은 4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장녀는 생원 설겸(偰謙)에게 시집가서 1남 4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연년(延年)이요, 장녀는 윤신(尹申)에게 시집갔으며, 둘째 딸은 생원 곽번(郭藩)에게 시집갔고, 셋째 딸은 이사경(李思卿)에게 시집갔으며, 막내는 아직 어리다. 둘째 딸은 안종전(安從)에게 시집가서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언균(彦鈞)ㆍ언용(彦鎔)ㆍ언상(彦鏛)이다. 언용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딸은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이우민(李友閔)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유충관(柳忠寬)에게 시집가서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 당(摚)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딸은 안복(安馥)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현재 경기도 관찰사인 정언각(鄭彦慤)에게 시집가서 4남 5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척(惕)ㆍ구(懼)ㆍ신(愼)ㆍ핍(愊)인데, 척(惕)은 기유년(己酉年, 1549년 명종 4년)에 등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고, 장녀는 참봉 김희순(金希舜)에게 시집갔고, 2녀는 이찬금(李纘金)에게 시집갔으며, 3녀는 방헌침(方獻忱)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윤희로(尹希老)에게 시집가서 2남 2녀를 낳으니, 아들은 숭복(崇福)ㆍ숭록(崇祿)이요, 장녀는 정응상(鄭應祥)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에 3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말(沫)ㆍ천(濺)ㆍ연(涎)이요, 장녀는 윤학년(尹鶴年)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사역원 정(司譯院正) 박장년(朴長年)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절도사(節度使) 윤담(尹倓)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정연(鄭璉)에게 시집갔다. 내외(內外) 여러 손(孫)이 백여 명이므로 두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인자(仁者)의 후예는 이처럼 번성함이 마땅하다.
공이 세상을 떠난 후, 부인의 장사(葬事) 또한 마치고서 감사(監司) 정군(鄭君, 정언각(鄭彦慤)을 말함)이 행장(行狀)을 가지고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나의 장인은 집안이 대대로 이와 같고, 덕업(德業)이 이와 같은데도 신도비(神道碑)를 세우지 못했으니, 명(銘)을 써 주기에 적합한 사람은 공만한 이가 없다.” 하니, 어찌 공의 공적을 열거하여 현양(顯揚)하지 않겠는가?
아! 생각건대, 우리 가문이 문헌(文獻)을 세습(世襲)해 온 것은 전대(前代)에 있어서도 숭상받았고, 근세(近世)로 말하면 우리 세종 대왕이 처음으로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글에 능한 인사를 엄선(嚴選)하여 학사(學士)로 삼았는데, 우리 증조(曾祖, 신장(申檣)을 말함)에게 처음으로 부제학(副題學)을 제수하여 그 이름이 옥당(玉堂)의 첫머리에 기록되었다. 우리 할아버지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를 말함)이 이를 이어 태학사(太學士)가 되어 문형(文衡,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의 별칭)을 맡았으며, 우리 종형(從兄) 종호(從濩)는 과거에 세 번을 수석 합격하였는데, 겨우 시사(始仕, 40세를 말함)할 나이에 예부 아경(禮部亞卿,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있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비록 문형을 맡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울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종형(從兄) 문민공(文敏公) 용개(用漑)는 관직이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고 호는 이요정(二樂亭)이었는데, 태학사가 되어 문형을 맡았다. 그러나 오직 우리 대형(大兄)인 공은 명필(名筆)로 가문의 명성을 이었으나 문형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니, 이는 바로 조자앙(趙子昻, 원나라 조맹부(趙孟頫))이 이른바 ‘나는 글씨로는 이름났으나 문(文)으로서의 영예(榮譽)는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한 것이다.
형이 세상을 떠났는데도 내가 여기에 참여할 수 있으니, 비록 매우 과분하지만 또한 우리 집안이 대대로 쌓아 온 여경(餘慶)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제 숙형(宿兄)은 덕이 아름다워 선세(先世)에 미처도 양보할 것이 없는 분인지라 내가 태사씨(太史氏, 사관(史官)을 말함)의 말석(末席)에 종사(從事)하고 있더라도6) 대체로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으니, 관람(觀覽)하는 자는 실록(實錄)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울창한 저 고령 땅에, 대대로 독실히 인재를 낳았도다. 누가 무성하게 덕을 수립했나? 세월이 오랠수록 더욱 배양(培養)되었네. 가지가 멀어지고 또한 갈라지면서도 문헌(文獻)은 대대로 이어졌도다. 아! 우리 대형(大兄)은 하늘이 많은 재능을 주었도다. 문무(文武)를 겸비한데다, 예악(禮樂)도 족히 징험할 만하였네. 사방(四方)을 경영(經營)함에 있어서도 공과 더불어 공적(功蹟)을 다툴 이 없었도다. 삼공(三公)의 지위를 밟을 만하고, 사업(事業)이 바야흐로 융성할 적에, 권간(權奸)이 공의 곧음 꺼려하여 정권(政權) 잡으려고 은밀히 모의하매, 때를 살펴 재덕(才德)을 품은 채로 돌처럼 굳은 절개 신묘(神妙)하였도다. 발길 돌려 귀래(歸來)를 생각함은 온진(蘊眞)을 이루기를 바라서였네. 출렁출렁 맑디 맑은 이천(伊川)에선, 세상 티끌 씻어낼 만 하였건만 한 번 병듦으론 부족했단 말인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아, 어이할거나? 필력(筆力)이 힘찬 보배로운 글씨 등, 뛰어난 재예(才藝)가 집안에 전하도다. 사문(斯文)과의 거리 비록 멀지만, 조박(糟粕)도 오히려 놀랍다네. 삼괴당(三魁堂)엔 문이 닫히고, 이요정(二樂亭)엔 빗장이 걸렸는데7) 오직 한 분 형마저 서거하니, 누가 가문의 명성을 이어가겠는가? 돌아보니 한미한 이몸 뿐인데, 이에 외람되이 문형(文衡)을 맡았다네. 공의 아름다움 드날리고자, 유명(幽明, 내세(來世)와 현세(現世))에 열거하노라.
각주
1) 팔계십동(八繼十同) : 시조 신성용으로부터 신공제의 할아버지까지 8대가 연이어 등제하였으므로 ‘팔계’라 하였고, 한편 시조로부터 신광한까지 10대가 연이어 등제하였으므로 ‘십동’이라 한 것임.
2) 포흠 문권(逋欠文券) : 백성들이 흉년이나 병란 등으로 조세를 제대로 납부하지 못한 사항을 기록한 문권.
3) 관직(館職) :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이하 관원의 총칭.
4) 절월(節鉞) : 지방에 관찰사(觀察使)ㆍ유수(留守)ㆍ병사(兵使)ㆍ수사(水使)ㆍ대장(大將)ㆍ통제사(統制使) 등이 부임할 때 임금이 내어주던 절(節)과 부월(斧鉞).
5) 나…있으면서 : 작자 신광한은 기묘 사화(己卯士禍)에 연좌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여주에 방축(放逐)되어 18년간을 칩거하였음.
6) 내가……있더라도 : 작자 신광한이 이 당시에 춘추관(春秋館) 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고 있었음. 후(後), 즉 말석이라고 한 것은 겸칭임.
7) 삼괴당……걸렸는데 : 삼괴당(三魁堂) 신종호(申從濩)와 이요정(二樂亭) 신용개(申用漑)의 죽음을 기휘하여 이렇게 표현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