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규(趙仁規)는 자(字)가 거진(去塵)이고 평양부(平壤府) 상원군(祥原郡) 사람이며, 어머니의 꿈에 해가 품에 들어와 그를 잉태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뛰어나게 영리하고 슬기로웠으며, 차츰 성장하여 공부를 하면서 대략 글의 뜻[文義]에 통하였다. 국가에서 자제(子弟) 중 영민한 자를 선발하여 몽고어(蒙古語)를 익히게 하였는데, 조인규가 여기에 선발되었다. 자기 동료들보다 뛰어나지 않았으나 3년 동안 바깥에 나가지 않고 주야로 〈몽고어 공부에〉 게을리 하지 않으니, 드디어 이름이 알려져 여러 교위(校尉)로 임명되었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장군에 올랐다.
충렬왕(忠烈王) 때 조인규가 휘하의 부하 병졸 개삼(介三)에게 남경(南京)의 민 8명을 유인하여 달호(獺戶)로 삼자, 민으로 부세(賦稅)를 피하려는 자들이 여기에 많이 소속되어 해마다 경성궁(敬成宮)에 수달 가죽을 바쳤는데, 〈그 중〉 반은 조인규의 집에 들어갔다. 남경 사록(司錄) 이익방(李益邦)이 개삼을 잡아가두자 조인규가 공주에게 호소하기를, “남경의 관리가 공주의 명령서[宮敎]를 찢어 던졌습니다.”라고 하니, 공주가 노하여 이익방 및 〈남경〉 부사(副使) 최자수(崔資壽)를 체포하여 가두고, 장군 임비(林庇)를 파견하여 국문하게 하였다. 임비가 그 사실을 모두 파악하여 공주에게 보고하니, 민은 원적(元籍)으로 돌아가게 하고, 두 사람은 유배 보냈다가 얼마 후에 석방하였다.
어떤 재상이 응방(鷹坊)의 폐해를 아뢰었는데, 왕이 노하여 회회(回回) 사람이 황제에게 신임 받는 것을 보고 그를 청하여 응방을 나누어 맡게 하고, 재상은 다시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하였으나 조인규가 힘써 충고하여서 중지되었다. 〈이에 조인규를〉 우승지(右承旨)에 임명하였고, 왕이 중서성(中書省)에 글을 보내 이르기를, “배신(陪臣) 조인규는 몽고어와 한어(漢語)를 통달하여, 조정의 조서(詔書)와 칙서(勑書) 등의 글을 번역하는 데 〈조금의〉 오류도 없습니다. 내가 예전에 조정[天庭]에서 시위할 때, 시종 나를 따라다녔고, 또 공주를 섬기는 일에도 아침저녁으로 정성껏 부지런히 힘썼습니다. 그에게 패면(牌面)을 내려서 왕경(王京)의 탈탈화손(脫脫禾孫, 토토카순) 겸 추고관두목(推考官頭目)으로 임명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자, 원(元)이 〈조인규를〉 선무장군 왕경단사관 탈탈화손(宣武將軍 王京斷事官 脫脫禾孫)으로 삼고 금패(金牌)를 하사하였다. 왕이 교서(敎書)를 내려 이르기를, “조인규는 동정(東征)때 우리 국가의 일을 〈황제께〉 잘 보고하였다. 황제께서는 과인(寡人)에게 중서좌승상(中書左丞相)을 제수하시고, 또 여러 신하에게 도원수(都元帥)·만호(萬戶)·천호(千戶)의 금패와 은패(金銀牌)를 내렸으니 모두 그의 공이다. 마땅히 그의 공로를 별도로 기록하여 전민(田民)을 하사하고, 자손에게는 등급을 뛰어넘어 관직에 임용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왕이 일찍이 남문(南門)에 거둥하였을 때,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이 술에 취하여 말을 타고 지나갔는데, 조인규가 평소에 김방경과 권세가 서로 비슷하였지만, 이에 이르러 기회를 타서 참소함으로써 김방경을 순마소(巡馬所)에 잡아가두게 하였다. 〈조인규는 이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역임하였다. 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 김온(金溫)의 처가 밤에 가만히 시누이의 집에서 물건을 훔치려다 붙잡혔는데, 시누이의 남편은 조인규와 인척관계여서 조인규가 김온의 처를 묶어 매를 치니, 사람들이 모두 옳지 않다고 하였다. 왕이 중찬(中贊)으로 임명하려고 하자, 조인규가 말하기를, “전하의 은혜가 비록 지극히 중합니다만, 홍자번(洪子藩)이 덕망(德望)으로 총재(冢宰)가 된 지 이미 오래인데, 신이 갑자기 그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면 여러 사람의 의견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며, 굳이 사양하므로 중지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중찬에 임명되었으며, 다시 얼마 후에 좌중찬(左中贊)에 임명되었다. 재추(宰樞)가 당시의 폐단 3가지를 조목별로 올리자 왕이 노하였는데, 조인규는 화(禍)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비밀리에 왕에게 보고하기를, “지난번의 3가지 일은 신이 아는 바가 아니니, 청컨대 국문하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 이우(李紆)를 순마소에 잡아가두고, 만호 고종수(高宗秀)에게 명하여 논의를 주창한 자를 심문하라고 하였다. 고종수가 혹독하게 고문을 가하자, 이우가 거짓으로 이혼(李混)을 말하였고, 이혼이 여기에 연루되어 파면되었다.
〈충렬왕(忠烈王)〉 24년(1298), 〈조인규(趙仁規)가〉 사도 시중 참지광정원사(司徒 侍中 叅知光政院事)로 승진하였다. 처음에 조인규의 딸이 충선왕(忠宣王)의 비(妃)가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어떤 사람이 익명서(匿名書)를 궁문(宮門)에 붙여 이르기를, ‘조인규의 처가 무당을 시켜 왕이 공주를 사랑하지 않도록 저주하고, 자기 딸에게만 사랑을 줄 것을 축원(祝願)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공주가 조인규와 그 처를 옥에 잡아가두고, 원(元)이 사신을 보내어 조인규를 국문하게 하였으며, 또 조인규의 처를 국문하는 것이 극히 참혹하여 처가 거짓으로 자복하였다. 드디어 〈사신이〉 조인규와 그의 사위 최충소(崔冲紹)·박선(朴瑄)을 붙잡아 돌아갔으며, 모두 가산을 적몰(籍沒)하여 사신관(使臣館)으로 운반하여 갔다. 원에서 곤장을 쳐서 조인규를 안서(安西)로, 최충소는 공창(鞏昌)으로 유배 보냈으나, 후에 조인규를 석방하여 환국(還國)시켰고, 왕이 황제의 명에 따라 즉시 판도첨의사사(判都僉議司事)로 임명하였다. 충선왕이 원에 있으면서 조인규를 자의도첨의사사 평양군(咨議都僉議司事 平壤君)으로 삼고 부(府)를 열어 관속(官屬)을 배치시켰으며, 선충익대보조 공신호(宣忠翊戴輔祚 功臣號)를 하사하였다. 〈충선왕이〉 승지(承旨) 김지겸(金之兼)을 보내어 충렬왕에게 아뢰기를, “조인규는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아 나라의 원로이니, 조회에 옥대(玉帶)를 차고 일산(日傘)을 쓰고 왕을 시종하도록 하고, 찬배(贊拜) 때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검을 찬 채로 궁전에 오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첨의밀직(僉議密直) 1인은 그의 집에 가서 상의하고 보고하며, 만일 조인규 및 중찬(中贊) 최유엄(崔有渰)과 약속한 것을 듣지 않는 자가 있으면 위법으로 다스리소서.”라고 하니 왕이 따랐다. 〈충렬왕〉 34년(1308)에 〈조인규가〉 죽으니 나이가 72세였으며, 시호(謚號)는 정숙(貞肅)이었다.
조인규는 용모와 행동거지가 아름답고 말과 웃음이 적었으며 전기(傳記)를 많이 읽었다. 처음에 나라 사람들이 비록 몽고어(蒙古語)를 공부해도 잘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이 아직 없어서, 우리 사신이 대도(大都)에 가면 반드시 대녕총관(大寧摠管) 강수형(康守衡)으로 하여금 인도하여 들어가 〈황제에게〉 아뢰게 하였다. 조인규가 일찍이 금칠을 한 자기(磁器)를 그려 바치자 세조(世祖)가 묻기를, “금으로 그림을 그린 것은 그릇을 견고하게 하려는 것이냐?”라고 하자, 〈조인규가〉 대답하기를, “단지 채색을 입히려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세조가〉 말하기를, “그 금은 다시 쓸 수 있느냐?”라고 하였고 대답하기를, “자기는 깨지기 쉽고 금도 그에 따라 파손되니, 어찌 다시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세조가 그의 대답을 칭찬하며 명하기를, “이제부터는 자기에 금으로 그림을 그리지 말고 진헌하지도 말라.”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고려인이 우리말을 이같이 잘하면서, 어찌하여 반드시 강수형으로 하여금 통역시키는가?”라고 하였으나, 황제의 사신이 우리나라와 감정이 쌓여, 토풍(土風)을 고치려고 황제에게 하소연하니, 일을 헤아리기 어려워졌다. 조인규가 단기(單騎)로 입근(入覲)하여 자세하게 아뢰고 명확하게 시비를 가려내니 마침내 일이 잠잠해졌다. 서북의 두 변방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니 이것도 조인규가 황제에게 잘 대답한 공로 때문이었다. 왕이 매번 아뢰어 청할 게 있으면 반드시 조인규를 파견하니, 무릇 사신으로 파견된 것이 30회이고 자못 부지런하고 노고를 드러낸 것이 있었다. 그러나 미천한 신분에서 일어나 나라의 요직을 얻었고, 사람됨이 겉으로는 단정하고 장중하며 평온하고 정직해 보이기 때문에, 왕의 총애를 얻어 항상 왕의 침소까지 출입하며 전민(田民)을 많이 거두어들여 부유하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왕의 장인이 되어, 권세가 한 시대를 기울게 하여 아들과 사위 모두 장상(將相)이 되니, 감히 비길만한 자가 없었다. 병이 들어 아들과 사위가 의원을 불러 진찰하게 하니, 조인규가 말하기를, “나는 병졸에서 출발하여 관직이 최고위까지 올랐고 나이도 70세가 넘었다.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니 어찌 의원을 쓰겠는가?”라고 하였다. 당시에 여러 아들이 원에 있었으므로, 오직 조연(趙璉)만이 옆에서 모시고 간병하니, 〈조인규가〉 말하기를, “너희 집안에 형제와 자매가 9명이므로, 신중하여서 분쟁으로 남의 웃음거리가 되지 말라. 너의 맏형과 막내 동생이 오기를 기다려 이를 자세히 알려 주어서 영원히 가법(家法)으로 삼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아들은 조서(趙瑞)·조연(趙璉)·조후(趙珝)·조위(趙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