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탁(禹倬)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25.03.03|조회수19 목록 댓글 0

우탁(禹倬)은 단산(丹山) 사람이며, 아버지 우천규(禹天珪)는 향공진사(鄕貢進士)였다. 우탁은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에 영해사록(寧海司錄)으로 임명되었는데, 영해군에 요망한 귀신을 모신 사당이 있었는데 이름은 팔령(八鈴)이라고 하였으며, 민은 미혹되어 영험한 귀신이라고 하면서 독실하게 제사를 받들고 있었다. 우탁이 부임하자 바로 그것을 부숴서 바다에 던져버리니, 음사(淫祀)가 드디어 근절되었다. 여러 번 승진하여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는데, 그때 충선왕(忠宣王)이 숙창원비(淑昌院妃)를 간음하니 우탁이 흰 옷 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메고 대궐로 나아가 상소하여 거리낌 없이 간언하자, 근신(近臣)이 상소문을 펴들고는 감히 읽지 못하니, 우탁이 소리를 지르면서 말하기를, “경은 근신이면서도 〈주상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악행을 하시게 하여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경은 그 죄를 아시오?” 라고 하였다. 〈이에〉 주변 사람들이 두려워서 벌벌 떨었고 왕도 부끄러운 기색이 있었다. 뒤에 연로하므로 예안현(禮安縣)으로 은퇴하였는데, 충숙왕(忠肅王)이 그 충의를 가상히 여겨 재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우탁은 경사(經史)에 정통하였는데 특히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서 점을 치면 맞추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역정전(易程傳)〉〉이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나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우탁이 문을 닫아걸고 한 달 남짓 깊이 연구하였더니, 마침내 해득(解得)하여 생도들을 가르쳤는데, 〈그 때부터〉 이학(理學)이 비로소 행해졌다. 〈우탁은〉 관직이 성균좨주(成均祭酒)까지 이르러 치사(致仕)하였으며, 충혜왕(忠惠王) 3년(1342)에 죽으니, 나이 81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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