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충(李達衷)은 경주(慶州) 사람이다. 아버지 이천(李蒨)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첨의참리(僉議叅理)에 이르렀고 월성군(月城君)으로 봉해졌다. 이달충은 충숙왕(忠肅王) 때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성균좨주(成均祭酒)가 되었다. 공민왕(恭愍王) 원년(1352)에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임명되었고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전임되었다가 〈공민왕〉 8년(1359)에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옮겼다. 팔관회(八關會) 때 유사(有司)가 손 씻는 장막을 복야청(僕射廳) 남쪽에 설치하고 울타리를 세워 안팎의 경계로 삼았는데, 이달충이 형부상서(刑部尙書) 이정(李挺)과 함께 대청 위에 앉아서 그 울타리를 철거하게 하였다. 왕이 의봉루(儀鳳樓)에 있다가 이를 보고 대노하여 묶어서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자 측근들이 간청하여 가노(家奴)를 가두는데서 그쳤다. 어사대(御史臺) 또한 이를 탄핵하였으나 이정이 일찍이 내불당(內佛堂)의 제조(提調)를 지냈으므로 특별히 용서하였다. 〈공민왕〉 15년(1366)에 왕이 이달충을 이름난 선비라고 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발탁하였다. 당시 신돈(辛旽)이 바야흐로 권세를 부리고 있었는데 이달충이 일찍이 여러 사람이 앉아있는 자리에서 신돈을 보고 말하기를, “사람들은 상공(相公)이 술과 여색을 좋아한다고 말합니다.”라고 하자 신돈이 불쾌하게 여기더니 얼마 안 되어 파직되었다. 신돈이 처형되자 시(詩)를 짓기를, “천지(天地)가 생겨나고 만물이 번성하거늘, 누가 큰 조화를 범하여 제 맘대로 차고 따뜻하게 했던가. 즐거운 감정은 봄을 간직한 마을에 흡족하고, 노기(怒氣)는 해를 가린 구름에 음침하도다. 꿩이 조개 되고 매가 비둘기 된 것도 너무나 괴이한데, 용이 고기 되고 쥐가 범이 된 것을 어찌 다 말하리오. 가련하도다 고목이 바람에 맞아 쓰러지니, 감았던 겨우살이덩굴들 의탁할 곳을 잃었도다. 괴상하고 요망한 짓을 잘하는 늙은 들여우, 사람마다 활 쏘아 댈 줄 어찌 알았으랴. 범의 위엄을 빌리니 곰들이 벌벌 떨고, 아양 떨다가 혹 사내 행세하면 여자들 달려들었네. 누런 개와 푸른 매를 특히나 꺼렸지만, 검은 닭과 흰 말은 무슨 죄로 죽었던가. 듣자하니 네 죽을 때 머리를 언덕 쪽에 둔다더니, 이제 성 동쪽의 관도(官道) 가에서 보게 되는구나.”라고 하였다. 신돈은 성품이 사냥개를 겁내고 사냥을 싫어하였으며 또 방종하고 음탕하여 항상 검은 닭과 흰 말을 잡아먹어 양기(陽氣)를 돋구었다. 그때 사람들이 신돈을 늙은 여우가 둔갑한 것이라고 말했으므로 이렇게 읊은 것이다. 후에 계림부윤(鷄林府尹)에 임명되자 글을 올려 사양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신우(辛禑) 11년(1385)에 계림군(鷄林君)으로 있다가 죽으니 시호를 문정(文靖)이라고 하였다.
〈이달충은〉 성품이 강직하고 곧아서 흔들리지 않았으며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다. 일찍이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가 되었다가 돌아올 때 우리 환조(桓祖)께서 들에서 전송하였다. 태조(太祖)께서 환조 뒤에 서 있었는데, 환조가 술을 따르자 이달충이 서서 마셨으나 태조가 술을 따르자 꿇어앉아 마셨다. 환조가 괴이하여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이 아드님은 정말 빼어난 분으로 공(公)께서 따라가지 못할 것이며, 공의 가업(家業)은 이 아드님이 반드시 크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고, 이로 인하여 자손들을 부탁하였다. 저술로 『제정집(齊亭集)』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으며, 그의 시문(詩文)은 이제현(李齊賢)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 아들은 이준(李竴)·이전(李竱)·이수(李䇕)·이횡(李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