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수는 기록에 세계(世系)가 없다. 충목왕(忠穆王) 때 현릉직(顯陵直)에 보임되었다. 공민왕 때 〈지용수가〉 안우(安祐) 등을 따라 홍건적을 쳐서 패주시켰으며, 또 안우 등과 경성을 수복하여 공이 모두 1등에 책록(策祿)되었다. 판전교시사(判典客寺事)에 제수되었으며 전공판서(典工判書)로 옮겨 규의선력공신(揆義宣力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안우경(安遇慶) 등과 덕흥군(德興君)의 군사를 물리쳐 추성규의선력공신(推誠揆義宣力功臣)의 칭호를 더하여 하사받았다. 〈그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제수되었으며, 여러 차례 관직을 옮겨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가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옮겼고 얼마 후 서북면상원수 겸평양윤(西北面上元帥 兼平壤尹)이 되어 나갔다.
처음에 기새인첩목아(奇賽因帖木兒, 기사인테무르)가 원의 평장사(平章事)로 벼슬을 하였다. 원이 망하자 요심(遼瀋)의 관리인 평장(平章) 김백안(金伯顔, 김바얀) 등과 동녕부(東寧府)에 웅거하였는데, 그의 아버지 기철(奇轍)이 주살당한 것에 원한을 품고 변경을 침략하고자 하였다. 왕이 지용수와 서북면부원수(西北面副元帥) 양백안(楊伯顔, 양바얀), 안주상만호(安州上萬戶) 임견미(林堅味)와 우리 태조를 보내어 가서 공격하게 하였다. 〈또〉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을 도통사(都統使)로 삼아 안주에 주둔하게 하였다. 군대가 의주(義州)에 이르자 만호(萬戶) 정원비(鄭元庇)·최혁성(崔奕成)·김용진(金用珍) 등에게 명하여 압록강에 부교를 만들었는데 말 3~4마리가 함께 갈 수 있었다. 우리 태조와 임견미가 먼저 〈압록강을〉 건너자 제군(諸軍)이 차례로 건넜다. 사졸들이 다투어 건너다가 익사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3일이 되어서야 강을 건너는 것을 마칠 수 있었다. 이날 저녁에 천둥이 치고 폭우가 내리니 군중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병마사(兵馬使) 이구(李玖)가 〈이에 대해〉 말하기를, “길조인데 왜 미혹됩니까?”하였는데, 여러 장수들이 그 까닭을 물었다. 이구가 말하기를, “용이 움직이면 반드시 천둥이 치고 비가 옵니다. 지금 상원수는 용을 이름자로 쓰고 있는데 강을 건너는 날에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니 전투에서 승리할 조짐입니다.”하니, 군중의 마음이 차츰 안정되었다. 군대가 나장탑(螺匠塔)에 이르니 요성(遼城)까지 2일정도 거리였는데, 보급품을 그대로 두고 7일간의 군량만을 가지고 길을 떠났다. 〈군대에서〉 요심(遼瀋)의 사람들에게 고유(告諭)하여 말하기를, “요심은 우리나라 경계이며, 민은 우리의 민이다. 지금 의병(義兵)을 일으켜 위로하고자 하는데, 만약 산채로 도망하는 자가 있으면 개별 군마들이 해를 입힐까 두려우니, 즉시 군대 앞으로 와서 사정을 고하라.”라고 하였다. 비장(裨將) 홍인계(洪仁桂)와 최공소(崔公招) 등으로 하여금 경기병(輕騎兵) 3,000명을 이끌고 공격하게 하였다. 저들은 우리의 군사가 적어 쉽게 전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으나, 대군이 연이어 도착하자 성중(城中)에서 바라보고 낙담하였다.
그들의 장수 처명(處明)이 날래고 용맹한 것을 믿고 오히려 항전하니 태조〈이성계〉가 이원경(李原景)을 시켜 타이르며 말하기를, “너를 죽이는 것은 매우 쉬우나 너를 살려서 쓰려고 하니 속히 항복하라.”라고 하였는데도 따르지 않았다. 이원경이 말하기를, “네가 우리 장수들의 재능을 모르는구나. 네가 항복하지 않으면 화살 하나로 관통시켜주겠다.”라고 하였으나 항복하지 않았다. 〈그러자〉 태조가 일부러 〈처명의〉 투구를 쏘아서 떨어뜨리고 이원경을 시켜 타일렀는데도 따르지 않았다. 태조가 〈활을〉 또 쏘아 다리를 맞히니 처명이 화살이 박힌 채로 도망갔다가 잠시 후에 다시 전투를 하려고 왔다. 다시 이원경을 시켜 〈처명에게〉 타일러 말하기를, “네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네 얼굴을 쏘겠다.”라고 하니, 처명이 마침내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하였다. 어떤 한 사람이 성에 올라 소리치기를, “우리들은 대군이 왔다는 것을 듣고 모두 항복하려고 하였는데 수장(守將)이 억지로 항전하게 하였습니다. 만약 힘써 성을 공격하면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성이 매우 높고 험준하였으며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고 목석(木石)이 섞이어 날아왔으나 우리 보병이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성에 가까이 가서 급작스럽게 공격하니 마침내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으며, 기사인테무르는 도망가고 김바얀은 사로잡았다.
이날 저녁 군사는 성의 동쪽으로 물러나고 방을 붙여서 납합출(納哈出, 나하추)과 야선불화(也先不花, 에센부카) 등에게 타일러 말하기를, “기사인테무르는 우리나라의 미천한 신하로서 최근에 원 조정에서 특별한 은혜를 과도하게 입어 지위가 1품에 올랐다. 의리상 〈나라와〉 편안함과 근심[休戚]을 함께 해야 하며, 천자께서 밖으로 몽진(蒙塵)하시니, 의리상 좌우(左右)와 선후(先後)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떠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배은망덕하게 동녕부(東寧府)에 숨어 아버지 기철(奇轍)이 주살당한 것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원한을 품고 참람히 반역을 도모하였다. 작년에 나라에서 군사를 보내어 추격하였지만 도망가서 죽이지 못하였으며 또한 행재소(行在所)에도 가지 않고 물러나서 동녕부를 지키고 있다. 평장 김바얀 등과 함께 복심이 될 것을 결탁하여 송보리(松甫里)·법독하(法禿河)·아상개(阿尙介) 등지에서 군마를 모아 우리나라를 침략하고자 하였다. 〈기사인테무르의〉 죄를 용서할 수 없으니 지금 군사를 일으켜 문죄(問罪)하려는 것이다. 또한 〈기사인테무르는〉 김바얀 등과 함께 〈우리나라의〉 소민(小民)을 유인하고 협박하여 견고하게 성을 쌓고 왕명에 저항하였다. 우리 군대의 선봉이 김바얀 외에 합랄파두(哈刺波豆, 카라바투), 덕좌불화(德左不花, 덕좌부카), 고달로화적(高達魯花赤, 고다루가치)을 생포하고 총관과 두목은 모두 죽이거나 생포하였다. 기사인테무르 또한 도망쳐서 죄를 자수하지 않고 있으니 그가 찾아온 각 성채에서는 〈그를〉 포획하는 즉시 알리도록 하라. 만약 그를 숨겨주는 자는 동경(東京)에서 처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금주(金州)와 복주(復州) 등지에 방을 붙였는데 〈그 내용에〉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요(堯) 임금과 함께 건립하였으며 주(周) 무왕(武王)이 조선(朝鮮)에 기자(箕子)를 책봉하고 영토를 하사하여 서쪽으로는 요하(遼河)에 이르렀으며 대대로 강역을 지켜왔다. 원조(元朝)가 〈중국을〉 통일하자 공주를 〈고려에〉 시집보내면서 요심(遼瀋)의 땅을 탕목읍(湯沐邑)으로 삼도록 하고 성(省)을 분치(分置)하였다. 왕조 말[叔季]에 덕을 잃고 천자가 외방으로 몽진(蒙塵)을 나갔는데도 요심의 두목관(頭目官) 등은 소문을 듣지 못하고 따라가지도 않았고 또 우리나라에 예(禮)를 지키지도 않았다. 즉 우리나라의 죄인 기새인첩목아(奇賽因帖木兒, 기사인테무르)와 함께 결탁하여 복심(腹心)이 되어 군대를 불러 모으고 민을 학대하였으니 〈그들의〉 불충한 죄는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의병(義兵)을 일으켜 기사인테무르 등을 문죄하고자 하나, 동녕성(東寧城)에 웅거하며 강함만을 믿고 명을 거스르고 있다. 대군이 이르면 옥석을 가려 모두 처벌할 것이니 일이 잘못된 뒤에 후회해도[噬臍莫及] 어찌할 수 있겠는가? 무릇 요하 동쪽의 우리나라 강역 안의 민과 크고 작은 두목 등으로 속히 스스로 내조(來朝)하면 모두 관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조정으로 오지 않는다면 동경(東京)에서 처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음날 군대가 성의 서쪽 40리 까지 왔는데 이날 밤 붉은 기운이 군영에 서리어 불과 같이 치솟았다. 일관(日官) 노을준(盧乙俊)이 말하기를, “이상한 기운이 군영에 서리었으니 주둔한 것을 옮기면 크게 길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만호(萬戶) 배언(裴彦) 등이 석성(石城)에서 고가노(高家奴)를 공격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는데 머물면서 〈그들을〉 기다리고자 노을준의 말에 따라 퇴각하였다. 처음에 성이 함락되자 우리 군사가 창고에 불을 놓아 거의 태웠는데 이때부터 군중(軍中)에 군량이 부족해졌다. 여러 장수들이 직로(直路)로 되돌아갈 것을 청하였는데, 지용수(池龍壽)가 듣지 않고 열병(閱兵)하여 해변을 따라 군사를 되돌리고자 하였다. 사졸들은 크게 굶주리자 소와 말을 잡아먹었으며 군대는 대열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군사들이 〈굶주리고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이〉 더욱 심해지니 마침내 지름길로 돌아갔는데, 〈이번에는〉 적병이 추격하는 것이 두려워 사졸들에게 들에서 자도록 하였으며 각각 뒷간과 마구간을 만들도록 하였다. 납합출(納哈出, 나하출)이 과연 2일 동안 뒤를 밟아 오며 말하기를, “뒷간과 마구간을 만들고 군대의 행렬이 가지런하니 습격할 수가 없다.”라고 하고는 이내 돌아가 버렸다. 3일이 지나자 군대가 송참(松站)에 이르렀는데 진무(鎭撫) 나천서(羅天瑞)가 수백석의 곡식을 얻어 배불리 먹이니 군대가 마침내 구제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눈보라와 심한 추위로 길이 얼고 미끄러워 사졸과 말이 많이 죽었다. 김백안(金伯顔, 김바얀)이라는 자는 아비가 고려의 승려로 통제원(通濟院)의 노비와 간통하여 그를 낳았다. 〈김백안은〉 고려에서 벼슬을 하여 낭장(郎將)이 되었으며 원에 들어가 대성(臺省)을 역임하고 평장(平章)에까지 이르렀다. 군대가 안주(安州)로 돌아왔을 때 그가 불손한 말을 한 것이 있어서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