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金普)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25.03.12|조회수3 목록 댓글 0

김보(金普)는 김해부(金海府) 사람으로 충정왕(忠定王) 때 지밀직(知密直)에 제수되었다. 공민왕(恭愍王) 초에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옮겼으며 연경(燕京)에서 시종한 공으로 1등에 책록(策祿)되어 충근양절광보공신(忠勤亮節匡輔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김보가〉 의창(義倉)과 성덕천창(成德泉倉)의 제조(提調)가 되었을 때 창고의 노비가 창고의 관리에게 붙어서 포를 바치고 신주(信州)의 조세를 거두어들이고자 하였다. 김보가 이를 허락하였다. 관리가 문서를 갖추어 규정(糾正) 정운(鄭賱)에게 가서 서명해줄 것을 청하니 정운이 이에 대해 물었다. 관리가 말하기를, “육지로 운반하는 값을 줄이려는 것일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정운이 신주가 서울에서 먼 곳인지 가까운 곳인지를 묻자, 아전이 속이며 말하기를, “7~8일 정도 걸립니다.”라고 하니, 정운이 이내 서명해주었다. 〈정운이〉 후에 아전이 속인 것을 알고 문서를 거두어들이자 창고 관리들이 모두 그를 미워하였다. 다른 날에 정운이 또 창고 밖에 따로 놓아둔 쌀 5석을 보고 그들을 꾸짖으니 아전이 남은 것이라 해명하였는데도 정운은 창고 관리가 훔쳐 쓴 것이라 생각하고는 어사대(御史臺)에 고하였다. 김보는 이로 인하여 불평이 쌓여 정운을 왕에게 고소하여 순군에 가두었으나 얼마 후 풀어 주었으며, 왕이 결국에는 의성과 덕천관(德泉官) 및 감검(監檢)을 파직하였다. 규정(糾正)이 내방고(內房庫)라 칭하며 따로 제거(提擧)를 설치하여 일을 맡아보게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이〉 대관(臺官)을 불러 타이르기를, “경들이 창고 관리를 혁파하여 김보를 탄핵하려고 한다는 것을 들었다. 내가 〈창고 관리를〉 다시 두려고 하니 〈그를〉 탄핵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여러 도의 안렴사(按廉使)는 임기가 차면 교체된다. 이자(李資)라는 자는 일찍이 김보에게 붙어 양광도(楊廣道)에 안렴사가 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또 김보에게 붙어서 교체하지 말아달라고 청하였다. 김보가 왕에게 아뢰자 〈왕이〉 교지를 내렸는데 〈그 내용은〉 “지금은 농사를 해야 하는 달로 역마(驛馬)를 번거롭게 할 수 없으니 오직 강릉도존무사(江陵道存撫使)만 교체하라.”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김보의 처형 김수(金隨)가 새로 강릉도존무사에 제수되었기 때문이다. 이자가 계속 양광도안렴사가 되었는데 김보가 모친상을 당하자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자가 이곳에 가는 것은 김상(金相)의 부의(賻儀)를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용(金鏞) 등이 김보가 권력을 마음대로 하는 것을 시기하여 쫓아내고자 하였다. 찰방(察訪) 최연(崔淵)이 김용의 뜻을 얻으려고 하였고, 또 이자를 미워하여 이자가 김보에게 뇌물을 얼마나 주는지를 몰래 캐내고 사람을 보내 문서를 취하고는, 이자의 아전을 가두고 핍박하여 〈김보를〉 해직시켰다. 김용이 김보가 복직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사람을 꾀어 글을 올리게 하고는 삼년상을 지낼 것을 청하고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교지를 속여 내리게 하였다. 김보는 이로 인하여 오랫동안 복직되지 않았다가 얼마 후에 금녕부원군(金寧府院君)에 책봉되었다. 기철(奇轍) 등이 주살되자 김보는 그의 당여라 하여 체포되었으며 장을 맞고 가라산(加羅山)으로 유배되었다. 신돈이 정권을 잡자 천거되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었으며, 곧이어 좌시중(左侍中)에 제수되었고 충근양절동덕보리공신(忠勤亮節同德輔理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김보는 왕에게 여러 차례 신돈을 헐뜯었는데, 신돈이 김보를 참소하여 다시 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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