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전(列傳) 권제29(卷第二十九) 고려사116(高麗史一百十六)
정헌대부 공조판서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正憲大夫 工曹判書 集賢殿大提學 知經筵春秋館事 兼 成均大司成) 【신(臣)】 정인지(鄭麟趾)가 교(敎)를 받들어 편수하였다.
심덕부(沈德符)
심덕부(沈德符)는 자(字)가 득지(得之)이고, 영해부(寧海府) 청부현(靑鳧縣) 사람이다. 아버지 심용(沈龍)은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심덕부는 충숙왕 말에 음보(蔭補)로 사온직장동정(司醞直長同正)이 되었고, 공민왕 때 거듭 승진해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가 되었다. 우왕 초에 우상시(右常侍)에 제수되었고 예의판서(禮儀判書)로 승진하였다가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密直副使 商議會議都監事)에 제배되었다. 서해도원수(西海道元帥)로 나갔다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승진하였고, 추성협찬공신(推誠協贊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얼마 후에 판사사(判司事)가 되었고 지문하사(知門下事)로 옮겼다가 다시 서해도원수가 되었다. 나세(羅世) 등과 함께 진포(鎭浦)에서 왜구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니 우왕이 상을 후하게 주었다. 오랜 뒤에는 찬성사(贊成事)에 임명되었다. 당시 사신을 〈명(明) 수도〉 경사(京師)에 보내어 세공(歲貢)을 바치면서 심덕부에게 평양부(平壤府)에서 토산물[方物]을 검사하도록 명했다. 사사로이 금과 은을 소지하는 것을 금지하고 물건을 압수하였으나, 우견(禹堅)이 명령을 위반했으므로 목을 베고 조리돌렸다. 또 동북면상원수(東北面上元帥)가 되어 나가서는 북청(北靑)과 함주(咸州)의 경계에 있는 요외평(要外平)에서 왜구를 만나서 선봉 50급(級)을 베었다. 왜구는 또 단주(端州)를 노략질하였고 심덕부가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였다. 왜구의 배 150척이 또 함주·홍원(洪原)·북청·합란북(哈蘭北) 등을 노략질하여 사람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아가니 백성들이 거의 남아나지 않았고, 심덕부가 지밀직(知密直) 홍징(洪徵), 밀직부사(密直副使) 안주(安柱), 청주상만호(靑州上萬戶) 황희석(黃希碩), 대호군(大護軍) 정승가(鄭承可) 등과 함께 홍원(洪原)의 대문령(大門嶺) 북쪽에서 싸웠는데, 여러 장수들이 모두 패하여 먼저 달아났으나, 오직 심덕부가 적진으로 혼자서 돌진하다가 창에 맞아 〈말에서〉 떨어졌다. 적이 다시 찌르려 하자, 휘하의 유가랑합(劉訶郞哈)이 달려 들어가 활로 쏘아 왜구 3명을 연달아 죽인 후 적의 말을 빼앗아 심덕부에게 주었고 계속 싸우면서 적진에서 빠져 나왔다. 여기서 심덕부의 군대가 또 대패하니, 적의 기세가 날로 올라갔다. 우리 태조〈李成桂〉가 가서 공격하기를 청하였고, 함주에 이르러 장수들에게 일을 나누어 맡기고 군영에서 70보쯤 되는 곳에 소나무가 있었는데, 태조가 군사들을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몇 번째 가지의 몇 번째 솔방울을 활로 쏠 테니, 너희들은 보아라.” 라고 하고, 곧 유엽전(柳葉箭)을 쏘았다. 7발 쏘아서 7번 적중하니, 모두가 말한 바와 같으므로 군중(軍中)이 모두 발을 구르고 춤을 추며 환호하였다. 이튿날 바로 적이 주둔한 토아동(兎兒洞)으로 가서 그 곳 좌우에 군사를 매복시켰다. 적의 무리가 먼저 토아동 안의 동·서쪽 산에 있다가 멀리서 나발 소리를 듣고 크게 놀라서 말하길, “이것은 이성계의 차거라(硨磲螺)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상호군(上護軍) 이두란(李豆蘭), 산원(散員) 고여(高呂),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조영규(趙英珪)·안종검(安宗儉)·한나해(韓那海)·김천(金天)·최경(崔景)·이현경(李玄景)·하석주(河石柱)·이유(李柔)·전세(全世)·한사우(韓思友)·이도경(李都景) 등 100여 기병을 거느리고 말 고삐를 당기면서 천천히 그 사이를 지나가니, 적이 군사가 적은 데다 행군이 느린 것을 보고, 하는 바를 예측할 수 없어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동쪽의 적이 서쪽으로 가서 합류하여 1둔을 만드니, 태조는 동쪽의 적이 주둔한 곳으로 올라가서 호상(胡床)에 걸터앉은 채 군사들에게 말 안장을 풀고 말을 쉬게 하였다. 한참 있다가 말을 타려고 하다가 100보 쯤 떨어진 곳에 마른 나뭇가지가 있는 것을 보고는 태조가 연달아 3개의 화살을 쏘아 모두 정중앙에 맞추니 적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라고 탄복하였다. 태조가 일본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서 소리치며 말하게 하기를, “지금 주장(主將)은 곧 이성계 만호이므로, 너희들은 빨리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후회해도 늦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적이 추장이 대답하길,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부하와 더불어 항복하기를 의논하였으나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태조가 말하길, “그 태만한 틈을 타서 공격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말에 올라 이두란·고여·조영규 등을 시켜 적을 유인해 오게 했더니 적의 선봉 수백 명이 추격해 왔다. 태조는 패배한 척하고 스스로 맨 뒤에 서서 아군의 복병이 있는 곳까지 퇴각하다가 마침내 병사들을 돌려 친히 적 20여 인을 쏘니 모두가 활시위를 당기자마자 거꾸러졌다. 이두란·안종검(安宗儉) 등과 함께 말을 달려 공격하자 복병도 공격을 개시했다. 이에 태조는 몸소 사졸들의 선봉에 나서서 단기로 적의 후미를 치면서 돌진하니 가는 곳마다 적들이 쓰러졌으며,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기를 서너 번 하니 손수 적을 쓰러뜨린 것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쏜 화살이 겹으로 된 갑옷을 꿰뚫었고 혹은 화살 1개에 사람과 말이 모두 관통한 것도 있었다. 적의 무리가 궤멸되어 달아나자 관군이 기세를 틈타 소리를 지르니 천지를 진동하였고, 시체가 들을 덮고 냇물을 막아 1인도 탈출할 수 없었다. 이 전투에서 여진의 군대가 승승장구하여 살상을 마구잡이로 하므로, 태조가 명령하여 말하길, “적이 궁지에 몰려 불쌍하니 죽이지 말고 사로잡아라.”라고 하였다. 살아남은 적은 천불산(千佛山)으로 들어갔지만, 역시 모두 다 사로잡았다.
우왕이 요동을 공격할 때, 심덕부는 서경도원수(西京都元帥)로서 갔지만 우리 태조〈李成桂〉를 따라 회군하였다. 창왕이 즉위하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우리 태조가 심덕부·지용기(池湧奇)·정몽주(鄭夢周)·설장수(偰長壽)·성석린(成石璘)·조준(趙浚)·박위(朴葳)·정도전(鄭道傳)과 함께 논의하여 말하길, “우왕과 창왕은 본디 왕씨가 아니니 종사(宗祀)를 받들 수 없다. 또한 천자의 명도 있으니 마땅히 가짜는 폐하고 진짜를 왕위에 올려야 한다.”고 하였다. 정비(定妃)의 교서를 받들어 창왕을 강화(江華)로 쫓아내고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 왕요(王瑤)를 맞아들여 옹립하니 이가 공양왕(恭讓王)이다. 즉위하는 날 저녁에 왕의 사위 강회계(姜淮季)의 부친 강시(姜蓍)가 〈궐에〉 들어가 왕에게 말하길, “여러 장수와 재상들이 전하를 옹립한 것은 다만 자신들의 화(禍)를 면하고자 도모했을 뿐이고 왕씨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삼가시며 그들을 가까이 하거나 믿지 마시고 스스로를 지킬 방법을 생각하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왕의 사위 우성범(禹成範)이 곁에서 모시고 있다가 그 말을 듣고 자기 모친 윤씨(尹氏)에게 말했는데 윤씨의 사촌오빠 윤소종(尹紹宗)이 듣고는 아홉 공신에게 알렸다. 이에 아홉 공신이 왕에게 말하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시자마자 참언(讒言)이 바로 들어오니, 신 등은 황공하고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참언을 믿으신다면, 즉시 신 등에게 죄를 주십시오. 〈그러나〉 만약 신 등이 거짓 성(姓)을 축출하고 다시 왕씨를 옹립하여 종사에 공을 세웠다고 여기신다면, 참언을 한 사람에게 죄를 내리셔서 상하 간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해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왕이 좌우를 둘러볼 뿐 말이 없으니, 아홉 공신은 오랫동안 엎드려 있다가 물러갔다. 얼마 후에 〈심덕부에게〉 충근양절익찬좌명공신(忠勤亮節翊贊佐命功臣)의 호(號)를 내렸고, 벽상삼한삼중대광 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사 이조상서사사 영효사관사 겸 팔위상호군 영경연사(拜壁上三韓三重大匡 門下侍中 判都評議使司事 吏曹尙瑞司事 領孝思觀事 兼 八衛上護軍 領經筵事)로 임명했으며, 청성군충의백(靑城郡忠義伯)에 봉했고, 중흥공신녹권(中興功臣錄券)을 하사하였다. 〈왕이〉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덕이 있는 자는 관직으로 그를 높이고 공이 있는 자는 상으로 그를 권려하는 것이니 고전(古典)을 상고해보면 원래 이루어진 법규가 있다. 경은 마음가짐을 충성스럽고 부지런히 하며, 몸가짐을 청렴하고 검소하게 하여 진퇴가 때에 맞았으며, 안위(安危)에 뜻을 다했다. 시기적절하게 일을 잘 처리하였고, 전쟁의 계책을 잘 세웠으며, 사람들을 잘 부려 그 명령하는 바를 즐겁게 따르도록 하였다. 이에 불안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능히 여러 장수들을 설득하여 험난한 곳에서 대군(大軍)을 돌이킴으로써 권간(權姦)이 함부로 역모를 꾸미지 못하도록 하였고, 중국과의 오랜 우호를 회복하게 하였다. 윤승순(尹承順)이 〈명의 수도〉 경사(京師)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께서 본국이 왕위가 끊어졌다고 하여 가짜 왕씨가 이성(異姓)으로써 왕이 되었던 것은 역시 삼한(三韓) 대대로 지킬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책망했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성계가 경(卿)과 함께 의논하여 서로 간에 의리를 좇아 자신을 희생하면서 큰 논의를 정하였다. 천명이 있는 곳에 인심도 또한 따른다. 조정과 저자에서도 놀라지 않았고, 무력을 쓰지 않고도 이성(異姓)의 화(禍)를 하루도 되지 않아서 제거하였다. 국가의 기반이 이미 기울어졌지만 다시 평정되었고, 왕씨의 제사도 이미 끊어졌지만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옛날 진평(陳平)·주발(周勃)이 유씨(劉氏)의 한(漢)을 안정시켰고, 적인걸(狄仁傑)·장간지(張柬之)가 이씨(李氏)의 당(唐)을 회복하였는데, 비록 시대가 다르고 정세도 다르지만 진실로 뜻이 같고 기(氣)가 모이므로, 공(功)이 사직에 있고 은택은 백성에게 미쳤다. 내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그대의 큰 공적을 가상하게 여겨서 상경(上卿)의 지위를 주고 지극하게 은혜를 베풀며, 조묘(祖廟)에 고하고 산하(山河)를 가리키며 맹세하고, 공신각을 세워 초상을 안치하고, 송덕의 글을 비(碑) 속에 새길 것이다. 또 3대 조상을 추숭하고 영원히 자손의 죄를 용서하겠다. 그대에게 토지와 노비를 내려주며 또한 은 1정(錠)과 말 1필을 하사한다. 경은 영원히 그대의 마음을 바르게 하여 나의 덕을 도우라.”
라고 하였다.
공양왕이 장단(長湍)에 행차하여 전함을 살펴보려고 하자 대간이 상소하여 중지하기를 간언했다. 왕이 사람을 심덕부에게 보내 묻기를, “오늘의 거동을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대답하여 말하길, “인군(人君)의 행동거지는 대간이 중지시킬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뜻을 정하여 가려고 하자, 대간이 여전히 물러서지 않으려 하니, 성석린(成石璘)이 곧바로 입궐하여 아뢰어 말하길, “대간의 말은 물리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마지못해서 따랐다. 또 하교(下敎)하여 회군(回軍)한 공을 녹권에 올리고 토지를 하사하였다. 서경천호(西京千戶) 윤구택(尹龜澤)이 우리 태조〈李成桂〉에게 고하기를, “김종연(金宗衍)이 시중 심덕부·판삼사사(判三司事) 지용기(池湧奇) 등과 함께 시중(侍中) 〈이성계〉을 해할 것을 모의하고 있습니다. 판선공시사(判繕工寺事) 조유(趙裕)도 저에게 말하기를, ‘심시중(沈侍中)이 진무(鎭撫)인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조언(曹彦)·곽선(郭璇), 전 판서(判書) 김조부(金兆府), 전 판사(判事) 위충(魏种)·장익(張翼), 그리고 조유 등에게 명령하여 휘하의 병사들을 억지로 동원하여 시중을 살해하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우리 태조가 그 말을 은밀히 심덕부에게 알렸는데, 조유는 심덕부의 족질(族姪)이자 또한 휘하의 진무였다. 심덕부가 노하여 조유를 하옥했는데 그 전말은 「〈김〉종연전(〈金〉宗衍傳)」에 나온다. 태조가 왕에게 아뢰기를, “신은 심덕부와 마음을 같이 하여 나라를 받들었고, 본래 시기하거나 배반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조유의 일은 분명 허망(虛妄)한 것이니 청컨대 〈심덕부를〉 국문하지 마시어 우리 두 신하가 처음과 끝을 보전할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라고 말하였다. 왕이 〈조유를〉 석방하려고 하자, 심덕부가 그것을 듣고 크게 놀라서 울면서 청하기를, “조유의 말이 신에게 연관되었는데, 지금 만약 불문에 붙인다면 신이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판별할 수 있겠습니까? 조유와 함께 대질하여 국문해 주시기를 청하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심덕부를 입궐하라고 불렀지만, 심덕부는 돌아보지도 않고 나가서 순군(巡軍)까지 걸어가 스스로 옥에 갇히기를 청하였다. 왕이 지신사(知申事) 민개(閔開)를 시켜 불러오자 심덕부가 그제야 나아가서 사죄하였다. 왕이 조유를 석방하자, 헌부(憲府)에서 상소하여 조유와 윤구택을 대질시킬 것을 정하였다. 왕이 평리(評理) 박위(朴葳)에게 명하여 대간과 함께 국문하여 치죄하도록 하였다. 조유가 처음에는 자복하지 않았는데, 박위가 윤구택을 먼저 고신(拷訊)하려고 하자 집의(執義) 유정현(柳廷顯)이 말하기를, “고발한 자를 먼저 국문하는 것이 옳습니까?”라고 하였다. 박위가 얼굴빛이 바뀌며 묵묵히 있다가 조유를 고신하였고, 조유가 자복하자 목을 매달아 죽이고 그 집을 적몰하였다. 헌부에서 또 심덕부를 탄핵하자 결국 조언·곽선·김조부·위충·장익을 옥에 가두고 모두 장(杖) 100대씩 치고 멀리 유배 보냈으며, 심덕부를 파직하고, 지용기 등도 유배 보냈다. 대간에서도 번갈아 글을 올려 아뢰기를, “심덕부는 나라의 수상(首相)이 되어서 조유·김조부 등의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가 병권을 장악하게 함으로써 재앙의 싹을 만들었습니다. 또 조유의 죄를 덮으려고 경솔하게 스스로 옥에 갔다가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또 판지(判旨)를 따르지 않은 채 여러 날 군사를 모아놓고 해산하지 않았으므로, 신하로서의 예(禮)를 잃었습니다. 지금 휘하가 모두 이미 죄를 자복했는데도 심덕부는 아직도 수도[國中] 안에 있으니, 사람들이 서로 의심하고 꺼리게 되어 재앙이 예측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그를 먼 곳으로 보내어 사람들의 의심을 끊고 화란(禍亂)의 싹을 막으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연일 대궐 문 앞에 엎드려 강력하게 청하자, 심덕부를 토산(兎山)에 유배 보냈다.
이듬해는 〈심덕부를〉 기용하여 청성군 충의백(靑城郡 忠義伯)으로 봉하고, 시중으로 다시 임명하였다. 세자를 따라 〈명의 수도〉 경사(京師)에 가게 되자 간관이 심덕부가 죄를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여 보내면 안 된다고 상소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더해 주었다. 후에 수시중(守侍中) 배극렴(裴克廉) 등과 함께 여러 도(道)의 관찰사를 혁파하여 안렴사(按廉使)를 회복하고, 절제사(節制使)·경력(經歷)·도사(都事)를 혁파하여 장무(掌務)·녹사(錄事)를 회복하며, 새로 정한 감무(監務)·여러 역승(驛丞)·여러 도의 유학교수관(儒學敎授官)·자섬저화고(資贍楮貨庫)·인물추변도감(人物推辨都監)·동서체운소수참(東西遞運所水站) 및 호구성적(戶口成籍)·우마낙인(牛馬烙印)·주군(州郡)의 향사리장(鄕社里長) 등의 법을 혁파하기를 청하는 소를 올렸다. 또한 여러 관사에서 아뢸 일이 있으면 모두 도당(都堂)에 바로 보고하도록 하고 6조에 예속시키지 말도록 하였다. 얼마 후에 사직하자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바꿔 임명하였다. 이 뒤부터는 본조[조선]의 기록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