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순룡(張舜龍)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25.03.14|조회수10 목록 댓글 0

장순룡(張舜龍)은 원래 회회(回回) 사람으로, 초명은 삼가(三哥, 셍게)였다. 아버지 장경(張卿)은 원 세조(世祖)를 섬겨 필도적(必闍赤, 비칙치)이 되었다. 장순룡은 제국공주(齊國公主)의 겁령구(怯怜口, 케링구)로서 고려에 와서 낭장(郞將)에 임명된 후 여러 번 승진하여 장군(將軍)이 되었으며, 지금의 성명(姓名)으로 바꾸었다.

 

충렬왕(忠烈王)이 마제산(馬堤山)으로 사냥을 갈 때 수강궁(壽康宮)에 도량(道場)을 설치하고 대거 승려들을 모아들이자 장순룡이 말하기를 “왕께서 부처를 받들고 반승(飯僧)하면서도 또한 이와 같이 사냥하시니 어떠한 공덕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원이 장순룡을 선무장군 진변관군총관 정동행중서성도진무(宣武將軍 鎭邊管軍摠管 征東行中書省都鎭撫)에 임명하자 왕이 장순룡을 원에 보내 공녀(貢女)를 바치고 공주가 입을 진주로 장식된 옷을 구매해 오게 하였는데, 황제가 장순룡에게 쌍주금패(雙珠金牌)를 하사하였다. 〈장순룡은〉 승진하여 부지밀직(副知密直)이 되었다. 왕과 공주가 곡연(曲宴)을 베풀자 내인(內人)들이 차례로 일어나 헌수(獻壽)를 올렸는데, 찬성사(贊成事) 조인규(趙仁規)가 술 취한 척 하고 마시지 않자 장순룡이 말하기를 “어찌 마시지 않고 속임수를 쓰는가?”라고 하였다. 조인규가 노해서 “너희 무리들이나 속이지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였다. 왕과 공주가 안으로 들어가도 두 사람의 다툼이 그치지 않자 장순룡의 동생 삼가(三哥, 셍게)가 자기 형의 편을 들려고 하였으며, 이에 조인규가 그를 구타하고 뺨까지 때리자 셍게는 팔을 걷어 부치고 나아가므로 좌우 사람들이 이를 말렸다.
충렬왕 23년(1297)에 첨의참리(僉議叅理)를 지내다 죽으니, 나이는 44세였다. 장순룡은 인후(印侯) 및 차신(車信)과 더불어 권력을 다투고, 경쟁적으로 사치스럽게 하였다. 저택을 지을 때 극도로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지어 기와와 조약돌로 바깥담을 쌓고 화초 무늬로 장식하니, 당시 사람들이 ‘장씨네 집 담장[張家墻]’이라고 불렀다. 그 저택이 기거랑(起居郞) 오양우(吳良遇)의 집과 이웃했는데, 장순룡이 그 집을 빼앗으려 하였으나 실패하자 밤에 무뢰인(無賴人)을 거느리고 가서 그 집 담장을 무너뜨려 버렸다. 아들인 장군 장운(張芸)도 호사스럽고 제 멋대로 하였다. 일찍이 팔관회(八關會)에서 바로 오봉루(五鳳樓)로 올라가 상 위의 귤과 유자를 손으로 잡았고, 이어서도 예의에 벗어난 것이 많았으므로 왕이 불쾌하여 파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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