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민(李義旼)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25.03.15|조회수7 목록 댓글 0

이의민(李義旼)은 경주(慶州)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이선(李善)은 소금과 체(篩)를 팔아 생업으로 삼았으며, 어머니는 영일현(延日縣) 옥령사(玉靈寺)의 비(婢)였다. 이의민이 어렸을 때, 이선이 꿈에서 이의민이 푸른 옷을 입고 황룡사(黃龍寺) 9층탑을 올라가는 것을 보고서 생각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성해서는 키가 8척이나 되었고 완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형 두 명과 함께 마을에서 횡포를 부려 사람들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안렴사(按廉使) 김자양(金子陽)이 이들을 잡아들여 고문을 했는데, 두 형은 감옥에서 굶어죽었지만 이의민만은 죽지 않았다. 김자양이 그의 사람됨을 장하게 여기고 경군(京軍)으로 선발하였다. 그리하여 이의민이 아내를 데리고 짐을 지고 개경에 도착하였다. 마침 날이 저물고 이미 성문이 닫혀서, 성 남쪽에 있는 연수사(延壽寺)에 투숙하였다. 그날 꿈에 어떤 긴 사다리가 성문에서 대궐까지 쭉 이어져 있었으므로 그것을 타고 올라가다가 깨었으므로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이의민은 수박(手搏)을 잘 했으므로, 의종(毅宗)이 그를 총애하여 대정(隊正)에서 별장(別將)으로 승진시켰다.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이의민이 많은 사람을 죽였으므로 중랑장(中郎將)이 되었다가, 곧이어 장군(將軍)으로 승진하였다.

 

명종(明宗) 3년(1173), 김보당(金甫當)이 군사를 일으키고서 장순석(張純錫)·유인준(柳寅俊)을 남로병마사(南路兵馬使)로 임명하였다. 장순석과 유인준 등은 거제(巨濟)로 가서 의종을 받들고 계림(雞林)으로 나와 기거하였다.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은 이 소식을 듣고, 이의민 및 산원(散員) 박존위(朴存威)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남로(南路)로 빨리 가도록 하였다. 이의민 등이 계림에 도착하니, 어떤 사람이 길을 가로막고 말하기를 “전 임금이 여기에 온 것은 이곳 사람들의 뜻이 아니라 장순석과 유인준 등의 뜻입니다. 그 무리들은 수백에 불과하며 모두 오합지중(烏合之衆)이니, 그 우두머리를 없앤다면 나머지는 모두 흩어져서 도망갈 것입니다. 청하건대 조금만 머물러 계시면 제가 돌아가서 그들을 없앨 것이니, 경주 사람들에게는 죄주지 마시길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의민이 말하기를 “나는 여기에 있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마침내 경주로 들어가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면서 말하기를 “장순석의 무리는 지금의 임금이 파견한 사람이 아니므로, 그를 죽인다고 해서 무슨 해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밤에 군사들로 포위를 하고 그들을 공격하여 수백 명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죽은 사람들의 머리를 길 좌우에 늘어놓고 이의민이 오기를 기다렸으며, 의종을 객사(客舍)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서 지키면서, 이에 이의민 등을 인도하여 성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의종을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가[北淵上]로 불러내어 술을 여러 잔 올렸다. 그때 이의민이 의종의 척추를 꺾어 버렸는데, 손을 놀리자 소리가 나니 이의민이 크게 웃었다.
박존위가 의종의 시체를 이불에 싸서 가마솥 두 개와 함께 묶어서 연못 가운데로 던져 넣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크게 불고 모래먼지가 일어나니 사람들이 모두 소리를 지르며 흩어졌다. 절의 승려 중에서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이 있었는데, 가마솥만 건져내고 시체는 그대로 버려버렸다. 시체가 며칠 동안 떠 있어도, 물고기·자라·까마귀·솔개 등이 감히 해치지 못하였다. 전 부호장(副戶長) 필인(弼仁) 등이 몰래 관을 마련하여 시신을 물가에 묻어주었다. 이의민은 스스로 공을 내세워 대장군(大將軍) 벼슬을 받았다.

다음 해(1174), 조위총(趙位寵)이 다시 군사를 일으키자, 이의방이 이의민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임명하였다. 이의민이 군사를 거느리고 전투에 나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눈을 맞았으나, 철령(鐵嶺)으로 진군하여 사방에서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면서 급습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연주(漣州)를 공격할 때, 흥화도(興化道)의 역적 수천 명이 와서 북천(北川)에 주둔하고 구원하였다. 이에 이의민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싸우면서 칼날을 무릅쓰고 그들의 주둔지로 들어가 기병 장수 1명을 베어죽이니 적병이 후퇴하였다. 이후부터 적들은 이의민의 군대가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바로 달아나 숨으면서 감히 대적하지 않았다. 이 공으로 이의민은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명종(明宗)〉 7년(1177), 조위총의 남은 군사들이 다시 보향산(保香山)으로 집결하자, 이의민이 8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공격하여 3백여 명을 죽이고 이겼다.
〈명종(明宗)〉 9년(1179),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를 죽이자 조정 신하들이 대궐에 나아가 축하를 드렸다. 경대승이 말하기를, “임금을 죽인 사람이 아직 살아 있는데, 무슨 축하인가?”라고 하였다. 이의민을 이 말을 듣고 매우 두려워, 날랜 군사를 자신의 집에 모아서 대비하였다. 또 경대승의 도방(都房)에서 자기들이 싫어하는 사람을 죽일 것을 모의한다는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서, 자신이 사는 마을에 큰 문을 세우고 밤마다 경계를 하였다. 이 문을 여문(閭門)이라고 불렀는데, 개경의 방리(坊里)마다 이를 본떠서 대문을 세웠다.
〈명종(明宗)〉 11년(1181), 〈이의민이〉 형부상서 상장군(刑部尙書 上將軍)에 제배되었다. 처음 경대승이 허승(許升)을 죽일 때에 이의민은 병마사(兵馬使)로 북쪽 변경에 출진(出鎭)하였다. 어떤 사람이 잘못 전하기를, “나라에서 경대승을 죽였다.”라고 하였다. 이의민은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경대승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데, 누가 모의를 하였을까? 나보다 먼저 손을 썼구나.”라고 하였다. 경대승이 이를 듣고 앙심을 품었다. 이의민이 돌아와서 두렵고 불안하여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왕이 여러번 이의민을 불렀지만 나오지 않았으며, 경대승이 죽은 뒤에도 오지 않았다. 왕은 이의민이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서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제수하고 중사(中使)를 보내 설득하니, 그제야 이르렀다. 왕이 편전(便殿)으로 불러 만났다. 왕은 속으로는 이의민이 두렵고 싫었지만, 겉으로는 은혜를 베풀고 위로하니, 온 나라 사람들이 왕의 나약하고 겁 많음을 한탄하였다. 조금 뒤 〈이의민은〉 수사공 좌복야(守司空 左僕射)가 되었다.

〈명종(明宗)〉 20년(1190), 〈이의민은〉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同中書門下平章事 判兵部事)가 되었다. 당시 재상들 중에는 무인들이 많았다.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김영존(金永存)과 부사(副使) 손석(孫碩)이 함께 추밀원에서 있으면서 서로 욕을 하고 꾸짖으니, 마치 호랑이 두 마리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동료[同列]들이 두렵고 위축되어 슬금슬금 물러났지만, 오직 부사(副使) 왕도(王度)만이 이들을 잘 달래어 화해를 시켰다. 하루는 이의민(李義旼)이 두경승(杜景升)과 함께 중서(中書)에 앉아 있으면서 으스대며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용맹함을 자랑하기에 내가 그 사람을 이렇게 때려 눕혔소.”라고 하면서 주먹으로 기둥을 치니 서까래가 흔들렸다. 두경승이 말하기를, “언제 적 일이오. 나는 맨 주먹으로 치니 사람들이 모두 달아나 버렸소.”라고 하면서 벽을 치니, 벽에 구멍이 뚫렸다. 뒤에 이의민이 두경승과 함께 성(省)에 앉아서 일을 의논하다가 마음이 상하자, 주먹을 휘둘러 기둥을 치면서 말하기를, “너는 어떤 공이 있어 나보다 위에 있느냐?”라고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중서성[掖垣]에는 이의민과 두경승이 있고, 추밀원에는 손석과 김영존이 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시를 지어서 조롱하여 일컫기를, “나는 이의민과 두경승이 두렵네. 그 당당한 모습이야말로 진짜 재상답구나! 중서성[黃閣]에 서너 해만 있으면, 만고에 제일가는 권풍(拳風)을 날리겠구나!”라고 하였다.

〈명종(明宗)〉 23년(1193), 남적(南賊)이 봉기하였다. 가장 극성스러운 반적은 운문(雲門)을 거점으로 한 김사미(金沙彌)와 초전(草田)을 거점으로 한 효심(孝心)이었다. 이들은 유랑민을 불러 모아 주현(州縣)을 습격하여 노략질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걱정하여, 대장군(大將軍) 전존걸(全存傑)을 보내 장군(將軍) 이지순(李至純)·이공정(李公靖)·김척후(金陟侯)·김경부(金慶夫)·노식(盧植) 등을 데리고 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지순은 이의민의 아들이었다. 이의민은 일찍이 붉은 무지개가 두 겨드랑이 사이에서 일어나는 꿈을 꾸고는 이를 자랑하였다. 또한 옛날 참서(讖書)에 ‘용의 자손은 12대로 끝나고 다시 십팔자(十八子)가 나타난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십팔자는 곧 이(李)자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이의민은 헛된 생각을 품고서 탐욕스러운 마음을 자못 억누르고 이름난 인사들을 불러 등용시킴으로써 헛된 명예를 추구하였다. 자신이 경주(慶州) 출신이라 하여 몰래 신라(新羅)를 부흥시키겠다는 뜻을 품고 적인 김사미와 효심 등과 내통하였다. 적들도 많은 재물을 바쳤다. 이지순도 욕심이 끝이 없어 적들이 재물이 많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갈취하려고 은밀하게 적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의복·식량·신발·버선 등을 보내니, 적 또한 금은보화를 보냈다. 이로 인해 군대의 동정이 누설되어 거듭 패배를 당하였다. 전존걸이 일찍부터 지혜와 용맹이 있다고 이름이 났는데, 이에 이르러 화가 나서 말하기를, “만약 법대로 이지순을 처벌한다면 그 아비는 반드시 나를 해칠 것이요, 처벌하지 않는다면 적이 더욱 날뛸 것이니, 죄가 장차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라고 하고서는 기양현(基陽縣)에 도착하자 약을 마시고 죽었다.

〈명종(明宗)〉 24년(1194), 왕이 이의민을 공신으로 책봉하니, 양부(兩府)와 문무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이의민 집으로 가서 축하하였다. 이의민이 전주(銓注)를 제멋대로 하니 정사가 뇌물로 이루어졌으나, 그 일당들이 서로 연결되어서 조정 신료들이 감히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민(民)들의 거주지를 많이 빼앗아 자신의 집을 크게 짓고 다른 사람의 토전(土田)을 빼앗는 등 탐욕과 포악함이 끝이 없으니, 중외(中外)가 두려움에 떨었다. 한번은 낙타교(駱駝橋)에서 저교(猪橋)까지 수 척(尺)의 제방을 쌓으면서 제방을 따라 버드나무를 심으니, 사람들이 그를 ‘새 길 재상[新道宰相]’이라고 불렀다.

이의민의 처 최씨는 성질이 흉학하고 사나워서 집의 비(婢)를 질투하여 때려 죽였으며, 노(奴)와 간통하였다. 이의민이 노를 죽이고 처를 내쫓은 뒤에, 양가(良家) 여자들 중 얼굴이 예쁜 여자를 많이 데려다가 결혼하고는 다시 버리는 일을 반복하였다.

여러 아들들도 아버지를 믿고 횡포를 부렸는데, 이지영(李至榮)과 이지광(李至光)이 더욱 심하여 세상에서 그들을 쌍도자(雙刀子)라고 불렀다. 이지영이 일찍이 삭주분도장군(朔州分道將軍)이 되었는데, 옛 제도에 장군은 반드시 병마사(兵馬使)의 지휘를 받은 뒤에 도내(道內)를 순행할 수 있었으나, 이지영은 제멋대로 드나들면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것이 없었다. 감창사 합문지후(監倉使 閤門祗候) 최신윤(崔莘尹)이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삭주(朔州)에 도착했는데도, 이지영이 영명례(迎命禮)를 갖추지도 않고 평상복[褻服] 차림으로 공관에서 같이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손으로 최신윤의 머리채를 잡고 때려죽이려고 하였다. 그가 힘이 들어 잠깐 쉬는 사이에 최신윤이 달아나니, 이지영이 최신윤의 옷과 물건을 가져다가 불태워버렸으며, 휘하의 나장(螺匠) 한 명을 죽였다. 이처럼 자신의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은 모조리 죽였다.

〈이지영은〉 아름다운 부인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그 남편이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반드시 그 부인을 위협하여 음란한 짓을 하였고, 또한 길에서 아름다운 부인을 만나면 그때마다 종자들을 시켜 그 부인을 데려오도록 하여 몸을 더럽히고서야 그만두었다. 한번은 견룡(牽龍) 박공습(朴公襲)과 기녀 화원옥(花園玉)을 놓고 다투다가 앙심을 품고 칼을 빼들고 박공습을 쫓아 궁문(宮門)까지 갔다. 이의민이 이지영에게 죄를 주자고 요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화원옥을 유배 보내자고 요청하니, 왕은 내시(內侍) 이덕우(李德宇)를 보내 화원옥을 감옥에 가두었다. 이지영이 감옥으로 쳐들어가, 이덕우를 내쫓고 그 기녀를 데리고 나갔다. 또한 왕이 총애하는 궁녀를 협박해 간음해도 왕이 그에게 죄를 주지 못하니 조정과 재야에서 이를 원통하게 여겼다.

이의민의 딸은 승선(承宣) 이현필(李賢弼)의 처였는데, 음란한 것이 그 어머니와 같았으니 이현필이 그것을 더럽게 생각하여 같이 살지 않았다. 이현필의 아들 이진옥(李晉玉)은 별장(別將)에 제수되었는데 역시 매우 사납고 간교하였다. 이지순이 아버지에게 간하기를, “아버지는 한미한 몸으로 장상(將相)이 되어 올바르게 자식을 가르쳐서 부귀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지금 자손들이 횡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원망을 사고 있으니, 화가 반드시 금방 닥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명종〉 26년(1196), 이지영(李至榮)이 장군(將軍)이 되었다. 그가 최충수(崔忠粹) 집의 비둘기[鵓鴿]를 빼앗았는데, 최충수가 화가 나서 그 형인 최충헌(崔忠獻)에게 그 사실을 아뢰고 이의민(李義旼) 부자를 죽이자고 하니, 최충헌이 그렇게 하자고 하였다. 이의민이 미타산(彌陀山) 별장에 갔을 때, 최충헌 등이 가서 그를 죽이고 머리를 저자에 내걸었다. 당시 이지순(李至純)은 대장군(大將軍)이었고, 이지광(李至光)은 장군이었는데, 변란의 소식을 듣고 가동(家僮)을 이끌고 길에서 싸웠다. 이지순은 최충헌 쪽에 협조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자, 스스로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고 이지광과 함께 달아났다.
이지영은 벽란강(碧瀾江) 보달원(普達院)을 원찰(願刹)로 삼고서 다리를 세워 강을 건너려고 하였다. 기녀를 데리고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로 가서, 서리[吏]와 민들에게 다리를 놓을 비용을 내도록 하였다. 서리와 민들이 화를 당할까 두려워서 백금(白金) 70근(斤)을 거두어서 주었으니 민들은 그 폐단을 견디지 못하였다. 최충헌이 장군 한휴(韓休)를 보내 체포하도록 하였다. 한휴가 밤에 부(府)로 들어가니, 이지영이 마침 태수(太守) 허대원(許大元)과 연회를 열어 머리에 꽃을 꽂고 한 손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휴가 그를 베고 개경으로 그 머리를 보내니, 안서(安西)의 민들이 기뻐하면서 “이지영이 죽었다. 우리들은 아무런 걱정이 없다.”고 하였다. 최충헌 등이 또 요청하여, 지후(祗候) 한광연(韓光衍)을 경주(慶州)로 파견하여 이의민의 3족(族)을 멸하였다. 여러 주(州)에 사신을 나누어 보내, 그의 노예와 도당을 죽이고 이현필(李賢弼)을 원주(原州)로 유배 보내었다. 이지순(李至純)과 이지광(李至光)이 인은관(仁恩館)으로 나아가 잘못을 빌었으나, 최충헌이 말하기를 “이놈들은 재앙의 씨앗이니, 은혜를 베풀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그들의 목을 베었다.
이의민은 글자를 몰라 오직 무당의 말을 믿었다. 경주에 나무도깨비[木魅]가 있었는데, 그 지역 사람들은 두두을(豆豆乙)이라고 불렀다. 이의민은 집에 당(堂)을 만들고 나무도깨비를 가져다가 안치하고, 날마다 제사를 지내면서 복을 빌었다. 어느 날 갑자기 당 안에서 곡소리가 들리니, 이의민이 괴이하게 생각하여 묻자 나무도깨비가 말하기를, “내가 오랫동안 너희 집을 지켰는데, 이제 하늘에서 장차 재앙을 내리려고 하니 내가 의지할 곳이 없어서 운다.”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의민이 패망하였다. 유사(有司)가 공신각 벽에 그려두었던 이의민의 초상을 없애자고 요청하니, 왕이 조서를 내려 흙으로 덧칠하여 초상을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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