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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강론

2026년 06월 13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작성자구순애 루치아|작성시간26.06.13|조회수28 목록 댓글 0

복음<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41-51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루카 2,41-51 
 
성모 성심 : 다 봉헌하고도 죄송한 마음 
 
 어제는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하면서 예수 성심 대축일이었습니다. 
사제는 아버지의 마음과 어머니의 마음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다 내어주시고도 미안한 아버지의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그러면 성모님의 마음은 어떠실까요? 
‘다 봉헌하고도 죄송한 마음’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계시며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하신 말씀을 듣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분명 봉헌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이제 아버지의 소유임을 잠깐은 망각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 밑에서까지 예수님을 따라가시며 아버지의 뜻에 봉헌하십니다.
그러나 완전히 봉헌하지 못하고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라고 하시며 어머니로서의 아주 미소한 집착을 내비치셨습니다.  
 
부모를 잃은 자녀를 고아라 하고, 남편을 잃은 여인을 과부라 하며, 아내를 잃은 남자를 홀아비라 하는데, 자녀를 잃은 부모는 너무 슬퍼서 부르는 이름조차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잃어본 사람만 알 것입니다. 
 
그러나 맡기셨던 것을 다시 찾아가시는 것에 불과한 일이 그런 고통을 가지는 것조차 죄스러운 마음이 성모 마리아의 마음이 아니셨을까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더 못 줘서 미안하고
어머니는 남편에게 더 못 돌려드려서 죄송한 마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수녀님께서 감사하게도 당신이 수녀가 되게 된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허락은 받았지만, 누구신지 짐작이 갈 것 같은 내용은 조금 수정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 봉헌하면서도 죄송하고, 그래서 행복한 성모님의 마음과 닮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심하게 자아와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고 방황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대학교를 철학과로 들어갔는데 3학년 때 또다시 제 영혼이 ‘삶이란 무엇인가?’의 딜레마에 빠져 방황하였어요.  
 
그러던 중 형이상학 교수님이 개인적으로 저에게 철학 공부를 해보라고 하셨고 저의 정신적 멘토가 되어주셨어요. 
그런데  교수님께서 급성 간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교수님은 어떤 신부님과 친구셔서 신부님께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대세를 받고 선종하셨어요. 
그때 성당에서 하는 미사라는 것에 처음 참석했죠'. 
 
교수님께서 마지막에 돌아가시기 전 제게 하신 말씀은 “내가 사제가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였습니다.
그러시며 저에게 『천국의 열쇠』를 읽어 보라고 하셨죠
(‘천국의 열쇠’는 헌신적으로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종교의 굴레보다는 사랑의 실천을 목적으로 살았던 치셤 신부와 고위 성직자가 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안셀름 주교의 두 삶이 대비되면서 하늘 나라는 누구의 것인가를 묻는 내용입니다).  
 
교수님의 죽음으로 저는 또 길을 잃고 죽음에 대한 사유로 가득했습니다.
도대체 진리란 무엇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휩싸여 캠퍼스를 돌며 도서관에서 수많은 철학자가 제시하는 해답을 읽으면서 방황했어요.  
 
『천국의 열쇠』 책을 사러 가톨릭 서점을 다니면서 신학과 신앙 책을 읽게 되었고 제 영혼을 가장 강력하게 붙잡아주는 말씀이 저를 교회로 이끌었어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그 후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교리 반을 다니면서도 자살 충동이 계속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울증이 심했지 않았을까?’, 아니면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원했던 대학원 진학도 할 수 없었어요.
다만 성모님 기적 메달, 묵주, 성수 등에 매달리며 예비자 때도 매일 성당에 갔어요.
성체만 영하면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빨리 세례받기만을 기다렸죠.  
 
그리고 길이 없는 저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길이다.
진리를 찾는 저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진리다.
죽음으로 가득한 저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제 영혼을 구원해 주셨어요. 

세례받고 제가 엄청나게 밝아 졌어요.
자연스럽게 신앙 서적과 성경을 읽으면서 마더 데레사 수녀님처럼 수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예수님을 만나니 나에게서 철학은 끝났다고 정리했어요. 
마더 데레사 수녀님처럼 내가 그렇게 살 수 있을지 저 자신을 테스트해 보기 위해서 수녀원 입회 전에 가톨릭 장애인 시설에서 숙식하면서 일했는데 매일 매우 피곤했음에도 그때 성당에 가서 밤에 2시간 정도 성체조배를 했어요. 
 
그때 예수님 환시 체험을 했어요.
십자가에 계시는 예수님이 살아서 몸을 비틀거리면서 너무 고통스러워하셨어요.
이런 환시는 수많은 날 오랫동안 계속되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혼자서 2시간 “예수님 사랑해요.”라고 기도하면서 그 고통스러운 예수님 바라보다가 성당에서 졸기도, 잠들기도 하고, 나중에는 예수님께 “예수님 죄송해요. 저 너무 피곤해서 갈게요.”
그러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살아 움직이며 몸을 비틀면서 못 박힌 손과 발, 계속 힘들어하시는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숨소리를 들으며 나와야 했어요. 
 
고통스러워하시는 예수님을 홀로 남겨두고 성당에서 나오는 마음이 너무나도 무거웠어요.
이 환시 체험은 계속되다가 종신서원 후에는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때 그 시설에 신학생 2명이 파견받아 봉사하고 있었는데 두 명 모두 저에게 결혼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농담이든 진담이든 저는 밤마다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이루고 있었기에 수녀원 갈 것이고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말했어요. 
 
저를 사랑하기에 받으시는 예수님의 고통에 저 자신을 바치는 것도 부족하다 여겼기 때문에
당연히 그 멋진 신학생들에게는 마음이 갈 수 없었어요.
지금도 저는 너무 행복하고 예수님 성체를 매일 모시면 너무 흡족하고 바랄 것이 없는데 성당에서 조배하고 예수님과 함께 하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만족스러운데 천국에 가면 얼마나 행복할까요...아멘." 
 
저는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제가 버리고 온 것에 비해 주님께서 저에게 왜 더 주시지 않느냐고 불평을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예수님의 한 마디로 오히려 죄송스러운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은 이렇듯 주님께 당신 자신을 다 봉헌하여 구원자의 어머니가 되셨음에도 주님의 은혜에 다 보답할 수 없는 마음에 미안하셨을 것입니다.  
 
수녀님이 삶의 길과 참 진리와 생명을 찾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것을 주신 것에 비해 당신은 그분의 곁을 떠나있는 것에 너무나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졌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내가 가진 것, 나의 사랑스러운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을 주님께 바친다고 주님께서 주신 것보다 더 바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바친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십일조가 아니라 당신의 온 존재와 당신의 아드님을 바치시고도 항상 죄송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미안함과 인간의 이 미안한 마음이 합쳐질 때 둘은 하나가 됩니다.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마태오 5,33-37

 

자기를 믿는다는 말과 자기를 합리화한다는 말은 동의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를 가장 믿고 신뢰해야 할까요?

어떤 이들은 결국, 믿을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제가 ‘자기 자신을 절대 믿으면 안 된다’고 말하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봅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자기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이 결국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길임을

우리는 잘 알지는 못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절대로 자신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맹세는 자기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을 때 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도 말씀하십니다.

 

네가 머리카락 하나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런 능력으로

자기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말씀이십니다.

 

물론 하늘이나 땅, 그리고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 자리는 하느님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확신은 하느님만 할 수 있는 부분이지 인간이 할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옳으신 분은 하느님밖에 없으니 하느님께 신뢰해야지

자기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신뢰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믿을 수는 없을까요?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신뢰의 정도는 한정되어 있고 내가 그 신뢰를 나 자신에게 주는 만큼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제 생각을 지나치게 믿음으로써 결국 진리를 보지 못하여

되돌이킬 수 없는 삶을 살기도 합니다.

 

영화 ‘기억의 밤’은 자기 자신만을 굳게 믿는 두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재수생인 동생과 모든 것에 완벽한 형은 우애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새로 이사 온 집에서 형은 조금씩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형이 조금씩 형처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부모도 조금 이상합니다. 친부모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가족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집을 빠져나와 경찰서로 도망칩니다.

가족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신원조사를 해 보고 거울을 보니 자신은 20대 초반의 재수생이 아니라

이미 40이 넘은 아저씨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형이 꾸민 일이었습니다.

형은 사실 20대 초반입니다.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범인을 찾다가 결국 찾아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범인은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의 범행을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면을 걸어 모든 것을 20년 전으로 돌려놓고

그 범인이 모든 것을 기억해 낼 수 있도록 꾸몄습니다.

이 과정에서 범인은 조금씩 기억을 찾게 되었던 것이고

결국 자신이 함께 살던 이들이 자신의 가족이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결과는 어떨까요? 자신은 착한 재수생이기에 범인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던 동생은

모든 것을 깨닫고 자살합니다. 범인을 찾아 원수를 갚으면 속이 후련할 것이라 믿어

고생 끝에 범인의 기억을 되살려주기는 했지만 결국 남는 것이 없음을 깨닫고 형도 자살합니다.

 

이렇게 영화는 허무하게 끝납니다.

그들의 착각이 처음부터 이 결말로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예화를 일반화의 오류라고 말씀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한 영화를 너무 모든 것에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때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잘 살았다고 굳게 믿으며 살아온 이들은 악한 삶을 살아왔음을 알게 될 것이고,

끊임없이 죄인이기에 주님의 자비만 청하며 살았던 이들은 선한 삶을 살았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성인이라고 굳게 믿었고, 김수환 주기경은 돌아가시기 직전

하느님의 자비를 청해 달라고 신자들에게 부탁했습니다.

 

믿음도 하나의 에너지입니다.

우리가 힘을 한쪽에 쓰면 다른 쪽에 쓸 힘은 그만큼 줄어듭니다.

자기 자신과 주님도 그렇게 대치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당신을 따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에 신뢰를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나’는 ‘내가 믿는 나’가 아니라 내가 믿는 나를 믿을 것인지,

‘나는 나다’라는 주님을 믿을 것인지 결정하는 ‘나’입니다.

 

이렇듯 ‘참 나’와 ‘자아’, 그리고 ‘주님’이 구별될 때 비로소 자아에만 신뢰를 주던 것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나와 주님 사이에서 나의 신뢰를 어느 쪽에 줄 수 있는지

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는 주님을 믿어도 결국 자아가 만들어낸 우상을 믿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100%의 신뢰를 자아에게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켈리 맥고니걸’의 「움직임의 힘」이란 책에

헤펠이란 운동을 아주 싫어했던 한 여인의 사례가 나옵니다.

 

그녀는 여자는 달리기하면 안 된다는 철저한 믿음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50년 동안 뚱뚱하게 살아온 자신을 합리화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라고 왜 하면 안 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믿음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엔 마라톤을 완주하게 됩니다.

건강해진 것은 이루 말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믿으며 크고 작은 이러한 착각 속에서 자기 합리화를

하며 삽니다. 여기에 빠지지 않으려면 나 자신을 믿는 나의 믿음에 의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한 번쯤은 믿고

실천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나의 신뢰는 나 자신에게서 조금씩 주님께로 옮겨가게 되고

그만큼 하느님 자녀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https://youtu.be/EIYpwCFhy6g?si=CFxESM5nRcrUs0c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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