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손
주연 정희정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흐르고
스멀스멀 스며 나오는 새싹
옹알이하는 그 순수한 웃음들
나무에게 손 내밀 때
이파리들이 짙은 그늘을 풀어놓는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잎사귀에서
허공을 흔드는 소리가 들리면
셀 수 없는 몸짓
바람이 갈라놓은 그 순간
둥치는 또 다른 문양 접목이다
서로 다른 끝을 잡고
풀리지 않는 매듭 묶는 이음새
지킴의 위력이다
바람이 나뭇가지 만지는 순간
허공에 수만 개의 지문으로 가득하다.
거미줄
주연 정희정
장마 그친 뒤 그늘 깊은 구석진 곳
바람에 흔들리다 멈추어버린 그물의 유적
나뭇가지와 가지 사이에
바람에 나부끼며 비단 천이 걸려있다
직선으로 대각선으로 때로는
타원형으로 꽁무니로 짜 올린 덫은
언어를 통째로 씹어 침묵만 내뱉고
먹이를 기다리는 한 생의 안락한 보금자리
허공에 고대 피라미드 형식
길을 이어가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방식이라 주장하는 거미의 행적
저 부유스러운 꿈의 파동들
끈적이다가 낡아 버린 여러 모양의 실꾸리
도구상자 햇살 속에서 곱게 나부낀다.
삶의 흐름이 물결치는 곳에서
주연 정희정
신록이 짙은 향기를 뿜는 날
하늘의 깊은 눈이 내려다보고
눈을 감으면 더 또렷하게 가깝게 다가와
때론 촉촉이 젖어도 젖을 일 없는 듯
한 줄기 바람은 의미의 무게로 불어 가고
이슬비 가슴에 젖듯 촉촉하게
돌아보면 파란만장한 그 오랜 시간
정체를 모를 시간의 흐름 앞에서
어느 한순간도 멈출 수 없는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부르면 달려와 함께 저물어도 좋을
사람과 행복한 날을 누려보리라
추억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주연 정희정
수 없는 별이 지쳐 쓰러져
추억의 흔적마저 보이지 않을 때
벽에서 자리를 잡고는
한 곳에 머물기 위해서는 얼마간 시간이 필요하다
사진 속의 눈동자는 항상
변함없이 웃고 있지만 그림자는 슬퍼서
혼자 울고 있는지 모른다
붙박이 삶이 되어 늘 한자리에서
고통의 심장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길
그 표정 하얀 침묵 속에서
시간은 사진과 함께 정지된 추억
산을 넘으면 아스라한 그리운 시절들
순간을 모아 푸른빛을 고른다
황톳빛 울음으로도 다 기억할 수 없는
침묵하는 길의 풍경은 내내 낮은 어깨를 하고 있다.
| 초록의 신비 주연 정희정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성큼성큼 푸름이 온다 푸른 빛들이 밀려오는 그 무렵 거대하게 밀려오는 초록빛은 산란에 이르기 시작한다 바로 어둠이 오기 전 너무나도 아득해서 가까운 혹은 먼 겹겹의 산 능선 그 산빛과도 같은 운무 구름같이 밀려오는 무 색채 회색 낯빛은 싱그러움에 밀려가고 눈이 부신 푸르름 이제 푸른 빛은 동색이 아니다 바라보는 풍경은 녹색으로 피어오른다 햇볕에 구워진 초록 더욱 길어진 신록 마냥 눈부신 날 일제히 까치발로 서서 손사래 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