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23(화) 요한복음 9장
태어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쌍한 사람 앞에서 제자들이 참 못난 질문을 합니다.
9: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랍비여’라고 부른 것도 이상한 일이었지만
제자들의 질문 역시 이 전에 것과는 결이 좀 달랐습니다.
분명한 것은 제자들의 질문이 비교적 명확했고, 판단이나 판결을 바라는 바리새인들의 질문과 그 결이 같았다는 것입니다.
‘눈 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
‘이 사람의 죄인가? 부모의 죄인가?’
사실 이런 질문은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을 비롯한 모든 유대인들은 불행이나 질병을
하나님의 심판, 곧 죄의 결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태어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한 불행은
그의 부모가 죄를 지었거나
아니면 그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죄를 지었다는 것이
그 시대의 사상이자 신념이자 종교였습니다.
어떻습니까?
동의가 되십니까?
놀라운 것은 이런 가르침의 배경인 인과응보 사상을 정말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는 것입니다. ‘선(善)을 행하면 선(善)의 결과가, 악(惡)을 행하면 악(惡)의 결과가 반드시 뒤따른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탄 난다’는 인가응보의 가르침에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는 것입니다.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이슬람, 흰두교 불교, 유교, 도교(샤머니즘) 등의 모든 가르침이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처럼 불행의 원인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는 일은 인간의 본능이자 죄의 본능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는 일에는 아주 능숙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도식을 오늘 본문에서 파괴하십니다.
인과응보
즉 원인과 결과의 도식으로 불행이나 행복을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태어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의 불행은
그 부모의 탓도 그 자신의 탓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불행을 안고 태어났는가?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
바로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1)죄로부터 자유
2)질병으로부터 자유
3)불행으로부터 자유
4)사망으로부터 자유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해 행하신 하나님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9: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놀라운 것은 ‘구걸하는 인생’이 ‘증언하는 인생’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9:8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그런데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 즉 구원이 나타나자 ‘구걸하는 인생’에서 ‘증언하는 인생’으로 바뀝니다.
9:32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9: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